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유진과 강여경이라면 제가 가장 잘 아니까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민우는 아직 살아있을 겁니다. 회장님께서 진실을 아는 것이 겁날 뿐이니 민우의 목숨을 담보로 잡아 놓고 있을 겁니다.”잠시 뜸을 들이더니 여름이 덧붙였다.“때로 남이 하는 말은 진실이 아닐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면 함께 지내면서 느껴봐야죠. 비즈니스 바닥에서 이 정도로 오랜 세월을 버텨오셨으니 사람을 이성적으로 판단하실 정도 눈은 있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차진욱의 마음이 살짝 움직였다.“그 건에 대해서는 조사해 보겠네. 자네가 한 말이 사실이었으면 좋겠군.”여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차진욱이 자신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강여경이 회장님과 아내 분 앞에서 어떻게든 이 건에 대해서 저와 최하준에게 혐의를 돌리려고 할 겁니다. 아내 분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든 저는 이게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회장님은 냉철한 분이시니 쉽게 남에게 이용당하진 않으시겠죠.”“하여간 강 씨 집안 사람들은 만만한 인간이 하나도 없군.”차진욱이 꼭 집어 말했다.“편할 대로 생각하십시오. 한 가지만 더 말씀 드리자면 강여경은 다른 사람처럼 성형을 하고 최하준의 주변에서 간호사로 지냈습니다. 그때 최하준의 먹는 것에 약을 타서 최하준은… 정신이 이상해졌죠. 그래서 저와 관계가 지속적으로 악화되었죠. 혹시 모르니 그점에 유의해서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그러더니 여름은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건너편의 차진욱은 여름의 마지막 한 마디를 듣고 나서 얼음처럼 굳어졌다.최근 들어서 강신희는 점점 비이성적이고 냉철하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그것을 차진욱은 집안 일이 빨리 해결되지 않아서 마음이 산란한 것으로 생각했다.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면….마음 속에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이때 서재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별안간 강신희가 쳐들어 왔다.“차진욱, 여기 숨어서 누구랑 통화하는 거죠? 민욱이
“그게 왜 네 탓이겠니?”강시희가 얼른 강여경의 손을 잡으며 위로했다.“강여름의 악독함을 너무 얕잡아본 것 같아요. 처음부터 그것들에게 일말의 기회도 주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정말 그런 것 같구나.”그 말을 듣더니 강신희가 차진욱을 노려보았다.“당신 부자가 몰래 강여름하고 접촉을 해서 그래요. 민우가 너무 순진해서 그 여우에게 홀랑 속아 넘어갔는지도 몰라요.”“이러고 우리가 다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일단 민우를 찾고 나서 얘기합시다.”차진욱이 목소리를 낮추었다.강여경이 입술을 깨물었다.“강여름이 인정을 안 할까 봐 걱정이네요.”그 말이 강신희를 자극했다.“고것이 인정하지 않겠다면 송태구를 찾아갈 수 밖에 없지. 송태구가 강여름과 최하준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면 이 나라의 항편을 모두 끊어버리겠어.”차진욱이 미간을 찌푸렸다.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결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만히 두 모녀를 보더니 의미심장한 눈빛이 강여경의 얼굴에서 잠시 머물렀다.이전에는 강여경이 수작을 부리는 정도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강여경이 강신희의 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굳이 그런 일로 부부사이를 상하고 싶지 않았다.그 정도 잔꾀 부리지 않는 사람이 있겠나 싶었다.그러나 바로 차진욱의 코 앞에서 그런 잔꾀로 도발을 하다니 자의식 과잉이 아니겠는가?차진욱이 그 따위 잔 꾀에 넘어갈 정도로 어리석은 인간이었다면 지금의 자리까지 오를 수도 없었을 것이다.표면적으로는 자신과 강신희를 말리는 듯했지만, 행간을 자세히 읽어보면 은근히 이번 일이 강여름의 소행이라고 암시하고 있었다.방금 강여름과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어 보지 않았더라면 정말 강여경에게 넘어갔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차민우가 강여름의 손에 있는 경우 별로 걱정거리가 못 되었다.그러나 진상이 강여름의 말대로라면 그거야 말로 골치 아픈 일이 될 것이다.차진욱은 즉시 부하에게 동성으로 가서 조사해 보라고 일렀다.점심 때쯤 부하에게서 소식이 왔다.“동성 경찰서에서 윌의 시신을 찾았습니다.
