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진은 병원에서 만약 어떤 의료 사고라도 발생한다면 이 병원의 명성은 그대로 무너질 것으로 생각했다.그의 말에 한 간호사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원장님, 병원 내부 번호와 원장님 개인번호 모두 통화 중이셨어요. 원장님 인기가 지금 장난 아닌 걸 모르시는 건 아니시죠?”문 앞에 대기 중인 인턴들로도 모자라 소문 듣고 연락이 오는 환자도 있었고 학생들도 있고 심지어 부잣집 부인들도 어디서 개인번호를 얻었는지 매일 전화를 걸어 이명진의 전화는 항상 통화 중 상태였다.긴급 상황만 아니라면 인명진이 직접 나설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인명진은 간호사의 필요 없는 말을 들을 시간도 없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그가 문을 열자 밖에서 있던 인턴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진짜 너무 멋있고 젊잖아. 이렇게 젊으신데 원장 선생님이라고?”“너무 잘생겼어. 여자 친구도 없다 그러던데.”“많은 수술도 직접 하신대. 그리고 학술논문도 봐주고 기타 강의도 하신다고 들었어.”“이렇게 훌륭한 사람 품에 안겨있는 느낌은 어떤지 상상도 안 가.”그들은 미친 사람처럼 저마다 한마디씩 주고받고 있었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인명진에게 달려들어 길을 막고 있었다.“인 원장님, 저랑 사귀시면 이런 병원 몇 개라도 더 해줄 수 있어요. 당신을 경성의 의료센터에서 우두머리로 만들어 드릴게요.”“인 원장님, 저 사람 말 믿지 마세요. 저랑 사귀시면 더 많은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드릴게요.”“인 원장님, 저랑...”“다들 꺼져!”인명진은 평소에 이 사람들에게 무관심이었지만 지금은 급한 수술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한 간호사가 데리고 온 경호원들도 그녀들을 막을 수가 없었지만 항상 따뜻하고 우아하고 부드러운 말만 할 거로 생각했던 인턴들은 인명진의 화내는 소리 한 번에 더 이상 앞으로 다가서지 못했고 자리를 피해 길을 열어 주었다.인명진은 재빨리 수술용 무균복으로 갈아입고 소독한 후 바로 수술실로 들어갔다.수술실 안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했
은서우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인명진은 이미 돌아서서 갈 길을 가고 있었다.비록 인명진이 병원의 원장이었지만 은서우는 회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그를 본 적이 거의 없었다.오늘 처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하는 것이었다.그는 수술용 멸균복을 입고 마스크와 모자를 착용하고 있었다.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깊고 차가운 그의 검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수술 내내 상황이 아무리 긴박해도 인명진은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고 그의 침착함과 냉정함은 뛰어난 실력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은서우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이제야 왜 병원의 많은 여성 간호사, 인턴, 심지어 여의사들까지도 그에게 열광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은서우는 가볍게 몸을 풀며 수술실을 나왔다.막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한 동료가 그녀를 찾아왔다.가슴에 걸린 명찰을 보고 은서우는 상대가 인턴임을 알았다.은서우는 예의 바르게 물었다.“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시죠?”“은 선생님, 방금 원장님과 함께 수술을 마치셨죠?”인턴의 질문에 은서우는 약간 의아했다.“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인턴은 자신의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은 선생님, 저 좀 도와주세요. 원장님 카톡 좀 추가해서 저한테 넘겨주시거나 아니면 원장님 사진 몰래 몇 장만 찍어 주세요. 제가 이만큼 드릴게요.”인턴의 눈에는 기대감이 가득 차 있었다.은서우는 인턴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제가 원장님 연락처를 넘긴다고 해도 원장님 입장에서는 그냥 낯선 사람일 뿐일 텐데 원장님이 연락 받아줄 것 같아요? 그리고 몰래 사진 찍는 건 불법인 거 모르나요? 고작 그 정도 푼돈으로 저를 이런 큰일에 끌어들이겠다고요? 당신이 미친 걸까요? 아니면 제가 미친 걸까요?”은서우는 거침없이 인턴을 몰아붙였다.인턴이 급히 덧붙였다.“아니에요, 은 선생님. 도와주시기만 하면 백만 원 아니 천만 원도 문제없어요.”‘천만 원에 사진 몇 장과 연락처? 저 인턴 진짜 제정신이 아니네.’은서우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호텔 바닥은 아수라장이었다.