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욕실에 있는 송영식은 열이 뻗쳐서 머리가 터져버릴 지경이었다.어쨌거나 지금 마땅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아, 몰라. 그렇다고 내가 지금 자기 화장실에서… 그걸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할 수도 없잖아.젠장.’몇 분 후 송영식이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 윤서가 코를 막고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임윤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하고는, 아주 신났구먼.”“내가 올 걸 알고 일부러 날 꼬드기려고 기다리고 있었지?”“뭐라는 거야, 지금?”임윤서는 혈압이 확 올랐다.“여긴 내 집에 내 방이거든. 문도 안 두드리고 마구 쳐들어온 주제에 어디서 큰 소리야? 따귀라도 한 대 맞아야 정신을 차리려나?”“나한테 꿍꿍이가 있는 줄 내가 모를 줄 알아?”송영식이 싸늘하게 웃었다.“어젯밤에 지안이한테 뭐라고 했어? 날 사랑하게 되었다고? 날 유혹해서 지안이와 나 사이를 갈라놓겠다고? 아주 흑심이 가득하구먼!”“내, 내가 누굴 사랑해?”임윤서의 눈이 커졌다.“흥! 다 알면서. 어제 당신이 지안이한테 한 말이잖아!”송영식이 싸늘하게 말했다.윤서는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아이 씨, 진짜로 여름이 말이 맞잖아?’“백지안 약 올리려고 한 소리지. 전에 백지안이 나랑 여름이를 얼마나 괴롭히…”“됐어! 강여름에게 당한 쪽은 오히려 지안이라고.”송영식이 소리를 지르며 윤서의 말을 끊었다.“그딴 헛소리 듣기도 싫으니까 내 집에서 나가.”윤서는 너무 열이 올라서 이러다가는 임신을 유지하는 데 문제가 있겠다 싶어서 고개를 돌리고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거기 서!”송영식이 따라갔다.“지금 당장 병원 가자고.”“병원을 왜?”“수술해야지.”송영식은 이미 결심을 내렸다. 윤서가 주제 파악을 하고 얌전히 있으면 아이를 낳아도 문제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젯밤 지안의 말을 들어보니 임윤서는 더할 나위 없이 교활한 기회주의자인 듯했다. 이대로 임윤서와 얽힐 수는 없었다.“뭐래? 미쳤나?”저도 모르게 임윤서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내, 내가….”송영식이 후다닥 내려와 윤서를 안아 올리려고 했다.그러나 여름이 와락 밀어내더니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았다.“저리 가! 그렇게나 자기 자식을 없애고 싶었어? 안고 가는 척하면서 애한테 해코지하려고?”“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내가 무슨 악마같잖아?...헉! 출혈이….”송영식은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임윤서가 고개를 들어 보더니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아래가 너무 아파.”“움직이지 마. 이모님, 좀 도와주세요. 같이 윤서를 데리고 나가죠.”여름이 급히 조현미를 불렀다.조현미는 송영식이 수술을 하러 가자고 으르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차마 송영식에게 도와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여름과 함께 윤서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구급차가 곧 도착해 병원으로 옮겼다.가는 길에 윤서는 통증 때문에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솟았다.병원에 도착하자 윤서는 바로 응급실로 들어갔다.여름은 바로 송윤구에게 전화를 걸었다.“아드님이 미는 바람에 윤서가 계단에서 굴렀습니다. 지금 바로 병원으로 와주시겠어요? 이번 일에 대해서 합당한 해명을 좀 해주시면 좋겠습니다.”통화내용을 들은 송영식은 당황했다.“이봐, 그게 무슨 소리야? 난 밀지 않았다고, 임윤서가 혼자서…”송영식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여름이 송영식의 어깨를 팍 쳐서 밀었다.“이게 무슨 짓이야?”송영식이 와락 여름을 잡으려고 했다.그러나 여름은 잽싸게 피하면서 도리어 송영식의 팔을 잡아 업어치기로 바닥에 내려꽂았다.“억! 으아아….”송영식은 척추 골절이 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팠다.“자기 아픈 건 느껴지나 봐? 하지만 지금 당신이 느끼는 아픔은 윤서의 고통과는 비교도 안 되는 거라고!”여름은 분노에 차서 노려보았다.“호랑이도 제 새끼는 잡지 않는 법인데, 윤서에게는 애정이 없다고 쳐도 뱃속에 든 아이는 당신 아이라고. 아무리 백지안이 좋아도 사람이 자기 자식에게 이렇게 인면수심일 수 있는 거야?”“정말 내가 민 게 아니라니까. 자기가 미끄러졌다고.”송영식은
