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논의해 볼게요.”기우 엄마와 아빠는 몸을 돌려서 한참 얘기를 나누더니 의사의 의견을 받아들여 구급차를 부르기로 했다.의사가 구급차를 불러주었다. 이어 두 사람에게 말했다.“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집에서 구급차가 오길 기다리면 됩니다.”의사가 가자 기우 어머니 눈에서 짙은 원한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분노에 차 욕설을 내뱉었다.“천박한 년! 가죽을 벗겨버릴 것이다!”그녀는 다시 한번 빗자루를 들고 양 우리로 향했다.의사는 멀리 가지 않고 담장 밖에 서 있었다. 기우의 어머니가 나오는 모습을 본 그는 얼른 몸을 숨기고 따라갔다. 의사는 기우의 어머니가 양 우리에서 사람을 때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곳에는 사람이 숨겨져 있었다.의사가 숨을 들이마시고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려고 했는데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그는 얼른 앞으로 달려갔다. 경찰차 두 대가 큰길에 서 있고, 그 뒤로는 승용차 몇 대가 따라오고 있었다.촌장은 소식을 듣고 진작에 여기로 와서 경찰의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주위에는 가십을 좋아하는 마을 사람들이 서 있었다.경찰이 뭐라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촌장이 얼른 손을 저으며 답했다.“그럴 리가 없습니다. 저희 마을에서 그런 일이 발생할 리가요!”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 의사는 인신매매와 비슷한 단어를 듣고는 흥분하며 달려들어 말했다.“제가 알아요!”경찰이 뭐라 하기도 전에 승용차에서 내린 양복 입은 남자가 얼른 물었다.“뭘 알고 계십니까?”“곽 선생, 함부로...”부승민이 싸늘한 눈길로 바라보자, 촌장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얼버무렸다.육광태 일행이 곧 촌장을 둘러쌌다.부승민이 말을 이었다.“편히 말씀하십시오. 아무런 일도 없을 것입니다.”곽 의사는 방금 본인이 본 바에 대해 숨김없이 얘기했다.기우 집의 양 우리에 사람이 갇혀있다는 말을 듣자, 부승민은 마음은 마치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는 주먹을 꽉 쥐고 온몸에서 차가운 냉기를 품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그녀는 자신이 납치되었을 때도, 누군가에게 팔려 갔을 때도, 심지어 기우 어머니한테 맞았을 때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여자이지만 부승민을 보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알 수 없는 눈물이 마구 흘러내렸다.그에게 도움을 요청해서도, 또 그 사람이 자신을 계속 도와줘야 할 의무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가 영화 속 영웅들처럼 자신을 구해주기를 바랐다.“미안. 내가 너무 늦었지.”그는 온하랑의 붉은 뺨과 목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한번 삼킨 뒤 그녀를 꽉 안아주었다가 다시 더러워진 그녀의 얼굴을 닦아줬다.“이제 괜찮아.”온하랑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강옥자는 이 빌어먹을 남자가 도대체 어떻게 쫓아왔는지 의문스러웠다.보아하니 그 몇억은 이제 날아간 것 같았다.부승민은 그녀의 더럽고 냄새나는 옷을 벗겨준 뒤 자신의 양복을 걸쳐줬다. 그리고 공주님 안기 식으로 안아 올린 뒤 경찰 서장인 김민국과 육광태에게 다가가 강옥자를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이 사람은 제가 데려갈 테니 나머지는 알아서 처리해 주세요. 진술서도 나중에 제가 확인할게요.”“그래요.”김민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 나한테 맡겨.”육태광도 그를 보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강옥자는 내키지 않지만 눈앞의 수많은 경찰과 건장한 남자들을 보고 나니 감히 그들을 막아서지 못했다.그러다가 곽민준앞을 지나가면서 부승민은 잊지 않고 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도울 게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 주세요.”곽민준은 웃으며 답했다.“인신매매는 엄연히 범죄인데 누구든 그 상황이었으면 신고했을 겁니다.”뒤에 서 있던 사람들도 하나같이 말했다. “맞습니다.”어차피 대가를 바라고 한 일도 아니었기에 곽민준은 돌아가면서 명함을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명함 위에 금색으로 쓰인 회사 이름을 본 순간 그는 다시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BX 그룹이라는 이름이 왠지 낯설었는데 그가 타고
