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법로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았더니 이내 몸이 뒤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아, 아버지!”온지유는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쿵.법로는 그대로 모래사장에 쓰러지게 되었고 온지유의 목소리를 들은 신무열과 그들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때 법로는 힘겹게 손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기다려. 나 좀 기다려...”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의 숨이 멎어버렸다. 온지유는 그가 더는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온지유는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김혜연도 더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여이현은 온하윤을 안고 있었고 별이는 그동안 법로와 함께 지낸 시간이 많았던지라 이미 법로를 외할아버지로서 아주 좋아하고 있었기에 바로 눈물을 터뜨렸다.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는 것은 아니었다.이젠 법로를 보내줄 때가 된 것이다. 법로는 마지막을 바닷가에서 보내고 싶어 했기에 장례식을 바닷가에서 치러주려고 했다. 하지만 온지유는 법로가 그래도 태어난 곳에 묻히는 것이 낫지 않나 생각했다.그러나 신무열은 법로의 의사대로 해주려고 했다.“아버지는 경성에 묻히고 싶어 하셨어. 그러니까 아버지 의사대로 하자. 지유야, 아버지 의사대로 하는 게 너한테도 편할 거야.”“하지만 Y 국이야말로 아버지 고향이잖아요. 게다가 그곳엔 오빠도 있고요. 어머니도... 그곳에 묻혀 있는 거 아니에요?”그녀가 내뱉은 말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녀의 가슴을 찌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알지 못했다. 어릴 때 기억이 조금 돌아오긴 했지만 불완전한 상태였고 여전히 알지 못했다.신무열은 입술을 틀어 문 채 나직하게 말했다.“어머니의 죽음은 아버지에게 엄청난 고통이었어. 이젠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아버지가 원하셨던 대로 하자.”온지유도 법로가 이렇듯 갑자기 자신의 곁을 떠난 것이 너무도 괴로웠다.장례식은 다음 날에 치러졌다. 장례식장엔 오직 그들
온지유는 비록 상심이 컸지만 아이들을 돌봐야 했다. 시간이 흐르고 그녀는 김혜연과 함께 병원으로 왔다. 이번에도 인명진이 직접 김혜연에게 주의사항을 말해주며 진찰해주었다. 법로는 세상을 떠나기 전 김혜연의 아기를 아주 기대하고 있었다.법로는 온지유는 물론이고 별이와 온하윤도 잘 돌봤기에 온지유는 김혜연을 법로처럼 잘 돌봐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그러나 김혜연은 그녀에게 신세 지고 싶지 않았다.“지유 씨에겐 돌봐야 할 아이들이 있잖아요. 아직 초기니까 저 혼자 저를 돌볼 수 있어요. 더구나 지유 씨 별장엔 도우미 아주머니들이 계시잖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신경 써줄 필요 없어요.”“안 돼요. 전에는 시간이 없어서 소홀했다고 하지만 지금은 아니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잘 돌봐야 하는 거죠. 전 혜연 씨를 최선을 다해 돌볼 거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부끄럽지 않을 만큼 말이에요.”법로를 언급하자 김혜연은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애당초 그녀가 신무열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법로가 직접 신무열과 이어질 수 있게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은 야속하게도 너무나도 빠르게 흘러갔다.행여나 김혜연이 무료함을 느낄까 봐 온지유는 권다솔도 불러왔다. 권다솔도 임신했던지라 배가 어느 정도 부른 상태였다.“저는 둘째한테 신경을 써줘야 하는 상황이라 혜연 씨한테 관심을 전부 쏟아부을 수 없어요. 그래서 다솔 씨를 부른 거예요. 두 사람 지금 모두 임신 중이잖아요.”제일 중요한 건 그녀가 온하윤을 임신했을 때 여이현이 그녀를 챙겨주고 돌봐주었던지라 여이현에게 돌봐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었다.그렇게 김혜연과 권다솔은 친구가 되었고 셋이서 쇼핑도 하고 게임도 하면서 지냈다. 양시은은 현재 박은희를 간호해야 했기에 불러올 수 없었다. 만약 양시은도 시간이 되었다면 아마 넷이 친구가 되었을 것이다.여이현이 운영하고 있는 회사는 규모가 점점 더 커졌고 배진호의 회사도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지선율은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기도 했다. 장다희도 어느새 톱스타가 되었다.다
