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식은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면 하준이에게 연애도 가르쳐야겠네요. 그러면 곧 하준이랑 사귈 수도 있을 거예요.”“……”하도 어이가 없어서 윤서가 한 마디 했다.“IQ가 두 살 수준이라서 여름이를 이모로 생각한다는데 무슨 연애를 해? 이모랑 연애하라는 거야?”옆에서 듣던 여름은 깊이 상처받았다.윤서가 말을 이었다.“그리고 당신도 솔로로 30년을 산 주제에 누구에게 연애를 가르쳐? 됐다 그래. 괜히 멀쩡한 사람 망치지 말고 가만 계시지.”송영식의 태양혈이 불뚝거렸다.“왜 말을 그런 식으로 해?”윤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송영식을 흘겨보았다.“왜? 팩폭하니까 찔려? 사람이 이렇게 속이 좁다니까.”송영식은 불룩한 아내의 배를 한 번 보더니 심호흡을 하고 결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용히 핸드폰을 꺼내 게임 켜서 하준 옆으로 다가갔다.“야, 하준아. 게임 가르쳐줄까?”하준이 눈썹을 찡그렸다.“난 아직 아기인데.”“아, 말이 헛 나왔네. 쭌이라고 부를까?”송영식이 싱긋 웃었다.“애니메이션이 뭐가 그렇게 재미있냐? 게임이 훨씬 더 재미있…”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주혁이 핸드폰을 압수했다.“야, 뭐 하는 거야?”송영식은 불만이었다.“진짜 애도 아닌데 게임 좀 해도 되잖아?”“게임할 시간에 책 보여주고 교육 프로그램 보여주고 글씨 공부 시키는 게 나아. 지금 하준이는 2세 수준에서 교육을 새로 해야 한다고.”이주혁이 찬성할 수 없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너 지금 하는 꼴 보니 아기 태어나면 넌 교육은 손 안 대는 게 좋겠다. 네 와이프 말이 맞아. 괜히 멀쩡한 애 망치겠어.”“들었지? 자기 친구도 내 편이네.”그 말을 들은 윤서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주혁의 입에서 튀어나온 ‘네 와이프’운운하는 소리는 귀에도 안 들어온 모양이었다.송영식이 입을 비죽거리더니 할 수 없이 핸드폰을 집어 넣었다.다행히도 하준은 핸드폰에 관심이 없었다. 곧 화면 속 애니메이션 스토리에 빠져들었다.송영식과 윤서는 잠깐 앉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준은 숟가락에 있던 밥을 사방으로 뿌려서 테이블이 온통 밥풀 투성이가 되었다.“바보.”여울이 화를 냈다. 예전이 시니컬하던 하늘이의 말투와 똑같았다.하준은 눈을 깜빡이더니 여름을 향해 울음을 터트렸다.“나 바보래….”“아니야, 바보 아니지. 우리 쭌이 최고 똑똑한데.”여름이 얼른 하준의 머리를 안으며 여울에게 눈짓했다.“난 엄마가 전에 이렇게 가르쳐 줬을 때 한 번에 배워서 했는데.”여울이 입을 비죽거렸다.“과연 정말 한 번에 배웠던가?”하늘이 냉랭하게 뱉었다.“…어쨌든 아빠가 이 모양이 됐으니 내가 가르쳐야지, 뭐.”여름의 입가가 씰룩거렸다.“됐어. 얼른 먹어라. 아빠는 내가 먹일게.”그러더니 밥그릇을 들고 한 입씩 떠 먹였다.여울은 분했다.“내가 아기 때는 혼자서 먹어야 한다고 했으면서.”하늘이 여울을 흘겨 보았다.“남편이랑 너랑 똑같냐? 신경 꺼.”여울이 툴툴거렸다.“엄마에게 나는 아빠보다 못하구나.”“……”‘못 산다, 진짜. 하다하다 이젠 아빠도 질투하는 거냐?’“그만. 빨리 먹고 할머니랑 집으로 가. 내일 늦지 않게 유치원 가고.”여름이 말했다.쌍둥이는 얌전히 밥을 먹었다. 여울은 가려다가 테이블의 초콜릿을 집어 들었다.“이런 거 먹으면 이빨 썪으니까 내가 보관해 줄게요. 여기 자리도 없네.”그것을 본 하준은 또 울었다.“싫어! 쟤가 내 거… 사탕 가져간대….”여울이 진지하게 말했다.“이런 거 많이 먹으면 이빨에 벌레 생겨. 나중에 이빨 아프고 못 생겨 진다. 배 속에도 막 벌레 자라고. 그러면 여름이가 싫어할 텐데.”“여름이나 나 좋아하면 좋겠ㅇ….”하준은 깜짝 놀라서 얌전해 졌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하준을 보니 여름은 마음이 녹아버릴 것 같았다.“초콜릿 하나만 가져가. 아빠 친구가 선물한 거거든.”여름이 딸에게 말했다.“괜히 놀래키지 말고. 아빠가 몸은 어른이니까 초콜릿 좀 먹어도 괜찮아.”여울이 발을 굴렀다.“흥! 아빠만 좋아하고!”“아유, 아빠는 아프잖아?