온하랑은 코를 풀쩍거렸는데 눈가는 아직도 빨갛고 눈물이 맺혀있었다.그녀는 남자의 품에 안겨 두 눈은 꼭 감은 채 그의 익숙하고 따뜻한 온기를 느꼈다. 분명 며칠밖에 안 되었지만 마치 시간이 오래 흐른 것처럼 느껴졌다.“뭐?”온하랑은 울먹거리며 그에게 되물었다.“이제 네 곁에 내가 있으니까 무서워하지 말라고.”부승민은 그녀의 두 손을 꼭 잡아주며 방금 했던 말을 다시 해줬다.이제야 제대로 들은 그녀는 다시 부승민의 손을 잡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지금 이 순간 그녀는 그저 조용히 쉬고 싶었다.그러다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사실 맨 처음 날 납치해 간 사람이 인신매매범이 아니라 민성주였어.”“민성주?”“응. 지금 온몸이 만신창이 상태로 경찰들을 피해 다닐거야...”온하랑은 심호흡 한번 하고 손으로 눈가의 눈물을 닦으며 간단하게 자초지종을 말해줬다.“만약 그 사람이 진짜 돈이 필요한 상황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날 납치하지 않았을 거야.”그녀가 자주 드나드는 촬영장과 오피스텔에는 모두 경비원이 있고 출퇴근길은 운전기사가 데려다주고 있는데 만약 진짜 돈 때문에 벌인 일이라면 민성주는 왜 이쪽 사람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았을까?그녀는 분명 누군가가 민성주에게 지시를 내리면서 그의 어떠한 요구를 들어줬으리라 의심했다.그리고 민성주의 지금 처지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배후 인물들은 높은 확률로 그를 경찰 쪽으로부터 안전하게 피신시켜 주겠다는 조건을 내비쳤을 가능성이 높았다.어쩌면 민성주를 이용했던 사람이 부민재일 수도 있고 추서윤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한 명은 감옥에 있고 한 명은 재판을 기다리고 있기에 이 두 사람은 민성주에게 몰래 지시하기 어려워 보였다. 그러면 배후에 아마 또 다른 사람이 있을 것이다.지금 그녀를 해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온하랑은 오씨 가문이 아니면 최씨 가문의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었다.오씨 가문에서는 지금 오재원을 잡느라 혈안이 되어있다. 사건이
“괜찮아. 난 눈 감고 있을 테니까 넌 그냥 갈아입으면 돼.”부승민은 덤덤하게 말했다.온하랑은 지금 혼자 있으면 불안해서 그가 곁이 있어 주기를 원하지만 또 그 마음은 들키기 싫었다.어쩔 수 없이 그녀는 살짝 옆으로 비켜줘서 그를 들어오게 한 뒤 문을 닫고 그에게 말했다.“그럼 돌아서서 눈 감고 있어.”부승민은 고분고분 그녀의 말대로 뒤돌아서 눈을 감았다.평소에는 장난을 많이 치는 타입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검사부터 받는 게 가장 중요했다.그렇게 환자복을 갈아입은 뒤 간호사는 온하랑을 데리고 검사받으러 갔다.병원 대기실에서 검사 결과를 기다리던 중 부승민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배고프지? 뭐 먹고 싶어? 내가 가서 사 올게.”온하랑은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더니 무심코 답했다.“기사님께 부탁하면 안 돼? 난 그냥 빵이랑 우유면 되는데.”“그래, 기사님께 말해놓을게.”부승민은 온하랑의 가엾은 뒤통수를 보고는 가슴이 아팠다.여태껏 지금처럼 불안해하고 그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예전에 이런 순간을 바라왔던 사람이지만 그가 원했던 건 진심으로 그를 사랑해서 의지하는 모습이지 지금처럼 불안해서 한시도 그와 떨어지기 싫어하는 모습이 아니었다.부승민은 운전 기사에게 전화를 걸어 부탁했다. 그리고 핸드폰을 호주머니에 넣은 뒤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그러다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 때문에 그는 발걸음을 멈췄다.온하랑은 그렇게 갑자기 멈춰 선 그의 등에 얼굴을 부딪치고 말았다.“화장실도 따라오려고?”“아니...”온하랑은 쭈뼛거리더니 다시 돌아갔다.그렇게 두 시간 뒤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온하랑은 손목과 발목에 가벼운 찰과상을 입었고 몸 곳곳에 타박상을 입었다.또한 왼쪽 고막은 충격이 커서 청력이 저하되었다고 했다.간호사가 연고를 가져오더니 그들에게 사용 방법을 설명했다.설명을 마친 뒤 간호사가 나가자마자 부승민은 테이블 위의 연고를 보더니 온하랑에게 물었다.“내가 따뜻한 물
