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준이 싸늘한 얼굴로 주머니에서 카드키를 꺼내 여름에게 주었다.“가지고 있어요. 앞으로 언제라도 내가 부르면 오십시오.”여름이 복잡한 얼굴로 물었다.“서유인에게 들키면요?”“볼 테면 보라지. 상관 없습니다. 이 나이에 여자도 못 만나본 남자 있습니까?”하준의 말이 끝나자 초인종이 울렸다.문을 열었더니 상혁이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옷 사왔습니다. 아 참, 9시에 회사에 미팅 잡혀있습니다.”“알았어.”하준이 물건을 받아서 여름의 품에 안겼다.“가서 갈아입어요.”여름은 봉투를 받아서 올라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내려왔다. 하준은 가고 없었다. 테이블에 어제 송영식의 유람선에 놓고 왔던 핸드폰이 놓여있었다.들어보니 서경주와 양유진에게서 문자와 톡이 와 있었다. 윤서에게서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급히 전화를 걸었다. 곧 통화가 됐다. 잠이 덜 깬듯한 윤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무슨 일 있어?”“넌 괜찮아?”여름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나? 나는 괜찮지.”윤서가 고개를 갸웃했다.“그런데 어제 밤에 자료 준다고 갔다가 너무 마셨나 봐. 잠이 들었는데 회사 사람이 집에 데려다 줬더라고. 앞으로는 이러지 말아야지.”“......”여름은 알듯했다. 어젯밤 일은 송영식이 벌인 짓이다. 윤서는 아직까지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여름은 잠시 생각해 보다가 말하지 않기로 했다.윤서 성질에 회사에서 난리를 칠 텐데, 송영식은 애초에 자신들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고 하준이 이제 송영식을 꽉 잡고 있으니 앞으로 함부로 여름의 친구에게 손을 대지는 못할 것이란 판단이 섰다.“괜찮으면 됐어. 그래도 다음부터는 조심해 그러고 나가서 술 취해서 다니지 말고.”“그래. 그런데 이상하다. 내가 그래도 주량이 꽤 되는데 어제는 몇 잔 안 마셨는데도 취했어. 술이 너무 독한 거였나?”여름은 씁쓸하게 웃었다. 술을 섞어 먹였던지 했겠지.하준이 사는 곳을 나와 그대로 화신 서울 사무소로 갔다.하루 동안 서울 상황을 파악해보니 화
화요일, 서경주가 여름을 데리고 본가에 갔다.여름은 서경주에게 선물을 건넸다.“며칠 전에 친구랑 쇼핑하러 나갔다가 하나 샀어요. 원단이 꽤 편해보이더라고요.”“우리 딸 안목이 좋구나. 괜찮은데? 내일 바로 입어 봐야겠다.”서경주는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할아버지랑 할머니 것도 샀는데 좋아하실지….”“괜찮다. 그 분들이 뭐 부족한 분들은 아니니 성의를 보이는 게 중요하지.”서경주가 웃었다.서경주의 본가도 서명산 근처에 있었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본가에 거의 다 왔을 무려 하늘에서 ‘투투투투’하는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다. 여름이 창문을 열고 내다봤다. 서경주는 마침내 딸과 이야기할 거리를 찾았다.“서울에 돈 좀 있는 사람들은 헬기를 가지고 있단다. 쿠베라의 헬기겠지”“송영식의 그 쿠베라요?”여름의 입에서 송영식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 남자에게는 호감을 가지지 않았다. 하준이 그런 자와 친구라니 유유상종이겠거니 싶었다.“송영식 대표도 아는구나.”서경주가 웃었다. “송영식 대표와 최 회장은 절친이지. 두 사람이 색깔만 다른 똑같은 브랜드의 헬기도 샀어. 