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동생은 부 대표님 사람들 덕분에 잘 보살핌을 받고 있어요. 저는 대표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철수하고 싶지 않아요. 게다가 임무도 아직 끝나지 않았잖아요.” 희서는 등을 꼿꼿이 세우며 말했다. “송혜선이 부씨 가문에서 둘째 아이를 낳게 된다면, 대표님의 길에 큰 장애가 될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저는 떠날 수 있습니다.” 희서의 단호한 태도에 상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이제는 원신민과 직접 연락해. 황연지가 너에게 연락해도 대응할 필요 없어.” “알겠습니다.” 희서는 차를 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났고, 하연은 원신미를 대신해 직접 희서를 배웅했다. “우희서 씨, B시는 위험한 곳이에요. 만약 위험을 마주하게 되면 이 번호로 연락해요. 도와줄 사람이 있을 거예요.” 하연은 펜을 꺼내 우희서의 손바닥에 번호를 적으며 말했다. “꼭 기억해야 해요.” 희서는 하연을 바라보며 잠시 넋을 잃었다. 하연은 향긋한 향기가 나는 우아한 여성이었지만, 결코 쉽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희서는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최하연 씨인가요?” 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절 알아요?” “황연지를 만날 때마다, 황연지 씨가 항상 최하연 씨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고요.”연지가 하연을 언급할 때는 언제나 아쉬움이 가득한 말투였다. 왜 최하연은 이렇게 모든 것을 쉽게 얻었는지, 왜 자신은 상혁의 사랑을 받을 수 없었는지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곤 했다. 희서는 연지가 늘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조용히 듣고 있었지만, 그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오늘 하연을 직접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하연은 상혁과 완벽하게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둘은 마치 천생연분처럼 잘 어울렸다. 하연이 물었다. “황연지가 저에 대해 뭐라고 말했어요?” 희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연은 그 모습에 대충 짐작이 갔지만, 화내지 않고 부드럽게 말했다. “사랑하는 마
하연과 신가흔은 최씨 가문 저택 내에 있는 카페에서 만났다. 최하성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확인한 후, 가흔은 안심하며 말했다. “이건 내가 후배로서 할아버지께 드리는 작은 선물이야. 대신 전해줘.” 하연은 선물을 한 번 보고 나서 물었다. “할아버지가 가끔 너랑 하성 오빠를 언급하시는데, 직접 찾아뵐 생각은 없어?” 가흔은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상황에서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해외에서 지내는 동안 가흔은 더욱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변해 있었다. “내가 할아버지를 만나면 하성 오빠가 분명 날 찾을 거야. 우리끼리 만날 일은 없을 테니까,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아.” 하연은 이해하지 못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그렇게 하성 오빠를 계속 피하려고 해?” 하연이 DS그룹 홍보팀 직원들에게 들은 바로는, 하성이 그 당시의 여자 연예인과 관련된 사건은 단순한 해프닝에 불과했고, 별다른 문제도 없었다. 이후 공식 입장을 내고 해명도 했었다. 하성이 가흔에게 설명했을 테지만, 가흔은 끝내 떠나고 돌아오지 않았다. 가흔은 차분하게 말했다. “우리 사이엔 기본적인 신뢰가 없어. 서로를 의심하며 살아가는 게 너무 힘들었어.” 이 말에 하연은 대충 상황을 이해하고 커피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하성 오빠의 상태가 좋지 않아. 몇 달째 스케줄도 없고, 녹음실에 틀어박혀 곡만 쓰고 있어. 오빠도 분명 너를 많이 그리워할 거야.” 가흔은 슬며시 웃었지만, 그 미소는 금세 사라졌다. “사람마다 이별에 적응하는 시간이 달라. 시간이 좀 더 지나면 괜찮아질지도 몰라.” 가흔은 더는 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 화제를 바꿨다. “이번에 F국에는 무슨 일 때문에 온 거야?” “보석 복원 작업을 맡았어. 의뢰 금액이 엄청나게 높더라. 전 세계에서 이 복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세 명도 안 돼.” 하연은 놀라며 물었다. “네가 그 중에 한 명으로 뽑힌 거야?” 가흔은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도 식힐 겸, 잠깐 쉬면서 여행 좀 다녀볼까 해. 그러면 새로운 영감이 떠오르지 않을까 싶어서.”“오빠, 얼마나 오래 쉬려고 하는데?” “아직 모르겠어.” 하성은 휴지를 꺼내 손을 닦으며 말했다. “맞다, 들었어? 하민이 형이 형수님을 집에 데려왔다던데. 한번 봐야겠어.” 여전히 가벼운 말투였지만, 하연은 하성의 태도에 묘한 냉담함이 스며든 것을 느꼈다. 신가흔은 이번에 일주일 동안 이곳에 머물 예정이다. 