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수현이 마음속으로 투덜거렸다.나한테 물어보면 난 누구한테 물어보라는 거지?서수현은 일부러 아이의 달수를 한 달 줄여 말했다.“그 일이 있은 지 한 달밖에 안 됐는데 벌써 남자친구를 사귀었다고요? 아뇨. 저는 못 믿겠으니 그 남자더러 나와보라고 하세요.”“...”서수현이 극구 부인했지만 민지훈은 여전히 그녀의 배 속의 아이가 자기 것이라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매일 그녀에게 아침과 점심을 가져다주기까지 했다.특히 점심은 배달을 자주 먹는 것은 건강과 아이 모두에게 좋지 않다고 말하며 더욱 신경 써 챙겨주었다. 민지훈은 그녀가 아이를 남기기로 선택한 이상 반드시 그녀와 함께 양육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였고 서수현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머리가 터져버릴 지경이었다.아이는 확실히 그날 밤에 임신한 것이 맞다.하지만 그녀는 결코 진실을 말하여 부승민을 팔아버릴 순 없다.그렇지 않으면 매우 비참하게 죽어버릴지도 모른다.진실을 말할 수 없으니 서수현도 민지훈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몸이 되었다.그래서 지금과 같은 상황이 생겨버렸고 서수현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컴퓨터를 켜고 몇 분 동안 자리에 앉아 있다가 테이블 위의 아침을 들고 탕비실로 향했다.그녀가 아침 식사를 탁자 위에 놓고 막 떠나려 할 때 민지훈이 걸어 들어왔다.“마침 잘 왔네요. 여기 아침 식사 좀 챙겨가세요. 전 이미 아침을 먹었으니 앞으로도 챙겨오지 마시고요.”“서수현 씨, 우리 결혼해요.”민지훈이 불쑥 말을 꺼냈다.그러자 서수현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을 더듬었다.“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우리가 결혼하면 아이가 태어나도 완전한 가정이 있잖아요...”멀지 않은 곳, 복도 끝에 서 있던 부현승은 탕비실에서 서로를 잡아당기며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을 보게 되었는데 어렴풋이 “결혼”과 “아기”라는 말이 들려오자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평온하던 얼굴에도 점차 냉기가 감돌았다.그들이 탕비실에서 말을 나누는 것을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처음에는 썸을 타고 있어 몰래
곧이어 서수현은 생애 가장 절망스러운 말을 듣게 되었다.“서수현 씨, 잠깐 제 사무실로 오세요.”서수현은 입을 벙끗하더니 조용히 응할 수 밖에 없었다.“네.”옆에 있던 인턴은 궁금한 듯 부현승의 뒷모습을 흘끔거리며 물었다.“부경리님이 왜 수현 씨를 찾으시는 거예요?”“저도 몰라요. 그게 무슨 일이든 가보면 알겠죠. 먼저 갈게요.”서수현은 이미 죽음을 받아들인 듯 평화로운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이미 부현승이 그녀를 찾는 이유는 아마 사내 연애 때문일 것으로 추측했다.서수현은 민지훈과 사귄 적이 없다.하지만 지금은 연애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부현승이 먼저 사무실로 들어가고 서수현은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가 고개를 숙이고 다소 어색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경리님, 혹시 무슨 일로 저를 찾으신 겁니까?”부현승은 책상 뒤의 짐벌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 놓여있는 서류를 정리하며 담담하게 물었다.“당신이 면접을 볼 때 내가 당신에게 했던 질문을 기억합니까?”“기... 기억납니다. 사내 연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었죠.”서수현은 고개를 숙인 채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손에는 땀이 가득 차고 심장은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 미친 듯이 뛰었다.어쨌든 후회되는 건 사실이었다.민지훈에게 약병을 들킨 것이 후회되었다.아까 인턴이랑 얘기하다가 부현승에 들킨 것이 후회되었다.아마 부현승도 이것 때문에 그녀를 사무실로 불렀겠지.회사에서 가장 많이 접하는 사람은 동료와 팀장이다.그리고 부현승이라면 면접을 제외하고 정기 회의에서 두 번 만났을 뿐인데 그의 위세는 말로 이룰 수 없이 대단했다.“그렇다면 그때 어떻게 대답하셨었죠?”부현승은 서류를 한쪽에 놓고 양손을 깍지 낀 채 책상 위에 팔꿈치까지 올려놓고 서수현을 쳐다보았다.“... 회사에 취직할 수만 있다면 기필코 회사 규정을 지키며 사내 연애 따위는 절대 하지 않겠다고 했었습니다.”서수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무실은 숨 막힐듯한 침묵에 빠져버렸고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