최 회장은 눈에 띄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자주 타지는 않더라. 그런데 며칠 전 밤 12시에 갑자기 헬기를 타고 나가서 다들 그 집에 무슨 큰일이 생겼구나 했지.여름이 움찔했다. 갑자기 지난번에 유람선에서 취했던 생각이 났다. 그때 무슨 비행기 같은 것을 탄 것 같았는데 그때는 꿈인가 보다 했던 것이다.“그게 언제예요?”“그게, 잘 모르겠구나. 아마도 화요일이나 수요일 쯤일 게다.”서경주가 의아해했다.“왜 그러니?”“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요.”여름은 좀 멍해졌다. 수요일이라면 일이 벌어졌던 바로 그 날이었다.하준이 헬기를 타고 오다니, 뭣 때문에 그렇게 다급했겠는가, 자신을 보고 싶어 왔다면 우스운 소리겠고, 아니면, 걱정이 돼서?그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가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그럴 리가, 그 남자가 뭐 그렇게 마음이
할아버지 서신일은 만족스러운듯 고개를 끄덕였다.“그게 맞지. 최 회장은 명문가에서 아내를 골라야 할 텐데, 우리 집안이 돈이 부족한 집안도 아니고 보석이 부족하지도 않지. 어디 없는 집 자식처럼 그러면 못 쓴다.”“그러니까 말이에요. 누구처럼 보석에 입이 헤벌레 해가지고 있는 사람하고는 차원이 다르지.”고모가 여름을 흘겨보며 비웃었다.다들 조용히 웃었다. 서경주가 불쾌한 기색을 띠고는 막 한 소리 할 참이었다.여름이 웃었다.“그러게요. 그런데 저는 정말 너무 좋아서요. 비싼 보석을 받아서 그렇다기 보다는 할머니께서 저에게 주신 것이라 너무 기쁘네요.”여름이 잠깐 말을 멈추더니 눈물이 그렁그렁 해지더니 눈시울을 붉혔다.“오는 길에 내내 엄청 두근거렸어요. 저는 유인이랑 달라서 어려서부터 할머니 할아버지랑 같이 살았던 게 아니잖아요. 유인이는 성격도 애교스럽던데 저는 그런 것도 잘 할 줄 모르고, 어려서부터 외삼촌 손에 자라서 식구들하고 잘 지낼 줄도 몰라요. 그래서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저를 안 좋아하실까 봐 걱정했는데, 할머니께서 이렇게 선물까지 준비해 주시다니 그래도 마음 한 자락에 제 자리가 있구나 싶어서요.”그렇게 말하면서 감동했다는 듯 할머니를 쳐다보았다.할머니는 아들에게 딸이 하나 더 생겼다는 소리를 듣고 기쁘긴 했지만, 그 말을 듣고 나니 갑자기 이 손녀에게 더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대충 고른 악세사리였는데 손녀애가 그렇게 감동을 하니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그래서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얼른 손짓을 했다.“이리 와서 할머니 옆에 앉으렴. 다 우리 집 손녀들인데, 네가 고생이 많았다. 외삼촌이랑 외숙모가 잘 안 해줬니?”“전에는 그래도 잘 해주셨는데 친딸이 돌아오고 나서는 냉담해 지셨어요. 오래된 집에 갇혀서 밥도 제대로 못 먹은 적도 있어요.”여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TH도 그렇게 처지는 집안이 아니던데 설마?”여름의 손을 꼭 잡은 할머니를 보고는 눈꼴이 시어 유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맞은 편에 앉아있던 서경재가 웃었다.“유인이는 최 회장이랑 언제 약혼하니?”서유인이 다들 부러워 하느 시선으로 쳐다보는 것을 느끼고 부끄러워 하며 대꾸했다.“할머니께서 올해나 내년에 하라고 하세요. 약혼 말고 그냥 바로 결혼하라고 하시더라고요.”“정말 마음이 급하신가 봐.”고모가 웃었다.“곧 우리 유인이가 FTT사모님 되겠네?”