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형 테이블에서, 부승민이 앉은 자리가 곧 중심이었다. 부승민의 옆으로 오미연과 부 전무가 앉았다.음식은 미리 예약해 놓았기에 사람들이 다 앉자 테이블은 어느새 여러 요리들로 가득 찼다.오미연은 카카오톡으로 부승민에게 뭘 좋아하냐고 물었지만 부승민은 그저 담담하게 답장했다.「아무거나 다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뭘 좋아하는지 물어보세요.」그 답장에 오미연은 더 묻지 않았다.몇 년이나 같이 일하면서 부승민과 여러 번 밥을 먹었지만 부승민이 특별히 즐기는 음식은 본 적이 없었다.부승민은 진중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부승민이 젓가락을 들자 다른 직원들도 식사를 시작했다. 팀마다 분위기 메이커가 있었다. 홍보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분위기는 점차 달아오르고 있었다.부승민은 의자에 기대어 잔을 들고 이따금 대화에 참여했다.어떤 사람들은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위엄을 내뿜는다.오미연은 공용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짚어 부승민 앞에 놓아주었다.“부 대표님이 좋아하실는지는 모르겠어요.”부승민은 앞접시에 놓인 음식을 보면서 대답했다.“감사합니다. 다만 날 위해 이럴 필요는 없어요.”“...”오미연은 이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묵묵히 관찰했다.부승민은 앞접시에 놓인 음식을 전혀 다치지도 않았다.오미연은 금세 실망하고 말았다. 이때 테이블에 놓인 부승민의 핸드폰이 켜졌다.카카오톡이 온 모양이었다.부승민이 핸드폰을 들고 답장을 하려는 순간, 오미연은 카카오톡 상대 이름을 발견하고 말았다.「온하랑」온하랑이 뭘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부승민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그리고 이내 타자를 해서 답장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오미연은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상대가 문자를 하자 부승민은 또 웃으면서 문자를 주고받았다.부승민은 카카오톡을 잘 하지 않는 편이었다. 보통은 메일을 주고받거나 전화를 쳤다. 이렇게 핸드폰으로 카톡을 하는 모습은 아주 드물었다.오미연은 부승민의 행동을 보면서, 또 부승민과 온하랑이 문자를 주고받는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사람들은 노래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직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부승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오미연이 웃으면서 물었다.“부 대표님, 안 가세요?”부승민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오미연이 계속 얘기했다.“주문한 케이크를 노래방으로 보냈거든요. 가서 생일 케이크도 드셔야죠.”부전무도 옆에서 거들었다.“부 대표님, 노래방은 바로 옆이에요. 시간 오래 끌지 않을게요.”“그래요, 갑시다.”부승민은 의자에서 외투를 집어 들었다.부전무가 얼른 부승민의 외투를 건네받았다.노래방에 도착하자 사람들은 이미 노래를 예약하고 있었다.부승민은 구석에 앉아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그는 왼손을 소파에 올려놓고 미간을 문질렀다.이유는 모르겠지만 머리가 약간 아프고 어지러웠다.“부 대표님, 괜찮으세요? 물 좀 드세요.”오미연은 부승민을 보고 종이컵에 물을 따라 부승민에게 건넸다.“고맙습니다.”부승민은 안경을 올리며 오미연을 쳐다보았다.오미연은 부승민을 보면서 웃었다.부승민은 컵을 들고 물을 마셨다.오미연이 정말 그를 좋아하나?긴가민가했다.오늘 밤의 오미연은 꽤 다정했지만 선을 넘는 행동도 하지 않았다.룸에서는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얼마 지난 후, 부전무가 와서 물었다.“부 대표님도 한 곡 하셔야죠.”“먼저 불러요.”부승민이 손을 저었다.부전무는 더 묻지 않았다.부승민이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부승민은 손을 들어 단추를 풀었다. 단추 두 개를 풀자 쇄골이 나타났다.그는 몸을 일으켜 밖으로 가려고 했다.“부 대표님!”오미연은 부승민이 떠나려는 줄 알았다.부승민은 오미연의 표정을 자세히 보고 얘기했다.“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여긴 좀 답답해서.”오미연은 난처한 기색을 드러냈다.