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질긴 노력 끝에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그는 그 순간의 심정을 뭐라고 설명하기는 힘들었지만, 어쨌든 기쁘기도 하고 흥분되기도 했다.이때 온하랑은 문득 무언가가 자신을 떠받치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숙여 확인하던 그녀가 깜짝 놀라 말했다.“부승민, 오빠…”“하랑아, 나도 모르게.”부승민은 낮은 소리로 속삭이며 왼손으로는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오른손으로는 그녀의 머릿결을 어루만지며 그녀의 뒤통수를 받쳐 들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앵두 같은 입술에 키스했다.온하랑도 두 손으로 그의 목을 감싸며 그의 키스에 응했다.그의 키스는 부드럽기도 하며 자제력이 있었다. 부승민은 자기의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감쌌다.그렇게 조금씩, 마치 진귀한 선물을 풀어헤치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고, 서로의 탐색으로 인해 온하랑의 마음도 마구 요동치기 시작했다.그녀는 곧바로 정신이 혼미해져 갔다.부승민도 갑자기 더욱 강하게 그녀에게 들러붙었다.그는 강하게 자신의 품속에 그녀를 가두었고, 큰 손으로 그녀의 민감 부위를 마구 자극하기 시작했다.온하랑은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고, 부승민의 열정적인 키스에 성공적으로 욕망을 불러일으켰다.그는 뒤로 한걸음 물러서며 등을 벽에 기대어 그녀와의 키스를 이어갔다. 그녀의 눈에는 이슬이 맺혔고 두 볼은 불같이 뜨거워지며 다리에 힘이 풀려 서 있을 수가 없었다.온하랑은 부승민에게 반쯤 안긴 채 안으로 들어갔고, 원피스의 자크도 이미 반쯤은 열린 상태였다. 바로 옆에 침실이 있었지만 부승민은 이미 인내심을 잃은 상태였다. 그는 바로 그녀를 거실의 소파에 눕혔다.부승민은 그녀의 치마를 한 번에 벗긴 뒤 옆으로 내던졌다.온하랑의 피부는 마치 껍질을 깐 삶을 달걀처럼 희고 부드러웠다.부승민은 더는 참을 수 없어 마치 늑대처럼 그녀의 살결에 입을 가져다 댔다.그녀는 두 눈을 감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온몸에는 마치 전류가 흐르듯이 찌릿했고, 두피까지 그 전율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문득 온하랑은 복부에서 개
“냉장고에 식자재 조금 있어. 굳이 사람 시킬 필요 없어.”온하랑이 말했다.“그래.”여름은 원래부터 더운 날씨 인지라 실내에서 에어컨을 켜고 있어야 한다. 거기에 그들은 조금 전의 운동 때문에 땀까지 난 상태라 온몸이 끈적거렸다.온하랑은 더는 참을 수 없어 침실에 들어가 깨끗한 옷을 들고 나왔다. 그러고는 욕실로 들어가기 전 그에게 한마디 건넸다.“나 일단 들어가서 씻을게.”그녀가 문을 닫기도 전에 부승민이 곧바로 뒤따라 들어갔다.“같이 씻자.”“…”그들은 거의 한 시간 동안 같이 샤워를 했다.밖은 이미 해가 저물었고 아파트에서도 하나둘씩 불을 켜기 시작했다.온하랑은 그에게 안긴 채 욕실에서 나왔다.부승민은 목욕 타월로 그녀를 감싼 채 침실 침대에 눕혔다.힘이 빠질 대로 빠진 온하랑은 눈을 감은 채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없었다.이윽고 부승민이 그녀에게 얇은 담요를 덮어주며 말했다.“나 옷 가지러 다녀올게. 갔다 와서 저녁해 줄 테니까 같이 밥 먹자.”온하랑은 겨우 나오는 목소리로 그에게 “응”이라고 답했다.부승민은 몸을 일으키며 거실로 나갔다. 그는 바닥에 버려진 셔츠와 그녀의 속옷을 주운 뒤 소파 끝자락에 올려두었다. 그러고는 바지를 입고 열쇠를 가진 뒤 바로 옆집으로 향했다.그는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다시 온하랑네 집에 돌아왔다. 그러고는 주방의 냉장고를 한번 훑어보았다.냉장고 안에는 신선한 채소, 가지, 그리고 냉동 새우가 있었다.부승민은 그 식자재로 채소와 가지를 볶았고, 새우도 삶았다. 그러고는 흰쌀 죽도 끓여 정교하게 테이블에 세팅해두었다. 그는 침실로 들어가 그녀더러 일어나 밥 먹으라고 했다.그 말에 서서히 눈을 뜬 온하랑은 겨우 침대에 일어나 앉으며 그에게 눈짓으로 옷 좀 가져다 달라고 했다.치마를 제대로 입고 바닥에 발을 내딛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리며 하마터면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그 모습에 부승민은 빠르게 그녀를 부축하며 걱정되는 듯 바라봤다.“괜찮아?”그러자 온하랑이 그를
