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하나 여쭤볼게요. 양유진이 우아하고 품위있다고 생각하시죠?”여름이 되물었다.“저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시죠? 그러면 양유진고 전수현의 일은 어떻게 생각하세요?양수영은 말문이 턱 막혔다.확실히 양유진이 강여름을 너무 지나치게 사랑한다고 생각을 하기는 했다. 전에 세상에 여자가 걔 하나뿐이냐며 마음을 접으라는 말도 많이 했었다. 그러나 양유진은 언제나 강여름이 아니면 안 된다는 얼굴을 하고는 했다.여름도 그 영상을 보고는 솔직히 너무 의외기는 했다. 그러나 세상에 그런 남자들은 많지 않은가?여름이 이어서 물었다.“그러면 양유진이 저 때문에 신장을 잃은 일이 없다는 것도 아세요?”“……”여름과 가족들은 모드 양유진이 정말 신장을 잃은 줄 알았다.양수영이 침묵하고 있다 여름이 웃었다.“그러니까 누님이시면서도 친동생인 양유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셨다는 말이잖아요? 무슨 근거로 양유진이 절대 선우 오빠를 해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시죠?“선우가 죽기 전에 너에게 보냈다는 문자를 보여줄 수 있나?”양수영이 냉랭하게 물었다.“죄송합니다. 그렇게는 못합니다.”여름이 거절했다.양수영이 싸늘하게 웃었다.“내가 바보인 줄 알아? 결국은 증거가 없다느 말이잖아? 일부러 우리 식구들을 이간질 하려는 수작이지?”“정 못 믿으시겠으면 며느님에게 물어보세요. 하지만 육 씨 집안의 핏줄을 뱃속에 품고 있으니 먼저 찾아가거나 하시는 마시고요. 문자나 톡으로 불어모세요. 괜히 손자 해치지 마시고요.”여름이 문득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양수영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생각해 보세요. 양유진이 누님이 저에게 온 경고 문자를 봤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저에게 연락을 하겠죠? 그리고 의심할 거라고요. 참, 주변에 감시하는 시선을 느끼신 적은 없나요? 만약 선우 오빠의 죽음에 양유진이 관련되어 있다면 누님이라고 뭐 더 봐줄 것 같으세요?”여름이 목소리를 낮추었다.“조심해서 나쁘실 것 없잖아요. 저는 그저… 서도윤 씨와 뱃속의 아이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서 그럽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양유진이 와락 돌아섰다 .눈에는 한기가 번뜩였다.“누가 이런 짓을 한 거야?”“아무래도 주민 그룹이지 싶습니다.”채진남이 우물쭈물 답했다.“아시다시피 국내 최대 병원은 주민 그룹이 다 차지하고 있다 보니, 주민 그룹이 말 한 마디면….”“이주혁!”양유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주혁이 최하준의 절친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이주혁이 감히 건방지게 최하준을 위해 나와 맞서겠다 이건가?’잠시 후. 양유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주혁이 그 시아라는 가수와 하반기에 결혼한다지?”“그렇습니다.”채진남이 끄덕였다.“시아는 무슨 운이 그렇게 좋은 지 모르겠습니다. 이주혁 선생을 잡고 나서는 영화판에서 얼마나 잘 나가는지 모릅니다. 전에는 부적적인 기사가 많이 올라오던 요즘은 이주혁이 자금으로 시아의 이미지를 많이 올려놔서 재기에 성공했죠. 게다가 양가 부모님도 친해서 정확한 결혼 일정이 곧 잡히지 싶습니다.” “역시 대단하군. 그 바람둥이가 시아에게 정착한단 말이지?”양유진이 사악하게 웃었다.“은근히 나랑도 인연이 있단 말이야. 다들 동성 사람이다 보니 전에는 몇 번 만난 적도 잇고.”그동안 강여경, 양유진, 백지안, 강여름이 모두 죽자 살자 싸워왔다. 오로지 시아만이 진흙탕에서 몸을 빼고 가만히 있다가 이제 이주헉과 결혼을 한다는 것이다.“쯧!”드디어 딱 시아를 이용할 때가 왔다. 그러나 일단 강여경이 돌아와야 더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대표님, 이제 어떡하죠?” 추신에 도움이라도…”채진남이 떠보듯 물었다.“이제 추신을 찾아가야지. 내가 그놈들을 위해서 뛰어다닌 게 얼만데?”양유진이 콧방귀를 뀌었다.“내 진면목이 까발려져 버렸지만 이제 앞으로… 더는 꾸밀 일이 없어서 좋군. 수십 년을 가장하며 살았더니 이제 피곤하기도 했어. 아, 누님은?”“네?채진남이 어리둥절해서 답했다.“회사에 계시죠.”양유진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양수영이 요란하게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유진아,
