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너무 똑똑한 게 탈이라니까.”민정화는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싸늘하게 웃었다.최양하는 온몸이 차가워졌다. 모두가 민정화에게 속았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최양하를 이렇게 비참한 꼴로 만든 것도 결국 민정화였지만 지금은 목숨을 구하는 것이 중요했다.급히 말을 돌렸다.“널 탓할 생각은 없어. 아주 잘했네. 나는 하고 싶어도 못 했던 일을 해냈어. 우린 어차피 다 한배를 탄 사람들이야. 너도 우리 아버지를 위해서 최선을 다 하느라고 한 짓이겠지. 어쨌든 이제 날 풀어줘. 난 추동현의 아들이야. 앞으로 너에게 좋은 자리를 달라고 아버지께 말씀드려 볼게.”민정화가 최양하를 보더니 큭큭 웃었다.“정말 순진하네.”간신이 지어냈던 최양하의 웃음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떤 생각이 떠올랐지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무슨 뜻이야?”“명확하지 않나? 내가 추신의 명을 받고 움직인다면 추신의 명령이 없이 내가 당신을 이런 데로 끌고 올 것 같아?”민정화가 다시 최양하를 끌고 절벽을 올랐다.“잘 보라고. 저 아래가 네 무덤이야.”최양하는 머릿속이 와르르 무너졌다. 이제는 죽는 것도 문제가 아니었다. 도저히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두 눈은 온통 시뻘겋게 변했다.“아버지가 날 죽이라고 했다고? 왜? 어째서? 내가 아들인데?”“나도 모르지. 아마도 너무 쓸모가 없어서가 아닐까?”민정화가 웃었다.“안녕히 가세요. 이제 가셔도 되겠어요.”그러더니 최양하를 파도가 철썩이는 절벽 아래로 밀었다.최양하가 해변으로 밀려 나와 살아나겠다는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민정화는 차를 끌고 자리를 떴다.******시내. 여름은 회사도 가지 않고 육민관, 양우형과 사방으로 최양하를 찾으러 다녔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최양하의 종적이 보이지 않았다. 병원을 수소문 해도 흔적이 안 보였다.할 수 없이 최하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젠장, 대체 양하 씨를 어디에 내려놓은 거야? 도저히 찾을 수가 없는데. 실은 지룡에서 억류하면서 거짓말한
하준의 얼굴은 사뭇 어두웠다.******전성은 하루 종일 찾아보았지만 최양하는 증발이라도 한 듯 사라졌다. 어느 병원에서도 그런 환자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죄송합니다. 못 찾았습니다. 아무래도… 추신에 있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추신 쪽에서 의사를 부르지도 않았습니다.”하준이 갑자기 앞에 있던 탁자를 발로 찼다.“그날 내려놓으러 가면서 미행당한 거 아니야?”“아닙니다. 그리고 누가 저희를 미행하겠습니까?”전성이 쓴웃음을 지었다.“이제 우리 FTT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근처 CCTV는?”하준이 으르렁거리며 물었다.“그쪽은 사는 사람도 없어서 CCTV 같은 것도 없습니다.”전성이 답했다.“내려놓을 때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도록 특별히 조심했는데 그 점이 오히려 발목을 잡네요.”하준은 마른 세수를 했다.“그러면 혼자서 가서 지룡에서는 자네 말고는 아무도 최양하가 어디에 내려졌는지 모른다는 말인가?”전성은 심장이 철렁했다. 원래는 혼자서 가려고 했지만 민정화가 갑자기 와서 같이 가게 되었던 것이다.그러나 임무 수행 중에 민정화를 데리고 갔다는 것을 회장님이 알게 되면 괜히 정화가 혼날 것 같았다.“혼자서 갔습니다.”“계속 찾아봐. 혹시…죽었으면 시체라도 찾아와.”하준은 잠시 말을 쉬더니 잠긴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최양하는 추동현의 아들이니 최야하가 실종되었다면 분명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생각할수록 초조해서 하준은 이것저것 마구 집어던지기 시작했다.요즘 온갖 일이 줄줄이 튀어나오면서 회사 일은 아무리 해도 끝나지 않았고, 할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고 가기도 전에 최양하는 실종상태가 되었다.갑자기 깊은 피곤과 무력감이 몰려왔다.하준은 최양하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머니는 또 얼마나 충격받으실지 생각하기도 싫었다.*****서경주의 별장. 여름도 정신이 팔려있었다.오늘도 회사에 나가지 않자 이사진이 회의에 참석하라고 난리였지만 지금 회의에 참석할 정신이 있겠는가?
