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더 이상 민효정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그녀가 갑자기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슬기야, 제발 부탁이야. 넌 정말 상욱이를 망치려고 작정한 거야?”그저 공정하게 경쟁할 뿐인데, 왜 그게 주상욱을 망치는 것이라 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뻔뻔한 사람은 봤어도, 이 정도로 뻔뻔한 사람은 처음이었다.나는 몸을 약간 굽혀, 아래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민효정, 그렇게 안쓰럽다면 너희 집 돈으로 지원해 주면 되잖아? 임씨 가문이나 주씨 가문만큼은 아니지만, 민씨 가문의 실력으로도 이 프로젝트 따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더 이상 시간 낭비하기 싫어 그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그 뒤로 며칠간, 나는 프로젝트를 준비하기 위해 바쁘게 지냈기에 다른 일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고승우와 한동안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나는 마침 차고에 있던 아무 차를 골라 타고, 고승우의 집으로 향했다.거실은 텅 비었고, 서재에선 종잇장을 뒤적이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고승우가 고개 숙인 채 뭔가를 살피다, 날 보곤 반가워하며 벌떡 일어났다.“슬기야, 네가 오기만을 기다렸어. 너를 위해 깜짝 놀랄 선물을 준비했거든.”내가 다가가자, 그는 내게 계약서를 내밀었다.읽어보니, 바로 내가 몇 달째 공들였던 그 프로젝트였다.“이 프로젝트 네가 갖고 있었어?”고승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응, 아버지께서 나더러 경험을 쌓으라면서 맡긴 거야.”서류를 훑어보니, 이미 우리 집 회사 명의로 정리되어 있었고, 내가 사인만 하면 계약이 확정되는 상태였다.“제, 제정신이야? 이건 수백억이 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프로젝트라고!”그러자 고승우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내가 마침 네가 원하는 걸 갖고 있었으니, 당연히 너한테 줘야 되는 거 아니야?”나는 그의 말에 감동받을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따뜻해지며 기분이 벅찼다.“그럼 난 뭘로 보답해야 될까?”고승우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아무거나 다 괜찮
“슬기야, 일단 올라와!”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우리가 타고 있던 요트에는 이미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게다가 요트에 준비된 구명보트는 단 두 사람만 탈 수 있는 크기였는데 우리는 세 명이었다.우리 중에서 요트를 운전할 줄 아는 사람은 주상욱뿐이었으므로, 구명보트 두 자리 중 하나는 분명 그의 자리였다.문제는 남은 두 사람 중 한 명만이 구명보트에 탈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과거처럼 치열하게 고민하던 주상욱이 결국 내게 손을 뻗으려 하자, 나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그러곤 단호하게 그의 요구를 거절해 버렸다.“주상욱, 효정 씨를 먼저 구해줘.”이번 생에는, 내가 살아남아 누군가를 죽게 만들었다는 질책 따위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내 말을 들은 주상욱은 마치 안도의 숨을 내쉬듯, 주름진 이마를 펴며 곧바로 민효정의 손을 잡아 구명보트로 데려갔다.“슬기야, 넌 내 약혼녀야. 원래라면 너를 먼저 구해야 하는데, 네가 효정을 먼저 구하라고 했으니... 꼭 기다리고 있어. 내가 반드시 널 구하러 돌아올게.”“꼭 기다려.”그는 그렇게 말하곤, 혹시라도 내가 마음을 바꿀까 봐 서둘러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민효정을 데리고 떠났다. 참 어이가 없었다. ‘사람들이 다 자기처럼 변덕이 심한 줄 아나 봐?’전생에서도 똑같았다. 주상욱은 우선 나를 태워 바다를 빠져나갔고, 민효정은 요트 위에 홀로 남겨졌다.이후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경찰에게 구조를 요청했지만, 민효정은 이미 물에 빠져 숨졌고, 건져 올린 건 차디찬 시신뿐이었다.사고 소식을 들은 주상욱은 처음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담담히 민효정의 장례를 치른 뒤, 그녀의 가족에게 거액의 위로금을 건네며 마무리했다.그가 내세운 유일한 요구라면, 민효정의 묘지를 좋은 곳에 마련해 주는 것 정도였다.나는 당연히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결혼식을 미루겠냐고 살뜰히 물어봤는데, 그는 단칼에 거절했다.그때 주상욱은 내 손을 잡으며 내게 말했다.“슬기야, 난 반드시 너랑 결혼할 거야!”그러나 그건
