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특수한 취향이라도 있어서 다른 사람의 욕을 듣는 걸 좋아하기라도 하는 건가?“진호 오빠...”석규리는 배진호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그녀는 따라가지 않고 자리에서 묵묵히 일어나기만 했다.배진호가 보여준 혐오는 거짓이 아니었다. 석규리도 바보는 아니니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정미진이 약속한 물건은 너무나도 달콤했다.둘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갖기만 하면 집안의 모든 것은 아이의 것이 되고 회사도 수중에 들어올 수 있다.여이현도 배진호를 가족처럼 대해주니 그 인맥을 이용해 배진호의 회사는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테다. 지금 이 대우만 참아내기만 하면 그녀를 기다리는 건 호화로운 부잣집 며느리 생활이었다.남편이 잘 대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시부모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 무서울 게 없었다. 아이의 얼굴을 봐서라도 배진호는 독하게 굴지 않을 것이다. 배진호는 좋은 남자였다. 그를 따내기만 하면 그 뒤에는 달콤한 미래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석규리는 치밀하게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여기서 포기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권다솔 쪽.그녀는 단걸음에 자신의 방으로 달려와 방문을 잠갔다. 창밖의 풍경을 보며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그녀는 자신에게 한번, 또 한 번 배진호 따위를 위해 눈물을 흘려서는 안된다고 되새김했지만 감정이라는 건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똑똑똑.”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가 따라온 것일 테다.권다솔은 마음을 가다듬고 문을 열었다. 하지만 문밖에는 아버지가 아닌 남태건이 서 있었다.“다솔아, 괜찮아? 나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진호 씨와 여자분이 하도 너무 심한 말을 하길래. 입 밖에 오빠, 오빠라며 얼마나 시끄럽게 구는지. 아버지의 성격도 잘 알잖아. 그렇게 너를 사랑하시는데 얼마나 화가 나셨겠어.”남태건은 한숨을 내쉬었다.“네가 많이 속상할거라는건 잘 알고 있어. 뭔가 있으면 나한테 말해. 말하고 나면 좋아질 거야.”“졸려요. 전 그냥 빨리 자고 싶어요.”
클럽에는 예쁜 여자들이 많았지만 권다솔 같은 분위기의 사람은 얼마 보이지 않았다.권다솔이 들어서자마자 한 남자가 술잔을 들고 와서 말을 걸었다.“저희 이미 자리 잡았는데 오실래요? 스페이드 에이스도 깠어요. 마시러 와요.”“저 사람 따라가실 거면 그만두고 이쪽으로 오세요. 전 이 클럽 회원이에요. 마시고 싶은 술이 있으면 아무거나 불러요.”하지만 권다솔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들을 밀어냈다.“비켜주세요.”권다솔은 곧장 카운터로 걸어가서 테이블 석과 맥주를 한 박스 주문했다.그녀는 혼자서 자리에 앉아 기계식으로 맥주를 열고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곧 테이블 위에는 빈 맥주병들이 줄을 지었다.알콜로 정신을 마비시키고 싶었지만 이렇게 많은 술을 마셔도 머리는 점점 맑아지기만 했다.머릿속에는 심지어 배진호의 모습이 그려지기까지 했다.같이 일을 하던 장면들, 행복한 연애를 하던 장면들, 많은 조각들이 모여져 무릎을 꿇고 프러포즈를 하는 배진호의 모습으로 변했다.한때 그녀는 자신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인 것 같았다. 크면서 한 번도 억울함을 겪은 적 없었고 일도 순조로웠다. 배진호라는 사랑하는 남자도 만났고 말이다.하지만 지금은 그저 광대가 돼버린듯한 기분이었다.“웨이터.”권다솔은 빈 술병을 한쪽에 치워두고 휘청거리며 일어섰다.“소주 몇 병 추가해 주세요.”맥주로는 아무리 마셔도 도저히 취하지 않았다.소주라도 더 마셔야 할 것 같았다.취하고 나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슬프지도 않을 것이다.머지않은 곳 다른 테이블 석에서 배진호도 한잔 또 한잔 술을 입안에 들이붓고 있었다.잘 생기고 분위기 있는 그의 모습에 고급스러운 옷차림, 게다가 주변에는 다른 여자도 없었다.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바에 있는 여자들의 이목을 끌었다.곧 노출이 심한 복장을 항 여자 한 명이 그의 곁에 와서 앉으며 배진호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오빠, 혼자 왔어? 혼자 마셔도 재미없는데 나랑 게임 할까? 진 사람이 옷 하나씩 벗기
