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단잠에서 깨어난 임완유는 바쁘게 아침을 준비하는 예천우를 발견했다.예천우의 표정에는 행복함이 그려져 있었다.요즘 들어 예천우는 처음 느껴보는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다.‘인생이 이렇게 아름다울 줄이야.’오전 아홉 시.임완유는 정시에 회사에 나타났다. 어젯밤 생각해 본 후 임완유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당장 천상그룹을 떠나는 건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되었다.지금 떠나는 건 호랑이가 꼬리를 내리고 도망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떠난다고 해도 뭐라도 성과를 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본인을 사랑해 주는 남궁은서한테 미안해질 것 같았다.직원들은 어느새 임완유에게 존경심을 품고 있었다.짧은 시간이지만 임완유가 해온 모든 일들은 직원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회사의 업무 효율도 굉장히 높아졌다. 물론 아직 확실한 수치가 보이진 않지만 직원들은 느낄 수 있었다.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임완유의 핸드폰이 울렸다. 문자 메시지 속의 0의 개수를 세어보던 임완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20조...정말 20조가 임완유의 계좌로 들어왔다.‘예천우는 도대체 돈이 얼마나 많은 거야...’임완유는 참지 못하고 전화를 꺼내 예천우의 번호를 눌렀다.“천우야, 네가 나한테 20조를 보낸 거야?”“응, 어제 다 얘기된 거 아니었어?”“2천억이라고 하지 않았던가?”“그래? 까먹었네. 괜찮아. 어차피 내 돈은 다 네 돈이니까. 남은 돈은 네가 쓰면 돼.”예천우가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다.“...”임완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많았다.“안 돼. 이건 네 돈이야. 돌려줄게.”“만약 너무 많다고 생각하면 돈이 필요한 사람한테 기부해 줘.”예천우가 얘기했다.“...”“맞다, 천상그룹의 일은 끝냈어?”“무슨 일? 퇴사 말하는 거야?”임완유가 물었다.하지만 마침 사무실 앞까지 걸어온 양서은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서 다시 돌아갔다.‘뭐? 임 대표님이 퇴사하신다고? 왜? 임 대표님이 얼마나 일을 잘하
“나도 모르겠다. 모든 건 네게 달렸어.”옛 용왕은 거기까지 얘기한 후 어쩔 수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천우야, 예씨 가문의 일에 대해서 들었지?”“네.”예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넌 어떻게 생각하니.”옛 용왕이 물었다. “곧 용도로 가겠습니다.”이건 예천우가 결심한 일이기에 옛 용왕에게 감출 필요가 없었다.“그래. 넌 착한 아이니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네게 알려줘야 할 것이 있어. 예씨 가문 일을 정리할 때 조심해야한다. 그들에게는 아주 강한 배후가 있어.”“누구죠?”“누구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육지의 신선 급인 사람이다.”“그렇게 강한 사람이라고요? 그렇다면 예씨 가문은 그 사람의 상대가 될 수 없겠는데요?”“만약 네가 예씨 가문을 도와주려고 한다면 그 사람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얼른 노력해서 옥패의 비밀을 풀어보거라.”“네.”예천우는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옥패를 생각하니 또 가슴이 답답했다.이미 두 개의 옥패를 손에 넣었지만, 이를 합쳐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아직 무언가가 부족한 듯했다.옛 용왕은 전화기를 내려놓고 어두운 표정을 드러냈다. 그는 예천우에게 옥패를 준 것이 과연 옳은 결정인지를 생각하고 있었다.솔직히 생각하면 예천우는 부담을 이기지 못해 얼른 그 옥패의 비밀을 풀었어야 한다. 하지만 예천우는 아직도 옥패를 갖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한 달, 한 달만 더 지켜보자. 만약 그때까지 아무런 진전이 없다면... 그때는 해치워야 해.”그렇지 않으면 당하는 건 옛 용왕이 될 것이다.열한 시.회사 임원들은 대표 사무실 밖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보였다.다들 갑작스러운 소식에 본인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그 소식은 바로 임완유가 퇴사한다는 소식이었다.임완유는 회사에 오래 머무른 건 아니지만 회사의 업무 효율을 높여주었다.그런 훌륭한 대표가 본사와 뜻이 맞지 않아서 퇴사한다니.그들이 봤을 때 이건 임완유의 자원적인 퇴사가 아니라 본사의 해고와 같았다.왜냐하면 양서은은
