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양은 녹아에게 약을 짓게 하고, 기씨 어멈에게 몇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넨뒤 그 곳을 떠났다.기씨 어멈은 계속 화용이를 돌보고 있었고 날이 어두워 지자 부쩍 겁이 나기 시작했다.녹아도 기씨어멈의 곁에서 함께 지키고 있다. 두 사람은 숨을 죽인채 조용히 화용이를 지켜봤다. 그가 어느 순간부터 더이상 숨을 쉬지 않을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깊이 잠들었던 화용이는 뜻밖에도 자시가 가까워지자 깨어났다. 아이는 한쪽 눈을 천천히 뜨더니 기씨 어멈을 바라보았다.“할머니, 저 배고파요!”기씨 어멈은 놀랍고도 기쁜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상처가 번지면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심지어 그녀가 힘들게 구해온 양유(羊奶) 역시 한모금도 넘기지 못했던 화용이다.기씨 어멈은 손을 뻗어 아이의 이마를 만져보았다. 의외로 그렇게 뜨겁지 않았다. “의원님의 약이 효과가 있구나, 효과가 있어!”기씨 어멈은 기쁨에 겨워 녹아에게 말했다.“그러게요, 의원님의 약이 효과가 있나 봐요!”녹아도 덩달아 기뻐했다.***다음날 이씨 의원은 다시 초왕부로 모셔졌다.그 아이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소식에 그는 신기해 했다.“이 녀석은 명줄이 참 길구먼. 다 죽어가던 참이었는데.”기씨 어멈은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렸다.“의원님, 약을 하나 더 지어주십시오. 제 손주 녀석 좀 살려주십시오.”이씨 의원은 잠시 멍해졌다. 어제 처방한 약은 전혀 아이를 치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기껏해야 통증을 멎게 하고 진정시키는데 쓰였을 뿐, 상처 치유에는 큰 효과가 있는 약이 절대 아니였다.그러나, 어쩌면 우연히 맞아 떨어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화용의 맥을 짚어보니, 확실히 어제보다 나아 보였고 몸도 더는 뜨겁지 않았다.하여 그는 다른 처방을 내렸다. “시녀를 불러 나를 따라와 약을 지으라 이르게. 연속 이틀 동안 먹여야 하네. 상처에 바르는 가루약도 마찬가질세. 호전을 보이면 계속 약을 지으러 오게.”“감사합니다, 의원님!”“진찰비와 약값은 누가 내는가?”의
차가워진 찐빵을 절반 정도 먹고나서 한참이 지나니 그녀의 기력도 어느 정도 회복이되는듯 했다. 바닥에서 애써 몸을 일으켜 탁자 옆 의자에 앉아 탁자에 엎드렸다. 허나 상반신을 일으켜 물을 따를 힘은 없어서 그나마 잔에 남아 있던 차로 일단 목부터 추겼다..이윽고 조금 나아진 느낌이 들어서 엎드리려고 천천히 두 다리를 뒤로 움직여 보았다. 그러나 기력이 부족한 나머지 그대로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그 충격에 등에 난 상처에서 저릿한 아픔이 전해졌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그 아픔이 어느정도 사그러지기 까지 버틴후 팔꿈치로 기어가 약 상자를 찾아냈다. 어둠속에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소염제와 해열제의 위치는 기억하고 있었다. 주사를 맞을 수 없으니 약의 복용량을 늘이이는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또 반시간 정도 지난후 그녀는 비타민C를 찾아내여 몇 알 집어먹었다. 물과함께 삼킬수도 없어 씹어서 삼킨 그녀는 비타민C의 시큼한 맛에 정신이 번쩍 드는듯 했다.약을 다 먹은 그녀는 몸을 웅쿠린채 바닥에 누워 천천히 숨을 골랐다. 이 정도의 육체적인 고통은 태여난후 처음 겪어 보는 것이였다. 이번에 맞은 곤장은 그녀로 하여금 이 시대는 자신이 살던 곳과 매우 다름을 제대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 곳은 높은 권력과 위치를 가진 자는 사람의 명줄도 손에 쥐고 있는 곳이였다.그리고 그녀의 명줄은 초왕의 손에 쥐여 있었다.이 곳에서 살아 남으려면 반드시 이러한 생존환경에 적응해야 했다.다만 그 아이는 어떻게 됐는지 걱정됐다. 비록 상처는 처치했지만, 약을 쓰지 않으면 제대로 나을 수 있는건 아니였기 때문이다.***한편, 약을 먹은 화가는 다시 고열이 시달리고 있었다.기씨 어멈은 마음이 급해졌다. 분명 낮에는 좋아지고 있었는데, 왜 밤이 되니 다시 열이 나기 시작하는지 알수가 없었다.녹아도 덩달아 급해졌다: “아니면, 제가 다시 이씨 의원을 불러 올가요?”기씨 어멈은 열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며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손자를 바라 보다가, 이씨 의원과 다섯 냥의
