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더니 구 감독은 가버렸다.원연수도 자리를 떴다.다들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원연수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진짜 구 감독에게서 한 큐에 OK 사인을 받는 배우를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심지어 영화계의 황제라는 강우진이 갑자기 씬에 투입되었는데도 원연수는 일말의 동요하는 기색 없이 연기에만 집중했던 것이다. 그에 반해 여주라는 시아는 종이인형마냥 씬에 전혀 어우러지지 못했다.매니저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선 시아는 부드득 이를 갈았다. 원연수의 연기가 그 정도일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이번 작품에서 원연수를 내보내지 못하고 그대로 상영관에 걸려버리면 시아의 연기는 완전히 원연수의 연기에 압도당한 것을 모두에게 보일 판이었다.갑자기 뭔가가 뇌리를 팍 스쳤다.시아는 다급히 천막 쪽을 훑어보았다. 이주혁이 언제인지 모르게 자리를 떠서 보이지 않았다.안도의 한숨을 쉬던 시아는 방금 그 연기를 이주혁도 다 보았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다시 걱정이 와락 몰려왔다.*******이주혁이 차에 타자 기사가 물었다.“서울로 돌아갈까요?”“아니. 우선 어디 가서 점심이나 먹지.”이주혁은 두 눈을 감고 뒤로 기댔다.기사가 어느 식당으로 차를 몰았다. 식사가 끝나가 권현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금 뭐 하십니까?”“밥 먹는데, 무슨 일입니까?”이주혁이 심드렁하게 물었다.“큰일입니다. 방금 구 감독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상당히 곤란한 목소리였다.“원연수를 주연으로 할 수 없겠냐고 묻던데요. 저희 쪽에서만 동의하면 내년에 바미 엔터 소속 배우들을 대거 기용한 영화를 한 편 찍어주겠답니다. 출연할 배우는 저희가 정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요.”이주혁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러나 바로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자신이 구 감독이라도 그런 제의를 할 것 같았다.원연수는 분장 등이 도움 없이 연기만으로 완벽하게 악녀 연기를 완성했다.이대로 촬영하다 보면 시아는 연기에서도 밀릴 뿐 아니라 미모에서도 압도당할 것이 뻔히 보였다.그러면 영화가 상영된
권현규가 이어서 말했다.“역시나 훌륭한 배우라는 건 경험을 통해서 길러지는 모양입니다. 아, 대표님께서 따로 말씀이 없으시면 제가… 시아를 불러들이면서 대표님 뜻이라고 전하겠습니다.”“나한테 뒤집어씌우겠다 이거군.”이주혁이 꼬집었다.“아니, 달리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다들 시아가 대표님 애인인 걸 아는데 제가 그렇게 말 안하고 누를 방법이 있겠습니까?”권현규가 민망한 듯 말했다.“아니면 직접 말씀하시겠습니까?”“됐습니다. 난 너무 직설적으로 말하는 타입이니까 빠지겠습니다.”이주혁은 그러고 전화를 끊었다.******촬영 현장. 원연수는 점심을 먹더니 느른하게 소파에 누워 쉬고 있었다.이나정이 다급하게 말했다.“지금 이러고 쉬고 있을 시간 없다니까? 곧 오후 촬영 시작이야. 자기가 오전에 연기로 눌러놨지만 구 감독이 시건방진 배우를 얼마나 싫어하는데.”“아니야. 내 생각인데… 오후에는 촬영 안 할 거야.”원연수가 천천히 생수를 들어 마시며 느긋하게 말했다.이나정이 흠칫했다.“왜?”원연수의 입술이 서서히 올라갔다.이때 누군가가 쾅 하고 분장실 문을 걷어찼다.화가 잔뜩 난 시아가 들어왔다.“원연수, 아주 수단이 보통이 아니네?”“무슨 말씀이신지?”원연수가 고개를 외로 꼬고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었다.“모르는 척하지 마!”시아가 외쳤다.“오전에 일부러 예쁘게 하고 나와서 투 샷 찍었지? 그러면서 연기며 미모며 ‘내가 이 정도다!’라고 과시해서 감독님이 아무래도 주연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하게 만든 거잖아! 회사에서 들어오래. 이 영화 주인공은 너라고!”이나정의 눈이 커지더니 원연수를 쳐다보았다. 그제야 아까 원연수가 오후에 촬영을 하지 않을 거라고 했는지 알았다.원연수는 피식 웃었다.“누가 자기더러 나보다 연기를 잘하지 말랬나, 나보다 예쁘지를 말랬나?”“이게…”시아가 눈을 희번득 뜨고 쳐다보더니 한참 만에야 싸늘하게 웃었다.“이번 작품에서 주연 자리 가져갔다고 너무 의기양양하지 말라고. 나는 엔터 산업을 꽉