이때 종업원이 케이크를 들고 들어왔다. 오미연은 케이크를 자르러 갔다.부승민은 천천히 복도 끝으로 가 온하랑에게 문자를 보냈다.밖에서 한참 서 있었지만 부승민은 여전히 덥다고 느꼈다.룸으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밀폐된 공간에 두 사람만이 남아 아주 조용했다.부승민은 1층 버튼을 눌렀다.오미연은 부승민의 뒤에 서서 부승민을 훑어보고 있었다.검은 셔츠만 입은 그는 소매를 걷어 단단한 전완근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위에 외투를 걸친 채 서 있으니 이루어 말하기 어려운 우아함이 돋보였다.오미연은 용기를 내어 그의 뒤로 다가가 그를 안으려고 했다.하지만 이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몇 사람이 웃으면서 걸어들어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안의 부승민을 보더니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어린 여자 한 명이 부승민을 힐끔힐끔 훔쳐보았다. 부승민은 딱 봐도 성공한 사업가 같았다. 젊긴 했지만 눈동자는 아주 깊었고 온몸에서 남자의 향기가 나고 있었다.게다가 조금 익숙하기도 했다.누구인지 떠올리기도 전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1층에 멈춘 엘리베이터에서 젊은 남녀들이 내렸다.부승민이 같이 내리면서 오미연을 돌아보고 얘기했다.“여기까지면 충분합니다.”“괜찮아요. 조금 더 걷는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앞까지 바래다 드릴게요.”노래방에서 나오자 주변은 네온사인으로 가득했고 시원한 바람이 훅 불어왔다.가을바람은 약간 추웠다.오미연이 다가가 물었다.“부 대표님, 안 추우세요?”“안 춥습니다.”부승민이 고개를 저었다.춥지 않을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이유 모를 열기를 느끼고 있었다.오미연은 주변을 보다가 물었다.“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네요?”“조금 기다려야 합니다.”“그럼 같이 기다리죠 뭐.”오미연은 부승민에게로 걸어갔다.이제 마지막 기회였다.“앗...”오미연은 발을 삐끗하더니 그대로 부승민의 몸에 쓰러졌다.부승민은 오미연을 부축하며 물었다.“괜찮아요?”“부 대표님, 발목을 다친 것 같아요...”오미연이 부승민의 팔에 매달려 얘기했다.“로비까지 부축해 줄 테니 앉아있으세요.”“부 대표님, 병원까지 데려다주면 안 돼요? 제 주머니에 차 열쇠가 있는데...”오미연은 고개를 들어 부승민을 보면서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부
부승민은 그 차가 그의 주차장에 있는 재규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는 얼른 외투를 들고 길을 건넜다.걸어오면서 부승민은 유리창을 통해 온하랑이 의자에 기대 팔짱을 낀 채, 미심쩍은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부승민은 차 앞으로 걸어가 조수석에 타면서 얘기했다.“언제 왔어? 연락하지.”온하랑은 시동을 걸며 얘기했다.“금방 왔어. 마침 다른 사람을 안고 있느라 날 신경 쓰지 못했겠지.”차를 세우자마자 온하랑은 오미연이 그의 품에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느라 전화를 한다는 것도 까먹었다.부승민이 얼른 해명했다.“그저 부축했을 뿐이야.”오늘 밤, 오미연은 선을 넘지 않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부승민에게 손을 댔다.아까 엘리베이터에서, 부승민은 거울에 비친 오미연의 행동을 보고 있었다. 그렇기에 오미연이 발목을 다쳤다는 말도 믿지 않았다.정말 온하랑의 말처럼, 오미연은 부승민을 좋아하고 있었다.“같이 병원에 가주지 그랬어? 그리고 집까지 데려다주면 서프라이즈를 해줄지도 모르는데.”부승민은 온하랑을 보면서 차창을 내려 바람을 쐬었다.“지금도 서프라이즈가 있을 수 있지.”“응?”“집에 가면 알아.”...온하랑이 씻고 있을 때, 부승민은 샤워 가운을 입은 채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약간 붉어졌고 목소리는 쉬었고 호흡은 조금 거칠었다.온하랑은 그제야 부승민이 얘기한 서프라이즈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차에 탈 때부터, 부승민은 몸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집에 돌아왔을 때도 몸은 여전히 뜨겁고 열기로 가득했으며 목까지 바싹 말랐다.약에 당한 것이었다.부승민은 오미연의 짓에 화가 났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뻤다.온하랑은 요즘 계속 그를 거부하고 있었다.그러니 이때를 틈타 두 사람 사이를 좁히는 것이다.온하랑은 구석으로 들어가면서 얘기했다.“찬물 샤워를 하는 게... 저번에도 그랬잖아!”“이제는 추워서 찬물 샤워하면 감기 걸려.”부승민은 가까이 다가오면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온하랑을 잡아먹을 듯이
