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준은 흠칫했다. 그렇다. 대뜸 여름에게 어머니가 돌아가지 않으셨고 셀레만 제도의 주인이자 니아만의 안 주인이 되어 어마어마한 부를 손에 넣으셨으며 재가하셔서 다른 자식도 있다고 말한다면 여름은 자신을 사기꾼 취급할 게 틀림없었다.한병후가 위로했다.“양유진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이든 그자가 강여름 씨와 계속 살게 해서는 안 된다. 첫째, 만약 방금 내 말이 사실이라면 양유진의 CB그룹에 빨대를 꽂으려고 들 것이고 신세가 펴는 순간 널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둘째, 이용 가치가 끝나면 강여름 씨의 신세는 어떻게 될 것 같으냐?”“그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하준은 괴로운 듯 주먹을 꽉 쥐었다.“반드시 여름이를 되찾아 오겠습니다. 저는 여름이가 그저 평온하게 행복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아, 오늘 알게 되었는데 여름이가 저와의 사이에 생긴 아들딸을 낳아서 키우고 있었더라고요.”“그러냐?”한병후가 깜짝 놀라더니 곧 미소를 띠었다.“잘됐구나. 나중에 한 번 보자꾸나.”“여울이는 문제가 없습니다만 아들은…. 아마도 지금 저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노력할 겁니다.”하준이 웃었다.“아버지 일은… 어머니께 말씀드려도 괜찮겠습니까?”한병후의 표정이 확 변했다. 한참 만에야 담담히 입을 열었다.“말해도 좋다만 굳이 얼굴을 보고 싶지는 않구나. 그때 내가 란이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어머니가 그렇게 허무하게 돌아가시지는 않았을 것 같구나.”하준은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한병후가 부탁했다.“나에 관해서는 한동안 비밀로 해주었으면 좋겠다. 나가면 대외적으로는 우리 사이의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발표하자. 물론 가디언은 전력으로 기술 이전을 해서 FTT가 이 난관을 뚫고 나가도록 도울 게다.”“고맙습니다.”하준은 갑자기 눈앞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물론 하준은 자기 혼자 힘으로도 재기할 자신이 있었지만 한병후가 도와준다면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일어설 수 있을 터였다.프레지덴셜 스위트 룸에서 나오는 하준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한병후라는 이름이 최란의 삶에서 사라진 지 어언 20여 년이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자기 첫 남편이자 하준의 친부인 한병후를 잊어본 적이 없었다.한병후 때문에 하준을 임신을 하게 되어 자신의 인생이 꼬였기 때문에 원망스러웠다.최란도 한병후는 다시는 자기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그러나 최란이 그렇게 깔보던 그가 지금은 거대한 글로벌 기업의 이사장이 되어 경매에서 추동현에게 망신을 살 뻔한 자신을 구해준 것이다.“잘… 잘 지내디?”한참 만에야 최란이 더듬더듬 물었다.“최소한 어머니께 버림받은 뒤로는 떠돌이 유기견 같은 삶을 살았더군요.”하준은 추동현이 어떻게 한병후를 죽이려고 들었는지 낱낱이 최란에게 이야기해 주었다.최란은 얼이 빠졌다.“그.. 그럴 리가?”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그런 일로 아버지가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얼굴 한쪽이 다 칼 맞은 흉터더군요. 그리고 예전에 술잔에 약을 탄 것은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추동현이었어요. 아버지가 실수로 그 술을 마신 것을 어머니께서 내내 오해하신 거예요.”그 말을 듣고 얼떨떨한 최란의 얼굴을 보면서 하준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자신은 너무나 최란을 닮았다. 어머니가 그랬듯이 여름에게 어리석은 짓을 잔뜩 저질렀다. 지금 최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하준은 잘 알았다.“이 일은 일단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세요. 그리고 아버지를 찾아가지도 마시고요. 우리는 신중히 움직여야 합니다.”그렇게 말하더니 하준은 성큼성큼 걸어 나가 버렸다.최란은 멍하니 그대로 서 있었다.당시 처음 한병후를 만났을 때를 떠올려 보았다. 한병후는 하얀 셔츠를 입고 학생회 회의실에 서 있었다. 세상에 다시 없을 말쑥한 신사로 보였다. 한병후는 그때까지 본 남자 중 가장 똑똑한 남자였다. 다만 말수가 매우 적었다. 그 차가운 얼굴은 늘 자신 곁을 맴도는 추동현과는 사뭇 달랐다.그때 추동현은 재기 넘지는 인간이었고 늘 최란에게 다정했다.한병후의 싸늘함과 비교해 보면 추동현의 따스함이
