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이 너무 빠르잖아.’여름은 술을 너무 마셔서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싶었다.윤서가 와서 어깨를 툭 치며 안 됐다는 듯 말했다.“너무 상심하지 마라. 잘난 남자 마음 얻기가 어디 쉽니? 다음에 다시⋯.”“아니, 내일 10시에 구청으로 나오래.”강여름이 멍하게 대답했다.“⋯⋯.” 당황한 윤서가 잠시 침묵하더니 잠시 후 깔깔 웃었다.“축하해. 이제 선우 오빠 외숙모가 되시겠네.” 여름이 물었다.“진짜일까?”윤서가 여름의 말랑한 뺨을 꽉 꼬집었다.“왜 아니겠어? 네 미모면 어지간한 한 아이돌한테도 안 밀려. 내가 남자였으면 한눈에 반했을걸. 가자! 결혼 축하주 한잔해야지.”여름은 자리를 비운 새 아무래도 윤서가 술을 너무 마셨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그러나 본인도 아까 먹은 술기운이 도는지 슬슬 머리가 아파졌다.바 입구로 고급차 한 대가 천천히 다가왔다.주차요원이 차 문을 열자 최하준이 뒷좌석으로 올라탔다. 셔츠의 단추를 두어 개 풀더니 가죽 의자에 나른하게 기대었다.“이번에는 좀 눈에 띄지 않는 거 가져오라고 하지 않았나?”공손한 목소리가 대답했다.“이쪽 집에 있는 것 중에 제일 얌전한 차로 가져왔습니다만.”하준이 눈썹을 찡그렸다.“내가 동성에 온다는 건 누가 알고 있나?”“큰 사모님만 알고 계십니다.”하준의 얼굴이 풀어졌다. 방금 그 여자는 우연히 나타난 모양이었다.“사람 하나 조사해서 날 밝기 전까지 자료 좀 가져오지.”*****아침 햇살이 커튼을 뚫고 들어왔다.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던 여름은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깼다.눈을 뜨니 한선우가 성큼성큼 문을 열고 들어서는 게 보였다.윤서가 그 뒤에서 화를 냈다.“여긴 내 집이에요. 이거 가택 침입이라고요.”“역시나 여기 있었구나.”한선우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여름을 쳐다보았다. 새카만 머리는 살짝 헝클어져 있었고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여름은 잠이 확 깼다. 눈에는 슬픔이 가득했다.잠시 뭔가 생각하더니 윤서가 말했다.“할 말 많겠지. 천천히들
여름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갔다. 아버지는 출근하신 뒤일 터였다.여름은 2층으로 올라가 주민등록증을 들고 나왔다. 거실로 들어서려다가 서류를 가득 안고 서재에서 나오던 강여경과 마주쳤다.화장기 없는 얼굴에 검은 머리, 수수한 차림새, 때 묻지 않은 청순한 모습이었다.“돌아왔구나, 여름아. 어제 일 때문에 걱정 많이 했어.”강여경이 미안하다는 얼굴을 했다.“그렇지만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 일은 억지로 되는 게 아니잖아.”여름의 눈이 싸늘해졌다.“됐어. 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착한 척 할 거 없어. 내가 그쪽을 너무 과소평가했나 봐.”“그러지 마라, 얘.”강여경이 또륵 눈물을 흘렸다.“앞으로 네가 원하는 건 다 양보할게. 회사 일에도 손대지 않을 거고. 이 자료 다 네가 보렴.”그러면서 자료를 모두 여름에게 안겼다.여름은 얼떨결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서류는 모두 화르륵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거기서 뭐 하니?”이정희가 2층에서 내려오다가 마침 눈물이 그렁그렁한 강여경과 흩어진 서류를 보게 되었다.“그거 아빠가 보라고 한 서류 아니니?”“엄마, 제가 실수한 거예요. 