양유영은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며느리 서도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아주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은근히 여름의 말이 믿을만한 사실이라는 암시를 주었다.그러니까 그 말이 사실이라면 양유진이 한선우의 죽음과 관련되었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아들과 동생을 두고 저울질을 하게 된 것이다.양수영은 마음이 아픈 나머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들이 세상을 떠났으니 사실 더 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들을 위해 복수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다만 강여름의 경고 때문에 함부로는 움직일 수 없었다. 양유진이 이미 자신에게 감시의 눈을 붙여 놨다면 선우도 살해할 수 있는 양유진이 누나라고 가만히 둘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일단은 양유진의 의심에서 벗어나야 했다. 다시 믿음을 얻어야 증거를 잡아 양유진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양수영은 일단 양유진이 언제부터 이렇게 무서운 인간이 되었는지 계기를 알고 싶었다.대체 무슨 계획을 꾸몄길래 이렇게 오래도록 가면을 쓰고 살았는지 궁금했다.******호텔 바.고급 룸 안, 코에 금테 안경을 걸친 이주혁의 조각 같은 얼굴에 휴대 전화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시아가 톡을 보내 왔다.-나 자기 집에 왔는데 어디야? 언제 와?이주혁은 간단히 답했다.-안 가.그리고는 휴대 전화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송영식이 흘끗 보더니 감격한 듯 이주혁의 어깨를 와락 껴안았다.“크흐, 역시 내 마음 알아주는 건 너밖에 없다. 여친이 부르는데도 안 가고. 자, 한잔해! 오늘 나랑 자자.”“떨어져라. 남자한테는 관심 없거든.”이주혁이 싫다는 눈으로 송영식을 흘겨보았다.“누굴 데리고 자고 싶으면 지안이한테 가면 되잖아.”“그게… 난 지안이랑 자본 적이 없어.”송영식이 갑자기 민망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이주혁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송영식을 쳐다봤다. “너도 안 서냐?”“내가 하준이냐?”송역식은 얼굴이 벌게져서 바로 반박했다.“지안이는 나에게는 여신 같은 존재라고. 뭐랄까, 차마 함부로 손을 댈 수
남자가 뭐라고 했는지 백지안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그러더니 고개까지 숙여 백지안을 끌어당기더니 진하게 입을 맞추었다.송영식은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천둥번개가 치는 듯했다.믿을 수 없었다. 자신이 그토록 오래 바라만 보고 사랑해 왔던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천박해 보이는 인간과 입술을 맞대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지안이는… 내 여자 친구잖아?오늘 야간 진료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왜 이렇게 되는 건데?’이주혁이 송영식의 시선을 따라가더니 즉시 후다닥 다가가 닫히려는 엘리베이터를 잡았다.남자에게 안겨서 키스를 받던 백지안은 이주혁을 보더니 냅다 비명을 지르며 남자를 밀어냈다.“지안아….”송영식이 주춤주춤 다가섰다. 다리는 힘이 다 풀리고 놀라고, 망연하고, 두렵고, 분노에 찬 눈을 했다.“왜, 왜 날 속였어? 지안아, 저 남자랑 무슨 사이야?”송영식은 다짜고짜 그 남자의 멱살을 잡더니 주먹을 치켜들자 백지안이 튀어나와 송영식의 팔을 와락 잡았다.“그러지 마.”송영식은 움찔했다.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지안아, 내가 알던 그 지안이 맞니?”“이런 젠장, 감히 내게 손을 대려고? 꺼져!”퉁퉁한 남자가 송영식을 와락 밀치며 노기를 띤 소리로 외쳤다.“내가 누군지 알아? 죽고 싶어?”“죽고 싶은 건 네 놈이겠지?”송영식이 흥분해서 외쳤다. 두 눈에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듯한 분노가 쏟아져 나왔다.그러나 이번에는 이주혁이 막아섰다.“진정해. 이 분은 화건 인베스트의 원승탁 사장이셔.”송영식은 움찔했다. 분노한 나머지 아무 생각이 없이 마구 덤벼들었는데 화건 인베스트라고 하니 뭔가 낯익은 느낌이었다. 전에 무슨 비즈니스 서밋에서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역시 닥터 리가 보는 눈이 있군.”원승탁이 차가운 눈으로 송영식을 노려보더니 대뜸 소리쳤다.“집안에서도 내쳐진 주제에 날 건드리기라도 했다가는 뼈도 못 추릴걸.”“좋아, 일단 반 죽여 놓고 내 뼈를 추리는지 못 추리는지 보지.”송영식은 이미
