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이 틀려?”하준이 자기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자기야, 남자는 성모 마리아가 아니라고. 양유진이 아이들에게 잘해준 건 순전히 당신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야. 아이들에게 잘해주지 않으면 당신이 자기를 쳐다도 안 볼 거라는 사실을 다 알기 때문이지.”“그렇다고 해도 아저씨 보다는 훨씬 좋았어요.”하늘이 말대꾸했다.“우리가 배 속에 있을 때 다른 아줌마한테 우리를 줘서 키우게 할 거라고 그랬다면서요? 우리 엄마한테서 떼어내서요. 아저씨는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하준은 민망했다. 여름이 그런 얘기까지 아이들에게 했을 줄은 몰랐다.여울이 큰 소리로 외쳤다.“난 나쁜 새엄마는 싫어! 우리 엄마가 좋아!”“나쁜 새엄마는 없어. 이제 아빠는 엄마만 좋아해.”하준이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이제 죽을 때까지 엄마 한 사람만 사랑할 거야.”쌀쌀맞던 하늘이 갑자기 우웩~하는 얼굴을 해 보였다.“우웩! 가식적이야.”“……”하준은 충격을 받았다.흙색이 된 하준의 얼굴을 보니 여름은 어쩐지 웃겼다.결국 여름은 하준이 말했던 어린이 레스토랑으로 차를 몰았다.하준은 아이들 비위를 맞춰주고 싶었으나 여울의 취향은 잘 알았지만 하늘이 뭘 좋아하는지는 전혀 몰랐다. 결국 레스토랑에 있는 어린이 메뉴는 다 시켰다.“됐어. 너무 많이 주문하지 마. 낭비잖아.”여름이 말렸다.하준이 입을 열기도 전에 여울이 말을 가로챘다.“아니야, 아니야. 그동안 아빠가 하나도 안 사줬잖아. 괜찮아.”여름이 여울을 쿡 찔렀다.“맛있는 거 잔뜩 먹고 싶어서 그러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그렇게 많이 먹다가 충치 생긴다.”“내가 뭘? 이모가 항상 기회가 있으면 얻어먹으라고 했는데.”여울이 가슴을 쭉 펴고 당당하게 말했다.여름은 이마를 짚었다. 임윤서는 대체 애들에게 뭔 쓰잘 데 없는 거 가르친 거야 싶었다.하준은 여름과 두 아이를 보면서 어느새 눈빛이 부드러워졌다.이런 여자와 아이들 곁에 평생 있어 주고 싶었다.음식이 차려지자 여울은 앞받이를
“엄마도 특공 무술 어느 정도 해요. 민관이 삼촌도 가르쳐 줄 수 있고요.”하늘이 문득 분노를 터트렸다.“아, 아저씨가 민관이 삼촌 손가락을 없애 버렸지.”순간적으로 하준은 괜히 무공 얘기를 꺼냈다 싶었다. 그러나 계속 피할 수만은 없는 일도 있는 법이다.“그래, 네 말이 맞다. 정말이지 내 손가락을 잘라서라도 그 친구에게 보상을 해주고 싶은 심정이란다.”하늘이 인상을 썼다.“거짓말!”“여기 다른 사람이 없으면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데.”하준은 전혀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어쨌든 내 무공이 민관이 삼촌보다 뛰어나. 네 엄마는 내 상대가 되지도 못한다고. 못 믿겠다면 엄마에게 물어봐.”부자의 시선이 내내 아무 말도 않고 있던 여름에게로 향했다.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 3년 동안 죽도록 수련한 무공을 자기보다 못하다고 대놓고 말하다니 아들 앞에서 체면이 뭐가 되겠는가?여름의 시선에 하준은 살짝 마음이 떨렸다.“뭐, 하지만 겨루기 방식에 따라서는 내가 도저히 엄마한테 이기지 못하는 것도 있기는 하지.”“뭔데요?”하늘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하준은 주먹을 쥐고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눈빛이 미묘했다.