화내지 마세요.”강여경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급히 말했다.“여름이가 회사 일에 손대지 말래서 서류를 주려다가 그랬어요. 선우 일로도 속상할 텐데 회사 일은 그냥 여름이에게⋯.”“뭐라는 거야, 지금⋯?”“시끄럽다.”이정희가 눈을 치켜뜨고 여름을 돌아봤다.“언제부터 네가 회사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했니? 나랑 아빠가 언니에게 보라고 준 자료다. 다음 주부터 언니가 팀장으로 들어갈 거야. 넌 물러나 있어.”여름은 깜짝 놀랐다.“학력도 내가 더 좋고 경력도 내가 더 많아요. 1년 먼저 들어간 제가 아직 대리도 못 달았는데 어떻게 늦게 들어온 사람이 팀장을 맡아요?”“엄마, 저는 팀장 같은 거 안 한다니까요. 더는 여름이 기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강여경이 울먹이며 말했다.이정희는 더욱 마음이 아팠다.“이거 봐라. 여경이는 그저 네 생각뿐인데, 너는 심
결국 최하준은 뻣뻣하게 굳은 채 아무 말도 못 했다.사진사는 속으로 멀쩡하게 생겼는데 안면신경마비라니 안 됐다고 생각했다.사진을 찍고 나서 두 사람은 2층으로 올라가 서류를 작성했다.최하준이 신분증을 내밀었다. 여름은 그때서야 남자의 진짜 이름을 알게 되었다.‘최하준’‘선우 오빠네 어머니는 양 씨인데, 외삼촌이면 양 씨여야 하는 게 아닌가?’여름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최 씨네요?”“네.”하준은 고개를 숙인 채 이름을 적느라 여름의 말에 담긴 다른 뜻을 눈치채지 못하고 대충 대답했다.“어머니 성을 따랐습니다.”“아~.”여름은 이 남자가 한선우의 외삼촌이라서 결혼을 하자고 덤빈 것인데, 사람을 잘못 안 줄 알고 놀라서 기절할 뻔했다.어쨌든 뭔가가 찜찜했다.혼인신고는 10분 만에 끝났다.약간 슬프기는 했지만, 신기하기도 했다.어릴 때부터 한선우와 결혼할 줄 알았는데, 겨우 얼굴 한 번 본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될 줄이야.“제 연락처입니다.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하준은 종이에 전화번호를 적어주더니 가려고 했다. “잠깐만요⋯.”여름은 정신을 차리고 급히 최하준을 잡았다.“이제 부부인데 같이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최하준이 싸늘한 얼굴로 대답했다.“다른 사람이랑 사는 건 불편합니다.”“다른 사람이 아니라 합법적인 아내죠. 이혼할 때 하더라도 정식 부인이라고요.”여름이 혼인신고서를 흔들어 보이고는 불쌍한 척을 하며 입을 비죽 내밀었다.“오랫동안 헤어졌던 언니가 돌아오더니 엄마 아빠가 날 버려서 이제 살 곳도 없어요.”“월세를 알아보시죠.”최하준은 눈도 깜짝 않고 가려도 했다.“여보, 날 버리지 말아요!”여름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최하준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난 이제 당신 말고는 아무 것도 없어요.”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접수처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쳐다봤다.어쩌자고 함부로 이런 여자와 혼인신고를 했을까 생각하며 최하준은 후회했다.“컨피티움에 삽니다. 알아서 가 있어요.”참다 못한 최하준이 여름을