한편 양시은은 병원에서 박은희를 간호한 지 며칠이 지났다.박은희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예전에는 왜 몰랐지...”양시은은 그녀가 예전의 일을 언급하려는 것을 눈치채고 얼른 웃으며 말을 잘랐다.“어머님,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니까 더는 언급하지 마세요.”“그래. 알겠다.”박은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머금은 채 따듯한 죽을 먹었다. 그 따듯함이 그녀의 가슴에도 퍼지는 것 같았고 나날이 행복해지는 것 같았다.나도현은 점심이 되어서야 병실로 오게 되었다. 양시은과 박은희의 화목한 모습을 보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당연하지. 넌 내 며느리고 내 딸이나 다름없는 존재이지.”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모르겠지만 박은희가 웃으며 말했다. 양시은은 나도현을 힐끗 보며 미소를 지었다.“어머님 상태는 괜찮으셔. 며칠만 더 입원하면 퇴원할 수 있대. 내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응, 걱정 안 해.”나도현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그래도 쉬엄쉬엄해.”“박 여사, 오늘 몸 상태는 어때요?”이때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휘두른 여자가 병실 앞에 서서 말을 걸었다. 여자는 바로 박은희가 입원해 있는 병실의 옆 방에서 지내고 있었다. VIP 병동엔 애초에 사람이 많지 않았던지라 요즘 자주 찾아오고 있는 손님이었다.“어머, 엄 여사. 얼른 들어와 앉아요.”박은희는 반갑게 인사했다.“혹시 제가 눈치 없이 찾아온 건 아니죠? 어머, 오늘은 아들이 찾아온 거예요?”옆 병실을 쓰고 있는 엄현숙이 말하면서 들어오더니 나도현을 위아래 훑어보곤 기쁜 얼굴로 말했다.“아들이 참 곱게 자랐네요. 꼭 연예인처럼 어디서 본 것 같네요?”박은희는 아들을 언급하는 엄현숙에 자랑스럽게 대꾸했다.“어느 잡지에서 본 것이겠죠. 우리 아들이 인터뷰를 몇 번이나 했었거든요.”“아, 생각나네요. 그때 그 유명한 엘리트 변호사 맞죠? 이제야 기억이 나네요. 젊은 나이에 모든 걸 다 가졌다니. 정말 보기 드문 인재
최정숙은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저희한테 잘해주기만 하면 된 거죠. 지난 시간 동안 다른 걸 바라본 적은 없어요.”“사랑이 밥 먹여 줘요?”계은경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결국 집안 좋고 능력 좋은 사람을 찾아야 하는 법이에요. 예를 들어 제 딸처럼요.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서 예의 바르고 외모까지 출중하다죠.”“그래요? 따님을 본 적은 없지만 은경 씨 닮아서 분명히 예쁠 것 같네요.”최정숙이 칭찬하듯 덤덤히 말을 받았다.반대로 계은경은 이 이상 더 노골적으로 말할 수 없었다. 최정숙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녀는 살짝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막 이어서 얘기하려던 참이었는데, 문밖에서 양시은이 들어오는 게 보여 화제를 뚝 끊고 웃으며 한마디 건넸다.“벌써 돌아왔니?”“도현 씨 로펌에 일이 많아서요.”양시은은 가볍게 대답한 뒤 곧바로 가서 이것저것 챙겼다.그녀가 짐을 들고나오는데 마침 계은경도 따라나왔다.“시은 씨, 시간 좀 있어?”“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양시은이 덤덤히 뒤돌아보았다.계은경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제안했다.“우리 방으로 가서 이야기하자. 방안에 더 널찍하고 좋아.”양시은은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 나섰다.방에 들어서자마자 계은경의 태도는 싹 달라졌다. 그녀는 양시은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너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며?”양시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했다.“그래서요?”“네 시어머니만 아니었어도 넌 내 앞에서 이런 식으로 말할 기회가 없었을 거다.”계은경은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재벌 특유의 거만한 태도를 드러냈다.“돈 좀 있는 사람들이야 돈만 쓰면 여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지. 근데 끝까지 같이 갈 수 있는 건 결국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사람뿐이야.”양시은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그 말씀 무슨 뜻이에요?”“좋게 말할 때 물러나라는 뜻이야. 돈이라면 얼마든지 쥐여줄게. 자리만 비워준다면 네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이익을 받을 수 있을 거야.”계은경은 여전히