하성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가흔의 행적을 조심스럽게 살피는 중이었다. 하연은 가흔이 잘 먹고 잘 쉬지 못할까 걱정돼, 집에 있는 요리사에게 음식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한 후 직접 가져가기로 했다. [우리 하연이는 참 마음이 따뜻해. 집에 있을 땐 밖에 있을 때처럼 일벌레 같지 않고 말이야.] 상혁이 전화 너머로 농담을 던졌다. “친구에게 잘하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하연은 호텔로 들어가며 말했다. 고개를 들었을 때,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름 아닌 부남준이었다. 그는 분주한 걸음으로 급한 일을 처리하는 듯 보였다. 하연은 로비에 앉아 가흔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렸는데, 예상보다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상혁은 일이 있다고 전화를 끊었고, 하연이 다시 고개를 들자 이번엔 정다영이 호텔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았고, 정다영은 하연을 알아보지 못한 듯했다. 하연은 본능적으로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부남준과 정다영이 연이어 들어오는 게 정말 단순한 우연일까?’ ‘하지만 두 사람이 이미 연인 관계라면, 호텔 방을 잡는 것도 이상할 건 없잖아.’ 고개를 살짝 저으며 하연은 애써 신경을 끊기로 했다. 괜히 생각을 더 이어가 봐야 자신만 피곤해질 테니까.두 시간이 지난 후, 가흔이 도착하며 미안한 표정으로 하연에게 사과했다. “연아, 미안해, 오래 기다렸지? 고생했어.” “별거 아니야.” 두 사람은 함께 방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가 3층에 도착했을 때, 하연은 다시 정다영의
“최하연 씨, 뭘 찾고 있길래 이렇게 열심히 인가요?” 하연이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바로 부남준이 서 있었다. 그는 편안한 차림으로 여유롭게 서서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연은 반사적으로 조금 전까지 닫혀 있던 문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그렇다면 부남준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정다영과 함께 있던 게 아닐까?’ “사적인 일이라 굳이 부남준 씨께 말할 필요는 없겠죠.” 하연은 침착한 척하며 남준을 지나치려 했다. 마침 그때 가흔이 하연을 불렀다. 하연이 걱정되서 그녀가 밖으로 나와 하연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하연아!” “여기!” 하연은 급히 가흔에게로 걸어갔다. 마치 무엇인가로부터 도망치는 사람처럼 보였다. 남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가흔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가흔은 그를 알아보지 못한 듯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누군데?” “상혁 오빠의 동생.” “아, 그 사람이구나.” 가흔은 남준을 한 번 더 찬찬히 바라보며 말했다. “부상혁이랑은 많이 안 닮았네.” 남준이 묘한 표정을 지으려는 순간, 하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떤 면에서는 꽤 닮았어.” ‘특히 집착적이고 어두운 순간들에서 말이야...’ 하연은 마음속에서 말을 덧붙이며 남몰래 차가운 시선을 내리깔았다.가흔은 아직 복원 작업을 끝내지 못해 시간이 더 필요했고, 하연도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다음에 다시 오기로 마음먹은 찰나, 하성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디야?] “밖이에요. 오빠가 새언니 보러 간다고 했잖아요.” [형수님이 오늘 일이 있다네. 끝나면 나랑 저녁 먹기로 했어. 지금 기다리는 중이야.] “그럼 오빠 나한테 전화는 왜 한 건데요?” [형수님이 너도 같이 오라는데? 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게.] 하연은 가흔과 눈을 마주쳤지만 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하성은 단호하게 말했다. [위치 바로 보내.] “큰일 났다.” 하연은 전화를 끊으며 빠
“하연아, 형수님이 너한테 물어보잖아.” 하성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하연을 쳐다보며 팔꿈치로 툭 건드렸다. “아니에요. 몸이 좀 안 좋아서요.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먼저 얘기하고 있어요.” 하연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밀고 나서자마자, 기다리던 부남준이 팔짱을 끼고 있었다. “딱 2분이네.” 그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행동이 꽤 빠른데? 오빠가 상처받을까 봐 두려운 건가?” 하연은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천천히 다가가 술병을 들어 술잔에 가득 따랐다. “부 상무님, 한 잔 받으세요.” 잔이 서로 부딪히자, 하연은 망설임 없이 잔을 들고 마시려 했지만, 남준이 잔을 붙잡아 내렸다. “이건 독주야. 그렇게 마시면 못 버틸걸.” 남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비록 술자리를 많이 하지는 않지만, 술자리 경험이 없는 건 아니야. 