여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이런 망할! 사람이 아니라 고양이라고 말해줬으면 오죽 좋아.’새엄마가 될 생각에 고민했던 것을 생각하니 울고 싶었다.어쨌거나 고양이는 귀여웠다. 털도 반질반질하고 토실토실했다.다가가서 한 번 만져보려고 했더니 고양이는 홀랑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여름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그 안방.답답함에 한숨을 내쉬고는 집을 둘러보았다. 방이 세 개였다.안방, 작은방, 서재.북유럽풍에 인테리어는 대부분이 무채색이었다. 깔끔하니 보기는 좋은데 좀 썰렁했다.‘선우 오빠네 외삼촌이 이런 집에 산단 말이야?유망한 사업가라고 하지 않았던가?’번듯한 별장이 아닌 건 그렇다 치고 호화로운 느낌이 하나도 없었다.게다가 서재에는 , , 같은 책뿐이었다.아무래도 이상했다.‘선우 오빠네 외삼촌이 아닌 거 아냐?아냐,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윤서가 어리바리하기는 해도 이런 큰일을 두고⋯.착, 각, 한, 건, 아, 니, 겠, 지!생각할수록 당황스러웠다. 여름은 결국 윤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남자가 선우 오빠네 외삼촌인 거 확실하지?”“뭐래, 우리 오빠가 직접 말해줬다니까. 같이 술도 먹고 밥도 먹었다던데.”여름이 가슴을 탁탁 쳤다.“결혼 잘못했을까 봐 그래.”“맙소사, 진짜로 신고했어?”윤서가 비명을 질렀다.“그 사람이 진짜로 왔디?”‘으응’하는 대답을 듣자 윤서는 울먹거렸다.“우리 서로 수호천사 해주기로 했잖아. 날 버리고 가면 난 어떡하라고.”여름은 속마음을 다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어쨌든 집들이는 한 번 할 거지?”“그게, 사실은 아직 나한테 다 넘어온 게 아니라서⋯.”여름은 결국 자초지종을 말했다.“네 연애 팔자는 어쩜 그렇게도 기구하냐.”윤서가 위로했다. “그래도, 괜찮아. 너라면 반드시 그 남자를 사로잡을 수 있을 거야.”“그래, 나도 날 믿어!”통화를 끝내고 여름은 근처의 마트에 갔다. 아무래도 집이 너무 썰렁해서 조치를 취해야 했다.****
“⋯⋯.”최하준은 이마를 문지르다 톡 요청을 수락했다.곧 강여름이 톡을 보냈다.“여보, 저녁은 집에서 먹을 거예요?”하준 : 안 갑니다. 그렇게 부르지 마시죠.하여간 love : 그래요? 그럼 쭌이라고 할게요, 쭌 좋네요.하준 : ⋯⋯.‘아, 반품해 버릴까?’******그날 밤.고색창연한 한옥에 사람들이 모여 식사 중이었다.변호사들이 새로 들어온 의뢰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최하준은 그저 듣는 시늉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톡이 울렸다.여름이 사진을 보냈다. 따스한 조명 아래 토실토실한 고양이가 바닥에 엎드려 행복한 얼굴로 멸치를 물고 있는 사진이었다.하여간 love : 쭌, 걱정 말고 식사 모임 잘 하고 오세요. 지오는 제가 잘 돌보고 있답니다.어이없다는 표정이 드러났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식탐냥이라니까. 벌써 매수당한 거냐?’******9시 반.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오던 최하준은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집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까만 소파는 청록색 덮개가 깔려 있고 하얀 식탁에는 초록색 물결 무늬 식탁보가 덮여 있고, 그 위에 분홍 수국을 꽂은 유리 화병이 놓여 있었다. 집에 화초와 꽃이 가득했다. 발코니에는 주렁주렁 화분이 걸려있었다.‘잘못 들어왔나?다른 집인가?’“왔어요, 쭌?”작은 방에서 여름이 걸어 나왔다. 치맛자락에 하얀 토끼 무늬가 있는 와인색 실크 잠옷을 입고 있었다.풍성한 브라운 헤어가 어깨에서 찰랑거렸고, 치맛자락 아래로 눈처럼 새하얀 두 다리가 보였다.그야말로 요정 같은 자태였다.최하준이 인상을 찡그렸다.“누가 이런 옷을 입으라고 했습니까?”“이게 뭐 어때서요?”여름이 천연덕스럽게 한 바퀴 빙글 돌았다.“가슴이 보이길 하나, 배가 드러나길 했나, 무릎이랑 종아리밖에 안 보이잖아요. 나가 봐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입고 다니나. 이렇게 입는 것도 안 된다고요?”골치가 아팠다. 물론 노출이 심한 건 아니지만 속에 아무것도 안 입질 않았는가 말이다. 최하준은 얼른 시선
