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준은 집에서 나오자마자 차윤에게 전화했다.“좀 있다가 애들 좀 데리고 외삼촌 댁 근처에 매복해. 신호를 들으면 바로 들어오면 돼.”차윤은 깜짝 놀랐다.“외삼촌 댁에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응.”하준은 여러 소리 하지 않았다.“30분이 지나서도 나오지 않으면 바로 쳐들어 와.”“알겠습니다. “차윤은 하준이 하는 말의 행간에서 조심스러움을 읽어냈다.“경찰에 신고해야겠습니까?”“그럴 필요는 없어. 최윤형이 납치된 것 같다.”아까 최진이 하는 말에는 허점이 수두룩했다. 최진이 집안에 유일한 아들이긴 해도 할아버지께서 최진에게 무슨 가보를 물려주신 적은 없다.그런데 가보 핑계를 대며 갑작스럽게 불러내는 것을 보니 누군가에게 위협받는 상황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최진을 위협할 인물이라면 뇌리를 스치는 사람이 몇 있었다.40분 뒤 하준의 차가 최진의 집에 들어섰다.고연경과 최진이 정원에 있었다. 두 사람 조심스러웠다. 최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늦은 시간에 불러서 미안하구나.”하준은 심드렁한 눈으로 최진을 흘끗 보았다. 스쳐지나가는 눈빛인데도 최진은 온몸이 떨렸다.“사람을 속여서 불러냈으면 이제 슬슬 진짜 이유를 말씀해 주시죠.”당황한 듯 최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고연경은 하준을 노려보았다.“그래, 거짓말 좀 했다. 어쨌든 우리는 너랑 강여름 때문에 연루되는 바람에 우리 윤형이는 지적 장애가 됐어. 그런데도 걔를 끌고 가서 놔주지 않는단 말이다.”‘역시….’하준의 추측이 맞아 들었다.“누굽니까?”“양…양유진이 잠깐 보고 싶다더구나.”최진이 턱으로 거실을 가리켰다.“걱정하지 마라. 비서 하나만 데리고 왔더라. 그 인간이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윤형이를 꼭 좀 구해다오. 오늘 외숙모랑 잠깐 쇼핑하러 간 사이에 윤형이를 꼬여낸 모양이다.”하준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대체 양유진이 무슨 수작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준을 상대하려고 했다면 둘만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양유진 이자식이 대체 뭘 어쩌려고….’
하준은 제자리에서 꼼짝 않고 서서 한껏 상대를 도발했다.그러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갑자기 온 집안에 기괴한 음악이 울렸다. 뭔가 산스크리트어 같은데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었다.‘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데….’정신을 집중해서 어디서 들었던 음악인지 떠올려보려고 했는데 돌연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이어서 2층에서 별처럼 등이 하나 비쳤다.그 불빛을 바라보니 다시 구석에서 불빛이 하나 더 빛났다. 두 불빛이 끊임없이 번갈아 가며 비추니 정신이 혼란했다.하준은 바로 눈치 채고 눈을 감았다.이어서 2층에서 공허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최하준, 기억해라. 백지안은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야.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이 목소리는…?’하준은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머리 속이 웅웅 울렸다. ‘아니야, 아니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여름이야. 아니라고!’“백지안, 수작 부리지 마!”하준은 어둠 속에서 비틀거리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려고 했다.그러나 그곳에 닿기 전에 뭔가에 걸려서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그 공허한 목소리는 여전히 계속됐다.“네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강여름이다. 강여름이 널 꼬드겼어. 강여름은 너를 꼬드겼다. 꼬드겼어…”기억의 창문이 탕하고 무언가에 의해서 열린 것 같았다.머리가 극심하게 아팠다.얼굴은 온통 하얗게 질렸다.간신히 남은 이성의 끈에 기대어 생각해 보니 양유진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그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 소리는 악마의 속삭임처럼 귀를 파고 들었다.뿐만 아니라 머리 속에서 수많은 자신의 목소리가 울렸다.기억 속에서 익숙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한 목소리였다.“이혼하고 싶습니까? 좋습니다. 3년 동안 밥을 해주면 이혼해 주겠습니다.”“강여름, 당신이 정말 날 사랑한 적이 있나?”“당신이 신경 쓰지 않는대도 난 신경 쓰여. 당신이 날 미워한다는 거 알아. 하지만 어쩌겠어. 그래도 난 당신을 놓아줄 수가 없어. 강여름이라는 독에 중독되
