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문 끝에 민성주는 이 일을 지시한 사람이 이환이라는 깡패라고 솔직하게 자백했고 또 끈질기게 조사한 결롸 진짜 배후의 사람은 임연지라는 사실을 알아냈다.이 시각 임가희와 임연지는 아직 강남에 남아 있었고 최국환은 경주로 돌아갔다.그는 자신이 강남에 오래 머무를 수 없기에 두 사람은 여기에 남아서 어떻게든 온하랑에게 사과해서 관계를 회복하라고 당부했다.경찰은 임연지가 묶고 있는 호텔 위치를 알아냈고 추적해 본 끝에 아직 호텔 방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뒤 곧바로 찾아가서 체포하기로 했다.워낙 비밀리에 조사되었고 또한 온하랑도 쭉 집에 있었던 탓에 임연지는 자신이 계획한 일이 성공했다고 생각하고는 마음껏 먹고 마시고 밖에서 놀다가 지쳐 그제야 호텔에 돌아와서 쉬고 있었다.그러다 누군가의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무심결에 문을 열어줬는데 눈앞에는 두 명의 경찰 제복을 입은 사람이 엄숙한 표정으로 서 있었고 뒤에는 호텔 매니저도 같이 있었다.순간 임연지의 심장 박동이 빨라지면서 반사적으로 문을 닫으려 했다.하지만 가만히 보고 있을 경찰이 아니었다.그들은 냉큼 문을 박차고 방 안으로 들어간 뒤 임연지 손에 수갑을 채웠다.“임연지 씨 맞죠? 저희는 경찰입니다. 지금 당신이 인신매매 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고 있으니 저희랑 같이 가서 조사받아야겠습니다.”“대...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요! 저랑 아무런 상관이 없거든요. 당장 이 수갑 풀어요. 아니면 절대 당신들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임연지는 억울한 척 일부러 그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상관이 있는지 없는지는 가서 조사해 보면 알겠죠.”두 경찰은 그대로 그녀를 끌고 방문을 나섰다.“당신들 혹시 내 고모부가 누군지 알기나 해? 알면 감히 날 이렇게 잡지 못할 것이고 반드시 후회할 날이 있을 거야!”“당신 고모부는 고사하고 설령 아버지가 서정훈이라고 해도 소용없어요!”그중 젊은 경찰인 이동휘가 그녀에게 큰 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서정훈은 연도진의 삼촌이다.이번 인신매매 사건
아무리 임가희가 뭐라고하던 두 사람은 들은체도 하지 않고 그녀를 한쪽에 밀친 뒤 그대로 임연지를 끌고 갔다.하지만 임가희는 끈질기게 그들의 뒤를 쫓아가더니 이동휘를 붙잡고 사람들에게 호소하기 시작했다.“여러분, 좀 도와주세요. 이 사채업자 놈들이 시퍼런 대낮에 경찰을 사칭해서 우리 조카를 끌고 가려고 해요! 이게 어디 말이나 됩니까?”“돈을 빌린 건 저 애 아버지인데 우리 연지랑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돈 빌려간 사람을 찾아가야지 우리 연지는 왜 끌고 가냐고요!”호텔 로비에서 임가희의 울부짖는 소리 때문에 금세 구경꾼들이 몰려왔다.임가희는 위에 정장 재킷에 아래는 펜슬 스커트를 입고 있었고 목에는 얇은 스카프 하나를 둘렀다. 그리고 머리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잘 정리되어 귀부인의 느낌이 흠씬 풍겼는데 딱 봐도 품위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그런 사람이 억울함을 호소하니 다들 쉽게 믿는 눈치였다.이동휘는 임가희를 또다시 밀치며 말했다.“저리 꺼져. 경고하는데 한 번만 더 내 앞을 막으면 그때는 진짜 당신도 같이 체포할 거야!”이때 구경꾼 중에 웬 아저씨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앞에 나와 한마디 끼어들었다.“정말 깡패예요? 이건 너무 하잖아요. 누가 빌렸으면 그 사람한테 가서 따져야지 이토록 연약한 아가씨를 잡아가서 뭐하려고요? 저 겁먹은 모습 좀 보세요. 그리고 감히 경찰을 사칭하다니, 제가 이미 신고했으니 두고 보세요!”“저 여자 말에 속은 거예요. 저희는 진짜 경찰이고 저 여자는 지금 범죄 사건에 연루되어서 체포해 가는 것뿐이에요.”“저 여자가 무슨 범죄를 저질렀는데요?”“납치 사건이요.”“납치요?”그 아저씨는 듣자마자 너무 어이없는 나머지 웃음이 터져 나왔다.“오히려 그쪽이 납치하려는 것처럼 보이는데요?”경찰들은 할 말을 잃었다.“...”임가희는 임연지가 진짜로 이 일에 가담했다고 생각했고 일단 경찰들에게 연행되고 죄가 확정되면 그야말로 끝장이라고 생각했다.하여 어떻게든 임연지를 잡아가지 못하게 만든 다음 당장 외국으
