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을 들은 양시은이 하민의 말을 극구 부인했다.“하민아, 엄마 화 안 났어. 왜 그렇게 생각해?”양시은은 하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를 안심시켰다.“엄마가 예전처럼 행복해 보이지 않아서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괜찮아. 어른들한테는 항상 많은 걱정거리가 있는 거거든.”천진난만한 하민이를 바라보며 양시은은 자신의 고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저런 방식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어떻게 보면 걱정거리가 맞긴 하니까...’하민은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 이해한 듯 양시은의 손을 잡고 그녀를 위로했다.“하민이는 엄마가 슬프지 않았으면 좋겠거든요. 그러니까 제 기쁨 중 절반을 나눠줄게요.”그 말에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고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그 후, 양시은은 하민이와 함께 놀아주었다. 그러다가 밖에서 놀고 싶었는지 하민이는 갑자기 밖으로 나가버렸다. 하민이가 도대체 뭘 하러 간 건지는 그녀조차 몰랐다.양시은은 하민이가 멀리 가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사실 하민이는 그저 침실 밖으로 나간 것이었다.“아저씨, 말한 대로 했는데도 안 알려주는데요? 어떻게 할까요?”하민은 나도현의 목을 끌어안고 말했다.나도현은 하민의 코를 톡톡 건드리며 칭찬했다.“그래도 잘했어. 하민이가 엄마를 웃게 했잖아. 그게 제일 멋진 거야.”그 말을 들은 하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어린아이와 어른의 기쁨은 결국 무게가 다른 것이었다.하민이가 준 위로는 일시적이었다. 양시은은 그런 단순한 위로로 바로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고 나도현도 그녀가 걱정돼서 점점 우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양시은은 익명의 문자 한 통을 받았다. 문자 내용은 딱 한 줄 뿐이었다.“나 채은이야. 누군가가 두 사람한테 해를 끼치려고 하니까 꼭 조심해야 돼.”그 문자를 본 양시은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고 의자는 뒤로 넘어져 버리면서 큰 소리를 냈다.그 소리를 듣고 도우미가 달려왔다.“아가씨, 무슨 일 있으세요?”그녀는 계속해서
호텔 바닥은 아수라장이었다.잠에서 깬 지유는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지유는 미간을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커다란 몸집을 가진 남자가 옆에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지나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은 조각과도 같았고 눈매도 깊고 진했다.아직 깊은 잠이 들어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지유가 몸을 일으키자 이불이 그녀의 몸에서 미끄러져 내렸고 뽀얗고 매혹적인 두 어깨에 어젯밤 남긴 흔적이 보였다.지유가 앉았던 자리에 선명한 핏자국이 보였다.시간을 보니 어느새 출근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유는 바닥에 널브러진 출근룩을 다시 집어 들어 얼른 갈아입었다.스타킹은 이미 남자에 의해 찢겨 있었다.지유는 스타킹을 돌돌 말아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하이힐을 신었다.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깔끔하게 차려입은 지유는 어느새 워커홀릭 비서로 완전히 돌아왔고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들어온 사람은 청순한 미녀였다.지유가 부른 사람이었다.이현의 취향이 이런 여자였다.지유가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침대에 누워서 대표님 깨나길 기다리면 돼요. 다른 건 한마디도 하지 마요.”지유는 고개를 돌려 아직 단잠에 빠진 남자를 힐끔 쳐다봤다. 억울한 마음에 코끝이 찡해졌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방에서 나왔다.지유는 두 사람이 어젯밤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이현이 아는 게 싫었다.그들 사이에 계약에 의하면 아무도 모르게 3년간 결혼을 유지하면 바로 이혼할 수 있었다.이 기간에 선을 넘는 행동은 그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지유는 7년째 이현의 비서로, 3년째 이현의 와이프로 있었다.졸업한 그날부터 이현의 곁을 한시도 떠난 적이 없었다.같은 날, 이현은 지유에게 두 사람은 그저 상사와 부하의 관계일 뿐 이 관계를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지유는 복도 창가에 서서 어제 일을 떠올렸다. 이현은 그녀를 안고 침대에 누워 ‘승아’라는 이름을 연신 불러댔다.지유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승아는 이현의 첫사랑이었다.이현은 지유를 승
