최양하는 멈칫해서 잠깐 있었다. 표정이 과히 미묘했다.“약혼하셨군요.”강여름은 가볍게 ‘네’ 했다.“그날은 정말 감사합니다.”“별말씀을요. 현란한 운전 솜씨가 인상적이었습니다.”최양하가 여름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다음에 한 번 붙어보죠.”“운전을 잘한다고요?”양유진이 살짝 놀란 듯했다.“뭐, 살려다 보니 없던 능력이 나왔겠죠.”여름이 씁쓸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최양하는 인사를 하고 떠났다.병실이 조용해지자 양유진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나랑 약혼한 거 후회하지 않아요?”“왜 그러세요?”여름은 의아해했다.양유진은 떨떠름한 얼굴로 여름을 바라보았다.“어려서부터 순탄하게만 살았는데 여기에 와서 내 자신이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지 알았어요. 최양하 씨처럼 잘난 사람을 보고 나니 갑자기 내가 당신한테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네요.”여름이 방긋 웃었다. “절 너무 과대평가하시는군요. 벨레스 가로 들어가긴 했지만 제대로 된 자식 대접도 못 받는 걸요. 대단한 집안에서는 저를 며느릿감으로 보지도 않아요.”“그건 그 사람들이 천박해서 당신을 못 알아보는 거죠.”양유진은 여름의 뺨에 있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여름은 무의식적으로 피하려던 것을 꾹 참았다.******3일째.위자영 모녀가 씩씩거리며 병원으로 찾아왔다.“당신 뭐 하자는 거예요? 왜 우리를 집에 못 들어가게 하냐고요?”위자영이 들어오자마자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친딸도 못 들어가게 막고, 이제 여름이밖에 없는 거예요, 당신한텐?”“아빠, 정말 이제 날 버리려고 그래요?”서유인도 속상해 울기 시작했다.서경주의 마음도 영 편하지가 않았다.“아니, 잠깐….”“아버지.”여름의 목소리가 그를 막았다.서경주는 바로 입을 닫았다.“네가 우리 아빠 시켜서 나 집에도 못 들어가게 했니?”불똥이 여름에게 튀었다.“거긴 내 집이야. 내가 20년을 산 집이라고.”“내가 잘못했다.”위자영이 갑자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여름은 아무 말이 없었다.이 정도로 쉽게 살해 사주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과거 자신의 어머니에게도 똑같이 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부인의 실체를 이제야 깨달은 아버지는 한 번도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의심해본 적 없겠지.’“여름아, 안심하렴. 이번에 이혼하기로 결심 굳혔다.”서경주는 이렇게 말하고 이혼합의서를 작성하러 갔다. 양유진이 말했다.“아버님은 이혼 못 하실 겁니다.”“맞아요.”여름도 동의했다. “두 집안이 오랫동안 협력 관계였던 데다 서유인이 FTT 장남이랑 사귀니까요. 그 집안에서 신지와 벨레스를 다 등에 업지도 않은 서유인을 며느리 삼을 리 없죠. FTT와 혼인이 무산될 수 있다는 점만 들어도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온 집안이 이혼에 동의할 리 없어요.”양유진이 안타까워했다.“그럼 이번에….”“적은 한 번에 무너지지 않아요.”여름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서유인이 최하준의 연인만 아니라면 아버지가 위자영과 이혼할 수 있어.’ ******깊은 밤. 외딴 산골 마을.강여경이 목숨 걸고 마을에서 도망 나오고 있었다. 매일 밤 그 역겨운늙은이에게 괴롭힘당하느라 미칠 지경이었다.“야! 거기 서!”등 뒤에서 우락부락한 노인이 작대기를 들고 미친 듯이 쫓아오고 있었다.거의 다 따라잡았을 때쯤 봉고차 한 대가 갑자기 눈앞에서 멈추더니 안에서 누군가 강여경을 끌어올렸다.따라오던 남자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달렸다.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드디어 해방이야! 이제는 추위과 굶주림에서도 빨래에 밥하는 일에서도 해방이야!이게 다 강여름과 최하준 때문이야!’“당신이 강여경인가?”차 안에 있던 한 남자가 역겨운 듯 쳐다보며 물었다. “누, 누구세요?”강여경은 깜짝 놀랐다.“널 만나고 싶어 하는 분이 계셔.”5시간 후 강여경은 눈이 가려진 채 낯선 곳으로 끌려갔다.“여기가 어디예요? 당신들은 누구고요?”“내가 누군지는 알 필요 없고, 강여름과 최하준에게 복수하는 걸 도와줄 거라는 것만 알면