그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나는 부랴부랴 살아남을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비록 요트에 물이 차오르고 있었지만, 쓸 만한 물건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점점 많은 물이 요트 안으로 들어오자, 나는 서둘러 요트 안쪽으로 들어가 미리 챙겨 두었던 튜브와 구명조끼를 찾았다.전생에 나는 수영을 못 하면서도 바다놀이를 하고 싶어서, 미리 여러 개의 튜브를 준비해 두었는데, 이번 생에 마침 쓸모가 있게 된 셈이다.나는 튜브들을 모두 챙긴 뒤 서둘러 구명조끼를 입었다. 튜브에 공기를 넣은 다음 몸을 끼워 넣고, 보관해 둔 몇 개의 초콜릿과 생수 병 몇 개도 함께 챙겼다.요트가 완전히 침몰하는 순간,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나서 해변 쪽으로 헤엄치기 시작했다.여기는 깊은 바다지만, 근처로 자주 어부들이 물고기 잡으러 나오곤 해서 완전히 인적이 드문 곳은 아니다. 만약 어선을 만나기만 하면, 구조될 가능성이 있었다.그러나 아쉽게도 지금은 한밤중이라, 어선이 주변을 지난다고 해도 시끄러운 엔진 소리 때문에 내 구조 요청을 듣지 못할 것이다.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가능한 한 해안 쪽을 향해 열심히 헤엄치기 시작했다.그러나 세상 일은 언제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낮에는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먹구름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전생에서도 이랬다. 곧 폭우가 쏟아지면서 구조 난이도가 급격히 높아졌고, 그 탓에 경찰들은 민효정을 제때 구하지 못했다.그러나 이번 생의 나는 가득 펼쳐진 바다를 보며 더욱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움직였다.약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마침내 앞쪽에 요트 한 척이 둥실둥실 떠 있는 모습이 보였다.나는 두 손을 번쩍 들고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살려주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제발 도와주세요!”목청껏 외치기 시작했지만, 어느새 비가 후드득거리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가랑비 수준이었지만, 몇 분 안 돼 그 비가 금세 폭우가 쏟아졌다.게다가 요트가 멀어지려고 하자, 가슴 한 편이 절망으로 가득 찼다. 그래도 나는
전생에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주상욱이 술에 취해 돌아온 날이 있었다.나는 그를 방으로 부축해 가면서 술 좀 줄이라고 말했을 뿐인데, 주상욱은 갑자기 화가 폭발해 날 바닥에 세게 밀어 넘어뜨렸다.나는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지면서, 뒤통수를 바닥에 세게 찧었다. 손으로 머리를 만져보니 피가 흐르고 있었다.나는 깜짝 놀라 소리치며 상처를 확인했는데, 주상욱은 차갑게 나를 내려다보며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아파? 잘 됐네. 효정이는 죽을 때 이보다 백 배, 천 배는 더 고통스러웠을 거야! 근데 효정이는 죽었어. 깊은 바닷속에 잠겨 죽었다고! 그때 내가 너부터 구하지만 않았어도, 효정이는 물에 빠져 죽진 않았을 거야! 임슬기, 이 모든 게 네 탓이야!”나는 머리에서 피가 계속 흘러내리는 것도 잊은 채,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이런 말들이 그의 입에서 나올 줄이야. 가슴 한구석이 서서히 식어 가는 기분이었다.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주상욱! 요트를 고장 낸 건 너희 집 원수가 벌인 짓이었고, 구명보트에 나를 먼저 태우기로 한 것도 너였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날 탓하는 거야? 