서수현이 입가를 움찔거리며 묵인했다.왜 상상했던 대화와 좀 다른 거지?부현승은 그녀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뒤로 기대어 큰 손을 손잡이에 얹으며 의미심장하게 말을 꺼냈다.“예전에 우리 부문에 부경리 한 분이 더 계셨는데 2년 전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고 지금은 가정주부가 되어버렸죠. 매우 훌륭한 사람인데 참 안타깝게 됐네요. 사람, 특히 여자들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가정에 사로잡혀요, 그렇죠?”“경리님 말이 맞습니다.”부현승이 이 말을 한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서수현은 오히려 그의 말에 동의하는 편이었다.그래서 심사숙고 끝에 그녀는 아이를 남겨두고 결혼 절차를 생략하려는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그녀의 표정을 살펴보던 부현승은 그녀가 정말로 그의 조언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보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그럼 됐어요. 이만 돌아가세요.”부현승의 시선은 다시 컴퓨터 모니터로 돌아갔고 마치 여기서 야근을 하려는 듯한 모양이었다.“네?”서수현은 문득 고개를 들어 놀란 표정을 지었다.이게 끝이라고?“뭐가요? 물론 퇴근하기 싫다면 여기 남아서 야근하셔도 됩니다.”“아닙니다. 곧 돌아가겠습니다. 경리님, 안녕히 계세요.”서수현은 쏜살같이 도망갔고 그녀의 우스꽝스러운 뒷모습을 보자 부현승은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사무실을 나서자 서수현은 그제야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녀는 한바탕 혼나며 꾸짖음을 면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부현승은 그저 그녀에게 귀띔만 해줄 뿐이었다.앞으로는 아무래도 민지훈과 거리를 둬야 할 것 같았다.월요일에 출근했을 때, 서수현은 민지훈의 자리에 아무도 없는 것을 발견하고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설마 민지훈이 해고된 건가?그녀는 일부러 빙빙 돌려서 동료에게 슬쩍 물었다.“민지훈 씨? 지훈 씨라면 부현승 경리님과 출장 갔는데. 원래는 지훈 씨가 아니었는데 왜 갑자기 지훈 씨를 지목했는지는 나도 잘 몰라.”“아, 그래?”서수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강남시 국제공항 로비.
시간은 이미 점심시간이 되었고 부승민은 운전기사 더러 직접 모 식당으로 가라고 당부했다.웨이터는 두 사람을 2층 룸으로 안내하며 예의 바르게 메뉴판을 건네주었다.부승민은 이미 이전에 여기에 여러 번 왔었는데 아마도 자신이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에서인지 이번에 주문했을 때야 메뉴에 양고기 요리가 몇 개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온하랑은 메뉴를 보고 아무거나 몇 개 주문했다.부승민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웨이터에게 추가로 주문을 넣었다.“아 그리고 양고기찜과 양고기 갈비도 추가해주세요.”“대표님 안목이 좋으시군요. 이 두 가지는 우리 식당 메인요리입니다.”웨이터가 웃으며 메모해두었다.“너무 많지 않을까?”“괜찮아. 다 먹고 남으면 포장해가지 뭐.”부승민은 웨이터에게 메뉴판을 다시 건네주며 말을 꺼냈다.“됐어요. 이것뿐입니다.”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렇게나 잡담을 나누었다.부승민은 BX그룹의 모든 계열사와 스튜디오에서 출시할 신제품을 보여주며 온하랑에게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지 물었다.온하랑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그는 이제 온하랑을 안배하여 촬영 준비를 시작할 수 있다.만약 그녀가 잡지를 찍고 싶다면 그녀를 도와 추천해줄 수도 있다.온하랑은 그가 정말 진심으로 나올 줄 몰랐기에 조금 당황하는 듯 싶더니 그저 싱긋 웃어 보일 뿐이었다.“안 급해. 내가 정말 일자리를 구할 수 없을 때 다시 보자.”대략 10분쯤 후, 웨이터들이 들어와 준비된 음식을 내려놓았다.어찌 된 일인지 온하랑은 그 두 접시의 양고기를 보고도 별다른 식욕이 없었고 오히려 다른 요리만 몇 젓가락 들 뿐이었다.이를 본 부승민은 삶은 양고기 조각을 집어 온하랑의 접시에 담아주었다.“자, 이 집의 메인요리가 어떤지 맛봐.”온하랑도 잇달아 양고기를 입에 가져다 넣었다.그런데 그 순간, 강한 누린내가 코를 찔렀고 온하랑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렸다. 그녀는 젓가락을 집어 던지고 쓰레기통에 엎드려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연속된 헛구역질에 그녀는 방금 먹