“아, 아니, 아버지. 저는...”“난 너같이 독한 자식 둔 적 없다.”전유미가 완전히 실망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그렇게 알아듣게 이야기를 했는데도 네가 이렇게 나오니 정말 실망스럽구나. 가거라. 앞으로 우리는 너와 아무 관계도 아니다.”송영식은 입맛이 썼다. “정말 제가 밀친 게 아닙니다. 손자와 임윤서 때문에 저를 버리시겠다는 말씀이에요?”“아직 이해가 안 되나 보네. 사람으로서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라는 게 있는 거야. 하지만 넌 그 선을 넘었어. 너 같은 인간은 내 아들이 될 자격이 없다. 우리 집안에 남겨둘 수도 없어.”송윤구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나가! 꼴도 보기 싫다!”송윤구 내외는 마음이 완전히 싸늘하게 식어버렸다.송영식은 입이 떡 벌어져서 부모님의 증오에 찬 시선을 바라보다가 결국 돌아서서 자리를 뜨고 말았다.이제 아무도 백지안과 사귀는 것을 방해할 사람이 없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런데 어쩐 일인지 즐겁지가 않았다. 오히려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이렇게까지….”여름도 송윤구가 송영식을 집안에서 축출할 줄은 몰랐다. 어쨌든 사건의 전말을 송윤구 부부에게 이야기했다.“어쨌든 이번 일은 영식이 잘못이지. 그 녀석이 수술을 하러 가자고 임 총감을 끌고 가려고 하지만 않았어도 벌어지지 않을 일이었어요.”송윤구가 한숨을 내쉬었다.“우리가 잘못 키웠지. 난 영식이가 그래도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착해 빠진 녀석이 백지안에게 완전히 홀려서 정신을 못 차리게 되어 버렸어.”여름의 미간이 깊은 주름을 만들었다.“하지만 그러면 아이는….”“섣불리 수술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이번 일은 우리가 임 총감에에게 큰 빚을 진 거예요. 우리가 책임지겠어요.”전유미가 말했다.“오는 길에 우리가 아버님하고 통화해서 상의를 했는데 아버님은 서방님이 임 총감을 양녀로 삼으면 어떨까 하시더라고요. 앞으로 대통령의 양녀가 된다면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테니까요.”여름은 깜짝 놀랐다.송태구의 양녀가
“물론이지. 우리도 이미 영식이와 부모 자식 관계는 끊어버렸어. 이미 실질적인 관계 단절을 위한 여러 조치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공개적으로 발표도 할 거고.”송윤구가 거침없이 말했다.송영식이 가족이 이렇게 일사천리로 바로 일을 처리하는 데에 임윤서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나 집안의 지원이 사라진 송영식은 얼마나 울분이 터질까 생각하니 은근히 시원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과연 백지안은 송영식과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도 관전 포인트였다.******오후 2시.쿠베라 공식 계정에서 발표가 났다.-쿠베라의 송윤구 대표 이사장은 송영식 씨와 부자 관계를 단절함을 알려드립니다. 따라서 앞으로 쿠베라는 송영식 씨와 어떤 관계도 없습니다. 가족들과의 왕래도 금지하며 모든 재산에 대한 상속권도 박탈당하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서로의 길을 잘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이어서 송근영도 입장을 밝혔다.-나 송근영은 앞으로 송영식 씨와 더 이상 남매 관계가 아님을 밝혀둡니다.동생 송신홍도 발표했다.-송신홍은 송영식 씨와 형제 관계를 단절합니다.송태구의 발표문도 있었다.-송영식 씨는 나 송태구와 친지 관계가 단절됨을 알려드립니다.“……”전국이 떠들썩해졌다.-송영식이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길래 집에서 쫓겨난 거야? 식구들이 하나둘 관계 단절을 선언하네?-송영식은 바보인가? 그 많은 재산을 가진 아버지, 누나와, 앞으로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삼촌까지 다 적으로 돌렸나 봐. -송영식이 곧 죽어도 백지안이랑 사귀겠다고 해서 그런 거 아니야? 그 집에서 백지안 탐탁지 않아 했잖아? 약혼녀인 임윤서를 좋아하는 것 같던데.-대통령 나올지도 모르는 집안에 백지안 같은 인간을 들일 리가 없잖아?30분도 안 돼서 송태구가 임윤서의 사진을 SNS에 게시했다.-아내와의 사이에 딸이 하나 있었으면 하고 바랐는데 아들 하나뿐인 것이 아쉬웠는데 다행히도 아내와 임윤서 씨의 사이가 좋아서 우리 부부는 임윤서 씨를 우리 딸로 입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조카며느리가 되지 못한다
