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사랑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아직 가늠하지 못했다.아무리 사랑한들 다른 여자와 낳은 아이마저 받아들일 수 있을까?어젯밤 부승민은 침대에 누워 이리저리 뒤척이며 온하랑과의 과거를 회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온하랑이 이 일을 받아들일 만한 이유를 찾지 못했고 점점 기분이 착잡해졌다.부시아를 옆에 두기로 결정한 사람이 부승민이다. 그런데 친딸이 밝혀진 마당에 다시 돌려보낸다는 게 부시아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될지 감히 생각할 수도 없었다.이엘리아는 부승민이 침묵하는 걸 보고 재빨리 입을 열었다.“온하랑 씨는 저랑 다툼이 있었어요. 시아가 그런 여자랑 같이 지낸다는 게 너무 신경 쓰이고, 무엇보다도 온하랑 씨를 엄마라고 부르는 게 싫어요.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자기 남편이 다른 여자랑 애를 낳았는데 좋아할 여자가 어딨어요? 시아를 키우겠다면 온하랑 씨랑 이만 헤어져요. 그게 싫다면 시아는 제가 데려가서 키울 겁니다.”“승민아, 시아가 네 딸인 걸 알잖아. 어제 내가 한 말을 잘 생각해 봐. 시아는 아직 엄마 아빠의 사랑이 필요한 나이야. 이엘리아 씨는 윌슨 가문의 아가씨이기도 하고 외모는 물론 몸매도 아주 좋잖니. 너랑도 잘 어울리고. 이참에 잘해봐. 시아가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게 너도 힘써야지.”부승민은 고개를 들더니 이엘리아를 무시한 채 곧장 부선월을 바라보며 싸늘하게 거절했다.“싫습니다. 하랑이가 시아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도, 정말 이것 때문에 헤어지더라도 이 여자랑 잘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요.”“그건...”부승민의 말은 이엘리아의 뺨을 때리는 것처럼 그녀에게 끝없는 굴욕을 안겨줬다.“도대체 온하랑 그 X은 너한테 무슨 수작을 부렸길래 이렇게 홀린 거니? 제발 정신 좀 차려.”부선월은 버럭 호통을 쳤다.“그만하거라.”김정숙이 상황을 수습하며 입을 열었다.“시아는 며칠 동안 여기에 있는 게 좋을 것 같구나. 넌 하랑이랑 한번 진지하게 얘기해 봐. 받아들인다면 좋겠지만 안 된다고 해도 별수 없지.”부승민은 씁쓸한
“말해봐.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야.”김시연은 더 이상 놀라지도 않았다.온하랑은 무거운 마음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이가 있었어.”“뭐라고?”그 말을 들은 김시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아이가 있다니?”“응... 나랑 결혼하기 전에 생긴 아이야. 너도 알아. 부시아.”“X발. 말도 안 돼. 시아가 부승민 씨 딸이라고?”“응...”“야, 부승민 씨 정말 너무한 거 아니냐? 어떻게 자기 딸을 데려와서 같이 키울 수가 있지? 이제 막 좋아하는 감정이 생겼는데 이런 걸 얘기해줬다고? 정말 미친 거 아니야? 누가 봐도 지금 널 가스라이팅 하는 거잖아. 잘못은 묻지도 말고 일단 아이부터 키워라? 이거잖아. X발. 듣기만 해도 화가 나는데 넌 오죽하겠냐.”“승민 씨는 시아의 존재에 대해서 몰랐던 것 같아.”“그 입 닥쳐. 이런 상황에서 승민 씨 편을 들고 싶냐? 또 이딴 소리 할 거면 당장 나가.”세상 난폭한 김시연의 모습에 온하랑은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그래서 누구랑 낳은 딸인데?”“이엘리야...”정말 듣고도 믿기지 않지만 현실이었다.너무나 충격적인 말에 김시연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두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언제 만난 거야?”“그건 나도 모르겠어.”“설마... 그 여자 이번에 돌아온 게 승민 씨 때문인 건 아니겠지?”“아마 그런 것 같아.”온하랑은 고개를 푹 숙였다.처음에 이엘리아는 부선월의 핑계를 대며 본가를 방문했다.부시아는 태어나자마자 부선월에게 입양되었으니 어쩌면 둘 사이에 일종의 거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게다가 온하랑을 향한 혐오의 감정이 극에 달한 시점에서 부승민과 둘이 잘되어 가는 것 같으니 이때다 싶어 출생의 비밀을 밝히며 이엘리아와 맺어줄 발판으로 삼았다.강남 BX 그룹의 대표와 필라시 윌슨 가문의 아가씨. 얼마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커플인가?“내가 그렇게 말렸는데도 끝까지 버티더니 이제 정신 좀 차릴 것 같아? 어쩌면 애가 있는 남자