웨이터가 막 나가려 하자 부승민이 다시 그녀를 불러세웠다.“잠깐만요. 맑은 죽 한 그릇 좀 빨리 가져다주세요.”“알겠습니다.”몇 분 후, 매니저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개봉하지 않은 고량주 한 병과 잔을 내려놓았다.“부 대표님, 사모님, 조금 전의 일은 이미 전해 들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주방장 측에서 요리할 때 제대로 신경 쓰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벌로 고량주 석 잔을 마시고 두 가지 음식을 더 제공하며 이 식사는 면제해 드리겠습니다. 어떠신가요?”예전에 부승민이 여기서 접대할 때, 매니저가 특별히 술을 따라주며 얼굴을 비춘 적이 있기에 그래도 말은 잘 통했다.“석 잔으로는 부족할 것 같은데.”“그럼 열 잔은 어떠신가요?”매니저의 예의 바른 모습을 보고 나서야 부승민은 안색이 조금 좋아지더니 다시 온하랑을 바라보았다.“하랑아, 넌 어떻게 생각해?”온하랑은 조금 전의 상황을 다시 떠올려 보았는데 양고기는 확실히 상한 것 같지 않았고 비린내만 조금 심한 것을 보아 단지 제대로 처리되지 않은 것 같았다.“그래요.”부승민이 다시 매니저를 한 번 바라보았다.그러자 매니저가 싱긋 웃으며 다시 인사를 올렸다.“사모님, 감사합니다.”말을 마치고 그는 자신에게 술을 따르기 시작했는데 잔이 넘칠 정도로 술을 가득 채워 넣었고 열 잔을 전부 들이켜자 매니저의 얼굴은 원숭이 엉덩이처럼 붉게 물들었고 그는 잔을 전부 비운 뒤 다시 부승민의 안색을 살폈다.“됐습니다. 대표님, 사모님, 두 분의 관대함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지금 당장 직접 주방으로 가서 그들이 게으름을 피우지 않도록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그러자 부승민이 손을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가봐, 다음번에도 이런 상황이 생긴다면 식당 문을 닫을 각오를 해야 할 거야.”“물론이죠.”매니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술병을 들고 룸을 나섰다.이윽고 2분도 안 되어 종업원이 맑은 죽 한 그릇을 가져다주었고 온하랑은 간단하게 죽과 담백한 반찬을 먹었다.같은 시각, 주방에 들어온 매
부시아는 이미 두 달 동안 온하랑을 보지 못해 그녀가 너무 그리웠다.오후 수업을 마치고 부시아는 평소대로 짝꿍과 함께 줄을 서서 유치원에서 나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그때, 짝꿍의 귀띔 소리가 들렸다.“시아야, 네 부모님께서 데리러 오셨어.”짝꿍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니 웬 남자와 여자가 차 옆에 나란히 서서 유치원생 무리를 살피고 있는 것이 보였다.검은색 셔츠에 양쪽 소맷부리를 걷어 올려 탄탄한 팔뚝을 드러낸 남자는 검은색 정장 바지에 가죽 벨트를 착용해 늘씬한 다리를 과시하는데 모델이 따로 없는 옷핏이었다.여인은 상반신에 늘씬한 흰색 레이스 블라우스를 입고 하얗고 정교한 쇄골에 은백색 목걸이를 하고 있었는데 겉으로 드러난 팔뚝은 하얗고 가늘어 마치 서리 눈처럼 희고 부드러워 보였다. 게다가 카키색 랩 스커트를 입어 훤히 드러난 두 다리는 희고 가늘어 마치 흰 눈과도 같이 맑았다.그들은 훈훈한 외모로 많은 학부모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심지어 어린아이들마저 두 사람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짝꿍은 부시아의 잘생긴 아버지를 한눈에 발견했다.아빠에게서 들은 바로는 부시아의 잘생긴 아빠가 엄청 대단하다는 것이다. 하여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부시아와 짝꿍이라는 말을 듣고 그녀더러 부시아와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며 신신당부했던 것이다.부시아는 온하랑을 발견하고는 초롱초롱 빛나는 두 눈으로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가 외쳤다.“숙모!”그러자 온하랑은 곧바로 몸을 숙여 그녀를 안아 들고는 아이의 작은 볼에 두어 번 입을 맞추었다.“시아야, 숙모가 돌아왔다. 숙모 보고 싶지 않았어? ”“보고 싶었어요!”온하랑이 막, 다시 무슨 말을 하려 하는 순간, 옆에서 갑자기 귀여운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시아야, 네 어머니 정말 아름다우시다.”부시아는 깜짝 놀라 온하랑을 바라보며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온하랑이 고개를 들자 웬 포동포동한 얼굴을 가진 어린 여자아이가 보조개를 자랑하며 밝게 웃고 있었다.“아, 칭찬해줘서 고마워. 너도 엄청 귀여워. ”
