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하랑은 밥을 한다는 그 한마디에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왜냐하면,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부승민과 밥을 하는 그의 모습이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하랑아, 너 승민이 요리 솜씨 엄청 좋은 거 모르지? 대학교 다닐 때 승민이 혼자 자취하면서 나한테 자주 밥해 주고 그랬어. ”온하랑은 추서윤이 일부러 그런 말로 자신을 자극한다는 걸 이미 눈치챘다.그녀의 마음은 칼로 찌르는 듯 아팠다.한 남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를 위해 직접 밥을 한다는 건 분명히 엄청 상대방을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그들의 3년 결혼생활에서 부승민은 단 한 번도 밥을 한 적이 없거니와, 심지어 그녀는 부승민이 요리 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도 몰랐다.요리하면서 부부간의 금실도 좋아진다고 들었지만, 일단 집에 도우미 아주머니가 있어 온하랑 또한 가끔 요리하곤 했다. 하지만 부승민은 단 한 번도 그녀를 도와준 적이 없었다.이게 바로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지 않는 것의 차이이다.이윽고 온하랑은 아픈 가슴을 억누르며 말했다.“오빠 바꿔줘요. 제가 물어볼 게 있어서요.”“뭔 일인데? 내가 대신 전달할게.”이건 그 누가 봐도 크나큰 도발이다. 현재 부승민과 온하랑은 아직 부부 사이인데, 둘 사이의 일을 추서윤 통해서 이야기해야 하다니, 이 또한 얼마나 웃긴 일인가?비록 지금 부성민과 이혼할 마음이 있다고 해도, 절대 추서윤이 저러는 꼴은 봐줄 수 없었다.“오빠한테 핸드폰 줘요! 직접 오빠한테 물어볼 거 있으니까요!”추서윤이 뭐라고 말하려던 찰나, 온하랑이 바로 그녀의 말을 잘랐다.“지금 자동 녹음되고 있어요. 만약 이 녹음이 오빠 귀에까지 들어가지 않게 하려면, 지금 당장 핸드폰 오빠 줘요.”추서윤은 부승민이 이런 작은 일로 자신과 헤어지지 않을 거라 믿고는 있지만, 그래도 부승민의 앞에서 좋은 이미지로 남고 싶어 할 수 없이 핸드폰을 주방에 있는 부승민에게 바꿔주었다.그렇게 아무 말 없이 십몇 초간 시간이 흘러갔고, 갑자기 전화기 너머로 추서윤의 목소리가 들려왔
이때 부승민이 담담하게 말했다.“난 하랑이가 그 기사 보고 해명이라도 하겠다고 할까 봐 그러는 거야. 그러면 너한테도 영향이 갈 거잖아. 시간을 끌면 끌수록 좋은 거니까, 이 일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그래야 모두한테도 영향을 끼치지 않지.”그 말을 들은 추서윤은 두 눈을 반짝이며 괜히 미안한 척 그에게 말했다.“근데 그러면 하랑이한테는 안 좋은 거잖아. 아니면 그냥 우리 하랑이 대신 해명하자. 나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되겠어. 다른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더라도 나 당당히 너랑 함께하고 싶단 말이야.”그러자 부승민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근데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야. 여론 쪽도 어떤 상황인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고. 넌 연예인이라 네가 만약 해명한다면 네 커리어에도 영향이 갈 거라고.”그 말에 추서윤은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다.대체 진짜로 그녀의 커리어를 위해서인지, 아니면 그가 공개하고 싶지 않아서인지 알 수가 없으니 말이다.“난 그냥…”“서윤아, 이 일은 더 이상 신경 쓰지 마. 이 일은 내가 너를 해명하지 못하게 한 거라, 하랑이도 탓한다면 나를 탓해야 해. 내가 알아서 잘 처리할 테니까, 넌 그냥 네 일만 신경 써.”