술병이 박살 나며 바닥이 깨진 조각들로 가득 찼다.여자는 눈앞의 상황에 깜짝 놀라 화들짝 일어섰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배진호를 쳐다보는 그녀의 심장은 놀라서 요동쳤다."당신 지금 뭐 하는 거야?""비키라고 했잖아."배진호는 마침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의 눈빛엔 감정이 전혀 없었다. 욕망은커녕 오히려 혐오감만 가득 차 있었다.그 순간, 여자는 철저히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내가 그렇게 형편없나?’제 발로 찾아온 여자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맥주병까지 깨버리다니."알았어. 가면 되잖아. 설마 내가 당신 아니면 안 될 줄 알아?"그녀도 자존심에 화가 났다.체면을 세우고 싶었던 그녀는 독설을 날렸다."당신 같은 사람 나 말고 누가 좋아한다고 그래? 사람들한테 방해받기 싫으면 여기엔 왜 온 건데?"클럽은 남녀가 자유롭게 어울리는 곳 아닌가?자기가 순진한 남자라도 되는 줄 아는가?배진호는 그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변이 조용해진 뒤,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 조용히 술잔을 들었다.만약 권다솔이 여기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일 뿐이라는 것을.그가 술잔을 집으려 고개를 숙인 순간, 남태건이 그의 옆을 지나 안쪽 자리로 향했다.권다솔이 그곳에 앉아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쫓아낸 남자들이 몇 명인지 셀 수도 없었다. 몇몇은 버티며 소란을 피우려 했지만 그녀의 손에 든 맥주병은 그들을 봐주지 않았다.머리를 맞을 뻔한 남자들은 당연히 더 이상 그녀를 귀찮게 하지 못했다.하지만 그들 역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틈틈이 이쪽을 힐끔거리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그때 남태건이 다가왔다.그는 권다솔의 손에 있던 술병을 순식간에 낚아챘다.“다솔아,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밤늦게 집에 안 들어가고 왜 여기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어?”“이건 내 일이에요. 당신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권다솔은 그의 말을 듣고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권다솔은 방금 뺏긴 술병 대신 새로운 술병
“태건 씨, 다시 말하지만 나는 도움이 필요 없어요. 빨리 돌아가세요.”권다솔의 목소리엔 이미 지친 듯한 짜증이 묻어났다.그녀가 밤늦게 클럽에 온 이유는 마음을 풀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이지 남태건이 옆에서 잔소리를 늘어놓으라고 온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남태건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그녀 옆에 자리를 잡고 자신도 맥주 한 병을 땄다.“네가 술을 마시고 싶다면 내가 같이 마셔줄게. 네가 집에 가고 싶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데려다줄게.”권다솔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갑자기 술 마실 기분이 뚝 떨어진 그녀는 술병을 옆으로 밀어두고 춤추는 남녀들로 가득한 스테이지를 멍하니 바라봤다.‘이 순간에 배진호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다솔아, 우리도 같이 춤출래?”남태건이 먼저 제안했다.아까 이쪽으로 오면서 그는 배진호를 봤다.그 남자는 정말로 끈질기게 권다솔의 앞에 나타났다. 아니면 둘 사이엔 정말 인연이라도 있는 걸까? 이렇게 힘들고 지칠 때 찾는 곳이 똑같다는 것 자체가.하지만 남태건은 그런 인연도 자신이 있는 한 반드시 끊어낼 거라 다짐했다.그는 배진호가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권다솔과 자신이 춤을 추며 두 사람의 몸이 밀착해 있는 모습을 말이다.권다솔은 고개를 저었다.“혼자 가세요. 난 그냥 조용히 있고 싶어요.”“네가 안 간다면 나도 안 가. 나는 너하고만 있고 싶어. 다른 여자는 보지도 않을 거야.”남태건은 천천히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둘 사이의 거리가 한층 더 좁혀졌다.남태건이 손을 내밀어 권다솔의 손끝에 닿으려는 순간, 권다솔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다솔아, 어디 가려고?”남태건은 그녀가 화난 줄 알고 얼른 따라가려고 몸을 일으켰다.권다솔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주스 좀 받아어려고요. 금방 올 테니까 여기 있으세요.”그제야 남태건은 안심하고 자리에 앉았다.그는 미리 준비해 둔 액세서리를 가방에서 꺼냈다. 권다솔이 돌아오면 그녀에게 선물할 생각에 미소를 지