차에 타는데 보조석 문이 열리더니 비서 닐슨이 올라탔다.“지금 대통령실로 가십니까?”차진욱이 닐슨을 흘끗 쳐다봤다.“보디가드들은 언제쯤 회복되겠나?”닐슨이 흠칫했다.“뼈가 부러진 경우가 많아서 최소한 2~3개월은 걸리겠습니다.”“2~3개월이나 걸린다고?”차진욱은 골치가 아팠다.“내가 이 정도로 희롱을 당하게 될 줄은 몰랐는걸.”“강여름이 회장님을 협박하려는 목적이라면 도련님의 목숨은 위험하지 않을 겁니다.”닐슨이 위로했다.“자네도 강여름의 소행이라고 생각하나?”차진욱이 아무런 표정이 없는 채로 입만 웃으며 물었다.“그러면… 아닙니까?”닐슨이 의아해서 물었다.“당연히 아니지. 그러나 와이프 앞에서는 모른 척 하게.”예전에는 40%정도 여름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면 지금은 80%정도는 믿음이 가게 되었다.아무리 생각해도 강시희에게서 강여경 같은 딸이 나왔다고 믿기 어려웠다.“남은 보디가드 둘 있지? 그 둘에게 사모님을 잘 살피라고 해. 만약 사모님이 뭔가 하려고 하면 바로 나에게 알리라고 하고. 하지만 절대 내 와이프와 강여경에게 의심을 사서는 안 되네, 알겠나?”차진욱이 당부했다.닐슨은 깜짝 놀랐다.“사… 사모님을 감시하라고요?”“그래.”******별장.차진욱이 떠나자 강신희가 일어섰다. 갑자기 머리가 빙 돌았다.“엄마, 왜 그러세요?”강여경이 얼른 다가가 부축했다.“어제 민우 일로 잠도 못 자고 쉬지도 못 해서 그런가 보다.”“그러게요. 엄마는 늘 오빠를 아끼셨잖아요.”강여경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저도 너무 걱정돼요. 하지만… 아무래도 VIP가 강여름을 잡아들이지는 않을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VIP의 조카랑 최하준이 절친이잖아요? 미리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하면 최하준에게는 도움이 될 ㄱ예요.”“네 말이 맞다.”강신희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오빠가 오래 잡혀 있을수록 더 위험해질 것 같아요.”강여경이 입술을 깨물었다.“저쪽에서 어머니의 아들도 인질로 잡고 어머니의 부하도 살해했는데 그냥
“돈만 있으면 못할 일이 있나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들은 다치지 않게 해서 데려올게요.”강여경이 다시 안심시켰다.******병원.여름도 차민우의 일을 생각하니 걱정이 되었다.마음이 놓이지 않아 이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민우가 동성에서 실종되고 비서는 사망해다는 소식을 들었다.“써머, 차민우랑 대체 무슨 사이인데요?”이지훈이 호기심에 차서 물었다.“아버지가 다른 제 동생이에요.”여름이 한숨을 쉬었다.“양유진이 한 짓 같아요. 양유진 집안이 지금 동성에서 분위기가 어떤가요?”“그 집요?”이지훈이 혀를 찼다.“우리 이성이 동성에서는 제일 큰 거 알죠? 그런데 진영그룹이 물 들어오기 무섭게 노를 저어서 지금은 동성의 90%는 양유진에게 붙어서 먹고 삽니다. 우리 이성에도 손을 뻗치고 있어요. 하지만 난 그 녀석이 마음에 안 들어서 말이죠. 진영그룹에서 우리 이성의 발을 자꾸 걸고 넘어지니…. 그것만 아니었으면…”“아니면 뭐요?”여름이 다급히 물었다.이지훈이 답답한 듯 말을 이었다.“리마랑 협력하지 않았으면 우리 이성은 동성에서 버티지도 못했을 거예요. 그냥 서울로 올라가 버릴까 싶기도 했는데 하준이 당하는 걸 보고 마음 접었죠. 괜히 자기들에게 폐 끼칠 수는 없잖아요.”“그런 얘기를 왜 우리랑 안 했어요?”여름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양유진이 동성에서도 세력을 확장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알았다면 차민우에게 동성에 가보라고 할 때 귀와 눈을 더 조심하라고 했을 텐데….’차민우도 차마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당당하게 대놓고 여기저기 물어보고 다녔으니 양유진의 귀에 말이 들어갔을 것은 불 보듯 뻔했다.“여름 씨랑 하준이는 자기 일 해결하기도 바쁜데 내가 숟가락을 얻을 수 있나요?”이지훈이 한숨을 쉬었다.“양유진 자식, 아주 약을 쳐도 쳐도 죽기 않고 또 기어 나오는 바퀴벌레 같다니까요. 짜증 나 죽겠어요. 조심해요.”여름은 씁쓸하게 우었다. 지금 하준의 상황은 말하지 않기로 했다.이때 뒤에서 간호사가 외쳤다.