최정숙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러자.”다행히 상처가 그리 깊지 않아서 약만 잘 바르면 되었다.집에 돌아온 후, 옆에서 놀고 있는 하민을 보고 있자니 최정숙은 조금씩 기운을 되찾았다.퇴근하고 돌아온 나도현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시은아, 잠깐 서재로 와. 얘기할 게 있어.”양시은은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대답했다.“응.”서재에 들어가자 나도현은 서류 가방에서 한 장의 문서를 꺼내 그녀 앞에 놓았다.“이거 한번 봐봐.”양시은은 서류를 받아 들고 빠르게 훑어봤다.“이게 뭐야?”“이 프로그램 들어본 적 있지? 변호사들이 참가하는 토론 대회인데 대상을 타면 업계 내에서 상당한 인지도를 얻을 수 있어.”나도현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당연히 들어봤지.”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대회에 참가하는 것도 까다롭다고 했잖아. 전에 자주 봤었어.”그녀는 꿈을 포기한 다음에도 변호사가 된 자신의 모습을 종종 생각하고는 했다. 끊임없이 이어가는 일상에서 점점 흐릿해지기는 했지만 말이다.눈앞의 서류를 바라보며 그녀의 마음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일었다. 설렘과 함께 불안감도 뒤섞여 있었다.나도현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기회가 왔는데 한번 도전해 볼래?”“참가자 자격 요건이 높은 거로 기억하는데 내가... 그걸...”양시은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 로펌에 주어진 기회를 내가 가로채면 다른 사람들이 불만을 가지지 않을까?”“그럴 리는 없어.”나도현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아무한테도 피해가 가지 않아. 너만 원하면 네 이름으로 신청할게.”“좋아. 나 할래.”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동안 그녀는 법학 공부를 포기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시작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양시은은 미소를 지었다. 마음속의 감동은 말로 이루 형용할 수가 없었다.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로 돌아갈 기회가 생기자, 그녀는 며칠 동안 열정적으로 공부하며 밤늦게까지 책을
“네!”양시은은 들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사람들은 점점 더 모여들었다.그러다 한 대형 로펌 변호사가 그녀의 앞에 놓인 명패를 힐끗 보더니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나진 그룹 로펌도 이제 영 시원찮네. 아무나 막 끌어들이는 모양이야.”양시은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자신이 이 업계에서 출신이나 지위가 마땅히 인정받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의 경멸에 기죽을 생각은 없었다.그녀는 대형 로펌 변호사를 똑바로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누구나 출발점이 있는 거잖아요. 중요한 건 얼마나 더 멀리 갈 수 있느냐가 아니겠어요?”그 변호사는 그녀의 침착한 태도와 단호한 눈빛에 잠시 움찔하더니 이내 헛웃음을 지었다. 분수를 모르는 신참 변호사를 비웃는 표정이었다.“어찌 됐든 올해 상은 다른 로펌에 가겠네요.”“글쎄요, 그건 모르는 일이죠.”다른 몇몇 변호사들이 다가와 말했다.“뭐요?”대형 로펌 변호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오랜만이네요, 권변.”무리 중 리더 격인 변호사가 손을 내밀어 자연스럽게 악수했다.권 변호사는 그들을 슥 훑어보더니 상황을 이해한 듯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나진은 투자자로서 스폰서 자격으로 두 팀을 내보낼 수 있는 거였네요. 수상 확률을 높이려고 한 일인 것 같은데 왜 이름도 없는 신인 변호사한테 기회를 줬어요. 이렇게 큰 무대를 연습장으로 삼다니, 나변도 참 통이 커요.”“과찬이십니다. 근데 뭐가 됐든 나 변호사님의 계획이 아닐까요.”리더 변호사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래도 저는 이해가 안 되는데요. 나진이 스폰서가 돼서 은변도 좋았죠? 근데 이 좋은 기회를 신인한테 넘기다니...”권 변호사는 말끝을 흐리다가 다시 한번 크게 웃어넘긴 뒤 손을 내저었다.“그냥 헛소리였어요. 못 들은 걸로 해요.”은 변호사는 여유 있는 표정으로 답했다.“나 변호사님도 다 생각이 있으십니다. 부러우면 따라 해보시죠.”권 변호사는 더 말해봤자 손해만 볼 것 같았는지 형식적
기자회견이 끝난 후 양시은은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때 나도현이 다가와 옆에 앉으며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는 격려의 표시였다.양시은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나 때문에 얼마나 투자했어?”“이건 스폰서의 권한이라 다른 사람과는 상관없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어. 시은아, 너만 마음먹으면 이건 정말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어.”나도현은 진지하게 말했다. 작은 일에 얽매여 괜한 고민하지 말고 눈앞의 일에 집중하자는 뜻이었다.양시은은 곧 결심을 내린 듯 말했다.“알았어. 널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 거야.”“내가 아닌 너 자신을 실망시키지 말아야 해.”