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준은 그래도 뻔뻔하게 여름의 어깨를 감쌌다.“뭐, 쟤들도 크면 다 할걸.”“우웨, 누가 그런 걸 한다고!”여울이 소리쳤다.하늘이는 비아냥거렸다.“이모할머니가 그러는데 우리 집 망할지도 모른다는데 그러고 있을 정신이 있어요?”하준은 태연하게 받았다.“그러는 너희는 이 와중에 남 뽀뽀 구경할 정신이 있나?”여울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저기, 망하면 이제 사탕 못 먹어요?”“……”이 와중에도 먹을 것 생각뿐이라니 정말이지 대단한 먹보가 아닌가!하늘이는 여울을 흘겨보았다.“걱정하지 마. 망하면 내가 회사를 차려서 돈 엄청나게 벌어줄게. 죽을 때까지 다 쓰지도 못하게.”“그러면 됐어.”여울은 그제야 통통한 얼굴을 반짝 들었다.그런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무거웠던 여름과 하준은 저도 모르게 웃게 되었다.‘역시 아이들은 좋구나.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고.하긴 사실 누구나 다들 어린아이 시절을 거쳐왔지. 어른이 되면서 점점 더 많은 의무와 책임이 늘어나는 거지만….’여름과 하준은 갑자기 마음이 홀가분해졌다.“가자, 아버지가 재워줄게.”하준은 여울을 어깨에 올려놓았다.여울이 힘껏 주먹을 휘둘렀다.“이랴! 달려라!”하준은 화가 나기는커녕 신이 났다.여름의 입가에는 행복한 미소가 감돌았다.커다란 바위가 심장을 누르고 있는 것 같았는데 이제는 정말 한결 가벼워졌다.내일 차민우의 아버지도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갈 수 있을 듯했다.어쨌거나 자신은 최선을 다하겠지만 실패하더라도 억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그 일은 하준에게 비밀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준이 질투할까 봐 걱정되기도 했지만, 여름이 누군가에게 FTT를 도와달라고 부탁하러 간다면 하준은 자존심 상한다며 못 가게 말릴 것이 뻔했다.******다음 날 오후. 여름은 차민우가 알려준 외국 은행으로 향했다.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한 무리의 사람들이 덩치가 산만 한 남자와 나오는 것이 보였다. 남자는 검은 정장을 입었는데 딱 봐도 차민우의 중년 버전이었다
차진욱은 은행 직원이 자신을 부르나 싶어서 돌아보다가 눈동자가 커지더니 몇 초간 그대로 굳어버렸다.은행 입구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은 스물 남짓한 여자로 보였는데 연노랑 니트에 롱스커트를 입어 우아하고 산뜻했다. 발랄하게 높이 올려 묶은 포니테일은 이목구비를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평생 수많은 미인을 보아왔지만, 차진욱의 마음을 움직인 사람은 강신희 하나였다. 젊었을 때 강신희는 활력이 넘쳤었다.지금 눈앞의 젊은 여자는 예전의 강신희를 떠오르게 했다.‘닮았어. 저 입술, 저 코… 너무 닮았어.’눈은 똑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눈빛은 예전의 강신희와 판박이였다.마치 수십 년 전으로 돌아가 스물 몇 살의 강신희를 다시 만난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옆에서 보고 있던 은행 중역은 차진욱의 표정을 보고 여름의 미모에 반했다고 생각하고 눈치껏 길을 텄다.여름을 위아래로 훑던 중역들은 깜짝 놀랐다. 갑자기 튀어나온 어린 여자애의 미모가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이었다.‘저 정도의 미모라니, 이 미스터리의 회장님과 그렇고 그런 관계이려나?’여름은 은행 중역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들 멍해진 틈을 타서 과감하게 차진욱에게 다가갔다.“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차민우 씨의 친구입니다. 잠깐 시간을 좀 내주시겠습니까?”차진욱은 곧 정신을 차렸다.눈썹이 움찔하더니 중역들을 훑어보았다.“회장님, 그러면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중역들은 눈치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자리를 피해다.차진욱은 한 손을 차 문에 얹고 다른 한 손은 바지 주머니에 꽂고 있었다. 모델 같은 몸매가 어우러져 그림처럼 보였다. 그러나 깊은 푸른색 눈에는 어두운 빛이 번뜩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데도 압도적인 카리스마에 상대방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여름은 긴장한 나머지 등에서 땀이 흘러내렸다.“갑자기 무례하게 시간을 내달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일단 소개 드리겠습니다. 저는 강여름이라고 합니다. FTT 그룹 일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강여름이라….”차진욱의 동공 깊은 곳에