할아버지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최 회장 잘 잡아야지. 이제 우린 너만 믿는다.”유인이 기뻐했다.“실망시키지 않을게요, 할아버지.”다들 서유인을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데도 여름은 그다지 불편한 기분도 없었다. 그저 담담하게 맞은 편에 앉은 서경재를 흘끗 보았을 뿐이다. 아버지의 둘째 형이라는 서경재는 휠체어에 앉아서 음침한 느낌을 주었다.“아 참, 여보. 지난 번에 우리 동생에게 강변 개발건 주기로 했잖아요. 왜 갑자기 당신네 회사 사람들한테 들으니 화신에 주기로 했다는 것 같던데?”위자영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여름의 젓가락이 움찔했다. 서경주가 이마를 찌푸렸다.“화신은 여름이 회사잖아. 처남은 서울에서 개발 경력도 꽤 되고 돈도 꽤 벌었잖나? 이번에는 여름이에게 양보 좀 해. 얘도 슬슬 서울에서 자리 좀 잡아야지.”“무슨 소리에요? 지난 번 개발건 손해 막심해서 강변 쪽 개발 프로젝트만 보고 있던데.”위자영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이미 기획서도 다 준비했던데. 여보, 일단 지웅이네를 좀 도와줘요. 우리가 여름이한테 다른 데 개발 프로젝트 하나 찾아주는 것쯤은 일도 아니잖아요.”고모도 고개를 끄덕였다.“먼저 지웅이네 웅산을 도와 줘. 여름이는 아직 젊은데 아랫사람들 다루기가 쉽지도 않고 결국 이도저도 안 돼서 실패나 하지.”서경재도 거들었다.“경주가 영 안 내켜 하거든 내일 유인이가 최 회장 한 번 찾아가 봐라. 최 회장한테는 간단한 일일 걸.”할아버지가 바로 말을 끊었다.“됐다. 그 프로젝트는 웅산에 넘겨.”여름은 고개를 떨구었다. 눈에 자조적인 웃음이
유인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지더니 작은 소리로 답했다.“엄마, 하준 씨 성격 이상하고, 나 사실 그 사람 잘 알지도….”“그래도 가! 최 회장한테 안 먹힐 것 같으면 그 댁 할머님이라도 찾아가. 이제는 우리 집안이 어떤 집인지 보여줄 때가 되었어.”위자영이 말했다.서유인의 눈이 빛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승마장.잘 빠진 말이 초원에서 자유롭게 뛰어 놀고 있었다. 말에 타서 채찍을 휘두르며 검은 기수복을 입은 사람의 모습은 귀족적으로 보였다. 온 몸으로 남성적인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곧 말이 멈춰 섰다. 하준이 말 등에서 뛰어 내려 목의 단추를 몇 개 풀었다.회사 임원진이 곧 몰려왔다.“회장님, 승마 시술이 일취월장 하십니다.”“피버를 이렇게 타실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하준은 아무 표정이 없이 싸늘하게 모두를 돌아봤다.“아부들 떨 거면 빨리들 떨고 가시죠.”임원 하나가 간신히 입을 뗐다.“언제쯤 회사로 돌아오십니까? 자리를 비우신 지 4개월이 지났습니다. 회사 이윤은 계속 추락하고, 부회장님은 저희말은 듣지도 않고 혼자 하고 싶은 대로만 하십니다. 제발 회사로 돌아와 주십시오.”“저희는 회장님이 필요합니다.”“돌아오십시오.”하준은 상혁이 내민 물을 받더니 꿀꺽꿀꺽 마사고는 냉담한 눈으로 말했다.“됐어. 다들 가봐요. 다음주에 돌아가지.”“정말 잘 됐습니다. 어서 돌아오십시오. 저희는 그만 가보겠습니다.”임원진은 신이 나서 하나씩 돌아갔다.그 모습을 보고 상혁이 가볍게 웃었다.“4개월 떠나 계시는 동안 최양하 부회장이 전혀 중역의 마음을 사지 못했군요.”“최양하는 제 아버지를 닮았지. 놈의 깜냥이 어느 정도인지는 내가 잘 알아. 다만 우리 어머니는, 날 마음에 안 들어 하시겠지만.”하준이 가볍게 말했다.상혁은 아무 말이 없었지만 속으로는 너무 하준에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하준 씨.”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불렀다.하준은 이마를 찌푸리고 돌아섰다. 하얀 스웨터를 입