“따끈한 밥에다 조기를 얹으면, 캬~ 이게 또 짭짤하고 고소하니 갓 지은 밥하고는 궁합이 딱이지~”여름은 먹방을 계속했다.귀여운 얼굴로 열심히 먹으며 종알거리니 요즘 인기 있다는 먹방보다 더 식욕을 자극했다.이제 최하준은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마침 이때 지오가 식탁으로 폴딱 올라와 꼬리를 살랑거렸다.지오도 배가 고프다는 것을 알아채고 최하준이 일어나서 서랍에서 사료를 꺼내 그릇에 담아 지오 앞에 놓아 주었다.지오는 냄새를 한 번 맡아보더니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더니 여름을 빤히 쳐다보았다.최하준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여름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조기 살을 발라서 건네자 얼른 받아 맛있게 먹었다.“아유, 착하지.”여름은 지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아빠보다 품위 있구나.’민망해진 최하준은 조기 살 먹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입으로 명란 계란말이가 쏙 들어오자 확 인상을 썼다.“아니⋯.”여름은 얼른 명란 계란말이를 상대의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화가 나서 뱉으려는데 고소한 냄새가 입안에 퍼졌다. 저도 모르게 씹기 시작했는데 보드라우면서도 탄탄한 식감이 일품이었다.이런 명란 계란말이는 먹어본 적이 없었다. 본가의 주방장이 별별 요리를 다 할 줄 알아도 이렇게 맛있게 하지는 못했다.대체 어떻게 한 건지 버터처럼 고소한 향이 나는데 느끼하지도 않았다.“맛있죠?”여름이 아래턱에 손을 받치고는 자신 있다는 듯 물었다.맞은 편에 앉은 여자의 득의양양한 미소를 보고 최하준은 얼른 정색을 했다.“그냥 그렇군요.”그러고는 계란말이를 하나 더 집어 먹었다. 한 조각으로는 부족했다.여름이 눈을 깜빡였다.“그저 그렇다면서요?”“이렇게 많이 만들었는데 혼자서 다 먹을 수 있습니까? 음식 남기는 거 질색입니다.”최하준이 침착하게 답했다.뭐가 말하려고 여름이 막 입을 여는데 말을 막았다.“식사 시간에 시끄럽게 떠들지 맙시다.”“⋯⋯.”‘이런 걸 두고 바로 염치가 없다고 하는 거지.’여름이 속으로 생각했다.‘아침에
누군가 심장을 꽉 움켜쥔 것 같았다. 여름은 아파서 숨도 쉴 수가 없었다.특히나 한선우의 그 싸늘한 시선이 쓱 훑고 지나가자 견딜 수가 없었다.이민수가 허둥지둥 강여경에게 다가갔다.“본부에서 공지 받았어. 이번 프로젝트는 여경이에게 맡긴다면서?”움찔하더니 여름의 시선이 강여경에게 꽂혔다.“화내지 마라, 얘.”강여경이 놀랐다는 듯 주춤주춤 몇 걸음 물러섰다. 한선우가 얼른 강여경의 허리를 받쳤다. 그 모습을 보니 더욱 열불이 뻗쳤다.“강여경, 남자도 뺏어 가고, 내가 따온 프로젝트도 강탈하고, 뭘 어쩌고 싶은 건데? 그렇게 남의 손에 든 것만 보면 뺏고 싶어?” “아니 선우가 언제부터 자기 남자친구였다고⋯.”이민수가 비웃었다. “그냥 혼자서 죽자 살자 따라다닌 거지. 그리고 이번 프로젝트는 선우가 호텔 사장님과 친분이 있어서 받아온 거 사람들이 다 아는데⋯.”“오빠, 그만 해요.”강여경이 급히 이민수에게 눈짓했다.“할 말은 해야지. 