어두운 환경에 적응되어 있던 원경능은 갑자기 눈을 자극하는 빛에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이윽고 귓가에 ‘털썩’하고 무릎 꿇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씨 어멈이 땅에 무릎을 꿇은채 애원하고 있었다.“왕비님, 소인이 왕비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만 왕비님을 오해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제발 소인의 손주를 살려주십시오.”“이리 와서 날 부축해!”원경능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리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기씨 어멈은 급히 등불을 내려놓고 원경능을 부축해서 일으켰다. 그리고 원경능의 등에 가득 남아있는 핏자국에 눈이 갔다. 곤장에 맞은 상처라고 생각하니 조금 망설여졌다. 사실 그녀는 아직도 왕비에 대한 증오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화용이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도움을 청하러 온것이다.“왕비님 일어서실 수 있겠습니까?”“내 약 상자를 갖고와!”원경능은 기씨 어멈이 자기를 죽도록 미워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무릎을 꿇고 애원한다는 건 아마도 화용이의 상황이 많이 나빠졌기 때문이라고 짐작할수 있었다. 하여 약 상자를 다른 사람으로부터 숨기는것 조차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네, 네!”기씨 어멈은 얼른 가서 약 상자를 챙겨들고 다시 그녀를 부축하였다. 그러나 겨우 한 발자국 내딛자 원경능은 엉덩이와 다리에서부터 이어지는 고통에 심장까지 아파왔다. 방문을 나서기만 했을 뿐인데 온몸은 이미 땀으로 흥건해졌고 극심한 고통에 이까지 덜덜 떨렸다.“왕비님….” “잔말 말고 빨리 가자!”원경능은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으며 말했다.사람을 구하는 건 그녀에게 있어 매우 순수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화용이를 구하는 일에 그녀는 또 다른 생각이 더 추가됐다. 이번에 반드시 아이를 구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세워야만 했다. 그래야만 자신이 이 곳에서 살아 남을수 있기 때문이다.“이제 죽지는 않겠네.”갑자기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려왔다.원경능은 본능적으로 기씨 어멈을 돌아 보았다. 기씨 어멈은 한
모든 일을 마친 그녀는 지칠 대로 지쳤다. 탁자에 엎드린 채로 잠깐 쉬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모습이 볼썽사납다는 것을. 하지만 모습 따위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잠깐의 휴식을 취하는 동안, 밖에서는 기씨 어멈의 다소 조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왕비, 다 되셨습니까?”원경능은 책상을 짚고 천천히 일어서며 담담하게 말했다.“들어오너라.”갑자기 문이 열리고 기씨 어멈과 녹아가 뛰어들어 왔다. 두 사람은 재빠르게 달려가 화가를 살펴보았다. 화가의 안정적인 숨소리를 확인한 기씨 어멈은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원경능은 약상자를 들며 말했다.“오늘 밤 일은 비밀에 부치거라. 초왕이나 초왕부의 그 어떤 사람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기씨 어멈과 녹아는 서로 쳐다보며 속으로 원경능의 반응이 의외라고 생각했다.녹아는 앞으로 나아가 원경능을 부축했다.“왕비 소인이 부축하여 모셔드리겠습니다.”“되었다. 화가를 돌보거라. 침대 머리에 내가 남겨놓은 약이 있으니 두 시진마다 한 번씩 먹이거라. 약을 다 먹이면 나에게 와서 더 달라 하거라.”원경능은 녹아의 손을 벗어나 힘겹게 밖으로 걸어 나갔다.“왕비!”기씨 어멈이 소리 내어 불렀다. 