잠에서 깬 지유는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지유는 미간을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커다란 몸집을 가진 남자가 옆에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지나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은 조각과도 같았고 눈매도 깊고 진했다.아직 깊은 잠이 들어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지유가 몸을 일으키자 이불이 그녀의 몸에서 미끄러져 내렸고 뽀얗고 매혹적인 두 어깨에 어젯밤 남긴 흔적이 보였다.지유가 앉았던 자리에 선명한 핏자국이 보였다.시간을 보니 어느새 출근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유는 바닥에 널브러진 출근룩을 다시 집어 들어 얼른 갈아입었다.스타킹은 이미 남자에 의해 찢겨 있었다.지유는 스타킹을 돌돌 말아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하이힐을 신었다.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깔끔하게 차려입은 지유는 어느새 워커홀릭 비서로 완전히 돌아왔고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들어온 사람은 청순한 미녀였다.지유가 부른 사람이었다.이현의 취향이 이런 여자였다.지유가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침대에 누워서 대표님 깨나길 기다리면 돼요. 다른 건 한마디도 하지 마요.”지유는 고개를 돌려 아직 단잠에 빠진 남자를 힐끔 쳐다봤다. 억울한 마음에 코끝이 찡해졌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방에서 나왔다.지유는 두 사람이 어젯밤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이현이 아는 게 싫었다.그들 사이에 계약에 의하면 아무도 모르게 3년간 결혼을 유지하면 바로 이혼할 수 있었다.이 기간에 선을 넘는 행동은 그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지유는 7년째 이현의 비서로, 3년째 이현의 와이프로 있었다.졸업한 그날부터 이현의 곁을 한시도 떠난 적이 없었다.같은 날, 이현은 지유에게 두 사람은 그저 상사와 부하의 관계일 뿐 이 관계를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지유는 복도 창가에 서서 어제 일을 떠올렸다. 이현은 그녀를 안고 침대에 누워 ‘승아’라는 이름을 연신 불러댔다.지유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승아는 이현의 첫사랑이었다.이현은 지유를 승
이에 지유가 화들짝 놀라며 하마터면 발을 삐끗할 뻔했다.중심을 잘 잡지 못한 지유는 그렇게 이현의 몸에 기댔다.이현은 지유의 몸이 앞으로 쏠리자 손으로 지유의 허리를 잡아줬다.뜨거운 체온이 전해지자 지유는 어젯밤 그가 저돌적으로 그녀를 덮치던 화면이 떠올랐다.지유는 가까스로 진정하고 고개를 들어 이현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 봤다.이현의 눈동자는 매우 진지했고 그 속엔 질문과 의혹도 담겨 있었다. 눈빛은 지유를 뚫어버릴 것만 같았다.지유는 심장이 벌렁거렸다.이현과 더는 눈을 마주칠 엄두가 나지 않아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아까 나간 그 여자라고 생각했을 때도 이현은 불같이 화를 냈는데 여기서 만약 지유가 자신이었음을 인정한다면 후과가 그리 좋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아니라고 하기엔 억울했다.만약 어젯밤 잠자리를 가진 사람이 지유라는 걸 이현이 알게 된다면 결혼 생활을 조금이라도 더 이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그래도 지유는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게 겁나 고개를 숙인 채로 물어봤다.“그건 왜 묻는 거예요?”지유는 사실 남몰래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이현이 코웃음을 치더니 이렇게 말했다.“너는 그런 용기가 없을 것 같아서.”지유는 멈칫하더니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어쩌면 이현은 어젯밤 잠자리를 가진 사람이 지유가 아니길 더 바랄지도 모른다. 계약 결혼일뿐이니 말이다.게다가 며칠만 더 지나면 계약도 끝나간다순간 이현이 지유의 손을 힘껏 낚아챘다.지유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이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심사하듯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지유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발버둥 치며 손을 빼려 했지만 이현이 지유를 전신 거울 앞으로 바짝 몰아갔다.“뭐 하는 거예요?”지유는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긴장과 두려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너 정말 사무실에서 잠들었어?”지유는 칠흑같이 어두운 이현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혹시나 들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3년 전, 결혼한 첫날 밤, 지유는