밖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시아의 분노한 얼굴을 보고 시아의 화를 살까 겁이 나서 우르르 도망갔다.이나정은 뒷목을 잡고 원연수를 쳐다보았다.“저기요, 시아가 싫은 건 알겠는데 너무 하얗게 닦아세운 거 아니니? 나중에 이주혁 대표 사모가 될 걸고 권 사장도 함부로 못 하는데….”“괜찮아. 배우 못하면 자기랑 나랑 나가서 장사하자.”원연수는 너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난 원래 연기보다 사업 마인드가 더 강해.”이나정은 너무 어이가 없었다.“난 빼주셔. 네가 언제 사업을 해봤다고 그래? 게다가 이주혁 대표 쪽에서 사람 손보려고 들면 진짜 쉽지 않을걸.”“알아.”원연수가 웃었다. 어느 정도는 조롱하는 기색이 섞여 있었다.‘그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알지. 내가 바로 그거 때문에 죽은 사람이거든.”곧 구 감독이 긴급회의를 소집했다.“시아 씨는 연말에 결혼 준비로 바빠서 아무래도 촬영에 참여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서 회사랑 상의를 한 끝에 주연을 원연수 씨로 교체하고 조연을 내일모레 새로 투입하기로 했으니 촬영은 며칠 쉽시다. 원연수 씨는 그동안 주연 대사 익혀주고.”“알겠습니다.”원연수는 놀란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새 대본을 받아 갔다.시아가 결혼 준비 때문에 바빠서 하차한다는 말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원연수가 연기를 너무 잘하니까 결국은 탈탈 털릴까 봐 빠지는 거지. 아까 점심시간에도 그래서 싸운 거고.’그러나 다들 눈치껏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오후 촬영이 취소되었다.원연수는 그대로 호텔로 돌아갔다. 우선 샤워를 좀 하고 오후에는 서울로 돌아가 며칠 쉬다 올 생각이었다.목욕을 마친 원연수는 수건을 두르고 나왔다.그런데 욕실 문을 열고 나서서 나오다가 소파에 앉은 누군가의 모습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오전에 봤던 고급스러운 차림 그대로 이주혁이 모델처럼 앉아 있었다.세상에 노크도 없이 남의 방에 들어와 앉아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어떻게 들어오신 거죠?”원연수가 당황해서 물었다. 상황
‘그래, 그때 내가 그랬지.그때라니, 얼마나 되었지?’얼마나 오래전 일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원연수는 살짝 몸을 떨었지만, 곧 평온을 되찾았다. 후다닥 침대로 가서 위에 놓여 있던 옷을 집어 들었다.이주혁은 수건 아래로 드러난 원연수의 가느다란 두 다리를 노골적으로 탐욕스러운 눈을 훑었다.원연수는 아무것도 못 본 척하고 옷을 들고 욕실로 향했다.그러나 수건을 감고 있어 걸음을 크게 못 걷고 종종거리는 모습이 도리어 귀여웠다.원연수는 잔뜩 긴장해서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이주혁이 다시 또 강제로 키스라도 해올까 싶어 두려웠다.전에는 옷이라도 입고 있었지, 지금은 이주혁이 마수를 뻗쳐오면 절대 벗어날 수 없을 상황이었다.그러나 다행히도 이주혁은 내내 소파에 가만히 앉아서 일어서지 않았다.원연수는 욕실로 들어가 문을 잠근 뒤에야 한숨을 돌렸다.이주혁은 카드 키를 손에 들고 빙글빙글 돌렸다.길게 심호흡을 하며 한창 성을 내는 자신의 남성을 느끼면서 낮을 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여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렇게나 잔뜩 성을 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너무 오래 여자를 안지 못해서 그래.아니, 그래도 이건 너무 굴욕적인데.’곧 다시 욕실 문이 열리더니 원연수가 평범한 분홍색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나왔다. 완전히 신입생 같은 모습이었다.“핑크색을 입을 줄은 몰랐는데?”이주혁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난 뭐 핑크색 입으면 안 되나요?”원연수가 반박의 말로 이주혁의 입을 막았다. 원연수가 평소 핑크색 옷을 입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금 입은 티셔츠는 명품 브랜드의 모델로서 협찬을 받은 옷이라 입지 않을 수 없었다.이주혁은 흠칫하더니 기다란 속눈썹 아래로 그림자를 드리웠다.‘그래, 원연수도 핑크색 옷을 입을 수 있지. 처음 봤을 때부터 백소영을 닮은 저 눈동자 때문에 내가 너무 백소영의 캐릭터를 원연수에게 과도하게 투영하고 있는지도 몰라.’이주혁이 기억하는 백소영은 결코 분홍색을 입는 사람이