그 말이 떨어지자 회사 사람들은 순식간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특히 그중 한 사람이 참지 못하고 크게 외쳤다.“예 대표님, 임 대표님이랑 사이가 좀 안 좋으신 건 알지만... 임 대표님은 정말 훌륭하신 분이에요. 우리 회사의 희망이란 말입니다! 제발 떠나지 않게 해주실 수 없나요?”“맞아요, 예 대표님. 부탁드릴게요. 임 대표님을 보내지 말아 주세요!”“그래요! 저희에겐 임 대표님이 꼭 필요해요!”“제발요. 임 대표님을 여기 남겨주세요!”“...”누군가 앞장서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간절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들 감정이 북받쳐 올라와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반응만 봐도 임완유가 얼마나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그 모습을 본 예선홍은 물론이고 당사자인 임완유마저 역시 깜짝 놀랐다.이 회사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렇게까지 자신을 지지해 주는 사람이 많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예선홍은 속으로 크게 흔들렸다. 이 순간 그는 임완유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유능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이란 걸 비로소 깨달았다.‘회장님께서 그녀에 대해 그렇게 강하게 말한 것도 단지 며느리라서가 아니라 정말 실력이 있어서였겠지.’그래서 그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여러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퇴직 문제는 아직 확정된 게 아닙니다. 제가 직접 임 대표님과 상의하려고 이렇게 찾아온 거예요.”그도 역시 함부로 확답을 줄 수는 없었다. 솔직히 아직 임완유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녀가 진심으로 회사를 떠나고자 한다면 이런 자리에서 강제로 붙잡는 건 오히려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 수 있었다.예선홍의 말에 사람들은 조금 안도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자신들의 행동이 효과가 있었던 걸까 하는 기대감이 피어올랐다.“됐어요. 다들 이제 흩어지세요.”임완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예선홍을 사무실 안으로 안내했다.사무실에 들어서자 예선홍
‘어머님께서 이렇게까지 날 도와주는 건 역시 천우 때문일 거야. 천우를 사랑하니까 나도 아껴주시는 거겠지.’그런 마음을 느끼고 있자니 임완유는 문득 자기 엄마가 떠올랐다.‘왜 나는... 그런 엄마를 갖지 못했을까. 지금 나와 천우 사이의 격차는 엄청 클 수도 있어. 어쩌면 지금의 나는 예전에 엄마가 평가했던 천우보다도 더 뒤처진 상태일지 몰라.’그런데도 남궁은서는 단 한 번도 자신을 무시하거나 깔보지 않았고 오히려 어느 하나 빠짐없이 다정하게 챙겨줬다.‘엄마는...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임완유는 몇 번이나 전화를 걸까 말까 고민했지만 결국 누르지 못했고 자기가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유은수는 한 번도 먼저 전화를 걸어온 적이 없었다.‘됐어. 이런 생각 해봤자 뭐 해...’그래도 예천우가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를 떠올리는 순간 임완유의 입가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점심 무렵, 예천우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임완유는 전화를 받고 곧장 건물을 나섰다.출입구를 나서자마자 바쁘게 어디론가 향하는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경인아!”“임 대표!”주경인은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한 얼굴로 급히 달려와 임완유를 불렀다.“무슨 일이야? 왜 그렇게 급하게 뛰어다녀?”임완유가 의아한 듯 묻자 주경인은 숨을 고르며 급히 말했다.“다른 방법이 없어서. 완유, 우리는 동창이잖아. 제발 본사 좀 같이 가줘. 예 대표님을 꼭 만나야 해. 이미 각오는 다 했어. 정말 큰 희생도 감수할 생각이니 제발 예 대표님이 한 번만 기회를 주셨으면 좋겠어.”주경인은 간절한 눈빛으로 임완유를 바라보았다. 임완유가 함께 가지 않으면 자신은 본사 입구에서 쫓겨나기 십상이었다.“신재생 배터리 사업 때문에 그러는 거지?”“응.”“근데... 예 대표님은 아까 오전에 여기서 떠났어.”“뭐? 다녀가셨다고? 지금 어디 계시는 거야? 혹시... 날 데려다줄 수 있어?” 주경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재빨리 물었다.“지금쯤이면 비행기 타셨을 거야.