이건 온하랑의 악취미였다. 온하랑은 다시 부승민에게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그와 가까이 지내다 보니 어느새 또다시 그에게 빠져버렸다. 온하랑은 뻐근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어젯밤의 일을 떠올린 온하랑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부승민은 자꾸 마지막이라고 하면서 멈추지를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온하랑이 의식을 잃을 정도였다.사실 7월에 출장한 후부터 두 사람은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정말 오랜만이었다.게다가 그의 테크닉이 꽤 좋아서 온하랑도 즐기는 편이었다.“깼어? 아침부터 무슨 생각 하길래 얼굴이 이렇게 빨개?”부승민이 다가와 장난스레 물었다.온하랑은 급히 부인하면서 얘기했다.“아무것도 아니야. 왜 아직도 안 일어났어?”평소의 부승민이었다면 이 시간에 일어나 조깅을 하고 있을 것이다.“오늘은 조깅을 쉬려고.”얼마 지나지 않아 부승민은 갑자기 일어나 온하랑의 허리를 껴안고 부드럽게 얘기했다.“지금 일어날래, 아니면 좀 더 눈 붙이고 잘래?”“좀 더 잘래.”온하랑이 이어서 얘기했다.“피곤해.”어젯밤 부승민 때문에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두 사람은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가 일곱 시에 일어났다. 아침을 먹은 후, 그들은 같이 회사로 돌아갔다.마치 예전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엘리베이터 앞에서 헤어질 때, 부승민은 온하랑의 손을 잡고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온하랑은 다른 사람들이 볼까 봐 급하게 그를 밀어냈다.겁이 많은 직원들은 오늘 출근해서 부승민한테 보고를 올릴 때 부승민이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것을 발견했다.언제 터질지 모르는 부 대표님이 아닌, 부드럽고 온화한 부 대표님으로 말이다.이건 아주 좋은 소식이었다.눈썰미가 좋은 사람은 바로 부승민 목에 있는 자국을 발견했다.온하랑이 화장실에 갔을 때, 옆의 칸에서 두 여자 동료가 얘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오늘 부 대표님 봤어요?”“봤는데, 왜요?”“못 발견했어요?”“뭘요?”“그렇게 선명한 걸 못 봤다고요?”“아니, 그러니까 뭘 보라는 거예
“오미연 씨, 제 사무실로 오세요.”부승민의 말투는 담담하고 조금 차가웠다. “네.”오미연은 거울을 들고 보다가 머리카락을 정리한 후, 마음을 굳게 먹었다. 부승민은 누가 약을 탄 것인지 아직 모른다.그녀는 일어나 대표 사무실로 걸어갔다.노크를 두 번 하고 들어간 오미연은 테이블 앞에 서서 물었다.“부 대표님, 무슨 일로 찾으셨어요?”부승민은 고개를 들어 오미연을 보더니 서류를 들고 그녀 앞에 놓았다.“인사이동 명령입니다. 자회사로 배정할 생각인데, 오미연 씨 의견은 어떻습니까?”오미연의 의견을 묻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오미연에게 선택의 여지도 주지 않고 있었다.오미연은 그대로 굳어서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부승민을 쳐다보았다.“부 대표님? 왜죠? 왜 갑자기 저를 전근 보내는 겁니까?”좋아하는 건 죄가 아니었다. 부승민은 곁에 그를 좋아하는 직원을 남겨둘 수는 있었지만 그를 좋아한 나머지 그에게 약을 타는 직원을 남겨둘 생각은 없었다.부승민은 의자에 기대 손깍지를 끼고 얘기했다.“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원하지 않는다면 다른 곳으로 알아볼까요?”본사의 자리는 지키기도 어려운 자리다. 그러니 다른 팀에는 빈자리도 없을 것이다. 오미연이 본사에 남으려면 전무 자리는 지키지 못한다. 자회사에 가면 전무 자리를 지킬 수 있지만 권력의 중심과 약간 멀어지게 된다.오미연은 그제야 알았다.표정이 굳은 오미연은 겨우 입술을 뗐다.“부 대표님, 무슨 얘기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부승민은 시선을 들어 오미연을 보면서 서류를 가리켰다. “인사발령은 다음 주부터 유효합니다. 이번 주 안에 인수인계 끝마치세요.”모르는 척해도 소용없었다.“부 대표님, 제가 순간 미쳤었나 봅니다. 제발 저에게 기회를 한 번만 더 주세요. 절대로 그러지 않겠습니다.”오미연이 애걸복걸했다.“나가세요.”부승민이 차갑게 얘기했다.오미연은 떨리는 입술로 서류를 들고 나가려다가 멈춰서서 부승민을 돌아보았다.“부 대표님, 왜 온하랑은