여름은 바로 알아들었다. 얼굴로 열기가 올라왔다. 테이블 아래로 하준을 세게 걷어찼다.‘애 앞에서 무슨 소리야!’하준은 아픈데도 씩 웃었다.“엄마랑 나 사이의 비밀이야.”하늘은 얼굴이 빨개진 엄마를 보며 어리둥절해졌다.아무리 생각해 봐도 엄마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이슬을 머금은 새벽 장미처럼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런 모습은 유진 아저씨와 있을 때는 본 적이 없었다.하늘은 마음이 무거워지며 미간을 찌푸렸다.하준이 말을 이었다.“그리고 수영도 가르쳐 줄 수 있지.”“수영은 나도 할 수 있거든요”하늘이 우습다는 듯 말했다.“자유형, 접영, 평영, 배영 다 할 주 알아?”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자신에게는 어린애 장난이나 다름없는 일로 아이를 꼬드기는 수단을 삼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난 다
처음으로 아들에게 그런 시선을 받은 여름은 하준을 노려보았다.‘아들 앞에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거야 그렇다고 치지만 왜 꼭 날 물고 늘어지는 거야?’여름이 화난 것을 눈치 채고 하준은 얼른 헛기침을 했다. 얼른 스테이크를 잘라서 여름의 접시에 놓아주었다.“물론 엄마는 그림을 가르쳐줄 수 있지. 엄마는 세계 최고의 설계 디자이너거든. 공원에 가서 새와 꽃을 함께 봐줄 수도 있고….”“됐거든. 입 다물어.”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고는 스테이크를 콱콱 찍어서 먹고는 여울이를 찾으러 갔다.“엄마한테 미움 샀네요.”하늘이 결론을 내리더니 포크를 내려 놓았다.“다 먹었어요.”그러더니 의자에서 폴짝 뛰어 내려 엄마와 여울을 찾으러 갔다.하준도 급히 플레이 파크 쪽으로 따라갔다.여름은 여울이가 미끄럼틀 타는 것을 봐주고 있었다.하늘이는 잠깐 놀더니 흥미를 잃고 곧 레고 블록 테이블로 갔다.하준은 조용히 곁에 앉아서 가만히 블록을 쌓기 시작했다.잠시 후 하늘은 하준이 항공모함을 만드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자기가 만들던 놀이터를 보니 매우 하찮아 보였다. 갑자기 레고가 재미 없어졌다.“하늘아, 이거 난 못하겠다. 좀 도와줄래?”하준이 갑자기 간절하게 하늘을 바라보았다.“포탄을 못 찾겠어.”하늘이가 인상을 팍 쓰더니 결국 옆에 앉아서 포탄을 찾아 하준에게 건넸다.“오, 대단한데! 고마워!”하준이 받아 들었다.“이쪽에 좀 끼워 줄래? 난 이쪽을 할게.”하늘은 잠시 망설이더니 결국은 바짝 붙어 앉았다.여름이 땀에 절은 여울이를 데리고 오다가 부자가 모여 앉아 거대한 항공모함을 주물럭거리고 만드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 모습을 보자 어쩐지 마음이 심란했다.하준에 대한 하늘이의 가드가 많이 내려갔구나 라는 게 느껴졌다.하늘이는 머리를 쓰는 장난감을 좋아하는데 여름은 그런 게 어쩐지 귀찮았다. 그래서 평소에는 혼자서 이리저리 궁리를 하고 양유진이 가끔 봐주는 식이었다.그러나 친아빠가 아닌 양유진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넷은 어린이 레스토랑 놀이터에서 8시까지 놀았다.하준이 농구 기술을 보여주겠다며 아이들과 여름을 데리고 농구장으로 갔다.한창 경기가 진행 중이었다.하준이 리더에게 가서 귓속말을 몇 마디 하더니 곧 경기복을 하나 얻어 입었다.안 그래도 훤칠한데 농구복을 입으니 관중석에서 경기를 보던 여학생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저기 3번 누구야? 완전 잘 생겼어!”“너도 봤어? 진짜 잘생겼다. 