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양하의 실종에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최란은 너무나 후회가 되었다.추동현의 바람과 배신으로 정신을 못 차리느라 두 아들을 전혀 신경 쓰지 못했던 것이다.정신을 차려보니 양하가 사라져 버렸다.“양하를 찾아오지 못하면 너 같은 아들 없는 셈 칠 거야.”최란은 미친 듯 소리를 지르다가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아이고!”전성이 후다닥 달려가 부축했다.하준은 벌떡 일어나 얼른 최란을 안았다. 그 길로 병원으로 내달렸다.채혈을 하고 여러 가지 검사를 진행하더니 의사가 말했다.“사모님께서는 며칠이나 못 주무신 것 같습니다. 피로와 스트레스가 너무 누적되어서 기절하신 거예요. 스트레스 없이 좀 마음 편하게 해주세요.”하준은 씁쓸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최란이 어떻게 마음 편하게 지내겠는가?의사가 막 병실에서 나가는데 경찰 몇 명이 들어섰다.“추동현 씨께서 최하준 씨가 그 댁 아들을 납치해서 지금까지 행방불명이라고 신고했습니다. 같이 서로 좀 가 주셔야겠습니다.”하준의 눈이 어두워졌다. 추동현이 최양하의 일로 들고 일어날 것은 알았지만 예상보다 너무 빨랐다.“좋습니다. 어머니께 인사만 드리고 바로 같이 가겠습니다.”하준은 침대 가로 다가갔다. 최란은 수액을 맞고 상태가 조금 좋아졌지만 안색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제가 원망스러운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양하는 추동현의 아들이에요. 지금 추동현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는데 제가 양하에게 화풀이 정도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걔 목숨을 어쩌기는 힘듭니다. 보세요, 벌써 절 경찰에 신고했네요.”“……”최란은 완전히 경악했다.더는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이제 사람들이 우리 FTT를 삼키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요. 특히나 추신에서는 하남그룹을 뒤에서 조종하고 있어요. 제가 경찰서에 들어가고 나면 하남그룹에서 여러 기업과 연합해서 우리 FTT를 조여올 겁니다. 최대한 빨리 FTT에서 내내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던 보험, 호텔, 전자상거래 쪽 자회사를 빨리 매각하십시오.우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최하준이 최양하를 납치했다고 잡혀갔다고? 강여름도 납치하더니, 아주 습관성 납치병 환자인가 봐?- 아주 법 위에 군림을 하시는구먼. 자기 동생까지 납치해? 닥치고 감옥에 집어처넣자.- 최하준이 아주 성질이 더럽대. 전에도 최양하에게 함부로 화풀이하고 막 그랬잖아.-이번에는 좀 심하게 한 것 같은데? 최양하 지금 실종된 지 며칠 됐는데 호텔 목격자 말로는 최하준의 부하에게 끌려갔대. 최양하 아버지인 추동현이 경찰에 신고했다는데?-지금은 추신의 기세가 등등하니 곧 최하준을 감옥에 보낼 수 있겠지. 저런 놈은 절대로 놔주면 안 돼.네티즌이 워낙 갑론을박하다 보니 여름에게도 소식이 들려왔다.엄 실장이 자기가 들은 소식을 풀어놓았다.“FTT에서 보험, 호텔 같은 자회사를 매각하기로 했나 봅니다.”“지금 자금줄이 막혔으니 매각도 현명한 결정이지.”여름은 갑자기 궁금해졌다.“그런 결정은 누가 내렸는데?”