만약 온하랑이 퉁퉁 부은 입술로 나간다면 다른 사람들의 오해를 사기 십상이었다.“왜 그래? 여긴 내 사무실이라서 함부로 들어오는 사람은 없어.”부승민은 고개 숙여 온하랑을 보면서 얘기했다.“누가 들어오면 그냥 이 틈을 타서 공개해 버리는 거야.”“안 돼.”온하랑이 단호하게 얘기했다.“왜 안 되는 건데?”부승민의 눈빛이 약간 암울해졌다.온하랑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보면서 입술을 움직였다.“지금 공개하고 싶지 않아.”“왜 그러는데? 나랑 서윤이는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야. 네 부탁은 다 들어줄 수 있어.”온하랑은 시선을 내렸다.“그냥 싫다니까. 얼른 날 내려놔. 일하러 가야 해.”부승민은 한숨을 내쉬고 얘기했다.“그럼 여보라고 불러.”“...”온하랑은 이를 꽉 깨물었다.“미쳤어? 이거 놔!”“말 들어.”부승민은 온하랑을 더욱 꽉 껴안았다.“여보라고 부르면 놓아준다니까?”“부승민, 아직도 어린애처럼 굴지 마.”“그냥 어린애라고 생각해.”온하랑은 어이가 없었다.“여보라고 불러주면 놓아준다고?”“응. 난 뱉은 말은 지키는 사람이야.”온하랑은 입술을 꽉 깨물고 낮은 소리로 얘기했다.“여보. 이제 됐지?”“더 크게. 안 들려.”“부승민!”“응, 이제 들리네.”부승민이 웃었다.“여보.”온하랑은 아까보다 목소리를 높여 얘기했다.“이제 됐지?”“말하고 싶은 게 있어.”“말 돌리지 말고 나 좀 내려놔.”“진짜야. 비자가 내려왔어. 휴가 전날에 출발하면 돼.”“알겠으니까 나 좀 내려놔달라고.”부승민은 만족스럽게 온하랑을 내려놓았다.온하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쏜살같이 사무실에서 나갔다.부승민은 온하랑의 뒷모습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문자가 알람 소리에 부승민이 핸드폰을 들었다.[승민아, 추석 연휴에 나 보러 올 거야?]추서윤에게서 온 문자였다.부승민이 답장했다.[바빠. 촬영 잘해.][보고 싶어.]그 문자를 본 부승민은 아예 대답하지 않았다.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문자가 왔다.[승민아, 나 너무
추씨 가문.비서가 서류를 가져왔다.“온하랑의 자료를 가져왔습니다. 한번 확인해 보시죠.”“내려놔.”추상훈이 얘기했다.비서는 서류를 테이블에 놓았다.추상훈은 안의 자료를 펼쳐보았다.첫 페이지에는 온하랑의 기본 자료가 적혀 있었다.이름:온하랑성별:여출생:1998년12월2일(음력)아버지:온강호 어머니:임가희 ‘임가희?’그 세 글자를 본 추상훈의 동공이 약간 떨렸다.다른 자료를 확인하기 전에, 추상훈은 몇 페이지 넘겨 임가희에 관한 자료를 찾았다.시간이 많이 흘렀고 임가희가 죽은 지도 오래되었다. 사진은 없었지만 임가희의 기본 자료만으로도 추상훈은 이 임가희가 그가 아는 임가희라고 확신했다.그리고 다시 온하랑의 출생 연도를 확인한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임가희는 추상훈을 떠난 후, 온강호에게 간 것이었다....점심, 온하랑은 비서와 함께 고객을 만나러 갔다.그러다가 화장실에 들렀다.“온하랑?”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온하랑은 멈춰서서 돌아봤다. 그녀를 부른 건 강민이었다.온하랑은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다.“강민 씨도 여기서 밥 먹어요?”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하랑 씨는요? 승민이랑 같이 밥 먹어요?”“아니요, 고객을 만나러 왔어요.”“승민이랑 사이는 어때요?”“지금까지 보면 괜찮은 편이에요.”지금까지만.온하랑은 추서윤이 다시 부승민에게 연락했는지 안 했는지 몰랐다. 하지만 추서윤은 그렇게 쉽게 부승민을 포기할 사람이 아니다.“두 사람 사이가 좋다고 하니, 꽤 기쁘네요.”“감사합니다.”부승민의 친구들 중에서, 온하랑이 진심으로 대할 수 있는 건 강민뿐이었다.“하지만 승민이는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 그런 일을 겪은 추서윤을 그냥 내버려두지는 못할 거예요.”온하랑의 표정을 본 강민이 물었다.“승민이가 얘기했어요?”온하랑은 고개를 저었다.아마도 온하랑이 기분 나빠할까 봐 추서윤의 얘기를 적게 하는 것 같았다.“두 사람이 연애하고 있을 때, 추서윤이 납치당해서 윤간당했었어요.”그 말을 들