우습지도 않니?”주상욱은 술이 점점 깼는지 표정이 더더욱 차가워졌다.“임슬기, 처음부터 난 이 정략결혼에 동의한 적 없어. 네가 굳이 우리 할머니 앞에서 나를 좋아한다고만 하지 않았어도, 내가 이렇게까지 떠밀려 결혼하진 않았을 거라고.”“하하하.”나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며, 그를 비웃듯 쳐다봤다.“그러니까, 결국 이 모든 게 내 잘못이라는 거네?”“네 원수한테는 원망 한마디 못 하면서, 네 집안의 압박에도 입 닫고 있었으면서, 날 탓한다고? 너 제정신이야?”나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선 뒤, 혼자 택시를 잡아 병원으로 가 상처를 치료했다.그날 이후로, 우리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얼어붙었다. 나 또한 더는 주상욱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됐다.그런데 지금, 눈앞의 낯선 사람은 혹시라도 내가 아프기라
주상욱은 묵묵히 나를 바라보았다.민효정은 그의 뒤에서 걸어 나와, 내 뒤에 서 있던 고승우를 힐끔 보고는 바로 물었다.“슬기야, 너 혹시 저 사람 요트에 올라탄 거야?”“근데 우리가 타고 있던 요트가 사고가 났던 당시, 주변엔 다른 요트가 전혀 없었잖아. 사방이 캄캄했는데 어떻게 구조된 거지?”나는 의아해졌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이유가 뭘까?’“게다가 너와 상욱은 A시에서 추진 중인 프로젝트를 앞두고 정략결혼하려던 사이였잖아. 임씨 가문의 너는 이 프로젝트 담당이 아니니 굳이 참여할 필요가 없겠지만, 상욱이는 주씨 가문을 대표해 경매에 참여해야 하잖아. 근데 이 시점에 사고가 나다니.”“임슬기, 이 모든 우연들이 정말 우연인 걸까? 사실은 누군가 의도한 사고는 아닐까?”‘그 말은 요트를 고장 낸 사람 나라는 건가?’솔직히 전생에 민효정이 죽게 된 것이 불쌍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나를 모욕하는 것을 그대로 참고 넘길 수는 없다.하물며 이번 생에서는 내가 그녀를 살려준 셈인데, 구조된 뒤에 와서 나를 모함하려 하다니.‘차라리 죽게 내버려 둘 걸 그랬어.’나는 경찰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형사님, 이 사람이 지금 저를 모함하고 있어요! 허위사실 유포로 신고하겠습니다.”결국 우리 모두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다.질문을 받는 동안에도 민효정은 계속 날 못마땅하게 노려보았다.“임슬기, 왜 대답 안 해? 내가 한 말이 사실이라서, 겁나서 대답 못 하는 거야?”나는 고개를 돌려 차갑게 대꾸했다.“네가 경찰이야? 내가 굳이 너한테 설명해야 할 이유가 뭔데? 네가 뭔데?”내가 본인을 살려줬다는 사실 따위는 까마득히 잊고, 오히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에게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민효정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그때 옆에 있던 주상욱이 참다못해 끼어들었다.“임슬기,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효정이는 단지 진실이 궁금할 뿐이잖아. 이번 사고의 피해자로서 사건의 진실을 알 권리는 있잖아!”“그럼 나는 피해자가 아니라는
어릴 적, 나는 부모님을 한 번이라도 더 만나기 위해 일부러 시험을 망쳐 보기도 했고, 일부러 다른 아이들과 싸워 보기도 했다.그들은 그런 일이 있어야만 나타나, 아주 조금이나마 나에게 관심을 줬으니까.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점차 기대를 접게 되었다.내 생일이 되면 스스로에게 선물을 사 주며 한 살 더 먹은 걸 축하했고, 학부모 면담이 있을 때면 아예 부모님의 핸드폰 번호를 선생님께 말씀해 드렸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직접 전화하라고 말이다.결국 나는 그렇게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주상욱을 만났다.부모님이 학교에 한 번도 온 적이 없으니, 학교 아이들은 내가 고아라고 떠들어댔고, 그 얘기가 돌면서 어느 날 하교 후, 양아치들이 내 앞을 가로막고 용돈을 전부 내놓으라고 협박했었다.그때 주상욱이 등장해, 날 향해 휘둘러지려던 주먹을 막아 주었다. 그리고 내 앞을 가로막아 나를 괴롭히려던 이들에게 외쳤다.“뭐 하는 짓이야! 여럿이서 여자애 하나를 괴롭히는 게 말이나 돼?”그 무리들은 황급히 흩어졌고, 나는 날 지켜 준 소년을 바라봤다. 땀 몇 방울이 턱 아래로 뚝뚝 떨어지며,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그리고 그가 내게 물었다.