“지금 최란 이사가 FTT 경영을 맡았답니다. 지금 달리 사람도 없고요.”그러면서 엄 실장이 초대장을 하나 내밀었다.“아 참, 모레 저녁에 큰 경매가 열립니다. 최하준 회장 본가인 별장이 매물로 나온다고 합니다.”여름은 완전히 깜짝 놀랐다. 탄식이 나왔다.“흥, 갈 데까지 갔나보 군.”“그렇습니다.”엄 실장이 말했다.“경매도 최란 이사가 결정했습니다. 그 별장은 국내 최대 규모입니다. 풍수지리적으로도 아주 훌륭한 곳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추신에서 재계에 은밀히 압박을 넣어놨더군요.여름이 미간을 찌푸렸다.“추신도 정말….”‘저렇게 비열하고 변칙적인 방법으로만 어떻게 지금의 추신을 만들었는지 모르겠네.’“그렇습니다. 어쨌든 지금 다들 눈치를 보느라 함부로 움직이지 않을 것 같습니다.”엄 실장이 말을 이었다.“한번 가보시겠습니까? 내로라하는 재벌들은 모두 참석하는 모양입니다.”여름은 미간을 문질렀다.“가서 뭐 하겠어요? 사지도 못할 텐데. 그냥 둬요.”*****구치소 안.담당자가 식사와 물을 배식구에
‘누구야? 대체 어떤 놈이 이렇게 악랄한 수를?추동현인가? 나와는 그렇게 직접적으로 원한을 가질 일이 없었는데?그렇다면 누구지?’“우씨, 감히 날 쳐?”상대가 입에서 흐르는 피를 쓱 닦더니 막 다가서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고 경찰이 들어왔다.“이것들이 뭐 하는 짓이야? 잡혀 들어왔으면 얌전히 있을 것이지!”******강변에 위치한 어느 별장.양유진이 전화를 한 통 받더니 표정이 일그러졌다.“하다 말았다고?”“잘 처리됐습니다. 안에 있던 녀석 말로는 최하준에게서 피가 많이 났다고 하더라고요. 아마도 앞으로는 남자구실 못할 겁니다.”“아마도”양유진의 눈이 가늘어졌다.“난 100% 확실한 걸 원하는데.”‘사사건건 최하준이 내게 모욕을 줬으니 이제 철저히 밟아줘야겠어.그렇게 여자를 밝히는데 앞으로 어떻게 밝히는지 한번 보자고.남자구실도 못 하니 이제 강여름에게 덤빌 수 없을 거다.’“이런 일에는 100%라는 게 없죠.”상대가 낮은 소리로 말을 이었다.“그때 바로 한 번 더 그으려는 참에 이주혁이 면회를 신청하는 바람에 경찰이 들어와서 현장이 발각되고 말았습니다.”“젠장!”양유진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그 녀석이 아귀힘은 좋은 놈이니 십중팔구는 불구가 되었을 겁니다.”부하가 달래듯 말했다.“알겠다.”기품 있던 양유진의 얼굴이 음험하게 일그러졌다.******병원.소식을 들은 송영식이 황급히 와서 보니 이주혁이 수술실 앞에서 멍하니 있었다.“어떻게 됐어? 아니, 젠장. 그 빌어먹을 자식이 대체 하준이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송영식이 한껏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이거 뭐 완전히 하준이를 불구로 만들려고 한 거 아니냐고? 이게 인간이 할 짓이냐? 추동현은 아니겠지? 이건 너무 악랄하잖아? 걔네 집을 그렇게 쑥대밭을 만들었으면 충분하지 않나? 하준이네랑 무슨 원수를 그렇게 졌다고. 이렇게까지 할 이리냐고?”“내 생각에는… 추동현이 아닌 것 같아.”이주혁이 팔짱을 끼더니 갑자기 가만히 말했다.“추동현은 하준이 네에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사람 굉장히 무서운 인간이지 않냐?”이주혁이 영식을 흘끗 쳐다보았다.“너도 이 바닥에 있으니 잘 알겠지만, 성공하는 사람 중에 간계에 능하지 않고 심지 굳지 않은 사람이 있냐? 양유진은 서울 올라와서 겨우 몇 년 만에 진영 그룹을 국내 의약 업계 최고의 기업으로 만들었어. 