네가 나더러 술을 따라달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안 마셔?”남준의 눈은 이미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가 이미 술을 꽤 마셨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까지 나한테서 도망치고 싶은 건가? 내가 하라는 건 뭐든 다 할 정도로?” 그의 손아귀가 너무 강해 하연의 팔이 아파왔다. 화가 난 그녀는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안 오면 협박하겠다고 했잖아. 그래서 네 말대로 왔잖아. 그래도 아직 못마땅한 거야? 부남준, 도대체 뭘 원하는 데?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신가흔이 있는 곳을 하성 오빠에게 들킨다면, 제일 먼저 너를 탓할 거야.” 오빠와 친구, 둘 다 하연에겐 소중했다. 신가흔이 떠나고 싶어 한다면, 하연도 그 결정을 존중하고 보호할 것이다. 하지만 부남준이 이 일에 끼어드는 건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 뿐이었다. 화가 난 하연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손목에는 남준의 손아귀 때문에 자국이 남아 더 아프게 보였다. 남준은 갑자기 화가 풀린 듯 그녀를 놓아주고는 의자를 가리켰다. “나랑 식사 한
자신이 실언했다는 것을 깨달은 하연은 잠시 어색해졌지만, 곧 아무 일 없었던 듯 냉정함을 되찾았다. “축하 인사가 늦었지만 동생이 생긴 걸 축하해. 곧 그 애가 널 형이라고 부를 날도 머지않았네.” 남준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초의 불빛을 응시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 ‘내가 이렇게 유치한 생일을 마지막으로 보낸 게 언제였더라? 아마 유치원 때였던 것 같아.’ 송혜선은 아들의 생일을 챙기지 않았다. 그녀는 남자는 어릴 때부터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생일 같은 사소한 일에 얽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치원에서는 선생님이 남준의 생일을 기억하고, 반 친구들과 함께 생일 파티를 열어줬다. “소원을 빌어봐, 남준아.” 그때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는 남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아마도 매일 아버지를 보고 싶다는 소원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일을 알게 된 송혜선은 유치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곧바로 다른 유치원으로 전학시켰다. 엄격한 교육 아래에서 자란 남준은 친구를 사귈 기회조차 거의 없었다. 이후 그는 스스로 생일을 챙기는 일을 멈췄다. “무슨 소원을 빌었어?” 눈을 뜨자 하연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소원을 말하면 안 이루어진다던데.” 남준은 촛불을 불었다. “사실 그렇게 궁금한 건 아니야.” 하연은 몇 초를 기다리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생일은 챙겨줬으니, 이제 가볼게.” 하연의 핸드폰이 계속 진동을 했다. 아마 하성이 재촉하는 연락일 것이다. “잠깐.” 남준이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불렀다. 하연은 뒤를 돌아보며 그를 쳐다봤는데, 여전히 남준은 뭔가를 바라는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생일 선물은?” 그 한마디에 하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 ‘이 사람은 얼굴이 얼마나 두꺼운 걸까? 생일 선물을 대놓고 요구하다니.’ “생일도 챙겨줬으니까 작은 선물이라도 주고 가는 게 맞지 않겠어? 하연 씨?” 남준
몇 개의 테이블을 두고 있었고, 하연은 단지 정다영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이 여성이라는 것만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볼 때는, 경매 가능성은 없을 것 같아. 이 유물은 정씨 가문의 가보가 아닌 것 같아. 그렇다면 정다연 맞은편에 있는 저 여자가 바로 유물의 주인일 가능성이 커.” 가흔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가흔과 함께 방 하나를 잡고, 근처에 있던 웨이터를 불렀다. “실례지만, 옆 테이블에 있는 두 여성분이 커피를 시키셨나요?” 웨이터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나갔다면, 한 잔씩 더 리필 해준다고 하면서 다시 주시겠어요.” 하연은 말하며, 미니카메라를 웨이터의 옷깃에 몰래 고정하고 돈을 그의 주머니에 넣었다. “당신이 잘 해낼 거라 믿어요.” 웨이터는 잠시 망설였지만, 돈의 액수가 꽤 컸기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10분 뒤, 웨이터는 돌아왔고, 임무는 성공적이었다. 카메라 화면 속, 정다영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여자의 행동 하나하나에는 우아함이 묻어났고, 기품 있는 중년 여인의 풍모를 풍기고 있었다. 그 여자도 잠시 몰래 카메라를 쳐다보았다. 하연은 화면을 멈추고 가흔에게 물었다. “이 여자 본 적 있어?” “아니, 기억에 없는데.” 하연도 낯선 얼굴이어서 바로 그 여자의 사진을 찍어 하경의 이메일로 보냈다. [오빠, 이 사람 좀 조사해 줘.] 정다영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 게다가 F국에 흔적이 없는 사람이면 결코 평범하지 않을 터였다. 하연의 모든 연락은 하경의 특별 관리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기에 그는 곧 메시지를 확인하고 신원을 조회했다. [허징인. 현지인이 아니야. 원래 화교 출신인데 결혼하고 동남아로 이주해서 지금까지 거기에 정착했어.]하경이 전화로 빠르게 하연에게 필요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허징인을 왜 조사해?] 하연은 잠시 고민하다 물었다. “허징인의 남편은 누구예요?”
