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준이 가만히 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날뛰던 심장이 그제야 겨우 가라앉았다.지금 가장 힘든 사람은 실은 자신이 아니라 여름일 터였다.저렇게 더러운 인간과 부부가 되고 싶은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테니까.“가자. 영식이네 할아버지께 인사시켜 줄게.”하준이 여름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곁눈질로 송영식을 보던 윤서가 갑자기 엄지를 치켜올렸다.“잘하던데!”“크흠크흠!”신이 난 송영식은 엉덩이에서 꼬리가 흔들리는 게 보일 지경이었다.“당연하지. 나도 잘하는 게 많다고.”“하긴, 그 입담을 이길 사람은 거의 없지. 전에 나랑 여름이한테 악담 날릴 때는 정말 집어 던지고 싶었는데 내 편에 있으니 이렇게 속이 시원할 수가 없네.”윤서가 송영식을 바라보는 눈이 이제는 매우 부드러워졌다.송영식은 대체 윤서가 자기를 칭찬하는 건지 욕하는 건지 헷갈려서 어정쩡한 얼굴이 되었다.******여름은 하준과 함께 한 바퀴를 돌더니 마지막에는 호텔 직원의 안내에 따라 펜트하우스로 이동했다.오늘 연회는 2개 층에서 진행이 되었다.한 층은 귀빈들이 먹고 마시고 노는 곳이었고 다른 한 층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당연히 다들 알다시피 송영식의 집안에서 대통령이 당선되었으니 펜트하우스에는 VIP가 있었다.방앞 에 도착하자 비서가 나오더니 곤란한 얼굴로 여름을 쳐다보았다.“VIP께서는 최 회장과 따로 할 말씀이 있습니다.”“그러면 저는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여름은 즉시 알아들었다. 송태구와 최하준 사이의 일은 상당한 기밀일 테니 다른 사람에게 들려줄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연회장으로 가지 말고 이 층에서 기다려.”하준은 여름이 양유진을 만날까 봐 그렇게 당부하고는 들어갔다.여름은 하릴없이 복도에서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았다.초고층인 호텔 복도에서 전면창으로 내려다보니 도시의 불빛이 별처럼 반짝여 너무나 아름다웠다. 다만 여름은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바짝 다가갈 수는 없었다.한동안 그렇게 걸어 다니다가 쭉 뻗어나간 발코니를 보았다.
여름은 흠칫했다.“뭔가를 아시는 것 같네요.”차진욱은 입을 다물었다.여름이 웃었다.“제가 이렇게 바보라니까요. 여기 와서 장기를 두실 정도면 저희 같은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레벨이실 텐데. 최소한 VIP급은 되신다는 뜻이니까요.”“날 시험하지 말게.”차진욱이 고개를 돌려 여름을 흘끗 쳐다보았다. 바디 라인을 따라 선이 떨어지는 드레스를 입은 여름을 보니 저도 모르게 젊은 시절의 강신희가 떠올랐다.“앉게. 이 장기판이나 한번 봐주겠나?”여름은 스스럼 없이 다가갔다.장기라면 여름도 조금은 알았다.그러나 이번 대국의 판세를 보니 차진욱은 이미 외통수에 걸린 듯 보였다.“지금 누구랑 장기를 두고 있었는데 거의 질 것 같단 말이야. 뭐 좋은 수가 없겠는지 한 번 봐주지.”차진욱의 푸른 눈이 곤란한 빛을 띠었다.“난 사실 장기는 잘 모르거든.”“도와드리면 뭔가 제게도 떨어지는 게 있나요?”여름이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차진욱은 여름을 쓱 훑어보았다.“아주 밀당의 귀재인데?”“보통 분이 아니신데 뭘 주신대도 저한테는 큰 이득일 것 같은데요. 기회를 잡았으니 놓치고 싶지는 않네요.”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그리고 아마도 이런 분과 장기를 두실 정도면 상대방도 보통 분은 아니실 것 같은데…. 대통령 정도 되는 분이 아닐까 싶네요”차진욱이 웃었다. ‘이거 아주 큰 걸 내놓으라고 하게 생겼군.하긴 강여경도 신희에게서 이런저런 이득을 보고 있잖아?’여름은 당당한 태도로 영리하게 상대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아내고 하니 싫을 리가 없었다.“대통령을 이기게 도와드리는데 떨어지는 떡고물도 없다면 너무한 거 아닌가요?”여름이 눈썹을 찡긋했다.“좋아. 내가 이 판만 이기게 해준다면 앞으로 자네가 곤경에 처했을 때 내가 사람을 하나 구해주지. 딱 한 사람이야.”차진욱은 잠시 생각해 보다가 말했다.“좋습니다.”여름이 끄덕였다. 시원스럽게 다가와서 허리를 숙이고는 차진욱의 앞에 있는 말을 하나 움직였다.차진욱은 잠시 들여다보다가 별안간 큰