주경인은 잠시 멈칫했다. 임완유가 누구에게 물어보려는 건지 순간 떠올랐지만 더 묻지는 못했다. 지금은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백성그룹에서 제시한 마감일이 바로 오늘이었다.예천우가 예약해 둔 식당은 근처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도보로 3분 남짓한 거리였기에 그녀들은 금방 도착했다.레스토랑은 외관부터 범상치 않았다. 가격대도 일반인이 쉽게 들어올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고 내부 분위기 역시 고급스럽고 깔끔했다.예천우가 알려준 룸 번호에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이미 그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임완유가 들어서고 주경인도 뒤따라 들어왔다. 그녀들이 안으로 들어선 순간 테이블에 앉아 있는 청년이 눈에 들어왔다.스물 중후반쯤 되어 보이는 그 남자는 말끔하고 단정한 인상이었으며 단박에 시선을 끄는 외모에 균형 잡힌 체격까지 갖추고 있었다.첫눈에 봐도 여자들이 호감을 느낄 법한 인상이었다.‘저 사람이 혹시 임 대표의 남자 친구일까? 근데 진짜 잘 생겼다... 눈도 좋네. 근데 저렇게 잘생긴 사람이 과연 능력은 있을까? 아니면 그냥... 얼굴로 먹고사는 스타일인 건 아니겠지?’주경인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임완유는 당당한 회사 대표이니 그녀의 곁에 있는 남자라면 당연히 눈여겨보게 될 수밖에 없었다.예천우도 자연스럽게 주경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는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곧 차분해졌다.임완유는 주경인을 굳이 데려온 김에 일이 잘 풀리면 협력 얘기도 해보자는 생각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소개를 건넸다.“천우, 이쪽은 내가 말했던 친구야. 한통 재료 회사의 주경인 주 대표야.”그리고 이어서 잠시 머뭇거리던 임완유는 뜻밖에도 이렇게 말했다.“경인아, 이쪽은 내 남편 예천우야.”원래 임완유는 남자 친구라고 소개하려다 자신도 모르게 남편이라는 단어가 입 밖으로 나왔다.그녀 마음속에서 예천우는 언제나 단 하나뿐인 남편이었다.세상이 어떻게 바뀌든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든 그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았다.“남편이셨어?”주경인은 조금 놀란 듯했지만 이내 빠
주경인은 살짝 당황했다. ‘갑자기 협상 얘기로 들어가는 거야? 그럼 혹시... 이미 해결할 방법이 있다는 뜻?’그렇다면 결국 관건은 자신이 얼마나 매력적인 조건을 내걸 수 있느냐에 달린 셈이었다.‘그래 분명 그럴 거야!’그녀는 서둘러 말했다.“예 대표님께선 어떤 방식이 괜찮다고 생각하세요?”그러자 예천우는 의외로 담담하게 말했다.“그건... 주 대표님이 먼저 말해보시죠.”그 말에 주경인은 잠시 망설였고 아버지가 언급했던 조건이 떠올랐다. 너무 높은 욕심을 부릴 순 없었고 지금은 그저 회사를 살리는 게 우선이었다.“... 가능하다면 1,000억 원을 투자받고 지분은 60%를 드릴 수 있어요. 대신 회사의 운영과 관리는 저희가 계속 맡고 싶습니다.”지금처럼 다급한 상황에서 더 이상 바랄 수는 없었다.하지만 예천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1,000억으론 부족해요. 그 정도로는 파급 효과조차 나기 힘들죠.”그는 말을 이어갔다.“이렇게 하죠. 저희가 4조 원을 투자하고 지분 80%를 갖겠습니다. 대신 회사 운영은 완유가 맡는 걸로.”“4... 4조 원이요?”주경인은 숨이 멎는 듯했다.그 숫자는 그녀가 상상했던 선을 훨씬 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지분 80%에 회사 운영권도 임완유에게 넘어가는 조건이었다.그녀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혹시… 아버지께 먼저 여쭤봐도 될까요?”“물론이죠.”예천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주경인은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예상대로 조급하고 긴장감이 가득했다.백성 그룹에 회사를 넘기면 조건도 나쁘겠지만 그 뒤에 어떤 문제들이 기다릴지 알 수 없었다.예천우의 제안을 들은 주 회장은 잠시 침묵에 빠졌다.4조 원이라는 금액은 단순한 자금 지원이 아니라 회사의 연구 개발과 설비를 대대적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하지만 회사 운영권을 잃는다는 건 아버지로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그러나 그는 결국