“…..”‘대화를 더는 이어 나갈 수 없겠군.’그러나 여름은 차진욱 같은 사람을 찬탄하는 편이었다.“계속해서 저와 차민우가 썸을 탄다고 의심하신다면 저에 대한 모욕일 뿐 아니라 회장님의 아들에 대한 모독이기도 합니다. 아드님을 너무 우습게 생각하시는 거 아닌가요?”여름은 재빠르게 반격에 나섰다.“저는 오늘 회장님을 처음 뵙지만 아주 냉철하고 현명하신 분 같습니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성공하신 분이라면 아들도 영리하고 절제할 줄 아는 사람으로 키우셨겠죠. 가볍게 미색에 홀려서 남편과 아이가 있는 사람과 불륜을 저지르는 사람이 아니라요.”차진욱의 얼굴에 ‘어라, 요거 봐라?’ 하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눈앞에 있는 젊은이는 예전의 강신희를 떠올리게 했다. 말솜씨도 좋거니와 강신희와 똑같이 날카로웠다.죽어도 강여름이 차민욱을 꼬시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든다면 그것은 민욱의 품성이 그만큼 떨어진다는 말이었다.“아주 달변이군 그래. 그러나… 난 자네 같은 타입도 많이 봤거든.차진욱이 심드렁하게 말했다.“당연하죠. 차 회장님께서 스물 남짓한 나이였다면 제가 꽤나 특별해 보였을 테니 코 앞에서 수작을 부릴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처럼 성숙한 연세인데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여자도 적잖이 보셨겠죠.”여름이 공손하게 말을 이었다.“하지만 전 상관없습니다. 저는 회장님께 저를 마음에 담아달라고 온 게 아닙니다. 잠깐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서로에게 이익이 될만한 내용이 있을 테니 이야기해보고 싶어 왔을 뿐입니다.”“FTT 얘기를 하는 건가?”차진욱이 비꼬듯 싸늘하게 웃었다.“민우가 뭐라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난 FTT 따위는 안중에 없네. 당연히 손잡을 생각도 없어. 다들 알다시피 FTT는 얼마 못 버틸 거라서.”“FTT가 얼마 못 버틸 것이라는 소리를 하던 사람은 상반기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몇 개월 되지 않아 FTT는 어마어마한 기세로 일어섰지요.”여름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이어서 말했다.“회장님은 우리나라에서 외국계 은행을 경영하고 계십니다.
“매리트가 없는 건가요, 아니면 실패가 두려우신 건가요?”여름이 과감하게 입을 열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차진욱의 시선이 여름에게 떨어졌다. 얼음송곳처럼 예리했다.처음 느껴보는 압박감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나에게 자극 요법을 쓰시겠다?”차진욱은 싸늘하게 웃더니 갑자기 허리를 숙였다. 사악한 말투로 내뱉었다.“내 아들과 하룻밤을 보내준다면 자네의 요구에 대해 한번 고려해 보지.”여름이 미간을 찌푸렸다.“죄송합니다. 저는 여기 담판을 하러 왔습니다. 잠자리를 논하러 온 게 아니에요. 뭔가 착각하신 것 같네요.”“착각은 자네가 하고 있지. 지금 자네는 나에게 부탁하러 온 처지라고.”차진욱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이 없었다.“네. 부탁을 드리는 입장이죠. 하지만 저도 나름의 선이라는 게 있습니다. 돈이야 없으면 다시 벌면 그만이지만 자존심의 마지노선마저 없다면 그건 정말 방법이 없죠.”좀 유감스럽긴 하지만, 노력은 해보았으니 현실을 그냥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생각이 없으신 듯하니 그만하겠습니다. 그래도 나중에라도 잘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어쨌거나 제국의 황제는 영토가 넓어지는 것을 꺼리지 않지요.”그러더니 여름은 몇 걸음 물러섰다.“실례가 많았습니다.”그러더니 자리를 떴다.차진욱은 여름의 뒷모습을 보다가 생각에 잠긴 채 차에 올랐다.확실히 강여름에게는 특별한 뭔가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FTT가 곧 도산할 위기인데도 자신을 찾아와 협상을 하면서 조금도 비굴하게 굴지 않았다.‘밀당인가, 아니면 자기 회사도 아니니 그저 마음을 그 정도만 쓴 것일까?’집으로 가는 길에 차진욱은 전화를 걸었다.“당장 기어들어 와!”차민우는 곧 별장으로 돌아왔다.강신희가 강여경을 데리고 쇼핑을 좀 하겠다고 해서 은행 시찰을 잡아놨었는데 거기서 강여름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아버지….”차민우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여름이 아버지를 찾아갔다는 사실을 눈치챘다.입을 열기도 전에 차진욱은 테이블에 있던 사과를 냅다