방안은 어두웠고 쥐죽은 듯 조용했으며 가끔 바깥 거리에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만 들렸다.설윤이 네 번째로 몸을 뒤척일 때 옆에서 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이 안 와요?”낮고 유혹적인 목소리가 깊은 밤의 정적을 뚫고 그녀의 고막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동철 씨도 잠이 안 와요?”“네.”최동철은 낮은 소리로 대답했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실내는 다시 조용해졌고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집안의 난방이 너무 커서인지 설윤은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다치지 않은 발목으로 이불을 걷어차며 팔을 이불 밖으로 내밀었는데 조심하지 않고 최동철이 밖에 놓은 팔과 부딪혔다.피부가 닿는 순간 설윤은 재빨리 팔을 비켰으나 뜻밖에도 최동철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떠나지 못하게 했다.그의 손은 매우 컸다. 뜨거운 온도가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그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얼굴에 퍼지며 설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설윤은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에서 손목을 빼려고 힘을 썼지만 실패했다.“뭐 하는 거예요?”“보통 운동 후에 몸이 피곤해서 잠이 잘 오는데, 한 번 시도해 보겠어요?”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둠 속에서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설윤은 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치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묻는 것 같았다.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그녀의 대답은 마치 닫힌 문을 여는 열쇠처럼 들렸다. 최동철은 그녀의 팔을 풀어주었는데 그녀가 손을 거둘 때 신속히 이불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남자는 공격적인 기운을 풍기며 달려들어 순식간에 그녀를 덮쳤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또 겁이 났다.그녀는 숨을 죽이고 손끝을 그의 가슴에 떨어뜨린 채 천천히 위로 거슬러 올라가 어깨에 놓았다.“... 몸에 상처가 있는데 그럼...”“조심할게요.”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마주쳤다.서로의 눈 밑에는 빛을 볼 수
설윤이 차례로 밖에 씌워져 있는 랩과 붕대를 제거하니 몇 바늘 꿰맨 상처가 드러났다.그녀는 알코올로 주변을 부드럽게 닦은 후 다시 연고를 꺼내 면봉으로 고르게 발랐다.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드러난 옆모습은 매끄러운 얼굴 라인을 자랑했다. 아마 스무 살 어린 나이어서인지 볼에는 젖살이 있어 통통했고 피부는 희고 섬세해서 모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거즈를 몇 바퀴 두른 후 설윤은 나비 모양으로 매듭을 지었다.“다 됐어요.”“고마워요.”“별말씀을요.”설윤은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난 샤워하러 가고 싶어요. 욕실에 걸상 하나 놔줄 수 있어요?”최동철은 몸을 일으켜 동그란 걸상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다시 나오면서 그는 다치지 않은 팔을 내밀려 말했다.“부축해 줄게요.”설윤은 느릿느릿 침대로 옮겨 한 손을 그의 팔에 얹고는 다치지 않은 발을 먼저 땅에 대고는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갔다.그녀를 안쪽 욕실로 데려다준 후 최동철은 샴푸 등을 욕실 벽에 있는 선반 위에 놓아주고는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아 주었다.설윤은 느릿느릿 옷을 벗었다. 속옷은 팬티는 이거 하나밖에 없었다. 빨면 곧 마를 수 있겠지만 마르기 전에는 그저...이틀 전에는 혼자 살아서 괜찮았지만 지금은 곁에 남자가 한 명 많아졌다.그러나 씻지 않으면 위생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두 장 더 사는 건데...’고민 끝에 설윤은 속옷을 빨았다. 다 빤 후 드라이어로 말리면 10분 정도면 다 마를 수 있었다.이때 설윤은 문득 최동철이 나왔을 때 머리를 말리지 않은 것이 떠올랐는데 보아하니 드라이어로 팬티를 말린 것 같았다.간단히 샤워를 마친 후 설윤은 팬티를 씻고 말린 후 간단히 머리도 말렸다. 그런후 속옷과 팬티를 입고 목욕 수건을 둘렀는데 다행히도 이 수건은 충분히 길어서 가슴부터 무릎까지 감쌀 수 있었다.이때 밖에서 문소리가 들렸다.“다 씻었어요?”“...네.”“그럼 제가 들어갈까요?”