고개를 들어보니 승아가 앞치마를 두르고 손에 국자를 들고 있었다.지유를 본 승아는 표정이 살짝 굳었다가 다시 부드럽게 인사했다.“아주머니 손님이에요? 마침 삼계탕을 조금 더 끓였는데 같이 와서 먹어볼래요?”승아의 느긋한 태도는 마치 그녀가 이곳의 안주인인 것 같았다.오히려 지유가 멀리서 찾아온 손님처럼 보였다.하긴 얼마 지나지 않아 지유는 곧 이 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된다.지유는 이런 거지 같은 상황에 미간이 찌푸려졌다.이현과 결혼할 때 모든 사람에게 알렸고 승아도 축복을 보내왔기에 지유가 이현의 와이프라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승아는 지유가 문 앞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자 얼른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왔으면 손님이죠. 얼른 들어와요.”승아가 가까이 다가오자 옅은 재스민 향이 풍겨왔다. 이현은 작년 생일에 지유에게 똑같은 향수를 선물했다.지유는 목구멍이 점점 메어와 숨쉬기가 힘들었고 다리가 천근만근인 듯 움직이기 힘들었다.여진숙은 지유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자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지유야, 여기 서서 뭐 하는 거야? 손님이 왔으면 차라도 내와야지.”지유는 승아와 겨뤄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물었다.“어머님, 승아 씨가 왜 우리 집에 있는 거예요?”여진숙이 답했다.“승아도 오랜만에 귀국했으니 한 번쯤은 나 보러 와야 할 거 아니니? 왜? 승아가 우리 집에 오면 안 돼? 현이도 뭐라 안 하는데 네가 뭐라고 시비야?”“그런 뜻 아니에요.”지유가 고개를 푹 숙였다.“아, 지유 언니였구나. 이현 오빠가 결혼사진을 보여준 적이 없어서 못 알아봤네요. 기분 상했다면 죄송해요.”지유는 환하게 웃는 승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허.’하긴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여자에게 다른 여자와 결혼한 사진을 보여줄 리가 없지.이때 여진숙이 호통치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얼른 승아한테 차를 내주지 않고 뭐 해?”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놓은 주전자를 들었다.승아는 여진숙과 웃고 떠들며
“지유 언니 오늘 기분이 별로 안 좋다면서 오기 싫다고 해서 내가 올 수밖에 없었어요.”승아는 얼른 손에 난 덴 자국을 일부러 보여주며 말했다.“오빠도 지유 언니 너무 미워하지 마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예요. 일을 그르친 건 아니죠?”지유가 회사의 서류를 다른 사람에게 넘긴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이현은 안색이 너무 어두웠지만 승아 앞이라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넥타이를 살짝 풀며 덤덤하게 말했다.“아니야.”이현은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왔으니 앉아.”이현의 말에 승아는 내심 기뻤다. 그녀를 받아준다는 건 그래도 미워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회의하러 간다면서요? 내가 방해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이현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이렇게 말했다.“회의 시간 뒤로 30분 미루세요.”승아는 입꼬리가 올라갔다. 전에 인사도 없이 떠나서 혹시나 이현이 원망하면 어쩌지 했는데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심각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잃어버린 시간은 다시 메꾸면 된다.소파에 앉은 승아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해명하려 했다.“오빠,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요. 그때 내가 인사도 없이 떠난 거 잘못한 거 알아요. 근데 지금은 다시 돌아왔으니까...”“먼저 일 처리 좀 할게.”이현이 승아의 말을 잘라버렸다.승아는 하려던 말을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바빠 보이는 이현의 모습에 승아는 별수 없이 이렇게 말했다.“오빠 일 끝나는 거 기다릴게.”승아는 방해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남은 반 시간 중 얼마나 더 앉아 있어야 마주 보고 앉아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약간 이현의 속내를 맞히기 어려웠다.진호가 안으로 들어와서야 이현은 하던 일을 멈췄다.이현이 걸어오자 승아가 웃으며 말했다.“오빠, 나...”“손은 아직도 아파?”그녀의 상처를 발견했다는 건 그녀를 걱정한다는 걸까?승아가 잽싸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이제 안 아파요.”“응.”이현이 가볍게 대답하더니 진호의 손에서 한약을 받아왔다.“귀국해서 계속 속이 안 좋다며, 목