주경인은 순간 멍해졌다. 예천우를 의심한 게 티가 났던 걸까. 그걸 눈치챈 듯 임완유의 표정엔 눈에 띄는 불쾌함이 스쳤다. 그녀는 차분한 듯 말했지만 그 안엔 단단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경인아, 겨우 수십조 가지고 그래? 천우한테 그 정도는 별것도 아니야.”“...”주경인은 할 말을 잃었다.그녀가 말한 수십조는 사실 약간의 과장이 섞인 수치였다. 물론 공장 설립이나 대규모 설비 구축에는 수십조 수천조 단위의 자금이 드는 게 맞긴 했다.하지만 그걸 가볍게 넘겨버리는 임완유의 말투에 주경인은 어쩐지 말문이 막혔다.그런 주경인의 반응을 읽은 듯 임완유는 아무 말 없이 휴대폰을 꺼내더니 메시지를 하나 보여주었다.“안 믿기면 이거 한번 볼래?”주경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화면을 들여다봤고, 그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20... 20조원?”액정에 떠 있는 수치는 너무나도 선명했다. 그녀는 숨을 삼켰다. 지금껏 이런 숫자를 직접 본 적은 없었다.“이걸... 천우 씨가 준 거야?”“그렇다기보다... 그때 내가 배터리 산업에 관심 있다고 하니까 그냥 아무렇지 않게 20조 원쯤은 용돈처럼 보내더라고. 모자라면 또 말하래.” 임완유는 마치 대수롭지 않다는 듯 덤덤하게 말했다.이쯤 되자 주경인은 머릿속이 하얘졌다.임완유를 오래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그건 정말로 사실일 가능성이 컸다.‘20조? 그게... 용돈이라고? 이 남자는 대체 정체가 뭐지.’주경인은 눈앞의 예천우가 점점 현실감 없는 인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너무 압도적이어서 오히려 믿기 힘든 감각이었다.그때 예천우도 그 대화를 듣고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내가 언제 20조를 용돈이라고 했어?”속으로 생각하며 어이없는 표정이 떠올랐다.자신도 돈이 많긴 하지만 20조를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용돈이라 말하진 않았다. 하지만 임완유는 지금 일부러 저렇게 말하고 있었고 예천우는 그제야 눈치를
“됐어요. 완유를 봐서라도 그냥 넘어가 줄게요.”예천우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막 전화를 걸려던 찰나 갑자기 주경인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는 화면을 확인하더니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마... 두석이예요.”주경인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오, 잘됐네요. 전화비 아꼈네요.”예천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미소 지었다.“...” 주경인은 난감한 얼굴로 전화를 받았고 예천우가 옆에서 듣기 쉽도록 바로 스피커폰을 켰다.“마 대표님, 안녕하세요.”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지만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단호하고 싸늘했다.“주 대표님, 우리 쪽 제안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목소리엔 일말의 여유도 없었고 거들먹거리는 기색마저 느껴졌다.주경인은 슬쩍 예천우를 쳐다봤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불안하게 다가왔다.“마 대표님, 그 조건은 솔직히 너무 과합니다. 저희로선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그래요? 그 말은 곧 거절하겠다는 뜻이군요?”마두석의 말투가 점점 거칠어졌다.주경인은 다시 한번 예천우를 바라봤지만 여전히 반응은 없었다. 그래서 주경인은 망설이다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죄송합니다. 저희로선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좋아요. 그 말씀... 기억하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저도 봐주지 않겠습니다.”목소리에는 노골적인 협박이 실려 있었고 주경인의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결국 예천우를 향해 간절한 눈빛을 보냈고 그제야 예천우가 입을 열었다.“마 대표님, 제법 위세 등등하시네요?”“누구야?”전화기 너머에서 마두석의 목소리가 잠시 멈췄다. 그 목소리엔 분명 낯선 듯한 불쾌감이 나타났지만 곧바로 확신에 가까운 두려움이 드러났다.“설마... 예 대표님이신가요?”“나야.”예천우의 말투는 여전히 담담했다.“근데 예 대표님이라 부르지 마. 괜히 불편하게 그러지 마시고 그냥 계속하던 대로 반말해. 마 대표님께서 화나시면 어쩌나 싶기도 하고.”“아, 아뇨! 절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예 대표