추서윤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부승민의 등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승민아. 너 나한테 너무 잘해주는 거 아니야?”“됐어. 나가서 기다려봐. 밥 준비 거의 다 됐으니까.”“그래.”추서윤은 대답과 동시에 주방을 나갔다.부승민은 고개를 돌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몇 초간 멍하니 있다가 다시 이어서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그는 거짓말을 했다.온하랑이 기사를 보고 해명할까 봐 겁나서가 아니라, 온하랑이 인터넷 언론 때문에 상처받을까 봐 걱정돼서였다.하지만 추서윤이 그에게 물었을 때,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이 나가게 된 것이다.“사모님, 나가게요?”“네, 오늘 제 할아버지 제삿날이라 제사 지내러 가려고요. ”온하랑은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웃어 보인 뒤 거실을 나왔다.시골 출신인 온하
“아빠, 이번에 할아버지 제사 지내러 온 것 외에 알려드릴 거 있어서 왔어요. 나 그 사람이랑 이혼해요.”“이 소식 듣고 엄청나게 놀라셨다는 거 알아요. 제가 전에 추석 때까지만 해도 그 사람이 저한테 엄청나게 잘해준다고 했죠? 근데 갈라서려고요. 엄청 당황스럽고 웃기죠? 솔직히 말해 저도 웃겨요. 그 사람이 저한테 이혼하자고 한 뒤로부터 계속 어딘지 모르게 혼란스러운 상태예요. 어쩌다가 이혼 지경까지 이르렀는지…”“만약 그때 추석에 누군가가 저한테 몇 달 뒤 부승민과 이혼할 거라고 알려준다면, 저는 아마 믿지도 않았을 거예요…”“내가 그 사람 그렇게나 사랑하는데 이혼이라뇨? 근데 그런 일이 실제로 발생했지 뭐예요…”“말하자면 긴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 지금 임신 상태에요. 아빠 외손주 보게 생겼다고요. 만약 하늘에서 보고 계신다면 제 배 속 아이 끝까지 지켜주세요… 솔직히 말해 저 아직도 그 사람 좋아해요. 10년이나 그 사람 좋아하고, 3년 동안 부부였는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잊을 수 있겠어요? 저 지금 너무 괴로워요. 우리는 진짜 인연이 아닌가 봐요…”“그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은 그 전 여자 친구예요. 저 3년이 지나도 그 사람 마음 움직이지 못했다고요. 이렇게는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서 포기를 한거고요. 저 실패한 삶일까요? 만약 아빠가 계셨다면 저더러 놓아주라고 저를 설득했겠죠? 저는 아마 끝까지 놓기 힘들어할 거고요.”온하랑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어서 말했다.“저 그 사람 10년 동안 좋아하고 결국에는 그 사람 와이프까지 돼서 3년 동안 행복했는데 이렇게 갑작스레 이혼이라니…”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걸까?온하랑은 아버지의 묘비 앞에서 혼자 중얼거리며 속에 있는 이야기를 다 털어놓았더니, 그제야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그리고 현재는 이미 이혼하기로 결정된 상황이다.이왕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거면 겸허히 받아들여야지 않겠는가.게다가 그녀에게는 아이까지 있다. 그녀는 아이를 낳아 성도 자신의 성을
그 차는 온하랑이 속도를 늦춘 걸 보고 본인도 더욱 늦게 운전하기 시작했다.이렇게 가다간 온하랑이 차를 멈춰야만 끝날 듯 보였다. 하지만 여기서 차를 멈출 수 없는지라 온하랑은 다시 노선을 변경했다. 그러자 그 차도 똑같이 노선을 변경하며 그녀의 차 앞에서 얼쩡거렸다.온하랑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그녀는 본인이 노선을 변경해 그 차를 초월했다 하더라도 검은 차가 속도를 내지 않는 한 그 차를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게다가 그녀의 운전 기술이 좋다 하더라도 본인의 목숨과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그런 위험한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온하랑은 안전한 곳을 찾아 신호등이 깜빡일 때 길옆에 차를 멈추고 경찰서에 신고하려 했다.