“이게 며칠만이냐, 얼굴 한 번 보기 참 어렵구나.”장춘자가 나무랐다.“서유인이 매일 와서 말벗해드리지 않았습니까?”하준이 응수하며 장춘자 옆에 앉았다. 네이비색 조끼에 와이셔츠를 입은 하준의 깊은 눈은 모든 걸 꿰뚫어 볼 듯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알긴 아는구나. 걔가 아무렴 나 같은 노인네 보자고 오겠니? 널 보러 오는 거겠지.”장춘자가 쏘아붙였다. “걔도 딱하다. 멀쩡하던 집안에 혼외자식이 들어오더니 서 회장이 허구헌날 이혼 운운하다니. 서 회장도 사람 참 어정쩡하지 뭐야. 어쩌자고 조강지처랑 이혼을 하겠다고 해?”하준이 턱을 문지르더니 ‘흥’하고 콧방귀를 뀌었다.“서유인 수완이 보통 아니군요. 천하의 장춘자 여사를 완전히 자기편으로 구워 삶았으니.”“그게 뭐 구워 삶고 말고 할 일이니? 내가 어디 재벌가 지저분한 가정사 한두 번 본다고.”장춘자는 감정이 격해졌다.“에미 이혼만 해도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반대했다.”하준은 담배 한 개비를 꺼냈지만 불은 붙이지 않고 만지작거렸다. 눈빛이 싸늘해졌다.장춘자가 한숨을 내쉬었다.“아까 유인이가 그러는데 다음 주 그 댁 어르신 생신에 가까운 사람들만 불러서 식사한다더라. 네가 꼭 왔으면 하는 것 같으니 이번에는 그 아이랑 관계를 확실하게 해주고 오렴. 안 그랬다간 걔 엄마 이혼당하게 생겼어.”하준은 아무 말도 못 들은 것처럼 그저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어떡할래? 가, 안 가?”장춘자의 언성이 높아졌다.“유인이가 마음에 안 드는 거면 맞선이라도 봐라. 어쨌든 올해는 꼭 결혼해야지.”“갑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꼭 가야죠.”하준은 담담히 웃으며 일어났다.“늦었네요. 걱정 말고 들어가 주무세요.”“아무렴, 그래야지.”장춘자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방으로 들어갔다.******곧, 서경주의 아버지 서신일의 생일이 다가왔다.68세 생일을 맞아 성대한 파티까지는 아니지만 해외에서 쉐프를 불러 호텔에서 생일 상을 차렸다.초대 받은 사람은 모두 사업 상 오랫동안
하준이 서신일의 생신잔치에 참석했다. 공개적으로 서유인과의 관계를 인정한다는 뜻이었다.머지않아 서유인과 하준이 결혼하게 되면 벨레스도 한층 레벨업 하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아이고, 유인아, 최 회장이 올 거라고 할아버지에게는 귀띔했어야지?”입이 귀에 걸린 서신일이 서둘러 맞으러 나왔다.하객들도 모두 아첨하려고 우르르 몰려가 둘을 에워쌌다.“최 회장님, 우리 유인이랑 정말 환상의 커플이에요. 하늘이 맺은 인연인 것 같아요.”“아이고,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위 여사, 정말 복도 많으세요, 저런 귀한 딸을 두시다니.”“…….”반대로 여름 쪽은 썰렁하니 아무도 없었다. 양유진은 너무나 놀란 상태였다.“여름 씨, 저 사람은….”“네.”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간에 잔뜩 힘이 들어간 채 심각한 얼굴이었다.하준이 서유인과 함께 할아버지 생신에 참석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서경주와 위자영이 이혼을 한다고 떠들썩한 이 때에 서유인 모녀와 나타났다는 것은 최하준이 서유인 편이라는 뜻이었다.‘위지웅이란 자는 지난번 자신을 해치려 했던 인물이다.그런데도 저쪽 편에 서다니….’여름은 온몸을 휩쓰는 냉기에 심장까지 얼어붙을 듯한 기분이었지만 가까스로 분노를 참고 있었다.‘이제부터 최하준은 내 적이야.그렇지만 만인지상의 최하준하고 대체 어떻게 싸워야 하는 거지?’창백해지는 여름을 보고 양유진이 와락 손을 뻗어 여름의 허리를 꼭 붙들고는 말했다.“아무리 상대가 최 회장일지라도 난 당신을 놓지 않을 겁니다. 이제 후회하지 말아요, 여름 씨.”여름이 놀라서 ‘헙’하고 입을 오므렸다.“잘못 짚으셨어요. 최하준이 ‘신지’ 편에 섰으니 이제 위자영을 상대하기가 훨씬 더 어려워졌다는 생각을 하는 중이었어요.”양유진이 낮게 읊조렸다.“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아요. 이쪽으로 온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천천히 하자고요.”“네.”영혼 없는 대답이었다.하지만 하준이 서유인과 결혼하는 날엔 신지는 건드리기 힘들어질 터였다.******사람에