“하지만 뚱뚱이가 되고 싶지는 않다. 멋져서… 여름이한테… 사랑받고 싶어.”하준이 고개를 들고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맑은 두눈에 여름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하준의 시선에 여름의 마음은 달달하게 녹아갔다.사고 후에 검사와 수술을 위해서 바싹 깎아 버린 머리 때문에 하준의 미모가 더 직설적으로 드러나 여름은 더욱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전에는 말 없이 엄숙한 모습이 잘생겼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지금 보니 이런 천진난만한 모습도 너무 귀여웠다.“응, 지금 난 널 아주 좋아하거든.”여름은 참을 수가 없어서 하준의 입술에 키스했다.하준은 숱 많은 속눈썹을 깜빡이더니 바로 여름의 입술에 뽀뽀를 되돌렸다.“나도 좋아.”남녀간의 사랑이 아니라 순수한 ‘좋아한다’는 말인 걸 알면서도 여름은 심장이 두근거렸다.다시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었다.“쭌, 입 벌려 봐.”하준은 어리벙벙했다.그러나 더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순진하게 여름이 시키는 대로 했다.“쭌, 눈 감아….”“응.”하준은 얌전히 눈을 감았다.여름의 입술이 부드럽고 달콤해서 하준은 너무 좋았다. 얼마나 키스를 했는지 모른다. 하준은 자기 몸이 점점 뜨거워진다고 느꼈다.그런데 그때 여름이 입술을 떼었다.하준은 입술을 핥았다.“여름이 입술이 초콜릿보다 맛있어.”여름은 민망해서 얼굴이 뜨거워졌다. 자기가 변태가 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아이가 되어 버렸는데도 가만 두질 못하고….’“쭌, 그건 뽀뽀라고 하는 거야. 나하고만 하는 거야. 다른 사람하고는 뽀뽀하면 안 돼.”“왜?”하준이 멍하니 물었다.“그게… 여긴 내 거 거든. 알겠어?”여름이 하준의 매끈한 입술을 톡톡 건드렸다.“응, 난 네 거….”아는지 모르는지 하준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헤에~하고 웃었다.태양처럼 찬란한 미소였다.여름은 심장이 녹아버릴 지경이었다.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자, 밥 먹여줄게.”하준은 얌전히 한 그릇을 다 비웠다. 하준이 다 먹자 여름도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옷 소매
여름은 울고 싶었다.‘지금 날 가지고 장난하는 거냐고….’“저기….”하준이 여름을 바라보았다. 까만 두 눈이 촉촉했다. 당장이라고 울 것 같았다.여름은 하준의 매끈한 입술을 보며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준의 목에 손을 걸고 부드럽게 키스했다.“착하지. 괜찮아. 내가 있으니까.”******목욕을 마치고 나오니 8시가 넘었다.뒤에 여름도 안에서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하준은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로 침대에 누웠다.