“괜찮아?”그 짧은 순간에 나는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다.그러나 그땐 용기가 없어 작은 소리로 고맙다고 중얼거리곤, 황급히 집 쪽으로 뛰어가 버렸다.그날 이후, 나는 무심한 척하면서도 주상욱에 대한 소식을 자꾸 알아보게 되었다.그에게는 오래된 소꿉친구인 민효정이 있었지만, 둘의 관계는 그저 소꿉친구일 뿐이지 더 이상 나아갈 것 같진 않았다.그때 나는 몰랐다. 누군가는 좋아하는 마음을 품고 드러내지 않기도 한다는 걸.다만, 사춘기 시절의 짝사랑은 겉보기엔 고요해 보여도, 이미 마음속은 그 사람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그래서 주상욱을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하면 괜히 가슴이 두근거려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숙였다. 다만 우리 둘의 결혼은 우리가 결정하는 게 아니란 사실도 알고 있었다.그래서 나중에
집으로 돌아와 보니, 부모님이 거실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들은 곧바로 나를 질책하기 시작했다.아빠가 먼저 입을 열었다.“오늘 일은 상욱이가 다 말해 줬어. 정말이지, 너한테 너무 실망이야.”“거긴 바다야. 언제든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곳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먼저 구하라고 할 생각을 한 거야?”엄마도 곧이어 덧붙였다.“그렇게 무모하게 구는 데 우리가 어떻게 회사 운영을 너한테 맡길 수 있겠니? 제발 좀 성숙해져 봐!”“네가 그렇게 철이 없으니, 차라리 결혼을 빨리 서둘러야겠어! 앞으로 상욱의 아내로 조용히 살기나 해.”“전 주상욱이랑 결혼 안 해요! 이 결혼 절대 안 해요!”나는 단호히 잘라 말하며, 똑바로 부모님을 바라봤다.“오늘은 바로 그 얘길 하려고 온 거예요. 전 절대 주상욱한테 시집 안 가요. 아빠 엄마가 주상욱을 만족스러워하건, 회사 운영을 맡기고 싶어 하건, 그건 부모님 일이지 제 일 아니에요!”아빠는 화가 치민 듯 탁자를 세게 치고 나서 소리쳤다.“이 못된 것! 상욱이가 얼마나 능력 있는 남잔데, 그럼 도대체 상욱이를 마다하고 누구랑 결혼하겠다는 거야!”“전 시집 안 갈 거예요!”나는 한마디를 내뱉고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부모님이 무슨 생각을 하든, 나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다음 날, 일찍 일어나 거실로 내려가 보니, 부모님은 여전히 잔뜩 화가 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엄마가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아빠가 먼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파혼하고 싶다면, 네...”“됐어!”엄마가 갑자기 아빠를 제지하듯 말리더니 창백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정말 파혼하고 싶다면 막지 않을게. 하지만 이후의 일은 전부 네가 스스로 감당해야 해.”그렇게 말한 뒤, 엄마는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가자. 파혼하러 가야지.”‘내 의견에 동의하신 건가?’나는 왠지 가슴이 저려온 느낌이 들었다.사실 양가의 정략결혼은 원래 주상욱의 할머니, 최영미가 먼저 꺼낸 이야기였
나는 더 이상 민효정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그녀가 갑자기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슬기야, 제발 부탁이야. 넌 정말 상욱이를 망치려고 작정한 거야?”그저 공정하게 경쟁할 뿐인데, 왜 그게 주상욱을 망치는 것이라 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뻔뻔한 사람은 봤어도, 이 정도로 뻔뻔한 사람은 처음이었다.나는 몸을 약간 굽혀, 아래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민효정, 그렇게 안쓰럽다면 너희 집 돈으로 지원해 주면 되잖아? 임씨 가문이나 주씨 가문만큼은 아니지만, 민씨 가문의 실력으로도 이 프로젝트 따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더 이상 시간 낭비하기 싫어 그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그 뒤로 며칠간, 나는 프로젝트를 준비하기 위해 바쁘게 지냈기에 다른 일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고승우와 한동안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나는 마침 차고에 있던 아무 차를 골라 타고, 고승우의 집으로 향했다.