부승민은 더는 강요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이윽고 온하랑이 그에게 강씨 가문과의 원한에 관해 물었다.부승민은 경찰서 압력으로 인해 사건을 대충 종결지으려는 것부터 말했다. 그러다가 장국호가 진술을 번복해 검찰이 사건을 재수사할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그는 이 모든 배후에 강씨 가문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도 한때는 강 씨 집안과 교섭할 방법을 찾았지만, 강씨 집안에서 부인한 나머지 협상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솔직히 이건 강씨 가문과 싸움에서 부승민이 이겼다고 볼 수 있다.강씨 가문에서는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할 능력이 없었고, 사건은 다시 경찰서에서 조사하게 된다.이번에 장국호와 민성주의 증언이 있으니, 추서윤 또한 절대로 법의 처벌을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하랑아, 미안해. 장인어른 죽음이 큰 형과 연관이 있어서 말이야. 이건 부씨 집안에서 너에게 빚진 거나 다름없어. 이 모든 게 장인어른을 위한 것이든, 큰형을 위한 것이든 나 자신을 위한 것이든 난 끝까지 이 일에 대해 밝혀낼 거야.”부승민이 진지하게 말했다.“다만 강씨 집안에서 왜 사건의 진상 조사를 방해하는지 모르겠어. 네가 장인어른의 딸이자 사건과 연관되었기도 하니깐, 갈등이 격화되면 네가 불리해져서 포기하려 하지 않을까 봐 그런 방법을 선택했을 수도 있을 거야.”온하랑은 마침내 부승민과 강씨 가문의 갈등 원인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부승민이 그녀와의 관계를 끊으려 했던 이유도 알게 되었다.솔직히 처음에 경찰서에서 사건을 종결하고 부승민이 검찰에 사건을 맡길 방법을 찾았을 때, 온하랑은 부승민이 부민재를 대신하여 살인 주모자의 죄를 추서윤에게 뒤집어씌우려 한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 말을 들은 뒤, 그녀는 점차 부승민에 대한 방어기제를 버리고 그를 믿기로 했다.그녀는 더는 의심하지 않고 그에게 말했다.“그렇구나, 누구를 위하든 간에 일단은 고맙네.”허심탄회한 이야기를 거치고 보니, 부승민은 그동안 확실히 그녀의 편에 서서 생각해주었었다.하여 조금 전 그녀가 거절
부승민이 웃으며 말했다.“온하랑, 너 이러기야? 네가 나 사진 찍는 건 되고 왜 나는 안 되는 건데?”“왜? 내 맘이야.”온하랑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답했다.부승민은 침대에 한쪽 다리를 꿇은 채 그녀에게 가까이했다.“어떻게 찍혔는지 한번 보자.”온하랑이 찍은 사진은 아주 느낌 있었다. 그 사진은 어제 사진 촬영하는 친구가 찍은 것보다도 더 매력적이었다.“괜찮지?”온하랑이 칭찬해달라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자 부승민은 눈썹을 치켜세웠다.“내가 이 사진을 잡지에 올린다면 어떨까?”“안돼.”온하랑이 칼같이 그를 거절했다.“왜 안 되는 건데?”그러자 온하랑이 핸드폰을 거두며 말했다.“경제 잡지에 올리려고 그러는 거잖아? 이 사진은 주제에 어긋나는 사진이야. 하지만 연예 잡지라면 생각해볼 수 있어.”이것은 그녀의 개인 소장이라 그녀의 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이윽고 부승민은 셔츠의 단추를 맨 위까지 잠갔다.온하랑은 그를 한 번 쳐다보더니 갑자기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뛰어갔다.“나 핸드폰에 배터리 없어 충전기 좀 가지러 가야겠네.”이상함을 느낀 부승민은 의자 등받이에 걸린 넥타이를 매며 매듭을 지었다.“오빠.”그녀의 소리에 부승민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찰칵.”온하랑은 카메라로 그의 모습을 찍었다.사진 속의 부승민은 넥타이를 매며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담담한 표정과 굳건함에 부드러움까지 띤 눈빛은 보는 이들을 절로 매료시켰다.그렇게 온하랑은 눈 뜨자마자 촬영 작업을 시작했다.그녀는 옷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맨발인 상태에서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미니 슬립을 입고 있었다. 온하랑은 둥글고 귀여운 엄지발가락으로 둘째 발가락을 누르며 카메라를 든 채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또 어떻게 찍고 싶은데?”부승민이 어이가 없는 듯 물었다.“나 신경 쓰지 말고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온하랑은 파파라치 샷으로 자신이 원하는 사진을 얻어내려 했다.부승민은 웃어 보이며 긴 다리로 화장실을 향해 갔다. 그의
