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하고 애들만 내 곁에 있어준다면 그런 건 난 아무래도 상관 없어.”하준이 웃었다.“자, 그런 생각은 이제 그만하고, 쇼핑이나 하러 들어가 볼까?”여름은 고개를 들어 무슨 가게인지를 보고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여성 속옷을 파는 곳이었다.“당신이랑 같이 들어가긴 좀 그렇고, 저런 건 충분히…”“예쁜 게 더 있으면 좋잖아. 당신이 예쁜 거 입은 거 보고 싶어.”하준이 은근한 목소리로 여름의 귓가에 속삭였다. 좀 전의 무거웠던 분위기는 어느새 싹 사라져버렸다.그러나 두 사람은 차민우가 4층에서 가만히 둘의 이런 장면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차민우는 오늘 여름을 우연히 만난 척 과장하면서 일부러 플레티넘 카드를 보여준 것이었다. 돈과 권력을 탐하는 여자라면 반드시 넘어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그러나 여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심지어 일말의 여지마저도 먼저 차단해 버렸다.그러더니 최하준이 나타나고부터는 더 대놓고 애정을 과시했다.“회장님….”부하가 곁에 나타났다.“최하준이 내 신분을 의심하는 것 같다.”차민우가 낮은 소리로 뱉었다.부하가 깜짝 놀랐다.“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최하준은 우리와는 접점이 전혀 없는데요. 게다가 최하준 따위는 우리 CB그룹과 접점을 가지기에 한참 부족한데요.”“니아만의 차씨 집안이 아니냐고까지 묻던걸. 이상하네. 어떻게 우리에 대해서 들어봤을까?”차민우는 영 신경이 쓰였다.“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까요?”부하가 물었다.“아, 사모님께서는 최하준과 강여름은 간악한 것들이니 FTT까지 깨끗하게 날려버렸으면 하시던데요.”“최하준은 최근 재계 1위 자리를 탈환하면서 아주 탄탄한 입지를 만들었어. 싹 날려버리기는 그리 쉽지 않을 거야. 계획을 수정해야 해.”차민우가 아래 턱을 문질렀다.“대체 최하준의 뭐에 여자들이 끌리는 거야? 천하의 나쁜 놈인데.”“네, 확실히 검색해 보면 그런 쓰레기가 없던데요. 아무래도… 돈이 많아서가 아닐까요?”부하가 말을 이었다.“게다가 강여름은 최근에 최하
“네.”전화를 끊고 나자 하준은 머리가 아팠다.이제 막 안정을 찾는가 싶었는데 여름의 어머니가 나타나서 자기와 여름이 사귀는 것을 반대하면 어쩌나 싶었다.*******월말아직 날이 밝지 않은 시간, 고성 세트장. 드라마 제작 스텝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다.구찬수 감독의 의 크랭크인 날이었다.배우가 도착하기 전에 스텝들이 소곤거렸다.“원연수랑 시아가 같은 작품에 출연할 줄이야.”“누가 아니래? 둘이 주연자리를 놓고 경쟁했다던데 결국은 원연수가 경쟁에 밀려서 조연을 맡은 거라더라.”“조연 캐릭터 빌런이라서 사랑 받기는 그른 역 아니냐? 원연숙 안 됐다. 사실 난 원연수가 주연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쉿~. 조용히 해. 죽고 싶냐? 시아는 이 대표 부인이 될 거라고. 이 바닥에서는 시아한테 요만큼만 밉보였다가는 끝장이야.”“야, 시아 왔다. 개빨리 왔네.”누군가가 작은 소리로 일러주었다.다들 돌아보니 시아가 사극용 가채를 얹고 분장까지 마치고 들어왔다. 뒤로 매니저와 분장사, 의상담담 등이 줄줄이 따라왔다.“일찍 오셨네요.”스텝 중 한 명이 다가가서 말을 붙였다.“조금 빨리 와서 현장에 적응 좀 하면 촬영할 때 좀 나을 것 같아서요.”시아가 부드럽게 웃었다.“다들 일 보세요. 저는 신경 안 쓰셔도 돼요.”그러더니 대본을 들고 다시 점검했다.다들 시아의 뒷모습을 보며 소곤거렸다.“와, 난 뭐 갑질하러 온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다정하네?”“게다가 부지런하잖아? 저 가채 얹고 분장하려면 꼭두새벽부터 샵 다녀왔겠는데?”“연기는 원연수에 한참 못 미치지만 저 정도 부지런하면, 뭐. 원연수는 아직 오지도 않았잖아.”“……”얼마 안 가서 구 감독도 도착했다. 시아가 대본을 읽고 있는 것을 보더니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처음에는 시아를 마뜩찮게 생각했지만 노력하는 모습을 보니 그래도 그릇은 만들면 되겠다 싶었다.배우들이 속속 들어오면서 곧 거의 모든 배우가 들어왔다. 그러나 원연수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구
