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혁은 시아의 입을 통해서 뭔가를 얻어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결국 시아는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주혁 씨, 여경이를 소개해 줄게요. 여경이 배후의 인물하고 인맥만 터놓으면 주민그룹은 한 단계 더 위로 올라갈 수 있을 거예요.”시아가 용기를 내어 이주혁의 뒤로 다가가 허리를 감았다.이주혁은 가차 없이 시아의 손을 쳐냈다.“채시아, 강여경이 성형수술을 해서 다른 사람인 척하고 하준이 곁에 스며들어 간호했었던 건 알겠지? 강여경이 하준이가 먹는데 약을 타서 병세를 더 악화시켰었다고.”이주혁이 천천히 돌아섰다. 두 눈에서는 조금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정체가 거의 노출되었을 때 저는 슬쩍 빠져나가면서 무고한 사람을 불 속에 집어넣었어. 그래서 하준이에게 해를 끼친 게 지다빈이고 그 지다빈이 화재로 사망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지. 그것만 해도 천인공로할 짓인데, 추동현과 손을 잡고 그 화재 사망사건의 죄를 백소영에게 뒤집어씌운 인간이야.”시아가 덜덜 떨었다.그 사건에 대해서는 그저 조금 들었을 뿐 강여경이 그렇게 깊기 간여되어 있는 줄은 몰랐다. 게다가 백소영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줄은 전혀 몰랐다.더구나 백소영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었다.다만 이주혁을 따라다닌 여자 중 하나로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저 이주혁이 가지고 놀다가 버린 상대 중 하나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이다.“백소영이 누구인지 알아?”이주혁의 얼굴이 굳어졌다. 목소리도 점점 싸늘해졌다.“내 첫 여자야.”그 말을 마치더니 이주혁은 시아의 따귀를 올려붙였다.시아는 다리가 풀려서 바닥에 주저앉았다.정신이 혼미해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이주혁이 한 걸음씩 걸어왔다. 시아에게는 그 발걸음이 마치 사신의 발걸음처럼 느껴졌다.“내 평생 가장 증오하는 게 바로 강여경이야. 소영이를 내 손으로 감옥에 집어넣도록 날 가지고 놀았다고. 그런데 네가 그런 인간이랑 가깝게 지내? 절친이라고?”이주혁의 입꼬리가 잔인하게 올라가더니 비웃음을 띠었다.“넌 이번에 선을 넘은 정도가 아니라 내
“똑똑하게 굴어. 네가 내게 주었던 것은 남김없이 가져가도 상관없어. 강여경이 널 도와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버려. 강여경이 너에게 접근한 건 나랑 결혼할 상대였기 때문이야. 주민 그룹의 작은 사모님이 될 자격이 사라지고 나서도 그 인간이 널 만나줄 거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이주혁은 시아를 뿌리치고 문을 열었다.이제는 시아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나랑 결혼하지 않는다면 나도 어머님께 헌혈해 드릴 수 없어!”짙은 혐오가 이주혁의 눈을 스쳤다. “채시아, 아무리 해도 만족할 줄 모르는 악마 같은 모습 때문에 이제 내가 도저히 널 참을 수 없게 된 거야.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 그동안 내가 너에게 얼마나 많은 걸 해주었나? 널 최고의 스타로 만들어줬는데도 만족할 줄을 모르고. 여자친구 자리를 차지하고 싶대서 그러라고 했더니, 나중에는 결혼을 하겠다고 하고. 그래서 결혼까지도 허락했지. 나에게 이런 식으로 협박을 한 인간은 없었어. 마지막으로 내게 협박을 했던 인간은 지금은 뼛가루도 남지 않았어. 