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현은 고개를 들어 믿을 수 없다는 눈길로 보았다. 이내 박은희가 문을 닫았다.혼란스러워 보이는 나도현을 보며 박은희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자꾸 아버지한테 화를 내지 마. 네 아버지도 그냥 말만 그렇게 하시는 분이야. 그동안 네가 변호사 하겠다고 고집을 부려도 말만 그렇게 할 뿐이지 속으로는 은근 자랑스러워했어.”나도현은 박은희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줄곧 자신을 미워한다고 생각하던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기분이 어떤 기분인지 형언할 수 없었다.물론 이런 상황을 누구나 다 바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그렇게 나도현은 저녁도 먹지 않고 바로 본가에서 나와버렸다. 양시은은 당연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민이는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양시은이 옆에서 말 못 하게 막아버렸다.집에 도착하고 침대에 서로 기대앉고 나서야 양시은은 본가에서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기분은 좀 괜찮아?”나도현의 목소리가 한참 지나서야 들려왔다.“괜찮고 안 괜찮고 할 것 없어.”“알겠어.”양시은은 그런 그를 꽉 안아주었다. 이런 기분을 그녀가 제일 잘 알았다. 양채은이 살아 있다고 했을 때 이런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살아 있다는 사실에 기쁘면서도 그간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에 섭섭함을 느끼기도 했다.“그래도 이젠 알게 되어서 다행이네. 부모님이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걸 말이야. 그냥 말로 표현하기 어려우셨던 거야. 하지만 부모님의 자식 사랑은 깊고 영원한 것이니 아버님도 그러리라 생각해.”“응...”나도현도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나용민의 상태는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갑작스러운 고혈압으로 잠깐 정신을 잃은 것일 뿐 며칠 동안 편히 쉬고 있으면 다시 원래의 모습대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었다.양시은이 하민이를 데리고 나용민을 보러 갔을 때 나용민은 하민이와 놀아주기도 했다. 매일 본가엔 할아버지와 손자의 웃음소리만 울려 퍼졌다.나도현과 나용민의 사이도 점차 달라지기도
이날은 나도현이 회사로 출근하지 않은 날이었다. 그는 양시은을 재촉하고 있었다.“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으니까 얼른 가자.”양시은은 하민이를 안은 채 다급하게 나왔다.“다 됐어. 가자.”예쁘게 꾸민 그녀의 모습을 본 나도현은 웃으며 칭찬해주었다.“점점 더 예뻐지네.”양시은은 그의 말에 입꼬리가 귀에 올라갈 정도로 웃었다.“당신은 언제부터 말을 예쁘게 할 줄 알게 된 거야?”나도현이 피식 웃었다.“솔직히 말한 건데 말을 예쁘게 한 거야? 당신은 아직도 본인이 얼마나 예쁜지 모르나 보군.”양시은은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었다.“알았으니까 가자.”나도현은 원래 차에 오르려고 했지만 그녀와 자신의 옷을 훑어보곤 고개를 저었다.“안 되겠어. 내가 입은 옷이 너랑 어울리지 않아. 이래서는 너랑 부부로 안 보이잖아.”“그럼 갈아입으려고?”양시은은 눈썹을 튕겼다.“응. 갈아입어야겠어. 당신이 골라줘.”나도현은 웃으며 말했다.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던지라 두 사람은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고 그녀와 비슷한 톤의 옷으로 갈아입은 후에야 만족한 듯 거울을 보았다.“그래. 이제야 부부 같네.”두 사람은 하민이와 함께 밖으로 나와 차에 올라탔다. 그들은 화기애애한 자신들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박은희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박은희는 교대한 운전 기사에게 물었다.“하민이를 데리고 어디를 간대요?”“교대하던 기사님이 사진관 간다고 말해주더라고요.”“그럼 나도 그 사진관으로 데려다줘요.”박은희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세 사람이 가족사진을 찍을 거라는 것을. 그녀는 조금 기대하는 마음으로 차에 올라탔다.사진관에 도착하고 나니 어느새 오후가 되었고 스튜디오는 아주 컸다. 미리 예약했던지라 VIP 통로로 들어갈 수 있었고 사진작가가 열정적인 모습으로 맞이해 주었다.“어서 오세요. 제가 가족사진 아주 예쁘게 찍어드리겠습니다.”두 사람을 따라 들어가자 여러 가지 배경이 있었다.“자자, 세 분 나란히 앉으시고 일