“지금 남 편들어 주겠다고 네 동생을 의심하는 게냐?”차진욱은 심각한 눈으로 차민우를 바라보았다.“네 엄마가 알았다가는….“딱히 여경이를 의심한다는 말은 아니에요. 그냥… 뭔가 오해가 있지 않나 싶어요.”차민우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어제 찾아와서 좀 도와줄 방법이 없겠냐고 묻길래 단칼에 거절했거든요. 그러고서 떠보느라고 외국으로 빼내 줄 수 있다고 했는데 안 나가겠다는 거예요. 진심으로 최하준을 사랑하는구나 싶더라고요. 객관적 입장에서 봤을 때 강여름은 정을 중요시하고 의리가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이 과연 친할머니와 자기 부모를 해칠 수 있을까요?”“걔는 10년이 넘게 납치되었다가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애다. 네 엄마 친정 사람들과는 딱히 정이 들지도 않았을 테니 그런 짓은 충분히 할 수도 있지. 아마도 널 속이려는 건지도 모른다. 아주 앙큼한 애더구나.”차진욱의 눈에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솔직히 난 네 엄마 집안일은 관심도 없다. 그래도 엄마의 친정 일이라니까 빨리빨리 해결해 버리고 얼른 네 엄마를 데리고 니아만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 뿐이야. 이 일로 골머리 썩고 싶지도 않다.”차민우는 흠칫 놀랐다. 아버지의 말속에 ‘아마도’라는 말에 상당히 큰 의미가 담겼다는 점을 캐치해냈다.“확실히 영리하고 수단이 좋은 건 저도 인정해요. 그 정도 수단이 없었으면 어엿한 상장사의 이사장이 될 수 없죠. 하지만 영리하고 앙큼한 인간은 아버지도 실컷 만나서 그런 인간이 어떤지는 다 아시잖아요? 막상 강여름을 만나보신 소감은 어때요?”차민우가 문득 되물었다.차진욱의 싸늘한 눈이 차민우를 훑었다.차민우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웃었다.“꽤나 흥미로운 사람이죠. 아마도 부탁하러 온 주제에 비굴한 기색은 전혀 없었을 걸요? 저는 어제 보니 오만해 보이기까지 하던걸요. 젊었을 때 엄마 모습이 떠오르지는 않았어요?”“시끄럽다.”차진욱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네 엄마는 이 세상에 하나뿐인 특별한 존재야.”“아, 네네. 그렇죠. 하지만 강여름이 정말
물론 여름이 다시는 차민우를 찾아오지 않는다면 차진우는 정말 여름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그렇게 지시하고 나서 차진우는 강신희에게 전화걸었다. 한껏 부드러운 말투였다.“언제 와?”“아직 쇼핑 중인데.”강신희도 쇼핑할 때는 다른 사람들과 별다르지 않았다.“한동안 서울에서 지내야 하니까 여경이랑 옷이랑 화장품 좀 사두려고.”“나도 옷 좀 사줘.”그러더니 바로 애교스럽게 말했다.“빨리 와, 같이 저녁 먹게.”마흔이 넘었는데도 애교라니 강신희는 정말 어이가 없었다.“이 원피스 엄마랑 잘 어울릴 것 같아요.”강여경이 푸른 색에 자수가 있는 원피스를 들고 와서 생글생글 웃었다.강신희가 보니 평범한 디자인이었다. 그러나 강여경이 하도 열성적으로 추천을 하니 대충 답했다.“그럼 사자.”“안 입어 보고요?”강여경이 물었다.“됐다.”강신희는 바로 카드를 내밀었다.강여경은 강신희가 마음에 들어 하는 줄 알고 기뻤다. 자기 안목이 높다고 생각하고는 내내 강신희에게 이것저것을 골라주었다. 그러나 사실 강신희의 취향과는 맞지 않았다.강신희는 골치가 아팠다.‘애 취향이 어쩜 이렇게 저속할까?’그래도 딸이 충격을 받을까 봐 그대로 쇼핑을 계속 했다. 그러나 그런 쇼핑이 재미있을 리 없었다. 그냥 집에 가고 싶었다.“엄마, 우리 저녁도 먹고 들어갈까요?”강여경이 제의했다. 실은 아직도 사고 싶은 것이 많은데 걸어 다니는 ATM과 함께 있으니 쇼핑을 더 하고 싶었던 것이다.“됐다. 아저씨는 밖에서 먹는 걸 별로 안 좋아하셔.”강신희가 단칼에 거절했다.******쇼핑몰에서 나와 둘은 입구에서 기사를 기다리고 있었다.저녁 5시쯤이라서 점점 차가 많아지는 시간이었다.서경주는 차에서 서류를 살펴보다가 피곤해서 미간을 문질렀다. 창문을 열고 밖을 보니 마침 쇼핑몰을 지나고 있었다.그런데 길가의 누군가를 보더니 번개라도 맞은 듯 온몸이 굳어버렸다. 곧 크게 소리쳤다.“차 세워!”기사는 깜짝 놀랐다.“여기는 주정차 금지 구역입니다.”“세우라니까