상혁이 간식거리를 가져오자 하준은 초콜릿을 맛나게 먹었다.상혁은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여울이가 누굴 닮았는지 완전히 알겠네요.”‘회장님이 이렇게 초콜릿을 좋아하시는지 몰랐네.’여름은 하준이 어렸을 때 내내 보모에게 학대 당하고 정신병원에 갇히는 바람이 어디서도 초콜릿을 마음대로 먹어보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나마 지금은 행복한 유년을 보낼 수 있어서 다행인지도 몰랐다.오후가 되자 이주혁과 송영식, 윤서가 왔다.하준은 침대에서 진지하게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었다. 손에는 초콜릿 쿠키를 들고 어찌나 몰입했는지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몰랐다.“아니, 하준아. 왜 이렇게 되었어?”송영식은 마음이 쎄했다.초코 과자를 먹으며 애니메이션을 보는 하준이라니…. 내가 아는 그 하준이가 맞나?송영식이 아무리 떠들어도 하준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과자를 먹으며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윤서가 우유와 초콜릿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이제야 왜 이걸 사오라고 했는지 알겠다.”“여기 둬.”여름이 윤서가 들고 온 것을 받았다.윤서가 여름의 어깨를 두드렸다. 친구가 너무 안쓰러웠다.“넌 괜찮니? 너랑 하준 씨는 어쩜 이렇게 쉬운 길이 하나도 없냐? 그냥 최하준을 놓고 떠나는 건 어때?”“무슨 소리야?”송영식은 그 말을 듣자 기분이 확 상했다.“하준이가 저 지경이 됐는데 불쌍하지도 않아?”“불쌍하지. 그렇지만 우리 여름이는 안 불쌍하냐고? 아직 한창 나이인데 최하준이 언제 회복될 지 누가 알아?”윤서도 기분이 언짢았다.“저렇게 운이 안 좋은 사람은 결혼을 안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리고 애초에 최하준이 백지안에게 속아넘어가지만 않았어도 지금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거 아냐?”송영식이 입을 벌렸다. 살짝 당황한 듯했다.“그…그렇진 않을 수도 있지. 백지안이 이런 능력이 어디 있어?”“전에 최하준이 최면에 걸렸다고 얘기를 해도 안 믿었지? 그게 아니면 멀쩡한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이 지경이 되겠냐?”이주혁이 한숨을 쉬었다.
송영식은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면 하준이에게 연애도 가르쳐야겠네요. 그러면 곧 하준이랑 사귈 수도 있을 거예요.”“……”하도 어이가 없어서 윤서가 한 마디 했다.“IQ가 두 살 수준이라서 여름이를 이모로 생각한다는데 무슨 연애를 해? 이모랑 연애하라는 거야?”옆에서 듣던 여름은 깊이 상처받았다.윤서가 말을 이었다.“그리고 당신도 솔로로 30년을 산 주제에 누구에게 연애를 가르쳐? 됐다 그래. 괜히 멀쩡한 사람 망치지 말고 가만 계시지.”송영식의 태양혈이 불뚝거렸다.“왜 말을 그런 식으로 해?”윤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송영식을 흘겨보았다.“왜? 팩폭하니까 찔려? 사람이 이렇게 속이 좁다니까.”송영식은 불룩한 아내의 배를 한 번 보더니 심호흡을 하고 결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용히 핸드폰을 꺼내 게임 켜서 하준 옆으로 다가갔다.“야, 하준아. 게임 가르쳐줄까?”하준이 눈썹을 찡그렸다.“난 아직 아기인데.”“아, 말이 헛 나왔네. 쭌이라고 부를까?”송영식이 싱긋 웃었다.“애니메이션이 뭐가 그렇게 재미있냐? 게임이 훨씬 더 재미있…”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주혁이 핸드폰을 압수했다.“야, 뭐 하는 거야?”송영식은 불만이었다.“진짜 애도 아닌데 게임 좀 해도 되잖아?”“게임할 시간에 책 보여주고 교육 프로그램 보여주고 글씨 공부 시키는 게 나아. 지금 하준이는 2세 수준에서 교육을 새로 해야 한다고.”이주혁이 찬성할 수 없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너 지금 하는 꼴 보니 아기 태어나면 넌 교육은 손 안 대는 게 좋겠다. 네 와이프 말이 맞아. 괜히 멀쩡한 애 망치겠어.”“들었지? 자기 친구도 내 편이네.”그 말을 들은 윤서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주혁의 입에서 튀어나온 ‘네 와이프’운운하는 소리는 귀에도 안 들어온 모양이었다.송영식이 입을 비죽거리더니 할 수 없이 핸드폰을 집어 넣었다.다행히도 하준은 핸드폰에 관심이 없었다. 