“어? 아, 그래.”여름은 다시 페이지를 넘겼다.“신데렐라는 발자국을 따라 걸어갔어요. 이때 연못에서 뿅하고…”한창 다시 그림책을 읽는데 침대에 놓아둔 핸드폰이 울렸다. 차윤이었다.“회장님이 큰일 났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는 중입니다.”차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름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무슨 일이에요? 저녁에 외삼촌 댁에 간다고 했는데?”“거기서 일이 생겼습니다. 일단 주민 병원으로 오시죠.”차윤 쪽도 어지간히 다급한 목소리였다. 몇 마디 하고는 얼른 전화를 끊었다.“왜요? 아빠에게 무슨 일이 생겼어요?”여울이 놀라서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무슨 일에도 늘 시큰둥하던 하늘의 얼굴도 상당히 어두워졌다.“우리 같이 가요.”“너무 늦었어. 엄마가 거기 가서 너희들까지 돌볼 정신이 없을 것 같아. 일단 집에 있어. 엄마가 가보고 심하면 상혁이 아저씨를 보낼게. 심각하지 않으면 내일 아침에 엄마가 집으로 오고.”여름은 두 아이를 보며 얼른 정신을 차렸다.“엄마….”“착하지?”여름이 엄한 얼굴을 해 보였다.하늘과 여울도 눈치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여름은 얼른 차를 몰고 병원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한병후와 최란에게 알렸다.다급히 병원에 도착해 보니 차윤과 최진, 고연경이 응급실 앞을 지키고 있었다. 다들 안색이 매우 좋지 않았다. 여름이 오는 것을 본 최진 부부의 시선은 심하게 흔들렸다.“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여름은 최진 부부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고 바로 차윤에게 물었다.차윤이 입을 열기도 전에 최진이 미안한 듯 입을 열었다.“미안하다. 다 우리 탓이야. 양유진이 윤형이를 납치했어. 하준이를 우리 집으로 불러들이지 못하면 윤형이를 가만 두지 않겠다는 거야.”고연경이 입술을 바들바들 떨었다.“하준이를 해칠 생각은 없었다. 양유진이 그냥 하준이랑 얘기를 좀 하겠다고 했어. 딱히 누굴 데려오지도 않았거든. 그래서 뭐 혼자서 하준이를 어떻게 하겠나 싶었거든. 아니, 그렇게 노려보지 마라. 어쨌든 우
“수치심도 하나 없는 어른이오?”여름의 얼굴에 분노가 가득했다.“지금 말씨름할 정신 없습니다. 일이 이지경이 되도록 경찰에 신고는 하셨나요? 윤형 씨는 돌아왔고요? 양유진은 어디 있나요? 하준 씨에게는 왜 사고가 났나요?”주르륵 연달아 날아오는 질문에 고연경은 말문이 막혔다.최진이 더듬더듬 답했다.“윤형이는 돌아왔따. 하준이가 병원으로 이송되는 길에 집사에게서 윤형이가 돌아왔다는 전화를 받았어. 물어보니 누가 술래잡기를 하자고 데려갔다더구나. 그… 그러니 경찰에 신고하기도 애매하고. 그냥 오후에 잠깐 안 보였던 것뿐이라서.”양유진이 수작을 부려 최양하를 꼬여내서 데려 가긴 했지만 실종 24시간이 안 돼서 경찰에서도 실종 사건으로 접수해주지 않았을 것이는 점은 이해가 됐다.“하준 씨에게 사고가 났을 때 양유진은 현장에 있었을 거 아닙니까?”최진은 곤란한 듯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 지 알 수가 없었다. 차윤이 답했다.“회장님에게 사고가 났을 때 양유진은 옥상에서 달을 구경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얼굴도 본 적이 없다고 주장합니다.”여름은 돌아버릴 것 같았다.“그러면 대체 어떻게 사고가 났다는 거예요?”차윤이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회장님은 삼촌 댁에 가시면서 윤형 님이 납치됐을 거라는 것을 예상하셨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애들을 데리고 밖에서 대기하라고 하셨어요. 30분이 지나도 연락이 없으면 바로 인원을 데리고 진입하라고요. 제가 들어갔을 때 집안은 온통 불이 꺼져 있었습니다. 회장님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어요. 이마에서는 피가 나오고 이미 기절하신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바로 병원으로 모셨습니다. 오는 중에 상처를 살펴봤는데 다툰 흔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마에 난 상처가 유일한 부상 부위였습니다.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았습니다.”여름은 그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이상한 사건이었다.“집에 불이 꺼져 있었다고요?”차윤이 최진 부부를 돌아보았다.최진이 난감한 듯 답했다.“나도 잘 모른다. 양