그녀는 감사의 말을 전하려 했지만, 원경능과의 예전 일이 떠올라 감사하는 말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담담하게 말했다.“밤길 어두우니 등불을 들고 가십시오.”그녀는 등불을 넘겨 주었다. 원경능은 등불을 받으며 말했다. “고맙구나!”기씨 어멈은 깜짝 놀랐다.고맙다고? 왕비가 고맙다고 말한 건가?원경능은 봉의각에 돌아와 혼자 주사를 한 대 놓은 후 침대에 쓰러졌다.염증을 최대한 억제시켰지만, 상처 면적이 너무 컸다. 거기다 항생제가 들어 그녀는 너무 약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열에 시달린 그녀는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간 것 같아 머리를 들기조차 힘들었다.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깊은 잠에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며 급한듯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원경능은 현실과 꿈이 구분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달달 떨리는 손으로 약상자를 침대 밑에 밀어 넣었다. 그런데 그 순간, 침대 밑에서 약상자가 사라져버렸다.원경능은 삼 초 동안 숨을 내쉴 수가 없었다. 손을 뻗어 침대 밑을 더듬어보았지만 정말 아무것도 없다.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천천히 침대위로 올라가 숨을 거칠게 몰아 쉬었다.최근에 발생한 사건들은 그녀가 정상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났다. 그녀의 모든 지식을 동원해도 도무지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인간은 미지의 일에 공포를 느끼기 마련, 원경능은 정말 두려움을 느꼈다.‘쾅’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원경능은 고개를 들기도 전에, 냉기가 주위를 맴돌고 있음을 직감하였다. 두피로부터 고통이 느껴지더니, 그녀는 침대에서 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졌다.“본왕 앞에서 죽은 척하는 것이냐? 지금 당장 죽던지, 아니면 기어 일어나서 본왕과 함께 궁으로 가야 한다.”차가운 목소리가 그녀의 머리꼭대기에서 울려 퍼졌다. 초왕은 다시 원경능을 거칠게 뒤집었다. 등이 바닥에 닿자 그녀는 고통에 온몸을 떨었다. 그러고는 곧장 억센 남자의 손이 그녀의 턱을 잡았다. 턱을 으스러뜨릴 것 같은 힘이었다.원경능의 고통스러운 눈빛이 초왕의 광기 어린 눈에 들어오자 냉혹하고도 난폭한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혐오와 멸시가 짙게 드리워졌다. “본왕이 경고하는데, 다른 수작 부릴 생각은 하지 말거라. 만일 또 태후마마 앞에서 허튼 소리를 지껄인다면 너를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원경능은 너무도 아픈 나머지 화가 치밀었다. 그들에게는 인간의 목숨이 이렇게나 하찮은 것인가? 심한 부상을 입었는데도 도무지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원경능은 젖 먹던 힘까지 모아 우문호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무릎으로 몸을 지탱한 뒤 머리로 있는 힘껏 그의 얼굴을 들이받았다. 죽기 전 마지막 일격과도 같은 행동이었다.우문호는 원경능이 반격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더더욱 머리로 들이 받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는
약을 마시니 위가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원경능은 몸이 훨씬 개운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씨 어멈은 나지막하게 말했다.“왕비, 황궁에서 돌아오시면 소인이 차츰 몸조리를 해드리겠습니다. 지금은 먼저 눈을 감으시고 잠시 휴식하십시오.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 지실 겁니다.”원경능은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불꽃이 춤을 추며 터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난잡한 소리들이 귓전에 울렸다.‘너는 증오할 가치도 없다. 본왕은 그저 너를 혐오하는 것뿐이니라. 