이제 네가 선우 약혼녀인데, 프로젝트는 네가 맡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오빠도 그렇게 생각해?”강여경이 가만히 있는 한선우를 빤히 쳐다보았다.애초에 한선우가 주 대표와 인사를 시켜줘서 프로젝트를 받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그러나 사실 주 대표와 한선우는 그리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여름이 매달 주 대표를 찾아가 밥 사고, 술 사고, 디자인을 열 번도 넘게 수정해 가며 간신히 따온 프로젝트였다.한선우가 눈썹을 슥 올리더니 말했다.“뭐, 주 대표가 내 얼굴 봐서 일을 준 건 맞지..”이민수가 비아냥거렸다.“개나 소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믿을 수가 없어. 내가 직접 아빠한테 가볼 거야.”여름은 회사로 차를 몰아 강태환을 찾아갔다.“왜 강여경에게 호텔 프로젝트를 주신 거예요? 내내 제가 책임지고 있었는데요. 이번 프로젝트에 제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한창 업무 중인데 여름이 벌컥 들어오자 강태환은 기분이 언짢았다.“너한테는 따로 맡길 일이 있다. 진 대표네 별장 일을 네가 맡아
여름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자신은 입사해서 한 번도 ‘회장님댁 아가씨’ 노릇을 한 적이 없다. 그저 부지런히 일했을 뿐이다.다른 사람들이 다들 퇴근해도 자신은 남아서 야근을 하고 누구에게나 다정하게 대했다. 그런데 이런 엔딩을 맞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회사에서 나와 바람을 쐬며 혼자 걸었다.한선우가 몇 번인가 전화를 걸어왔지만 받고 싶지 않았다.마트에 가서 간식거리와 식자재를 사서 그대로 컨피티움으로 돌아갔다.집에 들어서니 지오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뛰어나왔다.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지오를 내려다보았다.“인제 날 좋아해 주는 건 지오 밖에 없네.”지오가 ‘야옹~’하며 편안한 듯 눈을 감고 여름의 손에 자신을 맡겼다.지오가 웃었다.“멸치가 먹고 싶구나? 알았어, 해주지.”점심에 최하준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름은 지오와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고 소파에 앉아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최하준은 10시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아직 집이 환했다.여름은 소파에 앉아서 지오 입에 소시지를 넣어주고 있었다.“내가 없으니 애한테 그런 정크푸드를 먹이는 겁니까?”쌀쌀맞은 최하준의 시선이 테이블에 있는 각종 간식거리로 향했다. 감자 칩, 닭발, 닭꼬치, 쥐포⋯.지오의 입가에 뭔가 양념이 묻어있는 것도 같았다.“그냥 맛만 보여준 거예요. 아주 조금만.”여름이 소심하게 손가락으로 아주 작은 양을 재보이는 시늉을 했다.“지오가 너무 덤벼서 어쩔 수 없⋯.”“고양이가 뭘 압니까. 다 사람이 알아서 조절해 줘야지.”최하준은 화가 나서 테이블의 간식거리를 싹 치웠다.“앞으로 집에서 이런 정크푸드 금지입니다. 이런 냄새도 싫습니다.”여름은 속상했다. ‘세상에 간식 냄새 싫다는 사람이 다 있네.변태인가⋯.’그러나 여름은 어쩔 수 없이 비위를 맞추며 웃었다.“당신 말이 맞네요, 쭌. 앞으로는 이런 거 안 먹을게요.”“거울이나 보시죠. 얼마나 가증스러운지⋯.”최하준은 꼴도 보기 싫다는 듯 고양이를 안고 안방으로 가버렸다.“배고프지 않아요? 국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