“네. 알겠습니다.”부승민은 차창을 올리고 핸드폰을 꺼내 온하랑의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엄지손가락은 통화 버튼 주위를 한참 동안 서성였으나 끝내 움직이지 못했다.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부승민은 핸드폰을 거두고 운전해서 회사로 향했다.‘저녁에 돌아오면 사실대로 다 얘기해야지.’BX 그룹의 대표 사무실.업무 보고를 마친 연민우는 부승민 앞에서 쭈뼛거리며 나가지 않았고 정신 사나웠던 부승민은 서류를 훑어보며 무심하게 물었다.“무슨 일 있어?”“그게... 사모님이 다녀가셨습니다...”부승민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언제? 왜 왔는데?”“아마 대표님을 만나러...”부승민은 말을 잇지 못했다.그 말인즉 온하랑에게 회사에 있다고 말했을 때 거짓말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회사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면 어디로 갈까? 이변이 없는 한 무조건 본가로 갔을 것이다.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목이 타들어 간 부승민은 ‘퍽’하고 서류를 닫고선 되레 화를 냈다.“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 거야?”부승민은 곧장 운전기사에게 전화를 걸었고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재빨리 물었다.“아직 하랑이랑 같이 있어?”“아니요.”“회사에 왔었어? 그다음엔 어디로 갔는데?”부승민은 온하랑이 다른 곳으로 가길 바라며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본가로 가셨습니다.”기사의 답에 부승민이 숨이 막혀왔다. 가슴을 짓누르던 돌이 쿵 하고 떨어진 느낌에 절망감이 밀려와 정신이 혼미해졌다.그녀는 알았다.어쩌면 온하랑은 모든 걸 알고 있을 수도 있다...부승민이 아무 말이 없자 기사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본가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입구에 잠깐 서 있다가 바로 차에 돌아오셨습니다.”부승민의 입가에는 쓴웃음이 떠올랐다.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만 있다가 돌아갔다는 건 뭔가를 들은 게 틀림없다.“본가에서 나오고는 어디로 갔어?”“클래식 캐슬로 이동했습니다.”기사는 김시연이 살고 있는 동네를 말했다.“일단 알았어.”부승민은 곧바로 전화를 끊
온하랑은 침묵을 지키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맞아. 다 알게 됐어. 시아가 친딸이더라. 어쩐지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왜 난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던 거지?”“하랑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 널 속일 의도는 아니었어. 사실 나도... 어젯밤에 알았거든. 시아가 내 딸이라는 걸.”부승민은 떨리는 목소리를 억제하며 간신히 말했다.“그럼 이엘리아 씨랑은 어떻게 된 거야?”온하랑은 참지 못하고 조용히 물었다.아예 무시하는 것보다는 지금처럼 뭐라도 물어보는 게 낫다는 생각에 부승민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정말 맹세하는데 모르는 사이었어. 6년 전에 그 사고가 있기 전까지는.”6년 전 여름, 어느 칵테일파티에서 부승민은 갑자기 몸이 안 좋아졌고 누군가에 의해 약에 취했다는 사실을 깨닫고선 곧장 호텔 위층으로 올라가 잠을 청했다.마침 그가 정신을 잃었을 때 어떠한 여자가 나타나 그를 덮쳤다.그러나 이튿날 아침에 그가 일어났을 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혼자 덩그러니 침대에 누워있었다.부승민은 사람을 시켜 조사했지만 끝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고 그 여자는 한여름 밤의 꿈으로 남았다.오랫동안 조사했지만 그 어떤 단서도 발견되지 않았기에 점점 이 일을 방치하였고, 시간이 흐르며 완전히 잊어버렸다.어제 부선월이 이엘리아가 그날 밤의 여자라고 말했다.알고 보니 그때 당시 이엘리아는 강남에 놀러 왔다. 파티가 끝날 무렵 술김에 호텔 방을 착각했고 그렇게 사고로 부승민과 하룻밤의 관계를 가졌다.그 일이 있은 후 이엘리아는 충격과 공포에 사로잡혔고 부승민에게 알리는 게 무서워 재빨리 호텔 방을 뛰쳐나와 신고하려던 참에 부선월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알고 달려온 부선월은 재빨리 이엘리아를 설득했다.부선월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이엘리아를 위로했고 무조건 모든 흔적을 완벽하게 지우겠다며 약속했다.당시 이엘리아는 이제 막 스무 살이 되었고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공주처럼 자라온 보물 같은 딸이었다. 철없는 나이에 부선월의 말만 믿고 마음 편히