부시아는 자신이 이전에 같은 반 친구들 앞에서 온하랑이 촬영 대회에서 1등을 했다고 자랑한 기억이 떠올라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작은 손가락으로 종이 한 장 두께만큼의 제스처를 취했다.“조금 말했어요.”“앞으로는 비교하지 마, 알았지?”“네, 네!”부시아는 마치 병아리가 모이를 쪼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온하랑의 품에 파고들었다.그녀는 마음속으로 온하랑에게 점점 더 의지하게 되었다.‘숙모 너무 좋아! 숙모가 진짜 엄마였으면 좋겠어!’“숙모, 오늘 밤 나랑 같이 자요.”부시아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나 온하랑이 대답하기도 전에 부승민이 말했다.“안 돼.”“삼촌한테 물어본 거 아니거든요?”부시아는 온하랑의 품에서 머리를 내밀어 부승민을 노려보았다.온하랑과 함께 잘 수 있는 기회를 두고 저녁 식사 후 부시아와 부승민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너 이제 다섯 살이라 9월부터는 유치원에서도 언니 소리 듣게 되잖아. 근데 아직도 숙모랑 같이 자겠다고?”부승민은 소파에 앉아 허리에 손을 얹고 서 있는 부시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삼촌은 서른 살이잖아요. 그런데도 숙모랑 같이 자잖아요!”부시아는 무시하듯 입을 삐쭉 내밀며 말했다.“난 다섯 살인데 왜 안 돼요?”부승민의 어이없는 표정을 보고 온하랑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곧 부승민은 논리적으로 반박했다.“숙모는 내 아내야, 우리가 같이 자는 건 당연하지.”“두 사람 다시 결혼했어요?”부시아는 눈썹을 살짝 들어 부승민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혼인 신고서라도 있어요?”이 말에 부승민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온하랑의 웃음소리를 듣고 부승민은 그녀를 한 번 보며 눈 속에 감춰진 위험한 기운을 내비쳤다.그러자 온하랑은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오늘 밤은 나 시아랑 잘게.”그녀도 그 일은 즐기지만 최근 며칠 동안 하도 피곤했던 지라 조금 쉬고 싶었다. 어린아이는 포근하고 향기로운 데 반해 부승민은 온몸이 단단했다.“아싸!”신난 부시아는 소리
이렇게 말하며 온하랑은 옆에 누운 부시아를 살짝 바라보았다. 부시아는 눈을 감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 언제 깰지 모르는 일이었다.온하랑은 부시아가 이 장면을 목격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하지만 부승민이 아무 대답 없이 뜨거운 숨결을 그녀의 목덜미에 내뱉는 바람에 온하랑은 온몸이 소름이 돋았다.그는 그녀의 귓볼을 잡아 세게 빨았다.전류가 흐르는 듯한 짜릿함이 온몸을 스치자 온하랑은 몸을 떨며 발가락을 오므리고 목을 움츠렸다.순간, 온하랑은 깜짝 놀라 정신이 들며 급히 부승민의 손을 붙잡았다.“뭐... 뭐 하는 거야?”그러자 부승민이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좀 편하게 해줄게.”“하지 마...”“편하게 해주고 나서 잘 거야.”온하랑은 입술을 깨물었다.“안 돼, 지... 지금은 안 돼.. 시아가 옆에 있잖아... 제발...”하지만 머릿속에 하얀 빛이 번쩍이며 온하랑의 몸이 갑자기 경직되었고 그녀는 초점을 잃은 채 천장을 응시하며 거칠게 숨을 쉬었다.부승민은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고 물티슈로 그녀를 닦아준 뒤 조심스럽게 그녀의 위에서 내려와 침대의 다른 쪽에 누웠다.“자.”곧 피로가 몰려왔고 온하랑은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부승민이 온하랑을 공항에서 데려오던 같은 시간에, 이엘리아도 강남국제공항에 도착했다.도착 게이트에 오자마자 이엘리아는 그 익숙한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마치 옷가게의 마네킹처럼 키가 크고 균형 잡힌 체형으로 사람들 속에서 두드러져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이엘리아는 기뻐하며 그에게 인사하려고 다가가려 했다.그때 부승민의 뒤에 또 다른 모습이 나타났다.발걸음을 멈칫한 이엘리아는 안색이 어두워지며 서서히 주먹을 움켜쥐었다.그녀는 며칠 전 필라시의 담당자가 페이가 협력의 진상을 알아차리고 변호사를 선임해 먼저 고소하고 귀국했다고 말한 것이 떠올랐다.‘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이렇게 간단한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페이는 발끝으로 몰래 부승민에게 살금살금 다가가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