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형 테이블에서, 부승민이 앉은 자리가 곧 중심이었다. 부승민의 옆으로 오미연과 부 전무가 앉았다.음식은 미리 예약해 놓았기에 사람들이 다 앉자 테이블은 어느새 여러 요리들로 가득 찼다.오미연은 카카오톡으로 부승민에게 뭘 좋아하냐고 물었지만 부승민은 그저 담담하게 답장했다.「아무거나 다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뭘 좋아하는지 물어보세요.」그 답장에 오미연은 더 묻지 않았다.몇 년이나 같이 일하면서 부승민과 여러 번 밥을 먹었지만 부승민이 특별히 즐기는 음식은 본 적이 없었다.부승민은 진중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부승민이 젓가락을 들자 다른 직원들도 식사를 시작했다. 팀마다 분위기 메이커가 있었다. 홍보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분위기는 점차 달아오르고 있었다.부승민은 의자에 기대어 잔을 들고 이따금 대화에 참여했다.어떤 사람들은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위엄을 내뿜는다.오미연은 공용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짚어 부승민 앞에 놓아주었다.“부 대표님이 좋아하실는지는 모르겠어요.”부승민은 앞접시에 놓인 음식을 보면서 대답했다.“감사합니다. 다만 날 위해 이럴 필요는 없어요.”“...”오미연은 이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묵묵히 관찰했다.부승민은 앞접시에 놓인 음식을 전혀 다치지도 않았다.오미연은 금세 실망하고 말았다. 이때 테이블에 놓인 부승민의 핸드폰이 켜졌다.카카오톡이 온 모양이었다.부승민이 핸드폰을 들고 답장을 하려는 순간, 오미연은 카카오톡 상대 이름을 발견하고 말았다.「온하랑」온하랑이 뭘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부승민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그리고 이내 타자를 해서 답장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오미연은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상대가 문자를 하자 부승민은 또 웃으면서 문자를 주고받았다.부승민은 카카오톡을 잘 하지 않는 편이었다. 보통은 메일을 주고받거나 전화를 쳤다. 이렇게 핸드폰으로 카톡을 하는 모습은 아주 드물었다.오미연은 부승민의 행동을 보면서, 또 부승민과 온하랑이 문자를 주고받는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사람들은 노래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직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부승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오미연이 웃으면서 물었다.“부 대표님, 안 가세요?”부승민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오미연이 계속 얘기했다.“주문한 케이크를 노래방으로 보냈거든요. 가서 생일 케이크도 드셔야죠.”부전무도 옆에서 거들었다.“부 대표님, 노래방은 바로 옆이에요. 시간 오래 끌지 않을게요.”“그래요, 갑시다.”부승민은 의자에서 외투를 집어 들었다.부전무가 얼른 부승민의 외투를 건네받았다.노래방에 도착하자 사람들은 이미 노래를 예약하고 있었다.부승민은 구석에 앉아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그는 왼손을 소파에 올려놓고 미간을 문질렀다.이유는 모르겠지만 머리가 약간 아프고 어지러웠다.“부 대표님, 괜찮으세요? 물 좀 드세요.”오미연은 부승민을 보고 종이컵에 물을 따라 부승민에게 건넸다.“고맙습니다.”부승민은 안경을 올리며 오미연을 쳐다보았다.오미연은 부승민을 보면서 웃었다.부승민은 컵을 들고 물을 마셨다.오미연이 정말 그를 좋아하나?긴가민가했다.오늘 밤의 오미연은 꽤 다정했지만 선을 넘는 행동도 하지 않았다.룸에서는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얼마 지난 후, 부전무가 와서 물었다.“부 대표님도 한 곡 하셔야죠.”“먼저 불러요.”부승민이 손을 저었다.부전무는 더 묻지 않았다.부승민이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부승민은 손을 들어 단추를 풀었다. 단추 두 개를 풀자 쇄골이 나타났다.그는 몸을 일으켜 밖으로 가려고 했다.“부 대표님!”오미연은 부승민이 떠나려는 줄 알았다.부승민은 오미연의 표정을 자세히 보고 얘기했다.“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여긴 좀 답답해서.”