“그리고 너... 이신향, 네가 뭐 대단한 여자가되는 줄 알아? 내가 기회를 줬는데도 걷어찼으니... 이제부터는 나도 봐주는 거 없어.”조신우는 눈빛을 서늘하게 바꾸며 이어 말했다.“이선우, 이건 네 누나 탓이니까 괜히 날 원망하진 마. 선택은 둘 중 하나야. 40억을 준비하든가... 아니면 감방 갈 준비나 해.”이쯤 되자 그는 완전히 본색을 드러냈고 말 그대로 막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자기 분노 때문에 정작 예천우가 어떤 사람인지 왜 그런 여유 있는 태도를 보였는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조신우의 말이 끝나자 방 안 분위기는 싸늘하게 가라앉았고 이재동을 비롯한 가족들 얼굴에는 먹구름이 드리워졌다.특히 이재동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애원하듯 말했다.“조 도련님... 말씀이 좀 심하십니다. 이건 우리 잘못이 아니잖아요. 저희는 줄곧 도련님 편이었는데요.”“그래?”조신우는 입꼬리를 비틀며 차갑게 대꾸했다.“그럼 간단하지. 당장 저놈 끌어내. 저 예천우란 놈 지금 당장 꺼져주면 내가 조금은 봐주지.”그 말에 이재동은 주춤거리며 예천우를 바라봤지만 그보다 먼저 이신향이 목소리를 높였다.“아빠, 지금 무슨 말씀이세요? 그게 무슨 말이냐고요!”이재동은 딸의 질문에 아무 말도 못 하고 결국 고개를 돌려 예천우를 바라보며 힘없이 말했다.“천우야, 그만 돌아가. 난 널 사위로 생각한 적 없어. 우리 신향이한텐 조 도련님이 훨씬 더 어울리는 짝이야.”그 말에 조신우는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이제 좀 상황 파악되냐? 누가 진짜 실력 있는 사람인지... 누가 진짜 남자인지. 어디서 싸구려 가짜 술이나 들고 와선 뭔가 될 줄 알았나 본데... 그런다고 네가 찌질이란 사실이 달라질 것 같아?”그는 속으로 확신하고 있었다.‘저 술을 어디서 주워왔든 아니면 맛이 그럴듯해서 속은 거든... 저 새끼는 결국 그냥 찌질한 놈이야.’그는 원래 몇 천만 원짜리 술이라도 꺼내서 겁줄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조차 없다고 느끼고 있었다.하지만 그때
예천우의 말이 끝나자 그제야 방 안 사람들 모두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기 시작했다.결국 술은 이성진 회장의 손에 들어갔지만 문제는 이 술은 조신우가 내놓은 것도 그가 사죄의 의미로 바친 것도 아니라는 점이었다.말하자면 조신우는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았고 단지 무릎만 꿇고 멋쩍은 사과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이 장면을 바라보던 조혁진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이 자식이... 감히 신우한테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냐. 대체 무슨 심보일까.’그는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따지고 들 상황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조신우가 이번 사고만 무사히 넘기면 그땐 따로 시간을 내서 따끔하게 손을 봐줄 생각이었다.이성진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상황을 파악하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재밌는 친구구먼. 이름이 뭐지?”예천우는 짧고 간결하게 대답했다.“예천우입니다.”“그래. 이름 기억해 두지. 오늘 자네 덕 좀 봤네.” 이성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 이 술을 돈 주고 못 마시는 것도 아니지만 워낙 희귀한 술이다 보니 아무리 부자라도 마실 기회가 흔치 않았다.82년산 라피노 같은 와인은 평생 마셔도 마실 수 있는 술이겠지만 이런 국보급 백주는 한 병 마실 때마다 하나가 사라지는 셈이다.“회장님, 별말씀을요.”예천우는 여전히 담담한 어조였다.이성진은 더 말하지 않고 시선을 돌리다 테이블 위에 놓인 마오타이를 보고는 다시 한번 눈썹을 치켜세웠다.“오성 마오타이 58년산이라니... 자네 보통 친구는 아닌데?”“지인이 준 겁니다.”예천우가 가볍게 대답했다.“지인도 대단한 사람이구먼. 자네란 사람... 점점 더 궁금해지는군.”이성진은 감탄한 듯 웃으며 지갑에서 명함 하나를 꺼냈다.“이건 내 명함이네. 기회 되면 같이 한잔하지.”조혁진은 속으로 진저리를 쳤다.‘세상에... 술 한 병 때문에 회장님이 저 녀석한테 이렇게 친절하게 대하시다니. 대체 저놈 주변에 어떤 인맥이 있는 거야?’그는 그 순간 조신우보고 예천우를 조심하라
“됐어. 난 사과받을 자격 없어.”이성진 회장이 싸늘하게 말하자 조신우는 완전히 얼어붙었다.그는 그저 백주 협회 회장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막말을 퍼부은 그 사람이 그렇게까지 대단한 인물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게다가 자기 삼촌인 조혁진조차 식은땀을 흘리며 머리를 조아릴 정도였다.하지만 조신우가 몰랐던 건 애초에 조혁진이 이번 술자리의 자리에 함께하게 된 것도 운이 좋았을 뿐 그조차도 이 자리에 참여할 자격이 애매한 사람이었다.왜냐하면 오늘 자리는 강흥시의 유명 인사인 도 대표님이 이 지역 투자 건으로 방문하면서 직접 시장이 배석해 마련한 자리였기 때문이다.“뭘 멍하니 서 있어. 당장 무릎 꿇어!”조혁진의 얼굴은 이미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조신우를 꾸짖었다.조신우는 더는 버틸 수 없었다.그 누구보다 조혁진에게는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걸 잘 알았고 그의 얼굴만 봐도 지금 자신이 얼마나 큰일을 벌였는지 직감할 수 있었다.