“제가 신고했어요.”김인우는 자진해서 한 발짝 나서며 말했다.“저 사람들이 경찰을 사칭해서...”“사칭은 개뿔!”오민석은 냉큼 일어나더니 김인우에게 수갑을 채우며 욕설을 퍼부었다.그리고 자신의 경찰증을 보여주며 말했다.“안녕하세요. 저는 블루 베이 지방 경찰서 오민석이고 지금 공무집행 중입니다. 용의자들의 교활한 수법을 쓰는 바람에...”그는 일부러 옆에 서 있는 김인우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그리고 오지랖이 넓은 어떤 사람 때문에 지금 용의자들이 도망친 상황인데 빨리 사람들을 불러서 뒤쫓아야 합니다.”금방 온 세 명의 경찰들은 그가 내민 경찰증을 보더니 김인우에게 물었다.“이 경찰증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데요?”김인우는 어리둥절한 나머지 온몸이 굳어졌다.“문... 문제가 없다고요?”경찰들은 그의 물음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용의자가 아마 너무 멀리 도망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세분은 왔던 참에 저희를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네.”그렇게 경찰들은 임연지가 도망쳤던 방향으로 뒤쫓아갔다.떠나기 전에 이동휘는 잊지 않고 김인우에게 경고까지 날렸다.“당신은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어. 내가 저 사람들을 잡으면 다음은 당신이니까. 아까까지 정의감이 넘치고 좋은 사람인 척했잖아? 만약 이후에 납치 유괴 사건이 또 발생하면 그건 바로 당신이 오늘 범죄자들을 잡지 못하도록 방해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명심해!”김인우는 그의 경고가 두려웠던 나머지 재빨리 강남에서 도망쳤다. 다행히 그는 단지 이곳에 여행 온 여행객이었다.다만 그 젊은 아가씨가 진짜로 사람을 납치 유괴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정말 외모만 보고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다시 한번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시간이 흘러도 가끔 그 인신매매 아가씨는 붙잡혔는지 궁금해지기도 했다.만약 아직도 못 잡았다면...비행기 티켓을 구매할 시간도 없었기에 임가희네는 고속도로를 향해 질주할 수밖에 없었다.오민석은 더 이상 이렇게 쫓아가는 건 무리라고 판단해서 재빨리 서
‘근데 지금은 왜 이렇게 변했을까?’‘아무리 전 남편한테 가정폭력을 당했다고 해도 이미 그 사람은 죽었는데 자식은 무슨 죄란 말인가?’‘왜 친딸을 이렇게까지 냉정하게 대할까?’“연지가 감옥에 가게 되어서 오빠한테 미안하다고? 그럼 이런 나쁜 아이로 가르친 건 오빠한테 안 미안해? 이제 동림이더러 일 없으면 그냥 기숙소에 있으라고 해야 겠네!”최국환이 말했다.이건 임가희랑 최동림을 만나지 못하게 하려는 심산이다.임가희는 심장이 순간 내려앉는 것 같았다.“국환 씨, 동림이는 아직 어린 데다가 천식까지 있어서 곁에 엄마가 없으면 안 돼요...”“도우미가 있어서 괜찮아. 그리고 그만하면 나이가 어린 것도 아닌데 이제 슬슬 독립해야지.”최국환은 뒤돌아서 걸어가며 말했다.“지금 당장 나랑 같이 돌아가. 그리고 내일 부씨 가문에 가서 사과할 준비나 해. 또한 연지를 감옥에서 구해낼 생각은 꿈도 꾸지 마. 이번 일로 큰 사건까지 연루되어 위에서 사람들을 많이 보냈다고 하니까 쉽게 꺼내기 힘들 거야.”임가희는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하지만 아까 임연지가 자신의 팔을 잡고 울먹거리던 게 자꾸 생각나 다시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자기 친딸과는 어릴 적부터 떨어져 있었고 그 대신 임연지가 커가는 모습은 곁에서 다 지켜본 사람이라 진작에 임연지를 자기 친딸처럼 생각했다. 근데 어떻게 그녀가 감옥에 잡혀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겠는가?최국환은 구해줄 마음이 없는 것 같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온하랑은 짬을 내서 경찰서에 들렀다.그리고 민성주 배후의 사람이 임연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전혀 놀라지 않았다.경찰이 낮은 소리로 그녀에게 당부했다.“온하랑 씨,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 사건을 위선에서도 매우 중시하고 있으니 아무리 임연지 씨가 배경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법의 망은 벗어날 수 없게 되었어요.”“감사합니다.”“참, 온하랑 씨가 오게 되면 한번 만나고 싶다고 했는데요.”온하랑