너무 힘들어서 누군가의 위로가 절실히 필요했다. 송영식은 백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지안아, 나 이제 임윤서랑 결혼하지 않아도 돼…. 그런데 집에서 쫓겨났어. 넌… 그래도 상관없지?”“다…당연하지. 네가 이렇게까지 해 줘서… 가, 감동했어.”백지안은 튀어나오려는 욕을 꾹 참았다.“너희 식구들이 그 정도로 날 싫어한다는 건 다 알고 있던 일이잖아. 난…”“아니, 아무 말도 하지 마. 난 이미 결심했어. 이제 임윤서가 아이를 낳아도 나하고는 전혀 상관없어.”송영식이 얼른 백지안의 말을 끊었다.임윤서를 생각하니 백지안은 울컥했다.“아, 그런데 너희 삼촌은 어쩌자고 걔를 양녀로 삼으셨대?”‘장차 대통령이 될 사람의 딸이라니. 친딸이 아니더라도 굉장하잖아?앞으로 굉장히 좋은 집안사람을 만나서 결혼할 거 아냐?’“아마도 식구들이 죄책감에 내놓은 대책인 것 같아.”송영식도 마음이 답답했다.“뭐, 됐어. 실컷 그러라지. 걔가 얼마나 음흉한 인간인데. 어쨌거나 걔 소원대로 이루어져 버렸네.”‘뭘 실컷 그러라고 해?’백지안은 임윤서가 얄미워서 마구 욕을 퍼붓고 싶은 심정이었다.이제 임윤서가 부러워 죽을 지경이었다.‘임윤서가 뭐라고 거지 같은 게 대통령의 딸이 된단 말이야? 나라도 송영식을 버리고 대통령의 딸이 될 수 있다면 당장 그러겠다!송영식을 독차지하면 뭐 해?이제 쿠베라의 지원이 없으면 오슬란 경영을 아무리 잘해 봤자, 그냥 일개 화장품 회사 사장이잖아? 게다가 쿠베라와의 인연도 끊어졌으니 앞으로 사업적으로도 크게 곤란해질 텐데. 다들 송영식 따위 무시할 텐데.이제는 나보다 더 가난한 녀석이 되어 버리겠는걸.’“영식아, 마음이 너무 아프겠다. 일단 좀 쉬어. 아니면 집에 가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던지.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잖아.”그러더니 백지안은 전화를 끊었다.송영식은 얼떨떨한 채로 멍하니 있었다. 사실은 백지안과 이야기를 하며 답답함을 풀고 싶었는데…송영식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야, 지금 기분 너무 안
임윤서는 갑자기 속마음을 풀어놓았다.“요즘 거지 같은 남자들도 많은데 애를 낳고 평생 그냥 결혼을 안 하는 것도 괜찮겠어.”“인생 아직 모르는 거야. 더구나 앞으로 든든한 정재계 배경을 두게 되면 더 괜찮은 남자들이 널 따라다니게 될걸.”임윤서가 웃었다.“그런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파티에서 내가 화려하게 등장해서 지나가다가 송영식이랑 윤상원 두 나쁜 자식은 구석에서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거야. 그러면 내가 ‘저 쓰레기는 당장 끌어내세요. 저런 인간들을 보다가 내 눈 버릴라.’ 하는 거야.”마침내 여름도 미간을 펴고 웃을 수 있었다. 농담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밥을 다 먹고 났을 때 여름은 양유진의 전화를 받았다.“미안해요. 오늘은 집으로 못 들어갈 것 같아요. 윤서에게 이런 일이 생겨서….”“괜찮아요. 친구니까 이럴 때 함께 있어 줘야죠.”양유진이 다정하게 말했다.“몇 호실에 있어요? 내가 잠깐 보러 갈 게요.”“아니, 그러지 말아요. 오늘 사람들이 너무 많이 찾아와서 윤서도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요.”“그래요. 그럼 내일 갈게요.”양유진이 잠시 말을 멈추더니 갑자기 물었다.“정말 송태구가 윤서 씨를 양녀로 삼는다나요?”“물론이죠. 직접 성명도 발표했어요. 윤서 몸이 회복되는 대로 그쪽 집안에서 성대하게 파티를 연대요.”양유진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윤서 씨에게는 전화위복이 되었군요. 미래 대통령의 딸이라니, 대단해요.”“뭐, 딱히 윤서가 노린 건 아니지만요.”양유진의 말을 듣고 여름은 저도 모르게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지금 윤서의 상황이 전화위복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던 것이다.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양유진은 둘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인데 그런 소리를 하다니 조금 이상했다.“내가 말 실수를 했군요. 그만 쉬어요.”병실로 돌아와서 얼마 되지 않아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돌아보니 하준이 옅은 불빛을 지고 들어왔다.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은 하준은 날렵해 보였다.“어쩐 일이야?”여름은 저도 모