지유는 걸음을 멈췄다. 이현과는 부부 관계에서 오는 조화로움보다는 위계질서에서 오는 거리감이 더 컸다.“대표님, 지시 사항 있으신가요?”이현이 고개를 돌리더니 거리감이 느껴지는 지유의 얼굴을 보며 명령조로 말했다.“앉아.”지유는 이현이 무엇을 하려는지 몰랐다.이현이 지유 쪽으로 걸어갔다.지유는 자신과 가까워지는 이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순간 이현이 어딘가 달라 보였고 이에 지유는 숨이 가빠졌다.긴장하기도 하면서 어딘가 이상했다.그녀가 딱히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이현이 먼저 그녀의 손을 잡았다.이현의 따듯한 손이 지유의 몸에 닿자 그녀는 마치 데이기라도 한 것처럼 얼른 손을 빼려 했다. 하지만 이현이 너무 꽉 잡고 있어 빼려고 해도 뺄 수가 없었다. 이현은 지유를 확 끌어당기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손 다쳤잖아, 몰랐어?”이현의 관심이 지유는 퍽 의외였다.“난... 괜찮아요.”“수포까지 났어.”이현이 물었다.“왜 나한테 얘기하지 않은 거야?”이현이 큰 손으로 그녀의 상처를 살폈다. 지유는 그런 이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3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유는 이현의 손을 잡고 그가 따듯함으로 그녀를 이끌어주기를 바랐다.하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다.지유가 포기하려 할 때마다 이현은 다시 희망을 주었다.“큰일 아니에요. 며칠이면 나아요.”지유가 대답했다.“연고 좀 가져오라고 할게.”지유는 눈시울이 붉어지는 걸 느꼈다. 몇 년의 기다림 끝에 이제 좀 보상받는 것 같았다.하지만 지유는 이성적이었다. 이현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이현은 연고를 가져와 그녀의 상처에 발라줬다. 지유는 그녀의 앞에 쪼그리고 앉은 어딘가 조심스러워 보이는 이현에 혹시 자신도 그가 아끼고 사랑하는 여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상처가 나니 그래도 눈길을 주는 이현이었다.7년이나 옆을 지키면서 극진하게 챙겨주기보다 차라리 조그마한 상처를 내는 게 그의 이목을 끄는 데에는 더 낫겠다는 우스운 생각까지 들었다.다친 게 아깝지 않았다.하염없이
지유는 눈앞이 까매지며 어지러웠다. 그때 누군가 다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이런 실수를 하면 어떡해요? 온 비서님, 온 비서님...”그 목소리가 점점 가물가물해졌고 지유는 그대로 쓰러졌다.다시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다. 하얀 천정을 보고 있노라니 아직도 머리가 어지러웠고 깨질 듯이 아팠다.“온 비서님, 깨셨어요?”윤정이 눈시울을 붉히며 의자에서 일어나 다급하게 그녀의 상황을 확인했다.“어디 불편한 데 없어요? 의사 부를까요?”지유는 아직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윤정을 보며 몸을 일으켰다.“저는 괜찮아요. 공사장은 어떻게 됐어요? 다른 부상자는 없어요?”윤정이 말했다.“일단 공사장 일은 상관하지 마세요. 떨어진 유리에 뇌진탕이 왔대요. 어찌나 놀랐는지. 저는 온 비서님 못 깨어나는 줄 알았어요.”윤정은 다시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윤정은 지유를 따라다니며 일을 돕는 비서와도 같은 존재였기에 평소에 지유는 윤정을 많이 아꼈다.아직 젊은 윤정은 이런 상황을 맞닥트려본 적이 없어 많이 놀란 것 같았다.“저 이제 깼잖아요. 걱정하지 마요.”지유가 그런 윤정을 다독였다.머리를 만져보니 머리엔 붕대가 감겨 있었고 아직 통증이 느껴졌다. 지유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렇게 물었다.“공사장은 괜찮아요?”갑자기 일어난 사고로 시공에 영향줄까 봐 무서운 지유였다.“괜찮아요. 온 비서님, 이렇게 심하게 다쳤는데 그깟 공사장이 무슨 대수에요? 평소에도 힘들게 일하시면서 저까지 신경 써 주시는데 이참에 얼른 누워서 쉬세요.”윤정은 너무 죄책감이 들었다. 자신이 재촉하지만 않았더라면 지유가 이런 사고를 당할 일도 없다고 생각했기에 업무와 관련된 일은 아무것도 보고하고 싶지 않았다.지유는 이미 습관된 것 같았다.몇 년간 업무를 수행하는 기계처럼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이현의 기분을 생각해 업무 전반을 다 챙겼다.그러니 자기도 모르게 업무부터 걱정했다.게다가 여씨 집안에 빚진 20억도 있으니 마음 편히 있을 수가 없었