남자는 머리가 어질거렸다. 고개를 들자 보이는 잔뜩 화가 난 배진호의 얼굴에 그는 꼬리를 내리게 되었고 이내 배진호에게 비위를 맞추려고 했다.“깼어요, 깼어요. 이 여자는 형님한테 넘길게요. 두 사람 방해하지 않고 바로 여기서 꺼져드릴 테니까 형님은 천천히 즐기십시오!”“여자도 사람이야. 우리랑 같은 인간이라고. 물건처럼 넘기느니 마느니 할 자격 없어, 너한테.”배진호는 손을 뻗어 남자의 멱살을 잡으며 엄숙하게 경고했다.그는 방금 이곳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나서서 도와준 이유는 아무 잘못도 없는 여자가 괴롭힘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그저 한 몫 챙겨보려고 구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그의 마음속에 권다솔 외에는 누구도 들어올 수 없었다.“네, 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남자는 바닥을 기어 다니더니 빠르게 몸을 일으켜 도망쳤고 중얼거리며 배진호를 욕했다.‘어디서 허세를 부려!'‘세상에 욕망이 없는 남자가 어디에 있다고! 다들 여자를 원한다고!'배진호는 쫓아가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방금 남자에게 당하고 있었던 여자에게 밤늦게 술집에 왔을 땐 조심하라고 말하고 싶었다.그런데 그는 권다솔을 발견하게 되었다.“진호 씨?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건 아니죠? 진호 씨가 왜 여기에 있어요?”권다솔은 그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그녀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보았다. 자신이 그렇게나 그리워했던 남자가 지금 바로 눈앞에 있자 땜이 무너져버린 저수지처럼 감정이 흘러나왔다.이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권다솔은 속으로 자신에 말했지만, 여전히 참지 못하고 손을 뻗게 되었다. 배진호를 직접 만지며 꿈인지 현실인지 확인하고 싶었다.“나예요. 우리가 같은 목적으로 여기에 온 것 같네요.”배진호는 씁쓸하게 웃었다.방금 그는 차를 몰고 이곳으로 오면서 안에서 빛나는 불빛 보며 생각했었다. 만약 이곳에 권다솔이 있다면 분명 안으로 들어가 한잔 마셨을 것이라고.그 생각으로 이 안까지 들어온 것이다.그러나 그는 정말로 이곳에서 권다솔을 만나게
만약 권다솔이 모른다고 한다면 그는 이곳을 떠나 그녀가 푹 쉴 수 있게 해줄 생각이었다.그는 알고 있었다. 권다솔이 취했다는 것을. 술에 취한 사람과 억지로 하고 싶지 않았다.“진호 씨, 내가 어떻게 진호 씨 얼굴을 잊겠어요. 설마 내가 진호 씨를 못 알아볼 거로 생각한 거예요?”권다솔은 그를 보았다.그녀는 지금 술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호텔 불빛 아래 보이는 배진호의 얼굴도 흐릿했다.이 모든 게 꿈일 거로 생각했다.현실에서는 감정을 꾹꾹 누르고 있었으니 꿈에서만큼은 전부 표현하리라 생각했다.그녀는 한번 또 한 번 배진호의 이름을 불렀다.그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배진호는 이성을 잃고 말았다.그는 옷을 하나씩 벗으며 방 안의 불을 꺼버렸다. 그리고 고개를 내려 권다솔에게 키스했다. 두 사람은 뜨거운 키스를 나누었다.얼마나 지났을까, 두 사람은 전부 힘이 빠진 상태였다. 그제야 서로에게서 떨어졌다.권다솔은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손가락 하나조차 움직일 수 없었기에 샤워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했다.그래서 그대로 눈을 감고 자버렸다.그날 밤, 그녀와 배진호는 그 어느 때보다 푹 자게 되었다.다음 날 아침이 되자 열린 커튼 틈 사이로 햇볕이 들어와 배진호는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옆에 누워있는 권다솔을 본 그는 전례 없던 행복을 느끼게 되었고 이대로 시간이 멈추길 바랐다.그는 권다솔에게 이불을 덮어준 뒤 옷을 입었다. 아침을 사러 갈 생각이었다.어젯밤 두 사람은 아주 격렬하게 서로를 원했기에 권다솔이 깨어나면 분명 배고플 것이었다.아침을 먹은 후에 두 사람을 편히 잠 못 이루게 했던 문제들을 해결해볼 생각이었고 이혼도 취소할 생각이었다.그는 그렇게 호텔을 나섰다.그 모습을 마침 남태건이 목격했다. 그는 어젯밤 내내 권다솔을 찾아다니느라 잠도 자지 못했지만 찾지 못했다.조급해진 그가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려던 때 배진호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배진호는 호텔에서 나왔다.그렇다는 건...남태건은 이를 빠득 갈며 호텔