곧 화면 속 애니메이션 스토리에 빠져들었다.송영식과 윤서는 잠깐 앉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준은 숟가락에 있던 밥을 사방으로 뿌려서 테이블이 온통 밥풀 투성이가 되었다.“바보.”여울이 화를 냈다. 예전이 시니컬하던 하늘이의 말투와 똑같았다.하준은 눈을 깜빡이더니 여름을 향해 울음을 터트렸다.“나 바보래….”“아니야, 바보 아니지. 우리 쭌이 최고 똑똑한데.”여름이 얼른 하준의 머리를 안으며 여울에게 눈짓했다.“난 엄마가 전에 이렇게 가르쳐 줬을 때 한 번에 배워서 했는데.”여울이 입을 비죽거렸다.“과연 정말 한 번에 배웠던가?”하늘이 냉랭하게 뱉었다.“…어쨌든 아빠가 이 모양이 됐으니 내가 가르쳐야지, 뭐.”여름의 입가가 씰룩거렸다.“됐어. 얼른 먹어라. 아빠는 내가 먹일게.”그러더니 밥그릇을 들고 한 입씩 떠 먹였다.여울은 분했다.“내가 아기 때는 혼자서 먹어야 한다고 했으면서.”하늘이 여울을 흘겨 보았다.“남편이랑 너랑 똑같냐? 신경 꺼.”여울이 툴툴거렸다.“엄마에게 나는 아빠보다 못하구나.”“……”‘못 산다, 진짜. 하다하다 이젠 아빠도 질투하는 거냐?’“그만. 빨리 먹고 할머니랑 집으로 가. 내일 늦지 않게 유치원 가고.”여름이 말했다.쌍둥이는 얌전히 밥을 먹었다. 여울은 가려다가 테이블의 초콜릿을 집어 들었다.“이런 거 먹으면 이빨 썪으니까 내가 보관해 줄게요. 여기 자리도 없네.”그것을 본 하준은 또 울었다.“싫어! 쟤가 내 거… 사탕 가져간대….”여울이 진지하게 말했다.“이런 거 많이 먹으면 이빨에 벌레 생겨. 나중에 이빨 아프고 못 생겨 진다. 배 속에도 막 벌레 자라고. 그러면 여름이가 싫어할 텐데.”“여름이나 나 좋아하면 좋겠ㅇ….”하준은 깜짝 놀라서 얌전해 졌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하준을 보니 여름은 마음이 녹아버릴 것 같았다.“초콜릿 하나만 가져가. 아빠 친구가 선물한 거거든.”여름이 딸에게 말했다.“괜히 놀래키지 말고. 아빠가 몸은 어른이니까 초콜릿 좀 먹어도 괜찮아.”여울이 발을 굴렀다.“흥! 아빠만 좋아하고!”“아유, 아빠는 아프잖아?
“하지만 뚱뚱이가 되고 싶지는 않다. 멋져서… 여름이한테… 사랑받고 싶어.”하준이 고개를 들고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맑은 두눈에 여름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하준의 시선에 여름의 마음은 달달하게 녹아갔다.사고 후에 검사와 수술을 위해서 바싹 깎아 버린 머리 때문에 하준의 미모가 더 직설적으로 드러나 여름은 더욱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전에는 말 없이 엄숙한 모습이 잘생겼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지금 보니 이런 천진난만한 모습도 너무 귀여웠다.“응, 지금 난 널 아주 좋아하거든.”여름은 참을 수가 없어서 하준의 입술에 키스했다.하준은 숱 많은 속눈썹을 깜빡이더니 바로 여름의 입술에 뽀뽀를 되돌렸다.“나도 좋아.”남녀간의 사랑이 아니라 순수한 ‘좋아한다’는 말인 걸 알면서도 여름은 심장이 두근거렸다.다시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었다.“쭌, 입 벌려 봐.”하준은 어리벙벙했다.그러나 더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순진하게 여름이 시키는 대로 했다.“쭌, 눈 감아….”“응.”하준은 얌전히 눈을 감았다.여름의 입술이 부드럽고 달콤해서 하준은 너무 좋았다. 얼마나 키스를 했는지 모른다. 하준은 자기 몸이 점점 뜨거워진다고 느꼈다.그런데 그때 여름이 입술을 떼었다.하준은 입술을 핥았다.“여름이 입술이 초콜릿보다 맛있어.”여름은 민망해서 얼굴이 뜨거워졌다. 자기가 변태가 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아이가 되어 버렸는데도 가만 두질 못하고….’“쭌, 그건 뽀뽀라고 하는 거야. 나하고만 하는 거야. 다른 사람하고는 뽀뽀하면 안 돼.”“왜?”하준이 멍하니 물었다.“그게… 여긴 내 거 거든. 알겠어?”여름이 하준의 매끈한 입술을 톡톡 건드렸다.“응, 난 네 거….”아는지 모르는지 하준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헤에~하고 웃었다.태양처럼 찬란한 미소였다.여름은 심장이 녹아버릴 지경이었다.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자, 밥 먹여줄게.”하준은 얌전히 한 그릇을 다 비웠다. 하준이 다 먹자 여름도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옷 소매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