“어쨌든 난 이제 도저히 도무지 쓸모도 없는 널 참을 수가 없어. 하준이가 내 돈을 빼앗아 가려고 했는데 너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잖아? 정말 쓸모가 하나도 없다니까.”백지안은 혐오스럽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넌 이제 나에게 안 어울려. 이렇게까지 안 하려고 사람이 그렇게 피했으면 대충 눈치를 챌 줄 알았더니…. 앞으로는 연락하지 마.”“알겠나?”원승탁이 비웃었다.“인간이 적당히 눈치가 있어야지. 꺼져.”그러더니 힘껏 송영식을 밀어냈다.송영식은 망연자실해서 백지안을 바라보았다. 완전히 영혼이 빠져나간 얼굴이었다.‘내가 그렇게 조심스럽게 사랑했던 지안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이주혁은 싸늘하게 백지안을 바라보았다.“너 저 사람 이혼해서 딸까지 있는 거 알고는 있지?”이주혁의 눈빛을 마주한 백지안은 몸이 부르르 떨렸지만 그래도 배짱을 튕겼다.“알아. 하지만 지금 내 형편에 멀쩡한 재벌집에 들어갈 수 있겠어? 그렇다고 영식이처럼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랑 만나긴 싫거든. 힘도 있고 지위도 있는 원 대표가 지금 나에게는 딱 맞아.”“뭐, 네가 알아서 하겠지. 다만 후회된다고 다시는 영식이에게 돌아오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이주혁이 엘리베이터 문을 놓았다. 엘리베이터가 닫히고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아니야, 지안이가 이럴 리가 없어.”송영식이 정신을 차리고는 쫓아가려고 비틀비틀 다가갔지만 이주혁이 와락 팔을 잡아챘다.“영식아, 정신차려!”이주혁이 낮지만 싸늘한 목소리로 말렸다.“네가 인마, 쿠베라 아들인데 여자 하나 때문에 이렇게 자존심까지 다 버릴 일이야?”송영식은 이주혁의 말에 움찔했다.멍하니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보는데 가장 소중한 보물이라도 잃어버린 어린애처럼 고통에 빠져 있었다.이주혁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내가 말했었잖아. 쟤 보통 아니라고. 하준이가 왜 결국에는 쟤 손을 놓았겠냐? 지안이의 바닥을 봤기 때문이야. 저렇게 돈과 권력에 집착하는 애가 아니라면 왜 그렇게 소송까지 불사하면서 하준이랑 위자
“가자, 오늘은 내가 밤새 같이 마셔줄게.”이주혁이 송영식의 어깨를 두드렸다.의외로 송영식은 고개를 저었다.이주혁은 굳이 잡지 않았다. 백지안에 대한 송영식의 마음이 매우 깊어서 단번에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백지안이 다시 와서 들러붙으면 송영식은 결국 넘어가고 말 것이다.송영식이 영혼 털린 얼굴로 어디론가 가버리자 이주혁은 하준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준은 이야기를 듣더니 잠시 침묵했다.“결국 영식이는 집으로 들어갈 거고, 사업이 궤도에 오르면 백지안은 돌아올 텐데.”이주혁은 흠칫했다.“영식이가 그렇게까지 바보는 아니겠지. 이런 일이 있었는데 백지안이 어떤 인간인지도 모른다면 진짜 그때는 나도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정말 제대로 정신차렸기만 바라야지.”유경험자답게 하준이 진심을 토로했다.“아 참, 이번에 양유진 건은 정말 고맙다.”하준이 웃었다.“내가 여기저기 병원에 말을 넣어 놓기는 했지만 아마 효과는 일시적일 거야. 양유진이 추신에 도와달라고 청하면 이번 위기는 넘을 수 있을 거야.”이주혁은 양유진을 결코 얕보지 않았다.“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어. 한 술 밥에 배 부르겠어?”******한편 송영식은 혼자 나오기는 했지만 어디로 가야할 지 알 수 없었다.혼자서 차를 몰고 한참 가다가 백지안이 출근하는 곳에 도착했다.송영식은 그대로 차에서 밤을 샜다. 아침 10시가 되자 백지안이 고급 외제차에서 내렸다.백지안이 내리면서 허리를 숙여 원승탁에게 키스를 하니 원 승탁이 껄껄 웃는 모습이 보였다.그 장면을 노려보던 송영식은 눈에 온통 핏발이 섰다.외제차가 사라지자 내려서 절망적인 눈으로 백지안을 바라보았다.“어젯밤에 내내 저 인간이랑 같이 있었던 거야?”“당연하지?”백지안이 상대하기도 귀찮다는 듯 머리를 쓸어 넘겼다.“어제 우리 둘이 같이 방으로 올라가는 거 못 봤어?”“지안아, 왜… 이렇게 됐니?”밤새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순간 송영식의 마음은 완전히 싸늘하게 얼어버렸다.어린 소년의 짝사랑을 마음에 품고 십 수년을 기다려 왔다.그런데 결국 자신이 사랑했던 것이 이렇게 지독한 사람이었다니.인생이 전부 우스워졌다.