그러나 최란은 다시 한병후 앞에 나타날 자신도, 면목도 없었다.******화신그룹.여름은 한창 일을 처리하느라 바빴다. 그러다가 불현듯 회의가 끝나고 나서 상혁에게서 온 받지 않은 전화 알림이 생각났다. 그러나 그때는 잠깐 바빠서 완전히 잊고 있었다.여름은 바로 상혁에게 전화를 걸었다.“상혁 씨, 무슨 일이에요?”“…그게, 큰일입니다.”상혁이 슬그머니 자리를 뜨는 상혁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지금 하준은 기분이 좋은 듯 발걸음이 사뭇 가벼웠다.여름은 상혁의 말을 듣고 나니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오늘 오후에 하준이 완전히 넋이 나갔는지 비틀거리는 것을 보았는데 설마 나쁜 생각이라도 한 건 아니겠지….“빨리 말해요.”“그러니까, 회장님이 하늘이와 여울이가 본인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버렸습니다.”상혁은 매우 미안스러운 듯 설명했다.“대체 회장님이 어디서 알아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제게 전화를 하셔서 예전에 제가 의사를 매수해서 강 대표님이 유산을 꾸며내지 않았는지 물으셨습니다. 다 알고 계신 것 같아서 사실대로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점심때 여울이가 양유진의 아이라고 속였는데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거짓말을 다 들켰다고?여름은 울컥했다.“몇 시쯤 물어보던가요?”“2시 반쯤이었습니다.”“……”2시 반이라면 사무실에서 나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이다.어떻게 그렇게 빨리 하늘이의 정체까지 알아버렸을까? 여름은 완전히 당황했다.“최하준은 완전히 몰랐을 텐데. 하늘이의 존재는 알았지만 아이가 나와 양유진의 아이라고만 알고 있엇다고요. 그런데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나머지 상혁 씨에게 그냥 해본 소린데… 상혁 씨가 넘어가서 사실대로 말해버린 거예요.”“그런 겁니까?상혁은 완전히 울고 싶었다.‘그러니까 내가 회장님 낚시질에 당한 거구나.’“그럴 수밖에 없어요.”여름도 울고 싶었다.자신과 양유진 사이에 아이가 있다고 말해서 완전히 마음을 접게 만들 생각이었는데 이제 두 아이가 모두 하준의 아이라는
‘하늘이 날 져버리지 않았어.내가 그렇게 천인공노할 잘못을 저지르긴 했지만 그래도 나에게 이렇게 사랑스러운 딸과 아들을 남겨주셨구나.’생각할수록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왔다.“큰아빠, 왜 그래요?”여울이 당황해서 물었다.하준은 무릎을 꿇고 앉아서 여울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더니 가볍게 말했다.“요,요 앙큼한 녀석!”여울은 영문을 모른 채 이마를 문질렀다.“한 녀석 아니거든요. 난 귀염둥이거든요!”하준은 큭큭 웃었다. 눈은 수정처럼 빛났다.여울은 하준이 이렇게 밝게 웃는 것은 처음 봐서 살짝 얼떨떨한 기분이 되었다.하준이 다시 손을 뻗어 포동포동한 여울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내가 아빠인 거… 다 알고 있었잖아?”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이 녀석이 얼마나 거짓말을 자연스럽게 했던가.평소에는 여름을 이모라고 불렸지만 사실 여름이 엄마라는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그러나 내내 자신을 큰아빠라 부르며 속여왔다.그러니 얼마나 앙큼한 녀석인가?여울은 동그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언제나 총기가 흐르던 여울이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당황했다.아빠가 대체 어떻게 그 엄청난 비밀을 알아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엄마가 다 말해줬어.”하준이 여울의 얼굴을 보고는 거짓말을 시작했다.“우어, 엄마…. 이 배신자.”여울이 발을 굴렀다.“나한테 미리 말도 안 해주고.”하준은 속으로 혀를 찼다. 요 앙큼한 녀석이 몇 번이나 엄마 없는 불쌍한 아이 역할을 해왔던가. 이대로 데뷔해서 스크린에 데뷔해도 될 정도였다.그러나 딸의 그런 영악함조차도 마음에 들었다. 이 정도로 똑똑하다면 남에게 당하지 않을 게 아닌가.“내가 아빠인 걸 다 알면서도 왜 말을 안 했어?”하준이 상처받은 듯한 얼굴로 여울을 바라보았다.“양하한테는 아빠라고 부르면서 나에게는 아빠라고 한 번도 안 불러 주었잖아.”여울이 어이없다는 듯 눈을 굴렸다.“아빠, 아빠가 얼마나 나쁜 짓을 많이 했는지 생각해 봐요. 내가 머리 다쳐서 병원만 안 갔으면 할머니한테 들키지도 않고 아빠네 집에 들