이때 갑자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에어백이 터졌다.온하랑은 머리가 아파 나면서 어지러워 났고, 혼수상태에 빠지기 전 뒤에 흰색 차도 계속 자신의 뒤를 밟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그렇게 날카로운 브레이크 소리가 귓가에 울리며 ‘펑'하는 소리와 함께 자동차 전체가 폭발했다. 그러고는 큰불이 나기 시작했고, 자동차 뼈대 하나만 남게 되었다.익숙한 장면이 한번 또 한 번 반복되면서 머릿속에서 재생되었고, 눈을 뜨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났다.익숙한 소독약 냄새가 풍겼고, 그녀 또한 여기가 병원인 걸 알고 있었다.눈을 떠보니 눈앞은 흐릿했고, 손으로 눈을 비벼보아도 여전히 흐릿한 상태였다. 그녀는 너무 오래 잔 탓에 이렇게 흐릿한 줄 알고, 몇 초간 눈을 감고 있다가 눈을 떴지만, 여전히 흐릿했다.온하랑은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만 같았고 왠지 모를 공포감에 휩싸였다.“깨어났어요?”이때 귓가에는 웬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 목소리에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그 여성의 대략적인 윤곽과 옷의 색상은 어렴풋이 보였다. 하지만, 그 여성의 얼굴과 옷의 구체적인 스타일은 어떠한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그녀의 옆에는 또 다른 키가 큰 남성이 있었고, 다들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다.게다가 침대의 양옆에는 다른
온하랑은 그때의 상황에 대해 다시 자세하게 설명했고, CCTV 속의 상황하고도 거의 일치했다.이윽고 남자 형사가 온하랑의 말을 기록하며 물었다.“온하랑 씨 추측으로는 그 검은색 차와 흰색 차가 일부러 그런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그러면 진짜로 그 검은색 승용차 차주하고는 모르는 사이인가요?”“네.”“그러면 흰색 차 기사님의 얼굴은 혹시 보셨나요?”“아니요. 제 뒤에서 거리를 꽤 두고 있었어요. 노선 변경을 할 때 백미러로 두 번 보긴 했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 운전하고 있는 분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어요.”“네, 알겠습니다.”이윽고 여자 형사가 온하랑은 안심시키며 말했다.“너무 걱정하지 마요. 지금 이미 용의자 신분을 확인하고 용의자를 체포하고 있으니까요. 너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그렇다, 지금 어딜 가나 감시 카메라가 있어서 멀리 도망가지는 못할 것이다.“고맙습니다.”온하랑이 답했다.“이제 가족들한테 연락드려도 돼요. 그리고 사고 현장에서 핸드폰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저 집에서 나오면서 핸드폰은 갖고 나오지 않았어요. 형사님, 혹시 형사님 핸드폰으로 전화 한 번만 해주실 수 있을까요?”“그럼요. 번호 불러주세요.”그 순간 온하랑은 하마터면 부승민의 번호를 부를 뻔했다.그는 지금쯤 아마 추서윤과 같이 있을 것이다.온하랑은 쓴웃음을 지으며 결국은 도우미 아주머니의 번호를 불렀다.전화가 걸린 뒤 형사는 온하랑에게 전화기를 건네주었고, 전화기 너머로는 도우미 아주머니의 의문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 누구세요?”“아주머니 저예요.”“사모님!”전화기 너머로 도우미 아주머니의 놀란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나가실 때 핸드폰도 가지고 나가지 않으시더니, 지금까지 어디 계시는 거예요?”“저 교통사고 났어요. 혹시 현대병원으로 와주실 수 있어요? 오실 때 갈아입을 옷이랑 제 지갑도 부탁드려요.”그 말에 도우미 아주머니는 조금 전보다 더욱 놀란 상태였다.“사모님, 괜찮으세요? 갑자기 웬 교통사고에요? 저 지