사람들로 북적이는 복도. 벌써 많은 이들이 몰려들어 웅성거리고 있었다. 누군가 놀라 소리쳤다. “피가 난다!” 하연은 다급히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커튼을 걷자, 화려한 귀부인 차림의 송혜선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녀의 허벅지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고, 상태는 심각해 보였다. “살인이다! 이건 살인이야!” 송혜선은 비명을 지르며 소리쳤다. “내 아이... 제발, 내 아이를 구해주세요!” 테이블 위에는 깨진 잔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실랑이가 벌어진 흔적이 역력했다. 조진숙은 침착하게 송혜선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119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태도는 단호했다.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억울한 일을 당했다면 곧 진실히 밝혀질 테니까. 내가 이렇게 만들지 않았어요... 여보세요, 여기는 XX로 카페입니다. 한 임산부가 유산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빨리 와주세요.” 전화를 끊고 나서도 조진숙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하연은 그녀 쪽으로 달려갔다. “진숙 이모, 괜찮으세요?” 조진숙은 하연을 보자 눈빛이 반짝였다. “하연아, 네가 여긴 웬일이니? 내가 이렇게 한 게 아니야. 그저 사고일 뿐이야...” 하지만 송혜선은 하연을 보더니 더 흥분하기 시작했다. “뭐야! 너희들! 이거 다 너희들이 짜고 한 짓이지! 너희들은 내 아이가 태어나면 상혁의 자리를 뺏길까 봐 두려운 거잖아! 상혁이가 혹시 너희들한테 이렇게 하라고 시켜서 이런 짓을 한 거지!” 하연은 송혜선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으려 했고, 조진숙을 한쪽으로 부축해 앉혔다. “이모,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조진숙은 두 손을 떨며 말했다. “송혜선 저 여자가 나를 초대했지만 내가 무시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찾아와서는 상혁이를 설득해서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하잖아. 만약 내가 송혜선 저 여자가 임신한 줄 알았다면, 만나지도 않았을 거야.” 하연은 조진숙의 자존심을 알았다. 아무리 화가 나고 원망스
하연은 파티 장소를 한 고급 프라이빗 클럽으로 정했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이라,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재력가나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밤이 깊어지자, 화려한 조명이 반짝이는 공간에서 단순한 싱글파티라기보다는 절친들끼리의 조촐한 모임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급스러운 좌석에 앉아 몇 잔 가볍게 마시던 중, 하연은 임신 중이라 과일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그때, 예나가 다가와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너도 결국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됐구나. 네 상혁 오빠랑 드디어 정식으로 부부가 되다니, 정말 부럽다.”그녀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덧붙였다.“반면에 나는 아직도 싱글이야.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혼자라니, 가끔은 나도 좀 서글프다.”여은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받아쳤다.“네가 서글픈 게 아니라, 애초에 연애할 마음이 없는 거겠지.”“내가 들었는데, 요즘 너네 가게에 어떤 남자가 매일같이 찾아온다며? 혹시 마음이 좀 움직인 거 아냐?”예나는 당황하며 급히 말을 잘랐다.“그럴 리가! 그냥 친한 친구일 뿐이야.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절대 아니야.”여은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키득거렸다.“진짜? 근데 왜 이렇게 부정하는데?”예나는 반박하려다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애 나보다 어리잖아. 그리고... 나 연하남이 별로야.”절친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하연은 흥미가 동했다.‘뭔가 재미있는 얘기가 나올 것 같은데?’“연하남? 이거 뭔가 숨겨진 이야기 있는 거 아니야?”여은은 재빠르게 하연에게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너 F국에 있어서 몰랐지? 이 둘, B시에서 꽤 핫했어.”그리고는 짧게 요점을 정리해서 들려주었다.“03년생 남자야. 올해 딱 스물두 살! 나이에 비해 성숙하더라구. 우리 예나, 아주 귀여운 연하남한테 꽂혔나 봐.”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예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헛소리하지 마!”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눈빛에