미워한다….그 말이 하준의 심장을 콕콕 찔렀다.‘그러니까 어쨌든 하늘이도 내가 아빠라는 건 알고 있다는 말이구나.’이때 낯선 남자가 하늘이를 데리고 유치원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아마도 그 사람이 서경주의 사촌인 서욱인 모양이었다. 유치원에 기록된 하늘이의 아버지인 것이다.“하늘아….”하준이 여울을 안고 얼른 그쪽으로 다가갔다.하늘은 무표정하게 하준을 쳐다보더니 얼른 서욱을 따라갔다.“하늘아, 할 말이 있어.”하준이 다가오자 서욱이 막아섰다.“죄송하지만 제 아들을 건드리지 마시지요.”서욱이 방어적인 시선으로 하준을 바라보았다.“이 아이는 내 아들입니다.”하준이 진지하게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닮았어. 여름이와 정말 너무나 똑같이 닮았어.’여울이는 하준의 얼굴을 닮고 성격은 여름을 닮았다. 그러나 하늘이의 얼굴은 여름과 똑같고 성격은 자신을 닮은 듯했다.서욱이 인상을 찡그렸다. 하늘이가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싸늘하게 말했다.“저는 아저씨랑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전 아저씨가 누군지도 몰라요.”그러더니 서욱의 손을 잡고 떠났다.하준은 마음이 씁쓸했다. 그러나 여전히 고집스럽게 따라갔다.“하늘아, 네가 날 미워하는 건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인데 이야기는 좀 해봐야 하지 않을까? 나에게 할 말이 한마디도 없니?”“모르는 사람하고는 이야기하지 않아요.”하늘이가 인상을 팍 썼다. 말투는 사뭇 결연했다.“내가 어떻게 모르는 사람이니? 네 친아빠인데. 네 몸에 흐르는 피는 나와 같은 피란다. 그건 변함없는 사실이야.”하준이 고집스럽게 길을 막았다.다툼이 일어나자 유치원에 아이를 데리러 왔던 학부모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엄마…”여울이가 문득 한마디를 했다.하준과 구름이 돌아보니 여름이 차에서 내려 허둥지둥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블랙 원피스에 어깨까지 내려온 풍성한 머리가 흩날려 아름다웠다.하늘이의 눈빛이 살짝 부드러워졌다.“여름아, 마침 잘 왔다.”서욱이 난처한 듯 하준을 쳐다보았다.“이
여름은 백미러를 통해서 하준의 그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자 그냥 한 대 올려붙이고 싶었다.두 아이의 친부가 하준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이제 얼마나 의기양양하겠는가?하늘이가 그 장면을 눈에 넣어놓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냉기를 발산했다.“내가 아저씨였다면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텐데요.”아들에게서 처음 들은 제대로 된 긴 문장이 그런 말이라 하준은 얼굴이 굳어졌다.하늘은 계속 별 호감 없이 말을 이었다.“내가 왜 아저씨를 우리 아빠로 받아들여야 하는데요? 우리한테 뭘 해줬다고요?”하준의 얼굴은 충격으로 하얗게 질렸다.여름은 박수를 치고 싶었다.‘역시 내 아들이야. 저 말발 보소. 네 마음이 네 마음이다, 아주!’“전에는 내가 아무것도 못해줬지만 이제부터는 확실하게 해줄 거야.”하준이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내가 최면에 걸리지만 않았으면 네 엄마를 그렇게 대하지 않았을 거야. 원래 대로였다면 너희 둘이 태어나기를 엄청 고대했을 거란다.”“흥!”하늘이 싸늘하게 콧방귀를 뀌었다.“다 큰 어른이 다른 사람에게 최면이나 걸리고, 부끄럽지도 않나요?”“……”하준은 다시 큰 절망을 느꼈다.하늘이 말을 이었다.“대체 저런 사람이 어떻게 국내 최고의 재벌이었을까? 그러니 오래 못 가고 망했지.”“……”아들의 독설은 그야말로 자신을 똑 닮은 것이었다.‘뭐, 내 아들이 날 닮은 거니 어쩌겠어? 아무리 독한 소리를 해도 꾹 참아야지.’“그래, 네 말이 맞다.”하준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엄지를 치켜올렸다.“자기야, 역시 자기가 낳은 아들이네. 아주 촌철살인이야. 내가 저런 머리가 있었으면 아내와 아이들을 잃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텐데.”여름과 하늘은 할 말을 잃었다.아내와 아이를 되찾겠다고 그야말로 자존심도 다 버렸구나 싶었다.여울은 멍하니 하준을 바라보더니 결국 푸흡하고 웃었다.“아빠 귀엽다.”하준은 당황했다. 다 큰 성인 남자에게 귀엽다니 예전 같았으면 벌컥 화를 냈겠지만 상대가 자기 딸이다 보니 웃을 수밖에 없었다.“아빠