몇 년 전 처음 진출할 때만 해도 다들 우습게 생각했는데 양유진은 조용히 기초를 다지더니 이제는 이 바닥에서 내로라하는 모임에는 양유진의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은 곳이 없어.”“… 확실히 그러네.”이주혁의 말에 송영식은 완전히 깜짝 놀랐다.“게다가 3년 전에 동성에서 올라 올 당시 강여름은 양유진의 약혼녀였잖아? 그런데 하준이가 양유진의 손에서 강여름을 빼앗아 왔었고, 이번에는 결혼식 당일에 또 데려가 버렸지. 다들 뻔히 보는 가운데 양유진은 완전히 뺨 맞은 거야. 그런 걸 참고 넘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그렇구나.”송영식도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네 말 듣고 보니 양유진이 정말 무서운 인간인 것 같다. 경찰서 구치소 안까지 손을 뻗을 수 있다니 만만한 녀석이 아니야. 계속 이런 식으로 하준이랑 맞서겠다면 이거 정말 큰 일인데.”“더 심각한 건 놈이 드러내 놓고 덤비는 게 아니라 뒤에서 은밀히 움직인다는 점이야.”이후로 두 사람은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한참 뒤 하준이 나왔다. 혼수상태는 아니었지만 얼굴이 아주 창백했다.병실에 들어가서 의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재건 수술을 하기는 했습니다만, 음경 부위 손상이 너무 심각합니다. 앞으로 정상적인 성생활이 가능할지는 장담을 못 하겠습니다.”“무슨 뜻입니까? 앞으로… 성생활을 못 한다는 말입니까?”하준은 크게 충격을 받은 듯했다.“그렇다기보다는…뭐 100% 보장은 할 수 없다… 그런 뜻입니다.의사가 동정하듯 하준을 흘끗 쳐다보았다.“긍정적으로 생각하세요. 목숨에는 지장이 없지 않습니까?”“……”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의사가 지금 하는 말이 무슨
“아니, 무슨 말이라도 좀 해 봐.”송영식은 하준이 너무 입을 다물고 있으니 살짝 불안했다.“지금 이러고 우울에 잠겨있을 때가 아니야. 추신에서 널 고소하고 일을 크게 만들려고 해서 지금 다들 이 일에 주목하고 있어. 구치소에서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넌 거기서 나올 방법도 없었을 거야.”“경찰에서 너 거주지역 벗어나지 마라고 하더라.”이주혁이 한숨을 쉬었다.“양하는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멀쩡한 애가 갑자기 실종이라니.”송영식이 말을 받았다.“양하랑 추동현이 일부러 널 모함하려고 그러는 거 아니냐? 최양하 어디에 숨어 있는 거 아냐?”하준은 눈을 감았다. 검은 속눈썹 아래 눈꺼풀에는 피곤이 드리워 있었다.“나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이번 일에 추동현이 관련되어 있다는 의심은 들어. 추동성은 어때 보였어?”이주혁이 기억을 떠올려보았다.“경찰서에서 대치했을 때 보니까 엄청 분노하는 것 같던데. 그런데… 별로 슬퍼 보이지는 않더라.”“숨어있는 게 맞다니까.”송영식이 울컥했다.“그건 몰라.”하준이 고개를 저었다.“양하는 꽤 중상을 입고 있었어. 어디 은신시키려고 했다면 추동현이 의사를 불렀을 거야. 그런데 내가 알아봤지만 그쪽에서 추동현 주변인이 의사를 부른 기록이 없어. 난… 양하가 살해당한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어.”‘살해’라는 말을 하는 하준의 목소리는 매우 고통스러웠다. 심장이 욱씬거렸다.송영식이 깜짝 놀랐다.“누구한테?”이주혁이 분석했다. “양하는 하준이랑 좀 티격태격하는 거 말고는 딱히 원한 관계도 없어. 그러니 해칠 사람이라면 양하의 죽음으로 최하준을 감옥에 보내고 싶어 할 사람밖에 없지.호텔 쪽 사람들이 하준의 부하가 양하를 끌고 가는 것을 목격했으니 걔가 실종되면 제1용의자는 하준이가 되는 거지. 하준이와 원한 관계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굴까?”“양유진?”송영식이 혀를 내둘렀다.“아니면 추동현일까? 추동현은 아니겠지. 양하는 자기 자식인데.”“양유진일 가능성이 제일 높아.”이주혁이 하준을 쳐다보았다.“