이주혁이 다리를 꼬았다.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도록 깊었다.“원연수, 아주 대단해. 다들 보고 있는 앞에서 구 감독에게 그런 도박을 걸다니 말이야. 멋진 연기를 보여주면서 시아는 물론이고 영화계의 황제라는 남주까지 압도해 버렸어.네가 완벽한 연기자라는 것을 보여주어서 감독이 내칠 수 없게 만들었지. 그렇다고 계속 같이 촬영을 하려니 주연인 시아가 당신 연기에 가릴 것 같으니 감독으로서는 시아를 빼버리는 수밖에 없었지. 시아도 상영 후에 조연에게 연기에서 밀렸다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으니 빠지기 싫어도 빠지는 수밖에 없어단 말이야.”“어쩔 수 없죠. 저는 원래 얌전히 조연을 맡아서 연기할 생각이었다고요. 대표님 약혼녀가 첫날부터 그렇게 제작팀에 분장팀까지 매수해서 날 너무 괴롭혔잖아요.”원연수는 느긋하게 짐을 싸기 시작했다. 방을 빼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대표님의 약혼녀로서 시아는 날 싫어한다고요. 지난번에 대표님 사무실에서 뛰쳐나오던 날부터 시아에게 찍혔거든요. 다들 평화롭게 촬영에 임하면 난 그냥 조연으로 맞춰서 연기할 생각이었지만 시아는 전혀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원연수가 고개를 들어 평온한 눈으로 이주혁을 바라보았다.“미안하지만, 난 억울해도 꾹 참고 물러나는 거 못해요. 뒤로 물러설수록 갑질 하는 사람은 더 신나 하거든요. 그리고 시아가 연기를 못하는 게 내 잘못인가요?”“지금 내 앞에서 내 약혼녀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폄하하는 건가?”이주혁이 언짢은 듯 셔츠 단추를 하나 풀었다.“팩트잖아요. 대표님 앞에서 거짓말로 알랑거리는 말이 듣고 싶으면 다른 사람이나 알아보세요.”원연수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시아가 아무것도 아닌 것 아닐지도 모르죠. 침대 위에서는 굉장할지도? 아니면 대표님이 그 하고많은 사람 다 두고 시아를 골랐을 리가 없으니까요.”“내가 아랫도리의 즐거움을 결혼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생각한다고 비웃는 건가?”이주혁이 일어서서 다가와 원연수의 턱을 잡았다.새삼 원연수의 턱 아래 피부가 너
“게다가… 난 누군가의 장난감이 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거든요.”원연수가 팔을 들어 시계를 풀었다. 안에 깊은 흉터가 있었다.“보이세요? 이게 내 지난번 연애의 끝이에요. 남들은 내가 배민교의 배경을 보고 덤볐다고 하지만 난 그 사람을 사랑했어요. 그런 사람에게 버림을 받고 난 자살을 시도했지만 죽지 못했죠. 결국에는 내가 자살을 위장해서 동정을 사려고 했다는 비난이나 들어야 했어요.”손목의 상처를 보며 이주혁은 흉터가 매우 깊은데 살짝 놀랐다. 이렇게 이성적이고 냉철한 사람이 자살을 시도하다니 대체 사랑에 대한 배신감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도 할 수 없었다.‘대체 그 쓰레기 같은 놈을 얼마나 깊이 사랑했던 거야?’“난 배민교가 아니야.”이주혁인 저음으로 입을 열었다.“배민교는 여자에게서 마음도 바라고 몸도 바랐는지 모르겠지만 난 네 몸만 원해.”원연수는 흠칫하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그 웃음이라는 것이 살짝 처량한 느낌이었다. “정말 제대로 쓰레기네요. 그러니까 난 인간적인 매력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으니까 내 몸만 있으면 된다는 말인가요?”이주혁의 깊은 눈이 의미심장한 눈빛이 지나갔다.“아마도….”“됐어요. 물론 이 바닥에 지름길 가고 싶은 사람이 없진 않겠죠. 하지만 오늘 내가 대표님 앞에서 속옷을 내리면 내일은 다른 남자 앞에서 내리게 될 거예요.”원연수가 고개를 저었다.“그런 삶을 사느니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로 이 바닥을 뜨고 말겠어요.”“연예계를 떠난 스타가 얼마나 손가락질을 받는지 아나?”이주혁이 찔렀다.“알아요. 누구는 선생이 되기도 하고 누구는 장사꾼이 되기도 하죠. 하지만 그것도 다 엄연한 직업이에요. 입에 풀칠만 할 수 있으면 뭘 해서 먹고살아도 되죠”원연수가 담담하게 답했다.이주혁은 원연수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지금 하는 말에 일말의 거짓도 없다는 것이 읽혔다.이주혁의 주변에는 늘 사람이 많았다. 다들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려는 사람들이었다. 그중 시아는 가장 탐욕스럽게 최고의 자리를 탐냈