“아니.”여울이 말을 이었다.“요즘 이쪽 집에 맨날 나 혼자 있어. 증조할아버지가 못 걸어서 증조할머니는 병원에 있어. 증조할아버지 보러 간 적 있는데 엄청 불쌍해요. 그리고 윤형이 삼촌은 바보 됐어. 유치원 동생 반 애기 같아….”여울은 말하다가 참지 못하고 울었다.“윤형이 삼촌도 불쌍해. 옛날에는 맨날 날 가지고 놀리고 귀 잡아당기고 그랬거든요? 그래도 뭐 사달라 그러면 다 사주고 그랬는데…”여름은 입이 썼다.딸의 울음소리를 들으니 당장 안아주고 싶었다. 아직 어린 아이가 아닌가….그러나 최양하가 없으니 여울을 만날 방법이 없었다.이제 여울이랑 어쩌면 좋단 말인가.생각할수록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계속 여울이 이야기를 들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여울이가 울먹이다 잠이 들 때까지 대화는 지속되었다. 여름은 혼이 쏙 빠졌다.****다음날, 아침이 밝자 여름은 최양하를 찾아 나섰다.그러나 아무리 수소문해도 소식이 없었다. 결국 여름은 FTT로 하준을 찾아갔다.원래는 돌아온 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최하준을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제 발로 먼저 찾아가게 되다니 아이러니했다.FTT는 예전처럼 활기차지 않았다.안내 데스크에는 아무도 없었다. 상자를 안고 나오는 직원들만 몇 명 보였다.여름은 야구모자를 쓰고 있어 직원들이 알아보지 못했다. 다들 어두운 얼굴로 소곤소곤하고 있었다.“추신에서 더 높은 연봉을 제시하면서 오겠냐고 물어보는 거야. 난 아무리 생각해도 이제 추신이 훨씬 전도유망한 것 같아.”“나한테도 전화 왔었어. 빨리 탈출하는 게 답이야. FTT에서는 이제 연말 보너스도 못 받을 거래. 우리 같은 기술직이 여기 남아서 뭐 하겠어?”“……”“거기 서.”팀장이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뛰어나왔다.“내가 이직하도록 둘 것 같아? 이직을 하더라도 지금 하던 일은 마치고 인수인계 하고 나가.”“아유, 황 팀장님. 우리가 여기 왜 남아 있어요? 하루라도 빨리 새 직장 잡아서 떠나야죠. FT
“뭐? 꺼져?”하 대표가 싸늘하게 웃었다.“최하준,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 보구먼. FTT는 이제 한 물 갔어. FTT는 이제 우리 하남그룹 산하의 일개 자회사보다도 못한 존재라고. 예전에는 나를 그렇게 깔보더니, 이제는 내가 밟아도 찍소리도 못할 거면서.”“그래? 해보시지?”하준이 벌떡 일어 섰다.훤칠한 키와 어깨에서 나오는 카리스마는 순식간에 짜리몽땅한 하 대표의 기세를 눌렀다.“뭐, 좋게 말할 때 안 듣다니, 내가 본때를 보여주겠어. 두고 봐.”하 대표는 앞에 있는 의자를 걷어차고는 씩씩대며 나갔다.입구에서 여름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에 하 대표는 자세히 보지 못했다.그러나 여름은 뒷모습을 자세히 보았다. 전에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남그룹의 하영광, 크게 내세울 것 없는 기업을 운영하고 있었다.그런데 지금은 FTT에 와서 큰소리를 치다니 과연 FTT가 풍전등화라는 게 보였다.사무실에서 상혁이 씩씩거렸다.“정말 염치가 없는 인간이군요. 전에는 회장님 앞에서는 침도 못 삼키더니 하정현이 백지안 씨와 손을 잡더니만 결국 회장님을 음해하려고….”“시끄러워.”하준이 상혁에게 경고의 시선을 보냈다. 그러더니 갑자기 긴장한 기색으로 상혁의 어깨 너머를 보았다.“어떻게 왔어?”상혁이 돌아보니 여름이 걸어 들어 오고 있었다.여름은 모자를 벗어 긴 머리를 드러냈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이지만 이목구비는 또렷했다. 다만 얼굴이 수심에 잠겨있었다.“강… 강 대표님.”상혁이 깜짝 놀랐다.“일단 나가 있어.”하준이 상혁에게 말했다.상혁은 복잡한 얼굴로 걸어 나가면서 문을 닫았다.사무실에 조용히 둘만 남겨졌다.여름은 하준을 바라보았다. 둘이 헤어진 지 겨우 며칠이 지났을 뿐이지만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것만 같았다. 특히 하준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그날 아침에는 그래도 제대로 옷을 차려입고 근사한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양복에 주름이 져 있었고 눈에는 핏발이 섰으며 수염까지 자라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섬에서 나온 후로 쉰