이에 지유가 화들짝 놀라며 하마터면 발을 삐끗할 뻔했다.중심을 잘 잡지 못한 지유는 그렇게 이현의 몸에 기댔다.이현은 지유의 몸이 앞으로 쏠리자 손으로 지유의 허리를 잡아줬다.뜨거운 체온이 전해지자 지유는 어젯밤 그가 저돌적으로 그녀를 덮치던 화면이 떠올랐다.지유는 가까스로 진정하고 고개를 들어 이현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 봤다.이현의 눈동자는 매우 진지했고 그 속엔 질문과 의혹도 담겨 있었다. 눈빛은 지유를 뚫어버릴 것만 같았다.지유는 심장이 벌렁거렸다.이현과 더는 눈을 마주칠 엄두가 나지 않아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아까 나간 그 여자라고 생각했을 때도 이현은 불같이 화를 냈는데 여기서 만약 지유가 자신이었음을 인정한다면 후과가 그리 좋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아니라고 하기엔 억울했다.만약 어젯밤 잠자리를 가진 사람이 지유라는 걸 이현이 알게 된다면 결혼 생활을 조금이라도 더 이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그래도 지유는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게 겁나 고개를 숙인 채로 물어봤다.“그건 왜 묻는 거예요?”지유는 사실 남몰래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이현이 코웃음을 치더니 이렇게 말했다.“너는 그런 용기가 없을 것 같아서.”지유는 멈칫하더니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어쩌면 이현은 어젯밤 잠자리를 가진 사람이 지유가 아니길 더 바랄지도 모른다. 계약 결혼일뿐이니 말이다.게다가 며칠만 더 지나면 계약도 끝나간다순간 이현이 지유의 손을 힘껏 낚아챘다.지유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이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심사하듯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지유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발버둥 치며 손을 빼려 했지만 이현이 지유를 전신 거울 앞으로 바짝 몰아갔다.“뭐 하는 거예요?”지유는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긴장과 두려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너 정말 사무실에서 잠들었어?”지유는 칠흑같이 어두운 이현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혹시나 들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3년 전, 결혼한 첫날 밤, 지유는
고개를 들어보니 승아가 앞치마를 두르고 손에 국자를 들고 있었다.지유를 본 승아는 표정이 살짝 굳었다가 다시 부드럽게 인사했다.“아주머니 손님이에요? 마침 삼계탕을 조금 더 끓였는데 같이 와서 먹어볼래요?”승아의 느긋한 태도는 마치 그녀가 이곳의 안주인인 것 같았다.오히려 지유가 멀리서 찾아온 손님처럼 보였다.하긴 얼마 지나지 않아 지유는 곧 이 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된다.지유는 이런 거지 같은 상황에 미간이 찌푸려졌다.이현과 결혼할 때 모든 사람에게 알렸고 승아도 축복을 보내왔기에 지유가 이현의 와이프라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승아는 지유가 문 앞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자 얼른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왔으면 손님이죠. 얼른 들어와요.”승아가 가까이 다가오자 옅은 재스민 향이 풍겨왔다. 이현은 작년 생일에 지유에게 똑같은 향수를 선물했다.지유는 목구멍이 점점 메어와 숨쉬기가 힘들었고 다리가 천근만근인 듯 움직이기 힘들었다.여진숙은 지유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자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지유야, 여기 서서 뭐 하는 거야? 손님이 왔으면 차라도 내와야지.”지유는 승아와 겨뤄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물었다.“어머님, 승아 씨가 왜 우리 집에 있는 거예요?”여진숙이 답했다.“승아도 오랜만에 귀국했으니 한 번쯤은 나 보러 와야 할 거 아니니? 왜? 승아가 우리 집에 오면 안 돼? 현이도 뭐라 안 하는데 네가 뭐라고 시비야?”“그런 뜻 아니에요.”지유가 고개를 푹 숙였다.“아, 지유 언니였구나. 이현 오빠가 결혼사진을 보여준 적이 없어서 못 알아봤네요. 기분 상했다면 죄송해요.”지유는 환하게 웃는 승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허.’하긴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여자에게 다른 여자와 결혼한 사진을 보여줄 리가 없지.이때 여진숙이 호통치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얼른 승아한테 차를 내주지 않고 뭐 해?”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놓은 주전자를 들었다.승아는 여진숙과 웃고 떠들며
