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현은 요즘 너무 피곤한 상태였기에 양시은은 더 이상 그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런데도 나도현은 여기까지 찾아왔다.“왔구나. 안 올 줄 알았는데...”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손목이 부러질 뻔한 양시은은 왠지 모르게 서운한 마음을 느꼈다.사람은 누구나 그런 듯했다. 어떤 상황에서는 강하게 버티면서도, 누군가에게서 걱정과 관심을 받으면 그 마음을 견디기 힘들었으니 말이다.나도현은 눈시울이 붉어진 양시은을 품에 안으며 어깨를 미세하게 떨렸다.“미안, 늦었어.”양시은은 나도현을 밀어내지 않고 그에게 조용히 기대었다.소란을 일으킨 사람들은 순조롭게 연행되었다.양시은은 나도현의 차에 타려던 찰나, 어떤 수상한 여인이 카메라를 들고 몰래 다가오는 걸 포착했다.“저 여자 파파라치야!”양시은이 소리쳤다.나도현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그의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에 파파라치는 깜짝 놀라며 도망치기 시작했다.하지만 결국 도망치지 못하고 붙잡혔다.나도현은 파파라치의 카메라 안에 있는 사진을 확인한 후, 안색이 어두워졌다.양시은도 처음엔 그 이유를 몰랐으나 카메라를 건네받고서야 깨달았다.카메라의 메모리 카드엔 두 사람의 사진이 가득했는데 심지어 지난번에 하민이를 데리고 문구점을 갔을 때 찍힌 사진도 있었다.양시은은 화가 나서 손이 떨렸다. 파파라치 여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녀는 이 사람이 바로 하민이가 부딪혔던 그 여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지난번 우리가 부딪혔던 그 사람 아니세요?”“아니에요...”양시은은 처음에 확신이 없었다. 겨우 한 번 마주친 사람을 쉽게 기억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파파라치가 급하게 부인하는 태도를 취하자 그녀는 더욱 확신했다.“역시 맞았네... 그러니까 왜 부딪혀 놓고 아무 말도 안 하나 했지.”알고 보니 그때부터 몰래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고 있었던 것이다.양시은은 최근 온라인에서 떠들썩하게 퍼진 사진들을 떠올리며, 그 여자가 한 짓이라는 의혹을 품었다.“혹시 인터
양시은은 일찍 퇴근해 하민이를 데리러 유치원으로 가야 했다.이를 알게 된 나도현은 자기도 따라가겠다고 말했다.“내가 차로 데려다줄게. 하민이 첫 등교 날이 어땠을지 나도 궁금해서 그래.”양시은은 망설이지 않고 알겠다고 했다.나도현은 하민의 아빠이기도 했으니 그가 하민을 걱정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유치원에 도착했다. 그들은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차를 세웠지만 차가 워낙 고급 차다 보니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건 어쩔 수 없었다.대부분의 아이들은 그 차를 보고 이렇게 생각했다.‘와, 진짜 멋지다...’하민이가 새로 사귄 친구는 차에 관심이 많은 아이였다. 그 친구는 한눈에 그 차를 알아보며 말했다.“나도 저 차 본 적 있는데 진짜 비싼 차야. 우리 아빠도 저런 차는 없어.”하민은 잠깐 차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저거 우리 아저씨 차야.”하민이가 이렇게 말했지만 친구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하민이를 부인했다.하민은 아무리 설명해도 친구가 믿지 않자 살짝 화가 나기 시작했다.“말했잖아. 저 차는 우리 아저씨 차라고. 난 거짓말 같은 거 안 해.”그러자 친구는 팔짱을 끼고 말했다.“그럼 차 안에 앉아 있는 사람한테 내려오라고 해 봐. 할 수 있어?”“당연하지...”“하민아, 무슨 얘기 하는 거야?”그때, 양시은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하민은 우울한 표정으로 양시은에게 달려가 그녀의 품에 안기며 방금 일어난 일을 하소연했다.그녀는 이 이야기를 듣고 잠시 당황했다.그 차는 사실 나도현의 차가 맞았지만 어린이 앞에서 그 정도로 차에 대해서 진지하게 설명하려니 어색할 것 같았다.하지만 그 어린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아이는 진지하게 고개를 들어 양시은을 바라보며 물었다.“하민이 어머님 맞으세요? 왜 하민이한테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고 가르쳐 주지 않았나요? 저희 엄마는 항상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고 가르쳐 주거든요.”“하민이는 거짓말을 하