저런 남친 하나 있으면 좋겠네.”“그런데 저 선수 어쩐지 예전에 재벌이었던 최하준 닮지 않았냐?”“최하준이 이런 대회에 왜 나와? 그리고 저 얼굴 봐라 끽해야 스물한두 살이지.”“꺄아아아! 와, 저렇게 먼 데서 그대로 3점 슛을 쏜다고? 들어갔네? 대박!”“얼굴만 잘생긴 줄 알았더니 농구도 완전 잘해. 나 이 자리에 누울게!”“……”여학생들이 떠드는 소리가 여름과 아이들 귀에 그대로 들어왔다.여름은 당황했다. 농구장에서 뛰어다니는 하준은 확실히 근사했다.어렸을 때 봤던 농구 만화의 주인공과 비교해 봐도 하준 쪽이 훨씬 압도적인 미모였다.게다가 농구 기술도 좋아서 3점 슛뿐 아니라 블로킹, 스틸 등의 기술도 다른 선수들을 압도했다.경기장이 거의 하준의 독무대였다.원래 지고 있던 소속팀은 곧 사대 팀을 따라잡으며 점수 차를 좁혀갔다.여울은 흥분해서 박수를 쳤다.“아빠, 최고다! 파이팅!”딸에게 응원을 받은 하준은 약이라도 맞은 듯한 기분이 되었다.경기를 구경하던 남자 아이가 부러운 듯 여울에게 말했다.“너네 아빠냐? 진짜 농구 잘한다.”“응. 우리 아빠가 농구를 좀 잘해.”여울이 자랑스럽다는 듯 턱을 치켜 올렸다.남자아이의 엄마가 웃었다.“아빠가 엄청 자랑스러운가 보구나.”여울이 으쓱해 하니 하늘이 옆에서 말을 보탰다.’”나중에 우리도 가르쳐 준댔어요.”“와 정말 좋겠다.”남자 아이가 웃었다.하늘은 더는 말하지 않고 그저 코트에서 눈부시게 활약하는 아빠의 모습을 눈으로 좇을 분이었다.아빠라는 게 뭔지 예전에는 몰랐다.남들은 다 있는
하늘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랑스러운 듯한 표정만 보아도 이미 하준의 말에 동의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여름이 물었다.“보니까 정식 경기던데 대체 어떻게 들어간 거야?”“간단하지. 재단에 기부를 좀 크게 하겠다고 했어. 매일 하러 오라고 하던데?”하준이 웃었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 속으로 한 마디 뱉었다.‘어이구 돈 귀신들.’그때 휴대 전화가 울렸다.양유진이었다. 이름을 확인하더니 여름의 표정이 굳어졌다.잠시 후 부자연스럽게 휴대 전화를 들고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여름 씨, 어디예요? 꽤 시끄럽네요.”양유진의 저음이 울렸다.“언제 돌아와요?”“하늘이 데리고 놀러 왔어요. 조금 있다가 돌아갈게요.”여름이 다소 어색하게 답했다.“하늘이랑 놀면서 난 왜 안 불렀어요?”양유진이 웃었다.“다음에는 꼭 부를게요.”여름은 대충 둘러대고 전화를 끊었다.돌아서면서 보니 하준과 아이들이 뒤에 서 있었다.하준의 어두운 시선으로 여름을 바라보았다.“양유진이 빨리 오래요?”“늦었잖아. 내일 애들 유치원도 가야 하는데.”여름이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그래. 그럼 돌아가. 여울이는 원래 나랑 지냈으니까 같이 가는 거고, 오늘은 하늘이도 내가 좀 데리고 가서 잘까 싶은데. 내일 아침에 바로 유치원에 데려가 줄게.”여름이 쓸데없는 생각을 할까 싶어 한 마디 덧붙였다.“아이들 빼앗으려는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하늘이 어차피 당시 아버지 댁으로 보낼 거잖아? 시간도 늦었는데 가까운 우리 집으로 가는 게 낫지.”여름은 그 말을 듣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서명산으로 가려면 확실히 차로 40~50분은 걸린다. 이 시간에 거기까지 가려면 좀 늦어지긴 한다.“하늘이는 어떻게 하고 싶어?”하늘이는 입술을 깨물고 잠시 침묵했다. 여울이가 하늘이 손을 잡았다.“같이 잔 거 너무 오래됐는데 같이 가자. 내일 외할아버지네 가면 되잖아?”“…그래.”하늘이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여름은 더는 뭐라고