은서우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인명진은 이미 돌아서서 갈 길을 가고 있었다.비록 인명진이 병원의 원장이었지만 은서우는 회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그를 본 적이 거의 없었다.오늘 처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하는 것이었다.그는 수술용 멸균복을 입고 마스크와 모자를 착용하고 있었다.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깊고 차가운 그의 검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수술 내내 상황이 아무리 긴박해도 인명진은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고 그의 침착함과 냉정함은 뛰어난 실력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은서우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이제야 왜 병원의 많은 여성 간호사, 인턴, 심지어 여의사들까지도 그에게 열광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은서우는 가볍게 몸을 풀며 수술실을 나왔다.막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한 동료가 그녀를 찾아왔다.가슴에 걸린 명찰을 보고 은서우는 상대가 인턴임을 알았다.은서우는 예의 바르게 물었다.“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시죠?”“은 선생님, 방금 원장님과 함께 수술을 마치셨죠?”인턴의 질문에 은서우는 약간 의아했다.“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인턴은 자신의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은 선생님, 저 좀 도와주세요. 원장님 카톡 좀 추가해서 저한테 넘겨주시거나 아니면 원장님 사진 몰래 몇 장만 찍어 주세요. 제가 이만큼 드릴게요.”인턴의 눈에는 기대감이 가득 차 있었다.은서우는 인턴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제가 원장님 연락처를 넘긴다고 해도 원장님 입장에서는 그냥 낯선 사람일 뿐일 텐데 원장님이 연락 받아줄 것 같아요? 그리고 몰래 사진 찍는 건 불법인 거 모르나요? 고작 그 정도 푼돈으로 저를 이런 큰일에 끌어들이겠다고요? 당신이 미친 걸까요? 아니면 제가 미친 걸까요?”은서우는 거침없이 인턴을 몰아붙였다.인턴이 급히 덧붙였다.“아니에요, 은 선생님. 도와주시기만 하면 백만 원 아니 천만 원도 문제없어요.”‘천만 원에 사진 몇 장과 연락처? 저 인턴 진짜 제정신이 아니네.’은서우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이명진은 병원에서 만약 어떤 의료 사고라도 발생한다면 이 병원의 명성은 그대로 무너질 것으로 생각했다.그의 말에 한 간호사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원장님, 병원 내부 번호와 원장님 개인번호 모두 통화 중이셨어요. 원장님 인기가 지금 장난 아닌 걸 모르시는 건 아니시죠?”문 앞에 대기 중인 인턴들로도 모자라 소문 듣고 연락이 오는 환자도 있었고 학생들도 있고 심지어 부잣집 부인들도 어디서 개인번호를 얻었는지 매일 전화를 걸어 이명진의 전화는 항상 통화 중 상태였다.긴급 상황만 아니라면 인명진이 직접 나설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인명진은 간호사의 필요 없는 말을 들을 시간도 없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그가 문을 열자 밖에서 있던 인턴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진짜 너무 멋있고 젊잖아. 이렇게 젊으신데 원장 선생님이라고?”“너무 잘생겼어. 여자 친구도 없다 그러던데.”“많은 수술도 직접 하신대. 그리고 학술논문도 봐주고 기타 강의도 하신다고 들었어.”“이렇게 훌륭한 사람 품에 안겨있는 느낌은 어떤지 상상도 안 가.”그들은 미친 사람처럼 저마다 한마디씩 주고받고 있었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인명진에게 달려들어 길을 막고 있었다.“인 원장님, 저랑 사귀시면 이런 병원 몇 개라도 더 해줄 수 있어요. 당신을 경성의 의료센터에서 우두머리로 만들어 드릴게요.”“인 원장님, 저 사람 말 믿지 마세요. 저랑 사귀시면 더 많은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드릴게요.”“인 원장님, 저랑...”“다들 꺼져!”인명진은 평소에 이 사람들에게 무관심이었지만 지금은 급한 수술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한 간호사가 데리고 온 경호원들도 그녀들을 막을 수가 없었지만 항상 따뜻하고 우아하고 부드러운 말만 할 거로 생각했던 인턴들은 인명진의 화내는 소리 한 번에 더 이상 앞으로 다가서지 못했고 자리를 피해 길을 열어 주었다.인명진은 재빨리 수술용 무균복으로 갈아입고 소독한 후 바로 수술실로 들어갔다.수술실 안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했