여름은 원래 양유진의 집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그러나 하준의 말을 들으니 잠시 망설이게 되었다.“내 조카를 데리고 양유진에게 가서 살겠다는 건 아니겠지. 절대로 그렇게는 못 해.”여름의 눈치를 본 하준은 폭발할 것 같았다.여름은 할 수 없이 대답했다.“알겠어.”여름의 마음은 이미 양유진에게 향한 것을 알고 있으니 그런 말을 들었다고 크게 마음이 놓이지는 않았다.“계속 양유진하고 결혼은 유지하는 거야?”하준은 좀 이해가 안 됐다.“나랑 그렇게 오래 지내고도 양유진이랑 이혼을 안 할 생각이야? 양유진 쪽에서 이혼을 할 생각이 없는 건가?”여름은 직설적인 하준의 말에 얼굴이 화끈거렸다.‘정말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니까.’“내가 누구와 살지는 당신이랑은 상관없으니 신경 끄셔. 전에는 당신 기세가 대단해서 우리도 어쩔 수가 없었지만 이제 FTT는 화신만도 못한 회사가 되었는데 당신이 나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해?”여름의 말투는 사뭇 냉랭했다. 여름이 FTT의 덕을 보려고 하준을 꼬셨다고 얼마나 사람을 무시했던가? 이제 그때의 모욕을 되갚아줄 절호의 기회였다.역시나 하준의 얼굴은 순식간에 민망한 얼굴로 변했다.하 대표의 멸시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떤 누구의 냉소에도 하준은 끄떡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름의 말은 화살처럼 하준의 심장에 날아와 꽂혔다.그렇게 잘난 척을 하고 여름을 깔보았었는데 이제 자신의 처지가 여름보다 못해졌다. 심지어 경쟁 상대인 양유진보다도 못한 처지가 되었다.씁쓸한 기분이 되었다. 이런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리고 확실히 해 둘 게 있는데.”여름이 냉랭하게 경고했다.“보석으로 나오긴 했지만 당신이 날 납치한 사건은 아직 조사가 진행 중이라고. 경찰에서 계속 증언 해달라고 하네. 직접 경찰에 가서 당신이 날 납치하고 강간했다고 말해 달라는 거야.당신이 지금 여기 앉아서 나랑 대화를 나눌 처지가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감옥에 들어가면 몇 년은 살아야 할걸. 감옥에서 나오게 되면 당신과 나는 천지 차이가 날 거
물론 지금 자신의 처지가 여름을 바랄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여름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바로 옆 엘리베이터에서 상혁이 내리더니 다급히 따라왔다.“강 대표님, 잠깐 얘기 좀 나눌수 있을까요?”여름은 걸음을 멈추었다.“네, 상혁 씨. 무슨 일인가요?”상혁이 머뭇거리며 답했다.“사실 방금 두 분 나누신 대화가 흘러나와서 좀 듣게 되었습니다. 저… 회장님 고소를 취하해 주실 수 없나요?”여름은 인상을 찌푸렸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거절했겠지만 상혁에게는 목숨 빚이 있었다.“상혁 씨, 최하준은 악마예요. 난 그저 유진 씨와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을 뿐인데 그걸 최하준이 다 망쳐버렸어요. 그것도 아주 공개적으로요. 내 평판은 땅에 떨어졌어요. 지금 사람들이 얼마나 나와 유진 씨를 가지고 입방아를 찧는지 알아요? 나 혼자만이 아니라 유진 씨를 위해서라도 꼭 해야 하는 일이에요.”“하지만 정말 고소를 진행하신다면 회장님은 몇 년을 감옥에서 보내시게 될 겁니다. 그리고 회장님이 없는 FTT는 정말 먼지 한 톨 남지 않게 될 겁니다.윤형 님은 지적 장애가 되었고, 양하 님은 실종이고, 최란 이사님은 하루 종일 넋을 놓고 앉아 계시고, 최민, 최진 님은 애초에 회사를 경영할 능력이 안 됩니다.노마님도 연세가 있으셔서 요즘 이런저런 충격으로 각종 질환이 다 튀어나오고 있어요. 얼마나 더 사실 수 있을지 모릅니다. 물론 이제는 다들 강 대표님과는 관계가 없는 분이죠. 하지만 여울이를 생각해서라도….”상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언급했다.“저랑 강 대표님은 여울이가 명목상 양하 님의 딸로 되어 있지만 실은 회장님 딸인 걸 알잖습니까? 여울이를 추신에 보낼 수는 없어요. 하지만 회장님 집이 뿔뿔이 흩어지면 여울이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말 부모없는 고아가 되어 버립니다!회장님이 여울이를 조카로 생각하시긴 하지만 그래도 피가 당기는 모양인지 정말 여울이에게 잘 해주십니다. 여울이도 회장님을 꽤 따르고요.”여름은 말이 없