‘어떡해? 최하준 급발진하는 거 아니겠지?’윤서는 쇼핑백을 잡은 하준의 손등에 푸른 힘줄이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그러나 하준은 화를 내지 않고 쇼핑백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조심스럽게 꾹 참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하준은 새우를 펼쳤다.장갑을 끼더니 하나하나 까기 시작했다.큼직한 새우구이에서 나는 고소한 냄새에 여름과 윤서의 위장이 꿈틀거렸다.“먹을 거면 나가서 드시지?여름이 참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당신 먹으라고 까는 거야. 다 까면 갈게.”하준은 고개도 들지 않고 답했다.“안 먹어도 상관없어. 어쨌든 다 까서 여기 놓고 갈게.”“……”이때 입구에 누군가가 병문안을 왔다. 보니까 추성호였다. 손에는 분홍 장미와 선물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느끼한 웃음을 띠고 반갑게 인사했다.“어, 강 대표. 이런 데서 다 만나고 말입니다.”“당신이 여기 무슨 일이야?”여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아니 하나같이 꼴 보기 싫은 것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네.’ “윤서야, 아는 분이셔?”“알기는 개뿔!”윤서가 눈을 굴렸다.추성호는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는 듯 웃었다. “임윤서 씨 병문안 왔습니다. 이제 송태구 의원의 양녀가 되신다던데, 우리 삼촌과 송 의원이 좀 아는 사이라고 인사 다녀오라고 하시더라고.”추성호가 말하는 삼촌이란 추동현이었다.여름은 바로 추신에서 송태구와 줄을 대려고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윤서가 바로 그 돌파구가 된 것이다.추신 쪽 인간들의 철면피 같은 뻔뻔함에 어이가 없었다. 추성호는 곧 정중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이제 보니 사진보다 훨씬 미인이시네. 아픈데도 사람 홀릴 정도로 아름다우시고….”“큭큭!”옆에서 새우를 까던 하준이 비웃었다.추성호가 하준을 노려보았다.“당신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임윤서 씨를 해친 백윤택을 변호했었다면서? 여기는 당신 같은 인간이 올 곳이 아니야.”“임윤서 본인도 날 내쫓지 않는데 네가 뭐라고 날 나가라 마라야? 당신이 무슨 미래 임윤서 남편이라도
결국…“둘 다 나가 주실래요? 환자가 좀 쉬어야 하니까. 병문안 온 뜻은 다 감사히 받았으니 둘 다 나가 주시지.”강여름이 가차 없이 둘을 내쫓았다.둘 다 한 방씩 먹은 셈이었다.하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여름이가 추성호더러 날 내쫓으라고 하지 않는군. 좋았어!’그러나 추성호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추신의 대표라는 사람이 겨우 최하준하고 같은 취급을 받다니 너무 자존심이 상했다.그러나 이제 임윤서는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고 여름은 그런 임윤서의 친구였다.할 수 없이 울분을 참으며 가식적인 웃음을 지었다.“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나가면서 추성호는 하준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하준은 일어섰다. 사람이 빠져들 것 같은 눈으로 여름을 들여다보았다.“새우 다 까놨어. 이제 갈게.”그러더니 하준은 병실에서 나갔다.여름은 머리가 아파서 이마를 짚었다.대체 하준이 왜 저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뭐야? 최하준은 뭐 귀신에 홀리기라도 했냐?”윤서가 한탄했다.“전혀 내가 알던 그 최하준이 아닌데? 예전에는 그렇게 기고만장하더니. 특히 결혼식장에서 널 데려갔을 때는 죽어도 널 놓지 않을 것 같은 기세더니만.”“……”‘저도 사람이라면 날 안 풀어줄 수는 없었겠지.’“잠자리를 못 해서 충격이 너무 컸나?”윤서가 고개를 갸웃하며 추측을 내놓았다.“쓸데없는 소리!”여름은 테이블로 가서 아직도 맛있는 냄새가 나는 새우를 보고는 쓰레기통에 쏟아 버릴까 하다가 맛이라도 보기로 했다. 너무나 맛있었다.결국 여름은 앉아서 새우를 다 먹고 말았다.다 먹고 나니 현타가 왔다.‘난… 자존심도 없나 봐.’******주차장.하준이 막 차 문을 열려는데 뒤에서 추성호의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아주 순식간에 사람 꼴 우습게 만들더군.”“애초에 인간이긴 했나? 사람 꼴이라니”하준이 싸늘하게 반격했다.“아직 내 앞에서 꼬리를 내리고 있어야 하는 자기 처지를 깨닫지 못한 모양이군.”추성호가 비열한 웃음을 남기고 차에 올랐다.하준이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