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림이 이렇게 쉬운 문제조차 풀지 못하는 걸 보자 최국환은 순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둘째 아들은 원해부터 몸이 약했고 공부에서도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몸이 약하니 학업에 쏟을 수 있는 에너지가 부족한 거겠지.’그렇게 스스로 납득한 후 차분하게 문제를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설명이 끝나자마자 최동림은 금세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짓더니 환하게 웃었다. “이제 알겠어요! 아빠, 감사합니다.” 사실 그는 이 문제를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그랬다. 이렇게 하면 아빠와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고. 최국환은 한 번만 듣고도 문제를 이해하는 아들이 기특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앞으로 모르는 문제 있으면 언제든 아빠한테 물어보렴.” “네!” 최동림은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설윤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닫자마자 불을 켜기도 전에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를 강하게 벽으로 밀쳤다. 순간적으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놀라 비명을 지르려던 찰나 거친 손이 빠르게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딸깍.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천장의 조명이 켜지며 은은한 불빛이 방 안을 환히 밝혔다. 설윤은 순간적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빛에 적응하려 애썼다. 그리고 마침애 눈앞의 인물을 또렷이 마주했다. 최동철. 그는 문 앞에 서서 한쪽 손으로 그녀를 벽에 가둔 채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한 달 만에 봤다고 날 못 알아보는 거야?” 낮고 서늘한 목소리. “설마요.” 설윤은 그의 손을 가볍게 치우고 여전히 평정심을 유지한 채 나지막이 되물었다. “그런데 이렇게 늦은 밤에 무슨 일이신데요. 최 대표님?” 최동철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탐색하는 듯한 어딘가 날카로운 시선. 설윤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어쩐지 불안했다. 그녀는 눈길을 피하며 자
그녀는 어딘가 쑥스러운 듯 손끝으로 옷자락의 끈을 만지작거렸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붉어진 귀 끝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민박에 머무는 며칠 동안 그들은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다. 준비할 시간이 없어서였을 수도 있고 그날 밤이 너무 격정적이어서 그럴 겨를조차 없었을 수도 있다. 어떤 이유든 둘 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최동철이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잠시 시선을 고정하더니 혀끝으로 어금니를 굴리며 낮게 물었다. “내 거야?” 설윤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그의 표정을 살폈다. “네.” 그녀의 대답과 동시에 최동철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곧 감정을 지운 듯 차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근데 말이야. 아버지한테 들었는데 네가 임 여사한테 쫓겨나기 전부터 이미 임신했다고 하던데?” 설윤의 손끝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그건 거짓말이에요.”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임가희가 절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먼저 덫을 놓았어요.” 임가희의 수법은 너무나도 조악했다. 처음부터 그녀는 유나영이 임가희의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반대로 그녀를 역이용하기로 했다. “만약 다움시에서 나를 만나지 못했다면?”최동철이 천천히 물었다. “낙태 수술 기록이라도 위조해서 아버지한테 가서 울었겠지?” “네...” 그녀는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임신할 줄은 몰랐다. 최국환에게 보낸 자료에는 임신 9주 차라고 적혀 있었지만 실제로는 5주 남짓이었다. 최동철은 낮게 웃었다. 그러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났다. “그러니까 네 원래 계획대로라면 결국 다시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겠다는 거네. 돈이 필요해서 그랬다면서 왜 내 제안은 거절했던 거야?” ‘이 인간은 아직도 그걸 따지고 있는 거야?’설윤은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잠시 침묵하더니 등을 꼿꼿이 세우고 발끝을 응시한 채 중얼거렸다. “그때 생각이 바뀌었어요.”그녀는 조용히 숨을