거실은 텅 비었고, 서재에선 종잇장을 뒤적이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고승우가 고개 숙인 채 뭔가를 살피다, 날 보곤 반가워하며 벌떡 일어났다.“슬기야, 네가 오기만을 기다렸어. 너를 위해 깜짝 놀랄 선물을 준비했거든.”내가 다가가자, 그는 내게 계약서를 내밀었다.읽어보니, 바로 내가 몇 달째 공들였던 그 프로젝트였다.“이 프로젝트 네가 갖고 있었어?”고승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응, 아버지께서 나더러 경험을 쌓으라면서 맡긴 거야.”서류를 훑어보니, 이미 우리 집 회사 명의로 정리되어 있었고, 내가 사인만 하면 계약이 확정되는 상태였다.“제, 제정신이야? 이건 수백억이 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프로젝트라고!”그러자 고승우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내가 마침 네가 원하는 걸 갖고 있었으니, 당연히 너한테 줘야 되는 거 아니야?”나는 그의 말에 감동받을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따뜻해지며 기분이 벅찼다.“그럼 난 뭘로 보답해야 될까?”고승우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아무거나 다 괜찮
나는 주상욱이 쫓아올 줄은 몰랐다. 마침 고승우의 차가 문 앞에 세워져 있었다.나는 더는 주상욱과 얽히고 싶지 않아 단호하게 말했다.“내 남자친구가 마중 나왔으니, 이만 갈게.”주상욱은 곧바로 비꼬듯 내뱉었다.“임슬기, 정말 저런 인간을 남자친구로 삼을 거야?”“그럼 너처럼 자기 잘못은 모르고 우유부단한 사람이라도 만나라는 거야?”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려 하자, 그는 얼른 내 손목을 붙잡았다.“슬기야, 내 말 좀 들어 봐...”그가 너무 세게 잡아당겨, 나는 순간 찌릿한 통증을 느꼈다.“쓰읍.”바로 그때, 차에서 내린 고승우가 주먹을 날려 주상욱의 얼굴을 가격한 뒤, 날 등 뒤로 숨기며 경고했다.“다신 손대지 마.”나는 고승우의 차에 올라탔고, 문득 차 안에 놓인 장식품 하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어? 이건 전에 제가 아는 친구한테 선물로 보낸 거랑 똑같은데요?”“이게 왜?”그러자 고승우는 얼굴이 붉어지더니 당황했다.“네, 아이스 스노우...”잊고 지냈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고등학생 때, 나는 너무 외로워서 인터넷에서 온라인 친구를 사귀었는데, 상대는 스스로를 B시 최고의 부잣집 아들이라고 했고, 나도 농담 삼아 ‘어느 나라 공주’라며 허세를 떨었다.그가 반에서 늘 1등이라고 말하면, 나도 학교 전체 1등이라고 떠벌렸다.어차피 만날 일 없다고 생각해, 있는 말없는 말 막 지어냈다.그러다 내 핸드폰이 도둑맞으면서, SNS 비밀번호를 잊었던 탓에 상대와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그 시절을 떠올리며, 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정말 B시 최고의 부잣집 아들이었다니...” 고승우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약간 억울하다는 듯 중얼거렸다.“근데 슬기 씨는 절 속였잖아요. 그때 말한 그 나라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어요.”나는 머쓱해져 헛기침을 했다.“그, 그땐 저도 승우 씨 말이 전부 사실일 줄 몰랐거든요.”고승우는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틈을 타 나를 보며 웃었다.“그럼 이젠 믿으시는 거예
집으로 돌아와 보니, 부모님이 거실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들은 곧바로 나를 질책하기 시작했다.아빠가 먼저 입을 열었다.“오늘 일은 상욱이가 다 말해 줬어. 정말이지, 너한테 너무 실망이야.”“거긴 바다야. 언제든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곳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먼저 구하라고 할 생각을 한 거야?”엄마도 곧이어 덧붙였다.“그렇게 무모하게 구는 데 우리가 어떻게 회사 운영을 너한테 맡길 수 있겠니? 제발 좀 성숙해져 봐!”“네가 그렇게 철이 없으니, 차라리 결혼을 빨리 서둘러야겠어! 앞으로 상욱의 아내로 조용히 살기나 해.”“전 주상욱이랑 결혼 안 해요! 이 결혼 절대 안 해요!”