본왕에게 있어서 너는 악취를 따라다니는 파리처럼 혐오스러울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너와 잠자리를 하는데 약까지 마시진 않았겠지.’초왕 우문호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는 원망과 증오가 뒤섞여 있었다. 원경능은 그렇게 무정한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또 누군가가 귓전에서 ‘흑흑’ 울어댔다. 머리 속의 불꽃은 구불구불한 핏물로 변했다. 점차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마치 머릿속에 얽히고 설켰던 실들이 드디어 정리된 것 같았다. 고통도 점차 사라져왔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마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원경능은 눈을 떴다. 녹아가 침대 앞에서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왕비, 괜찮아지셨습니까?”녹아는 그녀가 눈을 뜨자, 재빨리 물었다.“이젠 아프지 않구나.”원경능은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아프지 않았다. 그러나 온몸은 두려울 정도로 마비된 상태였다. 원경능은 볼을 꼬집었으나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마취제보다도 약효가 강했다.“그렇다면 소인이 부축하겠습니다. 의복을 갈아입지 않으신다면 왕야께서 화를 내실 겁니다.”녹아는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하였다. 기씨 어멈도 두 손으로 의복을 받친 채로 밖에서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원경능이 깨어난 것을 발견하자 이렇게 말했다.“빨리 의복을 갈아입으십시오. 왕야께서 재촉하십니다.”원경능은 무덤덤하게 서있었다. 녹아와 기씨 어멈은 그녀의 옷을 벗기고 새 의복을 갈아 입혔다. 상처를 조여 맸으나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의복을 갈
주먹 절반정도 되는 크기의 그 상자는 분명히 침대 밑에서 사라진 그녀의 약상자였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약상자가 왜 작아져서 내 소매 속에 숨어있지?'순간, 마비되었던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등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원경능은 재빨리 약상자를 소매 안으로 집어넣었다.“소인이 왕비를 모시고 가겠습니다.”녹아는 그녀를 부축했다.“소인이 왕야께 사정 드리고 왕비와 함께 입궁하겠습니다.”원경능은 심란한 나머지 녹아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무턱대고 머리를 끄덕이고는 그녀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아치형으로 된 문 몇 개를 지나 회랑에 들어섰다. 구불구불한 길을 한참 걸어서야 앞채에 있는 문에 도착하였다. 마차는 이미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문호는 마차에 앉지 않고 검은 준마(骏马: 좋은 말)를 타고 있었다.그는 옅은 보라색 의복을 입었는데 금과 옥으로 만든 관을 쓰고 있었다. 얼굴은 마치 칙칙한 날씨와도 같았다. 눈에는 성가신듯 한 노여움이 섞여 있었다. 그녀가 다가오자 흘끗 보고는 싸늘하게 말했다.“출발할 채비를 하거라.”“왕야, 입궁하는데 소인이 필요하십니까?”녹아는 눈을 딱 감고 한 마디 물었다. 우문호는 녹아를 흘끔 보더니 입을 열었다.“그렇게 하거라. 태후마마가 합방한 일을 물어보면 네가 증명을 할 수도 있으니.”왕부 문 앞에는 하인들이 열명 정도 있었다. 함께 입궁하여 시중을 들어줄 사람들이었다. 그중 가신인 탕양도 있었다. 우문호는 그들 앞에서 원경능이 얼마나 비참할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이런 말들을 뱉았다. 원경능은 무표정이었다. 근육이 뻣뻣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아무리 난처해도 난처한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녹아는 그녀를 부축하면서 마차에 올랐다. 발이 닿는 순간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우문호의 증오 섞인 눈빛과 얄밉게 웃고 있는 하인들의 표정을 발견하였다.원경능은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귓전에는 우문호가 뱉은 말들이 떠올랐다.원주인 원경능은 외모가 뛰어났다. 우문호는 도대체 얼마나 많