“지유 언니 오늘 기분이 별로 안 좋다면서 오기 싫다고 해서 내가 올 수밖에 없었어요.”승아는 얼른 손에 난 덴 자국을 일부러 보여주며 말했다.“오빠도 지유 언니 너무 미워하지 마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예요. 일을 그르친 건 아니죠?”지유가 회사의 서류를 다른 사람에게 넘긴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이현은 안색이 너무 어두웠지만 승아 앞이라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넥타이를 살짝 풀며 덤덤하게 말했다.“아니야.”이현은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왔으니 앉아.”이현의 말에 승아는 내심 기뻤다. 그녀를 받아준다는 건 그래도 미워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회의하러 간다면서요? 내가 방해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이현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이렇게 말했다.“회의 시간 뒤로 30분 미루세요.”승아는 입꼬리가 올라갔다. 전에 인사도 없이 떠나서 혹시나 이현이 원망하면 어쩌지 했는데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심각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잃어버린 시간은 다시 메꾸면 된다.소파에 앉은 승아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해명하려 했다.“오빠,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요. 그때 내가 인사도 없이 떠난 거 잘못한 거 알아요. 근데 지금은 다시 돌아왔으니까...”“먼저 일 처리 좀 할게.”이현이 승아의 말을 잘라버렸다.승아는 하려던 말을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바빠 보이는 이현의 모습에 승아는 별수 없이 이렇게 말했다.“오빠 일 끝나는 거 기다릴게.”승아는 방해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남은 반 시간 중 얼마나 더 앉아 있어야 마주 보고 앉아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약간 이현의 속내를 맞히기 어려웠다.진호가 안으로 들어와서야 이현은 하던 일을 멈췄다.이현이 걸어오자 승아가 웃으며 말했다.“오빠, 나...”“손은 아직도 아파?”그녀의 상처를 발견했다는 건 그녀를 걱정한다는 걸까?승아가 잽싸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이제 안 아파요.”“응.”이현이 가볍게 대답하더니 진호의 손에서 한약을 받아왔다.“귀국해서 계속 속이 안 좋다며, 목
지유는 걸음을 멈췄다. 이현과는 부부 관계에서 오는 조화로움보다는 위계질서에서 오는 거리감이 더 컸다.“대표님, 지시 사항 있으신가요?”이현이 고개를 돌리더니 거리감이 느껴지는 지유의 얼굴을 보며 명령조로 말했다.“앉아.”지유는 이현이 무엇을 하려는지 몰랐다.이현이 지유 쪽으로 걸어갔다.지유는 자신과 가까워지는 이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순간 이현이 어딘가 달라 보였고 이에 지유는 숨이 가빠졌다.긴장하기도 하면서 어딘가 이상했다.그녀가 딱히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이현이 먼저 그녀의 손을 잡았다.이현의 따듯한 손이 지유의 몸에 닿자 그녀는 마치 데이기라도 한 것처럼 얼른 손을 빼려 했다. 하지만 이현이 너무 꽉 잡고 있어 빼려고 해도 뺄 수가 없었다. 이현은 지유를 확 끌어당기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손 다쳤잖아, 몰랐어?”이현의 관심이 지유는 퍽 의외였다.“난... 괜찮아요.”“수포까지 났어.”이현이 물었다.“왜 나한테 얘기하지 않은 거야?”이현이 큰 손으로 그녀의 상처를 살폈다. 지유는 그런 이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3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유는 이현의 손을 잡고 그가 따듯함으로 그녀를 이끌어주기를 바랐다.하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다.지유가 포기하려 할 때마다 이현은 다시 희망을 주었다.“큰일 아니에요. 며칠이면 나아요.”지유가 대답했다.“연고 좀 가져오라고 할게.”지유는 눈시울이 붉어지는 걸 느꼈다. 몇 년의 기다림 끝에 이제 좀 보상받는 것 같았다.하지만 지유는 이성적이었다. 이현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이현은 연고를 가져와 그녀의 상처에 발라줬다. 지유는 그녀의 앞에 쪼그리고 앉은 어딘가 조심스러워 보이는 이현에 혹시 자신도 그가 아끼고 사랑하는 여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상처가 나니 그래도 눈길을 주는 이현이었다.7년이나 옆을 지키면서 극진하게 챙겨주기보다 차라리 조그마한 상처를 내는 게 그의 이목을 끄는 데에는 더 낫겠다는 우스운 생각까지 들었다.다친 게 아깝지 않았다.하염없이