햇빛이 그를 감싼 채 벽에 아름다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빛으로 인해 그의 조각 같은 이목구비가 더욱 돋보이는 것만 같았다.그 모습에 온하랑은 심장 박동이 더욱 빨라졌다. 그녀는 귀까지 빨개진 채 빠르게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그렇지, 계속 셔츠 단추도 풀어봐.”온하랑이 카메라 초점을 조절하며 말했다.부승민은 그녀가 말한 대로 넥타이를 풀고 반쯤 미소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썹을 추어올리고 아무 말 없이 천천히 가슴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그는 그녀를 유혹하고 있었고, 그의 흰 셔츠 단추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온하랑은 호흡이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것만 같았다.부승민의 탄탄한 가슴과 복근에는 투명한 물 몇 방울이 선을 따라 흘러내렸고, 천천히 그의 양복바지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그 모습을 본 온하랑은 숨죽이며 빠르게 셔터를 눌렀다. 그녀는 그 순간만큼은 자기 자신이 컨트롤 되지 않는 것만 같았다.이윽고 부승민은 양손으로 가슴 쪽의 천을 잡고 셔츠를 벗더니 땅에 내던졌다.그의 상체는 벌거벗은 상태였고, 하체는 양복바지를 입고 있었다. 평소의 부드러움과 우아함은 전혀 없이 그의 강인함과 야성미만 생생하게 드러났다.온하랑은 침을 삼켰고 입안이 말라 드는 것만 같았다.부승민은 가느다란 손가락을 가죽 벨트 쪽에 걸치더니, 반쯤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이것도 벗어?”“벗, 벗어도 돼...”그 말에 부승민이 눈썹을 치켜세웠다.“진짜지?”그는 온하랑이 대답도 하기 전에 양복바지 단추에 손을 얹더니 엄지와 검지를 비틀어 단추를 풀었다.그다음은 지퍼까지도...그렇게 검은 양복바지가 그의 허리에 느슨하게 걸쳐져 있었다.온하랑은 심호흡을 하고 주위를 둘러보며 한 모퉁이를 가리켰다.“저기 앉아봐.”부승민은 그녀의 말대로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뒷머리를 벽면에 대고 턱을 살짝 치켜세웠다. 게다가 눈은 가늘게 떴는데, 햇빛 아래에서 보니 눈동자가 깊은 갈색을 띠어 깊고 매혹적으로 보였다.그렇다, 그의 지금 모습은 너무도 멋
부승민이 담담하게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여전히 멈출 줄 몰랐고 눈빛 또한 차갑기 그지없었다.“아니요.”그 말에 이엘리아는 얼굴이 굳어지며 다급히 그에게 설명했다.“잊었어요? 저희 시테니 비행기에서 한번 봤잖아요. 그때 바로 제 옆에 앉으셨잖아요.”“죄송합니다. 제가 기억이 안 나서요.”부승민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남자 화장실로 들어갔다.그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차가웠다.그런 그의 모습에 이엘리아는 실망스럽고 짜증도 났지만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그녀는 남자 화장실 문에서 몇 분 동안 기다렸다가 젖은 손으로 나오는 부승민을 보고 재빨리 그를 막아 나섰다.“기억 못 해도 괜찮아요. 지금부터 알아가면 되죠. 저는 이엘리아 윌슨이라 해요.”이엘리아는 자신의 성씨를 강조하며 말했고 턱을 추켜올렸다.부승민은 잠시 멈춘 채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두 번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아 생각났다.”“진짜요?”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마음속으로는 약간의 경멸감과 시큰둥함이 생겨났다.‘조금 전까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다가 이름을 말한 뒤에야 공교롭게 기억해내다니!’그녀는 부승민이 다른 사람들과 다를 줄 알았는데, 그도 왠지 아부하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고 느꼈다.이윽고 부승민이 담담하게 웃어 보였다.“기억나네요. 그때 비행기에서도 지금처럼 눈치 없이 행동했었죠? 제가 대꾸조차 하기 싫었는데, 그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더라고요.”부승민의 말에 그녀는 얼굴이 굳어졌다.“당, 당신 감히 날 모욕해? 당신 내가 누군지 알기나 해?”부승민은 응석받이로 자란 것만 같은 그녀를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그녀를 무시한 채 앞으로 걸어갔다.이엘리아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그녀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아무도 감히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지 못했다.즉, 부승민에게는 윌슨 가문이란 자체가 안중에도 없었다.한편 멀지 않은 룸 문 앞에서 부선월이 그 광경을 지켜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그가 대체 누구길래 윌슨 가문을 감히 안중에도 두지 않는지 궁금해졌다.“네, 빠르게 확인해 보겠습니다.”매니저가 답했다.이엘리아는 매니저 사무실에서 나와 자신의 룸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돌아가면서 지형을 살핀 뒤 룸에 가서 창문을 열고 창문 앞 소파에 앉았다.그녀의 자리에서 정확히 203번 룸 문을 볼 수 있었다.