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특히 이신향 앞에서 무릎을 꿇는 건 자존심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았다.조혁진은 이미 분노의 극에 달해 주먹이라도 날릴 기세였다.그제야 조신우는 이를 악물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회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눈이 어두워 뵙지를 못했습니다. 제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그에 맞춰 조혁진도 고개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이 회장님, 신우가 정말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제가 따로 시간을 내서 제대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조만간 반드시 직접 찾아뵙겠습니다.”“됐어.”이성진은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사과하러 온다는 건 결국 선물이나 뇌물 같은 걸 들고 오겠다는 뜻이었다.하지만 그는 그런 건 관심도 없었다.“오늘처럼 기분 상하게 하는 일도 드물었지만 그래도 이 술을 만난 덕분에 기분이 조금 풀렸어. 그 공으로 이번만은 눈 감고 넘어갈게.”그러고는 술병을 가볍게 들어 보이며 물었다.“이 술은 네 것이야
“실례합니다. 혹시 이 술이... 여러분 겁니까?”이성진 회장은 룸에 들어서자마자 묻지 않고는 못 참겠다는 듯 바로 입을 열었다.그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어떻게 이런 고급술을 들고 와서는 가짜라고 단정 짓고 그냥 버리려 한단 말인가.’방금 밖에서 스쳐 지나가던 종업원이 술을 들고 가는 모습을 보고 이상한 향이 나서 따라가 봤더니 그게 바로 그 술이었다.이 말을 들은 모두가 순간 멈칫했다.하지만 가장 놀란 사람은 다름 아닌 이제동이었다. 그는 막 돌아와 후회로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그 술병을 든 노인을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저, 저 술이... 다시 돌아왔다고?’그는 거의 튀어나올 듯한 목소리로 다급하게 말했다.“네. 저희 겁니다. 그 술은 저희 거 맞아요.”이성진 회장은 단호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정말 어처구니가 없군요. 이게 진짜 명품 술인데... 어떻게 가짜라고 생각해서 버릴 수가 있습니까? 이건 그냥 낭비도 아니고 범죄 수준이에요!”이제동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고 사실 그도 진짜인지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저 노인의 말투를 보니 정말 진짜였던 모양이다.그런데 갑자기 조신우가 비죽 웃으며 끼어들었다.“이보세요, 노인네. 연기 참 잘하시네요? 도대체 예천우가 얼마를 쥐여줬길래 이렇게 연극까지 해주는 거죠?”“뭐라고?”이성진 회장의 눈이 번쩍 빛났고 그는 당장이라도 테이블을 뒤엎을 기세였다.“연기 말이에요. 아주 실감 나는데요?”조신우는 비웃으며 예천우 쪽을 힐끔 쳐다봤다.“예천우, 솔직히 말해 봐. 이거 뭐 하자는 거야? 가짜 술 하나로 사람들 속이고 저 노인네까지 고용한 거야?”그 말에 이성진은 완전히 폭발 직전이었다.“헛소리 작작 하게나. 젊은이, 내가 지금까지 했던 말은 하나도 거짓 없고 모두 사실이야. 못 믿겠으면 백주 협회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 봐. 내 사진이랑 이력 다 나와 있을 거야.”그 말이 끝나자 조신우는 또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였다.화장실에 간다던 이제동이 다시 돌아왔다.하지만 얼굴엔 미묘한 실망감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사실 그는 화장실에 간 게 아니었다.밖으로 나가 방금 나간 여종업원을 찾아다녔지만 아쉽게도 이미 늦은 뒤였다.그 술을 돌려받지 못한 것이다.‘하... 아까 그냥 진짜라고 말할걸. 괜히 허세 부리다 술까지 날려버렸네...’그는 깊은 후회를 씹어 삼키며 방 안으로 들어섰는데 탁자 위에 놓인 또 다른 술병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이건 뭐야?”“예천우가 또 꺼낸 거죠. 근데 딱 봐도 평범한 마오타이잖아요. 병에 페이톈 마크도 없고 제대로 된 것도 아니네요.” 조신우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고 예천우는 그런 그를 힐끗 보며 마치 바보 보듯 조용히 되받아쳤다.“페이톈 마크가 없으면 무조건 싸구려야?”“당연하지!” 조신우는 자신만만하게 외쳤고 예천우는 피식 웃으며 다시 물었다. “그럼 페이톈이 나오기 전 마오타이가 뭔지 알아?”조신우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는 원래 백주보단 와인을 선호했기에 이런 배경지식엔 무지했다.그때였다.이제동이 눈을 번쩍이며 말했다. “설마... 1958년산 오성 마오타이?”그 한마디에 방 안 분위기가 다시 술렁였다.조신우는 다시금 멈칫했고 예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맨날 입에 페이톈만 달고 다니더니... 오성 마오타이는 들어본 적도 없나 보네요? 조씨 가문의 자제라는 분이 참...”“흥. 누가 알아. 그것도 가짜일 수 있잖아?” 조신우는 씩씩대며 말했다.“아저씨, 이번에도 한 번 맛 좀 봐주시겠어요?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 좀 해주시죠.”예천우도 미소를 띠며 맞받아쳤다.“맞아요. 진짜인지 확인해야죠. 가짜라면 또 쓰레기통 직행이니까요.”그 말에 이제동은 손끝이 살짝 떨렸다.그는 천천히 술병을 들어 포장과 마개를 살펴봤다.예전에 단 한 번 직접 본 적 있었고 아주 조금만 맛본 기억이 뇌리에 남아 있었다.‘설마... 정말 그 술이?’조심스레 병을 열고 한 잔을 따랐다.잔을