시아도 이주혁이 자기를 볼 왔다고는 생각지 않았다.두 사람 사이가 이렇게까지 망가지지 않았을 때도 시아가 드라마를 촬영한다고 일부러 들여다 보러 오거나 한 적이 없었다.‘오늘은 어쩐 일이람?’문득 얼마 전 원연수가 이주혁의 사무실에서 옷 매무새가 흐트러진 채로 뛰쳐나왔던 것이 생각났다. 당시 이주혁은 사무실에 앉아 있었고 굳이 정열로 이글거리는 얼굴을 감추지도 않았었다.시아는 심장이 욱신했다.그러나 얼굴에는 그런 속마음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본인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이주혁은 공식적으로 시아의 애인이었고 다른 사람 눈에는 시아를 보러 온 것으로 보일 터였다.“시아 씨를 보러 오셨나 보죠?”구 감독이 싱글싱글 웃으며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시아 씨가 새벽부터 와서 저랑 캐릭터 분석도 하고 첫날부터 아주 열심입니다.”시아는 일부러 겸양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감독님께서 이런 대작에 주연이라는 기회를 만들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이 작품을 5~6년이나 준비하셨다던데 제가 걸림돌이 되지 않게 열심히 해야죠. 아무래도 부족한 점이 많을 테니 앞으로 감독님께서 많이 가르쳐 주세요.”“걱정하지 말아요. 열심히만 한다면 내가 아주 멋진 배우로 만들어 줄게요.”구 감독이 끄덕였다.깊이를 알 수 없는 이주혁의 동공에 의아한 빛이 스쳤다.낙하산으로 꽂아 넣은 시아에게 구 감독이 반감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첫날부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다니 의외였던 것이다. 구 감독이 엄하다고 소문이 자자했는데 아무래도 시아가 일부러 잘 보이려고 꽤 노력한 듯했다.무심하게 시아를 쳐다보며 시크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시아는 자기 속셈이 다 들킨 것 같아서 마음이 싸해서 얼른 화제를 바꿨다.“우리 언제부터 촬영을 시작하나요?”“좀 일찍 시작할까 싶었는데 조연이 늦는군요.”원연수의 지각을 생각하니 구 감독은 새삼 언짢아져서 이주혁에게 대놓고 불만을 토로했다.“저는 배우가 지각하는 걸 제일 싫어한다고 권 사장에게 한 마디 넣어주십시오. 촬영 첫날부터 9
구 감독은 원연수를 보더니 콧방귀를 뀌었다.“오긴 왔군요. 30분 넘게 기다렸습니다.”“죄송합니다.”원연수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분명 어젯밤에 통화할 때만 해도 구 감독은 목소리가 밝았었는데….“사정이 있었습니다.”“다음부터는 지각하지 않도록 조심해.”시아가 이주혁의 손을 잡고 말을 이었다.“이거 봐. 날 본다고 온 주혁 씨도 너보다 빨리 왔어. 어머, 너 왜 아직 메이크업도 안 했니?”원연수가 움찔했다.“그게…”“됐습니다. 우물쭈물하지 말고 빨리 가서 분장하고 의상 환복하세요. 원연수 씨 씬은 오후에 촬영하는 걸로 하죠.”구 감독은 원연수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차단하고는 씩씩거리며 가 버렸다.“빨리 가서 해. 감독님 화나셨나 봐.”시아가 재촉했다.원연수는 시아와 이주혁을 흘끗 쳐다봤다. 안 그래도 기분이 안 좋았는데 두 사람을 보니 짜증이 울컥 올라와서 쌩하니 가려고 했다.“거기 서.”이주혁의 저음이 원연수를 잡았다.“회사 대표를 봤으면 인사는 한 마디 해야지. 권 사장은 대체 소속 연예인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아무래도… 내가 예의부터 좀 가르쳐야겠구먼.”원연수는 두 눈을 꼭 감고 깊이 한숨을 쉬고는 돌아서서 가식적인 웃음을 지었다.“죄송합니다. 분장하러 가야 해서 서두르느라고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이주혁은 발그랗게 물든 원연수의 뺨을 보며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지각하는 꼴은 보고 싶지 않군. 다시는 나와 바미 엔터에 먹칠하지 않았으면 좋겠어.”“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원연수는 사과를 하더니 돌아서 가버렸다.시아가 이주혁을 쳐다보니 이주혁은 멀어져 가는 원연수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 시아는 입술을 깨물고는 억지 웃음을 지었다.“주혁 씨, 이쪽은 자외선이 너무 강하니 저쪽으로 가서 앉아 있어요. 같이 점심 먹을 수 있게 최대한 빨리 촬영 끝내 볼게요.”“너랑 밥을 같이 먹다니, 있던 식욕도 다 죽겠다.”이주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섰다.시아의 표정이