온지유는 그의 앞에 다가서며 말했다.“이건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문제인데 어떻게 생각할 겨를도 없을 수 있어요? 병원의 간호사나 의사들도 휴가가 있던데 명진 씨는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기계에요? 당신 생각도 잘 알아요. 아이를 입양할 생각도 괜찮지만 그래도 결국 친자식은 아니잖아요.. 그런 생각할 에너지가 있으면 친자식을 낳으면 되잖아요.”지금은 좋은 마음으로 입양했다 하여도 커서 입양한 자녀들 간의 모순으로 불행하게 된 사람들도 너무 많아서 온지유의 걱정이 틀리진 않았다.인명진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런 말은 왜 해. 너의 아이가 둘씩이나 있는데 내가 왜 다른 아이를 입양할 생각 하겠어? 법로가 나한테 너하고 별이를 잘 지켜달라고 부탁한 것도 있고 또 별이가 나중에 크면 이 삼촌이 외롭고 의지할 곳이 없는 것을 알고 그냥 내버려두진 않을 거잖아. 그때가 서 별이가 날 너희 별장으로 데리고 가면 우린 또 한 지붕 아래에서 살 수 있고 내가 곁에서 지켜줄 수 있잖아.”온지유는 인명진의 이런 생각에 너무 어이없어하며 말했다.“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어요? 우리 아버지가 어떤 임무를 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분명하게 알아둬야 할 것은 명진 씨 옆에는 반드시 돌봐줄 사람이 있어야 해요.”온지유는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인명진의 자료를 만들었고 바로 소개팅 사이트에 올리려고 했지만 그 순간 망설이게 되었다.분명 좋은 마음으로 하는 건데 혹시나 인명진이 원하지 않으면 되려 부담이라도 될가봐 다시 자료들을 쓰레기통에 버려 버렸다.그때 여이현은 집에 돌아와 얼굴에 걱정이 가득한 온지유를 보며 말했다.“왜 그래? 요즘 항상 기분이 다운되어 있던데, 무슨 일 있는 거야?”온지유는 있는 그대로 털어 놓았다.“인명진 씨 땜에 그래. 우리 주변 사람들은 다 각자의 삶을 안정적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인명진 씨는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냥 혼자 살고 있잖아. 금방 그의 자료를 만들어 소개팅 사이트에 올리려 했
양시은은 더 이상 나도현에게 빌붙어 사는 작은 변호사가 아니었고 심지어 임다혜와의 앙금도 풀고 둘은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었다.김혜연 쪽은 모든 것이 안정적이었다.온지유는 여름방학에 윤별을 데리고 Y 국으로 갈 계획이었고 인명진도 직접 나설 예정이었다.온지유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다들 결혼도 하고 홍혜주는 출산도 앞두고 있었고 양시은과 나도현도 이젠 너무 행복하게 살고 있었지만 인명진만 미혼에 아직도 혼자였다.여이현은 여희영이 만난 남자를 처음엔 좋게 보지 않았지만 그 남자가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것을 증명하자 안심되었다.심지어 나민우도 지난달 쌍둥이 아들을 낳았다고 연락이 왔고 결국 이제 남은 건 인명진뿐이었다.옆에서 자신을 지켜주고 많이 도와준 인명진을 가족으로 생각한 온지유는 그의 앞날이 걱정되어 하지 않으려던 말을 참지 못하고 내뱉고 말았다.“명진 씨, 제 주변을 돌아보면 다들 자기 행복 찾아 잘 살고 있는데 명진 씨도 이젠 그럴 때가 된 거 같아요. 명진 씨처럼 훌륭한 남자가 본인만 원한다면 좋은 사람은 많을 거잖아요.”인명진은 온지유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잘 알고 있었다.전에 여이현이 죽었다고 생각한 5년 동안은 인명진에게 가장 좋은 기회였지만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온지유의 마음을 얻지 못했고 그 뒤로 인명진은 뒤에서 지켜주는 것도 행복이라고 생각하며 항상 온지유의 그림자가 되어주었다.“난 지금 충분히 행복해. 네가 무슨 일이 있다고 하면 바로 나설 수 있어 좋고 더욱이 법로가 떠나시면서 옆에서 너를 잘 지켜주라고 특별히 당부하셨어.”“하지만 저는 명진 씨 인생의 전부가 아니잖아요. 명진 씨도 자신을 위한 인생을 사셔야죠. 홍혜주 씨도 출산을 앞두고 있다는데 이젠 정말 명진 씨만 남았어요. 그러면...”온지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인명진은 말을 끊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인류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기 위해 사는 건 아니잖아. 율아, 난 지금 충분히 행복하게 살고 있어.”인명진은 항상 온지유가 행복하
현민아는 엉엉 울면서 말했다.“그건 내가 준 예물인데 나한테서 뺏어가려 하지 마요. 신용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아빠가 말했잖아요. 근데... 아빠는 사기꾼이야.”현민아의 끝없는 투정 부림에 현민아의 아버지도 어쩔 수가 없었다.집 계약서도 돌려받았고 사람들 앞에서 더 이상 망신을 당하고 싶지 않은 현민아의 아버지는 현민아가 원하든 하지 않든 일단 둘러메고 집으로 들어갔다.양시은은 옆에 서 있는 하민이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너희들은 아직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말이니 이런 일로 어떤 스트레스도 받으면 안 돼. 유치원에서도 일부러 남을 냉정하게 대해서도 안 돼, 알았지?”“알겠어요.”하민은 양시은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고 사건의 자초지종을 들은 최정숙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우리 귀염둥이 손자가 유치원에서 이렇게 인기가 있는 줄은 몰랐네.”그러고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말했다.“집 계약서 8권이면 재산도 적지 않은데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은 거 같은데?”