경박하기 짝이 없군.하준은 채찍을 휘두르더니 가버렸다.유인은 훤칠한 뒷모습을 넋을 잃고 쳐다봤다. ‘정말 너무 멋있어. 저런 남자를 보고 나니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니까.꼭 저 남자와 결혼하고 말 거야.’******사무실.오봉규 사장이 의기소침해서 여름에게 보고했다.“강변 개발 건은 웅산에 가기로 결정되었답니다.”여름이 깜짝 놀랐다.“어제는 절차만 밝으면 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최 하준 회장 쪽에서 이야기가 들어왔답니다. 웅산은 위 씨네 가문 기업인데 그쪽에서 최 회장 쪽에 줄을 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오봉규가 괴로운 얼굴을 했다.“저희도 이번 프로젝트를 따려고 자금도 꽤 썼는데 아무래도 허탕친 것 같습니다.”여름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웅산이 어떻게 최하준에게 줄을 댔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하준이 정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웅산을 도와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최소한 옛정은 생각해주지 않을까 했는데….아니지, 그 인간이랑 나 사이에 무슨 정이 있겠어?’“다른 지역을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여름이 물었다.“지금은 다들 강변 쪽만 바라보고 있는 데다 다른 지역은 너무 지가가 높아서 프로젝트를 따내도 이득이 없습니다.”오봉규가 답답한 듯 말했다.“그냥 서울을 포기하시죠. 우리는 외지인이라서 서울을 뚫기가 너무 힘듭니다.”“도저히 안 되면 방식을 바꿔야죠. 화신도 다양한 분야의 사업을 하고 있잖아요. 의료, 금융, 여행, 서울은 국제적인 통로를 가지고 있으니 어디에든 돈을 벌 기회는 널려있어요.”여름이 가볍게 말했다.“계란은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 거예요. 다원화해야 도태되지 않아요.”오봉규가 활기차게 말했다.“맞습니다. 제가 바로 팀을 꾸려서 논의해 보겠습니다.”여름은 이날 종일 회사에서 회의에 참석했다.그러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다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밤 10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갔다. 유인이 느른하게 소파에 늘어져서 팩을 하고 있었다. 눈에 비웃음을 띠고
강여름은 시선도 주지 않고 그대로 부엌 다용도 실로 갔다. 한참을 찾아도 청소도구가 보이지 않자 베란다로 나갔다.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던 하준의 얼굴이 점점 더 싸늘해졌다.‘어떻게 된 거야?보자마자 웅산에 프로젝트를 준 것 때문에 욕부터 하고 매달릴 줄 알았는데?’하준이 상상했던 것과 다르게 상황이 흘러가자 하준은 일어서서 여름에게 다가갔다.여름이 마침내 베란다에서 빗자루를 찾았다. 뒤를 돌다가 그만 단단한 하준의 가슴에 코를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뭐 하시는 거죠?”“그건 내가 물어야 할 말인 것 같습니다만.”하준은 아무래도 여름에게 중독된 것 같았다. 안 보면 짜증이 나고 얼굴을 보면 더 짜증이 났다.“와서 청소하라면서요? 