경찰서에서 나오자마자 온하랑은 부씨 가문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게 되었다.전화기 너머에서 할머니 오순자의 걱정스러운 말소리가 들려왔다 .“하랑아, 엊그제 그렇게 큰일이 있었는데 왜 할머니한테 말하지 않았니? 네가 하마터면 못 돌아오는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데! 할머니한테 서운한 일이 있는 건 아니지?”온하랑이 냉큼 답했다.“아니에요. 제가 할머니한테 무슨 서운한 일이 있겠어요. 그냥 걱정 끼쳐 드리기 싫었을 뿐이에요.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요.”“난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쉽게 놀라는 나약한 늙은이가 아니야. 네 오빠의 일도 나한테는 숨기고 네 일도 나한테 숨기는데 내가 투명 인간이랑 다를 게 대체 뭐야!”“투명 인간이라니요, 이번에는 제가 잘못했어요. 이제부터 무슨 일이 있으면 꼭 제일 먼저 할머니께 말씀드릴게요.”“넌 항상 이쁜 말로 할머니를 달래주네. 참... 오늘 최씨 가문에서 전화가 왔었는데 내일 우리 집에 사과하러 오고 싶대. 할머니는 그 사람한테서 네가 납치될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거든. 최국환 두 번째 아내가 네 친어머니잖아, 그럼 너를 납치 유괴하려 했던 사람이 네 사촌 언니인 거야? 진짜 무서운 사람이네. 그래서 할머니는 네 의견이 듣고 싶어. 네가 만약 거절하면 내일 그 사람들을 오지 말라고 할 거니까.”최씨 가문에서 본가에 직접 전화를 걸었다. 어쩐지 할머니가 이 일에 대해 알고 있었다.온하랑은 아까 임연지의 태도를 떠올리며 할머니에게 말했다.“할머니, 그냥 그 사람들을 오지 말라고 해요. 어쩌면 최 회장님은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어 하겠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만나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요.”‘진심 어린 사과는 개뿔.’사실 김정숙도 만약 그들이 부승민과의 친분이 없었다면 또 온하랑이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최국환 같은 사람이 직접 사과하러 올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아니면 진작에 임연지를 감옥에서 구해냈을 것이다.“그래. 그렇게 전할게.”“네.”전화를 끊은 뒤 온하랑은 과일 바구니를 들고 김
안미영은 온하랑과 수다를 좀 더 떨다가 본가에서 나온 뒤 임대료도 받을 겸 백화점에 들렀다.둘째 삼촌의 요식업 회사 외에도 안미영은 몇 채의 아파트와 점포들을 갖고 있었고 모두 세를 준 상태였다. 그리고 이제 월말도 되었으니 임대료를 받으러 가야 했다.안미영네 아파트와 점포들은 대부분 고급단지와 번화거리에 위치했고 세입자들도 모두 몇 년씩 계약을 맺었던 탓에 집세는 반 년치 혹은 1년 치씩 결제했다. 단지 한 지역의 아파트만 약간 평범했는데 위치는 대학교 근처에 있었고 세입자가 돈이 많이 궁한지 집세를 달마다 결제하겠다고 했다.안미영은 원래 매달 돈 받으러 가기 번거로웠던 탓에 그 세입자에게 집을 내주기 싫었지만 대학교 재학 중인 서수현이 늙고 병든 아버지를 간호한다는 소리에 측은하고 기특한 마음이 들어 그냥 계약했다.말 그대로 서수현은 참 효심이 깊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지난번에는 자신이 직접 한 고구마튀김을 가져왔는데 비록 고급진 음식은 아니어도 그 마음이 너무 예뻤다.그 낡은 아파트는 6층 건물이었고 서수현이 계약한 집은 1층이어서 매우 편리했다.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안미영은 문을 두드렸다.“잠시만요.”집안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서 금방 문이 열렸는데 서수현이 고개를 내밀고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이모, 어서 들어오세요.” “그래, 오늘 수업이 빨리 끝났나 봐? 세탁기 돌리고 있어?”안미영은 세탁기가 돌아가는 걸 본 뒤 소파에 앉더니 웃으며 물었다.서수현은 안미영에게 물 한잔을 건네며 답했다.“오늘 오후에는 수업이 하나밖에 없어서 오자마자 청소하고 있었어요. 이모, 여기 물 마셔요.”“그래, 고마워. 아버지 일은 좀 어때?”“좋아요. 지금은 식사가 끝나자마자 일하러 갈 정도로 적극적이에요.”서수현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다, 이모. 제가 점심에 찹쌀 빵을 좀 만들었는데 드셔보세요.”아버지의 건강이 비록 호전되고는 있지만 여전히 약을 먹어야 하는 상태이기에 그를 집에 계속 혼자 있게 할수 없었다. 해서 학교 근처에