나도현은 진지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양시은의 마음속에서 감동이 여울처럼 퍼졌다.이튿날 바로 첫 경기가 시작되었다. 변호사의 토론 대회는 심플했다. 한 문제로 찬성팀과 반대팀이 나뉘어 각자의 의견을 주장하는 것이었다.옳고 그름은 나뉘지 않는다. 주최 측은 일부러 애매한 문제를 선정해서 참가자의 언변을 시험했다.양시은은 운 좋게도 작은 로펌을 상대로 뽑았다. 무대로 올라간 다음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옷매무시를 정리했다. 무대에 서 있으니, 자신감으로 넘쳐나던 대학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그녀는 당당한 눈빛으로 무대에 서 있었다. 눈빛 속에는 법조인의 꿈을 향한 열망으로 가득했다. 이 무대는 그녀의 전쟁터자, 그녀의 가치를 다시 증명하는 곳이다.“시작합니다!”MC의 말에 따라 토론이 시작되었다.상대는 경력이 풍부한 것이 분명했다. 논리 정연한 말은 토론이 시작되자마자 마구 쏟아져나왔다.양시은도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또렷한 목소리로 자신의 입장을 지켰고 실제 사례까지 들며 논리를 완성시켰다. 모든 말이 승리를 향한 발걸음이 되었다.무대 아래에서 지켜보던 관객과 심사위원은 보잘것없는 줄 알았던 신입 변호사인 그녀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그녀의 실력은 단순히 법에 대한 이해를 넘어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는 힘을 발산했다. 그것은 정의에 대한 갈망과 공정함
호텔 바닥은 아수라장이었다.잠에서 깬 지유는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지유는 미간을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커다란 몸집을 가진 남자가 옆에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지나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은 조각과도 같았고 눈매도 깊고 진했다.아직 깊은 잠이 들어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지유가 몸을 일으키자 이불이 그녀의 몸에서 미끄러져 내렸고 뽀얗고 매혹적인 두 어깨에 어젯밤 남긴 흔적이 보였다.지유가 앉았던 자리에 선명한 핏자국이 보였다.시간을 보니 어느새 출근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유는 바닥에 널브러진 출근룩을 다시 집어 들어 얼른 갈아입었다.스타킹은 이미 남자에 의해 찢겨 있었다.지유는 스타킹을 돌돌 말아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하이힐을 신었다.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깔끔하게 차려입은 지유는 어느새 워커홀릭 비서로 완전히 돌아왔고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들어온 사람은 청순한 미녀였다.지유가 부른 사람이었다.이현의 취향이 이런 여자였다.지유가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침대에 누워서 대표님 깨나길 기다리면 돼요. 다른 건 한마디도 하지 마요.”지유는 고개를 돌려 아직 단잠에 빠진 남자를 힐끔 쳐다봤다. 억울한 마음에 코끝이 찡해졌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방에서 나왔다.지유는 두 사람이 어젯밤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이현이 아는 게 싫었다.그들 사이에 계약에 의하면 아무도 모르게 3년간 결혼을 유지하면 바로 이혼할 수 있었다.이 기간에 선을 넘는 행동은 그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지유는 7년째 이현의 비서로, 3년째 이현의 와이프로 있었다.졸업한 그날부터 이현의 곁을 한시도 떠난 적이 없었다.같은 날, 이현은 지유에게 두 사람은 그저 상사와 부하의 관계일 뿐 이 관계를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지유는 복도 창가에 서서 어제 일을 떠올렸다. 이현은 그녀를 안고 침대에 누워 ‘승아’라는 이름을 연신 불러댔다.지유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승아는 이현의 첫사랑이었다.이현은 지유를 승
기자회견이 끝난 후 양시은은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때 나도현이 다가와 옆에 앉으며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는 격려의 표시였다.양시은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나 때문에 얼마나 투자했어?”“이건 스폰서의 권한이라 다른 사람과는 상관없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어. 시은아, 너만 마음먹으면 이건 정말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어.”나도현은 진지하게 말했다. 작은 일에 얽매여 괜한 고민하지 말고 눈앞의 일에 집중하자는 뜻이었다.양시은은 곧 결심을 내린 듯 말했다.“알았어. 널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 거야.”“내가 아닌 너 자신을 실망시키지 말아야 해.”