나는 단호히 잘라 말하며, 똑바로 부모님을 바라봤다.“오늘은 바로 그 얘길 하려고 온 거예요. 전 절대 주상욱한테 시집 안 가요. 아빠 엄마가 주상욱을 만족스러워하건, 회사 운영을 맡기고 싶어 하건, 그건 부모님 일이지 제 일 아니에요!”아빠는 화가 치민 듯 탁자를 세게 치고 나서 소리쳤다.“이 못된 것! 상욱이가 얼마나 능력 있는 남잔데, 그럼 도대체 상욱이를 마다하고 누구랑 결혼하겠다는 거야!”“전 시집 안 갈 거예요!”나는 한마디를 내뱉고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부모님이 무슨 생각을 하든, 나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다음 날, 일찍 일어나 거실로 내려가 보니, 부모님은 여전히 잔뜩 화가 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엄마가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아빠가 먼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파혼하고 싶다면, 네...”“됐어!”엄마가 갑자기 아빠를 제지하듯 말리더니 창백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정말 파혼하고 싶다면 막지 않을게. 하지만 이후의 일은 전부 네가 스스로 감당해야 해.”그렇게 말한 뒤, 엄마는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가자. 파혼하러 가야지.”‘내 의견에 동의하신 건가?’나는 왠지 가슴이 저려온 느낌이 들었다.사실 양가의 정략결혼은 원래 주상욱의 할머니, 최영미가 먼저 꺼낸 이야기였
어릴 적, 나는 부모님을 한 번이라도 더 만나기 위해 일부러 시험을 망쳐 보기도 했고, 일부러 다른 아이들과 싸워 보기도 했다.그들은 그런 일이 있어야만 나타나, 아주 조금이나마 나에게 관심을 줬으니까.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점차 기대를 접게 되었다.내 생일이 되면 스스로에게 선물을 사 주며 한 살 더 먹은 걸 축하했고, 학부모 면담이 있을 때면 아예 부모님의 핸드폰 번호를 선생님께 말씀해 드렸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직접 전화하라고 말이다.결국 나는 그렇게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주상욱을 만났다.부모님이 학교에 한 번도 온 적이 없으니, 학교 아이들은 내가 고아라고 떠들어댔고, 그 얘기가 돌면서 어느 날 하교 후, 양아치들이 내 앞을 가로막고 용돈을 전부 내놓으라고 협박했었다.그때 주상욱이 등장해, 날 향해 휘둘러지려던 주먹을 막아 주었다. 그리고 내 앞을 가로막아 나를 괴롭히려던 이들에게 외쳤다.“뭐 하는 짓이야! 여럿이서 여자애 하나를 괴롭히는 게 말이나 돼?”그 무리들은 황급히 흩어졌고, 나는 날 지켜 준 소년을 바라봤다. 땀 몇 방울이 턱 아래로 뚝뚝 떨어지며,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그리고 그가 내게 물었다.“괜찮아?”그 짧은 순간에 나는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다.그러나 그땐 용기가 없어 작은 소리로 고맙다고 중얼거리곤, 황급히 집 쪽으로 뛰어가 버렸다.그날 이후, 나는 무심한 척하면서도 주상욱에 대한 소식을 자꾸 알아보게 되었다.그에게는 오래된 소꿉친구인 민효정이 있었지만, 둘의 관계는 그저 소꿉친구일 뿐이지 더 이상 나아갈 것 같진 않았다.그때 나는 몰랐다. 누군가는 좋아하는 마음을 품고 드러내지 않기도 한다는 걸.다만, 사춘기 시절의 짝사랑은 겉보기엔 고요해 보여도, 이미 마음속은 그 사람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그래서 주상욱을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하면 괜히 가슴이 두근거려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숙였다. 다만 우리 둘의 결혼은 우리가 결정하는 게 아니란 사실도 알고 있었다.그래서 나중에