지유는 눈앞이 까매지며 어지러웠다. 그때 누군가 다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이런 실수를 하면 어떡해요? 온 비서님, 온 비서님...”그 목소리가 점점 가물가물해졌고 지유는 그대로 쓰러졌다.다시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다. 하얀 천정을 보고 있노라니 아직도 머리가 어지러웠고 깨질 듯이 아팠다.“온 비서님, 깨셨어요?”윤정이 눈시울을 붉히며 의자에서 일어나 다급하게 그녀의 상황을 확인했다.“어디 불편한 데 없어요? 의사 부를까요?”지유는 아직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윤정을 보며 몸을 일으켰다.“저는 괜찮아요. 공사장은 어떻게 됐어요? 다른 부상자는 없어요?”윤정이 말했다.“일단 공사장 일은 상관하지 마세요. 떨어진 유리에 뇌진탕이 왔대요. 어찌나 놀랐는지. 저는 온 비서님 못 깨어나는 줄 알았어요.”윤정은 다시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윤정은 지유를 따라다니며 일을 돕는 비서와도 같은 존재였기에 평소에 지유는 윤정을 많이 아꼈다.아직 젊은 윤정은 이런 상황을 맞닥트려본 적이 없어 많이 놀란 것 같았다.“저 이제 깼잖아요. 걱정하지 마요.”지유가 그런 윤정을 다독였다.머리를 만져보니 머리엔 붕대가 감겨 있었고 아직 통증이 느껴졌다. 지유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렇게 물었다.“공사장은 괜찮아요?”갑자기 일어난 사고로 시공에 영향줄까 봐 무서운 지유였다.“괜찮아요. 온 비서님, 이렇게 심하게 다쳤는데 그깟 공사장이 무슨 대수에요? 평소에도 힘들게 일하시면서 저까지 신경 써 주시는데 이참에 얼른 누워서 쉬세요.”윤정은 너무 죄책감이 들었다. 자신이 재촉하지만 않았더라면 지유가 이런 사고를 당할 일도 없다고 생각했기에 업무와 관련된 일은 아무것도 보고하고 싶지 않았다.지유는 이미 습관된 것 같았다.몇 년간 업무를 수행하는 기계처럼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이현의 기분을 생각해 업무 전반을 다 챙겼다.그러니 자기도 모르게 업무부터 걱정했다.게다가 여씨 집안에 빚진 20억도 있으니 마음 편히 있을 수가 없었
지유는 병실에 조금 더 누워 있다가 슬픔을 안은 채 병원을 나섰다.“지유야!”지희는 창백한 지유의 얼굴과 머리에 난 상처를 보며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헐,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 시간이면 출근 중이었을 텐데 이거 산재 아니야?”지희가 물었다.“여이현은?”“몰라.”지희는 어딘가 이상한 지유의 표정에 그녀가 머리만 다친 게 아니라는 걸 눈치채고 코웃음을 쳤다.“그 사람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일하면서 다치기까지 했는데 남편이라는 사람이 코빼기도 안 보이는 게 말이 돼? 죽은 거나 다름없는 남편이네.”“곧 남편도 아니야.”“뭐? 이혼하재?”지희의 표정이 삭 변했다.“내가 이혼하고 싶은 거야.”이에 지희의 태도가 또 한 번 변했다.“그래, 지금 당장 해!”지희가 경고했다.“재산 절반 나눠 가지는 거 잊지 말고. 총명한 여자라면 사람을 가질 수 없으면 돈이라도 가져야지. 돈이 있는데 좋은 남자를 못 찾겠어? 위자료 받으면 찾을 수 있는 만큼 찾는 거야. 착한 놈, 잘 챙겨주는 놈 찾아서 맨날 대접받고 사는 거지.”사실 처음부터 계약뿐인 결혼이라 이혼한다 해도 아무것도 차례지는 게 없었다.“지유야.”지희가 갑자기 지유의 이름을 부르며 미간을 찌푸렸다.“근데 왜 갑자기 이혼을 결정한 거야? 오랫동안 좋아했잖아. 여이현이 바람을 피우지 않는 이상 쉽게 포기하지 않았을 텐데.”지유는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러더니 이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기사 못 봤어? 노승아 씨 귀국했잖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붙어먹은 거야?”지유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이현을 계속 헐뜯었다.“혼내 외도라, 그럼 죄가 더 무거워지는 거지. 위자료 더 받을 수 있겠다. 지유야, 진짜 경고하는데 마음 약해지면 안 된다. 아무것도 따지지 마. 결혼이 유효한 이상 여이현의 재산 중 절반은 네 거야. 그래 뭐 절반은 아니더라도 3분의 1 정도는 있겠지. 게다가 외도라니, 못 들어주겠다고 하면 모든 사람이 알게 판
그 말을 들은 양시은이 하민의 말을 극구 부인했다.“하민아, 엄마 화 안 났어. 왜 그렇게 생각해?”양시은은 하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를 안심시켰다.“엄마가 예전처럼 행복해 보이지 않아서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괜찮아. 어른들한테는 항상 많은 걱정거리가 있는 거거든.”천진난만한 하민이를 바라보며 양시은은 자신의 고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저런 방식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어떻게 보면 걱정거리가 맞긴 하니까...’하민은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 이해한 듯 양시은의 손을 잡고 그녀를 위로했다.“하민이는 엄마가 슬프지 않았으면 좋겠거든요. 그러니까 제 기쁨 중 절반을 나눠줄게요.”그 말에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고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그 후, 양시은은 하민이와 함께 놀아주었다. 그러다가 밖에서 놀고 싶었는지 하민이는 갑자기 밖으로 나가버렸다. 하민이가 도대체 뭘 하러 간 건지는 그녀조차 몰랐다.양시은은 하민이가 멀리 가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사실 하민이는 그저 침실 밖으로 나간 것이었다.“아저씨, 말한 대로 했는데도 안 알려주는데요? 어떻게 할까요?”하민은 나도현의 목을 끌어안고 말했다.나도현은 하민의 코를 톡톡 건드리며 칭찬했다.“그래도 잘했어. 하민이가 엄마를 웃게 했잖아. 그게 제일 멋진 거야.”그 말을 들은 하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어린아이와 어른의 기쁨은 결국 무게가 다른 것이었다.하민이가 준 위로는 일시적이었다. 양시은은 그런 단순한 위로로 바로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고 나도현도 그녀가 걱정돼서 점점 우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양시은은 익명의 문자 한 통을 받았다. 문자 내용은 딱 한 줄 뿐이었다.“나 채은이야. 누군가가 두 사람한테 해를 끼치려고 하니까 꼭 조심해야 돼.”그 문자를 본 양시은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고 의자는 뒤로 넘어져 버리면서 큰 소리를 냈다.그 소리를 듣고 도우미가 달려왔다.“아가씨, 무슨 일 있으세요?”그녀는 계속해서