‘안 되겠어.저 둘이 너무 가까이하게 두면 안 되겠어. 그냥 뒀다가는 계획을 다 망칠 거야.’나중에 그 사진은 잘 써먹을 생각으로 넣어두었다.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양유진은 얼른 다른 쪽으로 자리를 피했다.곧 송태구가 나타나더니 공손한 얼굴로 말했다.“오래 기다리셨습니다.”“괜찮습니다. 마침 저도 해법을 찾은 참이었습니다.”송태구가 보더니 깜짝 놀랐다.“절묘하군요. 차 회장님께 장기를 이렇게 잘 아실 줄은 몰랐습니다.”차진욱이 담담히 웃었지만 누군가에게 훈수를 받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사실은 오늘 전 대통령 일로 왔습니다. 어찌 되었든 대통령께서는 이제 바라던 권력을 손에 넣으셨으니 전 대통령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합니다. 제 얼굴을 봐서 좀 너그럽게 처리해 주셨으면 합니다.”“네. 회장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그래야겠지요. 하지만 일이 좀 커져서 두어 사람 정도는 본보기로라도 법대로 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중이 보는 눈도 있으니까요.”송태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차진욱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친척 중에 두어 명에게 손을 쓰시지요. 어쨌든 전 대통령도 저 때문에 최하준과 벨레스 쪽에 손을 썼던 거니까요….”그렇게 말하더니 의미심장하게 송태구를 바라보았다.“벨레스와 최하준 회장은 아주 깊이 얽힌 모양입니다.”그 말을 들은 송태구는 아찔했다. 앞에 앉은 사람은 자신도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운 상대였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국제 사회에서 우리나라의 지위가 수십 년 전으로 후퇴할 수도 있었다.“제가 회장님과 최 화장 사이의 원한 관계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시다시피 최 회장은 보통이 아닙니다. 전 대통령의 약점을 틀어쥐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저의 약점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툭하면 대통령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일국의 사회와 국민의 삶을 뒤흔들지는 말아주시기 바랍니다.”차진욱은 덤덤히 웃
강신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여경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열어보니 양유진이 사진을 두 장 보냈다. 차진욱과 강여름의 사진이었다.‘차진욱이 언제 강여름과 알게 되었지? 아무래도 보통 사이로 보이지 않는데?’순간적으로 양유진이 왜 이 사진을 보냈는지 눈치챘다.“왜 그러니?”강여경이 우뚝 멈춰 서자 강신희가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오늘 제 친구가 파티에 갔다가 강여름을 봤나 봐요. 그런데 걔가 왜 아저씨랑 같이 있죠?”강여경은 일부러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강신희에게 사진을 보여주었다.강신희는 사진을 보더니 굳어버렸다.차진욱은 내내 다른 여자에게 냉랭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사진 속 차진욱은 강여름과 바짝 붙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아주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웃고 있었다.수십 년 한 베개를 벤 사람이니 진심으로 웃는지 가식적으로 웃는지 정도는 보면 바로 알았다.그동안 일부러 차진욱에게 접근한 여자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강신희에 대한 차진욱의 마음은 변함없었다. ‘하지만 얘는… 나랑 너무 닮았어. 아니, 내 젊은 시절과 너무나 똑같아.’강신희는 관리를 잘해서 여전히 아름답기는 했지만, 남편이 자기와 닮은 더 젊은 여자를 만난다는 것은 매우 꺼려지는 일이었다.젊은 시절의 자신을 대신할 사람을 찾게 될까 봐 겁이 나는 것이다.아주 짧은 순간 강신희의 얼굴이 굳어졌다.순간 이전에 없던 당황스러움과 짜증이 몰려왔다. 그러나 강신희는 애써서 그 감정을 억눌렀다.강여경은 강신희의 안색을 곁눈질로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친구한테 문자해야겠어요. 강여름을 찍는 건 상관없지만 아저씨를 찍다가 들키면 이건 문제가 될 수 있잖아요.”그러고는 강신희의 눈앞에서 진지하게 답장을 보내는 척했다. 다 보내더니 장난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절대 아저씨한테는 말하지 마세요. 나중에 제 친구를 찾아서 뭐라고 하시면 어떡해요? 대신 강여름이 얼마나 간사한 애인지는 얘기해 경고해 주셔야 할 것 같아요. 걔가 엄마랑 워낙 닮아서 보고 나면 아저씨가 마음이 약해질