주상욱은 묵묵히 나를 바라보았다.민효정은 그의 뒤에서 걸어 나와, 내 뒤에 서 있던 고승우를 힐끔 보고는 바로 물었다.“슬기야, 너 혹시 저 사람 요트에 올라탄 거야?”“근데 우리가 타고 있던 요트가 사고가 났던 당시, 주변엔 다른 요트가 전혀 없었잖아. 사방이 캄캄했는데 어떻게 구조된 거지?”나는 의아해졌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이유가 뭘까?’“게다가 너와 상욱은 A시에서 추진 중인 프로젝트를 앞두고 정략결혼하려던 사이였잖아. 임씨 가문의 너는 이 프로젝트 담당이 아니니 굳이 참여할 필요가 없겠지만, 상욱이는 주씨 가문을 대표해 경매에 참여해야 하잖아. 근데 이 시점에 사고가 나다니.”“임슬기, 이 모든 우연들이 정말 우연인 걸까? 사실은 누군가 의도한 사고는 아닐까?”‘그 말은 요트를 고장 낸 사람 나라는 건가?’솔직히 전생에 민효정이 죽게 된 것이 불쌍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나를 모욕하는 것을 그대로 참고 넘길 수는 없다.하물며 이번 생에서는 내가 그녀를 살려준 셈인데, 구조된 뒤에 와서 나를 모함하려 하다니.‘차라리 죽게 내버려 둘 걸 그랬어.’나는 경찰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형사님, 이 사람이 지금 저를 모함하고 있어요! 허위사실 유포로 신고하겠습니다.”결국 우리 모두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다.질문을 받는 동안에도 민효정은 계속 날 못마땅하게 노려보았다.“임슬기, 왜 대답 안 해? 내가 한 말이 사실이라서, 겁나서 대답 못 하는 거야?”나는 고개를 돌려 차갑게 대꾸했다.“네가 경찰이야? 내가 굳이 너한테 설명해야 할 이유가 뭔데? 네가 뭔데?”내가 본인을 살려줬다는 사실 따위는 까마득히 잊고, 오히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에게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민효정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그때 옆에 있던 주상욱이 참다못해 끼어들었다.“임슬기,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효정이는 단지 진실이 궁금할 뿐이잖아. 이번 사고의 피해자로서 사건의 진실을 알 권리는 있잖아!”“그럼 나는 피해자가 아니라는
전생에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주상욱이 술에 취해 돌아온 날이 있었다.나는 그를 방으로 부축해 가면서 술 좀 줄이라고 말했을 뿐인데, 주상욱은 갑자기 화가 폭발해 날 바닥에 세게 밀어 넘어뜨렸다.나는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지면서, 뒤통수를 바닥에 세게 찧었다. 손으로 머리를 만져보니 피가 흐르고 있었다.나는 깜짝 놀라 소리치며 상처를 확인했는데, 주상욱은 차갑게 나를 내려다보며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아파? 잘 됐네. 효정이는 죽을 때 이보다 백 배, 천 배는 더 고통스러웠을 거야! 근데 효정이는 죽었어. 깊은 바닷속에 잠겨 죽었다고! 그때 내가 너부터 구하지만 않았어도, 효정이는 물에 빠져 죽진 않았을 거야! 임슬기, 이 모든 게 네 탓이야!”나는 머리에서 피가 계속 흘러내리는 것도 잊은 채,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이런 말들이 그의 입에서 나올 줄이야. 가슴 한구석이 서서히 식어 가는 기분이었다.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주상욱! 요트를 고장 낸 건 너희 집 원수가 벌인 짓이었고, 구명보트에 나를 먼저 태우기로 한 것도 너였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날 탓하는 거야? 우습지도 않니?”주상욱은 술이 점점 깼는지 표정이 더더욱 차가워졌다.“임슬기, 처음부터 난 이 정략결혼에 동의한 적 없어. 네가 굳이 우리 할머니 앞에서 나를 좋아한다고만 하지 않았어도, 내가 이렇게까지 떠밀려 결혼하진 않았을 거라고.”“하하하.”나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며, 그를 비웃듯 쳐다봤다.“그러니까, 결국 이 모든 게 내 잘못이라는 거네?”“네 원수한테는 원망 한마디 못 하면서, 네 집안의 압박에도 입 닫고 있었으면서, 날 탓한다고? 너 제정신이야?”나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선 뒤, 혼자 택시를 잡아 병원으로 가 상처를 치료했다.그날 이후로, 우리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얼어붙었다. 나 또한 더는 주상욱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됐다.그런데 지금, 눈앞의 낯선 사람은 혹시라도 내가 아프기라