그녀의 최근 행동을 보면 물질, 환경, 품질 등에 큰 요구가 없는 것 같다."물론이죠."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도련님은 일반인에게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설윤은 회억에 잠겨 말했다.“제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이웃들이 그러는데 엄마 병은 고칠 수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일찍 퇴원했기 때문에 병세를 끌어서 돌아갔다고 했어요.”엄마가 돌아간 후 집주인은 장례를 치러주고는 그녀를 보육원에 보냈다.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최동철은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미안해요.”그는 그녀의 신원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문서에는 간단히 ‘6살 때 생모 병으로 사망’으로만 적혀있었다. 그녀의 입을 통해 들으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괜찮아요. 다 지나갔어요.”설윤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혹시 동철 씨는 돈이 싫으세요?”최동철은 그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최국환과 임가희와 암투를 벌였을까?“돈은 나에게 있어 숫자일 뿐이죠. 어쩌면 우리가 다투는 것은 돈이 아니라 권력이에요. 더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권력이죠.”최동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설윤은 아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에서 최동철을 끌어들인 후 그는 주위를 살펴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이렇게 허름한 곳에 왔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참았을 뿐이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겨울 날씨여서 그런지 금세 어두워졌다.저녁을 먹은 후 설윤은 또 얼음찜질하고 연고를 한 번 더 발랐다.발목 부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보아 최동철이 샤워를 하는 모양이다.며칠 동안 피해 살다가 드디어 안전하고 안정된 환경에 이르자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어깨에 부상이 났다고 설윤이 일깨워주었지만 최동철은 신경 쓰지 않고 랩으로 상처를 감싼 후 씻으러 갔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어젯밤에 본 화면이 떠올랐다.넓은 어깨와 가슴,
최동철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그런데, 젊은이. 아내랑은 어떻게 알게 됐어? 정말 잘 어울리네.”둘 다 잘생기고 아름다웠으니까.“저희는... 대학 동기입니다.”“그래? 몰라보겠어. 아내는 참 어려 보이는데 벌써 스물여섯이라니.”최동철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네, 동안이라 자주 오해를 받습니다.”스물여섯은 설윤의 가짜 나이였다.집주인은 작은 양념병을 들고 나와 최동철에게 건넸고 우유 두 병도 함께 내주었다.돌아온 후, 최동철은 집주인 아주머니의 말을 설윤에게 전했다.설윤은 웃으며 말했다. “동철 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서로 잘 맞춰주니 완벽하네요.”최동철은 가볍게 웃으며 가스레인지의 밸브를 열었다.점심은 밥에 감자 볶음과 돼지고기였다.최동철의 요리 실력은 훌륭했다. 삼겹살을 바삭하게 볶아내 느끼함 없이 밥과 잘 어울렸다.다행히도 다친 쪽은 왼팔이라 오른손으로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었으나 속도는 다소 느렸다.식사 후, 설윤은 다시 한 번 발목에 냉찜질을 했다.냉찜질을 끝낸 후 최동철이 약을 가져오자 설윤이 말했다. “제가 할게요.”“그래요.” 최동철은 순순히 응했다. 한 손으로는 불편했으니까.바쁜 대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외출할 수 없는 민박집 안, 두 사람은 갑자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설윤은 침대에 기대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고 최동철은 소파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잠시 멍하니 있었다.설윤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옆모습은 뚜렷한 이마선과 오똑한 콧대가 더해져 눈매가 깊어 보였고 날카로운 턱선이 또렷했다.정말 잘생겼다.그의 이목구비는 최국환과 약간 닮았다.하지만 나잇살이 들어 퉁퉁해진 최국환과는 달리 최동철은 참으로 젊었다. 눈빛 속에도 서른 살 남자의 단단함으로 가득했고 이는 세상 물정에 밝고 노련한 최국환과 완전 달랐다.잠시 머뭇거리던 설윤이 말했다. “동철 씨, 피곤하면 여기서 주무세요.”그의 키는 너무 커서 작은 소파에선 편히 쉴 수 없었다.설윤은 발목 부상