마차는 우문호의 인솔하에 곧장 궁문을 들어섰다. 원경능은 황궁이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녀의 발 사이로 깊고 긴 복도와 얼룩진 궁궐의 붉은 담장이 보였다.멀리 쳐다볼 수 없었지만 높은 누각이 눈에 들어왔다. 유리기와로 만든 지붕은 햇살을 받아 눈이 부시게 화려했다. 마차가 멈추자 원경능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녹아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햇살은 궁궐의 붉은 담장을 내리쬐었고 먼 발치의 유리기와에 눈부신 금빛 햇살이 반사되었다. 원경능은 마치 빛을 두려워하는 유령처럼 저도 모르게 손으로 햇살을 가렸다.우문호도 말에서 내렸다. 마차와 말을 남겨둔 채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건곤전(乾坤殿) 밖에 다다르자 녹아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왕비, 소인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원경능은 건곤전이 태상황이 거주하는 궁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밖에는 이미 각부의 시녀와 하인들로 붐비었다. 원경능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우문호의 걸음에 맞춰 안으로 들어갔다.초목이 우거진 정원을 지나 정전(正殿)에 도착했다. 정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서있었다. 원경능은 잠시 그들을 관찰해보았는데 모두 화려한 의복에 슬픈 표정을 하고 있었다. 원경능은 남아있는 원주인의 기억에 의해 대부분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숙연하고 엄숙한 얼굴에 청색 비단 의복을 입은 이는 기왕(纪王) 우문군(宇文君)이었다. 명원제의 진비(秦妃)가 낳은 장자였는데 서른 살이고, 마후의 적녀를 부인으로 맞이했었다. 진비와 마씨, 두 명의 아이가 그의 곁에 나란히 서있었다.위왕(魏王) 우문위(宇文蔚), 손왕 우문두(宇文杜), 주왕(周王) 우문안(宇文安) 모두 각자의 왕비와 자녀들을 데리고 입궁하였다. 왕야들은 그저 서로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았다. 분위기는 매우 무거웠다.원경능은 우문호가 순간 흠칫하고는 시선을 돌리는 걸 느꼈다. 그 모습은 몸이 뻣뻣하게 굳어 매우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문 어구로 시선을 돌려보니 한 쌍의 부부가 들어오고 있었
이 문제에 우문호는 잠시 멍을 때렸다. 왜냐하면 자신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당연히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원씨가 임신한 뒤로부터 그의 눈과 마음에는 다른 것들을 담지 못했었다.현재 제왕이 물으니 우문호는 잠시 멍을 때렸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어디 그렇게 많은 왜가 있어, 놓으면 놓는 거지.'"다섯째 형님."제왕은 우문호가 머뭇거리자 조금 몸을 일으키더니 경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 보았다."혹 아직도 명취를 좋아하는 건 아니겠죠?"우문호는 그를 흘겨보았다."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 네 다섯째 형수는 속이 매우 좁아.""형님 아직도 좋아하고 있는 겁니까?"우문호는 고개를 저었다."좋아하지 않아.""어떻게 했습니까? 이렇게 빨리 명취를 잊다니."우문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내가 뭘 했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한참 뒤에 우문호가 고개를 들었는데 빛이 반짝였다."너의 다섯째 형수가 있었기 때문이지.""그 말인즉, 다른 사람이 생기면 잊을 수 있다는 말인가요? 이건 아마 대체하는 방법인 듯 하군요. 다른 여인을 찾아야 되지요, 맞나요?"제왕이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우문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연구해본 적도 없는 걸.'