이때, 문 앞에 누군가가 서있는 느낌이었다.온하랑은 희미한 눈으로 문 쪽을 빤히 쳐다보았고, 한참을 본 뒤에야 검은색 옷차림을 한 사람이 문 앞에 서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여기 환자분들 가족인가? 아니면 조금 전 그 며느리가 말했던 남편일 수도 있겠네. 근데 왜 문 앞에서 들어오지 않는 거지? ’온하랑은 여러 가지 의문이 들었다.이때 그 검은 그림자가 걸어들어오더니 가장 밖에 있는 침대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었다.하여 온하랑은 다른 환자의 가족일 거라고생각했다.하지만 그 검은색 그림자는 온하랑의 침대 옆에 멈춰 섰고, 그녀의 침대에 다가와 앉는 것이었다.깜짝 놀란 온하랑은 무의식적으로 눈을 가늘게 떴지만, 아무리 가늘게 뜬다고 해도 눈앞은 여전히 흐릿했다. 그녀는 최대한의 노력으로 눈앞의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누구…승민 오빠?”“나야, 하랑아. 눈이 안 보여?”부승민은 걱정스레 물으며 큰 손으로 온하랑의 얼굴을 만졌다. 그러고는 그녀의 붕대 감은 이마를 빤히 바라보았다.조금 전 한참 동안 말이 없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익숙한 소리를 들은 뒤에야 온하랑은 그게 부승민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뇌에 피가 고여 시신경을 눌렀대. 그래서 시력이 흐릿해져 안 보이는 거야.”그러자 부승민은 손을 뻗어 그녀의 앞에서 흔들어 보였다.“이거 보여?”그러자 온하랑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어 보였다.“…내가 지금 장님이 된 건 아니잖아. 어렴풋하게는 보인다고.”“근데 왜 갑자기 교통사고가 난 거야?”“오늘 할아버지 제사라 묘원에 제사 지내러 갔거든. 돌아오는 길에 어떤 차가 나를 따라왔어.”온하랑은 간략하게 답한 뒤 그제야 부승민에게 물었다.“근데 여긴 어떻게 왔어?”“집에 있는데 아주머니가 너 교통사고 났다고 해서 왔지.”그는 오후에 집에 돌아가 그녀가 묘원에 갔다는 걸 듣고 원래는 그대로 저녁을 먹으려 했었다. 하지만 계속 기다려도 온하랑이 오지 않자,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니 그녀가 교통사고가 났다고
부승민이 물었다. "뭘 먹고 싶어?""뭘 할 줄 아는데?""뭐든 할 수 있어.""그럼 달걀 볶음밥 먹을게. 옥수수랑 햄 좀 넣고 양상추도 좀 넣어줘.""좋아. 재료 사러 갔다 올게." 부승민은 휴대폰을 책상 위에 꺼내 놓으며 말했다."내 휴대폰은 여기 있으니까 아줌마가 이따가 전화 오면 병실 번호를 말해줘.""응."부승민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온하랑의 두 눈은 휑해 있었다.온하랑은 부승민이 뜻밖에도 동의할 줄 몰랐다.부승민의 마음속에 온하랑도 있는 걸까?이런 생각이 막 떠오른 온하랑은 곧 그것을 내팽개쳤다.‘온하랑, 더는 자만하지마. 부승민은 아예 너를 좋아하지 않아.'내일은 이혼하는 날이다.온하랑은 이번에 놓치면 다시는 꺼낼 용기가 없을가봐 두려웠다.책상 위의 휴대폰이 울렸다.온하랑은 휴대폰을 들었는데 화면의 발신자 표시가 잘 보이지 않았고 희미한 녹색 덩어리만 보였다. 연결 버튼을 누르자 스피커 속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승민아, 너 밥 먹었어?""저에요." 온하랑이 답했다."온하랑?" 추서윤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승민은?""장 보러 갔어요.""얘가 장 보러 간다고? 너희 집에 아줌마가 있지 않아?"온하랑은 입술을 깨물더니 갑자기 악랄한 기분이 들어 일부러 말했다. "아줌마가 없어서 승민 오빠가 채소를 사러 갔어요. 저한테 밥해준대요.""하랑… 너…." 추서윤은 화가 나 냉소하며 비아냥거렸다."승민이가 밥해준다고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 너희들은 여전히 이혼하게 될 테니까.""왜요? 추서윤 씨께서 질투하시나봐요?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지금 녹음 중이거든요." 온하랑은 차분하게 말했다.온하랑은 결코 허튼소리를 하지 않았다. 실제로 부승민은 일이 바빠서 자주 전화를 받기에 업무상 어떤 누락이나 증거 분실을 방지하기 위해 항상 자동녹음을 켜놓고 있는다."너, 너 우쭐거리지 마!" 추서윤은 화가 나서 전화를 끊었다.온하랑은 웃으며 휴대폰을 책상 위에 다시 올려놓았다.그렇다.