우리 네 식구라….여름은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다.한참 뒤 양유진의 목소리가 들렸다.“여름 씨, 계속 거기 서서 뭐 해요”“아, 아무것도 아니에요.”여름은 얼른 휴대 전화를 내려놓고 따스한 양유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저는 목욕 좀 할게요.”여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양유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대체 어딜 다녀온 거지?’어쩐지 분명 강여름이 곁에 있는데도 나날이 더욱 손에 잡히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위층에 올라가니 침실 문이 이미 닫혀있었다.양유진은 처음으로 노크 없이 들어섰다. 욕실에서 솨아아 하는 샤워 소리가 들렸다.밤이 깊으니 양유진은 어쩐지 심장이 간질간질해졌다.내일이면 전수현에게 가서 풀고 올 수 있을 테고 색다른 맛이 있는 백지안도 있으니 그렇게 욕정을 풀 곳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그러나 그 둘은 역시 여름보다 못했다.여름의 미모는 독보적인데다 커다란 눈망울이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고 굴곡이 확실한 몸도 보기 드문 것이었다.양유진은 진작부터 여름이 자신의 몸 아래서 울부짖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그 남자의 위협만 아니었다면….양유진이 음험한 눈을 하고 주먹을 꽉 쥐었다.******여름은 샤워를 하고 나오다가 침대에 앉아 있는 양유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무의식적으로 가슴을 더 여몄다.평소 침실 문을 닫고 들어오면 양유진이 들어오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차츰 습관이 되어 샤워하고 나올 때는 좀 편하게 나왔던 것이다.여름이 얼른 가리긴 했지만 양유진의 눈에는 풍만한 여름의 가슴이 포착되었다. 게다가 살짝 젖은 머리가 흘러내린 모습은 가히 매혹적이었다.순간적으로 목욕을 하고 나왔던 여름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전수현과 백지안은 평소 화장을 잘하고 다녔는데 어쩐지 그 얼굴에는 키스하고 싶은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여름 씨….”양유진의 눈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무슨 일이라도 있나요?”양유진의 눈빛에 여름은 당황했다.“별일 없이 그냥 여름 씨를 보러 오면 안 되나요?”양유진의 목젖이 꿀꺽했다
여름은 힘껏 밀어냈다.그러나 양유진은 미친 것처럼 고집을 부렸다. 피부가 마찰되어 아플 지경이었다.결국 여름은 손에 잡히는 베개를 휘둘러 양유진의 머리를 내리쳤다.순간 고개를 든 양유진의 눈에는 모골이 송연하도록 싸늘한 한기가 넘쳐 흘렸다.달빛 아래 비친 양유진의 얼굴에 여름은 몸을 떨었다. 그런 양유진은 너무나 공포스러웠다.그렇다. 공포스러운 모습이었다.여름이 양유진에게 공포를 느끼는 날이 오다니.그러나 몇 초 뒤에 양유진은 다시 부드러운 표정을 회복하더니 실망과 고통이 섞인 얼굴을 했다. 여름은 방금 자기가 뭘 잘못 본 게 아닐까 싶었다.“그렇게나 내가 싫습니까?”양유진이 눈시울을 붉히며 여름을 바라보았다.“아, 아뇨. 싫어하지 않아요.”여름이 몸을 옹송그렸다. 절망적인 느낌으로 입을 열었다.“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여름도 하고 싶지만 몸이 이렇게 거부하는 걸 어쩌겠는가?