오미연은 난처한 기색을 드러냈다.이때 종업원이 케이크를 들고 들어왔다. 오미연은 케이크를 자르러 갔다.부승민은 천천히 복도 끝으로 가 온하랑에게 문자를 보냈다.밖에서 한참 서 있었지만 부승민은 여전히 덥다고 느꼈다.룸으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밀폐된 공간에 두 사람만이 남아 아주 조용했다.부승민은 1층 버튼을 눌렀다.오미연은 부승민의 뒤에 서서 부승민을 훑어보고 있었다.검은 셔츠만 입은 그는 소매를 걷어 단단한 전완근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위에 외투를 걸친 채 서 있으니 이루어 말하기 어려운 우아함이 돋보였다.오미연은 용기를 내어 그의 뒤로 다가가 그를 안으려고 했다.하지만 이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몇 사람이 웃으면서 걸어들어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안의 부승민을 보더니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어린 여자 한 명이 부승민을 힐끔힐끔 훔쳐보았다. 부승민은 딱 봐도 성공한 사업가 같았다. 젊긴 했지만 눈동자는 아주 깊었고 온몸에서 남자의 향기가 나고 있었다.게다가 조금 익숙하기도 했다.누구인지 떠올리기도 전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1층에 멈춘 엘리베이터에서 젊은 남녀들이 내렸다.부승민이 같이 내리면서 오미연을 돌아보고 얘기했다.“여기까지면 충분합니다.”“괜찮아요. 조금 더 걷는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앞까지 바래다 드릴게요.”노래방에서 나오자 주변은 네온사인으로 가득했고 시원한 바람이 훅 불어왔다.가을바람은 약간 추웠다.오미연이 다가가 물었다.“부 대표님, 안 추우세요?”“안 춥습니다.”부승민이 고개를 저었다.춥지 않을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이유 모를 열기를 느끼고 있었다.오미연은 주변을 보다가 물었다.“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네요?”“조금 기다려야 합니다.”“그럼 같이 기다리죠 뭐.”오미연은 부승민에게로 걸어갔다.이제 마지막 기회였다.“앗...”오미연은 발을 삐끗하더니 그대로 부승민의 몸에 쓰러졌다.부승민은 오미연을 부축하며 물었다.“괜찮아요?”“부 대표님, 발목을 다친 것 같아요...”오미연이 부승민의 팔에 매달려 얘기했다.“로비까지 부축해 줄 테니 앉아있으세요.”“부 대표님, 병원까지 데려다주면 안 돼요? 제 주머니에 차 열쇠가 있는데...”오미연은 고개를 들어 부승민을 보면서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부
부승민은 그 차가 그의 주차장에 있는 재규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는 얼른 외투를 들고 길을 건넜다.걸어오면서 부승민은 유리창을 통해 온하랑이 의자에 기대 팔짱을 낀 채, 미심쩍은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부승민은 차 앞으로 걸어가 조수석에 타면서 얘기했다.“언제 왔어? 연락하지.”온하랑은 시동을 걸며 얘기했다.“금방 왔어. 마침 다른 사람을 안고 있느라 날 신경 쓰지 못했겠지.”차를 세우자마자 온하랑은 오미연이 그의 품에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느라 전화를 한다는 것도 까먹었다.부승민이 얼른 해명했다.“그저 부축했을 뿐이야.”오늘 밤, 오미연은 선을 넘지 않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부승민에게 손을 댔다.아까 엘리베이터에서, 부승민은 거울에 비친 오미연의 행동을 보고 있었다. 그렇기에 오미연이 발목을 다쳤다는 말도 믿지 않았다.정말 온하랑의 말처럼, 오미연은 부승민을 좋아하고 있었다.“같이 병원에 가주지 그랬어? 그리고 집까지 데려다주면 서프라이즈를 해줄지도 모르는데.”부승민은 온하랑을 보면서 차창을 내려 바람을 쐬었다.“지금도 서프라이즈가 있을 수 있지.”“응?”“집에 가면 알아.”...온하랑이 씻고 있을 때, 부승민은 샤워 가운을 입은 채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약간 붉어졌고 목소리는 쉬었고 호흡은 조금 거칠었다.온하랑은 그제야 부승민이 얘기한 서프라이즈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차에 탈 때부터, 부승민은 몸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집에 돌아왔을 때도 몸은 여전히 뜨겁고 열기로 가득했으며 목까지 바싹 말랐다.약에 당한 것이었다.부승민은 오미연의 짓에 화가 났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뻤다.온하랑은 요즘 계속 그를 거부하고 있었다.그러니 이때를 틈타 두 사람 사이를 좁히는 것이다.온하랑은 구석으로 들어가면서 얘기했다.“찬물 샤워를 하는 게... 저번에도 그랬잖아!”“이제는 추워서 찬물 샤워하면 감기 걸려.”부승민은 가까이 다가오면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온하랑을 잡아먹을 듯이