부승민은 그제야 온하랑에게 약을 발라주고 흡수가 빨리 되도록 가볍게 마사지 해줬다.그리고 다른 곳의 상처는 온하랑이 스스로 발랐다.그러다 중간에 부승민이 밖에 나가서 전화를 받게 되었는데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온하랑은 또 다시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해서 그를 찾아 나서려고 했다. 문을 연 순간 부승민이 복도 끝에서 핸드폰을 들고 심각한 얼굴로 대화하고 있었다.그러다가 무심결에 온하랑을 발견하자 간단히 인사를 마친 뒤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다가와 다정하게 말했다.“미안. 통화가 너무 길었지.”“괜찮아... 그냥 답답해서 나와본거야...”온하랑이 뒤돌아서 다시 병실로 향했다.그리고 병실 안으로 도착하자마자 발걸음을 멈추고 몇 초간 생각하더니 부승민을 보고 말했다.“우리...다시...”온하랑은 그에게, 또한 자신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고 싶었다.하지만 부승민은 그녀의 말을 잘랐다.“약 다 발랐어?”순간 온하랑은 멍해 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아직.”“그럼 계속 바르고 있어. 내가 밥 가져오라고 했는데 우리 여기서 먹고 가자.”“그래.”온하랑은 다시 침대 쪽에 앉아 옷을 벗고 약을 발랐다.부승민이 말을 자르는 바람에 방금 하고 싶었던 말은 끝내 못했다.하지만 괜찮다. 이제 더 이상 이 남자의 곁에서 떠나지 않기로 마음먹었고 또 앞으로 기회는 많을 테니 조급하지 않아도 된다.얼마 지나지 않아 부승민의 핸드폰이 또 울리기 시작했다. 확인해 보니 최국환한테서 걸려 온 전화였다.부승민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더니 이번에는 밖에 나가지 않고 바로 온하랑의 앞에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최 회장님?”전화를 걸어온 목적을 알게 된 부승민은 옆에 앉아 있는 온하랑을 힐끔 보고 다시 인사를 건넸다.“온하랑 씨 대신 제가 회장님께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근데 그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왜냐고요? 어차피 나중에 다 알게 될겁니다... 그럼 다른 일 없으면 먼저 전화 끊겠습니다.”전화를 끊은 뒤 그는 핸드폰
김민국은 왕소를 심문 조사하면서 유시찬의 성격을 대충 파악할 수 있었는데 만약 그때 경찰쪽에서 바짝 추격하지 않았다면 유시찬이 진작에 인질한테서 돈을 뜯어낸 뒤 도망쳤을 거라고 예상되었다.그는 매우 확신에 차 상부에 보고 후 그들을 계속 추적하도록 요청했지만 또 너무 바짝 붙을 수는 없어 유시찬이 도망친 방향을 토대로 대략 구매자의 위치를 파악해서 그 지방의 경찰들과 같이 포위망을 좁혔다.그러다가 유시찬이 인질을 팔아넘길때 쫓아가서 인질을 구하고 다른 사람들은 주위 CCTV를 확보해서 유시찬을 발견하자마자 그를 덮쳤다.위선에서도 이번 유괴사건을 매우 중시하고 있는데 모처럼 대어를 낚을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그렇게 유시찬은 경찰에게 덜미를 잡혔다.심문 끝에 유시찬은 온하랑의 유괴 사건을 포함한 다른 사건에도 자신이 참여했다는 사실을 자백했고 그제야 김민국은 이번 일이 민성주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유시찬은 매우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는데 민성주와 처음 접촉했을 때부터 이미 그는 지금 도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고 면전에 대놓고 물었다.“이번에 한탕 건지고 계속 여기에 숨어있을 건가요? 아니면 기회를 봐서 도망칠 건가요?”다 같은 처지인 사람이라 민성주는 유시찬을 경계하지도, 그렇다고 솔직하게 다 말할 수도 없어 그저 가볍게 답했다.“당연히 기회를 봐서 도망쳐야죠.”그러다가 민성주는 전화 한 통을 받게 되었다.낡은 전화라 소리가 많이 새어 나왔는데 이미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모든 사투리를 섭렵한 유시찬은 전화기 너머의 소리를 듣자마자 단번에 공진 시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김민국은 재빨리 공진 시의 경찰서에 연락해서 조사 협조를 요청했다. ...강남에 돌아오니 이미 오후 다섯 시가 넘었는데 경찰서에 들러 녹취록을 마친 뒤 부승민은 온하랑을 집에 데려다줬다.김시연은 최근에 다른 연예인과 출장 가는 바람에 온하랑의 납치 유괴 사건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부승민은 외투를 벗자마자 주방에 가서 냉장고 문을 열며 물었다.“