최동철의 입술이 설윤의 쇄골을 스쳤다. “아무도 모를 거야.”“그만해요. 저... 임신 중이에요. 안 돼요.”“알아.”“회장님은 최동림 공부 봐주시러 가셨으니까 곧 돌아오실 거예요.”“아버지는 오늘 서재에서 밤새 일할 거야.”“그렇다고 해도... 당신이 계속 방에 없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문 잠갔어. 그리고 다들 내가 방해받기 싫어하는 거 알잖아.”“그럼 어떻게 나왔어요?”“테라스로.”설윤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조용히 말했다. “흔적 남기지 않게 조심해요.”“응.”잠시 후, 최동철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윤은 입술을 꼭 다문 채 빠르게 손을 닦아내고 일어났다. 그녀는 서둘러 창문과 테라스 문을 열어 공기를 환기시켰다. 찬 공기가 얼굴을 스치자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옷을 단정히 여민 최동철이 테라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간다.”“잠깐만요.” 설윤이 그의 팔을 잡았다. 최동철이 걸음을 멈추고 의아한 눈빛으로 돌아봤다. 그 순간, 설윤은 커다란 종이티슈 덩어리를 그의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최동철은 잠시 말을 잃었다. “이건 당신 거예요. 가져가세요. 회장님이 보면 제가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최동철은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설윤은 그가 창문을 넘어 테라스로 이동하는 걸 지켜봤다. 본가의 방들은 각자 테라스를 가지고 있었고 서로 멀지 않은 거리였다. 최동철의 방은 설윤의 방 바로 옆은 아니었지만 중간에 빈 객실 하나만 두고 가까운 편이었다. 그는 방으로 돌아가기 전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설윤은 곧장 방을 점검했다. 이상한 흔적은 없는지, 냄새가 남아 있지 않은지. 모든 걸 확인한 뒤에야 깊은 숨을 내쉬었다. 한편, 최동철은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종이티슈를 쓰레기통에 던지고 책상 앞으로 갔다. “똑똑.”컴퓨터를 켜고 일을 시작하려던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최동철은
“형이야 당연히 막아보려고 했지. 하지만...”최동철은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소용없었어. 아버지가 결정한 일은 누구도 막을 수 없어. 그리고... 아버지는 원래 그런 사람이야.”아이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최국환은 언제나 강하고 존경할 만한 존재였다. 그런데 형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반사적으로 반박했다. “그건 혹시 설윤 아줌마가 아버지를 유혹한 거 아닐까요?”“유혹?”최동철은 피식 웃으며 동생을 내려다봤다. “유혹이라는 단어 뜻은 제대로 알고 쓰는 거야?” “들었어요. 아빠 같은 사람한테는 붙으려는 여자가 많대요. 그러니까 설윤 아줌마도 그랬을 수도 있잖아요.” 최동림은 사립 기숙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학비가 비싼 만큼 친구들도 하나같이 부잣집 자식들이었고 자연스럽게 그런 집안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됐다. 아버지가 바람을 피우고 다른 여자와 가정을 차린 친구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안도했다. ‘우리 집은 달라. 아빠는 엄마를 사랑하니까.’하지만 지금 그 믿음이 완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동림아, 형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해?” “대단한 사람이요.” 최동림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아이는 존경 어린 눈빛으로 형을 바라봤다. 그들은 나이 차가 많아 자주 만나진 못했지만 형에 대한 동경은 항상 있었다. 어머니와 주변 사람들이 형을 이야기할 때마다 그는 형이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지 새삼 깨닫곤 했다. 형이 해외 명문대에 진학할 때도 집안 도움 없이 오로지 실력으로 합격했고 지금도 모든 걸 스스로 해내고 있었다. “외모로 보면 형이랑 아버지 중에 누가 더 잘생겼어?” “당연히 형이죠.” ‘아빠는 이미 늙었으니까.’ “몸매는?” “그것도 당연히 형이죠.” “재산은?” 최동림은 이번엔 조금 고민했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더 많겠지만... 형도 결코 부족하지