양시은은 최정숙이 이런 생각까지 할 줄은 몰랐다.“요즘 애들이 뭘 알겠어요. 애들끼리 뭔 생각을 못 하겠어요.”“엄마, 왜 어릴 때부터 그런 일을 만들어요.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거에 정말 탄복해요. 집 계약서 8권이 뭐가 대단하다고, 우리 하민이랑 비기면 턱도 없는걸요. 그 여자아이는 단지 의도하지 않은 행동을 했을 뿐이에요.”지금 좋아한다고 해도 아직도 이십여 년이나 남았는데 사람의 마음은 당연히 변할 것으로 생각한 나도현은 아들이 어릴 때부터 혼약을 맺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그와 같이 직접 경험한 사람에게는 이런 일은 귀찮다고만 생각되었다.최정숙은 나도현의 말에 변명하며 말했다.“그냥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그렇게 하라고는 안 했잖아? 뭐가 그렇게 안 달아 할 지경이니?”“그럴 만도 했잖아요. 전에 저도 엄마가 벌려놓은 이런 일 때문에 편하게 지내지도 못했는데 제 아들까지 그렇게 할 수는 없죠.”나도현의 말에는 토하나라도
“제가 어제 집에 돌아와 하민이의 가방을 열어보니 이런 집 계약서들이 있었어요. 현민아가 가방에 집어넣었나 봐요.”알고 보니 하민이가 잘생겼다고 오랫동안 지켜본 현민아는 그와 친구가 되고 싶었지만 하민이가 평소에 말을 잘 안 한 것 땜에 삼촌한테 고민을 털어놓았었고 그런 행동이 귀여웠던 삼촌은 조롱하는 식으로 현민아에게 친구보다 결혼이 좋은 거라고 말해줬는데 그 말에 현민아가 몰래 집 계약서들을 학교에 가져가 예물이라면서 하민이의 가방에 넣어 준 것이었다.현민아의 아버지는 말을 듣고 더욱 난처해졌다.“우리 꼬마 아가씨, 넌 아직 어려서 예물이라는 것이 뭔지 몰라. 다음부터는 남의 책가방에 물건을 함부로 넣으면 안 돼.”현민아는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근데 난 하민이랑 친구 하고 싶단 말이에요. 친구가 되고 싶으면 뭐라도 보여줘야 내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잖아요.”옆에서 듣고 있던 양시은도 현민아의 진지한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현민아의 아버지는 미안해하며 말했다.“하민 어머님, 정말 죄송합니다. 우리 민아가 어디서 어떤 말을 듣고 저런 행동까지 했는지 모르겠어요. 마음에 두시지 말았으면 좋겠어요.”“현민아 아버님, 여기 집 현민아가 넣어 둔 계약서들입니다. 맞는지 한번 확인해 보세요.”현민아의 아버지가 계약서를 확인하자 현민아는 기분 나빠하며 말했다.“전 돌려받기 싫어요. 아빠가 말했었잖아요. 이미 준 것은 곧 엎질러진 물이랑 같아 주워 담을 수 없다면서요. 그럼 책임을 져야잖아요. 이 물건들은 제가 이미 하민한테 줬고 하민이도 받아들이고 집에 가져갔으니 앞으로 제 사람이 될 건데 이렇게 다시 제가 준 예물을 회수하면 앞으로 저보고 어떻게 하민이랑 잘 지내라는 거예요? 아빠가 이렇게 하면 하민이 한테는 제가 신용이 없는 사람이 되잖아요.”현민아는 끊임없이 몸부림치며 울어댔다.요즘 아이들은 응석받이로 자라서 고집을 부리면 누구도 말릴 수 없어 현민아 아버지와 양시은도 현민아를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다만 양시은이 예상치 못했던
“어젯밤에 집에 도착했는데 네가 없길래 전화하려고 하자 마침 여이현 씨가 널 데려다주셨어.”나도현은 어제 마음이 심란하여 술을 많이 마신 게 분명했다.“여기 비타민이라도 좀 먹어.”양시은은 나도현이 깨어나기 전에 모든 것을 준비해 두었고 비타민 한 알을 건네주었다.나도현도 어제 양시은과 잘 소통하기 위해 많은 생각을 했고 심지어 양시은이 너무 바쁜 탓에 돌아오지 못하면 그녀가 간 도시를 찾으러 가려고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출장에서 돌아와 지금 옆에 있는 양시은을 보며 쓰디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시은아, 넌 이러는 내가 싫지?”“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넌 하나뿐인 내 남편인데 왜 싫겠어. 그리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 아직도 내 마음을 모르는 거야?”양시은은 항상 아이가 평안하고 나도현이 건강하고 그렇게 그들 세 식구가 행복하고 즐겁게 사는 것으로 매우 소박한 소원을 품고 지내왔다.“하지만 나...”“어제 여이현 씨가 널 데려왔을 때 나한테 둘이 잘 소통해 보라고 하길래 네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예측했어.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널 버릴까 봐 그러는 거지?”양시은은 나도현의 옆에 앉아 깊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녀는 나도현이 이렇게 불안해하는 것이 심리 건강에도 안 좋다고 생각되어 자신의 진심을 확실하게 말해주기로 했다.양시은의 말을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한 나도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하지만 전날 술자리에서 여이현과 배진호가 양시은의 우수함을 부정하지 말고 더욱이 양시은의 앞길을 가로막지 말라고 한 말이 생각나 머리를 숙이고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내 생각이 좀 많이 유치했던 것 같아.”