“하민아, 할머니한테 뽀뽀해줄래?”박은희가 먼저 하민이를 품에 안으며 물었다. 그러나 하민이는 고개를 저었다.“싫어요!”아이의 대답에 박은희의 표정이 잠깐 섭섭한 표정으로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자신을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랬기에 그녀도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그래. 그럼 이렇게 찍자꾸나.”사진작가가 사진을 계속 찍으려던 순간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어 문 쪽으로 다가가 소리를 쳤다.“조용히 좀 하세요!”말을 마치자마자 광기를 보이는 사람이 다가와 카메라를 빼앗더니 그의 머리로 내리쳤다.순간 당황한 사람들이었지만 양시은은 무의식적으로 하민이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어딘가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은 그들이 화목하게 가족사진을 찍는 모습에 괜스레 질투가 나 더 광기 어린 모습을 보이며 소리를 질렀다.“너희들은 뭔데 이렇게 행복하냐고! 왜!”두 사람은 깜짝 놀라게 되었고 양시은은 얼른 하민이를 자신의 뒤로 숨겼다. 광기를 보이는 사람이 달려들자 정신을 차린 나도현이 양시은과 하민이를 밀치며 지켜주었다.조금 전까지 달려들기 전 광기남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이 건장한 남자이자 바로 걸음을 멈추었고 이내 방향을 틀어 양시은 쪽으로 달려들었다.양시은은 놀란 얼굴로 자신을 향해 날카로운 흉기를 들고 달려오는 광기남을 보았다. 나도현이 미처 반응을 보이기 전에 한 행동이라 막아서기에도 늦어버린 후였다.일촉즉발 한 상황에서 박은희가 갑자기 그녀의 앞으로 달려오더니 광기남을 막아주었다.광기남의 흉기가 바닥에 떨어지더니 비릿한 피 냄새가 스튜디오 안에 퍼졌다. 양시은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박은희를 보았다.“어머님!”다행히 찔린 곳은 허리였고 깊지 않았기에 생명엔 큰 지장이 없었다. 광기남은 행복한 그들의 모습에 더 광기를 보이며 계속 흉기를 들고 달려들려고 했지만 나도현이 그런 남자를 막아섰다. 광기남의 손목을 꽉 잡은 뒤 제압하려고 했다.양시은은 박은희를
양시은은 당연히 박은희가 보여주기식으로 잘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와 나도현의 일에 더는 간섭하지 않을 거라고 말한 뒤로 박은희는 완전히 달라졌다.“알아요. 알고 있어요. 그동안 어머님은 늘 하민이를 돌봐주셨잖아요.”말을 하고 나니 양시은의 눈가가 어느새 붉어졌다. 박은희도 감정이 북받쳐 올라왔다.“하민이는 내 손자니까. 내가 그동안 못 해준 게 많으니까 더 늦기 전에 해주고 있는 거야. 그래야 내가 느끼는 부채감도 덜어지는 것 같아서 그래.”양시은을 받아들이기로 한 후로 그녀는 더는 나도현과 양시은의 사이를 훼방하지 않았다. 하지만 과거에 했던 어리석은 짓 때문에 매일 누군가 가슴을 난도질하는 것처럼 아프고 괴로웠다.매일매일 후회하고 있었다. 조금 전 그녀는 거의 망설임도 없이 양시은 앞에 나섰다. 머릿속엔 오로지 양시은이 죽으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기 때문이다. 양시은이 자기 아들과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지나간 일은 전부 지나간 일이잖아요. 이제 더는 과거에 연연하실 필요 없어요. 저희가 지금 당장 병원으로 모셔다드릴 테니까 그만 말씀하세요. 곧 괜찮아질 거예요.”양시은은 어느새 울적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비록 박은희가 그녀와 나도현의 사이를 훼방하긴 했으나 박은희는 나도현의 어머니였다. 그녀도 한 아이의 어머니였던지라 만약 그녀가 박은희였어도 어쩌면 같은 행동을 했으리라 생각했다.그랬기에 온지유와 만난 후로 온지유와도 속 깊은 얘기도 나눌 수 있는 진정한 친구로 될 수 있었다.그들은 빠르게 박은희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광기남을 경찰 조사하고 나니 단순히 세상을 향한 보복 행위였다... 나도현은 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인맥도 많았기에 광기남은 남은 생 감방에서 보내게 되었다.한편 병원으로 온 뒤 지석훈이 직접 상태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빠르게 병원으로 오고 응급처치도 마쳤던 터라 박은희의 목숨엔 지장이 없었다. 다만 회복이 느려 침대에 가만히 누워 쉬어야 했다.나도현은 원래 간병인을 알아봐