서경주가 설명했다.“여름이 약혼자일세, 진영 그룹 회장이야.”“모르겠군요.”하준이 시선을 거두고 담담하게 앞에 놓인 찻잔을 흔들고 있었다.“이댁에서는 뭐 주빈석에 이렇게 아무나 다 앉히나 봅니다?”이 말에 양유진의 기품 있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맑은 눈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서늘함이 스쳤다.여름은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멍해졌다.서유인이 참지 못하고 ‘푸흡’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니까요, 하준 씨가 어떤 사람인데 아무나 하고 같이 앉을 순 없죠.”양유진을 불렀던 박재연은 난처해졌다.“저는 다른 테이블에 앉겠습니다.”양유진이 여름의 손등을 톡톡 두드리고는 몸을 돌려 다른 테이블로 갔다.“잠깐만요, 같이 가요. 저도 뭐, 최 회장과 같이 앉을만한 사람은 못 되거든요.”여름도 양유진을 따라 가장 구석진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주빈석에 앉은 하준은 입술을 꾹 다물고,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얼굴엔 온통 싸늘한 기운으로 덮여 있었다.다들 하준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서신일은 겉으로는 웃고 있었으나 속으로 여름을 욕하며 말했다.“아이고, 이거 정말 미안하구먼. 저 애가 철이 좀 없어서. 너무 신경 쓰지 말게. 애가 좀 교양이 부족하지.”“아버지.”서경주는 더 참을 수가 없었다.“조용히 해라.”서신일이 그런 서경주를 무섭게 노려봤다. 그리고는 서유인에게 눈짓했다.서유인이 하준의 팔을 잡고 아양을 떨었다.“걱정 마세요. 다음부터 우리 집에서 저 두 사람은 다시 볼 일 없을 거예요.”“그럼, 다음부터 자네가 올 때는 저 둘은 무조건 없을 걸세.”하준이 입술을 살짝 비죽거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OK’ 하는 것 같겠지만, 사실 최하준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심기가 더 불편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인이었다.이들의 대화는 다른 테이블에 앉아있던 여름에게도 들렸다.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자신을 동정의 눈길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동시에 자신의 불행을 그들은 즐기고 있었다.여름의 얼굴이 점점
여름은 단단히 화가 났다.‘웃겨! 어떻게 날 불러낼 생각을 할 수가 있지?’곧바로 문자 메시지 삭제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잠시 후 바니 코스튬을 입고 춤추는 영상이 전송되어 왔다.여름은 이를 으드득 갈았다. 살며시 양유진에게 고개를 돌렸다.“할머니께 잠시 볼일이 있어요. 배웅 안 해주셔도 돼요.”“그렇군요. 집에 가서 전화해요.”양유진은 어쩔 수 없이 당부의 말을 전하고 여름이 멀어져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밝았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십여 분 후, 여름은 길 옆에 세워진 하준의 검정색 스포츠카를 발견하고 얼른 차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도둑질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누가 보진 않았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왜, 양유진에게 들킬까 봐 그럽니까?”핸들을 잡고 있는 하준의 손에는 담배가 들려있었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한껏 비아냥거리는 눈을 하고 있었다.여름의 얼굴에는 불쾌한 표정이 역력했다.“이거 봐요, 최하준 회장님. 방금까지 여자 친구하고 장모님 되실 분하고 하하호호 하면서 서유인의 남친이라고 광고하셨잖아요? 이 상황에서 내가 당신 차에 타는 걸 누가 보기라도 하면 당신을 유혹하는 줄 알 거 아녜요!”“질투합니까?”하준이 날카롭게 여름을 응시했다.여름이 보란 듯이 깔깔 웃더니 흥분해서 소리 질렀다..“그쪽에 질투할 만큼 흥미 없어요. 용건 없으면 그만 가볼게요.”여름은 여길 왜 왔나 싶어 순간 짜증이 확 났다.하준은 요즘 계속 뭔지 모를 감정에 억눌려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응어리 졌던 무엇인가가 폭발해버렸다. 여름을 코 앞까지 바짝 잡아 당겼다. “양유진이 왔으니 이제 나는 보고 싶지 않다 이겁니까? 계속 까칠하게 굴면 당신과 양유진 둘 다 이 바닥에서 발도 못 붙이게 해주겠습니다.”“그만 해요.”여름은 있는 힘껏 그의 손길을 뿌리쳤다. 눈에서는 분노가 활활 타올랐다.“그런 자리에서 그렇게 모욕을 준 걸로 모자라요? 내가 죽어야 직성이 풀리겠어요?“하고 싶으면 그러시던지.”하준은 여름의 뺨을