서경주가 말을 이었다.“하남그룹이 저가에 FTT를 사들이려고 하고 추신에서 부추기는 상황이라 지금 재벌가에서는 다들 강 건너 불구경하는 심정을 지켜보고 있더라.”재벌의 비인도적인 태도에 여름은 들을수록 역겨움이 올라왔다.“에휴, 우리 불쌍한 여울이. 애초에 최하준 본가에 보내지 않는 건데 그랬다.서경주가 한탄했다.“그래도 너는 딴생각하지 말고 앞으로 양 서방이랑 잘 지낼 생각이나 해. 또 실망시키지 말고.”“네.”여름이 고개를 숙였다.저녁 시간이 되자 양유진이 차를 몰고 왔다.여울을 보더니 매우 기뻐하며 안아 올렸다.“여울아, 내일 엄마랑 같이 아저씨 네 집에 가자!”“어…네…”여울이 시큰둥하게 답했다. 그다지 기쁘지도 슬픈 것 같지도 않았다. 그냥 양유진의 집이라니 자기 집이라는 생각이 안 들었던 것이다.엄마, 아저씨 네 집으로 이사 가요?”“여울이는 우선 하늘이랑 밥 먹어.”여름이 여울이가 자리를 피하도록 했다. 양유진이 다정하게 여름을 바라보았다.“왜 그래요?”“저기… 아무래도…유진 씨 집에 들어가는 날짜를 좀 늦춰야 할 것 같아요.”여름이 매우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최하준에게 여울이를 데리고 유진 씨네 들어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여울이를 데려온 거라서요. 정말 미안해요. 여울이를 도저히 그냥 둘 수가 없었네요. 요즘 그 집에 너무 온갖 일이 벌어져서 돌봐주는 사람이 없더라고요.”“난 또 무슨 일이라고.”양유진이 웃으며 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당신이 못 들어오면 내가 이리로 오면 되죠. 여울이가 그쪽으로 돌아가면 나랑 같이 우리 집으로 가요.”여름은 흠칫했다. 너무 의외의 답이었다.“내가 오는 게 싫은 건 아니죠?”양유진이 갑자기 눈썹을 치켜세웠다.“…아니죠, 아니에요.”여름은 조금 혼란스러웠다.“저기, 밤에 애들을 데리고 자야 하는데 다 같이 자기에는….”“괜찮아요. 난 손님방에서 자면 되죠.”양유진은 여름을 난처하게 하지 않았다.여름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너무 애들하고만 놀아주면 안
양유진은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슬픈 듯 웃음을 짓더니 나가버렸다.하늘과 여울이가 다가왔다.“엄마, 아저씨가 왜 갔어요? 싸웠어요?”“가자, 가서 밥 먹자.”여름은 허리를 숙여 아이들에게 뽀뽀해 주었다.눈에는 깊은 피곤이 쌓여있었다.******이후 이틀간 하준은 모든 지룡 멤버를 동원해 최양하의 행방을 찾았다. 그러나 증발이라도 해버린 듯 최양하를 찾을 수는 없었다.“회장님. 기차역, 공항, 고속도로 나들목을 모두 찾아보았지만 부회장님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인근 지역의 병원에서도 진료기록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전성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상황을 보고했다.“이제 가능성은 두 가지뿐이야. 양하가 어디에 갇혔거나, 아니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나.”가죽 의자에 앉은 하준의 거구에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왔다.“돌아가셨다고요?”‘아니야. 양하는 강한 녀석이야. 이렇게 쉽게 죽었을 리가 없어.’하준은 떨리는 손으로 의자 손잡이를 꽉 잡았다.“전 당주가 마지막으로 양하를 본 사람이니까 자세히 기억을 되살려 보지. 그때 양하를 놓고 떠날 때 다른 사람은 본 적이 없나?”갑자기 하준이 소리를 질렀다.전성은 움찔했다. 당시 현장에 다른 사람이라면 민정화뿐인데 정화가 부회장을 해칠 이유가 없질 않은가.‘정화가 부회장님과 딱히 무슨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없었습니다.”전성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최란이 사무실로 뛰어 들어왔다.“하준아, 동현 씨에게서 전화를 받았는데 양하가 연락이 안 된대. 네가 지룡에 끌고 가고 나서부터라는데, 혹시 네가 데리고 있니?”최하준의 몸이 확 굳어졌다. 가장 걱정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어머니. 사흘 전에 제가 한 대 때리고 내쫓았어요.”최란은 깜짝 놀랐다.“애가 우리를 배신했으니 손은 봐줄 수 있지만 연락도 못 하게 할 필요가 있니?”하준은 얇은 입술을 꾹 다물고 오래도록 아무 말이 없었다.최란은 점점 더 불안해져서 결국 전성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전성이 고개를 숙였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