권다솔은 눈을 떴다.옆에 누워있는 남태건을 본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머릿속도 하얘졌다.그녀는 힘겹게 입을 뗐다.“어젯밤에... 그럴 리가 없잖아요?”머릿속에 남아 있던 기억이 알려주고 있었다. 어젯밤 그녀와 함께 있었던 사람은 배진호라고. 하지만 왜 남태건이 눈앞에 있는 것일까?그녀는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다솔아, 내가 어제 일찍 집에 들어가라고 했잖아. 그런데 네가 싫다면서 나더러 먼저 가라고 했지. 내가 어떻게 너만 혼자 남겨두고 집에 가? 주위에 남자들이 득실거리는데. 정말로 내가 먼저 갔다면 이상한 파리들이 너한테 꼬였을 거라고. 내가 그렇게 경계하고 있었는데도 너한테 파리가 꼬였을 줄은 몰랐네.”남태건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해댔다.얼굴도 붉지 않고 가슴도 요동치지 않을 정도로 태연했지만 두 눈엔 안타까움만 남아 있었다.“누가 네 술잔에 뭔가를 탔어. 그걸 눈치 못 챈 네가 주스를 가지러 갈 때 결국 정신을 잃게 되었었지. 하마터면 처음 보는 놈들에게 끌려갈 뻔한 걸 내가 막은 거야.”권다솔은 어젯밤 있었던 일을 기억해내려고 애를 썼다.그녀는 확실히 자신에게 치근대던 남자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녀에게 손을 대려고 했으나 배진호가 나타나 남자를 때려주며 무사하게 되었다.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배진호라는 것을. 애초에 남태건이 아니었다.“정말로 절 구해준 사람이 태건 씨예요? 거짓말 하고 있는 건 아니죠?”권다솔은 반신반의하며 말했다.남태건은 손을 번쩍 들며 맹세했다.“당연히 거짓말이 아니야. 어젯밤 널 구한 사람이 내가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너랑 같은 방에 있겠어? 다솔아, 그 약은 아주 위험한 약이야. 사람 기억까지 흐릿하게 만들 수 있는 약이지. 이따가 나랑 같이 병원에 가자. 후유증이라도 남으면 안 되잖아.”기억까지 흐릿하게 만든다는 말에 권다솔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설마 진호 씨랑 보낸 시간이 전부 꿈인 거야? 약 때문에 환각이 생긴 거야?'그녀는 어제 꿈속에서 배
“참.”권다솔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체크아웃 해야겠어요.”“그럴 필요 없어. 어젯밤 방은 내가 예약한 거거든. 우린 그냥 바로 병원으로 가면 돼. 나머진 내가 알아서 다 처리할 거야.”남태건은 급하게 그녀를 말렸다.두 사람이 나가자마자 배진호가 돌아왔다.그의 손에는 금방 만든 샌드위치가 있었다. 맛집으로 소문난 가게였던지라 그는 족히 반 시간은 기다려서야 살 수 있었다.하지만 괜찮았다. 권다솔이 좋아하기만 한다면 반 시간이든 한 시간이든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손님.”이때 로비 직원이 그를 불렀다.그녀는 배진호를 측은한 눈길로 보았다. 즐거운 마음으로 아침을 사러 나갔다가 그의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와 함께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그는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직원은 결국 참지 못하고 말해주었다.“여자친구분이 이미 떠나셨어요. 체크아웃하시겠어요?”“네, 체크아웃할게요.”배진호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잠에서 깨어난 권다솔이 그에게 말도 없이 가버린 것을 보면 아직 그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그래서 그가 나간 사이에 생각을 정리할 겸 먼저 가버린 것으로 생각했다.체크 아웃을 한 뒤 배진호도 호텔에서 나왔다.그는 누군가 자신을 사칭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남태건은 권다솔을 데리고 병원으로 온 뒤 기본적인 검사를 진행했다. 권다솔은 아주 건강했다.하지만 그녀는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다솔아, 나랑 함께 밤을 보낸 게 그렇게 슬픈 일이야? 너한테 나는 그런 존재였어?”그녀를 집으로 데려다주던 남태건은 눈가가 붉어졌다.권다솔은 오직 배진호만 원했다. 그 사실에 그는 가슴이 쓰라리면서 분노가 치밀었다.그는 이미 권다솔을 자신의 아내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배진호는 그의 아내와 밤을 보내지 않았는가.권다솔은 고개를 저었다.“그런 게 아니에요. 전 그냥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 뿐이에요. 전 태건 씨를 여전히 친구로만 생각하고 있거든요.