허나 표면상으로는 적극적으로 말했다."맞아, 넌 동그란 얼굴의 계집애와 자주 있도록 시도해봐. 아마 곧 잊을 수 있을 거야."원영의를 말하니 제왕이 탄식하며 말했다."이번에 영의가 조태의를 데리고 돌아왔기 다행이지 아니면 전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겁니다.""네 다섯째 형수가 보낸 거다."우문호는 원경능을 위해 공을 쟁취했다. 일곱째는 늘 원씨에게 편견이 있어 이 문제에 대해 우문호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공을 쟁취하여야만 했다.그러나 제왕은 그 말을 흘려 보내고 홀로 중얼거렸다."사실, 동그란 얼굴도 괜찮아요. 자상하게 왕비를 소개해줄 것이라 했거든요."우문호가 불현듯 물었다."참, 오늘밤 돌아갈 거야?"제왕은 생각에 잠겼다."돌아갈 거예요. 동그란 얼굴이 있으니 절 괴롭히
우문호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부황...."부황께서 합의 이혼을 동의하시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또한 그 말투에 불쾌한 느낌이 상당했다."그대로 하면 되느니라."명원제가 퉁명스럽게 말했다.저명취가 시집온 뒤로부터 사단이 끊인 적이 없었다. 작은 일은 저수부의 체면을 보아 눈 감아줄 수 있었다. 이렇게 방임했더니 결국 무법천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황실의 체면을 깎는 건 괜찮으나 사적으로 친황들의 사이를 이간질 하니 더 이상 용납할 수가 없었다.애당초 그녀의 명성은 그렇지 않았다. 밖에서는 다들 그녀가 현명하고 정숙하며 대가의 풍격이 있다고 했다.그러나 오늘 저씨 노태부인의 그 말을 해 이미 화가 치밀었었다. 저씨 가문의 체면이 참으로 대단했다."부황."우문호가 정색하더니 재빨리 물었다."부황의 뜻은 일곱째의 요구를 동의한다는 겁니까?""동의하지 않을 수 있느냐? 무기를 휘두르기까지 하는데."명원제가 아비로써의 인내를 보여주었다."합의 이혼한 뒤 각자 재혼한다면 두 가문에게 모두 좋은 일이다."우문호는 매우 우러러보았다. 부황의 이 말은 참으로 가식적이었다. 너무 가식적이어서 전혀 가식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도리어 각별히 마음을 쓰는 것 같았다."이 일을 일주일 내에 해결하거라. 해결하지 못하면 곤장을 맞으러 와야 한다. 꺼지거라."명원제가 싸늘하게 말했다.우문호는 명을 받고 제왕을 찾으러 들어갔다. 두 형제는 서로를 부축하면서 출궁했다.그러나 명원제는 계속 상소문을 읽어야 했다. 군주로써 다른 이들보다 더 큰 의자가 있는 이외에 뭐가 나은 것이 있던가?황제란 수명이 짧은 직업이었다.옆에서 묵을 갈던 목여공공이 기쁘게 말했다."제왕과 초왕 사이에 틈이 생기지 않음을 보셨으니 폐하께서도 시름을 놓으실 수 있습니다."명원제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다섯째는 떳떳하고 일곱째는 단순하다. 그렇기에 다행인 거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마 일찍부터 크게 다투었을 것이다. 다투지 않더라도 이후에는 암투를 벌일 것이지.
우문호가 위로했다."그만 소리 질러, 부황 앞에서도 네가 계속 신음소리를 낸다면 네가 겁쟁이라고 꾸짖으실 거야."제왕은 아픔에 말도 하지 못했다. 끙끙 신음소리와 함께 발을 질질 끌며 가고 있었다. 결국에는 실로 참을 수 없어 말했다."형님, 절 업어줘요.""상처가 앞에 있는데 내가 널 없으면 더 아프지 않을까?"우문호는 그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근심스러워졌다. '왜 이렇게 아픔을 참지 못한단 말인가? 예전에 원씨는 온몸에 부상을 입고 입궁하여서도 억지로 버텼었는데, 일곱째는 여인보다 못하는군.""다쳐서 아픈 것이 낫지 이렇게 상처가 찢기는 고통은 원하지 않습니다." 제왕은 걸음을 멈추고 무기력하게 손을 저었다.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는데 입술에도 혈색이 보이지 않았다.우문호는 그를 업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업고 나니 제왕이 또 "아아아"하고 소리를 질렀다.우문호가 물었다."되겠어?"제왕은 간신히 고개를 돌려 목여공공을 바라 보더니 울상이 된 얼굴로 말했다."아니면 나를 들고 가게."목여공공은 이미 성지를 전하러 출궁한 궁인에게 물어보았었다. 부상 정도가 그렇게 엄중하지 않다고 조태의가 말했다고 전했다. 가슴팍의 상처는 괜찮고 복부의 상처가 조금 깊다고 했다.