다영은 온몸이 떨렸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간절하게 답했다.“정말 아무것도 듣지 않았어요...”“정말이요?”남준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다영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 듯했지만, 입술을 꽉 악물고 끝까지 버텼다.“정말이에요.”남준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아까의 위압적인 분위기가 사라지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리고는 큰 손으로 여자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마치 겁에 질린 새끼 고양이를 달래듯 말했다.“긴장할 필요 없어요. 그냥 가볍게 물어본 거예요.”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영은 몸은 여전히 뻣뻣하게 긴장한 채로 있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남준을 살폈다.남자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자, 그녀는 간신히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큰일 날 뻔했어...’“그리고 남준 씨, 원래라면 설날연휴에는 나랑 같이 어머님께 인사드리러 가야 하는데...”그러자 남준은 흔쾌히 수락했다.“네... 당연히 그래야죠. 우리는 곧 부부가 될 사이잖아요. 원래 부부는 한몸이잖아요.”남준은 자연스럽게 말하며 그녀를 바라봤다.다영이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남준의 대답에 다영은 순간 놀란 듯 그를 다시 바라봤다.“남준 씨... 아직도 저랑 결혼할 생각이세요?”남준은 그녀를 당연하다는 듯 품에 끌어안았다.그리고는 여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나지막이 말했다.“당연하죠. 제가 당신을 두고 다른 사람을 선택할 것 같아요?”그 확고한 대답에 정다영은 가슴이 벅차올랐다.“난 그냥...”“그냥 뭐요?”남준이 여자의 말을 끊었다.“혹시 파혼이라도 할까 봐요?”“네.”다영은 작게 하고 끄덕였다.그러자 남준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럴 일 없어요.”그 말에 다영의 눈가가 붉어졌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남자의 품에 파고들었다.그리고 남준을 꼭 끌어안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역시... 남준 씨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아요.”남준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웃었다.남자의 손이 다영의 귀 옆
허징인이 상혁을 찾았다는 소식은 남준에게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두 사람이 만나지는 않은 것 같아. 물론 앞으로도 절대 마주할 일이 없을 테니까 별문제는 생기지 않을 거야.’남준은 마음을 다잡았지만, 속내에서는 의문이 피어올랐다.‘내가 오래 지켜본 부상혁이라면, 이유 없이 움직일 리가 없는데...’하지만 상혁이 허징인을 언급했다는 것 자체가 심상치 않았다.남준은 조용히 시선을 들어 상혁을 바라보았다. 상혁은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을 뿐인데, 그 자체로 압도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왕좌에 앉은 자처럼, 이 남자의 존재만으로도 숨이 막힐 듯한 위압감이 느껴졌다.‘혹시... 무언가 알고 있는 건가?’의심이 한 번 피어나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간다. 그러나 남준이가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급히 뛰어 들어온 부하가 숨을 헐떡이며 보고했다.“상무님, 교도소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남준은 정다영의 집에 인사를 가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옷깃을 정리하던 손이 멈춰 섰고, 표정이 굳어졌다.“무슨 일인데 그래?”부하는 다급한 얼굴로 모든 걸 털어놓았다.“정규인이 교도소에서 난동을 부렸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변호사를 불러서 항소재판을 열겠다고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남준의 표정이 급격히 변했다. 순식간에 부하의 멱살을 움켜쥐며 낮은 목소리로 윽박질렀다.“잘 갇혀 있던 놈이 왜 갑자기 그러는 건데?”부하는 당황하여 중얼거렸다.“혹시... 어쩌면 허징인과 그 아들...”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준이 단칼에 잘라버렸다.“말도 안 돼. 이 일은 우리 쪽만 알고 있어. 교도소 안에 있는 정규인이 대체 어떻게 알겠어?”부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맞습니다. 우리 쪽에서 철저히 감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외부와 접촉할 방법은 없습니다.”그러나 의구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정규인,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남준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멱살을 놓았다.‘이상한 일이 벌어지면 반드시