핸드폰 너머로 침묵이 흐리자 온하랑은 허탈함이 밀려왔고 애써 감정을 억제하며 말했다.“만날 생각 없으니까 돌아가.”“하랑아...”“진정할 때까지 시간을 좀 줘.”온하랑은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채 소파에 기대 눈을 감으며 생각을 정리했다.‘내가 정말 승민이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더 이상 어둠 속의 햇살 같은 존재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부승민을 사랑했다.‘난 시아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게 맞나?’비록 친딸은 아니지만 부시아는 활기차고 귀여운 아이다. 똑똑한 건 물론 예의까지 바르고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오며 이미 자기 딸로 생각하고 있었다.‘이 일이 정말 승민이의 잘못일까?’어쩌면 부승민도 계획에 이용됐을지도 모른다. 부시아 출생의 비밀에 대해 아예 모르고 있었으니까.‘시아는 무슨 잘못이지...’부시아는 더더욱 잘못이 없다.그동안 자신이 고아라고 생각하며 늘 예민한 마음을 갖고 자랐는데 부모를 선택할 수도 없는 상황에 아이를 탓하는 건 말이 안 된다.각자의 입장이 모두 이해가 됐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예전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힘들었다.온하랑은 극심한 갈등과 모순에 휩싸여 고통스러웠고 한편으로는 이런 상황이 너무 불편했다.바로 이때 핸드폰이 또다시 울렸다.한숨을 내쉬고 눈을 뜬 온하랑은 곧장 핸드폰을 집어 들었고 발신자를 보니 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전화를 끊었으나 그 순간 또다시 핸드폰이 울렸다.화가 머리를 끝까지 치솟은 온하랑은 버럭 호통쳤다.“시간 좀 달라고 했잖아. 그만 전화해.”“온하랑, 나야.”핸드폰 너머로는 피곤함이 덕지덕지 쌓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순간 흠칫 놀란 온하랑은 재빨리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발신자를 확인했다.추서윤이다.아버지 사건을 재수사한 결과, 장국호와 민성주의 자백을 받아냈고 추서윤은 2주 전에 이미 체포되었다.‘갑자기 왜 연락한 거지?’온하랑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추서윤이 다시 한번 물었다.“온하랑, 듣고 있어?”목소
온하랑은 즉시 차에서 내려 살펴봤다. 차 뒷부분은 완전히 박살이 났고 바로 뒤에 있던 흰 차도 비슷한 상황이었다.흰색 차주도 내려와 상황을 살펴보았고 심하게 망가진 두 차를 보고선 곧장 뒤로 가더니 뒤차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X발, 운전을 왜 이따위로 하는 거야?”검은색 차주는 벌벌 떨며 운전면허를 꺼냈다.“죄송합니다... 초보 운전이에요...”온하랑은 그제야 연속 추돌사고라는 걸 알았다.검은색 차가 흰차를 들이받았고 차간 거리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했던 흰차는 그대로 온하랑의 차를 박았다.검은색 차주는 재빨리 차에서 내려 바리케이드 두 개를 놓았다. 그렇게 세 사람은 길가에 서서 경찰과 보험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사건은 매우 간단했지만 일련의 절차를 거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경찰들이 상황을 정리한 후 온하랑은 부랴부랴 추서윤에게 갔지만 이미 면회 시간이 지난 지 오래였다.온하랑은 어쩔 수 없이 한숨을 쉬며 돌아섰고 내일은 기필코 제시간에 올리라 다짐했다....서수현은 요즘 점점 게을러졌고 아침에 일어나는 게 너무 힘들었다.하여 곧 인턴 기간이 끝나니 ‘조금만 참자’라는 마인드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버텼다.회사 로비에 도착한 시간은 8시 27분이었다. 서수현은 닫히는 엘리베이터를 보고선 종종걸음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잠시만요.”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서수현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서서 다음 엘리베이터가 빨리 오기를 간절히 기다렸다.조금이라도 지체하는 순간 지각이었다.그런데 이때 갑자기 엘리베이터의 문이 다시 열렸다.순간 두 눈이 반짝인 서수현은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탔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고마워요.”“아닙니다.”옆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뭔가 익숙했다.서수현은 곧장 고개를 돌려 옆사람을 바라봤고 반가움에 저도 모르게 인사했다.“매제!”말이 끝나자 엘리베이터 안은 쥐 죽은 듯한 정적이 흘렀고 부현승은 표정이 잔뜩 어두워진 채로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그럼 제가 처형이라고 불러야