반면 여름은 살짝 민망했다.이주혁에게 전화를 해야 하나 망설여졌다. 왜 갑자기 그쪽 문제가 해결이 되었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이런 얘기는 너무 민망해서 결국은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그러나 다음날 아침 여름이 아직 잠에서 덜 깬 상태인데 하준이 키스를 해왔다.“저기, 또 이상해.”“……”환장할 노릇이었다.‘IQ는 여전히 어린애인데 왜 이쪽으로만 이렇게 빨리 자라는 거냐고? 예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전혀 못하지 않은걸?’곧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여름은 얼른 하준을 밀어냈다.“선생님 오셨다. 얌전히 있어. 이러면 안 돼.”“왜?”하준이 입을 비죽거렸다. 불만이 가득했다. “뽀뽀는 사람을 안 보는 데서 몰래 하는 거거든. 말 안 들으면 안 놀아 줄 거야.”여름은 할 수 없이 협박이라는 수를 썼다.잘은 모르지만 하준은 여름이 안 놀아준다는 말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여름은 이불로 하준의 몸을 가려놓고 탁탁 정리한 뒤에 문을 열었다.이주혁과 뇌신경 센터의 의사와 정신과 의사였다.“하준이 좀 보러 왔어요.”이주혁이 눈썹을 치켜세웠다.“이제 막 깨셨구나. 8시 반이나 되었는데.”“… 피곤해서 좀 늦잠을 잤어요.”여름이 간신히 대답했다. 아까부터 깨어 있었다고 말할 수가 없어서 잠꾸러기가 될 수 밖에 없었다.“오늘 하준이 증세는 좀 어떤가 하고요.”이주혁이 말을 이었다.“머리에 상처만 나으면 일단 퇴원해도 되거든요.”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집이 편하니 하루라도 빨리 퇴원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게요. 저도 생각지도 못했어요.”한참만에 여름이 민망한 얼굴로 답했다.이주혁이 의미심장하게 여름을 쓱 보더니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혹시 모르니까 오늘 비뇨기과에 데리고 가서 검사해 보세요. 일시적인 건지 확실히 좋아진 건지 봐야죠. 내내 하준이 진찰하던 선생님에게 얘기해 놓을게요.”“고마워요.“고맙긴요. 하준이는 제 친구니까 당연하죠.”이주혁의 눈에 슬픈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이주혁과 최하준은 오래 알고 지냈다. 언제나 자신을 가장 잘 알아주던 사람이 하준이였는데 이렇게 되다니….여름은 그 모습을 눈에 담아주었다. 이주혁이 남편이나 남자친구로는 별로일지 몰라도 형제나 친구로서는 더할나위 없이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점심을 먹고 나서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비뇨기과를 갔다.그 시간에는 환자가 없어서 누구에게 들킬 염려도 적었다. 닥터 류는 이주혁의 부탁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다.처음에는 아무리 해도 진찰실에 안 들어가겠다고 버티는 하준 때문에 여름은 결국 애니메이션과 초콜릿으로 달래고 나서야 겨우 데리고 들어갈 수 있었다.그러나 들어가서 얼마 되지 않아 안에서 하준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안 벗을 거야! 안 벗어! 여름이가 바지는 자기 앞에서만 벗는 거랬어!”“……”아무 것도 안 들렸으면 싶은 순간이었다.닥터 류는 어쩔 수 없이 진찰실에서 나왔다.“죄송한데 좀 도와주셔야겠는데요. 설득 좀 해주십시오. 힘이 너무 세서 방법이 없네요.”그야말로 난처한 상황이지만 여름은 할 수없이 들어갔다.안에서 하준은 자기 바지를 꼭 붙들고 아주 결사적인 모습으로 안 벗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여름이 다가가더니 하준의 짧은 머리를 쓰다듬었다.“쭌, 선생님 말씀은 들어야지. 검사해 보려고 하시는 거야.”하준은 입술을 비죽거렸다.“하지만… 바지는 다른 사람 앞에서 벗는 거 아니라고 했잖아. 여름이만 벗기는 거라고.”“……”“쿨럭쿨럭!”물을 마시던 닥터 류는 얼른 컵으로 얼굴을 가리고 ‘난 아무 것도