은서우는 깜짝 놀라며 급히 말했다.“원장님, 제가 알아볼 테니 먼저 가서 쉬세요.”그러나 인명진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은 선생님 먼저 쉬세요. 오늘 하루 종일 이동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제가 알아서 할 게요.”은서우는 두 개의 침대가 놓인 객실을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인명진의 배려가 고맙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한 죄책감과 두려움이 그녀를 짓눌렀다.그녀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두 손으로 옷자락을 꽉 쥐었다.머릿속은 온통 뒤엉킨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잠시 후 돌아온 인명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근처 호텔에도 빈방이 없어서 방법이 없네요. 오늘 밤은 그냥 이렇게 지내야 할 것 같아요.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그냥 특수한 상황이라고 생각해요.”은서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원장님.”인명진이 씻으러 들어가자 은서우의 시선은 탁자 위의 주전자에 멈췄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주머니로 가져가 약봉지를 만졌다.심장이 요동치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그녀는 약봉지를 손안에 단단히 움켜쥐었다.너무 세게 힘을 주어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갈등 속에서 은서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렇지 않은 척 주전자 쪽으로 다가갔다.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약을 컵에 넣고 재빨리 물을 부었다.그 후 약이 빠르게 녹도록 조심스럽게 저었다.모든 것을 완성하고 물컵을 원래 자리에 돌려놓는 순간 인명진이 욕실에서 나왔다.그는 느슨한 가운 하나만 걸친 채였다.젖은 머리칼 몇 가닥이 이마에 흩어져 있었고 물방울이 그의 단단한 턱선을 따라 흘러내려 쇄골을 타고 가운 속으로 사라졌다.은서우는 무심코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순간적으로 심장이 멎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른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하지만 그녀는 다시 한번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인명진은 그녀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듯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은서우에게 다가왔다.목소리는 방금 샤워를 마친 사
이렇게 드문 해외 교류 기회를 얻는 것은 그녀의 전문 능력을 크게 인정받은 것이며 또한 시야를 넓히고 자신을 성장시킬 절호의 기회였다.하지만 그 인턴은 이 소식을 듣고 다른 속셈을 품게 되었다.그녀는 은서우를 찾아가 몰래 약봉지를 건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은 선생님, 이번에 원장님과 함께 가시죠? 기회를 봐서 이 약을 물에 타세요. 일이 끝나면 2천만 원 드릴게요.”은서우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란 채로 연신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이건 불법이에요. 절대 할 수 없어요.”인턴 민지아는 어두워진 얼굴로 싸늘하게 협박했다.“전에 제 돈을 받고 제 부탁 들어주신 거 잊지 마세요. 안 하면 당신이 돈을 받고 원장님의 사진을 몰래 찍은 사실을 폭로해 버릴 거예요. 그러면 당신은 완전히 끝장나는 거죠. 그리고 소씨 가문 사람들이 가만있을 것 같아요? 이렇게 좋은 기회를 망쳐버리면 더 난리 칠걸요?”은서우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는 흰 종이처럼 순식간에 창백해졌다.그녀는 자신이 이 자리까지 오기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떠올렸다.‘이 선택 때문에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지만 민지아의 요구대로 하면 내 양심은 어떡하지? 원장님의 신뢰는 어떻게 보답하지?’민지아는 그녀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 다시 유혹하듯 말했다.“그냥 약을 타기만 하면 돼요. 원장님은 전혀 눈치채지 못할 거예요. 잠들면 사진 몇 장만 찍으세요. 어렵지 않잖아요? 이것만 끝내면 우리 둘은 완전히 정리되는 거예요.”은서우는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고뇌 속에서 결국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민지아는 목적을 달성하자 만족스러운 냉소를 지으며 장난치지 말라는 경고를 남긴 뒤 급히 자리를 떠났다.은서우는 손에 약봉지를 꽉 쥔 채 혼자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출발일이 다가왔다.은서우는 무거운 짐을 끌고 인명진과 함께 공항으로 향했다.가는 길 내내 인명진은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이번 교류와 관련된 의학적