굳이 당해보고 싶다면 너도 한 번 해봐.”그러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시아는 휑한 문을 보며 오돌오돌 떨며 멍하니 서 있었다.‘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이주혁이랑 결혼하지 못하면 연예계에서 누가 날 그렇게 떠받들고 존중해 주겠어? 난 완전히 우스갯거리가 될 거라고.안 돼. 그렇게는 못 살아.’시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아직은 기회가 있다.시아는 곧 119에 전화를 걸었다. 곧 구급차가 와서 시아를 인근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다음날, 시아가 한밤중에 병원으로 실려 갔다는 뉴스가 헤드라인에 걸렸다.시아가 밤새워 기다린 끝에 마침내 휴대 전화가 울렸다.병약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어머님.”“얘야, 어째 갑자기 밤중에 병원에 실려 갔다니? 어디가 안 좋아? 주혁이는 같이 있니?”이주혁의 어머니 류성희의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어머님…”시아는 입술을 깨물고 울먹거렸다
그러나 시아도 어쩔 수 없었다.이주혁의 집안에 압박을 가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이주혁이 파혼하려는 이유가 원연수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전에는 아무리 자기를 싫어했어도 이런 식으로 막 대하지는 않았었다.언제부터인지 이주혁이 자기를 대하는 방식이 점점 더 잔인해지고 있었다.******한편, 잠에서 깬 이주혁도 시아가 입원했다 뉴스를 보았다.눈에 싸늘한 경멸이 스쳤다. 바로 권현규에게 전화했다.“왜 시아가 어젯밤에 입원했다는 얘기를 안 해서 이따위 뉴스가 헤드라인에 걸리게 만들었습니까?”권현규는 당황했다.“저는 시아가 노이즈 마케팅을 하려는 줄 알았습니다만. 종종 쓰던 수법이잖습니까? 평소에는 별말씀 없으셨잖아요?”“난 이제 그 여자랑 결혼 안 합니다. 앞으로 채시아와 관련된 일은 무조건 최우선으로 보고하세요. 다시는 누구도 나에게 이 따위 수작 부리는 꼴 못 봅니다.”그러더니 전화를 끊었다.깨끗한 셔츠와 바지를 갈아입고 병원으로 향했다.이주혁은 사무실로 가지 않고 응급실 당직을 섰던 의사를 찾아갔다.“원연수 환자는요? 어느 병실로 갔죠?”의사가 이상하다는 답했다.“아까 퇴원했는데요.”이주혁의 눈에서 분노가 번뜩였다.“어젯밤에 기절했는데 그 꼴로 퇴원했다고요?”“어찌나 퇴원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지. 저희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의사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여기가 병원이지 감옥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미 서류에 다 사인하고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니 말릴 수가 없더군요.”이주혁의 얼굴이 이상스럽게도 싸늘하게 굳어졌다.응급실 당직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환자가 나가겠다는데 병원에서 강제로 억류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다만 어젯밤 쓰러졌을 때의 모습을 떠올리니 가슴에 울컥하는 게 올라오면서 답답했다.‘날 물어서 이 꼴로 만들어 놓고 말 한마디 없이 가버렸다고?원연수, 정말 잘났군.’이주혁은 입을 꾹 다물고 병원에서 나가려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막 시동을 걸려는데 아버지인 이원명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당
