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하랑은 제대로 듣지 못하고 그저 부승민이 술에 취해 잠꼬대한다고 생각했다.손목을 잡은 그의 손을 풀어내려고 했지만 부승민은 더욱 세게 온하랑의 손목을 잡았다.온하랑은 손을 뻗어 부승민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내려고 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부승민이 또 가볍게 속삭였다.“하랑아, 사랑해.”온하랑은 온몸이 그대로 굳어 하려던 동작도 멈춘 채 서 있었다. 환청인 줄 알고 천천히 부승민에게로 몸을 숙여 물었다.“뭐라고?”“사랑해, 하랑아. 제발 날 떠나지 마. 내가 잘못했어. 앞으로 널 더 사랑하고 아낄게. 제발 날 떠나지 마...”부승민은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사람인지 다시금 깨달았다.차갑게 조소하는 온하랑의 시선이 두려워 이런 방법으로 온하랑에게 비는 것이었다.온하랑은 그 말을 들으면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어쩌면 부승민이 잠결에 사람을 착각했을지도 모른다.그에게 잘못이 없다고 해도, 그가 이혼하기 싫다고 해도, 지금 이 행동은 그저 죄책감 때문일 것이다.그렇게 많은 고생을 하고 처참한 대가를 치렀으니, 온하랑은 더 이상 부승민과 함께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온하랑은 계속해서 부승민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냈다.온하랑이 떠나려고 하자 부승민은 속으로 실망하고 절망했다.그의 고백을 듣고도 온하랑은 아무 반응이 없다.결국은 붙잡지 못할 인연인 것이다.감정이 파도처럼 치고 올라왔다.아니, 그는 아직 온하랑을 놓을 수가 없었다.부승민은 온하랑의 손목을 잡은 채 힘을 줘서 끌어당겼다. 놀란 온하랑은 비명을 지르면서 그의 몸 위로 넘어졌다.부승민이 몸을 돌려 온하랑을 자기 아래에 깔고 정확히 입술을 향해 키스를 퍼부었다.부드럽고 달콤한 그 입술에 부승민은 점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읏...”두 사람 사이에 독한 술 냄새가 퍼졌다. 온하랑은 숨을 꾹 참고 두 팔을 가슴 앞에 교차한 채 열심히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리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부승민의 입술을 피하기도 했다.“부승민... 이거 놔...”부승민의 가슴은 마
예전 부승민은 일부 사람들이 왜 그렇게 담배를 피우기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야 비로소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담배 한 대를 다 피우고 담배꽁초를 비벼 끈 부승민은 찬 바람을 맞으며 몸에 밴 담배 냄새를 다 날려 보내고서야 방에서 나왔다.온하랑은 이미 아래층에서 부승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곧 내려올 거라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두 사람은 일순간 마주쳤던 시선을 재빨리 피했다.부승민은 아직도 미련이 남아있고, 온하랑은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다. 굳이 서로 말하지 않아도 훤히 알 수 있었다.“가자.”“그래.”온하랑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승민의 뒤를 따라 차에 올라탔다.부승민은 이번에는 일부러 속도를 늦추거나 하지 않았다. 가는 길 내내 막힘이 없었고, 차가 이내 가정법원 주차장에 도착해 멈춰 섰다. 그들이 이곳으로 온 건 이번이 두 번째다.차에서 내린 후 각자의 서류를 챙긴 부승민과 온하랑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고, 괴이한 침묵이 흘렀다.안으로 걸어 들어갈 때 부승민은 갑자기 온하랑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손을 빼내기 전에 얼른 한마디를 보탰다.“마지막으로 한 번만.”지난 3년 동안, 부승민은 당장이라도 멀리 떠나가 버릴 것 같은 위태로운 온하랑의 마음을 되돌릴 기회가 무수히 많았지만, 안타깝게도 끝내는 그 기회를 잡지 못했다.그녀는 이미 그에게서 마음이 떠난 지 오래였다.온하랑의 손을 꼭 감싸쥔 부승민의 커다란 손은 여전히 따뜻했다.온하랑은 지난번 가정법원에 왔을 때를 떠올렸다. 그녀는 앞이 잘 보이지 않았고, 부승민은 그때도 지금처럼 그녀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라갔다.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또 뭔가 달라 보였다.창구 앞으로 간 부승민과 온하랑은 서류를 들이밀었다. 이름을 흘긋 본 직원은 고개를 들어 그들과 말하려다가 문득 무언가 알아챈 듯 다시 고개를 숙여 서류에 적힌 이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재차 확인한 직원은 고개를 들어 부승민과 온하