"네가 좋아하면 됐어.""도련님께서 요리에 재능이 있으리라고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어요. 처음 요리하는 거 치고 너무 잘했는데요. 열심히 연습하면 훌륭한 요리사가 될 수 있겠네요." 아줌마가 말했다.온하랑은 그저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부승민도 침묵했다.…온하랑이 밥을 먹은 후 아줌마는 설거지했다.지금 이미 9시가 넘었는데 온하랑은 아파서 그런지 정신적으로 힘들어 휴식을 취하려고 했다."도련님, 이젠 집에 가세요. 사모님은 제가 잘 챙기겠습니다. 내일 다시 사모님을 보러 오십시오."부승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서 외투를 집어 들고 떠났다."그래요, 그럼 내일 다시 오죠.""잠깐 기다려 봐."온하랑은 벌떡 일어났다.부승민도 걸음을 멈추고 온하랑을 바라보며 물었다."또 무슨 일이 있어?""내일 올 때 이혼 서류 챙기는 거 잊지 말고 내 것도 같이 가지고 와."부승민은 잠시 어리둥절해 하며 눈살을 찌푸렸다."온하랑, 이혼은 급하지 않아. 우선 상처를 치료하는 게 좋겠어. 넌 글씨도 잘 볼 수 없어 표를 작성할 방법이 없잖아."온하랑은 입술을 오므렸다."잘 안 보이면 그냥 읽어주면 되잖아."흐릿하게 보일 뿐이지, 눈이 먼 것은 아니다."이혼 합의서에 다 사인 했어. 눈이 회복되면 며칠 늦게 이혼 증을 받으러 가면 되잖아. 이혼이 뭐가 그렇게 급해?"온하랑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나는 오빠가 아니야."부승민은 얼굴이 굳어졌다.아줌마도 그 자리에 멍하니 있었다.부승민은 다른 남자와 마찬가지로 알고 보니 겉으로는 아내와 충성스러운 관계를 유지하지만 실제로는 밖에서 다른 이성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온하랑은 그와 이미 이혼하기로 합의했다.아줌마는 줄곧 이 젊은 부부를 보면서 함께 있었는데 그들이 이렇게 빨리 이혼할 지경에 이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온하랑은 어제저녁에 부승민을 병원으로 불렀고 부승민도 온하랑이 교통사고를 당한 후에 즉시 집에서 병원으로 도착해서 아내를 위해 요리를 했다.두 사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
부승민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니야. 그냥 속이 너무 아파서 네가 보고 싶었어.” “그럼 그냥 나한테 말하면 되잖아. 왜 연 비서를 시켜서 괜히 날 놀라게 하는 건데?” 온하랑은 그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부승민은 허리에서 찌릿한 전율을 느끼며 전기가 온몸으로 퍼지는 느낌에 낮은 신음을 흘리며 대답할 겨를도 없었다. 온하랑은 손을 빼냈다. 그녀는 손끝에 묻은 뭔가를 보더니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는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부승민은 천장을 보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불을 걷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왜 따라와?” 온하랑은 그를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 “샤워하려고.” 부승민은 문틀에 기대어 배시시 웃더니 살짝 낮아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같이 할래?” “혼자 해.” 