온하랑은 하나씩 답장하기 시작했다.그러다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누군가가 낚아챘다.온하랑은 순간 멍해서 두 눈을 깜빡이며 부승민을 올려다보았다.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부승민은 순간 마음이 녹는 것 같았다.“그런 건 늦게 답장해도 괜찮으니까 먼저 쉬어.”어제 인신매매범의 봉고차에서 그녀는 당연히 잘 수 없었다.그리고 오늘 오후 돌아오는 길에 몇 시간 눈을 붙이긴 했으나 깊게 자지는 못했다.“하나만 보내고 가서 잘게.”온하랑은 간절하게 말했다.부승민은 어쩔 수 없이 핸드폰을 다시 돌려줬다.그렇게 온하랑은 재빨리 매니저에게 문자 하나를 더 보낸 뒤 핸드폰을 내려놓고 침대에 올라가 이불을 덮었다.“됐지.”“자. 내가 옆에 있을게.”“응.”온하랑은 그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눈을 감았다.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두 번의 유괴 사건을 겪게 되면서 온하랑은 시도 때도 없이 불안감이 느껴졌다.그러다 다시 눈을 떴다.“왜 그래?”부승민이 물었다.“혹시 창문이 잘 닫혔는지 한번 봐줄 수 있어?”부승민은 이미 닫혀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녀의 말대로 다시 한번 가서 확인해 줬다. 그리고 다시 침대 쪽으로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고 다정한 목소리로 안심시켰다.“닫혀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고층이라 아무도 들어오지 못할 거야. 더구나 나도 있잖아.”온하랑은 그의 손을 잡고 나서야 비로소 조금 안심되는지 다시 눈을 감았다.너무 피곤했던 나머지 긴장이 풀리니 빠르게 잠에 들었다.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부승민은 마음이 놓여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지켜보았다.그는 손으로 천천히 그녀의 희고 보드라운 얼굴 그리고 눈썹과 눈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그제야 온하랑의 얼굴을 만질 수 있었다.만약 그녀가 자신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준다고 해도... 부승민은 또다시 그녀를 다치게 할 수 없었다...그렇게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그녀와 헤어지는게 아쉽기지만 별다른 선택이 없었다.온하랑을 위해서라면 최선을 다할
뜻밖에도 전화를 받은 사람은 연민우였다.“죄송합니다. 하랑 씨, 회장님께서 지금 미팅 중이라 하실 말씀이 있으면 저한테 하세요. 제가 회장님께서 미팅이 끝나는 대로 전달해 드릴게요.”“별... 별로 급한 일이 아니에요. 제가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요.”서둘러 끊은 전화기를 들고 어리둥절해진 연민우는 다시 고개를 돌려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있는 부승민에게 핸드폰을 돌려줬다.“뭐라고 해?”부승민이 물었다.“그냥 나중에 다시 전화한다고만 하셨어요.”연민우가 여전히 멍한 얼굴로 그에게 답했다.부승민은 사실 지금 그녀가 집에 혼자 있어 매우 불안한 상태란걸 알고 있다.하여 다시 핸드폰을 집더니 안문희에게 전화를 걸었다.통화가 끝난 뒤 온하랑은 전화를 붙잡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하마터면 부승민은 BX 그룹의 회장이란 사실과 매우 바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뻔했다.일 이야기가 나오자 온하랑은 자신도 아직 작업을 마치지 못한 게 생각나 냉큼 노트북을 꺼내 일하기 시작했다.이번 사진 작업은 모두 사적으로 만나 찍은 자연스러운 작품들이라 상대방 쪽에서는 그녀의 촬영 스타일이 매우 마음에 들었는지 모든 특권을 다 그녀에게 넘겨줬다. 때문에 온하랑은 이번 작업이 매우 순리로웠고 곧바로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그렇게 반쯤 작업하던 중, 그때 자신의 가방은 돌려받았으나 안에 은행카드는 다 잃어버렸던 게 생각났다.하여 냉큼 각 은행사 쪽에 전화를 걸어 분실신고까지 마친 뒤 다시 작업했다.이때, 벨 소리가 울리자 온하랑은 또다시 깜짝 놀랐다.그녀는 인터폰으로 누군지 확인하며 물었다.“누구세요?”“이모, 저예요!”문밖에서 귀여운 아기 목소리가 들려왔다.인터폰으로 보니 문밖에는 부시아와 안문희 두 사람이 서 있었다.오늘이 마침 토요일이라 학교 가는 날이 아니었다.온하랑은 그제야 마음이 놓여서 문을 열어줬다.부시아는 자연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오더니 마치 자기 집인것 마냥 그녀에게 말했다.“이모랑 놀러 왔어요.”부시아의 초롱초롱한 눈을 보고 온하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