나도현은 진지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양시은의 마음속에서 감동이 여울처럼 퍼졌다.이튿날 바로 첫 경기가 시작되었다. 변호사의 토론 대회는 심플했다. 한 문제로 찬성팀과 반대팀이 나뉘어 각자의 의견을 주장하는 것이었다.옳고 그름은 나뉘지 않는다. 주최 측은 일부러 애매한 문제를 선정해서 참가자의 언변을 시험했다.양시은은 운 좋게도 작은 로펌을 상대로 뽑았다. 무대로 올라간 다음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옷매무시를 정리했다. 무대에 서 있으니, 자신감으로 넘쳐나던 대학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그녀는 당당한 눈빛으로 무대에 서 있었다. 눈빛 속에는 법조인의 꿈을 향한 열망으로 가득했다. 이 무대는 그녀의 전쟁터자, 그녀의 가치를 다시 증명하는 곳이다.“시작합니다!”MC의 말에 따라 토론이 시작되었다.상대는 경력이 풍부한 것이 분명했다. 논리 정연한 말은 토론이 시작되자마자 마구 쏟아져나왔다.양시은도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또렷한 목소리로 자신의 입장을 지켰고 실제 사례까지 들며 논리를 완성시켰다. 모든 말이 승리를 향한 발걸음이 되었다.무대 아래에서 지켜보던 관객과 심사위원은 보잘것없는 줄 알았던 신입 변호사인 그녀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그녀의 실력은 단순히 법에 대한 이해를 넘어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는 힘을 발산했다. 그것은 정의에 대한 갈망과 공정함
“네!”양시은은 들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사람들은 점점 더 모여들었다.그러다 한 대형 로펌 변호사가 그녀의 앞에 놓인 명패를 힐끗 보더니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나진 그룹 로펌도 이제 영 시원찮네. 아무나 막 끌어들이는 모양이야.”양시은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자신이 이 업계에서 출신이나 지위가 마땅히 인정받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의 경멸에 기죽을 생각은 없었다.그녀는 대형 로펌 변호사를 똑바로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누구나 출발점이 있는 거잖아요. 중요한 건 얼마나 더 멀리 갈 수 있느냐가 아니겠어요?”그 변호사는 그녀의 침착한 태도와 단호한 눈빛에 잠시 움찔하더니 이내 헛웃음을 지었다. 분수를 모르는 신참 변호사를 비웃는 표정이었다.“어찌 됐든 올해 상은 다른 로펌에 가겠네요.”“글쎄요, 그건 모르는 일이죠.”다른 몇몇 변호사들이 다가와 말했다.“뭐요?”대형 로펌 변호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오랜만이네요, 권변.”무리 중 리더 격인 변호사가 손을 내밀어 자연스럽게 악수했다.권 변호사는 그들을 슥 훑어보더니 상황을 이해한 듯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나진은 투자자로서 스폰서 자격으로 두 팀을 내보낼 수 있는 거였네요. 수상 확률을 높이려고 한 일인 것 같은데 왜 이름도 없는 신인 변호사한테 기회를 줬어요. 이렇게 큰 무대를 연습장으로 삼다니, 나변도 참 통이 커요.”“과찬이십니다. 근데 뭐가 됐든 나 변호사님의 계획이 아닐까요.”리더 변호사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래도 저는 이해가 안 되는데요. 나진이 스폰서가 돼서 은변도 좋았죠? 근데 이 좋은 기회를 신인한테 넘기다니...”권 변호사는 말끝을 흐리다가 다시 한번 크게 웃어넘긴 뒤 손을 내저었다.“그냥 헛소리였어요. 못 들은 걸로 해요.”은 변호사는 여유 있는 표정으로 답했다.“나 변호사님도 다 생각이 있으십니다. 부러우면 따라 해보시죠.”권 변호사는 더 말해봤자 손해만 볼 것 같았는지 형식적
최정숙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러자.”다행히 상처가 그리 깊지 않아서 약만 잘 바르면 되었다.집에 돌아온 후, 옆에서 놀고 있는 하민을 보고 있자니 최정숙은 조금씩 기운을 되찾았다.퇴근하고 돌아온 나도현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시은아, 잠깐 서재로 와. 얘기할 게 있어.”양시은은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 대답했다.“응.”서재에 들어가자 나도현은 서류 가방에서 한 장의 문서를 꺼내 그녀 앞에 놓았다.“이거 한번 봐봐.”양시은은 서류를 받아 들고 빠르게 훑어봤다.“이게 뭐야?”“이 프로그램 들어본 적 있지? 변호사들이 참가하는 토론 대회인데 대상을 타면 업계 내에서 상당한 인지도를 얻을 수 있어.”나도현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당연히 들어봤지.”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대회에 참가하는 것도 까다롭다고 했잖아. 전에 자주 봤었어.”그녀는 꿈을 포기한 다음에도 변호사가 된 자신의 모습을 종종 생각하고는 했다. 끊임없이 이어가는 일상에서 점점 흐릿해지기는 했지만 말이다.눈앞의 서류를 바라보며 그녀의 마음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일었다. 설렘과 함께 불안감도 뒤섞여 있었다.나도현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기회가 왔는데 한번 도전해 볼래?”