“당선자가 그렇게 직접 손 쓰고 싶어 하지 않더군요. 최하준에게 잡힌 약점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결국 우리 문제는 사적인 원한 관계인데 사회적으로 큰 동요를 일으킬 필요는 없잖겠어요?”차진욱이 하는 말은 사실이기도 했지만, 차진욱이 여름에게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강신희가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그래서 대체 언제 우리 어머니와 여경이의 복수를 할 건데요? 당신이 못 하겠다면, 아니면 하고 싶지 않다면 내가 직접 하겠어요. 굳이 당신 손을 빌리지 않아도 괜찮아요.”차진욱은 어쩐지 그 말이 귀에 거슬렸다.“허니, 최하준과 강여름을 신속히 해치우고 싶다면 송태구를 압박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 방법을 내가 몰라서 못 쓰는 게 아니잖아요? 하지만 국제 외교 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겠어요?”“당신은 그냥 손을 쓰기 실은 것뿐이에요. 강여름을 보니까 차마 손을 쓰지 못하겠나요? 어릴 때 내 모습을 너무 닮아서?”강신희가 갑자기 비꼬았다.차진욱은 침대에 앉아 싸늘한 얼굴로 불신의 시선을 보내는 강신희가 갑자기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마음이 싸해졌다.“무슨 뜻이죠?”“강여름이라는 애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나도 본 적이 있어요.”강신희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때로는 조카가 고모를 닮는 경우도 있거든요. 걔가 날 아주 많이 닮았더군요. 그러니 그런 강여름을 보고 당신이 마음이 약해졌을 수도 있죠. 당신이 걔를 내 젊었을 때처럼 생각하고 대하면 어쩌죠?”차진욱은 이제 무슨 소린지 알아들었다.그러나 화가 났다.“당신 눈에는 내가 그렇게 추잡스러운 인간으로 보였단 말이에요?”차진욱의 눈에 분노가 가득했다.강신희는 자신에게 화가 난 차진욱을 보자 갑자기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강신희가 아는 차진욱은 이렇게 자신에게 험상궂었던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강여름 때문에 자신에게 이렇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나가요!”강신희가 베개를 집어 던졌다.“나가라고!”차진욱은 아래턱에 힘이 들어갔다. “당신이 날
아침 식사 시간이 되었다. 평소에는 따스하던 분위기가 오늘은 남극처럼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강신희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어제 밤새워 생각해 봤는데 우리 집의 원한 관계에 대해서 당신 부자는 끼어들지 말도록 해요.”차민우가 계란을 삼키며 물었다.“뭘 어쩌시게요?”“엄마, 아저씨랑 왜 그러세요?”강여경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자기 계획이 이렇게 빨리 먹힐 줄은 몰랐다.다 그 약 덕분이었다. 강신희의 성격을 크게 바꾸어 놓지 않았다면 냉철한 판단을 하는 강신희가 이렇게 쉽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우리 일이니까 너희는 몰라도 된다.”강신희는 말을 마치더니 포크를 내려놓고 그대로 자리를 떴다.차민우가 조심스럽게 아빠를 쳐다봤다. 차진욱은 미간을 문지르며 차민우를 돌아보았다.“강여름에게 사람을 좀 붙여라. 무슨 사고 나지 않게.”“아빠….”차민우는 조금 놀랐다.“아니, 전에는….”“전에는 나도 네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만, 몇 번 만나보니 확실히 네가 무슨 생각인지 알겠더구나.”차진욱이 말을 이었다.“게다가 이번에 보니 최하준이 보통내기가 아니더라. 최하준을 해치우기 전에 강여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가는 그 녀석은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우리를 다 잡고 넘어갈게다. 지금 우리 쪽 인원이 여기에 다 와 있는 게 아니니 그렇게 되면 우리가 이 나라에서 무사히 빠져나가지 못할 수도 있어.”“역시 현명하세요.”차민우가 엄지를 치켜올렸다.******여름은 자기가 누구에게 노려지고 있는지도 몰랐다.화신을 윤서의 명의로 돌려놓고 난 뒤로는 출근을 할 필요가 없으니 매일 집에서 디자인을 하거나 아이들 보거나 했다.때로는 뉴스를 보기도 했다. 요즘 FTT는 눈에 띄지 않게 자중하고 있었다. 반면 진영그룹은 급 부상해서 지사를 세 군데나 내고 국내 백신 수요의 80%를 감당하는 수준이 되었다.그러면서 이미 손꼽히는 대기업이 반열에 올랐다.지금 양유진의 사업은 그야말로 떠오르는 해처럼 승