이건 온하랑의 악취미였다. 온하랑은 다시 부승민에게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그와 가까이 지내다 보니 어느새 또다시 그에게 빠져버렸다. 온하랑은 뻐근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어젯밤의 일을 떠올린 온하랑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부승민은 자꾸 마지막이라고 하면서 멈추지를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온하랑이 의식을 잃을 정도였다.사실 7월에 출장한 후부터 두 사람은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정말 오랜만이었다.게다가 그의 테크닉이 꽤 좋아서 온하랑도 즐기는 편이었다.“깼어? 아침부터 무슨 생각 하길래 얼굴이 이렇게 빨개?”부승민이 다가와 장난스레 물었다.온하랑은 급히 부인하면서 얘기했다.“아무것도 아니야. 왜 아직도 안 일어났어?”평소의 부승민이었다면 이 시간에 일어나 조깅을 하고 있을 것이다.“오늘은 조깅을 쉬려고.”얼마 지나지 않아 부승민은 갑자기 일어나 온하랑의 허리를 껴안고 부드럽게 얘기했다.“지금 일어날래, 아니면 좀 더 눈 붙이고 잘래?”“좀 더 잘래.”온하랑이 이어서 얘기했다.“피곤해.”어젯밤 부승민 때문에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두 사람은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가 일곱 시에 일어났다. 아침을 먹은 후, 그들은 같이 회사로 돌아갔다.마치 예전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엘리베이터 앞에서 헤어질 때, 부승민은 온하랑의 손을 잡고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온하랑은 다른 사람들이 볼까 봐 급하게 그를 밀어냈다.겁이 많은 직원들은 오늘 출근해서 부승민한테 보고를 올릴 때 부승민이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것을 발견했다.언제 터질지 모르는 부 대표님이 아닌, 부드럽고 온화한 부 대표님으로 말이다.이건 아주 좋은 소식이었다.눈썰미가 좋은 사람은 바로 부승민 목에 있는 자국을 발견했다.온하랑이 화장실에 갔을 때, 옆의 칸에서 두 여자 동료가 얘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오늘 부 대표님 봤어요?”“봤는데, 왜요?”“못 발견했어요?”“뭘요?”“그렇게 선명한 걸 못 봤다고요?”“아니, 그러니까 뭘 보라는 거예
“오미연 씨, 제 사무실로 오세요.”부승민의 말투는 담담하고 조금 차가웠다. “네.”오미연은 거울을 들고 보다가 머리카락을 정리한 후, 마음을 굳게 먹었다. 부승민은 누가 약을 탄 것인지 아직 모른다.그녀는 일어나 대표 사무실로 걸어갔다.노크를 두 번 하고 들어간 오미연은 테이블 앞에 서서 물었다.“부 대표님, 무슨 일로 찾으셨어요?”부승민은 고개를 들어 오미연을 보더니 서류를 들고 그녀 앞에 놓았다.“인사이동 명령입니다. 자회사로 배정할 생각인데, 오미연 씨 의견은 어떻습니까?”오미연의 의견을 묻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오미연에게 선택의 여지도 주지 않고 있었다.오미연은 그대로 굳어서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부승민을 쳐다보았다.“부 대표님? 왜죠? 왜 갑자기 저를 전근 보내는 겁니까?”좋아하는 건 죄가 아니었다. 부승민은 곁에 그를 좋아하는 직원을 남겨둘 수는 있었지만 그를 좋아한 나머지 그에게 약을 타는 직원을 남겨둘 생각은 없었다.부승민은 의자에 기대 손깍지를 끼고 얘기했다.“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원하지 않는다면 다른 곳으로 알아볼까요?”본사의 자리는 지키기도 어려운 자리다. 그러니 다른 팀에는 빈자리도 없을 것이다. 오미연이 본사에 남으려면 전무 자리는 지키지 못한다. 자회사에 가면 전무 자리를 지킬 수 있지만 권력의 중심과 약간 멀어지게 된다.오미연은 그제야 알았다.표정이 굳은 오미연은 겨우 입술을 뗐다.“부 대표님, 무슨 얘기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부승민은 시선을 들어 오미연을 보면서 서류를 가리켰다. “인사발령은 다음 주부터 유효합니다. 이번 주 안에 인수인계 끝마치세요.”모르는 척해도 소용없었다.“부 대표님, 제가 순간 미쳤었나 봅니다. 제발 저에게 기회를 한 번만 더 주세요. 절대로 그러지 않겠습니다.”오미연이 애걸복걸했다.“나가세요.”부승민이 차갑게 얘기했다.오미연은 떨리는 입술로 서류를 들고 나가려다가 멈춰서서 부승민을 돌아보았다.“부 대표님, 왜 온하랑은