“동림아, 네가 임 여사님을 걱정하는 건 알겠지만 어머니는 스스로 잘 해결하실 거야.” 최동림은 입을 열려다 다시 다물었다. 엄마의 태도가 이상했다. 친구네 아빠가 바람을 피웠을 때 친구 엄마는 크게 분노하고 난리를 쳤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본 적도 있다. 아내가 남편의 내연녀를 공격하는 영상 그리고 그 영상 아래 달린 수많은 댓글. ‘저런 여자들은 가만두면 안 돼.’ ‘원래 저런 건 맞아야 정신 차리지.’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연녀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는? 엄마는 너무도 평온했다. 심지어 그 여자, 설윤에게까지 온화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형, 그런데 엄마는 왜 그러시는 거야?” “너한테는 아직 좀 어려운 얘기야. 그냥 엄마 말 잘 따르기만 하면 돼.” “나도 알고 싶어. 형, 알려줘.” 최동림은 형을 똑바로 바라봤다. 아이의 눈빛은 맑고 어렸다. 하지만 그 안에 깃든 것은 단순한 호기심만이 아니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최동철은 결국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동림아, 너 이익이 뭔지 알아?” “알지. 돈!”최동림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자 최동철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꼭 돈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야. 사람과의 관계, 사업 기회, 사회적 지위, 더 나은 생활. 이 모든 게 다 이익이 될 수 있어.”“음...” 최동림은 이해가 되는 듯 안 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를 보며 최동철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정략결혼도 결국 이익과 이익이 맞물린 관계야.” “정략결혼?”“그래. 두 집안이 서로 협력하면서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해 맺는 거지. 남자가 신분이 낮다면 여자 집안의 도움을 받아 사회적 지위를 높일 수도 있고 반대로 여자가 남자의 배경 덕을 볼 수도 있어.”“임 여사님도 마찬가지야. 아버지가 결혼하면서 더 나은 생활을 했고 더 많은 인맥과 사회적 지위를 얻었어.”“그게 바로 결혼이 임 여사님에게 가져다준 이익이야.” 최동림은 조금 헷갈린
최동림은 입을 떡 벌린 채 멍하니 굳어버렸다. 순진한 초등학생의 머릿속이 처음으로 거대한 충격이 받았다. 형이 하는 말은 그동안 책에서 읽고 선생님에게 배운 것과 전혀 달랐다. 하지만 거짓이 아니었다. 그저 현실일 뿐. 그리고 그 현실은 바로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동화 속에서 왕자와 공주는 사랑으로 맺어지고 행복하게 살아간다. 애니메이션에서는 악당이 벌을 받는다. 하지만 현실에서 가장 강력한 ‘보스’는 아버지였다. 권력, 재력, 사회적 지위.아버지는 모든 걸 가졌고 온 가족이 그의 뜻에 따라야 했다. 옳고 그름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중요한 건 아버지의 기분. 그리고 지금 아버지는 설윤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렇기에 엄마는 설윤에게 어떤 위협도 가해서는 안 됐다. 최동림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최동철은 동생이 충격을 소화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기에 조용히 책상으로 가서 업무를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최동림은 멍한 얼굴로 형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형, 만약 내가 좀 더 똑똑하고 건강했다면... 아빠는 설윤 아줌마의 아이를 원하지 않았을까?” “아니.” 최동철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최동림은 형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형이 부족한가?’ ‘형이 건강하지 않은가?’ 전부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신이 태어났다.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모아둔 용돈을 전부 설윤 아줌마에게 주고 아이를 지우고 떠나달라고 하면... 아줌마께서 동의할까?” “아니.”최동철은 여전히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 “지금은 이미 설윤 아줌마가 마음대로 떠날 수 없는 상황이야. 아줌마가 동의한다고 해도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을 거고. 만약 네가 그런 행동을 하면 아버지는 네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의심할 거야. 심지어 임 여사님이 시켰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그러면 임 여사님께