강여경이 뒤로는 검은 양복을 입은 외국인 중년 남자가 따라 들어왔다. 월스트리트 분위기가 났다.“강여경, 제정신이야? 여기가 어디라고 네가 함부로 들어와?”여름이 하준의 무릎에서 벌떡 일어났다.강여경이 이렇게 대대적으로 호기롭게 나타나자 여름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하준의 생각도 여름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훨씬 침착했다. 하준의 시선은 빠르게 강여경 뒤의 외국인 남자의 얼굴을 훑었다. 어쩐지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기억력이 워낙 좋은 하준은 바로 그 사람을 알아보고 눈빛이 어두워졌다.“아주 준비를 단단히 하고 온 모양이군.”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눈빛은 더욱 깊어졌다.“최 회장이 날 알아본 모양이군.”중년 남자가 씩 웃었다.“그래도 정식으로 인사하지. 줄 그레이슨이라고 합니다.”강여경은 하준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 득의양양하게 웃었다.“잘 들어. 내가 소개하지. 이분은 최고의 M & A 전문가인 줄 그레이슨이야. 줄 그룹의 도움으로 내가 FTT 주식의 50%를 매수했거든.”여름은 머리가 웅 울렸다. 금융 관련한 내용은 잘 모르지만 듣고 나니 망연자실해졌다.“말도 안 돼. FTT 주주가 왜 너에게 주식을 양도해?”그리고 그렇게 큰일을 어떻게 하준도 모르게 조용히 진행을 할 수 있겠는가?“적대적 M & A니까.”하준이 여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마음속 노기를 누르기라도 하는 듯 그 손은 매우 무거웠다.여름이 돌아보니 하준이 얼굴은 여전히 냉정했지만, 두 눈에서는 무한한 냉기가 솟아나고 있었다.여름은 하준이 너무 안쓰러웠다. FTT는 하준의 피와 땀이었다. 하준의 모든 것이었다. 힘겹게 세무조사를 뚫고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FTT의 반이 강여경의 손에 넘어가다니….“남이야 어떻게 손에 넣었든 네가 상관할 바 아니고. 어쨌든 이제 난 FTT에 대해서 반은 권리가 있어. 그러니까 난 이 사무실에 들어올 권리도 있고 심지어….”강여경이 의기양양하게 걸어가더니 두 손으로 책상을 짚었다.“이 사무실을 내가 쓸 수도 있다
“닥쳐!”여름이 강여경을 잡아채서 끌고 오자 강여경의 보디가드 둘이 놀라서 손을 멈췄다.“우리 아가씨를 놓아주지 않으면 너희들 다 죽게 될 거다!”강여경의 보디가드 중 하나가 외쳤다.하준이 상황을 보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이제 더 싸워봐야 의미가 없으니 동시에 손을 놓도록 하지.”여름이 하준과 시선을 맞추더니 강여경을 힘껏 강여경의 보디가드에게로 던져버렸다.강여경은 더 이상 귀한 집 아가씨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여름에게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저걸 죽여버려. 아니, 쟤 머리를 다 뽑아 와.”“저기….”보디가드 둘이 곤란한 듯 강여경의 뒤를 가리켰다.“왜? 뭐? 왜?”강여경이 돌아보니 문 앞에 하준의 보디가드들이 가득했다. 강여경은 아픈 볼을 부여잡고 불만스럽게 말했다.“강여름, 두고 봐. 내가 반드시 갚아주겠어. 오늘은 싸우러 온 게 아니라 경고하러 온 거니까. 오늘부터 FTT의 반은 내 거야. FTT의 경영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고.”강여경은 말을 이었다.“오늘부터 내 쪽 인력이 FTT로 들어오기 시작할 거야. 솔직히 난 여기 이 이사장이라는 인간이 마음이 안 들거든. 능력이 있는지도 의심스러워. FTT그룹이 100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그룹인데 연수익이 그거밖에 안 된다는 게 말이 되나? 여기는 경영진이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어. 대대적을 손을 봐야겠어.”하준이 싸늘한 눈으로 강여경을 잠시 쳐다보더니 냉랭하게 웃었다.“강여경, 그때 널 살려두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그때 일을 떠올리니 강여경은 얼굴이 창백해지고 말았다.너무나도 수치스러운 일이었다.하준이 계속 잔인하게 말을 이었다.“그냥 바다에 던져 버렸으면 좋았을걸.”“아쉽게도 난 살아남았거든. 최하준, 그때 네가 날 그렇게 잔인하게 괴롭혔을 때 나는 맹세했었어. 언젠가는 돌아와서 복수하겠다고. 두고 봐. 이건 시작에 불과할 테니까.”강여경은 그렇게 도발하더니 돌아섰다.“이제 난 천천히 회사를 좀 돌아봐야겠다. 아, 공장하고 랩도 아직 다 안 가 봤네.”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