하민이가 얼굴이 빨개져서 다시 머리를 숙이자 양시은은 그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를 놀렸다.“하민이한테 상을 줘야겠네. 오늘은 집에서 저녁 만들어 먹자. 내가 요리할게.”양시은이 이렇게 말하자 하민이가 바로 물었다.“아저씨도 와요?”나도현은 양시은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그건 너희 엄마한테 물어봐야 해.”하민과 나도현, 두 사람은 동시에 양시은을 쳐다보았다. 역시 피는 못 속이는지 가까이에서 본 두 사람은 아주 닮아 있었다.이런 눈빛을 마주한 이상 그들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양시은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같이 먹자. 가면서 시장에서 재료도 사고...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재밌잖아.”채소 시장은 그들이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채소 시장에 도착하자 양시은은 하민이를 차에서 내려주었다. 채소를 파는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은 하민이를 보면 웃음을 참지 못했고 사는 것마다 조금씩 서비스를 더 줬다.양시은은 이 시장에 자주 왔기에 길을 걷다 보면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 몇몇 사람은 양시은 뒤에 따라오는 남자가 누군지 매우 궁금해하며 물었다.“시은 씨, 뒤에 있는 사람은 남편이에요?”양시은은 잠깐 멈칫했지만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나도현이 대답했다.“맞아요. 시은이 남편이에요.”양시은이 짜증을 내며 그를 쳐다보자 나도현은 잠시 멈칫했다가 말을 바꿨다.“미래의 남편이죠.”시장 아주머니들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과거의 경험이 떠오른 듯 말했다.“그래요? 시은 씨도 이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찾았나 보네요.”아주머니는 이렇게 말하며 양시은에게 셀러리를 건네주었다. 양시은은 받지 않겠다며 거절했지만 아주머니의 고집에 못 이겨 결국 받게 되었다.장 본 후 집에 돌아오자 이미 저녁 시간이었다. 해가 점점 지고 있을 때, 그들 세 사람은 서로 손을 꼭 잡고 집에 도착했다.양시은은 손에 짐을 들고 있었기에 문을 열기가 어려웠다. 그러자 나도현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에서
나도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양시은은 발걸음을 늦추고는 그의 휴대폰을 슬쩍 훔쳐보며 물었다.“무슨 일이야? 오성 지역 쪽에서 또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그런 거 아니야.”나도현은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일부러 그녀가 보지 못하게 했고 그 후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옆에는 하민이도 있었기에 양시은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궁금해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하민이가 혼자서 놀고 있을 때, 양시은은 나도현의 표정에서 이상한 점을 찾으려고 했다.“방금 식사할 때부터 안색이 안 좋았어. 만약 일과 관련된 문제가 생긴 거라면 나도 도울 수 있는 건 도와줄게.”누가 뭐라 하든 그녀는 지금 나도현의 비서였다.양시은은 마음속에서 피어오른 불편한 감정을 억누르려 했지만 나도현은 마음을 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미간을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너무 오래 있었네. 이만 가야겠어.”양시은이 그를 배웅해 주려 했지만 나도현은 사양했다.그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양시은은 전혀 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걱정만 점점 더 많아질 뿐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나도현이 숨기고 있던 게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처음에는 나도현이 나진 그룹 일을 돕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누군가 갑자기 정보를 유출한 것이었다. 얼마 전에 끝난 줄 알았던 논란이 다시 뜨거워진 것이었다.하지만 이번에는 삼각관계가 아니라 나도현의 신상에 관한 것이었다.양시은은 실시간 검색어를 보고 급하게 회사로 달려갔고 마침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나 대표님 어떡하지...”“앞으로 계속 회사에 계실 건가? 변호사를 그만하고?”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습을 보고 양시은의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그녀는 나도현이라는 사람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그가 변호사를 하기로 결심한 것도 오랫동안 계획해 온 일이었고 직업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변호사라는 꿈이 아니었더라면 나도현은 그저 가문의 재산을 상속받고 나진 그룹을 물려받을 것이니 말이다