그리하여 제왕의 이러한 모습을 본 목여공공은 근심을 금할 수 없어 물었다."태의가 확실하게 진찰한 게 맞습니까? 내장이 상한 건 아닙니까?"제왕은 숨을 들이쉬었다."내장이 상한 건 아니네."목여공공은 제왕의 이런 모습으로 실로 궁전까지 버티지 못할 것 같아 말했다."좋습니다. 그렇다면 들고 갑시다."어깨 가마와 들것이 없으니 한 사람은 어깨를, 한 사람은 두 다리를 들고 갔다. 제왕의 머리는 떨어져 있었는데 입에 초롱 손잡이를 물로 있었다. 허나 자신이 걷는 것보다는 나았다.제왕은 칠흙같은 하늘을 바라 보았다. 등불의 빛은 궁중의 밤을 밝히기엔 부족했다. 그는 그저 딴 세상에 온 듯 하였다.왜 살아가다가 갑자기 이렇게 되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음은 여전
황후는 완전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일곱째가 첩을 총애하고 처를 저버린 죄명을 받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 죄명이 실증되고 정말 백관 앞에서 죄를 심의 받는다면 절로 미래를 망친 것이었다.그리하여 이 일의 진위를 막론하고 재빨리 답했다."합방을 하지 않았는데 어찌 첩을 총애하고 처를 저버린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 말이야 말로 전해진다면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태노부인도 바보가 아니었다. 저명취의 낯빛을 보고 태후가 말한 것이 진실임을 알고 있었다.다만 바보가 아닌 태노부인은 멍해졌다. '측비 때문이 아니라면 제왕은 왜 합의 이혼하려고 하려는 걸까? 설마, 그 원측비의 말이 진실이란 말인가? 명취와 초왕 사이가 애매하단 말인가?'태노부인의 얼굴은 당장에 어두워졌다. 다만 태후가 자리에 있는지라 무엇이라 말할 수 없어 일단 이 화를 가라앉혔다.그러나 태후는 태노부인의 체면을 고려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노부인, 한마디 묻겠네. 한 여인이 처로써 작은 일로 자결하고 또 낭군을 중상한 뒤 회개하지 않고 적반하장으로 군다면, 노부인의 부중에서는 어떻게 처단하는가?"태노부인은 실로 체면이 깎였으나 반박할 방법이 없었다. 제왕부부는 예전에 화목했었고 측비가 시집 온지 얼마 되지 않았다. 또한 합방도 하지 않았으니 첩을 총애하고 처를 저버린다고 억지를 부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태노부인은 그저 기가 죽어 말했다."태후마마, 제가 아둔했습니다. 명확하게 묻지 않고 입궁하여 태후마마와 황후를 귀찮게 했습니다. 다만 젊은 부부가 다투는 건 자주 있는 일입니다. 어찌 되었든지 쉽게 처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 ""합의 이혼이네."태후가 차가운 낯빛으로 곧 시정했다."황실의 체면이 중요하나 황실의 혈육도 잃을 수 없네. 제왕은 황제의 적자네. 부부가 작은 일로 모순이 생겨 무기를 휘두른다면 철로 만든 몸이라 하여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네."태후는 고개를 돌려 황후를 바라 보았다."너의 며느리고 또 너의 조카니 네가 알아서 이 일을 해결하
황후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몰랐다. 안절부절하여 명원제를 흘깃 보았는데 명원제의 낯빛이 매우 어두웠다. 이에 황후는 원만하게 수습할 수 있는 말 몇 마디 하라고 태노부인에게 눈짓을 보냈다.그러나 태노부인이 싸늘하고도 딱딱하게 말했다."폐하, 황후마마, 제왕은 황실자손으로써 첩을 총애하고 처를 저버렸습니다. 비록 명취가 충동한 것은 잘못이나 모든 잘못이 명취에게 있는 건 아닙니다. 현재 제왕이 측비로 인해 합의 이혼을 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니 소문이 퍼진다면 실로 웃음거리가 될 겁니다. 이에 황실과 저씨 가문의 체면이 깎일 겁니다. 폐하께서 성지를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제왕의 상처가 호전되면 백관들 앞에서 죄를 심의 받고 합의 이혼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태노부인의 이 말은 절대 사정의 의미가 아니라 몰아붙이는 느낌이었다.심지어 태노부인이 황실의 체면과 저씨 가문의 체면을 함께 논할 때 황후의 낯빛이 돌연 변했다. 크게 경악하더니 고개를 홱 돌려 명원제를 바라 보았다.아까만 해도 낯빛이 어둡던 명원제는 태노부인의 이 말을 듣고 도리어 화를 내지 않았다. 심지어 잔잔한 미소까지 머금으며 말했다."노부인, 조급해하지 말게. 이 일은 짐이 자세하게 물어볼 것이네. 