“그러니까… 저는 평생 그 여자한테 매여서 살라는 말씀입니까?”일견 심드렁해 보이는 이주혁의 말은 은근히 싸늘했다.“말씀드렸다시피 채시아가 얌전히만 지난다면 제 아내의 자리에 앉혀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채시아는 그냥 그 자리만 바라는 게 아닙니다. 결혼을 하고 나면 아이도 가지겠다고 할 것이고, 그 다음에는 제 사랑을 독점하고 싶어할 거라고요. 죄송하지만 그 여자의 피를 다 뽑아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협박당하고 싶지 않습니다.”그러더니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러나 이원명의 전화는 이주혁의 심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다시 권현규에게 전화 걸었다.“채시아의 모든 일정은 다 중지하세요,”권현규가 깜짝 놀랐다.“대체 왜 그러십니까?”“정신을 못 차리면 응당의 처분을 받아야지.”이주혁은 전화를 끊고는 그대로 차를 몰고 원연수의 아파트로 갔다.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안에서 답이 없었다.이주혁은 휴대 전화를 꺼내 매니저인 조현희에게 전화했다.“원연수가 퇴원해서 어디로 갔습니까?”조현희는 깜짝 놀랐다. 연수랑 다투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 대표가 직접 자기에게 전화를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연수가… 퇴원했나요? 저는 몰랐는데요.”“그러고도 매니저입니까?”이주혁의 싸늘한 말투는 사람을 떨리게 만들었다.“제가 한 번 연락해 보겠습니다.”조현희가 얼른 답했다.3분 뒤 조현희가 아니라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통화 버튼을 누르자 안에서 원연수의 맑고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괜히 현희 씨 괴롭히지 마세요. 저 지금 서울 아니에요. 엄마 고향에 내려와서 요양 중입니다.”“원연수, 그렇게 심하게 다쳤는데 어딜 싸돌아 다녀? 몸 다 망가지고 싶어?”이주혁이 화난 목소리로 지시했다.“조현희 씨 괴롭히고 싶지 않거든 당장 돌아와요.”“가면? 또 기절시키게요?”원연수가 비웃었다.“이미 일주일을 쉬어서 더는 못 쉽니다. 빨리 나아서 촬영하러 가야 해요.”이주혁은 미간을 문질렀다.“당신이 날 깨물지만 않았으면 내가 그렇게 밀치고 그러
‘어쩌면 나도 하준이나 영식이처럼 평범한 연애를 할 수 있을지도 몰라.’전화기 저편에 있던 원연수는 경악했다.이주혁은 거짓말을 경멸하는 사람이었다. 채시아와 파혼했다면 그것은 정말일 터였다.원연수의 입에 돌연 비웃음이 서렸다.‘어렸을 때 들었던 말이잖아?’‘나랑 제대로 한번 만나 볼래?’소영은 그 말을 믿었다. 서로에게 자기 몸을 맡기는 너무나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고 난 후 소영을 찾아온 것은 싸늘한 버림뿐이었다.그런데 지금 다른 여자에게 똑같은 말을 또 하고 있는 것이었다. 영혼은 소영이지만 겉모습은 완전히 다른 사람, 원연수가 아닌가!‘내가 바보도 아니고, 그런 말에 감동할 줄 알고?’“응? 해보지 않을래?”이주혁의 얼굴에 매혹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이주혁은 자신이 있었다.‘원연수, 지금 아주 신나서 난리가 났겠지?’“싫습니다.”원연수는 단칼에 거절했다.“갑자기 소속사 대표가 시아랑 파혼하고 나랑 사귄다는 소문이 퍼지면 사람들이 절 뭐로 보겠습니까? 내가 두 사람을 파탄냈다고 말할 거 아니에요. 연예계에서 그런 일은 최악의 금기 사항이라고요. 저는 정말 이번 영화를 잘 찍고 싶습니다, 대표님.”