“걱정 마세요. 연지도 이제는 잘못을 깨달았어요.” 최국환은 문득 무언가 떠올랐는지 눈을 좁혔다. “고은이는 어떻게 할 거야? 재원이가 그 아이를 받아들일 수 있겠어?” “재원이가 받아들이지 못한다 해도 우리 최씨 가문에서 아이 하나 키우는 건 일도 아니야.” 최국환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 설윤과 몇 마디 나눈 후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오씨 가문에서는 지금 폭풍이 몰아치고 있다는 것을. 그도 그럴 것이 해외에 있어야 할 막내아들이 갑자기 집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오재원! 네가 정말 내 기대를 저버리는구나.”거실에 울려 퍼지는 노기 어린 외침. “탁!” 오형일이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테이블을 세게 내리쳤다. “몰래 귀국한 것도 모자라 또다시 임연지랑 얽혔다고? 네가 정말 나를 잡아먹으려고 작정한 거냐?” 옆에 있던 오승은도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나섰다. “재원아, 네가 왜 집행유예를 받았는지 잊었니? 임연지는 너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야. 그런 아이는 너와 어울리지 않아. 엄마 말 듣고 다시 해외로 나가 있어.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질 거야. 그때 가서 엄마가 좋은 아가씨를 골라줄게.” 그러나 오재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버지, 어머니, 더 이상 말씀하셔도 소용없어요.”그는 또렷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전 연지만 사랑합니다. 연지와 결혼할 거예요.” 순간, 거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오기 전에 연지가 저한테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조용히 숨을 들이마시던 오재원이 비웃듯 낮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부모님이시니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근데 아버지, 어머니는요? 말만 하면 연지를 깎아내리고 모욕하잖아요.”“대체 어느 쪽이 더 못된 겁니까?” “너!” 오승은은 충격과 분노로 얼굴이 창백해졌다. “임연지는 우리 집안의 돈과 지위를 탐내니까 네 앞에서 착한 척하는 거야.” “재원아, 아직도 모르겠니?
‘최국환도 낚시하러 간다던데 만약 마주치면 어쩌지? 특히 그 양반이 결혼 얘기라도 꺼내면... 끝장이야.’ 마침 걱정을 마치기가 무섭게 집사가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회장님, 최 회장님께서 함께 낚시 가자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차는 이미 문 앞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오형일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이런 젠장.’ 결국 낚시 도구를 챙겨 트렁크에 실은 후 그는 묵묵히 뒷좌석 문을 열고 올라탔다. “국환아, 오래 기다렸지.” “아니야. 나야 괜찮지.”운전석에 앉아 있던 최국환이 힐끗 그를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형일이 너, 오늘따라 얼굴이 별로다. 무슨 일 있어?” “우리 집 그 망나니 놈 때문에 속 터지겠다.”오형일은 한숨을 쉬며 분을 꾹 삼켰다. “노는 거야 그렇다 쳐도 사고만 안 치면 내가 이렇게까지 화낼 일도 없지. 근데 하는 짓마다 골치 아프게 만드니 어쩌겠어?” “재원이야 아직 젊잖아. 결혼하면 좀 달라질 수도 있지.” 최국환은 이미 상황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는 적당한 타이밍을 보고 조용히 본론을 꺼냈다. “형일아, 사실 나도 들었어. 재원이랑 연지 일 말이야. 우리 두 집안은 예전부터 각별했잖아. 그래서 더 솔직하게 말하는 거야.”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이어갔다. “재원이랑 연지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야. 그리고 지금 연지가 재원이의 아이를 가졌다고 하더군. 내 생각엔 이참에 그냥 결혼시키는 게 맞지 않나 싶어.”오형일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주먹이 저절도 쥐어졌고 차 안의 공기가 급격히 싸늘해졌다. 그는 낮게 코웃음을 치며 날카롭게 말했다. “말이 쉽지. 만약 네 아들 동철이가 그랬다면 넌 이 결혼 받아들일 수 있겠냐?” 최국환은 단호하게 답했다. “동철이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아. 그리고 방금 네가 말했잖아? 재원이는 아직 철이 없다고. 동철이랑 비교할 상대가 아니지.”그는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솔직히 이 일이 승혁이한테 벌어졌다면 나도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