“아까 본 사람 말이야. 채은이가 맞을까?”양시은은 나도현을 꽉 붙잡으면서 물었다.“안돼. 가서 확인해 봐야겠어... 불이 그렇게 큰데 혹시나 벗어나지 못했으면 어쩌지?”양시은은 그저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힐 것 같았다.그녀의 여동생도 화재로 죽은 것이었으니 말이다.‘채은이가 아직 살아있다면? 살아있는데 또 내 부주의로 화재 속에서 죽게 된다면?’이런저런 생각이 들자 양시은은 마음을 추스를 수 없었다.“시은아, 가지 마. 이미 경찰들이 다 막아놔서 들어갈 수도 없어.”나도현은 그녀를 말렸다.“하지만 정말 채은이라면...”“너도 채은이라고 확신 못 하잖아.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잖아. 왜 그런 불확실한 걸 위해서 죽을 위험까지 감수하려고 해? 네가 다치면 하민이는 어떡하려고?”나도현은 한마디 덧붙이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네가 다치면 난 어떡해?’양시은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눈시울을 붉혔다.나도현은 그녀를 품에 안아주며 말했다.“내가 비서를 보내서 찾으라고 할게. 우리는 집으로 가자.”집으로 가자는 말에서 양시은은 따뜻한 온기를 느껴졌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응.”그때의 양시은은 몰랐다. 근처에 한 대의 밴이 주차되어 있었고 차 안에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웨이브 펌을 한 아름다운 여인이 앉아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녀는 마치 어두운 밤 속에서 피어난 장미와 같은 미모를 가졌다.만약 양시은이 그곳에 갔더라면 분명 깜짝 놀랐을 것이다.왜냐하면 그 여인이 바로 양시은이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양채은이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녀는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일부러 풀어준 거죠?”운전석에 앉은 남자한테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채은은 깜짝 놀라며 부인했다.“그런 거 아니에요.”“거짓말하지 마요. 다 봤거든요! 한 번 죽었으면서 아직도 그렇게 네 언니를 생각해 주는 건가요? 참 눈물겨운 혈연이네요.”“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그 남자는 그녀가 하는 말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그쪽이 뭐라고 변명하든
반지의 경매 최저 가격은 2천만 원이었다. 양시은이 부른 가격은 그 두 배였다.양시은의 돌발 행동으로 인해 그녀를 향한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변했다.그 순간부터 그녀는 더 이상 나도현의 파트너가 아닌 양시은이었다.그녀의 행동은 예상 밖이었지만 양시은이라면 할 만한 선택이었기에 나도현은 왠지 모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결국 그 반지는 양시은이 제시한 가격으로 낙찰되었다. 이 금액은 그녀가 예상했던 가격보다 훨씬 비쌌지만 그럼에도 양시은은 그 가격으로 낙찰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경매에서 낙찰된 반지가 그녀에게 전달되었다. 나도현이 그녀 대신 그것을 보관해 주었다.“그 반지가 되게 마음에 들었나 보네?”“어차피 경매에서 발생한 모든 수익은 자선 단체에 기부된다며? 손해 볼 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양시은은 이렇게 되물으며 나도현이 했던 질문을 넘겨 버렸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빨간 벨벳으로 덮인 반지 상자를 훑어보고 있었다. 그녀가 상자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나도현은 그런 양시은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그녀의 찡그린 미간을 펴주었다.갑작스러운 손길에 양시은은 깜짝 놀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나도현은 이마의 주름이 완전히 펴질 때까지 부드럽게 문지르며 말했다.“미간을 찡그린 표정이 마음에 안 들어서... 넌 웃을 때가 제일 예뻐.”그는 무심한 말투로 말했지만 그 속에는 왠지 모를 진지함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그의 손길에 양시은은 몇 초 동안 얼어 있었다.그러다가 무언가에 이끌려 옆쪽을 힐끗 쳐다본 그녀는 갑자기 두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양채은!”그러자 나도현이 그녀의 어깨를 잡고 양시은이 앞으로 달려가려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그가 본 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였다.그 여자는 검은 드레스를 입었는데 매우 마른 체형을 가져서 멀리서 보면 확실히 양채은으로 보였다.나도현은 예전에 조사했던 CCTV 자료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하지만 그의 생각이 정리되기도