은서우는 인명진의 카카오톡을 추가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동시에 긴장감이 엄습해 왔다.이제 남은 과제는 사진을 찍어 전달하는 것이었다.어느 날 병원 휴게실에서 그녀는 인명진이 혼자 앉아 자료를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주변에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은서우는 심호흡하며 용기를 내어 조용히 다가가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이 핸드폰을 만지는 척했다.실제로는 몰래카메라를 켜 자연스럽게 각도를 조정한 뒤 빠르게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다행히도 인명진은 자료에 집중하고 있어 그녀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다.은서우는 재빨리 사진을 인턴에게 전송했다.인턴은 그 사진을 보고 매우 만족스러워했다.[은 선생님. 잘하셨어요. 이 정도는 되어야죠.]그러나 안도의 순간도 잠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인명진이 카카오톡으로 메시지를 보내 학술 교류에 관련하여 질문한 것이다.당황한 은서우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그때 인턴도 들킬 우려가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은서우에게 카카오톡 아이디를 보내주며 인명진이 그녀를 추가할 수 있도록 지시했다.은서우는 난감했지만 어쩔 수 없이 인턴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그녀는 다시 인명진을 찾아갔다.“원장님, 한 인턴이 이번 수술에 대해 관심이 많더라고요. 학술 연구에서도 독특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 친구인데 원장님께서도 얘기 나눠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건 그 친구 연락처입니다.”인명진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은서우를 바라보았지만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그는 은서우와 학술 논의를 하기 시작했다.은서우는 탄탄한 의학적 지식과 침착한 분석 능력으로 빛을 발했고 인명진은 그런 그녀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이상한 점도 있긴 하지만 확실히 능력은 있네. 한 번 키워봐도 되겠어.’인명진이 은서우를 보며 말했다.“은 선생님, 전문적인 역량이 기대 이상이군요. 앞으로 더 도전적인 케이스들을 맡겨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연구 프로젝트에도 참여해 보면 어떻겠습니까?”은서우는 깜짝 놀랐
은서우는 심장이 조여오는 듯했지만 이번에 물러서면 평생 그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나는 숨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어. 마음대로 해. 진실은 결국 밝혀질 테니까.”소태훈은 은서우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자 분노에 휩싸였다.그는 옆에 있던 테이블을 손으로 밀쳐버렸다.탁자 위의 찻잔과 유리병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깨진 유리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고 날카로운 소리가 온 방 안을 가득 채웠다.“은서우! 넌 내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 없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광기에 휩싸인 그의 행동은 방 안에 있던 다른 가족들의 분노까지 부추겼다.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덩치 크고 험악하게 생긴 중년 남성이 목소리를 높였다.“은서우! 네가 이 집에서 몇 년을 공짜로 먹고살았는데! 이제 와서 발을 뺀다고? 꿈도 꾸지 마.”말을 마친 남자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거친 손으로 은서우의 옷깃을 움켜잡아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발이 바닥에서 떨어진 은서우는 목이 조여와 숨이 막혔지만 여전히 그 남자를 노려보며 외쳤다.“이건 불법 감금이에요! 놔요!”“불법 감금? 이건 가족 간의 일이야! 네가 태연이를 죽였으니 끝까지 책임져야 할 거 아냐.”그 장면을 목격한 인명진은 얼굴을 굳히고 이내 앞으로 나서서 중년 남성의 손목을 움켜잡으며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봤다.“놔. 안 그러면 신고할 거야.”남자는 인명진의 기세에 눌려 주춤했지만 굽히지 않고 외쳤다.“넌 누구야? 뭔데 우리 가족 일에 끼어드는 거지?”인명진은 단호하게 대답했다.“은서우 병원 원장. 내 직원이 이런 식으로 위협받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사람이 많다고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나? 법 앞에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명심해.”그제야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소상태가 다가와 사내의 팔을 붙잡았다.“이러다 일이 더 커지겠어요. 일단 놔요.”사내는 마지못해 손을 풀었다.갑작스럽게 자유로워진 은서우는 비틀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인명진이