그런데 오늘 하준이 입을 맞출 때는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았었다.하준에게서 나는 냄새마저도 좋아했다.하준에게서 키스를 받으면 이성이 날아가고 머리가 하얗게 비어 버리는 경험을 하곤 했다.여름의 몸은 아무래도 하준에게 익숙해져서 다른 남자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되어버린 듯했다.여름도 미칠 지경이었다.“유진 씨, 우리….”“그만.”양유진이 갑자기 여름의 말을 막았다.눈에는 당황스러움과 절망이 가득했다.“날 나무라지는 말아주세요. 여름 씨를 그 오랜 세월 사랑했고 어렵사리 결혼까지 했어요. 이제 마침내 여름 씨와 함께하게 되었는데 아직도 날 이렇게 거부하다니 대체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네요.”여름은 말문이 꽉 막혔다.야유진의 말은 여름의 죄책감을 더했다. 그러나 이상하게 마음도 더 닫혀버렸다.여름은 어쩔 줄을 몰랐다.“쓸데없는 생각 말고 쉬어요. 더는 강요하지 않을게요. 나 때문에 놀랐죠? 오늘은 내가 잘못했어요.”양유진이 여름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돌아서 나갔다.문을 나설 때 양유진의 눈은 한기로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강여름, 내가
“하준아, 혹시 뭐 약이라도 잘못 먹었니?”장춘자가 떠보듯 물었다.“……”최란이 다가와 물었다.“두 분 주방에서 뭐 하세요?”“얘, 하준이가 오늘은 아침상을 차린다는구나.”최대범이 진지하게 말했다.최란은 앞치마를 두른 하준을 보고 깜짝 놀랐다.“잘됐네요. 남이 해주는 밥은 그렇게 안 먹더니 제 손으로 해 먹으면 더 잘 먹으려는지도 모르죠.”“……”하준은 화가 났다.“기분이 좋아서 웃는 거거든요.”“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러니?”장춘자가 수상쩍다는 듯 물었다. 운형은 지적 장애가 왔고 최진은 의욕을 잃었고 최민은 종일 남을 원망하며 울고불고할 뿐이다. 마음을 좋게 먹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면 장춘자도 진작에 쓰러졌을 것이다.최란은 한병후를 떠올렸다.아버지가 돌아왔다고 저렇게 기뻐하다니, 예전에 하준은 얼음처럼 차가웠는데 한병후가 돌아오자 완전히 사람이 달라진 것 같았다. 역시나 핏줄은 당기는 모양이었다.“금방 아시게 될 거예요.”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날아갈 듯한 기분이 보이는 듯했다.장춘자와 최대범은 어리둥절해졌고 최란은 긴장했다.두 노인네가 나가고 나서야 최란은 두근두근하는 마음을 안고 하준에게 다가갔다.“설마… 네 아버지가 온다고 했니?”잔뜩 긴장한 최란이 얼굴을 보고 하준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지금 아버지는 함부로 우리와 교류할 수 없는데 여길 어떻게 오시겠어요?”“… 그건 그렇구나.”최란이 눈을 깔더니 한숨을 내쉬었다.“왜요? 아버지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 생각나십니까?”“…그렇다기보다 네 아버지에게 미안한 마음은 있지.”최란이 힘없이 답했다.게다가 최란은 그럴 면목도 없었다.“그러면 됐습니다. 저는 어머니도 저처럼 후회가 되어 견딜 수 없나 싶었습니다.”하준이 말을 이었다.“최소한 저는 백지안이랑 결혼하지는 않았고, 백지안과 사이에 아이를 만들지도 않았거든요.”최란은 어이가 없어서 하준을 노려보았다.“그렇게 잘난 척하면서 그런 소리를 꼭 해야겠니?최소한 나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