양시은의 드레스는 나도현이 준비해 준 것이었다.오프숄더 드레스였는데 그녀에게 정말 잘 어울렸다. 양시은은 오랫동안 이런 드레스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약간 어색해하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계속 거울 앞을 서성이며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곤 했다.옆에서 그녀를 보고 있던 도우미가 말했다.“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아주 잘 어울려요.”양시은은 아무 말 없이 그냥 웃을 뿐이었다.“나도 그렇게 생각해. 엄청나게 잘 어울려.”뒤쪽에서 나도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시은이 뒤를 돌아보자 나도현이 수트를 입고 걸어 나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입은 건 세트로 나온 커플 의상인 듯했다.양시은은 갑자기 왠지 모를 불편한 느낌을 받았다.눈치가 빠른 도우미들은 그녀의 표정이 안 좋은 걸 보고 자리를 떴다.나도현은 주머니에서 목걸이를 꺼내며 말했다.“드레스까지 입었는데 어울리는 액세서리가 있어야지. 내가 고른 건데 어때?”양시은은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액세서리 같은 건 안 해도 돼...”나도현의 태도는 온화한 듯했지만 또 거절할 수 없을 만큼 단호했으니 말이다.양시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목걸이는 이미 그녀의 목에 걸려 있었다.그녀를 바라보는 나도현의 눈빛 반짝였다. 그는 입꼬리를 올리면서 말했다.“역시 예뻐. 내가 생각한 대로야.”그와 눈을 마주치고 있으면 양시은은 그의 깊은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애써 그를 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머릿속에는 계속해서 나도현의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가자.”나도현이 양시은을 끌어당겼다.나란히 차에 탑승한 그들은 행사장으로 향했다.시간은 그 정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행사장으로 가는 차들이 모두 질서를 잘 지켰기에 그들은 차가 막히지 않은 상태로 순조롭게 도착했다.전과 다른 점이라 하면 많은 사람들이 양시은을 보고 놀랐다는 것이다.대부분 사람들이 모두 놀라워하며 나도현 옆에 여자 파트너가 있다는 사실에 의아해했다.그때, 누
"시체도 찾았고 얼마 전 장례식마저 치렀는데 양채은이 정말로 살아 있다면 그 두 구의 시체는 누구 것일까?"너무 많은 문제가 풀리지 않자 나도현은 양시은을 안심시키기 위해 말했다.“사람을 찾더라도 지금은 아니야. 일단 차에 타. 돌아가서 얘기하자.”양시은은 밥도 먹지 못한 채 결국 집으로 돌아갔다. 점심쯤 잠에서 깬 하민이는 하인들이 만든 음식을 먹고 나서 낮잠을 잤다.거실 안.양시은은 침대에 누워서 놀이공원에서 보았던 그 여자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반복해 떠올렸다. 확실히 비슷한 점이 많았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니 그녀가 정말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닐까?나도현은 돌아오자마자 차준기가 찾아온 놀이공원의 감시카메라를 확인한 후 양시은에게 알려줬다.“내가 확인해 봤는데 양채은의 모습을 보진 못했어. 아마도 네가 잘못 본 것 같아.”“그래?”양시은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대답했다. 과연 그녀의 착각이었을까?“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내가 다시 찾아보라고 할게.”“알았으니까 그만 나가 줘. 혼자 있고 싶어.”양시은은 지금 그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양채은을 만난 줄 알았을 때 얼마나 기뻤던지. 지금은 그 순간의 기쁨과 사람을 잘못 봤다는 실망이 번갈아 가며 양시은을 괴롭혔다.나도현이 잔뜩 주눅이 든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럼 나는 이만 나가 볼게.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문이 살며시 닫혔다.양시은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손에 쥔 휴대전화로 그날 양채은으로부터 걸어온 전화를 찾아보았다. 몇 초밖에 되지 않는 통화 기록이 눈에 들어오자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처럼 양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그날 이후 양시은은 양채은에 대해 다시는 언급하지 않았다.양시은의 모습이 자꾸 마음에 걸렸던 나도현은 몰래 사람을 시켜 조사를 계속했다. 처음엔 아무것도 찾지 못할 거로 생각했는데 며칠 동안 찾아본 끝에 끝내 단서를 발견했다.그 단서는 어떤 기자가 찍은 사진이었다.처음엔 그 사람을 변장한 연예인으로 착각해서 몰래 사진을 찍었는데 잘못