원연수니 머리가 창에서 떨어지더니 이주혁의 어깨에 와서 닿았다.이주혁이 기사를 흘끗 보았다. 기사는 어색하게 웃었다. 이미 이주혁과 오랜 세월을 함께한 사람이라 눈빛만 보고도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이주혁이 아무 감정 없이 그런 눈으로 여자를 보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원래는 별 깊은 생각이 없었던 이주혁이었다.그러나 백소영과 한 남자를 공유할 생각이 없다는 말을 듣는 순간 원연수와 잠자리를 하겠다는 생각이 싹 사라졌다.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원연수는 백소영의 친구였다.그러나 그런 원연수가 자기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 머리에서 백소영과 같은 샴푸향이 풍겼다.내내 소영이의 향기를 기억하고 있었다니 너무 이상했다.휴대 전화를 쥐고 있던 이주혁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어쩐지 소영이를 떠올리기만 하면 심장이 아릿했다.요즘 그런 느낌이 더욱 강렬해지고 있었다.******차가 서는 느낌에 원연수는 깼다.몽롱한 눈을 뜨다가 자기가 웬 남자의 어깨에 안겨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개를 들어보니 웃는 듯 마는 듯한 이주혁의 눈이 보였다. “내 어깨가 쓸만했나?”원연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거리를 둘 생각이었는데 어째서 이주혁에게 기대어 잤는지 알 수 없었다.“죄송합니다. 너무 잠이 푹 들어서….”“난 이제 어깨가 저린데.”이주혁이 눈썹을 치켜세웠다.“뭔가 보상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열심히 일해서 회사에 돈을 많이 벌어드리겠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원연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보니까 이미 자기네 단지에 들어와 있었다.‘대체 우리 집을 어떻게 알고?’생각해 보니 회사에 제출한 이력서에는 자기 주소가 쓰여 있을 테고 회사 대표라는 사람이 소속 연예인 주소 하나 알아내는 건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돈?”이주혁의 입술이 굳어졌다.“난 돈은 넘쳐나는 사람인데.”“그러면 어쩔 수가 없네요.”원연수가 차 문을 열고 내리려고 했다.그때 손 하나가 와락 원연수의 손목을 힘껏 잡아당겼다. 전혀 대비가 되어
“아닌데요.”원연수가 있는대로 말하더니 잠시 침묵했다.“대표님이 싱글이었으면 그래도 뭔가가 아주 조금은 달랐을지 모르겠지만 곧 결혼하실 건데 이렇게 희롱을 하시면, 저 같은 멀쩡한 사람은 아마도….”“뭐?”뭔가 말하려다가 말려는 원연수를 보고는 이주혁이 마저 말하도록 부추겼다.“대표님을 지저분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겠죠.”원연수가 결국 말하고 말았다.“그런 짓은 상대의 반감만 산다고요. 하지만 막상 본인은 자기가 고단수라며 속으로 자화자찬하고 있겠죠.”이주혁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아주 대단하군.”이주혁은 한 쪽 입꼬리를 올리더니 갑자기 원연수를 확 밀어냈다.“가!”원연수는 슈트케이스와 함께 나동그라졌다.그러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원연수를 보면서 이주혁은 주먹으로 좌석을 내려쳤다.그러더니 잠시 후 큭큭 낮은 소리로 웃었다.앞에 앉아 있던 기사는 소름이 돋았다.******100평이 넘는 펜트하우스로 돌아온 이주혁이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데 문 앞에 서 있는 시아가 보였다.이주혁을 보자마자 시아는 눈시울을 붉히며 달려들었다.“권 사장이 영화 촬영에서 빠지래요. 원연수가 주연을 맡게 되었다고….”“알아.”이주혁이 지문으로 문을 열었다.시아가 이주혁의 옷자락을 잡았다.“다들 내가 주혁 씨의 약혼녀인 것도 알고 여주인 것도 아는데 촬영을 하루만 하고 그만둔 걸 알게 되면 감독님이 내 연기에 실망해서 그런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이 비웃을 거예요. 곧 주혁 씨랑 결혼하게 되니 나만 망신인 게 아니라 주혁씨랑 주민 그룹 전체의 이미지에 영향을 미친다고요.”이주혁이 시아를 돌아보았다. 검은 두 눈은 여전히 너무나 매혹적이었다.시아를 보고 있자니 결국 원연수가 다시 떠올랐다. 맑고 싸늘한 원연수는 말을 날카롭게 해서 그렇지 가식이 없었다.“왜… 왜 그렇게 쳐다봐요?”이주혁이 너무 빤히 쳐다보니 데면데면해진 시아는 불안해졌다.“난 그냥 있는 얘기만 하는 거잖아요.”“너도 망신이 뭔지는 아는 구나? 별일이군.”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