은서우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내가 그날 가자고 제안한 건 단순한 모임이었어. 그 누구도 그런 사고가 날 거라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도 나는 지난 몇 년간 계속해서 보상하려고 노력했어. 하지만 나도 내 삶이 있어. 더 이상 이 일에 끌려다닐 순 없어.”그 순간 소상태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오더니 손가락을 뻗어 은서우의 이마를 찌를 듯 들이밀었다.“이 배은망덕한 년아! 태연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이렇게 배신해?”은서우는 고개를 돌려 그의 손길을 피하며 차분하게 말했다.“저도 태연이의 죽음이 너무나 가슴 아픕니다. 하지만 제가 저지르지도 않은 죄까지 짊어지고 살 순 없어요. 저도 할 만큼 했어요.”연희진이 흐느끼며 애원했다.“서우야, 한 번만 더 도와주면 안 되겠니? 태훈이 몸이 안 좋아서 치료비가 계속 필요해.”은서우는 자신을 거둬준 양모를 바라보며 심란함을 느꼈다.이전의 기억들이 밀물처럼 밀려 들어왔다.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감사한 마음뿐이었다.은서우는 조심스럽게 행동했고 진심으로 인정받는 가족이 되고 싶어 노력했다.하지만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엄마, 마지막이라고 말했잖아요. 제가 지난 몇 년간 드린 돈만으로 부족했나요? 단순한 사고였어요. 저도 태연이한테 그런 일이 발생할 줄 몰랐고 태훈이가 이렇게 될 줄도 몰랐어요.”그 말에 소태훈이 흥분하며 휠체어에서 몸을 기울였다.그의 눈빛에는 증오와 광기가 서려 있었다.“은서우! 그렇게 쉽게 벗어날 생각은 하지 마. 이 모든 게 왜 벌어진 줄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내 마음을 받아줬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은서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몸을 떨며 물었다.“뭐라고? 그 사고... 설마 일부러 낸 거야? 단지 내가 네 고백을 거절했다는 이유로?”소태훈은 비웃듯 콧방귀를 뀌었다.그는 이젠 감추는 것조차 귀찮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그래! 너만 아니었으면 태연이가 죽을 일도 없었고 내가 장애인이 될 일도 없었겠지. 그러
“성북 쪽으로 가주세요. 도착하면 제가 길 안내할게요.”인명진은 은서우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내비게이션을 켜고 조용히 성북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성북은 오래된 주택가가 밀집한 지역이었다.인명진은 한 번도 이곳에 온 적이 없었다.그가 경성에서 주로 활동하는 곳은 병원이었고 그게 아니면 여이현이 있는 지역에 가끔 방문할 뿐이었다.하지만 생활이 안정된 후로는 여이현이 있는 곳으로도 향하지 않았다.은서우가 아니었다면 그는 이곳에 올 일조차 없었을 것이다.마침내 그녀의 안내에 따라 차는 한 단칸방 앞에 도착했다.차를 세운 순간 안에서 격한 소란이 들려왔다.“왜 아직도 그 계집애 편을 들고 있어? 대체 무슨 생각이야! 그 애만 없었어도 우리 태훈이가 이렇게 되진 않았어!”“그 애가 우리한테 준 돈만 해도 충분해. 게다가 태훈이 사고는 그냥 예상치 못한 사고일 뿐이었어. 대체 언제까지 그 아이한테 책임을 떠넘길 거야?”끝없는 다툼.은서우는 이제 이런 광경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었다.더는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인명진은 남의 사생활에 관여하는 타입이 아니었다.그는 은서우가 안전벨트를 풀고 내리려는 순간 무심하게 말했다.“가족 문제로 일에 지장 주지 마세요. 도저히 해결할 방법이 없으면 그냥 휴가 내세요. 그리고 차비는 안 받아요.”그건 분명 의도적인 언급이었다.인명진은 은서우를 쳐다보지도 않고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이제 더는 그녀와 이 문제로 말 섞고 싶지 않다는 신호였다.‘내일 현금을 들고 가서 감사 인사를 전해야겠지. 지금은 그런 것보다 당장 눈앞의 일을 해결하는 게 먼저야.’은서우는 얼른 집안으로 들어섰고 방 안은 깨진 유리 조각, 뒤집힌 가구들과 여기저기 널브러진 물건들로 인해서 엉망진창이었다.그녀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여기 이천만 원이에요.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거 기억하세요. 저도 이제 곧 서른이에요.”“곧 서른이라고? 그럼 태연이는 너 때문에 서른이 되기도 전에 죽었다는 거 알
이천만 원이라는 돈은 가뭄의 단비처럼 절실했다.‘하지만 원장님께서 이 일을 아시면 이 병원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할 수도 있어.’“은 선생님, 1억이라도 원하시는 건 아니죠?”인턴은 어떻게든 인명진과 접촉하려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인명진의 비서와 접촉하는 건 꿈도 꿀 수 없었고 결국 선택한 차선책이 은서우였다.어차피 은서우는 돈을 받으면 부탁을 들어줄 것이었고 그 후 그녀가 병원에서 잘리든 말든 인턴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은서우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일단 급한 일부터 처리해야겠어요. 그 부탁은 내일 다시 얘기하면 안 될까요?”“내일이면 원장님 사무실에 가는 날이잖아요? 은 선생님, 그냥 지금 확실히 해두는 게 좋겠어요.”인턴은 끊임없이 떠들어댔고 그때 은서우의 폰이 다시 울렸다.“은서우! 지금 죽어야 할 사람은 너야! 네가 아니었으면 우리 가족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어!”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온 것은 분노에 찬 외침이었다.너무나 익숙한 소리에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숨이 막혀왔다.“진정 하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 원하는 것도 바로 가져다드릴게요.”은서우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눈앞이 핑 돌 정도로 현기증이 몰려왔다.전화를 끊자마자 그녀는 거의 본능적으로 인턴의 손을 꽉 붙잡았다.“이천만 원 준다고 하셨죠? 바로 주면 내일 부탁 처리해 줄게요.”“지금 바로 송금할게요.”인턴은 은서우가 결국 제안을 받아들이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그녀가 핸드폰을 꺼내는 순간 은서우는 그것이 최신형 아이폰이라는 걸 알아챘다.케이스조차 반짝이는 보석으로 장식된 명품이었다.‘그래. 돈 없는 사람이 이런 일에 이천만 원이나 쓸 리 없지.’계좌 번호를 불러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계좌로 이천만 원이 들어왔다.인턴은 신신당부했다.“전 고화질 사진이 필요해요. 그리고 카카오톡도 꼭 추가해 줘야 해요.”“그럼 제가 당신 카카오톡을 로그인해야 하지 않나요? 아니면 어떻게 추가해요?”“좋아요. 로그인하세요. 은서우 씨...”그때 인턴의