부승민은 손에 들린 이혼 확인서 등본을 어찌나 힘껏 구겨 쥐었는지 뼈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한순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직원은 혼인관계증명서에 무효 처리 도장을 찍으며 말했다.“이건 다시 가져가실 건가요? 아니면 바로 폐기할까요?”“주세요!”서류를 건네받은 부승민은 나머지 하나를 온하랑의 손에 쥐여주었다.온하랑은 적잖이 당혹스러웠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혼 확인서와 함께 가방에 집어넣었다.“가자.”“그래.”돌아가는 차 안에서 온하랑은 창문을 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얼굴에 날카롭게 부딪혔다.온하랑은 무표정한 얼굴로 오른쪽 백미러를 통해 자기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마음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후련하지 않았고, 오히려 무거울 따름이다.미세한 욱신거림과 쓰라림이 천천히 그녀의 가슴 한구석을 옥죄어왔다.그다지 아프지는 않았지만, 가슴 전체가 답답하고 불편했다.온하랑은 자신의 눈시울이 붉어진 것을 부승민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눈에 힘을 주며 버텼다.하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열여섯 살 때부터 스물다섯 살까지 거의 10년에 가까운 시간이다. 키우던 반려동물을 갑자기 떠나보내도 커다란 아쉽움이 남을 텐데, 그게 사람이라면?그것도 온하랑이 10년을 좋아한 사람이다. 차갑고 어두웠던 그녀의 삶에 한 줄기 햇살 같은 사람이자, 그녀가 애타게 쫓으려 했던 빛이다.부승민은 이미 온하랑의 삶에 녹아들어 습관처럼 굳어버렸다.어떻게 짧은 시간 안에, 그에 대한 미련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그러나 몇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끝내 그의 마음을 잡지 못했다.이미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지칠 대로 지쳐버린 온하랑은 이제는 그냥 다 내려놓고 싶었다.온하랑은 칼로 찌르는 듯한 마음의 고통을 억누르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제 안녕, 열여섯 살의 하랑아.오늘 이후부터 그녀는 과거와 작별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이다.“부승민.”온하랑이 돌연 그의 이름을 불렀다.“왜?
부승민은 키가 너무 커서 병원 침대는 그가 눕기엔 작아 보였다.의식을 잃기 직전에 발생한 일을 떠올린 온하랑은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어쩔 바를 모르며 부승민의 침대 옆에 뛰어가 그의 손을 꼭 그러잡았다.“오빠? 괜찮은 거지? 빨리 일어나서 뭐라고 말 좀 해봐!”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렇게 무서웠던 적은 처음이다. 부승민도 아버지처럼 교통사고 이후 혼수상태에서 영영 깨어나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그녀는 그때의 사고 장면을 잊을 수 없었다. 그때도 트럭이 그녀가 앉아있는 조수석을 향해 오른쪽에서 돌진했다.아버지가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어 자신의 생사를 마다하고 그녀를 보호하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죽는 사람은 오히려 그녀였다. 바로 그때처럼 부승민도 위험을 무릅쓰고 핸들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설마 부승민도 이렇게 그녀를 떠나가려는 걸까?온하랑이 아무리 불러도 침대에 누워있는 부승민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온하랑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마음속의 공포가 점점 커졌다.“부승민, 죽지 마!”온하랑은 이제 아무렇지 않게 부승민을 내려놓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생기를 잃고 침대에 누워있는 부승민을 보는 순간 마치 보이지 않는 무형의 손길이 그녀의 심장을 옥죄이며 천천히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부승민에게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온하랑은 절대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그녀는 화근덩어리다. 주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여러 가지 불행을 가져다준다.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은 바로 그녀다.“울지 마. 나 괜찮아.”부승민의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이 고개를 들어보니 부승민은 어느새 눈을 뜨고 있었다.머리에 하얀 붕대를 감고 그윽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는 살짝 헝클어지고 잘생긴 얼굴은 약간 창백해져 오히려 유연한 아름다움이 비쳤다.온하랑은 저도 모르는 새에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 순간 그녀는 자기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왜 그래? 좋아서 못