“참가자 자격 요건이 높은 거로 기억하는데 내가... 그걸...”양시은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 로펌에 주어진 기회를 내가 가로채면 다른 사람들이 불만을 가지지 않을까?”“그럴 리는 없어.”나도현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아무한테도 피해가 가지 않아. 너만 원하면 네 이름으로 신청할게.”“좋아. 나 할래.”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동안 그녀는 법학 공부를 포기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시작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양시은은 미소를 지었다. 마음속의 감동은 말로 이루 형용할 수가 없었다.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로 돌아갈 기회가 생기자, 그녀는 며칠 동안 열정적으로 공부하며 밤늦게까지 책을
최정숙은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저희한테 잘해주기만 하면 된 거죠. 지난 시간 동안 다른 걸 바라본 적은 없어요.”“사랑이 밥 먹여 줘요?”계은경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결국 집안 좋고 능력 좋은 사람을 찾아야 하는 법이에요. 예를 들어 제 딸처럼요.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서 예의 바르고 외모까지 출중하다죠.”“그래요? 따님을 본 적은 없지만 은경 씨 닮아서 분명히 예쁠 것 같네요.”최정숙이 칭찬하듯 덤덤히 말을 받았다.반대로 계은경은 이 이상 더 노골적으로 말할 수 없었다. 최정숙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녀는 살짝 실망한 기색을 보였다.막 이어서 얘기하려던 참이었는데, 문밖에서 양시은이 들어오는 게 보여 화제를 뚝 끊고 웃으며 한마디 건넸다.“벌써 돌아왔니?”“도현 씨 로펌에 일이 많아서요.”양시은은 가볍게 대답한 뒤 곧바로 가서 이것저것 챙겼다.그녀가 짐을 들고나오는데 마침 계은경도 따라나왔다.“시은 씨, 시간 좀 있어?”“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양시은이 덤덤히 뒤돌아보았다.계은경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제안했다.“우리 방으로 가서 이야기하자. 방안에 더 널찍하고 좋아.”양시은은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 나섰다.방에 들어서자마자 계은경의 태도는 싹 달라졌다. 그녀는 양시은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너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며?”양시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했다.“그래서요?”“네 시어머니만 아니었어도 넌 내 앞에서 이런 식으로 말할 기회가 없었을 거다.”계은경은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재벌 특유의 거만한 태도를 드러냈다.“돈 좀 있는 사람들이야 돈만 쓰면 여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지. 근데 끝까지 같이 갈 수 있는 건 결국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사람뿐이야.”양시은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그 말씀 무슨 뜻이에요?”“좋게 말할 때 물러나라는 뜻이야. 돈이라면 얼마든지 쥐여줄게. 자리만 비워준다면 네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이익을 받을 수 있을 거야.”계은경은 여전히
한편 양시은은 병원에서 박은희를 간호한 지 며칠이 지났다.박은희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예전에는 왜 몰랐지...”양시은은 그녀가 예전의 일을 언급하려는 것을 눈치채고 얼른 웃으며 말을 잘랐다.“어머님,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니까 더는 언급하지 마세요.”“그래. 알겠다.”박은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머금은 채 따듯한 죽을 먹었다. 그 따듯함이 그녀의 가슴에도 퍼지는 것 같았고 나날이 행복해지는 것 같았다.나도현은 점심이 되어서야 병실로 오게 되었다. 양시은과 박은희의 화목한 모습을 보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당연하지. 넌 내 며느리고 내 딸이나 다름없는 존재이지.”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모르겠지만 박은희가 웃으며 말했다. 양시은은 나도현을 힐끗 보며 미소를 지었다.“어머님 상태는 괜찮으셔. 며칠만 더 입원하면 퇴원할 수 있대. 내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응, 걱정 안 해.”나도현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그래도 쉬엄쉬엄해.”“박 여사, 오늘 몸 상태는 어때요?”이때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휘두른 여자가 병실 앞에 서서 말을 걸었다. 여자는 바로 박은희가 입원해 있는 병실의 옆 방에서 지내고 있었다. VIP 병동엔 애초에 사람이 많지 않았던지라 요즘 자주 찾아오고 있는 손님이었다.“어머, 엄 여사. 얼른 들어와 앉아요.”박은희는 반갑게 인사했다.“혹시 제가 눈치 없이 찾아온 건 아니죠? 어머, 오늘은 아들이 찾아온 거예요?”옆 병실을 쓰고 있는 엄현숙이 말하면서 들어오더니 나도현을 위아래 훑어보곤 기쁜 얼굴로 말했다.“아들이 참 곱게 자랐네요. 꼭 연예인처럼 어디서 본 것 같네요?”박은희는 아들을 언급하는 엄현숙에 자랑스럽게 대꾸했다.“어느 잡지에서 본 것이겠죠. 우리 아들이 인터뷰를 몇 번이나 했었거든요.”“아, 생각나네요. 그때 그 유명한 엘리트 변호사 맞죠? 이제야 기억이 나네요. 젊은 나이에 모든 걸 다 가졌다니. 정말 보기 드문 인재