“아니야, 날 사랑하는 표현이라는 거 잘 알아. 만약 내가 너라면 너보다 더 했을지도 몰라. 나도현, 내가 너에 대한 사랑을 의심하지 마. 지금 하고 있는 사업도 네가 옆에서 많은 도움을 줘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양시은이 진지한 표정으로 나도현의 두 손을 잡고 말하자 그는 더 부끄러워졌다.나도현의 도움과 격려하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커갔고 착하게 자란 윤별은 초등학교에 간 지 며칠 되지 않아 선생님께 칭찬을 받았으며 여이현도 매우 기뻐했다.하지만 윤별은 항상 외할아버지를 기억하고 있었고 심지어 작은 빨간 꽃을 만들어 외할아버지가 있던 방에 붙여놨다.온지유는 윤별의 행동을 눈치채고 바로 다가가서 위로해 주며 말했다.“별아, 너무 슬퍼하지 마. 외할아버지는 지금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셔서 우리를 보고 계실 꺼야. 그리고 내년이면 외숙모 집에서 별이 남동생과 여동생도 태어날 거야.”“그런데요 엄마, 외할아버지께서 제가 1학년이 되어 글자를 배우면 공부를 가르쳐 주신다고 약속했어요. 그리고 외할아버지께서 또...”윤별은 말하다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전에 윤별이가 브람을 따라갔을 때 브람은 매우 엄하게 대했지만, 온경준이 경성에 데려다 키우는 동안은 윤별에게 끝없는 사랑을 주면서 모든 것을 만족시켜 주었다.그리고 윤별의 몸이 허약하니 온경준은 옆에서 정성껏 보살펴 주었고 쓴 약도 잘 먹게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달래여 먹이면서 많은 추억을 쌓아 주었다.그때 윤별은 온경준에게 물었었다.“할아버지는 할아버지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온경준의 집은 Y 국이었고 윤별의 말에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해 주었다.“별이랑 엄마가 어디에 있으면 할아버지 집은 거기에 있는 거야. 할아버지는 예전에 많은 잘못을 했고 그렇게 되어 너희 엄마와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었어. 이제 겨우 같이 살게 되였는데 할아버지가 어찌 Y 국에 다시 돌아가고 싶겠어? 게다가 이쪽에 오래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온경준은 그때 윤별이랑 함께 많은 수공예도 했고 병아리도 기르고 꽃을 심고 풀도 심었지만, 지금은 반 친구들 외에 하민 동생이 놀러 오고 평소에 윤별은 항상 혼자였다.온지유는 윤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부드럽게 말했다.“외할아버지는 그저 우리보다 먼저 다른 세계로 가신 거야. 모든 사람이 이 세상에 오면 사명이라는 걸 가지고 와. 그리하여 사람은 언젠가 죽을 것이고 앞으로 때가
여이현이 추천해 주겠다는 의사는 인명진이었다.인명진의 능력은 상당히 좋았다.당시 그와 지석훈이 하민에게 수술을 해주지 않았더라면 하민은 지금처럼 이렇게 빨리 낫지 않았을 것이다.“난 병이 없거든.”나도현이 자신의 심병을 인정하지 않자 여이현은 낮은 소리로 말했다.“지난 4년 동안 치료해 온 걸 아니까 너의 이런 심리는 이해는 할 수 있어. 근데 넌 배 비서가 말했듯이 양시은 씨의 우수함을 부정하면 안 돼. 그녀도 본인이 하고 싶은 일도 있을 텐데 네 옆에만 가둬 두고 있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게다가 네가 뭐 사랑을 강제로 시키는 대표도 아니고 결혼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이런 사소한 일로 다투지 마.”나도현은 여이현의 말을 다 알아들었지만 자신의 답답하고 복잡한 이 심정은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그는 양시은이 모두에게 존중받는 것도 원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앞에서만 이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마시다 보니 나도현은 술에 잔뜩 취해 있었다.양시은은 오늘 저녁에야 출장에서 돌아왔고 여이현이 만취한 나도현을 데려온 것을 보고 그녀는 갑자기 마음이 아팠다.“여이현 씨, 저의 남편 데려다줘서 고마워요.”“별말씀을요. 둘이 잘 소통해 봐요.”여이현의 한마디에 양시은은 바로 눈치채고 나도현이 열일곱 살 난 아이 같아 유치하다고 생각하며 웃음을 터뜨렸다.양시은은 도우미를 불러 나도현을 위층으로 옮기고 침대에 눕혀 신발을 벗기고 넥타이를 풀어줬다.금방 출장 다녀온 탓에 힘들었지만 인내성 있게 나도현을 돌보았고 혹시라도 토할까봐 곁에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그런데 뜻밖에도 나도현은 갑자기 양시은을 품에 안더니 그녀에게 입을 맞추며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양시은, 나 정말 널 너무 사랑해. 그래서 또 잃을까 봐 두려워.”“너의 마음을 나도 다 알고 있어.”“니가 너무 우수해서 다른 사람들이 눈여겨볼까 봐 겁이 나, 그리고...”양시은은 그의 등을 토닥여주며 말했다.“바보야, 너는 내가 인생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남자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