저녁, 부현승은 집에 와서 밥을 먹었다.그러다가 테이블 위 접시에 네 개의 찹쌀 빵이 올려져 있는 모습을 보고 당연히 이모님이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 집어서 입에 넣었다. 다 먹은 뒤 또 하나를 집어 들고 물었다.“이 찹쌀 빵 너무 맛있는데요.”안미영은 살짝 뿌듯한 얼굴로 웃으며 답했다.“맛있지?”“네, 혹시 어머니가 하셨어요?”“아니, 어느 세입자가 만들어 준 거야. 맛있으면 나중에 더 해달라고 할게.”“아니에요.”부현승은 비록 너무 맛있었지만 다른 사람을 귀찮게 할 정도로 부탁하고 싶지는 않았다.“체면 차릴 필요 없어. 내가 만들어 달라고 하지 않았는데 해준 거야. 그리고 아주 친절한 아가씨거든. 지난번에 그 고구마튀김도 그 여자가 해준 거고. 나한테도 저런 딸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듣고 있던 부현승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그 세입자가 분명 안미영의 재력을 눈치채고 일부러 그녀의 환심을 사려고 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안미영은 여전히 환상 속에 빠진 채 말을 이었다.“근데 참 불쌍한 사람이야. 엄마는 없고 아빠만 있는데 지금 중병에 걸려서 혼자 아르바이트도 하고 학교도 다니고 있어...”부현승은 무심결에 서혜민이 생각났다.예전에 서혜민의 집은 매우 가난했는데 여동생 두 명에 남동생까지 있는 바람에 그녀는 일찍 학교를 그만두고 나와서 일했다고 말했다.그러다가 안미영에게 입을 삐쭉거리며 말했다.“학교도 다닐 수 있고 학교 근처에 있는 집도 세 들어 살 수 있는 정도면 생활이 꽤 괜찮다는 걸 설명하지 않을까요? 그 사람보다 더 가난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안미영은 할 말을 잃었다.“...”“너는 어쩜 그리도 마음이 삐딱하니?”부현승이 답했다.“합리적으로 분석해 드렸을 뿐이에요.”안미영은 단번에 그가 집고 있던 찹쌀 빵을 도로 뺏으며 말했다.“먹지 마.”부현승은 어리둥절한 채 젓가락만 들고 있었다.“...”...아마도 할머니가 최국환의 방문을 거절한 탓인 지 이튿날 최국환은 직접 온하랑에게 전화
온하랑은 왜 최국환이 그녀에게 호의를 베푸는지도 모른 채, 감사 인사를 올렸다.“그러면 최 회장님께 감사드립니다.”그가 한 말이 사실인지는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터였다.최국환이 지난번 전화 온 이후로 며칠이 지났지만, 확실히 임가희에게서 따로 연락이오지 않았다.온하랑은 부승민을 못 본 지도 한참 되었다.그 시간 동안 부승민은 온하랑에게 전화도 하지 않았다.전화가 통했다. 온하랑은 비서가 받은 줄 알았지만 예상치 못하게 핸드폰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온하랑이 숨을 들이마시고는 비꼬는 어투로 물었다.“대표님, 전화 받을 시간은 있었나 보네요?”핸드폰 너머에 있던 사람이 잠시 멈칫하더니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무슨 일 있나요?”한 통의 전화일 뿐이지만 그녀는 이상함을 느꼈다. 이전에 여러 번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거나 비서가 받았었다. 그녀는 이상함을 느끼고 촬영하러 가기 전에 다시 한번 부승민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었다.온하랑의 얼굴이 굳더니 웃음기가 서서히 가셨다.“무슨 일이 없으면 전화하면 안 되나?”“최근에 좀 바빠. 특별한 일 없으면 연락하지 마.”말이 끝나며 전화기가 끊어졌다.온하랑은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핸드폰 화면을 보고 있었다.‘정말 이렇게 끊었다고? 정말 부승민 맞아? 왜 이렇게 냉담해진 거지? 이전까지는 좋았는데...’부승민은 대진시에서 돌아오고 나서, 그녀가 잠든 후 집을 나서더니 바로 지금처럼 냉담해졌다.온하랑은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마음은 차갑게 내려앉았다.최근 온하랑의 분량은 매일 10컷이 있을 정도로 많았다.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며칠만 더 촬영한다면 이 역할은 끝을 맞이하게 될 것이었다.그녀는 매일 촬영장에서 시간을 보내며 늦게까지 촬영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근로자의 날에도 휴무 없이 촬영을 강행했다. 가정의 달이다 보니 행사도 많아 김시연은 출장도 자주 다녔다.돌아왔을 때는 이미 5월 중순이 되어 있었고 그제야 며칠 숨을 돌릴 수 있었다.저녁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