최동철은 약품이 담긴 봉지를 찾아 안에서 멍과 부기를 가라앉히는 연고를 꺼냈다. 고개를 돌리니, 설윤이 느릿느릿 신발을 벗고 있었다.그는 연고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그녀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내가 해줄게요.”신발과 양말을 벗자 뽀얗고 작은 발이 드러났다. 다섯 개의 발가락은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고 동글동글 귀여웠다. 발톱은 깔끔한 곡선을 이루며 정리되어 있었으며 발등의 뼈선은 유려하게 흐르며 섬세한 곡선을 그렸다.발목 근처에는 큼직한 멍과 부기가 올라와 있었다.최동철은 그녀의 발바닥을 받쳐 들고 부은 부위를 살짝 눌러보았다.“앗...” 설윤이 숨을 들이마시며 얼굴을 찡그렸다.“아파요, 누르지 마세요.”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상태가 꽤 심각해 보이는데 내가 침대까지 옮겨줄 테니까 당분간은 움직이지 마요.”그렇게 말하며 일어나 그녀를 안으려 했다.“안 돼요!” 설윤은 급히 손으로 그를 막았다. “동철 씨도 팔 다쳤잖아요.”최동철은 몸을 숙여 다친 왼팔은 내리고 오른팔로 그녀의 다리 밑을 감싸 안았다. “두 손으로 내 목을 잡아요. 이쪽 팔은 힘을 쓰지 않을 거니까 안심해요.”한 손으로 안으려고?설윤은 그의 목에 양팔을 감고 조심스럽게 몸을 맡겼다.그는 오른팔로 그녀의 허벅지를 받치고 두 걸음 만에 침대 곁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잠시만 기다려요. 집주인한테 얼음팩 좀 받아올게요.”“네.”최동철은 약 10분 뒤 얼음주머니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하나는 냉장고에 넣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발목에 살며시 대주었다.얼음의 차가운 감촉에 설윤은 본능적으로 입술을 앙다물고 손으로 얼음주머니를 누르며 말했다.“너무 차가워요.”“20분은 찜질해야 해요. 하루에 세 번에서 네 번 정도로요.”설윤은 그에게 붕대를 가져와 얼음주머니와 발목을 단단히 감도록 했다.그녀는 침대 머리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 둘 다 밖에 나가지 말죠. 배달 앱으로 장을 보면 되니까요. 그런데 동철 씨,
의사는 최동철을 한번 쳐다보며 말했다. “젊은이, 앞으로는 아내 말 잘 들어요.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여보, 들었지? 의사 선생님도 그러시잖아!”최동철은 잠시 입을 말없이 있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어.”봉합이 끝난 뒤, 의사는 약을 처방해주었다.병원을 나서며 설윤은 최동철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디로 갈 거예요? 누가 데리러 와요?”최동철은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 짧게 대답했다. “당분간은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설윤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요?”“그건 알 필요 없어요.”설윤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요.”그녀는 두 걸음 앞서 걸으며 말했다.“이 작은 도시는 꽤 조용하네요. 며칠 더 머물 생각인데, 동철 씨도 안 간다니까 같이 지낼까요? 서로 보호도 되고.”최동철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호텔은 눈에 띄니까 단기 임대 민박을 찾는 게 더 안전하고 편리할 거예요.”“좋아요.”“근데 검색해 보니까 민박은 대부분 더블침대 방이더라고요. 괜찮으세요?”“설윤 씨가 괜찮다면 전 상관없어요.”“그럼 예약할게요.”최동철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온라인으로 예약할 거예요?”대부분의 예약 앱은 신분증 정보를 입력해야 해서, 한 번 사용하면 위치가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설윤은 그의 걱정을 알아채고 휴대폰을 흔들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이 폰은 제 이름으로 등록된 게 아니에요. 추적 못 할 거예요.”최동철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준비가 철저하네요. 그런데 어떻게 임가희한테 이렇게 몰렸어요?”“임가희가 이렇게 빨리 제 존재를 눈치챌 줄 몰랐거든요. 그랬다면 좀 더 철저히 준비했을 텐데요.”최동철은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먼 곳을 바라봤다. 마치 자신이 그녀의 정보를 넘긴 장본인이 아니라는 듯이.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두 사람은 예약한 민박으로 향했다.민박은 단일 방 구조로, 면적은 47㎡. 방에 들어서면 왼쪽에는 오픈형 주방이 있고 가스레인지
이튿날 아침, 최동철은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패딩 점퍼에 청바지, 스니커즈, 그리고 새로 정리한 헤어스타일까지 더해지니 몇 년은 젊어 보였다. 게다가 넉넉한 핏의 패딩은 그의 체형을 자연스럽게 감춰주었다.“자, 마스크도 잊지 말고 쓰세요.”“네.” 최동철은 대답하며 책상 위의 마스크를 집어 썼다.지금 이 모습이라면 자세히 보지 않는 한 그를 알아보긴 어려울 터였다.최동철은 설윤이 입고 있는 패딩 점퍼를 힐끗 바라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설윤은 웃으며 설명했다. “작은 가게라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어요. 그리고 커플룩이 신분을 숨기기에 더 좋아요.”“그렇군요.”“제가 먼저 내려가서 체크아웃하고 주변 상황을 살펴볼게요. 연락드리면 그때 내려오세요. 미리 택시도 불러놓을게요.”“알겠습니다.”“그럼 다녀오겠습니다.”“네.”설윤은 크고 작은 가방을 들고 나갔는데 가방 안에는 두 사람이 입었던 옷이 담겨 있었다. 이곳에 그냥 두면 흔적이 남을 수 있어 길 가다 버릴 생각이었다.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설윤은 무사히 로비에 도착해 체크아웃을 마쳤다. 거리로 나서며 핸드폰으로 택시를 부르면서도 그녀는 자연스럽게 주변을 살폈다.길 건너편 왼쪽, 작은 만두 가게에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가게 앞에는 접이식 테이블 두 개가 놓여 있었고 그중 한 테이블에는 건장한 남자가 앉아 가끔씩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그 자리는 아침을 먹으며 호텔을 감시하기에 딱 좋은 위치였다.