은서우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인명진은 이미 돌아서서 갈 길을 가고 있었다.비록 인명진이 병원의 원장이었지만 은서우는 회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그를 본 적이 거의 없었다.오늘 처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하는 것이었다.그는 수술용 멸균복을 입고 마스크와 모자를 착용하고 있었다.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깊고 차가운 그의 검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수술 내내 상황이 아무리 긴박해도 인명진은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고 그의 침착함과 냉정함은 뛰어난 실력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은서우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이제야 왜 병원의 많은 여성 간호사, 인턴, 심지어 여의사들까지도 그에게 열광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은서우는 가볍게 몸을 풀며 수술실을 나왔다.막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한 동료가 그녀를 찾아왔다.가슴에 걸린 명찰을 보고 은서우는 상대가 인턴임을 알았다.은서우는 예의 바르게 물었다.“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시죠?”“은 선생님, 방금 원장님과 함께 수술을 마치셨죠?”인턴의 질문에 은서우는 약간 의아했다.“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인턴은 자신의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은 선생님, 저 좀 도와주세요. 원장님 카톡 좀 추가해서 저한테 넘겨주시거나 아니면 원장님 사진 몰래 몇 장만 찍어 주세요. 제가 이만큼 드릴게요.”인턴의 눈에는 기대감이 가득 차 있었다.은서우는 인턴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제가 원장님 연락처를 넘긴다고 해도 원장님 입장에서는 그냥 낯선 사람일 뿐일 텐데 원장님이 연락 받아줄 것 같아요? 그리고 몰래 사진 찍는 건 불법인 거 모르나요? 고작 그 정도 푼돈으로 저를 이런 큰일에 끌어들이겠다고요? 당신이 미친 걸까요? 아니면 제가 미친 걸까요?”은서우는 거침없이 인턴을 몰아붙였다.인턴이 급히 덧붙였다.“아니에요, 은 선생님. 도와주시기만 하면 백만 원 아니 천만 원도 문제없어요.”‘천만 원에 사진 몇 장과 연락처? 저 인턴 진짜 제정신이 아니네.’은서우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이명진은 병원에서 만약 어떤 의료 사고라도 발생한다면 이 병원의 명성은 그대로 무너질 것으로 생각했다.그의 말에 한 간호사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원장님, 병원 내부 번호와 원장님 개인번호 모두 통화 중이셨어요. 원장님 인기가 지금 장난 아닌 걸 모르시는 건 아니시죠?”문 앞에 대기 중인 인턴들로도 모자라 소문 듣고 연락이 오는 환자도 있었고 학생들도 있고 심지어 부잣집 부인들도 어디서 개인번호를 얻었는지 매일 전화를 걸어 이명진의 전화는 항상 통화 중 상태였다.긴급 상황만 아니라면 인명진이 직접 나설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인명진은 간호사의 필요 없는 말을 들을 시간도 없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그가 문을 열자 밖에서 있던 인턴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진짜 너무 멋있고 젊잖아. 이렇게 젊으신데 원장 선생님이라고?”“너무 잘생겼어. 여자 친구도 없다 그러던데.”“많은 수술도 직접 하신대. 그리고 학술논문도 봐주고 기타 강의도 하신다고 들었어.”“이렇게 훌륭한 사람 품에 안겨있는 느낌은 어떤지 상상도 안 가.”그들은 미친 사람처럼 저마다 한마디씩 주고받고 있었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인명진에게 달려들어 길을 막고 있었다.“인 원장님, 저랑 사귀시면 이런 병원 몇 개라도 더 해줄 수 있어요. 당신을 경성의 의료센터에서 우두머리로 만들어 드릴게요.”“인 원장님, 저 사람 말 믿지 마세요. 저랑 사귀시면 더 많은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드릴게요.”“인 원장님, 저랑...”“다들 꺼져!”인명진은 평소에 이 사람들에게 무관심이었지만 지금은 급한 수술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한 간호사가 데리고 온 경호원들도 그녀들을 막을 수가 없었지만 항상 따뜻하고 우아하고 부드러운 말만 할 거로 생각했던 인턴들은 인명진의 화내는 소리 한 번에 더 이상 앞으로 다가서지 못했고 자리를 피해 길을 열어 주었다.인명진은 재빨리 수술용 무균복으로 갈아입고 소독한 후 바로 수술실로 들어갔다.수술실 안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