만약 온하랑이 퉁퉁 부은 입술로 나간다면 다른 사람들의 오해를 사기 십상이었다.“왜 그래? 여긴 내 사무실이라서 함부로 들어오는 사람은 없어.”부승민은 고개 숙여 온하랑을 보면서 얘기했다.“누가 들어오면 그냥 이 틈을 타서 공개해 버리는 거야.”“안 돼.”온하랑이 단호하게 얘기했다.“왜 안 되는 건데?”부승민의 눈빛이 약간 암울해졌다.온하랑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보면서 입술을 움직였다.“지금 공개하고 싶지 않아.”“왜 그러는데? 나랑 서윤이는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야. 네 부탁은 다 들어줄 수 있어.”온하랑은 시선을 내렸다.“그냥 싫다니까. 얼른 날 내려놔. 일하러 가야 해.”부승민은 한숨을 내쉬고 얘기했다.“그럼 여보라고 불러.”“...”온하랑은 이를 꽉 깨물었다.“미쳤어? 이거 놔!”“말 들어.”부승민은 온하랑을 더욱 꽉 껴안았다.“여보라고 부르면 놓아준다니까?”“부승민, 아직도 어린애처럼 굴지 마.”“그냥 어린애라고 생각해.”온하랑은 어이가 없었다.“여보라고 불러주면 놓아준다고?”“응. 난 뱉은 말은 지키는 사람이야.”온하랑은 입술을 꽉 깨물고 낮은 소리로 얘기했다.“여보. 이제 됐지?”“더 크게. 안 들려.”“부승민!”“응, 이제 들리네.”부승민이 웃었다.“여보.”온하랑은 아까보다 목소리를 높여 얘기했다.“이제 됐지?”“말하고 싶은 게 있어.”“말 돌리지 말고 나 좀 내려놔.”“진짜야. 비자가 내려왔어. 휴가 전날에 출발하면 돼.”“알겠으니까 나 좀 내려놔달라고.”부승민은 만족스럽게 온하랑을 내려놓았다.온하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쏜살같이 사무실에서 나갔다.부승민은 온하랑의 뒷모습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문자가 알람 소리에 부승민이 핸드폰을 들었다.[승민아, 추석 연휴에 나 보러 올 거야?]추서윤에게서 온 문자였다.부승민이 답장했다.[바빠. 촬영 잘해.][보고 싶어.]그 문자를 본 부승민은 아예 대답하지 않았다.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문자가 왔다.[승민아, 나 너무
추씨 가문.비서가 서류를 가져왔다.“온하랑의 자료를 가져왔습니다. 한번 확인해 보시죠.”“내려놔.”추상훈이 얘기했다.비서는 서류를 테이블에 놓았다.추상훈은 안의 자료를 펼쳐보았다.첫 페이지에는 온하랑의 기본 자료가 적혀 있었다.이름:온하랑성별:여출생:1998년12월2일(음력)아버지:온강호 어머니:임가희 ‘임가희?’그 세 글자를 본 추상훈의 동공이 약간 떨렸다.다른 자료를 확인하기 전에, 추상훈은 몇 페이지 넘겨 임가희에 관한 자료를 찾았다.시간이 많이 흘렀고 임가희가 죽은 지도 오래되었다. 사진은 없었지만 임가희의 기본 자료만으로도 추상훈은 이 임가희가 그가 아는 임가희라고 확신했다.그리고 다시 온하랑의 출생 연도를 확인한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임가희는 추상훈을 떠난 후, 온강호에게 간 것이었다....점심, 온하랑은 비서와 함께 고객을 만나러 갔다.그러다가 화장실에 들렀다.“온하랑?”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온하랑은 멈춰서서 돌아봤다. 그녀를 부른 건 강민이었다.온하랑은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다.“강민 씨도 여기서 밥 먹어요?”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하랑 씨는요? 승민이랑 같이 밥 먹어요?”“아니요, 고객을 만나러 왔어요.”“승민이랑 사이는 어때요?”“지금까지 보면 괜찮은 편이에요.”지금까지만.온하랑은 추서윤이 다시 부승민에게 연락했는지 안 했는지 몰랐다. 하지만 추서윤은 그렇게 쉽게 부승민을 포기할 사람이 아니다.“두 사람 사이가 좋다고 하니, 꽤 기쁘네요.”“감사합니다.”부승민의 친구들 중에서, 온하랑이 진심으로 대할 수 있는 건 강민뿐이었다.“하지만 승민이는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 그런 일을 겪은 추서윤을 그냥 내버려두지는 못할 거예요.”온하랑의 표정을 본 강민이 물었다.“승민이가 얘기했어요?”온하랑은 고개를 저었다.아마도 온하랑이 기분 나빠할까 봐 추서윤의 얘기를 적게 하는 것 같았다.“두 사람이 연애하고 있을 때, 추서윤이 납치당해서 윤간당했었어요.”그 말을 들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