온지유는 비록 상심이 컸지만 아이들을 돌봐야 했다. 시간이 흐르고 그녀는 김혜연과 함께 병원으로 왔다. 이번에도 인명진이 직접 김혜연에게 주의사항을 말해주며 진찰해주었다. 법로는 세상을 떠나기 전 김혜연의 아기를 아주 기대하고 있었다.법로는 온지유는 물론이고 별이와 온하윤도 잘 돌봤기에 온지유는 김혜연을 법로처럼 잘 돌봐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그러나 김혜연은 그녀에게 신세 지고 싶지 않았다.“지유 씨에겐 돌봐야 할 아이들이 있잖아요. 아직 초기니까 저 혼자 저를 돌볼 수 있어요. 더구나 지유 씨 별장엔 도우미 아주머니들이 계시잖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신경 써줄 필요 없어요.”“안 돼요. 전에는 시간이 없어서 소홀했다고 하지만 지금은 아니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잘 돌봐야 하는 거죠. 전 혜연 씨를 최선을 다해 돌볼 거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부끄럽지 않을 만큼 말이에요.”법로를 언급하자 김혜연은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애당초 그녀가 신무열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법로가 직접 신무열과 이어질 수 있게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은 야속하게도 너무나도 빠르게 흘러갔다.행여나 김혜연이 무료함을 느낄까 봐 온지유는 권다솔도 불러왔다. 권다솔도 임신했던지라 배가 어느 정도 부른 상태였다.“저는 둘째한테 신경을 써줘야 하는 상황이라 혜연 씨한테 관심을 전부 쏟아부을 수 없어요. 그래서 다솔 씨를 부른 거예요. 두 사람 지금 모두 임신 중이잖아요.”제일 중요한 건 그녀가 온하윤을 임신했을 때 여이현이 그녀를 챙겨주고 돌봐주었던지라 여이현에게 돌봐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었다.그렇게 김혜연과 권다솔은 친구가 되었고 셋이서 쇼핑도 하고 게임도 하면서 지냈다. 양시은은 현재 박은희를 간호해야 했기에 불러올 수 없었다. 만약 양시은도 시간이 되었다면 아마 넷이 친구가 되었을 것이다.여이현이 운영하고 있는 회사는 규모가 점점 더 커졌고 배진호의 회사도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지선율은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기도 했다. 장다희도 어느새 톱스타가 되었다.다
온지유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법로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았더니 이내 몸이 뒤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아, 아버지!”온지유는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쿵.법로는 그대로 모래사장에 쓰러지게 되었고 온지유의 목소리를 들은 신무열과 그들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때 법로는 힘겹게 손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기다려. 나 좀 기다려...”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의 숨이 멎어버렸다. 온지유는 그가 더는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온지유는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김혜연도 더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여이현은 온하윤을 안고 있었고 별이는 그동안 법로와 함께 지낸 시간이 많았던지라 이미 법로를 외할아버지로서 아주 좋아하고 있었기에 바로 눈물을 터뜨렸다.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는 것은 아니었다.이젠 법로를 보내줄 때가 된 것이다. 법로는 마지막을 바닷가에서 보내고 싶어 했기에 장례식을 바닷가에서 치러주려고 했다. 하지만 온지유는 법로가 그래도 태어난 곳에 묻히는 것이 낫지 않나 생각했다.그러나 신무열은 법로의 의사대로 해주려고 했다.“아버지는 경성에 묻히고 싶어 하셨어. 그러니까 아버지 의사대로 하자. 지유야, 아버지 의사대로 하는 게 너한테도 편할 거야.”“하지만 Y 국이야말로 아버지 고향이잖아요. 게다가 그곳엔 오빠도 있고요. 어머니도... 그곳에 묻혀 있는 거 아니에요?”그녀가 내뱉은 말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녀의 가슴을 찌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알지 못했다. 어릴 때 기억이 조금 돌아오긴 했지만 불완전한 상태였고 여전히 알지 못했다.신무열은 입술을 틀어 문 채 나직하게 말했다.“어머니의 죽음은 아버지에게 엄청난 고통이었어. 이젠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아버지가 원하셨던 대로 하자.”온지유도 법로가 이렇듯 갑자기 자신의 곁을 떠난 것이 너무도 괴로웠다.장례식은 다음 날에 치러졌다. 장례식장엔 오직 그들