“이제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닥터 류가 입에 주먹을 대고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아주 교육을 단단히 시키셨더군요. 앞으로 계속 강화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민망하기 그지 없었다.여름은 벌게진 얼굴로 하준을 데리고 비뇨기과를 떠났다.“얼굴이 엄청 빨개.”하준이 천진하게 여름을 바라보았다.“열 나?”“아니야.”여름은 하준의 언어 능력이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통 2살 배기와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병실로 돌아와 여름은 진지하게 하준을 바라보았다.“쭌, 앞으로는 내가 한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면 안 돼. 알겠어?”하준은 그 잘생긴 얼굴로 멍하니 대답했다. 여름이 예를 들었다.“예를 들어서 둘이서만 있을 때 다른 사람 앞에서는 바지 벗는 거 아니라거나 어떤 곳은 다른 사람이 건드리면 안 되고 나만 만질 수 있다거나 쭌 입술에는 나만 뽀뽀할 수 있다거나, 그런 건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안 돼.”하준이 눈을 깜빡였다. 한참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안 돼. 그러다가… 그러다가 누가 나한테 뽀뽀하려고 하면….”“그러면 ‘뽀뽀하지 마!’라고 말해야지. ‘여긴 만지지 마!’ 이렇게.”여름이 하준의 말을 끊었다.“다른 사람한테 자꾸 내 핑계 대지 마.”“…어….”잘모르는 것 같지만 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왜?”“왜냐하면… 내가 민망하거든.”여름이 단호하게 하준이 눈을 들여다 보았다.“그리고 난 너를 아가로 보지 않아.”“그러면 나 어린이야?”하준이 똘망똘망하게 눈을 반짝였다.여름은 속으로 생각을 삼켰다.‘당연하지. 어린이도 아니고 아저씨라고요, 아시겠어요?’“아니, 내가 사랑하는 사람으로 봐.”여름이 작은 얼굴을 하준의 가슴에 묻었다.“아직 잘 모르겠지만 앞으로 사랑이 뭔지 천천히 알게 될 거야.”“알아. 내가 초콜릿 좋아하는 거 같은 거잖아? 만화 좋아하는 거 같은 거.”하준이 진지하게 끄덕였다.여름은 씁쓸하게 웃었다. ‘알긴 뭘 알아?됐다. 천천히 배우지, 뭐
“걱정하지 마라. 여울이는 엄마가 꼭 구해낼 거야.”여름은 최대한 하늘이를 안심시켰다.하늘이가 말하지 않았어도 여름은 이 일이 분명 강여경, 양유진과 관련 있다는 것을 알았다.여름은 바로 차윤에게 전화했다.“양유진과 강여경이 어디 있는지는 알아냈나요?”“양유진은 동성에 갔고 강여경은 내내 차진욱의 집에 있었습니다.”차윤도 그 사실을 알고 매우 당황했다.“요즘 차진욱이 저택에는 경찰의 보호가 강화되었습니다. 차민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VIP께서 직접 인력을 투입해서 보호하고 있습니다.”여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양유진이 동성에 갔다면 무작정 양유진을 잡으러 나가도 이미 너무 늦은 것이었다.“상혁 씨에게 병원으로 와서 하준 씨 좀 봐달라고 해주세요. 내가 직접 차진욱 회장네로 가봐야겠어요.”