하준이 휙 고개를 돌려 여름을 쳐다보았다. 다시 열이 뻗쳤다.“강여름 씨, 내 말 못 알아들었습니까?”“알아들었어요. 서유인하고는 못 헤어진다는 소리잖아요?” 여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더욱 하준과 엮여서는 안 된다.“……”‘이 인간이 평소에는 그렇게 똑똑한데, 왜 이럴 때만 바보야!’하준은 답답했다. 계속 여름과 신경전을 벌이는 것이 피곤하고 짜증났다. 엑셀러레이터를 꾹 밟고 신경질적으로 차를 몰았다.“뭐야! 내려줘요!”여름이 뭐라고 소리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차는 어느덧 하준의 집에 도착했다. 하준은 여름을 위층으로 끌고 가 소파에 밀었다.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었다.“다시 말해줄 테니 잘 들으십시오. 양유진과는 헤어져요. 당신이 내 아이를 가지면 난 서유인과 끝낼 겁니다.”여름은 번개라도 맞은 느낌이었다. 눈을 크게 뜨고 그저 하준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준은 슈트를 벗어던지고 여름이 기대고 있는 소파 등받이에 양손을 짚었다. 여름의 가녀린 몸이 하준의 커다란 품에 폭 파묻혔다.“강여름, 당신은 정말 마약 같아. 내가 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야. 날 잡아.”하준의 뜨거운 숨소리가 귀를 뜨겁게 달구었다.여름의 머리 속은 전기충격이라도 받은 듯 윙윙거렸다.‘날 싫어하잖아? 더러워서 싫다며?내가 임신을 하면 서유인과는 헤어지겠다니?설마 아직 내게…?’여름의 심장이 마구 요동치기 시작했다. ‘위자영 집안의 악랄한 수법을 봤을 때 엄마 강신희의 죽음은 그 집안과 관련 있을 거야.게다가 날 한 번 죽이려고 들었으니 앞으로도 얼마든지 내 목숨을 노리고 덤비겠지?최하준은 나를 지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도 유일한 방법이야.’ 멍하니 생각에 잠긴 여름을 보더니 하준은 거침없이 여름을 안아 들고 2층 침실로 자리를 옮겼다. 침대에 여름을 눕히더니 거칠게 입술을 삼켰다.순간 여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하준을 힘껏 밀어냈다.“안 돼! 난 그렇게는 못 해요.”뜨겁게 달궈진 분위기가 한순간 싸늘해졌다.하준은 벌게진
위자영은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그까짓 교통사고 때문에 우리가 이혼할 줄 알았니? 말도 안 되는 소리.”여름은 핸드폰으로 서경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계속 울리고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전화해도 소용 없어. 지금 할아버지와 있을 테니.”위자영이 비웃었다.“아직도 분위기 파악 안 되니? 할아버지께서 묵인하신 거라 네 아버지도 어쩔 수 없어.”“알아들었으면, 어서 꺼져!”서유인이 바닥에 널부러진 여름의 옷을 발로 걷어차며 소리를 쳤다.여름은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옷을 하나씩 트렁크에 쑤셔 넣었다.아무도 몰랐다. 강여름의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 여름만이 알고 있었다.‘오늘의 치욕은 하나 하나 갚아주지.’트렁크에 옷을 다 집어 넣기도 전에 서유인은 어디서 떠왔는지 더러운 물을 떠와 여름의 옷에 와락 부어버렸다.“어머, 미안해서 어쩌지? 더러운 걸 치운다는 게 이렇게 됐네?”서유인은 깔깔거리며 웃어 젖혔다. 여름은 얼음처럼 차갑게 쏘아붙였다.“너 최 회장 믿고 이렇게 날뛰나 본데 최 회장이 너랑 결혼 안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해봤니?”서유인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뭐래? 하준 씨는 곧 나와 결혼할 건데.”“희망사항이겠지.”여름은 조소를 띠었다. 아까 본 하준은 여름을 원하고 있었다. 서유인에 대해서는 별 감정이 없어 보였다. 말을 마치고 위자영과 서유인 모녀에게 더 심한 조롱을 받기 전에 나와버렸다.달리 지낼만한 곳이 없었다. 회사 근처 오성급 호텔에 투숙할 수밖에 없었다.그날 밤, 서경주가 다급하게 전화를 걸어왔다.“여름아, 왜 짐을 다 뺐니?”“모르셨어요? 저 쫓겨났어요.”“뭐라고?”서경주는 불같이 화를 냈다.“아니, 이 몹쓸 인간이! 가만 두면 안 되겠군. 지금 어디냐? 데리러 가마.”“오지 마세요. 일단은 집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어요.”여름이 조용히 말했다.“두 사람은 지금 최하준을 뒷배로 두고 있으니 아버지 말도 무시할 거예요. 이젠 할아버지까지도 그쪽에 섰으니, 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