“차윤 씨, 일단 현장에 한 번 가봐 주세요. 양유진의 범죄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있는지 좀 찾아봐 줘요.”여름이 말했다.“알겠습니다.”차윤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최란과 한병후가 다급히 들어왔다.상황을 듣더니 한병후는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최란을 나무랐다.“어떻게 다들 그렇게 이기적인가? 저러고도 삼촘이야? 자기 아들만 소중하고 남의 아들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 없다는 건가?”지적을 당한 최란의 얼굴은 매우 난감해졌다. 한 마디도 반박할 수 없었다.그 모습을 보고 여름이 끼어들었다.“이러지 마세요. 일단 하준 씨가 깨어나면 다시 말씀 나누시죠,”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이주혁이 안에서 나왔다. 하준의 치료를 위해 이주혁이 직접 나섰던 것이다.“걱정하지 마십시오. 하준이 전신 검사를 마쳤고 머리는 CT를 찍었는데 가벼운 뇌진탕입니다. 별다른 건 없어요.그 말을 듣고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름이 물었다.“언제쯤 깨어날까요?”“몇 시간 지나면 깨어날 겁니다.”이어서 하준은 VIP병실로 옮겨졌다.여름은 한병후와 최란에게 돌아가서 쉬라고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하준이 깰 때까지 한사코 떠나지 않으려고 했다.병원에서 한 시간을 조금 넘게 대기하고 있는데 여름의 핸드폰이 울렸다. 양유진이었다.너무나 혐오스런 상대라 받고 싶지 않았지만 하준을 위해서 일단 받기로 했다.“오늘 저녁 일은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겠어.”여름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괜히 무고한 사람 잡지 말라고. 난 오늘 저녁에 최하준 얼굴도 못 봤어. 최하준이 들어올 때 난 옥상에서 맹 의원이랑 전화를 하고 있었어. 어떻게 사람이 통화를 하면서 다른 사람이랑 이야기를 나누겠나? 경찰에 신고할 테면 하라고 난 명백하게 통화기록을 제출할 수 있으니까.”양유진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당신이 직접 손대지 않았다고 다른 사람도 가만히 있었으리라는 법은 없지. 두 사람이 현장에 있었다며? 당신 말고도 비서가 있었다던데? 그리고, 그 집 등이
‘아줌마라니…?’여름은 깜짝 놀랐다.‘나더러 하는 소리인가?’“하준아, 왜 이러니?”최란과 한변후도 바로 다가왔다.“우엥, 저리 가! 누구세요?”하준은 이불로 자심을 가리며 커다란 몸을 최댛나 말고는 덜덜 떨었다.여름은 쿵하고 심장이 떨어졌다. 최란과 한병후라고 반응이 다르지 않았다.한병후는 다소 조급하게 이불을 젖혔다.“하준아, 에비다.”“저리가! 무서워!”하준은 놀라서 어린애처럼 울었다.“여기 싫어. 집에 갈래.”“우리가 네 엄마 아버지 아니냐?”최란이 급히 하준의 손을 잡았다.“아니야! 엄마 아니야. 우리 엄마 아빠는 이렇게 안 늙었어.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생겼는데….”하준은 입을 비죽 내밀고 있는 힘껏 손을 빼서 품안에 숨기며 다른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했다.‘할머니 할아버지라니….’한병후와 최란은 돌처럼 굳어져버렸다.아직 병원에 남아 있던 이주혁이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왔다. 하준의 그런 모습은 이주혁조차도 놀라게 만들었다.하준은 이주혁을 보더니 놀라서 대성통곡했다.“의사 선생님은 싫어! 무서워!”하준은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나마 착할 것 같아 보이는 여름을 보더니 치맛자락을 잡았다.“나 주사 무서워.”여름은 하준의 그 얼굴을 돌아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여울이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죽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꾹 참는 수밖에 없었다.“그래, 주사 맞지 말자. 의사 선생님이 그냥 머리 좀 보려는 거야.”여름은 간신히 하준을 달랬다.“잉… 나 머리 괜찮은데. 주사 안 맞을래.”하준은 힘껏 고개를 저으며 무섭다는 시늉을 했다.“착하지. 주사 맞지 않는다고 아저씨가 약속할게. 같이 게임 하러 갈 거야.”이주혁도 기괴한 느낌을 꾹 누르고 어린애 대하듯 말했다.여러 사람이 연달아 달래서 겨우 하준을 안정시켰다. 곧 뇌신경센터의 담당의가 번갈아 가며 살펴보더니 한 명이 입을 열었다.“가벼운 뇌진탕 외에 확실히 뇌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런 병세는 저희도 처음 봅니다. 내부적인 원인