법로는 여이현의 눈빛에서 확신을 얻었다. 그는 여이현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직접 두 눈으로 온지유에게 잘해주는 모습을 보았으니까.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기에 한번 또 한 번 당부했다.그는 살면서 얻은 것도 있었고 잃은 것도 많았다. 하지만 유일하게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은 바로 그의 자식들이었다. 분명 비흡연자에 술도 입에 대지 않았지만 하늘은 그의 목숨을 거두어가려 했다. 법로는 하늘이 자신에게 내려준 벌이라고 생각했다.법로와 여이현은 한참 얘기를 나누었다. 여이현은 짜증 내는 법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비록 신무열이 모든 걸 잘 해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당부했다.“앞으로 성질 좀 죽이며 살아. 내 빚은 네가 갚겠다는 마음을 가질 필요도 없고 남은 시간은 지유와 함께 보내고 싶어. Y 국엔 아직 네가 필요하니까 이만 가봐도 돼. 내가 지금 유일하게 바라는 건 네가 나 대신 Y 국을 잘 보살피는 거야. Y 국이 더 살기 좋은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구나.”“혜연이도 좋은 아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싸우는 일이 있게 되어도 네가 먼저 사과해. 물론 싸우는 일이 없으면 더 좋고. 알콩달콩 잘 지내야 해. 유일하게 아쉬운 게 너희들의 아이를 내가 돌봐줄 수 없구나.”“별이의 성장 과정도 더 지켜볼 수도 없고... 게다가 난 하마터면 별이와 지유를 죽일 뻔했잖니. 노석명 쪽은 내가 죽은 후에 깔끔하게 처리하려무나.”법로는 신무열에게 많은 일을 맡겼다. 노석명의 일도 빼놓지 않았고 심지어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시간에 대해서도 이미 계획을 세웠다.그런 그의 모습을 보니 그의 일생이 한 편의 영화처럼 눈앞에서 생생하게 재생되는 것 같았다.“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잖아요. 우리 이제 앞만 보고 살기로 한 거 아니었나요? 그러니까 그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런 생각 하면 할수록 더 괴로워질 거라고요.”신무열은 법로가 자책하는 것을 더는 바라지 않았다. 행여나 그가 말을 하
비서의 말에 인명진은 침묵했다. 잊지 못한 사람이 확실히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속엔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한 사람만 존재했다. 온지유, 바로 그의 율이였다.다만 유감스럽게도... 그가 온지유를 찾았을 땐 이미 여이현과 결혼한 상태였고 아이도 있었다. 나중에 여이현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도 온지유는 변함없이 여이현을 사랑했다.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온지유의 마음속에 들어 살 수 없었다.온지유만 떠올려도, 그녀가 행복한 모습만 봐도 그는 행복했다. 하지만 그가 느끼는 이 외로움은 너무도 괴로운 것이었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었다.다만 인명진은 빠르게 머릿속에서 스멀스멀 드는 부정적인 생각을 지워버렸다.“내가 준 업무는 다 했어요? 아무래도 내가 일을 너무 적게 줬나 봐요. 나한테 이런 관심을 보일 정도면?”비서는 바로 입을 꾹 다물었다.“아니요.”인명진은 담담하게 말했다.“가서 할 일이나 하세요. 쓸데없는 것에 시간 낭비하지 말고요.”“네, 알겠습니다.”말을 마친 비서는 바로 자리를 옮겼다.며칠 후.김혜연과 신무열의 태아가 성공적으로 잉태되었다. 그 뒤로 모든 건 절차대로 움직였고 김혜연은 아주 만족하고 있었다. 그녀와 신무열에게 드디어 아이가 생겼으니 말이다. 두 사람은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온지유는 법로를 부축해주고 있었다.“아버지, 좋은 소식도 들려왔으니까 꼭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저랑 오빠의 아이들을 아버지가 돌봐주셔야죠.”온지유는 말을 하고 나니 또 괜스레 눈물을 나올 것 같았다. 법로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의 곁에 있어 주면서 아이들을 돌봐줄 생각이었다. 그녀와 여이현이 편히 둘만의 시간을 보내며 쉴 수 있게 말이다. 그리고 돈도 아끼지 않고 썼다.법로는 심지어 집안의 작은 가구도 고민하지 않고 사주었다. 특히 아이들이 원하는 장난감이 있으면 바로 사주었다. 온지유는 자신과 법로에게 많은 시간을 주지 않은 하늘이 조금 원망스러웠다.사실 법로도 하루라도 더 오래 살고 싶었다. 다만 그의 생명은 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