서경주….순간 강신희의 뇌리에 그 이름 석 자가 떠올랐다.전에 자기와 서경주에게 과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강신희는 차진욱 몰래 온라인에서 서경주에 관한 내용을 찾아본 적이 있었다. 그 때 본 사진과 지금 눈앞의 사람은 매우 닮았다.다만 사진 속 남자가 더 젊어 보인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죄송하지만 누구시죠? 사람 잘못 보신 것 같네요.”강신희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서경주에 관한 일을 조사해 본 결과 그 사람에게 호감을 가질 수 없었다. 만나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었다.서경주는 흠칫하더니 고개를 흔들었다.“그럴 리가 없어. 난 늘 널 기억하고 있었다고. 신희야, 난 네가 죽은 줄 알았어….”서경주는 이성을 잃고 흥분해서 강신희의 팔을 잡으려고 했다.그러나 손이 닿기도 전에 건장해 보이는 남자가 갑자기 달려들어 서경구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고는 재빨리 팔을 벌려 강신희를 보호했다.“사모님, 어서 차에 타시죠.”강신희는 그대로 차를 향해갔다. 옆에 있던 강여경은 잔뜩 겁을 먹고는 얼른 차에 탔다. 이렇게 빨리 서경주와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나마 예전에 서경주와 직접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이 다행이었다.“신희야, 내가 잘못 봤을 리가 없어. 너 강신희잖아?”서경주가 흥분해서 쫓아왔다. 그러나 다시 보디가드에게 가로막혔다. 서경주는 두 눈이 시뻘개져서 외쳤다.“네가 날 미워해서 아는 척도 하기 싫다는 건 알아. 하지만 여름이도 모른 척 할래? 네 딸이잖아?”강신희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대로 차를 향해 갔다.차문이 닫히자 차 안의 상황은 보이지도 않았다.마지막으로 보디가드가 타자 차는 바로 출발했다.서경주는 따라 가고 싶었으나 곧 교통 경찰이 뛰어와 막았다.“선생님, 도로에서는 조심하셔야죠. 이러시면 위험합니다.”서경주는 멍하니 서 있었다. 그냥 아예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 같았다.‘내가 잘못 봤나? 하지만 그 사람은 정말 신희랑 너무너무 닮았는데? 20여 년이 흘렀다고는 하지만 겨우 서른 남
강여경이 끄덕이며 대범하게 말했다.“전에는 마음이 너무 괴로웠는데 이제는 다 털어버렸어요. 난 엄마만 있으면 돼요. 아저씨도 엄마가 아버지를 만나는 걸 바라지 않으실 거예요. 아저씨가 엄마한테 그렇게 잘 해주시는데 두 분이 계속 사이가 좋으셨으면 해요. 아버지가 여름이를 딸로 생각해도 상관없어요. 어쨌든 여름이한테는 내가 복수할 테니까요. 아버지한테 사과를 받을 생각은 없어요. 그래봐야 그걸 핑계로 더 질척거리기나 하겠죠.”강신희는 위안이 된다는 듯 끄덕였다. 강여경의 말을 들으니 또 서경주를 만나게 되어도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신희도 차진욱과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강신희는 보조석에 앉은 보디가드에게 말했다.“오늘 일은 회장님에게 굳이 말하지 말아요.”“알겠습니다.”보디가드가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강여경이 문득 입을 열었다.“엄마는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해도 아버지가 찾아보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엄마에게 아직도 옛정을 품고 있는 것 같던데…. 게다가 아버지는 나름 영향력있는 인사라고요. 혹시라도 조사를 하게 되면 아마도 좀 골치가 아파지지 않을까요? 아저씨 앞에 나타날 지도 모르고요. 사람을 시켜서 도로와 쇼핑몰의 CCTV 녹화 기록을 삭제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강신희는 질투가 심한 차진욱의 성격을 떠올리고는 강여경의 말에 동의했다. 바로 보디가드에게 오늘 쇼핑몰과 인근의 CCTV 기록을 삭제하도록 지시했다.******한편 서경주는 멍한 채로 차에 탔다. 기사가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아까 가신다던 창고 시찰 가시겠습니까?”“아니, 다음에 갑시다.”서경주는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고 여름에게 전화를 걸었다.-어디니?-화신 와 있어요.-저녁에 집으로 좀 오렴. 할 얘기가 있다.”서경주가 이토록 심각한 어조로 말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던 여름은 일을 마치자마자 벨레스로 서둘러 갔다.널찍한 거실, 소파에 앉은 서경주는 손에 사진 한 장을 들고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어찌나 집중했는지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