예전의 나도현과 양시은은 아주 힘든 시간을 보내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다.심지어 그는 강태경이라는 이름으로 양채은에게 접근해 하마터면 영원히 양시은과 평생 함께할 수 없게 될 뻔했었다.박은희의 목소리가 조금 잠겨버렸다.“설령 우리가 앞만 본다고 해도 과거의 일이 기억에서 지워지는 건 아니잖니. 난 너희들에게 죄인이란다. 너희가 이렇게 날 보살필 필요 없어. 너희들이 바쁘다는 거 내가 제일 잘 알잖아. 그러니까 너희가 할 일을 하러 가.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돼.”박은희는 그들이 자신에게 시간을 낭비하지 않길 바랐지만 양시은은 그런 그녀를 혼자 두고 갈 수 없었다. 그녀가 남아 있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나도현도 남아 있겠다고 고집을 부릴 것이고 더구나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나도현의 어머니이지 아닌가.“저희가 신경을 쓰지 않으면 누가 신경 써주는데요? 그런 의미 없는 말은 하지 마세요. 얼른 치료를 잘 받고 빨리 나으셔야죠. 안 그러면 우리 하민이를 누가 대신 봐줘요?”나도현은 하민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가족이 되었던지라 하민이도 그를 아빠라고 불렀고 그는 지금의 생활이 너무도 만족스러웠다.“그래. 알겠다.”박은희의 눈가가 어느새 촉촉해졌다. 양시은은 휴지를 뽑아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이젠 가족이 되었으니 앞으로 행복하게 잘 살면 되는 거예요.”그녀의 말은 박은희에게 아주 큰 행복으로 다가왔다.한편 양채은은 문해미를 데리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의 문해미의 모습을 보니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더는 중요하지 않았지만 양시은의 집에 남아 있으면 양시은의 걱정만 늘어가리라 생각했다.양시은은 그녀의 번호를 알고 있었다.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도 양채은은 받지 않았지만 양시은은 그녀의 전화라면 바로 받았다. 이번에도 양시은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언니, 내가 엄마를 데리고 가려고. 언니는 행복하게 살아. 우리 사이에 할 얘기는 이미 끝났다고 생각하니까 앞으로도 과거의 일로 자꾸 연락하지 말았으면 좋겠
양채은이 떠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하지만 이미 다 지나간 일이잖아. 평생 과거에 묶여 살아갈 수는 없어. 채은아, 나한테 동생은 너 하나뿐이야.”양시은은 목구멍에 무언가가 꽉 막혀버린 것처럼 괴로웠다.옆에 있던 나도현이 들리는 통화 내용에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며 눈빛을 보냈다. 양시은은 잠시 망설였다.“채은아, 잠깐만 기다려줘. 내가 지금 바로 갈게. 떠나겠다고 해도 나랑 마지막 인사는 하고 가.”말을 마친 양시은은 빠르게 병실에서 나왔다. 병실엔 나도현과 박은희, 그리고 하민이만 남게 되었다. 하민이도 사실 양채은을 보러 가고 싶었다. 양채은이 그간 하민이에게 너무도 잘해주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눈치 없이 나설 수는 없었다.양시은과 나도현이 결혼할 때도 양채은이 찾아오긴 했지만 결혼식장에 끝까지 남아 있지 않았다. 게다가... 양시은과 나도현은 겨우 이어지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양시은이 어떻게든 이 모든 것을 잘 해결하리라 생각했다.양채은이 문해미를 데리고 가겠다고 했으니 분명 문해미와 함께 있을 것이었다. 급하게 달려온 양시은은 양채은을 보게 되었다. 양채은은 미소를 지었다. 비록 예전과 모습이 달라지긴 했지만 양채은이 웃는 순간 예전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된 것 같았다.“언니를 부를 생각은 없었는데 그래도 왔네. 힘들지 않아? 출근도 하고 하민이도 돌봐야 하잖아.”“지난번에 이미 말했잖아. 괜찮다고. 그런 내가 그런 거 신경 쓸 것 같아?”양채은은 시원하게 웃었지만 양시은은 그럼에도 가슴이 아팠다.“네가 한 말은 잘 알겠어. 나도 괜찮아. 하지만 넌 내 하나뿐인 동생이잖아. 동생이 떠나겠다고 하는데 언니로서 어떻게 달려오지 않을 수 있어? 나는 네가 떠나지 말았으면 좋겠어. 넌 지금...”양채은의 모습은 크게 달라졌다. 만약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녀가 양채은인 것을 모를 것이다. 게다가 일도 해야 했다. 하민이도 건강해졌으니 양시은의 곁에 남아 있다면 일한 돈을 모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민이