하민이는 혼자서 회전목마를 신나게 타고 있었고 양시은은 머지않은 곳에 잇는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이때 나도현이 그녀에게 따뜻한 밀크티 한 잔을 건네며 입을 열었다.“날씨가 추우니까 따뜻한 거 마셔.”양시은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어디서 산 거야?”나도현이 가까운 곳에서 열심히 장사하는 직원들을 가리키자 직원들이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놀이공원에 고객이 세 명만 있다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면 사장이 얼마나 기뻐하실까.양시은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밀크티를 받았다.“고마워.”나도현이 놀랍게도 그녀와 같은 의자에 앉으려 하자 양시은은 의아한 표정으로 자리를 옆으로 비켜줬다. 나도현은 우아하고 깔끔한 사람이라 아무리 지쳐도 아무 곳이나 앉을 사람이 아니었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사실 직원들한테 의자 하나 달라고 해도 돼.”“괜찮아, 이렇게 앉는 게 좋아.”나도현이 담담하게 거절했다. 깔끔하고 짧은 머리로 한쪽 눈을 가리자 평소 차가운 모습과는 달리 따뜻해 보였다. 양시은은 그런 그의 모습에 잠시 마음을 뺏겼다.남자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자 양시은은 애써 다른 곳을 바라보며 딴청을 했다. 그러자 옆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낮고 부드러운 그 소리에 양시은의 귓방울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신이 나서 요리조리 쏘다니던 하민이는 체력이 부족해 점심을 먹기도 전에 지쳐버렸다.나도현은 미리 예약한 레스토랑에 전화를 걸어 확인하고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점심 먹으러 가자. 레스토랑 예약했어. 하민이가 자고 있으니 내가 안고 갈게.”말을 마친 그는 양시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양시은은 잠시 망설이다가 하민이를 조심스럽게 그에게 건넸다.나도현은 조심스럽게 양시은으로부터 하민이를 건네 안고 외투로 아이를 덮어 바람이 들어가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쌀쌀한 가을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있었지만 양시은의 마음속에는 따스한 기운이 스며들었다.나도현은 기사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어 위치를 알리고 있었
하민이 말을 들은 양시은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하민이는 도현 아저씨가 그렇게 좋아?”“네, 도현 아저씨는 하민이에게 아주 많은 선물을 줬어요. 그리고 전 그 할머니도 좋아요.”“그렇구나.”하민이는 도현 아저씨가 바로 꿈에서도 보고 싶다던 친아빠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양시은은 아무것도 모르고 마냥 신나 하는 하민이를 바라보며 가슴이 답답해 났다. 그때 나도현과 나씨 가문에게 하민이를 숨긴 결정이 옳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민이의 존재를 숨기지 않았다면 하민이는 어렸을 때부터 아빠와 함께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하민이가 말하다 말고 누구를 봤는지 얼굴에 웃음을 띤 채 양시은의 손을 놓고 뛰어갔다.“도현 아저씨!”하민이가 나도현의 품에 와락 안기자 남자는 무릎을 꿇고 그를 안아 들었다. 평소에 다른 이들에게 얼음처럼 차갑게 굴던 나도현이 하민이를 만날 때마다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저씨가 바빠서 이틀 동안이나 하민이를 못 만났는데 엄마 말은 잘 들었어?”“네. 제가 말을 잘 들어서 엄마가 절 데리고 놀러 간대요. 도현 아저씨도 같이 갈 수 있나요?”두 사람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기대하는 눈빛으로 양시은을 바라보았다.양시은은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정신 차리고는 하민이에게 다가가서 아이의 작은 얼굴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요 나쁜 아들, 도현 아저씨를 보면 엄마가 없어도 되는 거야? ”“아니요. 하민이는 엄마도 같이 있어야 되요.”양시은은 부드러운 눈길로 히죽 웃으며 그녀 손을 잡으러 다가오는 하민이를 바라보았다. 나도현이 머리를 돌려 그녀를 힐끔 보고는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얼른 타.”양시은은 하민이를 안고 차에 올랐다. 하민이가 엄마와 앉겠다고 해서 조수석에는 사람이 앉지 않았다. 나도현이 운전기사를 불러와서 그들과 함께 뒷좌석에 앉았다.가운데 하민이가 끼어 있으니 거리가 너무 가깝지 않았기에 양시은의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양채은이 세상을 떠난 후로 양시은은 나도현을 더 꺼리게 되었다.예전에는 혼자 있는 것