하미주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다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 수상했는데,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얼굴의 표정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어떤 상황이든, 그녀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 딸이 후회하지 않는 길을 가는 것. “다영아, 너는 마음이 너무 순진해. 제발,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구나.” 그러나 다영은 마치 그 말이 기분 나쁘다는 듯, 휙 손을 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엄마, 그런 말씀 이제 그만하세요.” 다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내 선택을 믿어요. 그리고 엄마도 나를 응원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만약 아직도 의심이 된다면, 내일 남준 씨가 오면 직접 물어보세요.” 하미주가 무슨 말을 더 하기 전에, 다영은 그대로 돌아서서 방을 나가버렸다. 딸이 사라진 자리에서, 하미주는 그저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설날 다음 날.아침부터 집사는 현관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곧장 앞으로 다가가 공손히 인사했다. “부 대표님.” 상혁은 무심하게 손목을 들어 올려, 소매 끝을 단정히 정리했다. 우아하면서도 여유로운 움직임.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 “어제 맡긴 일, 확인했나요?” 집사는 목소리를 낮추며 조용히 보고했다. “후원 CCTV를 확인한 결과, 어젯밤 그곳에 있던 사람은 남준 도련님이었습니다.” 상혁의 손이 멈추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마지막 단추를 여미고, 시계를 찬 후 말했다. “알았어요. 나가봐요.” 집사가 조용히 퇴장하자, 상혁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이미 남준이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상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답했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서로 마주 앉아 있었지만, 그 사이에 감도는 공기는 묘한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서둘러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정신을 바짝 차리며 정다영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마, 남준 씨가 아마 많이 바쁜가 봐요. 일 끝나면 꼭 세배하러 올 거예요.” 하지만 하미주는 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은 눈이 멀지 않은 이상, 최근의 분위기를 못 느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요즘 들어 사람들의 태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똑똑히 보고 있었다.지금 자신마저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힘이 빠진다면, 언제든 등을 돌릴 준비가 되어 있는 게 세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초에 하미주는 딸과 남준의 결혼 자체를 반대한 사람이었다. 하미주가 보기엔, 아무리 돈이 많고, 외형적으로 그럴듯해 보여도, 남준은 결국 ‘첩’의 자식이었다. 그런 가정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자랐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다영은 기어코 남준을 붙잡겠다고 난리였다. 그것도 마치, 그 남자가 아니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결국 정지철이 남준을 높게 평가하자, 하미주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거였다. 그래서 약혼까지는 허락했는데 예전엔 그럭저럭 신경을 써주던 남준이, 이제는 대놓고 얼굴도 안 비췄다. 하미주는 아주 불만이 많았다.‘명절에 처가집 한 번 들를 생각도 없는 사위가 과연 제대로 가정을 꾸릴 생각이 있을까? 말 다 했지.' 이렇게 생각하자 그녀는 딸의 손을 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다영아, 엄마가 하는 말 기분 나빠하지 말고 잘 들어. 이제 네 아버지가 그런 상황이니, 우리 집도 예전 같지 않아.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도 너도 잘 알고 있지?” 다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는 당연히 알았다. 아니,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더욱 필사적으로 버텨야 한다고 결심했다. 이 기회에 확실히 자리 잡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건 시간 문제일 테니까. “엄마, 집안 사정이랑 내 결혼은 상관없는 일이에요.” 하미주는 깊은 한숨을 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