이제동은 처음엔 이 술이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둘러댈지 고민했지만 예천우가 정확히 이 술의 가치를 알고 있다는 걸 깨닫자 결국 포기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예전에 용도에서 열린 경매에서 이 술 한 병이 무려 2억 넘게 낙찰됐어.”“뭐라고요? 2억이요?”방 안이 술렁였다.조신우는 그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말도 안 돼. 저런 평범한 놈이 어떻게 그런 술을 가질 수 있단 말이야?’ 그는 곧바로 외쳤다. “말도 안 돼요. 이거... 이거 분명 가짜예요. 가짜 술이 틀림없다고요!”그 말에 한지연과 이신향도 순간 흔들렸다.‘그러고 보니... 혹시 진짜 가짜 술이면 어쩌지?’예천우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조용히 말했다.“진짜인지 가짜인지야... 아저씨가 한 모금 드셔보시면 아실 겁니다.”“그... 그래. 마셔볼게.”이제동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술잔을 들어 한 잔을 따랐다.입에 가져간 뒤 천천히 음미하자 그 향과 맛이 그대로 온몸에 퍼졌고 마치 영혼 깊은 곳까지 따뜻하게 감싸주는 듯한 느낌이 전해졌다.‘이야... 이건... 진짜야.’말하지 않아도 그의 표정은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특히 한지연은 남편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그가 백주에 얼마나 진심인지 그 눈빛 하나로도 이미 확신할 수 있었다.‘진짜... 진짜인 건가?’하지만 조신우는 그 광경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이게 뭐야... 왜 저런 놈이 이런 술을 가지고 있냐고... 왜!’ 그는 억지로 말꼬리를 물었다. “아저씨... 어떠세요? 정말... 정말 이게 진짜 같나요?”그 말엔 은근한 압박이 실려 있었다. 지금 진짜라고 대답하면 조신우의 체면은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그걸 눈치챈 이제동은 살짝 당황한 기색을 보이다가, 곧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어. 맛은 괜찮은데 아주 뛰어나다기보다는 평범한 것 같네. 글쎄... 진짜는 아닌 거 같기도 하고...”그 말에 방 안 분위기가 살짝 멈칫했다.‘진짜...
“천우야, 아까 술 가지고 왔다며? 얼른 꺼내 봐. 네 아저씨가 술 하나는 진짜 좋아하셔.” 한지연이 살갑게 말했다.이제동은 뭔가 말하려다 말았지만 아내가 눈을 부릅뜨며 째려보자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조신우는 입꼬리를 올리며 여유롭게 앉아 있었다.그는 이제동도 자기 편이고 이 집 분위기도 다 자기 쪽이라 생각하니 완전히 이긴 기분이었다.‘좋아. 어디 보자. 저 자식이 들고 왔다는 술이 대체 얼마나 형편없는 건지 직접 보자고.’예천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용히 가방에서 술 한 병을 꺼냈다.병에는 분주라고 적혀 있었고 얼핏 봐도 평범한 술은 아닌 듯한 깊이 있는 외관이었다.물론 마오타이 같은 유명 술은 아니었지만 병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이 묘하게 남달랐다.그 모습을 본 이제동은 순간 멈칫했다.평소 백주를 즐겨 마시는 그는 술꾼끼리 떠도는 이야기와 시장 정보를 꽤 알고 있었다.‘이거... 설마... 50년산 한정판 분주야?’그 이름만 들어도 술 애호가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불리는 고급 백주였다.십몇 년 전 용도에서 열린 한 경매에서 단 한 병에 4억 원 넘게 낙찰됐던 그 술이었다.지금 시세로 치면 훨씬 더 높을지도 몰랐다.‘설마 진짜 그런 술일 리가... 아니겠지?’조신우는 병 라벨을 힐끔 보더니 툭 비웃으며 말했다.“봐. 내가 뭐랬어. 역시 마오타이도 아니잖아. 고작 집에서 들고 온 싸구려 술이겠지.”그러다 이제동이 술병을 유심히 바라보며 표정이 묘하게 변하자 슬쩍 웃으며 말했다. “아저씨, 그리 화내지 마세요. 어차피 그냥 술 아닙니까. 다음에 제가 제대로 된 마오타이 한 병 챙겨드릴게요. 진짜 좋은 걸로요.”조신우는 그 말에 은근히 힘을 실었다.지금 마오타이는 프리미엄이 붙어서 웬만하면 60만 원은 훌쩍 넘는 고급술이었기 때문이다.하지만 바로 그때 이신향이 뭔가 말을 꺼내려던 찰나 이제동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눈은 술병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목소리엔 믿기지 않는 떨림이 담겨 있었다. “이, 이게 설마... 50년