온하랑은 단호히 거절하며 말했다. “오늘 하루 종일 돌아다녔더니 너무 피곤해. 먼저 잘게.” “그럼 먼저 자.” “응.” 부승민이 샤워를 끝내고 나왔을 때 온하랑은 이미 간병용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샤워 소리에도 전혀 깨지 않은 걸 보니 오늘 하루 정말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한 말이 부승민의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는 눈은 가늘게 좁혀졌다. ‘별장에 있지 않고 비서한테 데리러 오라고 했다고?’ ‘정말 단순한 우연일까?’ 경주 국제공항. 임연지는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착용한 채 입구에 서서 사람들 사이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익숙한 실루엣이 보이자 그녀는 두 걸음 앞으로 나가며 손을 흔들었다. “연지야!” 한 키 큰 남성이 캐리어를 들고 마스크를 낀 채 서둘러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나 돌아왔어!” 임연지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주먹으로 치며 말했다. “생각보다 빠르네” “그럼!” 오재원은 웃으며 말했다. “네가 불렀는데 내가 안 올 수 있겠어?” “가자.” “호텔부터 가자.”
따스한 숨결이 천천히 귓불을 감싸더니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녀는 그의 귀에 입김을 불어 넣고 있었다. 부승민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마치 전류가 흐르듯 온몸에 간질간질한 감각이 번졌고 그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목소리가 잠기고 몸은 저릿저릿하게 뜨거워졌다. 어느 한 곳은 이미 솔직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손이 너무 차가워. 부승민, 따뜻하게 해줘.” 그가 대답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그녀의 차가운 손이 이불 속으로 들어오더니 그의 옷 안으로 파고들었다. 셔츠 밑단은 벌써 벨트에서 빠져나왔고 차디찬 손이 뜨겁게 달아오른 그의 허리에 닿았다. 그녀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고 마음의 준비도 했었지만 예상했던 순간에도 그의 몸은 차가운 손길에 본능적으로 굳어졌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오히려 점점 대담해졌다. 차가운 손가락은 그의 복부를 따라 유회하듯 움직이며 탄탄하게 뻗은 근육의 선을 따라 내려갔다. 부승민은 숨을 꾹 참으며 손으로 침대 시트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녀의 행동을 막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그러던 중 그녀의 손끝이 천천히 더 아래로 내려가더니 그의 허리띠 바로 위에 닿았다. 부승민은 몸이 굳어지며 팽팽하게 긴장됐다. ‘만약 더 아래로 손을 내리면 내 변화를 눈치채고 내가 깨어 있다는 걸 알아차릴 텐데.’ 그녀의 손이 허리띠에 막혀 더 이상 내려가지 않았다. 부승민은 속으로 안도했지만 마음속에는 이유 모를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바로 그의 심장은 다시 요동쳤다. 그녀가 허리띠를 풀기 시작했다. ‘뭐 하자는 거지?’ 부승민의 마음 한구석에는 기묘한 기대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허리띠를 찬 채로 자는 건 불편할 거야.” 그녀는 조곤조곤 말하며 허리띠를 빼냈다. 그러다 그녀의 손끝이 그의 민감한 부위에 스쳤다. 부승민은 잠시 숨이 멎을 듯했고 그 순간 그는 목을 꽉 누르며 간신히 신음을 삼켰다. “바지는 벗겨주고 싶지만 네가 너무 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