“내 말이 틀려?”하준이 자기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자기야, 남자는 성모 마리아가 아니라고. 양유진이 아이들에게 잘해준 건 순전히 당신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야. 아이들에게 잘해주지 않으면 당신이 자기를 쳐다도 안 볼 거라는 사실을 다 알기 때문이지.”“그렇다고 해도 아저씨 보다는 훨씬 좋았어요.”하늘이 말대꾸했다.“우리가 배 속에 있을 때 다른 아줌마한테 우리를 줘서 키우게 할 거라고 그랬다면서요? 우리 엄마한테서 떼어내서요. 아저씨는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하준은 민망했다. 여름이 그런 얘기까지 아이들에게 했을 줄은 몰랐다.여울이 큰 소리로 외쳤다.“난 나쁜 새엄마는 싫어! 우리 엄마가 좋아!”“나쁜 새엄마는 없어. 이제 아빠는 엄마만 좋아해.”하준이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이제 죽을 때까지 엄마 한 사람만 사랑할 거야.”쌀쌀맞던 하늘이 갑자기 우웩~하는 얼굴을 해 보였다.“우웩! 가식적이야.”“……”하준은 충격을 받았다.흙색이 된 하준의 얼굴을 보니 여름은 어쩐지 웃겼다.결국 여름은 하준이 말했던 어린이 레스토랑으로 차를 몰았다.하준은 아이들 비위를 맞춰주고 싶었으나 여울의 취향은 잘 알았지만 하늘이 뭘 좋아하는지는 전혀 몰랐다. 결국 레스토랑에 있는 어린이 메뉴는 다 시켰다.“됐어. 너무 많이 주문하지 마. 낭비잖아.”여름이 말렸다.하준이 입을 열기도 전에 여울이 말을 가로챘다.“아니야, 아니야. 그동안 아빠가 하나도 안 사줬잖아. 괜찮아.”여름이 여울을 쿡 찔렀다.“맛있는 거 잔뜩 먹고 싶어서 그러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그렇게 많이 먹다가 충치 생긴다.”“내가 뭘? 이모가 항상 기회가 있으면 얻어먹으라고 했는데.”여울이 가슴을 쭉 펴고 당당하게 말했다.여름은 이마를 짚었다. 임윤서는 대체 애들에게 뭔 쓰잘 데 없는 거 가르친 거야 싶었다.하준은 여름과 두 아이를 보면서 어느새 눈빛이 부드러워졌다.이런 여자와 아이들 곁에 평생 있어 주고 싶었다.음식이 차려지자 여울은 앞받이를
“엄마도 특공 무술 어느 정도 해요. 민관이 삼촌도 가르쳐 줄 수 있고요.”하늘이 문득 분노를 터트렸다.“아, 아저씨가 민관이 삼촌 손가락을 없애 버렸지.”순간적으로 하준은 괜히 무공 얘기를 꺼냈다 싶었다. 그러나 계속 피할 수만은 없는 일도 있는 법이다.“그래, 네 말이 맞다. 정말이지 내 손가락을 잘라서라도 그 친구에게 보상을 해주고 싶은 심정이란다.”하늘이 인상을 썼다.“거짓말!”“여기 다른 사람이 없으면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데.”하준은 전혀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어쨌든 내 무공이 민관이 삼촌보다 뛰어나. 네 엄마는 내 상대가 되지도 못한다고. 못 믿겠다면 엄마에게 물어봐.”부자의 시선이 내내 아무 말도 않고 있던 여름에게로 향했다.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 3년 동안 죽도록 수련한 무공을 자기보다 못하다고 대놓고 말하다니 아들 앞에서 체면이 뭐가 되겠는가?여름의 시선에 하준은 살짝 마음이 떨렸다.“뭐, 하지만 겨루기 방식에 따라서는 내가 도저히 엄마한테 이기지 못하는 것도 있기는 하지.”“뭔데요?”하늘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하준은 주먹을 쥐고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눈빛이 미묘했다.여름은 바로 알아들었다. 얼굴로 열기가 올라왔다. 테이블 아래로 하준을 세게 걷어찼다.‘애 앞에서 무슨 소리야!’하준은 아픈데도 씩 웃었다.“엄마랑 나 사이의 비밀이야.”하늘은 얼굴이 빨개진 엄마를 보며 어리둥절해졌다.아무리 생각해 봐도 엄마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이슬을 머금은 새벽 장미처럼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런 모습은 유진 아저씨와 있을 때는 본 적이 없었다.하늘은 마음이 무거워지며 미간을 찌푸렸다.하준이 말을 이었다.“그리고 수영도 가르쳐 줄 수 있지.”“수영은 나도 할 수 있거든요”하늘이 우습다는 듯 말했다.“자유형, 접영, 평영, 배영 다 할 주 알아?”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자신에게는 어린애 장난이나 다름없는 일로 아이를 꼬드기는 수단을 삼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난 다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