“괜한 생각하지 마. 오빠가 날 실리려다가 다쳐서 마음이 편치 않을 뿐이야.”온하랑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그녀는 부승민 때문에 아픈 마음을 단순한 불안감으로 관념을 바꿔버렸다. 낯선 사람이 그녀를 구하려다가 다쳤을지라도 감동받고 걱정하긴 매한가지니까.그러나 마음이 아프다는 건 다른 의미이다. 누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당신이 한 남자를 마음 아파하고 있다는 건 그 남자에게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고.부승민의 눈은 다시 빛을 잃고 어두워졌다.“왜 널 살리려고 했는지 안 물어보는 거야?”그런 위기 상황 속에서 그는 이것저것 생각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심지어 자기 안위조차 내팽개치고 의도적으로 핸들을 돌렸다. 오로지 그녀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본능보다 이성이 앞섰다.“이유가 어찌 됐든 내가 고마워해야 하는 건 당연한 사실이야. 고마워, 오빠.”온하랑은 진심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부승민이 목숨을 걸고 구해줬으니 온하랑도 목숨으로 보답할 것이다.혹시나 언젠가 부승민한테 위험이 닥친다면 온하랑도 그를 위해 목숨을 내던질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믿을 수는 없었다. 다시 마음을 내줄 리는 더욱 만무했다.온하랑의 감사 인사는 부승민이 듣기에 그저 가혹할 따름이다. 그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그저 입으로만 고맙다고?” “그럼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데?”“너...”엉겹결에 말이 입밖으로 튀어나왔지만 부승민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했다.“... 내가 퇴원할 때까지 병원에서 돌봐주면 안 돼?” 그 한순간 부승민이 하고 싶었던 말은 사실‘너 나를 떠나가지 않으면 안 돼? 우리 다시 시작하자’ 라는 말이었다.온하랑이 눈살을 찌푸렸다. 위급한 상황을 틈타 이런 말을 하면 안 됐다고 생각한 부승민은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온하랑이 동의하자 부승민의 마음에 기쁨이 차올랐다.이윽고 온하랑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날 구하려다가 다쳤으니 내가 돌
부승민은 한참 뒤에야 두 사람이 이미 이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 이상 서로의 행방에 대해 알려줄 의무가 없었고, 생활에 간섭할 이유도 없었다.온하랑은 앞으로 자기만의 삶을 살며 자기만의 일을 할 것이다.아마도 부승민은 어쩌다 가끔 본가에서만 온하랑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온하랑이 일부러 그를 피한다면 일 년 동안 못 보는 것도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부승민은 가슴이 저렸다. 그는 정말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뭐 먹고 싶어? 내가 내려가서 사 올게.”온하랑의 목소리에 부승민은 생각을 멈추고 천천히 눈을 뜨며 말했다.“그냥 아무거나 사. 난 별로 입맛이 없어.”“그래. 그럼 내가 알아서 살게.”온하랑은 휴대폰을 들고 병실을 나섰다.이십 분쯤 지나자 그녀는 밖에서 음식을 사 들고 돌아왔다. 손에는 만두, 빵, 계란, 두유, 소고기 야채죽을 들고 있었다.온하랑은 음식을 한꺼번에 테이블에 올려놓았다.“이것저것 사 왔어. 뭘 먹을래?”“지금은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먹기 싫어도 먹어야지. 가뜩이나 다치기까지 했는데, 잘 먹어야 몸도 빨리 회복할 거 아니야. 게다가 원래 위도 안 좋잖아...”절반 말하다가 온하랑은 갑자기 멈추고 침묵했다.그들은 이미 이혼한 사이다. 어떤 말은 그녀가 하기에는 주제넘은 감이있었다. 부승민도 침묵했다. 지난 3년 동안 온하랑은 항상 부승민을 관심하며 하루 세끼를 잘 챙겨 먹으라 당부했다. 그가 업무에 몰두하거나 회의하느라 식사 시간을 잊어버리지는 않았는지, 온하랑은 직접 찾아가 그를 감독하곤 했다. 그렇게 그들은 점차 함께 그의 사무실에서 밥 먹는 습관을 들였다.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는 다시는 그녀의 관심과 당부를 들을 수 없었다. 심지어 함께 마주 앉아 밥 먹을 그 흔한 기회조차 드물었다.온하랑은 모든 음식을 절반씩 덜어 침대 앞 테이블에 올려놓았다.“여기다 올려 둘게. 먹고 싶을 때 알아서 먹어.”온하랑이 돌아서서 병실을 나가려고 하자 부승민은 온하랑이