상혁은 풍등을 들고 하연과 함께 마당으로 나왔다. 타이밍 좋게 하인이 라이터를 건네주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멀지 않은 곳에서 부남준이 조용히 고개를 내밀었다. 몰래 지켜보던 그는,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풍등을 펼치는 모습을 바라봤다. 상혁이 직접 가운데 심지에 불을 붙였다. 뜨거운 열기가 천천히 풍등을 부풀게 만들었고, 풍등은 두 사람 앞에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연아, 빨리 소원 빌어!” 하연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상혁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또 다른 소원을 빌었다. ‘언제나 우리 둘이 해마다, 해마다, 서로를 마주할 수 있기를.' “다 됐어요.” 하연이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 눈빛에는 반짝이는 빛이 서려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서서히 손을 놓았다. 풍등은 하늘을 향해 천천히 날아올랐고, 점점 멀어지더니 마침내 한 점이 되어 사라졌다. “어떤 소원 빌었어?” 상혁이 손끝으로 하연의 귓불을 살짝 어루만지며 물었다. 하연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깜빡이며 말했다. “소원은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대요.” “그래? 그럼, 네 소원이 꼭 이루어지길 바랄게.” 두 사람은 다시 눈을 마주쳤다. 상혁의 숨소리가 깊어졌다. 그는 하연의 턱을 살며시 잡고,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맞췄다. 조심스러웠던 키스는 점점 더 깊어져 갔다. 하연은 숨이 가빠졌다. 상혁을 밀어보려 했지만, 오히려 더 깊이 끌어안겼다. 여자의 허리는 유연하게 휘어졌고, 상혁의 등은 팽팽한 활처럼 긴장됐다. 결국, 하연도 상혁의 목을 감싸 안고, 키스에 응답했다. 그러나 그 순간, 불청객 같은 전화벨 소리가 분위기를 깨뜨렸다. 하연은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상혁을 밀어냈다.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전화 울리는데요?” 하연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있었다. 묘하게 사람을 간지럽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상혁은
다른 곳에서 있던 조봉규가 소란이 일자마자 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송혜선에게 다가가며 다급히 말했다. “설날인데, 뭐하러 이렇게 화를 내...” 조봉규가 입을 여는 순간, 남준의 온몸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남준의 시선이 날카롭게 쏘아붙었고, 조봉규는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애써 태연한 척하며 한 발 다가섰다. 송혜선의 팔을 조심스레 부축하며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건강이 우선입니다.” ‘건강?’남준은 손에 쥔 염주를 힘껏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간 손등에는 핏대가 서고, 눈빛은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시선은 서로 닿아 있는 두 사람의 손목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입가에 엷은 조소가 떠올랐다. “조 선생님, 참으로 열정적인 분이시군요. 설날에도 근무 태세를 유지하시다니.” 조봉규는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의 말 속에 담긴 조롱을 알아챘다. 그러나 겉으로는 한껏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머리를 숙였다. “별말씀을요. 환자의 곁을 지키는 게 제 본분입니다.” 남준은 가만히 조봉규를 노려보다가, 짧고 날 선 경고를 던졌다. “그렇다면 본분에만 충실하시죠. 여긴 부씨 가문의 본가이니까.”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남준아!” 송혜선이 다급히 나섰다. 남준을 나무라는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조봉규를 감싸려는 의도가 분명히 깔려 있었다. 남준의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송혜선은 오히려 기세를 올려 쏟아내듯 말했다. “네가 좀 더 나서서 잘했더라면, 부상혁한테 밀릴 일도 없었어! 내가 왜 조진숙한테 설날마다 굽신거려야 하냐고?” “지금, 어머니는 나를 원망하시는 겁니까?”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남준의 손에서 염주의 한 알이 ‘탁' 하고 부서졌다. “남준아!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송혜선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염주는 영적인 기운이 깃든 물건이야. 함부로 부수면 불길한 일이 생길