“오늘 나 집에 한 번 다녀올게.”“오해일 거야. 꼭 아버님께서 그런 게 아닐 수도 있어.”나도현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의 표정은 아주 평온했는데 그래서 오히려 더 무서웠다.양시은은 영문 모르는 불길한 예감에 조금 불안했지만 어떻게 그를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이런 문제는 아무리 곁에서 뭐라 말해줘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었다.어쩔 줄 몰라 하는 양시은의 모습을 보고 나도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니까 하민이한테 전해줘. 당분간 아저씨를 만날 수 없을 거라고 말이야.”“나도 같이 갈게.”양시은 본인도 이렇게 말하면서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녀는 곧 눈빛을 굳히고 말했다.“하민이는 가정부한테 맡기면 돼. 아무튼 나도 같이 갈 거야.”양시은은 다시 한번 말했다.“이번 일은 전과 달라. 그러니까 나도 같이 가야 해.”양시은의 단호한 눈빛을 보고 나도현은 한숨을 쉬며 알겠다고 했다.그들은 오후에 하민이를 집으로 데리고 가서 가정부에게 맡겼다. 양시은은 하민에게 몇 마디를 당부하고는 늦게 돌아올 거라고 미리 얘기를 해 놓았다. 하민이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크게 불평하지도 않았다.나씨 가문으로 가는 길에 나도현은 미리 박은희에게 전화를 걸었다.박은희는 전화에서 물었다.“두 사람 다 오는 거면 하민이는?”하민이가 함께 오지 않는 걸 알게 되자 그녀는 크게 실망했다.하지만 양시은과 나도현은 그들만의 이유가 있어서 돌아가는 것이었기에 하민이를 데리고 가면 불편한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박은희는 전혀 모르는 듯했지만 말이다.박은희의 목소리를 듣고 양시은은 그녀가 이번 일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사모님 말투를 보니까 사모님은 이번 일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 같아.”전화를 끊은 나도현은 차 뒤에 기대앉으면서 말했다.“어머니는 아마도 모를 거야.”그의 표정을 본 양시은은 나도현이 이미 결심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도 더 이상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나도현은 아주 오랫동안 집
나도현은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고개를 들어 바라보며 말했다.“아버지가 한 거 아니세요? 아니면 해놓고 인정할 용기가 없으신 건가요?”나용민이 화가 나서 기침을 하며 분노했다.나도현은 표정이 어두워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척 괴로워했다.진실을 알았을 때, 그 또한 믿을 수 없었다.비록 아버지와의 관계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지만, 나도현은 아무래도 가족인데 이런 배신을 당할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번 일로 그는 가혹한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너!”나용민은 분노에 차서 계속 기침을 했다.박은희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고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나용민을 위로하며 나도현에게 더 이상 말하지 말라고 했다.“그만 해. 너희 아버지 고혈압이 있으시잖아. 화를 내면 안 돼.”양시은은 나도현이 주먹을 움켜잡는 걸 보며 손을 뻗었다.그녀는 무언의 위로를 전했고, 나도현은 조금 나아진 듯했다.나용민은 잠시 진정한 뒤에야 안색이 조금 나아졌지만 두 사람 모두 계속해서 서로를 차가운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나용민은 몇 번 깊게 숨을 쉬며 나도현을 바라보았다.“너는 돌아왔다는 게 나랑 말대꾸하러 온 거냐?”“말대꾸하러 온 것보다는, 왜 그런 짓을 하셨는지 알고 싶어서요. 친 아들에게 이렇게 무자비한 짓을 할 이유가 뭔지 말해보세요. 집안의 재산을 꼭 제가 상속해야 한다는 건가요?”나도현은 같은 어조로 반문했다.“너는 내 아들이야. 네가 아니면 내 재산을 누가 상속하겠냐?”“그럼 제가 아닌 다른 사촌들이 상속할 수 있죠.”나용민은 냉소를 지으며 웃었다.회사에서 수십 년을 강하게 버텨온 그가 어떻게 자신의 모든 삶을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있겠는가?“어쨌든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네가 이제 얌전히 회사에 있는 수밖에 없어.”나용민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넥타이를 매며 마지막으로 선언했다.박은희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여보, 그게 무슨 말이야...”“지금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는 저에 대한 소문은 아버지가 퍼뜨린 거라는 말이에요.