******쇼핑몰 남성 브랜드 매장.여름이 남성 정장을 보는데 누군가가 어깨를 두드렸다.윤서가 씩 웃으며 곁에 서 있었다.“한 달이나 못 봤더니 한 3년은 못 본 것 같다. 내가 얼마나 목을 빼고 기다렸는데 이제야 부르냐?”“장난 그만하고, 같이 정장이나 한 벌 골라주라.”여름이 푸른 셔츠를 꺼내며 물었다.“이거 어때?”“이렇게 젊은 디자인을 고르는 걸 보니 아버지께 선물하려는 건 아니고, 그러면 양유진이나 최하준인데?”임윤서가 흘끗 보더니 물었다.여름이 정색했다.“내가 최하준에게 옷을 왜 사주냐? 유진 씨 거 고르는 거야. 내가 좀 짜증 나는 일을 해서 사과의 의미로 옷이라도 한 벌 들고 가려고. 그런데 사이즈를 모르겠네. 나 참….”“야, 무슨 옷이냐? 남자는 시계지! 가자, 시계 좋은 거 골라줄게.”윤서가 여름을 끌고 나갔다.생각해보니 남자들이 멋을 드러낼 수 있는 수단으로 시계가 괜찮은 듯도 했다. “지금 업무시간 아니야? 내가 막 불러내도 괜찮은가?”“나 오슬란의 개발 총괄이야. 게다가 송영식 약혼녀라고. 내가 가고 싶으면 가는 거지 누가 날 막냐? 그리고 송영식은 지금 최하준 때문에 경찰서 들라거리느라고 나한테 쓸 신경이 없거든.”여름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화에 최하준이 너무 자주 등장하는 것 같았다.막 화제를 바꾸려는데 윤서가 갑자기 귀에 속삭였다.“구치소에서 일이 생겨서 최하준이 응급실에 실려 갔대.”여름은 흠칫했다.“4대 1도 문제없을 사람한테 일이 생기기는 무슨 일이 생겨?”“몰라. 어쨌든 너무 심한 중상이래.”윤서가 말을 이었다.“송영식 본가로 밥 먹으러 갔었는데 어머님이 말씀해주시더라고. 과보를 받은 거지.”여름은 멍하니 있다가 애써서 그 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최하준 애기 그만 해. 관심 없어. 가자. 시계 보러”“에헤이, 난 속 시원하라고 해준 얘긴데.”“그 인간이 내 앞에 보이지만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통쾌하거든.”둘은 결국 최고급 브랜드의 시계
“요즘 스트레스받으시나 봐요? 아주 팍삭 늙으셨네?”하정현이 입은 가렸지만 고소하다는 표정이 여실히 드러났다.“뭐, 이해는 돼요. 집이며 회사가 그 지경이면 난 머리가 다 셌을 거야.”“내가 나이는 들었는지 몰라도 아버지뻘 되는 늙은이랑 사는 자네 보다야 낫지.”최란은 이미 상당히 냉정을 되찾았다. 혹은 지금 감정에 휘둘릴 때가 아니라서 그런지도 모른다.“뭐라고…?”하정현의 안색이 변하더니 추동현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여보, 저 여자 하는 소리 좀 들어봐. 자기더러 늙은이래.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이제 겨우 서른 넘은 사람처럼 보이는구먼.”“요, 요 귀염둥이!”추동현이 사랑스러운 눈으로 하정현의 볼을 꼬집었다.둘을 보고 있자니 최란은 눈꼴이 시었다.추동현이 관리를 잘하고 있어 쉰이 넘었지만 마흔 남짓으로 보이긴 했다. 그래도 하정현과 같이 있으면 부녀처럼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젊었을 때 추동현은 그렇게나 다정하고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역겨운 대상일 따름이었다.