호랑이 굴이라고 해도 오늘은 무조건 들어가서 강여경을 잡아야 했다.전화를 끊은 여름은 하준을 돌아보았다.“내가 좀 나갔다 와야 해. 쭌은 병실에 가만히 있어, 막 돌아다니지 말고. 조금 있다가 김 실장이 올 거야.”그 말을 들은 하준은 당황했다.“같이 갈래.”“착하지. 지금 여울이가 사라졌어. 여울이 찾으러 가야 해. 막 돌아다니면 나중에 안 놀아줄 거야.”여름은 더 이상 하준을 상대하지 않고 바로 나갔다.차윤의 차가 곧 도착했다. 여름의 뒤로 대여섯 대의 차가 더 따랐다. 모두 지룡의 고수였다.“남은 지룡 멤버를 모두 데려왔습니다. 남은 일부는 여울이 납치범을 조사하고 있습니다.”차윤이 설명했다.“조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여름이 물었다.“단서가 좀 있습니다. 납치범은 아마도 1주 전 감옥에서 나온 기승탁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기승탁은 온갖 범죄를 다 저지른 녀석입니다. 그 중 한 사건으로 잡혀들어 갔습니다. 아는 건달이 많아서 평소에 폭행, 싸움, 갈취 등 사건을 많이 벌였습니다. 돈만 주면 무슨 짓이든 하는 놈입니다.”“그러면 강여경의 연줄이겠군요. 요즘 강여경은 보디가드가 없으니 돈을 써서 사람을
아무런 답이 없었다. 경찰이 싸늘하게 말했다.“이 많은 사람을 끌고 와서 난장을 부리겠다는 거 아닙니까? 당장 돌아가세요. 안에는 귀한 분이 계십니다. 멋대로 뚫고 들어간다면 발포하겠습니다.”뒤로 10여 명이 경찰이 서 있었다.여름은 지금이라도 심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곳을 돌파하다가 목숨을 잃으면 여울이는 더욱 구할 수 없게 된다.“그러면 차진욱 회장을 만나게 해주세요.”“회장님은 안 계십니다”“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가야겠어요.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내 아이를 납치했다는 의심이 듭니다. 아이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예요.”여름이 눈시울을 붉히고 경찰을 바라보았다.경찰은 미간을 찌푸렸다.“우리는 안에 계신 분을 보호하는 게 목적입니다. 못 들어 갑니다.”차진욱의 자택을 이렇게 삼엄하게 지키고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여름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핸드폰을 꺼내 차진욱에게 전화했다.잠시 후 통화가 되자 여름은 급히 말했다.“제발 부탁입니다. 제가 댁으로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강여경을 만나야 합니다. 제 아이가 사라졌어요. 강여경이 아이를 납치했…”“엄마…”전화기 속에서 여울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름은 철렁했다. 잘못 들은 줄 알았다.“여울아….”“엄마, 무서워. 나쁜 사람이 날 데려왔어. 나를 연못에 빠트리려고 했는데 아저씨가 구해줬어.”여울이 울면서 설명했다. “엄마 보고 싶어. 다시는 사탕 안 사먹을게. 너무 무서워.”여름은 심장이 찢어지는 듯했다.“여울아, 아저씨 좀 바꿔줘 봐.”전화기 건너 편에서 곧 차진욱의 목소리가 들렸다.“거기서 기다리고 있게. 곧 갈 테니. 아이는 무사해.”“고맙습니다.”여름이 울먹였다.“……”그 말을 듣는 차진욱은 입맛이 썼다.온몸에서 어두운 기운이 느껴졌다.차진욱은 아직도 눈물 콧물 짜고 있는 여자 애를 내려다 보았다. 포동포동한 얼굴에 분홍 원피스를 입었다. 냉랭하고 엄격한 자신도 심장이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마수를 뻗치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