부동건의 말은 송혜선을 전적인 신뢰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면, 과연 부동건은 스스로를 어떻게 납득할까?’ ‘결국 속아서 살아온 날이 우스운 바보일 뿐...’ 조진숙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애틋한 사랑인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서류들, 가져가.” “나 다른 뜻은 없어.” 부동건은 조진숙의 단호한 태도에 살짝 주춤했지만, 곧장 다시 설득을 시도했다. “네가 아직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동안... 혹시 네가...” “착각하지 마.” 조진숙은 부동건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부동건은 한 발 더 다가섰다. “하지만 네가 이걸 받지 않는다면, 결국 날 아직도 원망하고 있다는 뜻 아니야?” 조진숙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슴 깊숙이 가라앉은 감정이 불쑥 떠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정리한 뒤,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부동건은 말없이 서류를 정리하더니, 숙련된 손놀림으로 만년필을 열어 조진숙 앞에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대답이었다. “후회할 거였으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어.” 이번엔 조진숙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펜을 들어, 서류 맨 아래에 단호한 필체로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부디 이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 부동건은 서류를 덮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마음속에 짓눌려 있던 무언가가 비로소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문득 나직이 말했다. “이제야... 후회한들, 이제 돌아갈 길도 없어.” 조진숙은 그 말에 가슴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끝내 시선을 돌렸다. 담담한 표정 속에 모든 감정을 삼키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 “이건... 다 정해진 운명이야.” ‘운명의 장난...’ ‘어쩔 수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제 뜻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부동건의 태도가 단호했다. 이를 지켜보던 부해철이 더 이상의 말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네가 마음을 정했다면, 내가 더 이상 뭐라 할 수도 없지. 다만, 앞으로 그 여자를 내 앞에 데려오지는 마라. 네가 어떻게 살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그리고...” 부동건이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지만, 부해철은 손을 휘저으며 등을 돌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뒷모습만이 남았다. ‘그렇게까지 반대할 줄은 몰랐네...’ 부동건은 묘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설날 온 나라가 한 해의 끝을 보내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 예전에는 늘 조진숙과 상혁 모자가 함께 보내던 명절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본가가 가까운 데다, 명절이 지나면 하연과 상혁의 약혼식이 있을 예정이었다.그래서 조진숙이 제안했고, 양가 가족들이 함께 부씨 가문에서 설날 저녁을 보내기로 했다. 그 덕분에 조진숙은 하루 종일 분주하게 준비에 매진했다. 그러나 제사가 끝나자마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진숙아, 새해 복 많이 받아.” 부동건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낮은 자세로 인사를 건넸다. 평소 같았으면 송혜선과 함께 명절을 보낼 사람이, 오늘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조진숙에게는 뜻밖이었다.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여긴 웬일이죠?” “잠깐 들렀어, 당신한테 할 말도 있고 해서.” 조진숙은 그의 시선을 따라 문득 집안 분위기를 둘러보았다. 송혜선이 이곳에 들어온 이후, 부씨 가문 본가는 한 지붕 아래에서도 철저하게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있었다.그 경계는 뚜렷했고, 불필요한 마주침은 없었다. 부동건이 송혜선과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후, 둘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만약 이번 일이 없었다면, 조진숙 역시 이미 오래전에 이 집을 떠났을 터였다. “들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