이제 와서 돌아보니 어쩌다가 추동현 같은 사람에게 빠졌는지 이해가 안 됐다.“아잉, 이러지 마요. 자기 전처 얼굴 굳는 거 봐. 기분 나쁜가 봐. 어쨌든 자기 전처잖아.”“뭐라는 거야? 그냥 이 장면 자체가 역겨워. 둘 나이 차이가 너무 나서.”최란이 비꼬았다.추동현의 표정이 살짝 변하더니 눈동자에 음산한 기운이 돌았다.“별장을 팔아서 FTT에 자금 회전하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하지만 당신 계획은 물거품이 될 거야.”“무슨 뜻이에요?”최란이 미간을 찌푸렸다.하정현이 입을 갈고는 풋하고 웃었다.“이미 동현 씨가 재벌가에 이야기를 다 해났어요. 오늘 참석한 재벌도 많고 다들 그 별장을 하고 싶어도 경매 시작가인 4000억에서 1억도 더 붙이지 말라고 했거든요. 나중에 우리 동현 씨가 낙찰받아서 우리 셋이 살려고.”최란은 순식간에 상황이 파악되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추동현을 쳐다보았다. 너무 화가 나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어떻게 사
여름은 추동현이 이번 경매를 망치러 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겠지.’오늘 대부분 참석자는 별장 경매를 구경하러 왔다. 갑자기 경매를 취소한다면 주최 측의 신뢰에 금이 갈 테니 앞으로 다시는 경매를 할 수 없을 터였다.최란이 자리를 뜨는 것을 보고 나서야 여름은 무거운 마음으로 화장실을 향해 걸어갔다.모퉁이를 하나 돌자 키가 큰 남자가 벽에 기대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여름은 깜짝 놀랐다.그곳에 한참 서 있는 것으로 보였다. 아마도 최란과 추동현이 대화를 모두 들었을 것이다.여름은 저도 모르게 남자를 한 번 쳐다봤다.키가 매우 컸다. 뺨에는 흉터가 있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그 사람의 이목구비는 매우 시원하고 강한 선을 그리고 있었다. 검은 양복은 더욱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마흔 남짓해 보였는데 젊었을 때는 질식할 만큼 매혹적이었을 것으로 보였다.아니, 젊었을 때뿐 아니라 지금도 너무나 매력적이었다.여름의 시선을 느꼈는지 벽에서 몸을 떼더니 주머니에 손을 꽂고 자리를 떴다.여름은 화장실에 들렸다가 자리로 돌아갔다. 윤서가 구시렁거렸다.“뭐 이렇게 오래 있다가 와? 별장 경매 시작할 뻔했잖아?”“시작해 봤자지. 오늘 별장은 추신의 손에 들어갈 거야.”여름은 의기소침한 최란의 뒷모습이 생각나 마음이 아팠다.“그게 무슨 소리야?”윤서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여름을 할 수 없이 방금 본 내용을 이야기했다. 윤서는 여름의 이야기를 듣더니 불같이 화를 냈다.“어떻게 사람을 그렇게까지 괴롭히냐? FTT의 그 큰 산장을 4000억에 사려고 들다니, 거기 배산임수에 용맥이 지나가는 자리인데, 땅값도 안 된다고. 조금 있다가 내가 5000억에 입찰해서 가격을 올려놔야겠다. 내가 딱히 FTT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배신자에 조강지처를 버리는 사람은 본때를 보여줘야 해!”여름이 눈을 깜빡였다.“네가 5000억 불렀다가 뒤에 아무도 안 따라와서 낙찰되면, 낼 돈은 있고?”“……”윤서는 갑자기 쭈그러들었다.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