설윤은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는데 감시자는 그 남자 한 사람뿐인 듯했다.아마도 어젯밤 이들이 호텔 방마다 수색했지만 최동철의 흔적을 찾지 못해 속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한 명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주변을 수색하러 간 모양이었다.2분쯤 지나 설윤이 부른 택시가 호텔 앞에 도착했다.설윤은 최동철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차 문을 열며 짐을 싣다가 말했다. “기사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 남편이 금방 내려올 거예요.”“네, 알겠습니다.”설윤은 다시 로비로 들어갔다.1분쯤
최동철이 말했다.“그럼 내일 병원에 다녀와야겠어요.”“제가 도와드릴게요.”약을 다 바른 뒤, 설윤은 그에게 거즈를 감아주며 말했다. “됐어요, 이제 좀 쉬세요. 전 잠깐 나갔다 올게요.”“어디 가려고요?” 최동철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임가희 쪽 사람들이랑 마주칠 수도 있으니 조심해요.”“필요한 물건을 좀 사야 하거든요. 걱정 마세요.” 설윤은 가볍게 비웃으며 말했다. “그 인간들 손아귀에서 도망쳐 나온 제가 다시 잡힐 것 같아요?”최동철은 그녀가 방금 주머니에 넣은 휴대폰을 힐끗 보며 물었다. “왜 아버지한테 연락해서 상황을 설명하지 않는 거예요?”“이미 기회를 놓쳤어요. 제가 뭐라 해도 믿지 않을걸요?”“그럼 이렇게 지내는 것도 괜찮아요?”“당연히 괜찮지 않죠. 하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어요. 기회만 생기면 반드시 다시 돌아갈 거예요.”“성공하길 바라요.” 최동철이 씩 웃으며 말했다. “돈은 있어요? 부족하면 제 카드를 써요.”설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럼 조금만 써도 돼요?”돈이야 많을 수록 좋은 법이니까.최동철은 벽에 걸린 외투를 가리켰다. “지갑은 저기 외투 주머니에 있으니까 직접 꺼내요. 현금은 많지 않지만 블랙카드는 비밀번호가 필요 없어요. 사람이 적은 ATM에서 현금을 인출할 수 있을 거예요.”외투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니 고급 가죽의 촉감이 손에 닿았다.“얼마든지 뽑아도 괜찮아요?” 그녀가 돌아보며 물었다.“물론이죠.”“최 대표님, 참 후하시네요.”“제 목숨은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까요.”설윤은 밖으로 나갔다.최동철은 항생제를 먹고 씻은 뒤 침대에 누워 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곤했던지 스르르 잠이 들었다가 갑자기 깨어났다.시계를 보니 벌써 열한 시였다.설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최동철이 일어나 그녀를 찾으러 갈까 고민하던 찰나, 설윤이 돌아왔다. 그녀는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늦었네요. 위험한 일은 없었어요?”“없었어요.” 설윤은 고개를 저으며
최동철은 그 말을 듣고 샤워기를 틀었다.설윤은 간식이 담긴 비닐봉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그 위에 놓인 칼을 가렸고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걸어가 문을 여니 예상대로 복도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그는 방 안을 힐끗거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키우는 햄스터가 실수로 도망쳤는데, 혹시 보셨나요?”설윤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방금 밖에 나갔다 와서요. 잘 모르겠네요. 남편한테 물어봐 드릴게요.”그녀는 욕실 쪽을 향해 소리쳤다. “여보, 혹시 햄스터가 들어오는 거 봤어?”샤워기에서 물 흐르는 소리만 들릴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설윤은 욕실 문을 살짝 열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여보, 작은 햄스터가 들어온 거 못 봤어?”몇 초간 침묵이 흐른 후, 그녀는 머리를 빼고 남자에게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못 봤대요. 다른 곳도 한번 찾아보세요.”“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남자는 의심 없이 돌아섰다.최동철처럼 몸에 상처를 입은 사람을 숨겨줄 이는 남자일 수밖에 없었다.설윤은 차분히 문을 닫고 귀를 문에 붙여 조심스럽게 소리를 들었다. 남자가 정말로 떠났음을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욕실 문을 열며 말했다. “갔으니 나와요.”그리고 테이블로 가서 비닐봉지 안에서 약들을 꺼냈다. “자요, 여기 이 약들이 충분한지 확인해봐요.”최동철은 뒤에서 걸어나와 약의 종류와 양을 살펴봤다. “고마워요.”“별말씀을요.” 설윤은 생수를 주전자에 붓고 버튼을 눌렀다. “제가 약 발라줄까요?”“그럼 부탁할게요. 고마워요.”최동철은 잠시 망설였으나 곧 수락하고 천천히 겉옷을 벗기 시작했다.그가 왼팔을 제대로 쓰지 못하자 설윤이 다가가 도와주었다. 그녀는 그의 겉옷을 벗기고 벽걸이에 걸었다.안에는 짙은 회색 니트가 있었고 상처 부위는 터져 피로 얼룩져 있었다. 니트를 벗으려면 팔을 들어야 했기에 설윤은 그의 어깨 상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냥 잘라낼까요? 이 옷은 이미 알아본 사람들이 많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