며칠 동안 송영식은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회사도 가지 않고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가만히 누워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사흘을 멍하니 있다가 본가로 찾아가 현관에 무릎을 꿇었다.밤 9시가 되자 폭우가 쏟아졌다.송영식의 본가 거실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어찌나 조용한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지경이었다.“아버님….”전유미가 걱정스러운 듯 송우재를 바라보았다.“내가 뱉은 말을 주워담으란 말이냐?”송우재가 노려보았다.“그런 말씀이 아니라…”전유미가 한숨을 쉬었다.“어쨌거나 저희 자식 아닙니까? 주혁이 말을 들어보니 며칠 째 애가 아무 것도 안 먹었대요. 낮에야 해가 나서 괜찮았지만 지금은 비가 오니 오래 못 버틸 것 같습니다.”“못 버티면 그만 둬야지! 당장 돌아 가라고 해!”송우재가 벌떡 일어서더니 계단까지 툴툴 거리며 걸어가서 갑자기 외쳤다.“내일 아침까지 꿇어 앉아 있는지 보겠다.”“네.”그렇게 다들 각자 방으로 돌아갔다.전유미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까지도 송영식은 여전히 대문 앞에 꿇어앉아 있었다. 송영식은 하루 밤낮을 꼬박 꿇어앉아 있었던 데다 며칠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해서 얼굴이 종이처럼 하얗게 떴다. 불러 들어가는데 다리가 휘청거릴 지경이었다.그래도 죽을 힘을 다해 버텼다. 들어가자 붉어진 눈시울로 송우재 앞에 꿇어 앉았다.“할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사람을 제대로 못 알아보고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습니다. 죄송합니다.”송우재는 느긋하게 국을 떠 마시며 말했다.“윤서 올 때까지 그대로 꿇어 앉아 있거라.”송영식은 움찔했다.송윤구가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윤서도 우리 식구니까요. 일단 식구가 다 모여야 이야기를 하지 싶어서 정환이를 보
“왔구나. 아침 좀 들어라.”송우재가 벙글벙글 웃으며 손짓했다.“지난 번에 보니까 양 세프가 한 미역국을 잘 먹더구나. 내가 방금 새로 내오라고 했다. 아주 뜨끈뜨끈하단다.”“고맙습니다, 할아버지.”윤서는 당당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수저를 들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미역국을 먹었다.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송영식은 더욱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막 태어났을 때부터 집안에서는 송영식을 물고 빨고 아껴주었다. 마치 무슨 인기 아이돌마냥 식구들마다 예뻐서 어쩔 줄을 몰랐었다.‘그런데 지금은…, 뭐 다 내가 자초한 짓이지.’“할아버지…”송영식이 작은 소리로 불렀다.송우재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윤서에게 말을 건넸다.“얘야, 쟤가 왜 와서 저러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니? 쟤가 말이다, 며칠 전에 백지안이에게 차였다더구나.”“아아, 어쩐지….”윤서가 밥을 먹으며 알겠다는 듯 맞장구쳤다.“그러게나 말이다. 어쩐지 갑자기 집에 왔다 싶었지.”송우재가 갑자기 또 웃었다.“우리 집이 무슨 호텔인 줄 아나?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오고, 나가고 싶으면 때려치우고.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말고 말이야. 어쨌거나 우리 아무리 빌고 마음을 써도 저 녀석이 집으로 들어오긴 할 게다.”송영식은 할아버지의 비아냥에 고개가 푹 떨어졌다.“할아버지께서 집에 못 들어오게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제가 이전에 저지른 잘못을 사과 드리고 싶었습니다. 제가 눈이 멀었었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전유미가 한숨을 쉬었다.송우재의 분위기는 사뭇 싸늘했다.“백지안이가 헤어지자고 안 했으면 네 녀석이 정신을 차렸겠느냐? 그 물건을 위해서 평생을 우리와 마섰을걸?”“죄송합니다….”송영식은 귀까지 빨개져서 그저 그 한 마디를 할 뿐이었다.송윤구가 결국 입을 열었다.“나와 네 할아버지가 너보다 인생을 살아도 한참을 더 살았다. 그런데도 너는 우리가 백지안을 모함한다고 생각했지? 이 나이에 우리가 뭘 얻겠다고 그런 물건을 모함하겠니? 우리가 지금까지 지극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