예천우가 잠시 말이 없자 한지연은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물론 그녀 입장에선 아들을 위해 이신향이 조신우 같은 사람과 인연을 맺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천우가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그녀는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서둘러 나섰다.“조신우 씨, 농담이죠? 여긴 그냥 평범한 식당인데 그런 최고급 술이 있을 리가 있나요.”하지만 조신우는 턱을 치켜들며 기세등등하게 말했다.“그럼 딴 데 가시죠. 이딴 데선 도저히 못 먹겠네요.”그 말에는 노골적인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풋, 네가 나한테 밥 한번 사보겠다고? 한참 멀었어. 이 정도 식당에서 몇십만 원 쓰는 것만으로도 네 눈은 휘둥그레지겠지.’조신우는 속으로 그렇게 예천우를 조롱하고 있었다.그런데 예천우는 그를 슬쩍 쳐다볼 뿐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무심하게 말했다.“애초에 난 널 초대한 적도 없어. 먹기 싫으면 안 먹어도 돼.”그 말에 조신우의 얼굴빛이 확 어두워졌고 이제동은 깜짝 놀라 급히 끼어들었다.“천우야, 너 지금 무슨 말버릇이니. 조신우 씨가 어떤 분인데? 이런 분께 음식 대접하게 된 것만으로도 너에겐 큰 영광이야.”예천우는 살짝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고 그러자 이신향이 참지 못하고 나섰다.“아빠, 그런 말은 너무하시잖아요. 오늘은 천우 씨가 초대한 자리예요. 뭐가 나와도 그걸로 먹는 거죠. 손님이 무슨 메뉴까지 고르고 술까지 따져요?”그러고는 예천우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천우 씨, 제가 가서 식당에 무슨 술 있는지 보고 올게요. 적당한 거 가져다드리면 되죠.”하지만 예천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막았다.“괜찮아요. 제가 준비해 왔어요. 굳이 여기 술 안 써도 됩니다.”사실 그가 가져온 술은 모두 공간 반지 안에 들어 있었기에 언제든 꺼낼 수 있었지만 굳이 이목을 끌고 싶진 않아 자연스럽게 옆 가방에서 꺼내는 척을 했다.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잠시 멈칫했다.방금까지 분명 손에 아무것도 없었는데 어느새 술병이 나타난 것이다.하지만 누구
“흥, 그건 당연하지.”조신우는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쟤는 그냥 세상 물정 모르는 거죠.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면 알아서 무릎 꿇게 될걸요?”“그럼요. 조신우 씨,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죠.”이제동은 말하면서도 속으론 걱정이 가득했다.이신향이 갑자기 남자 친구를 데려왔다는 것도 머리가 아픈데 예천우가 무턱대고 나서서 조신우를 자극할까 봐 더 불안했다.특히나 예천우라는 사람은 뭘 좀 안다고 착각하는 무모함까지 있으니 더 위험했다.예천우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먼저 안으로 향했다.그런 모습에 이제동과 한지연은 눈살을 찌푸렸고 이신향은 난감한 마음에 얼른 뒤따랐다.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괜히 예천우에게 미안한 마음만 커졌고 갑작스러운 상황에 괜히 그가 모욕당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조신우도 마지못해 따라 들어왔고 일행은 함께 식당 안으로 향했다.내부는 화려한 인테리어 대신 전통적이고 소박한 농가 스타일로 꾸며져 있었는데 이런 분위기는 오히려 대도시 고위층들이 선호하는 콘셉트 중 하나였다.하지만 조신우는 들어서자마자 얼굴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내저으며 투덜댔다. “뭐야, 이런 촌스러운 데를? 딱 봐도 저질이네. 대도시에서 인당 2만 원도 안 되는 데면 분명 어디서 쿠폰이라도 긁어온 거겠지.”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오히려 잘 됐네. 이따가 제대로 면박 줄 수 있겠다.”사실 오늘 조신우는 아버지에게서 활동 자금으로 4억 원을 통 크게 받아온 상태였다.그 돈으로 오늘 제대로 부자의 삶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이었다.이번 자리는 급하게 잡긴 했지만 예천우에겐 아무런 어려움도 아니었다.왜냐하면 이 동강루의 최대 지분을 가진 대주주가 바로 천상 그룹이었고 결국 이 식당도 그의 사업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그러니 예약이야 식은 죽 먹기였다.사실 식당 대표는 그에게 가장 최고급 방을 준비하겠다고 했지만 예천우는 일부러 거절했다.너무 티 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그의 안내로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