그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나는 부랴부랴 살아남을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비록 요트에 물이 차오르고 있었지만, 쓸 만한 물건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점점 많은 물이 요트 안으로 들어오자, 나는 서둘러 요트 안쪽으로 들어가 미리 챙겨 두었던 튜브와 구명조끼를 찾았다.전생에 나는 수영을 못 하면서도 바다놀이를 하고 싶어서, 미리 여러 개의 튜브를 준비해 두었는데, 이번 생에 마침 쓸모가 있게 된 셈이다.나는 튜브들을 모두 챙긴 뒤 서둘러 구명조끼를 입었다. 튜브에 공기를 넣은 다음 몸을 끼워 넣고, 보관해 둔 몇 개의 초콜릿과 생수 병 몇 개도 함께 챙겼다.요트가 완전히 침몰하는 순간,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나서 해변 쪽으로 헤엄치기 시작했다.여기는 깊은 바다지만, 근처로 자주 어부들이 물고기 잡으러 나오곤 해서 완전히 인적이 드문 곳은 아니다. 만약 어선을 만나기만 하면, 구조될 가능성이 있었다.그러나 아쉽게도 지금은 한밤중이라, 어선이 주변을 지난다고 해도 시끄러운 엔진 소리 때문에 내 구조 요청을 듣지 못할 것이다.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가능한 한 해안 쪽을 향해 열심히 헤엄치기 시작했다.그러나 세상 일은 언제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낮에는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먹구름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전생에서도 이랬다. 곧 폭우가 쏟아지면서 구조 난이도가 급격히 높아졌고, 그 탓에 경찰들은 민효정을 제때 구하지 못했다.그러나 이번 생의 나는 가득 펼쳐진 바다를 보며 더욱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움직였다.약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마침내 앞쪽에 요트 한 척이 둥실둥실 떠 있는 모습이 보였다.나는 두 손을 번쩍 들고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살려주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제발 도와주세요!”목청껏 외치기 시작했지만, 어느새 비가 후드득거리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가랑비 수준이었지만, 몇 분 안 돼 그 비가 금세 폭우가 쏟아졌다.게다가 요트가 멀어지려고 하자, 가슴 한 편이 절망으로 가득 찼다. 그래도 나는
“슬기야, 일단 올라와!”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우리가 타고 있던 요트에는 이미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게다가 요트에 준비된 구명보트는 단 두 사람만 탈 수 있는 크기였는데 우리는 세 명이었다.우리 중에서 요트를 운전할 줄 아는 사람은 주상욱뿐이었으므로, 구명보트 두 자리 중 하나는 분명 그의 자리였다.문제는 남은 두 사람 중 한 명만이 구명보트에 탈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과거처럼 치열하게 고민하던 주상욱이 결국 내게 손을 뻗으려 하자, 나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그러곤 단호하게 그의 요구를 거절해 버렸다.“주상욱, 효정 씨를 먼저 구해줘.”이번 생에는, 내가 살아남아 누군가를 죽게 만들었다는 질책 따위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내 말을 들은 주상욱은 마치 안도의 숨을 내쉬듯, 주름진 이마를 펴며 곧바로 민효정의 손을 잡아 구명보트로 데려갔다.“슬기야, 넌 내 약혼녀야. 원래라면 너를 먼저 구해야 하는데, 네가 효정을 먼저 구하라고 했으니... 꼭 기다리고 있어. 내가 반드시 널 구하러 돌아올게.”“꼭 기다려.”그는 그렇게 말하곤, 혹시라도 내가 마음을 바꿀까 봐 서둘러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민효정을 데리고 떠났다. 참 어이가 없었다. ‘사람들이 다 자기처럼 변덕이 심한 줄 아나 봐?’전생에서도 똑같았다. 주상욱은 우선 나를 태워 바다를 빠져나갔고, 민효정은 요트 위에 홀로 남겨졌다.이후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경찰에게 구조를 요청했지만, 민효정은 이미 물에 빠져 숨졌고, 건져 올린 건 차디찬 시신뿐이었다.사고 소식을 들은 주상욱은 처음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담담히 민효정의 장례를 치른 뒤, 그녀의 가족에게 거액의 위로금을 건네며 마무리했다.그가 내세운 유일한 요구라면, 민효정의 묘지를 좋은 곳에 마련해 주는 것 정도였다.나는 당연히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결혼식을 미루겠냐고 살뜰히 물어봤는데, 그는 단칼에 거절했다.그때 주상욱은 내 손을 잡으며 내게 말했다.“슬기야, 난 반드시 너랑 결혼할 거야!”그러나 그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