여름은 3년 전 백지안이 하준에게 치료를 해준답시고 벌였던 수작을 모두에게 털어놓았다.여름과 하준은 그 일을 잊고 지냈으나 백지안이 양유진과 다시 결탁해서 이런 짓을 벌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그 말을 들은 최란은 완전히 경악했다.“어쩐지 그때 하준이가 갑자기 곧 죽어도 여름이와 이혼하고 백지안이랑 결혼하겠다고 날뛴다 싶었다. 난 백지안이랑 남은 정이 있어서 그런 줄 알았더니….”“제 잘못입니다. 애초에 하준이 병을 치료하겠다고 백지안을 끌고 들어오지 말았어야 해요.”이주혁은 너무나 후회됐다.“그런 소리 마. 자네만 탓할 수도 없지. 내가 진작에 어미로서 책임을 다했더라면 백지안 같은 인간이 허를 찌르고 들어올 수는 없었을 거야.”최란도 마음이 괴로웠다.“말로는 하준이를 사랑한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전부 거짓이었다. 정말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렇게 악랄한 짓은 할 수 없지. 자기가 가질 수 없다고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다니.”“내가 바로 사람을 보내서 그 물건을 잡아와야겠어.”한병후가 어두운 안색으로 말했다.“증거가 없습니다. 어제 아무도 백지안이 외삼촌 댁에 나타난 것을 직접 본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아무래도 양유진이 비서라고 했던 사람이 백지안이 아닌가 싶습니다. 전기를 끊고 창문을 가리는 등 행위가 모두 최하준에게 최면을 걸기 위한 수작이었을 겁니다. 양유진은 맹 의원을 현장 부재 증명으로 쓸 거고요.”여름도 너무 후회가 됐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애초에 하준과 같이 나갈 것을 그랬다 싶었다.“그러면 이제 어쩌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아무리 온화한 한병후라고 해도 이쯤 되자 미쳐버릴 지경이었다.“그냥 이대로 하준이가 저렇게 지능이 떨어진 채로인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한병후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높아졌다. 손가락을 빨던 하준은 한병후가 화내는 모습을 보더니 놀라서 더 크게 울었다.“우에엥, 저 할아버지 무서워.”“괜찮아. 내가 있잖아. 아무도 널 다치게 못해. 그냥 나
최란과 한병후는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다.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다가 최란이 여름에게 다가갔다.“하준이의 이런 상태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다. 어쩌면 평생…”“그런 약한 말씀하지 마세요.”여름이 최란의 말을 끊었다. 사실 여름도 막막하기야 매한가지였다.하준은 머리 자체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컴퓨터의 프로그램이 오류 난 것과 비슷한 상태였다. 지능은 퇴화했지만 이주혁이 최선을 다하겠다고는 했지만 치료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는 것은 여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쉽게 치료될 것 같았으면 하준은 진작에 그간에 혼란된 기억을 복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최란이 괴로운 듯 여름을 바라보았다.“너랑 하준이가 그 많은 일을 다 겪고 여기까지 오기도 쉽지 않았지. 그래서 난 너희들이 잘 지내고 아이까지 생겨서 너무나 기뻤단다. 하지만 지금은 너희들이 재혼을 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사귀긴 했어도 하준이가 네 남편도 아니고, 너도 하준이 아내가 아니다. 저렇게 된 하준이를 돌보는 것은 이제 부모 된 우리의 몫이다. 네 의무가 아니라.”“무슨 말씀이세요?”여름이 입을 열었다. 물론 그런 말을 하리라는 예상을 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너도 지쳤을 텐데 떠나고 싶다면 언제든 떠나도 좋다. 아무도 너에게 하준이를 돌보라는 소리는 하지 않을 거다. 저 상태가 얼마나 지속될지 아무도 모르잖니? 몇 년이 될 수도 있고 평생 저렇게 지낼 수도 있다.”그러게 말하면서 최란은 고개를 숙여 눈가의 눈물을 닦았다.“넌 아직 한창 나이가 아니냐?”“그런 말씀 마세요. 저렇게 됐다고 하준 씨를 떠나지는 않을 거예요. 너도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못 가요. 남아서 함께하겠습니다.”우유를 마시는 하준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지금은 지능이 떨어졌다고 해도 다시 좋아질지도 모르잖아요? 다시 회복할 수 있든 아니든 하준 씨가 다시 날 사랑하게 만들겠어요. 노력을 해서도 기대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후회하지는 않을 겁니다.”최란은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