“나중에 대표님이랑 결혼하시게 되면 청첩장 꼭 보내주세요.”메이크업 담당도 거들었다.“당연하죠.”시아가 고개를 들고 웃었다. 뒤에서는 몰라도 남들 앞에서는 당당한 이주혁 대표의 부인으로 보여야 했다.******좁은 분장실에서 매니저인 이나정이 분통을 터트렸다.“너무하네. 이렇게 좁은 분장실을 주다니. 탑 급 배우라고 다른 드라마 스텝들은 그저 떠받드느라 바빴는데.”“그만 해. 구 감독님 팀에는 웃돈을 얹어 주고라도 들어오려고 난리라고.”원연수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었다.“하지만 자기는 맡고 싶지도 않은 조연을 회사에서 떠넘겨서 하게 된 거잖아.”이나정이 씩씩거렸다.“이번 조연 캐릭터는 시아에게나 어울리는 역이었는데. 대체 걘 뭐가 그렇게 잘났어? 자기보다 예쁘길 하나, 연기를 잘 하나? 이 따위 대접 받으면서 조연 하느니 그냥 때려 치자.”원연수는 그냥 웃었다.“이 정도면 괜찮지. 전에 완전히 무명이었을 때 생각 안 나? 어딜 가도 구박 덩어리에 분장도 혼자서 알아서 다 하고, 어디 허름한 여관 같은 데 묵고 그랬잖아.”이나정이 입술을 깨물었다.“하지만 지금은 다르잖아? 지금 누가 일부러 너 엿 먹이고 있다니까? 왜 이 대표한테 말 안 했어? 야, 누가 늦고 싶어서 늦었냐고? 우리는 차 타고도 촬영장까지 40분이나 걸리는 어디 구석의 호텔에 처박아 놓고 말이야. 게다가 오는 길에 펑크는 또 뭐니? 택시도 안 잡혀서 생으로 뛰어 왔잖아.”원연수가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무슨 말을 하겠는가?안 봐도 시아가 벌인 짓이었다.십중팔구 지난 번에 사무실에서 민망한 일이 벌어지고 뛰쳐 나왔을 때 마주쳤을 때 이주혁과 자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고 질투에 눈이 먼 것이다.이나정이 불만을 터트렸다.“그리고, 스텝은 왜 미리 메이크업 하고 오라고 전화 한 통화 없어? 게다가 메이크업 담당도 안 붙여주고, 이해할 수가 없네.”“이따가 분장팀에 얘기해 보자. 조용히 해. 누구 온다.”원연수가 주의를 주었다.곧 분장팀
원연수는 인상을 찌푸렸다.‘대체 언제부터 저기 있었지?’“잘못 찾아오셨네요. 시아 분장실은 여기가 아닌데요.”“메이크업이랑 헤어 하는 솜씨가 꽤 좋은데 그래?”이주혁은 사실 원연수가 머리를 할 때부터 내내 분장실에 있었다.원연수가 능숙하게 뒷머리까지 만지는 걸 보니 뒤에도 눈이 달렸나 싶을 정도였다.‘원연수는 어떻게 해야 예쁘게 보일 수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어. 헤어 스타일만 간단히 만졌는데도 금방 미모를 돋보이게 만들어 버렸단 말이야.’원연수가 얹은 머리를 하고도 이렇게 아름답다니 의외였다.“어쩔 수 없죠. 누가 분장사를 매수해서 일부러 내 헤어라 메이크업을 다 망쳐놨으니 나도 자구책을 마련해야죠.”원연수가 마치 자기랑은 상관 없는 일이라는 듯 쌀쌀맞게 받아 쳤다.“시아가 한 짓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조롱하는 눈으로 원연수를 빤히 바라보며 이주혁이 물었다.“나한테 이르는 거야?”원연수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대체 이주혁의 의도가 뭔지 알 수 없었다.‘시아를 탓한다고 마음에 안 든다는 거야?아니면 시아는 내 여자니까 함부로 욕하지 말라는 거야, 뭐야?’“알아서 생각하시죠. 어쨌든 난 내가 알아서 해결했으니까.”원연수가 일어섰다.“좀 나가 주실래요? 옷 갈아 입어야 하거든요.”“안 도와줘서 화 났나?”이주혁은 나가기는커녕 손으로 문을 막고 서서 즐기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아뇨. 제가 감히 대표님께 화를 낼 수나 있겠습니까?”원연수가 침착하게 말했다.“화는 나는데 꾹 참고 있다는 소리군.”이주혁이 원연수의 평온한 눈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닮았어. 너무 닮았다고. 내 손으로 감옥에 보내 버린 그 여자랑 너무 닮았어.’대체 이주혁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어 원연수는 어이가 없었다.“대표님, 대체 왜 이러시는 건데요?”원연수는 너무 바빠서 이주혁이랑 지분거릴 정신이 없었다.이주혁이 느른하게 문에 기대어 섰다.“분장실이 너무 좁네.”원연수가 입술을 깨물었다.“드라마 팀에서 배정해 줬습니다만?”“원연