양채은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난 이미 내려놨어. 언니는 이젠 부잣집 며느리잖아. 설마 기자들에게 과거의 일로 고통받고 싶은 건 아니지?”문해미와 그녀는 분명 양시은에게 도움이 되어주지 못할 것이었다. 양시은은 양채은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태어날 때부터 그들과 가족이었던지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한 번도 문해미를 원망한 적도 없었기에 당연히 양채은도 원망하지 않았다.“채은아...”양시은이 여전히 그녀를 잡으려던 때 양채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됐어. 이런 말은 그만하자. 언니, 행복하게 사는 게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한 거야. 게다가 난 언젠가는 떠나야 할 운명이었다고. 1년이든 2년이든 시간을 미룰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니가 영원히 날 신경 쓰면서 살 수는 없잖아. 난 그냥 자유롭고 싶은 거야. 엄마랑 함께 말이야. 언니, 난 이미 결정했고 바꿀 생각 없으니까 이제 더는 그런 의미 없는 말은 하지 말아줘.”“알았어...”확고한 양채은의 모습에 양시은은 결국 타협하고 말았다. 그녀는 직접 양채은과 문해미를 배웅해 주었다.“그럼 어디로 가는지 꼭 알려줘야 해. 나중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되어도 연락해야 해. 알았지?”양채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양채은은 오늘 이 만남이 마지막 만남이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다른 도시에 가서 자리를 잡고 산다고 해도 절대 양시은에게 알려주지 않을 것이고 연락도 하지 않을 것이다.양시은이 고생하면서 산 것에 비해 그녀는 나쁜 짓이 많이 저질렀기에 양시은이 행복하려면 자신이 사라져줘야 한다고 생각했다....양시은은 세 시간이 지나서야 병원으로 돌아왔다. 아무리 감정을 갈무리하고 들어갔다고 해도 나도현은 바로 그녀의 기분을 눈치챘고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감싸며 나직하게 물었다.“양채은이 떠난 거야?”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아무리 설득해도 양채은은 확고하게 거절했다. 나도현은 그런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달래주었다.“아직 마음을 정리하기까지 시간이
나도현이 그런 양시은에게 물었다.“정말로 혼자 다 할 수 있겠어? 어머니는 지금 거동이 불편하신 상태야. 간병인을 알아봐 주지 않으면 몸 뒤척거리는 것도 힘드시다고.”그러자 양시은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내가 전에 어떤 일을 했는지 잊었어?”하민이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그녀는 어떤 일이든 다 해보았다. 그랬기에 누군가를 간호하는 것은 그녀에게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었다.양시은의 말에 나도현은 가슴이 아팠다. 혼자의 힘으로 어떻게든 아이의 병을 치료해보려고 했기 때문이다.“고생했어. 예전에는 미안했어...”조금 슬픔에 젖어버린 나도현의 목소리에 양시은은 그저 웃어넘길 뿐이다.“괜찮아. 나한테 사과하자고 모인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아까도 말했다시피 이미 다 지나간 일이잖아. 그러니까 과거의 일은 더 이상 언급하지 말자.”말을 마치자마자 양시은의 핸드폰이 울렸고 온지유의 연락이었다.“하민이와 함께 우리 집으로 놀러와요. 별이가 며칠 동안 계속 하민이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온지유는 정말로 양시은을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다. 나도현도 온지유에게 연락해 양시은을 잘 부탁한다고 말했었기에 그녀는 행사만 있으면 양시은을 불러 적응하게 할 생각이었다.양시은은 침대에 누워있는 박은희를 보며 거절했다.“미안해요. 요즘엔 바빠서 안 될 것 같네요. 바쁜 일 끝내면 찾아갈게요.”“그래요. 그럼 언제 한가해지면 연락해줘요.”“네, 알겠어요.”온지유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옆에서 책을 읽던 여이현이 고개를 들어 그런 그녀를 보았다.“왜? 안 된대? 다른 사람이라도 알아볼까?”온지유는 고개를 저었다.백지희는 경성에 없었고 지선율과 장다희는 촬영일로 바빴다. 홍혜주와 용경호는 부대에 있었기에 비교적 한가한 그녀와 달리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거기에다 나도현이 그녀에게 양시은을 잘 부탁한다는 연락을 받았던지라 양시은에게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양시은도 바쁘다고 했다.“왜 그렇게 힘이 없어. 아니면 나랑 같이 여행이라도 갈까?”여이현은 온지유를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