양시은은 한참 동안 복잡한 표정으로 손에 쥔 약을 바라보다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나도현도 그녀를 위한 마음이었으니 못 본 척 눈감아주기로 했다.하민이를 돌보는 간호사가 책임감 있게 일을 한 덕분에 양시은의 부담을 많이 덜어주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마음을 놓고 자신의 치료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나도현은 지석훈에게 양시은의 진료를 부탁했다.“지석훈에게 별일 없다고 해서 네 진료를 부탁해 봤어.”양시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지석훈에게는 털어놓을 불평이 많았다.‘내가 할 일이 없었다고? 뭔 소리야? 나도현 네가 나를 병원에서 강제로 끌어낸 거잖아.’“진료는 끝났어요. 위가 좀 안 좋네요. 요즘 거의 안 먹죠? 그리고 조금씩 먹어야 해요.”양시은은 조심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처음으로 나도현 앞에서 죄책감을 느꼈다.나도현은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양시은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물었다.“그 외에 다른 건 없어?”“다른 건 없어. 그냥 푹 쉬면 돼. 그럼 난 먼저 갈게. 병원 일이 많아서 중요한 일이 아니면 날 부르지 마.”지석훈은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병원에 수술이 있다며 급히 떠났다.양시은은 나도현이 그녀에게 물어볼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예상과 달리 먼저 하인에게 물었다.“시은 씨, 최근에 음식을 거의 안 먹었나요?”하인은 양시은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네... 거의 안 드세요. 제가 설득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어요.”“정말 입맛이 없어. 이 사람들 잘못 아니야.”양시은이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그날 이후, 양시은은 나도현의 집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처음에는 양시은이 아프다는 이유로 그녀를 설득했고 후에는 하민이를 보러 가는 것이 편하다고 해서 방법이 없었다.그녀는 속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나도현이 요즘에 선을 넘지 않고 조용히 있어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최근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그래. 입맛이 없어. 좀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복용하고 있는 약도 그녀의 식욕에 영향을
나도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아깐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지금은 괜찮아졌어.”그는 양시은의 상태를 확인한 뒤 큰 자극을 피해야 한다는 말 때문에 이 상황을 그녀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양시은은 아무런 의심 없이 그 말을 믿었다.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거의 기억하지 못했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상태였다.나도현은 그녀가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설명했고 양시은은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이때 하민이가 양시은의 손을 잡고 말했다.“엄마 많이 피곤해요? 그럼 집에 가서 쉬어야 해요. 저는 남자아이니까 엄마가 항상 옆에 있을 필요 없어요.”양시은은 웃는 얼굴로 그의 통통한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우리 하민이 다 컸네. 엄마는 그래도 너를 혼자 두는 게 걱정되는걸.”나도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나도 네가 좀 쉬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양시은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아니. 난 지금 아주 좋아. 만약 채은이 일 때문에 걱정하는 거라면 나 이젠 괜찮아.”“그럼 간병인을 부를게. 내일 하루는 쉬고 모레 다시 하민이를 보러 와.”양시은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어떻게 이렇게 함부로 결정할 수 있어?”양채은의 사고 이후 모든 사람이 그녀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 자신도 잘 알고 있었기에 회복에 전념했다.일주일 동안의 치료를 거쳐 많이 나아졌는데 왜 나도현은 여전히 그녀를 믿지 않는 것일까? 나도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너는 지금 네 상태가 괜찮다고 생각해? 화장실 가서 거울을 한 번 봐봐.”양시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녀는 요 며칠간 늦게까지 밤을 새웠고 다음 날 하민이를 보려 일찍 일어나야 해서 쉴 시간이 없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엄청 피곤해 보였을 수밖에. 심지어 다크서클이 깊게 자리를 잡아 파운데이션으로 간신히 가릴 수 있을 정도였다.하민이도 같이 양시은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협공 덕분에 양시은은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약속한 뒤 나도현은 믿을 만한 간병인을 구하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