이주혁의 얼굴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대외적으로는 비밀로 하면 되지. 그리고, 당신에 대해서 안 좋은 기사가 하나라도 나가면 그런 건 내가 다 해결해 줄 수 있어.”“지금이야 날 따라다니면서 달콤한 말을 실컷 속삭여 주겠죠. 하지만 내가 지겨워지면 그때도 대표님이 날 보호해 줄까요? 배민교가 날 따라다닐 때는 귀가 녹도록 달콤한 말을 얼마나 많이 해줬는지 알아요?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잖아요? 내가 겨우겨우 오늘날 이 자리까지 기어올라왔는데 연애하자고 내 일을 다 망칠 생각은 없다고요. “원연수가 너무 대놓고 그렇게 말을 하니 이주혁은 환장할 지경이었다.“지금 당신 처지를 잘 계산해 보라고. 한번만 더 거절하면 연예계에 발도 못 붙이게 해버리겠어.”“연기를 할 수 없다면 다른 걸 하면 되죠. 내가 연기 밖에 모르는
이주혁이 그렇게 원연수에 대한 마음을 다지고 있을 때였다.송영식에게서 전화가 왔다.“내일 밤에 아버지께서 골드 브라이트 인터내셔널 호텔에서 파티를 여신대. 주민 그룹 초대장은 내가 받아 왔는데 어디 있냐?”이주혁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가 곧 이해했다.송태구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친형제인 송윤구가 뒤에서 지지 세력을 모으기 위해 이 타이밍에 파티를 여는 것이었다. 당선을 축하하는 한편 재계의 세력을 다시 하나로 모으려는 뜻이었다.“밖에 있는데….”“병원 출근 안 하냐? 마침 윤서 데리고 산전 검사 가는데, 가는 김에 전해주게.”송영식이 말했다.이주혁은 ‘그래’라고 대답했다******오전 11시, 송영식이 윤서를 데리고 병원으로 왔다. 윤서의 산전 검사에 따라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번에는 입체 초음파를 본다는데 아기의 얼굴까지 볼 수 있다고 했다. 아기가 자기를 닮았을지 윤서를 닮았을지 너무나 궁금했다.두 사람이 막 엘리베이터에 타려는데 밖에서 한 무리의 사람이 몰려들었다. 그 사람들이 윤서와 부딪히려는 것을 보고 송영식은 바로 윤서 앞을 가로막으며 크게 소리쳤다.“밀지 마세요. 임산부 있습니다.”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송영식을 보며 빙글빙글 웃었다.“거 어지간히 와이프를 아끼는구먼. 이렇게 와이프밖에 모르는 미남을 남편으로 두다니 복도 많네.”구석에서 아주머니의 말을 들은 윤서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미남이라고?’고개를 들어보니 마침 윤서의 시선이 닿는 곳에 송영식의 섹시한 목젖과 쇄골이 있었다. 송영식은 양 손을 윤서의 머리 위로 짚어 병아리를 보호하는 어미 닭처럼 윤서를 감싸고 있었다.꽤 많은 인원이 밀고 들어왔지만, 송영식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사람들이 이쪽을 누르지 못하도록 버텨냈다.꽉 찬 엘리베이터에서 윤서가 서 있는 공간만 여유가 있었다.전에는 계속 시어머니 전유미와 보디가드와 함께 왔었다. 남들 보기에는 꽤나 위풍당당하게 보였겠지만, 막상 윤서는 마음이 공허했다.임신 주수가 커지면서 남편이 동행하니 확실히 느낌
“아, 왜? 놔 봐. 친구가 이 정도 관심도 못 보이냐?”송영식이 소리쳤다.안경 너머로 이주혁의 검은 눈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윤서의 입꼬리가 살짝 경련을 일으키더니 얼른 송영식의 손을 잡아당겼다.“안 보여주고 싶은가 본데 굳이 그럴 필요 있어? 남의 이미지도 생각해야지.”송영식은 얼씨구나하고 구경을 할 셈이었지만 왼손에 얹힌 작고 부드러운 손을 보더니 힘이 쭉 빠지고 말았다.‘손이 왜 이렇게 조그맣고 가느다랗지? 게다가 너무나 매끄럽잖아?’송영식이 그 손을 잡으려고 하자 윤서는 얼른 손을 치워 버렸다.송영식은 아쉽다는 듯 쩝하고 입맛을 다셨다. 