늦었으니까 빨리 끝내고 가서 자려고요. 좀 비켜주시겠어요?”여름이 그를 비켜 가며 진지하게 거실 청소를 시작했다.하준은 진지하게 청소하는 여름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당장 가서 그 빗자루를 뺏어버리고 싶었다.‘이 바보는 내가 진짜로 청소를 시키려고 부른 줄 아나?’“강여름 씨, 할 말 없습니까?”개발건에 관해서 여름이 부탁하고 잘 보이려고 살랑거리고 자신을 만족시켜 주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유인에 대한 약속쯤은 철회할 수 있었다.여름은 흠칫하더니 어깨를 으쓱했다.“없는데요.”하준이 음험하게 여름을 한동안 쳐다보더니 차갑게 명령했다. “가서 욕조 닦고 물 좀 받아주십시오. 씻어야겠습니다.”“......”여름은 그대로 빗자루를 놓고 2층으로 올라갔다. 욕조는 2미터가 넘는 큰 사이즈로 바닥을 파서 조성해 놓은 것이었다.수세미를 들고 바닥으로 내려가 닦는 수 밖에 없었다.하준이 들어왔을 때 여름은 바닥에 엎드려서 꽤나 유혹적인 포즈를 하고 있었다. 옷이 허리까지 말려 올라가서 군살 하나 없는 가는 허리가 보였다. 매끄럽고 윤기나는 피부가 드러나 보였다. 하준의 눈이 어두워지면서 막 욕조로 들어가려고 할 때 여름의 핸드폰이 울렸다.여름은 하준이 뒤에 있는 줄 모른 채 핸드폰을 들어서 보았다. ‘양유진’
여름은 하준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숨을 죽이고 양유진에게 대답했다.“샤워하느라고 못 들었어요.”“오늘은 종일 전화도 안 하고, 보고 싶었어요.”양유진이 다정하게 말했다.“보고 싶었어요?”욕실 분위기가 갑자기 얼어붙었다. 여름의 눈이 확 커졌다. 하준이 갑자기 귀를 살짝 깨물었던 것이다.하준의 망할 얼굴을 홱 돌아봤다. 사악하게 입꼬리 한 쪽을 올리며 웃더니 두 손으로 여름을 품에 안았다. 그러더니 거리낌없이 얼굴을 여름의 목에 파묻고 입을 맞췄다.양유진은 저쪽에서 계속 물었다.“왜 대답이 없어요? 안 보고 싶었어요?”“저, 저기 제가 며칠 너무 바빴어요.”여름이 애써 참으며 대답했다.“그 개발지는 손에 못 넣었나요?”“안 됐어요.”여름이 입술을 깨물었다. 망할 놈의 하준이 이번에는 앞으로 돌아와서는 여름의 입술에 키스했다.여름은 피하려고 하고 하준은 집요하게 쫓았다.양유진이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내가 거기 없어서 도움이 될 수 없어 아쉽군요.”여름은 하준 때문에 입이 막혀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양유진이 계속 말했다.“곧 서울로 갈 테니까 함께 해요.여름 씨? 왜 아무 말이 없어요?”여름은 키스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할 수 없이 ‘응’하고 작게 소리 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급히 하준을 밀어내고 핸드폰을 뺏어들었다.“제가 일이 좀 있어서 이만 끊을게요.”얼른 전화를 끊고는 힘껏 하준을 밀쳤다. 수치스러워서 분노가 치밀었다.“너무 하시네요.”“너무해?”하준이 싸늘하게 웃었다.“전에 내가 전화했을 때고 양유진과 이러고 있었던 거 아닙니까?”“무슨 소리예요? 정말 상대 못하겠네. 물 받아놨으니 이제 씻으시죠.”여름은 하준을 밀치고 갔다. 이대로 있다가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갈아입을 옷 가져다 주십시오.”하준이 뒤에서 싸늘하게 명령했다.“안 갖다 줘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준은 이미 셔츠를 벗고 탄탄한 몸을 드러냈다.고개를 돌려 매혹적인 눈으로 여름을 흘끗 보았다.“안 가져다 주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