이때 앨리스가 이해할 수 없는 듯 물었다.“이엘리아, 창문은 왜 열었어?”“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더워서 조금 열어놓으려고.”이엘리아가 담담하게 말했다.과거의 남자들은 그녀의 신분을 안 뒤로는 모두 그녀에게 잘 보이려 했었다. 하여 그녀는 항상 콧대가 높았고, 겉으로는 그들을 싫다고 하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사람들이 자신을 추켜세우는 것을 매우 즐겼다.그런 그녀가 지금 남자에게 먼저 말을 걸었는데, 상대방이 그녀를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자신의 가문을 말한 뒤에도 그 사람이 자신을 비꼬기까지 했으니, 정말 수치스럽지 않을 수 없다!이런 사실을 이엘리아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겠는가?“아, 그래? 그럼 열어두지 뭐.”이엘리아는 멍하니 몇 분 동안 여러 번 창밖을 내다보았다.앨리스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몇 번이나 밖을 내다보았으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이엘리아, 뭘 보고 있는 거야?”“아무것도 아니야.”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203번 룸의 문이 열렸고 부승민이 안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문을 닫지 않고 문 앞에 멈춰 선 채 안에 있는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앨리스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며 궁금해 물었다.“이엘리아, 아는 사람이야?”이엘리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한 여성이 그 안에서 걸어 나왔고 그녀의 모습은 왠지 낯익은 것만 같았다.부승민은 능숙한 동작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고, 두 사람은 나란히 선 채 웃고 떠들며 자리를 떠났다.그 광경을 본 이엘리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두 사람을 음울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잠시 질투심을 느꼈다.이엘리아는 문
하지만 이엘리아는 레스토랑에서 봤던 장면이 떠올랐다.부승민은 불필요한 움직임 없이 능숙하게 그녀의 손을 잡았고, 그 두 사람 사이에는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친밀감이 있었다.그녀는 그 모습에서 그와 페이가 아주 가까운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윌슨 가문의 장녀인 이엘리아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 그녀를 좋아하고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았지만, 그녀는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이제 마침내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는 남자가 생겼는데, 그 남자는 이미 임자도 있는 몸에 자신에게는 관심도 없었다.이엘리아는 절망에 빠져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심장에 큰 돌이라도 박힌 듯 뻐근하고 아팠다.그녀는 인터넷으로 부승민이 강남 출신에 BX 그룹도 강남에 있다는 것을 보았다.때마침 그녀의 삼촌네 가족도 강남 출신이다.그 순간 이엘리아는 약간의 후회감이 들었다.‘예전에 엄마가 강남에 가서 잠시 머문다고 했을 때 왜 같이 따라가지 않았을까?만약 그때 강남에 갔다면, 내가 먼저 부승민과 알 수 있지 않았을까?’기분이 좋지 않은 이엘리아는 술 한잔하자고 앨리스를 불렀다.앨리스가 도착했을 때 이엘리아는 이미 술을 마시고 있었고, 테이블 위의 술병에는 이미 술이 절반도 채 남지 않은 상태였다.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얼굴에는 슬픔이 쓰여 있었다.이윽고 앨리스가 그녀를 떠보며 물었다.“왜 그래? 누가 우리 아가씨 기분을 상하게 했을까?”“그런 거 아니야. 그냥 기분이 안 좋을 뿐이야.”이엘리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들며 잔을 비웠다.이윽고 앨리스가 뭔가 짐작이 가는 듯 물었다.“기분이 좋지 않다고? 설마 오늘 점심때 레스토랑에서 본 그 남자 때문이야?”그 말에 이엘리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앨리스는 그녀의 모습에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알아채고 눈알을 굴렸다.“솔직히 말해서, 난 페이가 그 남자와 함께 가는 것을 보고 마음이 놓였어. 적어도 네 오빠와는 이루어지지 않은 거잖아. 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