옆에서 보고 있던 이주혁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무슨 평생 여자는 만져본 적도 없는 녀석처럼 겨우 손 살짝 댄 걸 가지고 저렇게까지 설렐 일이냐고?’“야, 입은 어쩌다가 다쳤냐?”송영식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농담하듯 물었다.“설마 여자한테 물렸냐?”“신경 끄시고, 산부인과 다 왔다.”이주혁이 걸음을 멈추었다.송영식은 윤서를 따라 들어가려다가 간호사의 손에 막혔다.“남편 분은 못 들어가세요.”송영식은 할 수 없이 걸음을 멈추었다.윤서가 들어가니 잔뜩 긴장한 송영식을 곁눈질로 보던 이주혁이 물었다.“그렇게 신경이 쓰이냐?”“어쨌든 결혼했잖아? 내 아이까지 가지고 있고. 인제 제대로 성실하게 살고 싶다고.”송영식이 진지하게 답했다.“이제 백지안은 완전히 잊어버렸어?”이주혁이 물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잠시 후 거북한 듯 입을 열었다.“백지안은 내가 마음을 쓸 가치도 없어. 예전 짝사랑의 감정 따위 이제 잊어야지. 앞으로는 내 가족을 위해서 책임을 다할 거야. 나랑 윤서 사이에도 사랑을 키워나갈 수 있을 거야. 예전에는 지안이만 쳐다보느라고 다른 사람의 장점 같은 거 눈에도 안 들어왔었는데 지금 보니까 윤서는…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그냥 좀 사나워서 그렇지. 좀 무서워도 날 두고 바람 피우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물론 자존심 때문에 마지막 말은 꿀꺽 삼켜버렸다.
“아, 알겠어. 지금 바로 하러 갈게.”송영식은 얼른 카드를 들고 수납하러 갔다. 곧 두 사람은 다시 혈액 검사를 하러 갔다.꽤 많은 피를 뽑는 것을 보더니 송영식은 약간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말했다.“무슨 검사길래 피를 이렇게 많이 뽑아?”채혈하던 간호사가 친절히 설명했다.“이 시기에는 검사할 항목이 많아서 조금 채혈량이 많아요. 아기랑 산모랑 건강한지 제대로 확인해야죠.”송영식은 민만한 듯 입술을 핥았다. 채혈이 끝나자 진지하게 윤서에게 말했다.“조금 있다가 보양식으로 삼계탕 해줄게. 아니다 인삼은 좀 그런가? 전복 낙지 삼계탕 해줄게.”윤서는 살짝 심란한 듯 송영식을 바라보았다.“고마워. 전복 낙지 삼계탕이라니… 듣고 보니 예전에 시골 갔을 때 동네 할머니들이 ‘니 에미가 전복 낙지 삼계탕을 잘 끓였지’하셨던 게 생각나네.”“……”‘내 말을 듣고 ‘니 에미…’어쩌고 하는 말이 생각났다고?무슨 뜻이야?설마 ‘니미럴’하고 욕하고 싶은 걸 돌려서 말하는 건가?’한창 다정하려던 송영식은 갑자기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그 입 다물어줄래?”“왜 갑자기 입을 다물래?”윤서가 눈을 가늘게 떴다.“아니… 말을 고따위로 하니까 그렇게 남친도 없이 솔로로 지냈지.”송영식이 이죽거렸다.몇 년을 솔로로 지냈던 윤서는 울컥 화가 났다.“나한테 그런 소리 할 자격이나 있어? 당신이야말로 십수 년을 솔로로 지낸 주제에. 난 몇 년을 솔로로 지냈지만 당신은 모태 솔로였잖아!”“내가 당신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솔로 기간이 긴 건 당연하잖아!”“어, 나이 많아서 좋으신가 봐요? 이렇게 어리고 예쁜 내가 아내가 되어준 걸 영광으로 여기라고!”윤서는 한 마디도 지지 않았다.간호사가 어이없다는 듯 둘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저기, 다른 데 가서 해주시겠어요. 여기 다른 분들도 계시니까요.”두 사람은 흠칫하고 돌아보았다. 예닐곱 사람이 둘이 싸우는 꼴을 한창 보고 있었다.어느 나이 지긋한 부인이 빙긋 웃었다.“싸우긴 뭘 싸워. 둘이 아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