양시은은 깜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그의 눈빛에는 여태 한 번도 본 적 없는 진지함이 담겨 있었다.누구든 알 수 있었다. 나도현의 이 말들은 절대 가식이 아니며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라는 것을 말이다.박은희는 이 장면을 보고 복잡한 감정이 교차하는 동시에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다.몇 년 전만 해도 그녀는 나도현이 자기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을 집으로 데려오게 될 거라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이 자기도 인정하는 며느리가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세 사람 중 둘은 양시은을 인정했지만 나용민은 여전히 불만족스러워했다.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양시은을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는 나도현에게 말했다.“이게 네가 다른 여자들을 거절한 이유냐? 이 여자가 뭐가 좋다고? 가문도 너랑 맞지 않고 직업도 그저 그렇잖아.”나도현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회사에서 저를 감시하세요?”그럴 수밖에 없다. 이미 은퇴한 나용민이 어떻게 이렇게 상세히 알 수 있을까?들통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나용민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감시라고? 그냥 네가 회사를 잘 운영하는지 걱정한 것뿐이야.”나도현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나용민을 노려보며 말했다.나용민은 위압적인 모습의 아들을 보면서도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이제 이 아비도 네 일에 참견하지 말라는 거냐?”“저는 참견 같은 거 필요 없어요. 감당할 수 없어요.”나도현은 차갑게 말했다. 그리고 양시은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나용민은 극대노하며 소리쳤다.“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마!”그러나 나도현은 뒤돌아보지 않고 운전했다. 그리고는 차를 도로 한 쪽에 멈추었다. 나도현은 창밖을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양시은은 그를 위로하며 말했다.“너무 속상해하지 마.”“시은아, 안고 싶은데...”나도현이 갑자기 낮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도 마음을 아프게 했다.양시은은 잠시 망설였다.그가
양시은은 밤마다 자주 잠에서 깨는 습관이 있었다.오늘도 어김없이 잠에서 깨어 거실로 나온 그녀는 거실에 있는 희미한 사람의 형체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한참을 바라보고 나서야 그 정체가 나도현이라는 것을 알아봤다.“도현아, 왜 잠도 안 자고 여기 앉아 있는 거야?”나도현은 낮게 한숨을 쉬었는데 목소리가 너무 낮아서 양시은은 처음에 자기가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했다.양시은은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나도현의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의 이마에 맺힌 땀과 창백해진 그의 얼굴을 보고 그녀는 깜짝 놀랐다.“몸이 안 좋아?”“약 좀... 가져다줄 수 있어? 위가 좀 아픈 것 같아.”나도현의 목소리는 평소와 비슷했지만 그 속에 전에는 없던 허약함이 약간 섞여 있었다.양시은은 그제야 나도현은 위가 안 좋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위염에 자주 걸렸었는데 이는 모두 그가 너무 일에만 집중해서 생긴 문제였다.나도현이 걱정됐던 양시은은 당황하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자기 방에 위약이 있다는 생각이 났다.“내 방에 있는 것 같아. 기다려봐. 내가 가져올게.”그녀는 급히 방으로 들어가 뜨거운 물과 위약을 챙겨 가져다주었다.따뜻한 물 한 잔을 마시고 나니 나도현의 찡그렸던 눈썹도 조금 풀리는 듯했다.양시은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좀 나아졌어?”나도현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양시은은 한숨을 쉬며 다시 따뜻한 물을 준비해 그 옆에 두고 핑크색 온수 팩까지 꺼내왔다.“이걸 배 쪽에 올리면 좀 나아질 거 같아. 해봐.”“이걸 올리라고?”나도현은 핑크색 온수 팩을 쳐다보면서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지금은 색깔 따위 신경 쓸 때가 아니야. 빨리 꼭 안고 있어.”그는 그녀의 말에 이끌려 온수 팩을 배 위에 올렸다.그날 밤, 나도현이 갑자기 아픈 것 때문에 양시은은 그의 건강을 챙기느라 잠을 이룰 수 없었다.양시은은 오랫동안 그를 간호해 주다가 피곤해져서 소파에 기댄 채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자 잠에서 깬 그녀는 급히 나도현의 상태를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