“그럴 필요 없어. 전에 이혼 협의할 때 더윈파크힐은 너에게 주기로 했잖아. 내가 나갈게.”부승민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마음속으로는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온하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냥 오빠가 가져. 아니면 내가 부동산 중개인에게 팔아달라고 할게.”전에 이혼 협의서를 작성할 때 온하랑은 이 별장을 가지고 싶어 했었다.이 집에는 두 사람이 함께 생활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온하랑은 그들의 추억이 깃든 이곳을 남겨두고 싶었다. 그리고 이 집이 추서윤에게 점령당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그러나 온하랑은 이제 더는 이 별장을 가지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지 않았다. 지나간 기억들은 그녀에게 고통과 아쉬움만 가져다줄 뿐이었다.내려놓기로 마음먹었으니 지나간 모든 것들을 다 같이 버려버릴 것이다.온하랑의 말을 들은 부승민은 몸에 얼음물을 들이부은 것처럼 온몸이 시리고 가슴은 커다란 돌덩이로 짓눌러 놓은 것처럼 호흡이 가빠지며 숨이 막혀왔다.그녀가 지금 그들이 3년 동안 함께 살아온 별장을 팔아버리겠다고 한다. 약간의 추억조차 남기기 싫단 말인가?이렇게도 그를 벗어나고 싶단 말인가?온하랑은 가방을 들고 병실을 떠났다.부승민은 두 눈을 감고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워있었다. 마치 심장을 칼로 도려내는 것 같은 아픔에 온몸이 마비되고 오한이 들었다.온하랑이 떠났다.앞으로는 더 이상 그녀를 찾을 정당한 핑계가 사라졌다.그가 의도적으로 찾지 않는 한 두 사람이 서로를 만날 횟수는 매우 적을 것이다.보통의 이혼한 부부처럼 서로를 간섭하지 않고 각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부승민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뼈마디는 하얗게 변하고 우두둑 소리가 났다....별장으로 돌아온 온하랑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캐리어를 바닥에 열어놓고 옷장에서 옷을 꺼내려고 고개를 돌리는 새에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여행 가방 안에 들어가 그녀를 향해 야옹거렸다.온하랑이 송이의 머리를 쓰다듬자 송이는 온하랑의 손가락을 다정하게 핥았다.온하랑은 물론 송이를 데려갈 생
온하랑은 송이를 안고 계단을 내려왔다.다음 날 오전 온하랑이 송이를 애견 카페에 맡기러 갈려고 할 때 예상 밖에 문 앞에서 아주머니와 마주쳤다.“아주머니, 왜 돌아오셨어요?”“연 비서님이 가셔서. 전 필요 없어졌어요.”아주머니는 웃으며 말했다.“사모님, 송이를 안고 어디 가시는 거예요?”“아주머니, 저희 이제 이혼했어요. 앞으로는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말아 주세요. 저 곧 여행 갈 거라서 송이를 잠시 애견 카페에 맡기려고요.” “그냥 여기에 두면 안 돼요? 송이도 이미 이곳에 익숙해져 있는데, 낯선 애견카페에 보내면 적응 못 할 수도 있고 아직 너무 작아요.”온하랑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여긴 오빠 집이라 여기 두면 안 될 것 같은데요.”“괜찮아요. 송이도 대표님이 데려온 거니까 잠시 둬도 괜찮을 거예요. 대표님도 이 집을 당분간 팔지 않을 거라 하셨고요. 게다가 이렇게 큰 별장은 당장 팔리지도 않을 거예요. 저도 있는데 뭐가 걱정이세요. 만약 대표님이 진짜 팔아버리시면 제가 송이를 집에 데려가 며칠 돌보면 돼요. 적어도 송이는 제가 익숙할 거고 저도 송이를 정말 좋아하거든요.”아주머니에게 맡기는 것이 애견 카페에 맡기는 것보다 훨씬 낫다.온하랑은 곰곰이 생각하고 말했다.“아주머니, 그럼 그렇게 해요. 고마워요. 송이를 잘 부탁드려요.”“사모... 하랑 씨,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송이를 이쁘게 잘 키울 테니까요.”그리고 온하랑은 본가로 향했다.이미 부승민과 끝냈으니 김정숙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그녀가 입원해 있을 때 김정숙이 그녀를 보러오지 않은 건 아마도 부승민이 김정숙에게 이 사실을 숨겼기 때문일 것이다.김정숙은 눈치가 빨라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하랑아, 그동안 마음고생이 많았지. 그래, 잘 이혼했어. 승민이는 너에게 어울리지 않아. 어찌 됐든 넌 할머니 손녀니까 앞으로 자주 보러 와야 해, 알았지?”“알았어요, 할머니. 저와 오빠의 관계가 어떻든 할머니가 제 할머니인 건 영원히 변함이 없어요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