“원연수, 고상한 척 그만하지.”이주혁이 냉랭하게 뱉었다.“네가 배민교랑 놀아났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그 말이 입에서 튀어나오는 순간 이주혁은 자기 자신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자기 말투가 워낙 신랄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나 독살스러운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올 때만 해도 모욕을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원연수의 반응을 보고 나니… 어쩐지 살짝 이성을 잃어버렸다.원연수의 동그란 눈이 커다래졌다.아마도 이주혁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주변의 공기가 그대로 얼어붙은 듯했다. 이주혁은 원연수가 어지간히 악에 받치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원연수는 턱을 치켜들고 눈썹을 올렸다.“뭐, 내가 대표님을 거절해서 가지고 놀 수가 없으니 아니꼬운가 봅니다?”이주혁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몸을 꼿꼿이 하고 한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원연수, 지금 도발하는 건가?”“도발이라니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놀아난 게 아니라 잘못된 사랑을 했었다는 듯이 대표님 앞에서 울먹울먹 피해자 코스프레하고 싶은 생각은 없거든요.”원연수가 자조적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사실이 그렇다고 해도 대표님은 짠하게 생각하기는커녕 ‘지저분하게 놀던 게 열녀문 올리는 소리 하고 있네’라고 생각하실 거잖아요?”너무나 직설적인 화법이었다.이주혁은 경악한 나머지 족히 몇 초는 할 말을 잃었다. 한참 만에야 정신을 차리고 놀리듯 입을 열었다.“맞아. 안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날 아주 잘 파악하고 있군.”“몇 번 말 섞어보니 대충 견적 나오던데요? 보통 이런 금수저들은 흑심 가득하지 않나요?”원연수는 빙글 돌아서더니 옷걸이에서 연두색 한복을 집어 들었다.“전 그런 데는 말려들어 가기 싫거든요. 저는 잠자리를 가지면 애정이 생겨나는 타입이라서요. 누구처럼 잠자리를 가지면 가질수록 질려하는 타입이 아니고요.”“정말… 남자를 잘 아는 것 같군 그래. 다 배민교를 사귀면서 체득하게 된 건가?”이주혁의 두 눈이 날카롭게
‘이렇게 재미있는 여자는 정말 오랜만이야.’“자기야, 문은 왜 닫았어?”이때 갑자기 밖에서 이나정의 목소리가 들렸다.“아, 짜증 나. 메이크업아티스트 찾으러 갔었는데 다들 바쁘대. 그래서 분장팀장한테 갔는데 자기들 다 바쁘고 우리가 너무 늦어서…”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나정은 칼같이 다려 입은 양복 차림의 남자를 보고 깜짝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대… 대표님….”“응”이주혁이 매혹적인 저음으로 답하더니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이나정은 이주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원연수를 쳐다보았다.원연수는 머리에 쥐가 나는 것 같았다.“오해하지 말고…”“당연히 오해 안 하지. 오해할 게 뭐 있어? 늦었다고 이 대표가 와서 한 소리 하디?”이나정이 씩씩거리며 물었다.“그래서, 얘기는 잘했어?”“……”원연수는 고개를 숙이고 큭큭 웃었다.‘나 참, 나정 씨는 날 너무 잘 안단 말이야. 딱히 그 상황을 해명할 필요도 없었네.’“어머, 자기 머리 누가 한 거야? 예쁘네?”이나정이 갑자기 감탄했다.“너무 예쁘잖아.”“내가 했지.”원연수가 말했다.“잊어버렸어? 전에 스타일리스트 없을 때 내가 혼자 배웠잖아.”“어머, 생각난다. 그게 벌써 언제 적 얘기야? 아직까지 안 잊어버리고 있었나 보네.”이나정이 감탄했다.******원연수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한 씬은 이미 촬영이 끝났다.구 감독이 버럭 했다.“원연수 씨는 왜 아직도 안 나오나? 오전 내내 메이크업하고 옷 갈아입을 생각인가? 우리가 지금 원연수 씨 메이크업하라고 돈을 뿌려야 하냐고?”“원연수 씨 메이크업은 1시간 전에 제가 끝냈습니다.”스타일리스트가 말했다.“그런데 왜 아직도 꾸물거리고 있나? 이럴 거면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해.”구 감독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죄송합니다. 내일부터는 절대 늦지 않겠습니다.”원연수가 다가왔다. 환한 의상에 잘 올려 빗은 머리는 동그란 이마와 작은 얼굴을 잘 드러내 빛이 나는 듯했다. 많은 배우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