“네?!!! 추서윤이 죽었다고요?”“네. 동기가 오늘 아침에야 발견했다고 합니다. 시체는 이미 부검실로 옮겼습니다.”“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온하랑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추서윤의 부고를 들은 온하랑의 마음도 묘하게 불편했다.사실 온하랑은 추서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하던 상황이었다. 그러던 오늘 추서윤이 갑자기 감옥에서 죽었다니 여간 수상한 게 아니었다.이 사건으로 온하랑은 추서윤을 믿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추서윤은 정말 다른 사람에게 철저히 이용당한 것이었다. 추서윤 뒤에 숨은 진짜 범인은 추서윤이 모든 사실을 발설할 것이 두려워 그녀를 처리해버린 게 분명했다.구치소에 갇혀있는 사람에게 손을 댈 수 있을 정도면 그 배후도 결코 만만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그 말인즉슨, 어제 연속으로 일어난 그 일들도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는 거다. 누군가 일부러 온하랑의 발목을 잡아두려고 일부러 벌인 짓이 분명했다.그럼 그때 검은 차랑 하얀 차 둘 중 어느 차가 그 배후가 보낸 차였을까?배후의 진범이 추서윤과 함께 아버지를 죽이려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온하랑은 의아함 섞인 놀라움을 숨긴 채 경찰서로 향했다.다행히 그녀의 휴대폰에 있는 녹음본 덕분에 온하랑은 간단한 조서만 쓰고 녹음본을 경찰 측에 넘긴 후 바로 경찰서를 벗어날 수 있었다.온하랑은 경찰서에서 걸어 나오며 생각에 잠겼다.“하랑아!”온하랑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부승민이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부승민 역시 추서윤의 부고 소식을 듣자마자 경찰서로 달려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 온하랑을 마주할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부승민은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온하랑의 앞에 다다랐다.온하랑은 입술을 오므리고는 물었다.“너도 추서윤이 죽었다는 얘기 듣고 온 거야?”“응.”부승민은 탐욕으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온하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그럼 너도 얼른 들어가 봐.”온하랑의 말투는 지
유치원.휴식시간이 되자 아이들은 유치원 한가운데 모여 웃고 떠들며 신나게 놀고 있었다.원장이 걸어와 아이들을 쭉 둘러보더니 이내 부시아를 발견하곤 웃는 얼굴로 아이를 불렀다.“시아 어린이, 엄마가 시아 보러 오셨는데 잠깐 선생님이랑 원장실 갔다 올까요?”그 말에 부시아의 두 눈동자가 반짝였다.‘숙모가 온 건가?’‘설마 삼촌이 숙모 드디어 꼬신 건가?’‘이제 숙모도 삼촌 안 싫어하나?’숙모가 지금 찾아온 건 혹시 부시아한테 속 얘기를 털어놓기 위해서일까?“네.”부시아는 큰 소리로 대답하고는 바로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타 밑으로 내려갔다. 아이는 짧은 다리로 원장과 걸음을 맞추며 고분고분 원장의 뒤를 따랐다.원장실 입구에 다다르자 원장은 부시아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엄마는 안에 계셔. 시아 어린이랑 엄마랑 얘기하는 데 방해되지 않게 원장님은 여기 있을게요.”“네. 고맙습니다, 원장 아줌마!”부시아는 고개를 들어 원장을 바라보며 예의 있게 말했다.“괜찮아요. 아유, 우리 시아 어린이, 착하기도 해라.”원장은 아이의 동그랗고 큰 눈망울을 바라보더니 저도 모르게 부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으로 감탄했다.사실 부시아는 부승민과 본처가 낳은 아이가 아닌 부승민이 결혼 전에 만났던 여자와 함께 낳은 사생아였다.전에 유치원으로 와 자신을 대표님의 조카딸이라고 소개했던 여자가 바로 부시아의 친엄마였다.그녀가 오늘 원장실로 찾아와 자신을 부시아의 엄마라고 소개하며 부시아를 만나고 싶다 했을 때, 원장은 의아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부시아의 아버지에게 따로 전화를 걸어 확인을 거치고 나서야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믿을 수 있었다.한껏 신난 발걸음으로 원장실에 들어선 부시아는 이엘리아를 마주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얼굴에 남아있던 웃음기가 사라지더니 걸음을 멈추고는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아줌마가 여긴 어쩐 일이에요?”“시아야, 엄마는 너 보러 왔지!”이엘리아는 자신을 마주하던 부시아의 표정 변화를 보자 순간적으로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