노부인의 신체가 편찮다고 수부에게 들었으니 돌아가 푹 쉬게. 자손들은 자연히 자손들만의 복이 있을 것이니 노부인이 염려해서 되는 것이 아니네."말을 마친 명원제는 몸을 일으켜 떠났다. 나가기 전에 담담하게 저명취를 흘깃 보았다.태노부인은 기가 차 멍해졌다. 명원제가 위로의 말 한마디도 없이 이렇게 가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었다. 자신도 안중에 두지 않는 것이었다.명원제는 나간 뒤 목여공공에게 분부했다."초왕과 제왕을 부르거라."목여공공은 잠시 머뭇거렸다."폐하, 제왕은 아직 부상 당한 몸입니다.""죽지 않을 거다."명원제가 담담하게 말했다. 만일 중상이라면 일찍이 부중에서 보고를 했을 것이었다."그리고 이 일을 태후께 아뢰거라. 태후께 한 번 들리라고 전하고."목여공공은 명을 받
다만 저명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눈을 감고 울고 있었는데 몸을 달달 떨고 있었다.제왕은 조태의와 원영의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이번에 원영의는 매우 눈치가 빨랐다. 조태의를 이끌고 나가려는데 조태의가 약가루를 내려놓으며 시녀에게 분부했다."이건 지혈약이다. 상처부분에 뿌리고 살짝 동여맨다면 이틀 뒤 바로 괜찮아질 거다."시녀는 이미 놀라 손발이 나른해진 상태였다. 약가루를 건네 받고는 감사의 인사를 했다.제왕은 모든 사람들을 물리고 저명취의 곁에 앉아 물었다."왜 그러는데?"저명취는 고개를 돌리고 눈물만 흘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제왕은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고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그러나 늘 흐리멍덩했던 머리가 이번에는 도리어 맑아졌다. 사실 원영의의 말들이 그를 정신차리게 했던 것이다.만일 명취가 정말 자신을 생각했다면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들을 강요하지 않을 것이었다. 자신은 째지게 가난한 사람도 아니었고 당당한 친왕이었다. 다른 것을 쟁취하지 않아도 그녀에게 평생의 부귀영화를 줄 수 있었다.누구도 그를 경쟁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도 한가하게 놀고 있는 왕야를 상대하지 않았다. 명취는 그렇게 총명하니 알고 있을 것이었다. 또한 자신은 저수부의 외손자였고 현재 황후의 적자였다.큰 형님이 태자로, 황제로 된다고 하여도 감히 자신에게 어쩌지 못할 것이다. 아니면 천하 사람들의 공론을 막을 수 없을 터였다.당연히, 좀 못나게 말한다면 큰 형님은 애초에 자신을 안중에 두지도 않았다.그리하니 명취는 정말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았다.그렇다면 그가 한 모든 것들은 가치가 있을까? 그리하여 제왕은 마음이 아프지만 계속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이렇게 끝내. 그대가 시집온 날부터 난 그대의 마음 속에 내가 없다는 걸 알았어. 난 자연히 다섯째 형님과 비할 바가 못되지. 나도 내 자신을 알아. 그대는 시종일관 다섯째 형님을 좋아했던 거야. 다만 다섯째 형님이 그대를 저버리자 어쩔 수 없이 나에게 시집온
탕양은 이 말을 듣고 너무 놀라 눈알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아사가 들어와 앉더니 물었다."뭐가 산 것이라고요?""본왕의 아들 말이다!"우문호가 득의양양하게 말했다.아사는 머뭇거리다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턍양을 바라 보았다. 탕양은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키며 왕야가 이미 미쳤다는 손짓을 했다.원경능은 기가 막혀 웃음을 터뜨렸다."됐어요, 됐어요, 식사나 해요.""우리 큰 언니는요?""돌아갔어."원경능이 답했다. 아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제왕에게 정말 화가 나요. 글쎄 큰 언니와 서일이 노닥거린다면서 큰 언니에게 화를 내는 게 아니겠어요? 큰 언니가 화를 참고 때리지 않았는지 모르겠네요."우문호는 기분이 매우 좋은지라 이 말을 듣고 아사를 흘겨봤다."이 계집아이 좀 봐, 일곱째가 매우 연약한 것처럼 말하네. 일곱째도 무술을 연마했었어.""설마요?"아사가 경악했다."그런데 왜 그렇게 연약하게 굴어요?"우문호는 어깨를 으쓱했다."연약하지 않아, 최소한 손으로 계란을 한 알 깰 수 있으니.""전 돌을 깰 수 있어요."아사가 답하니 우문호는 웃음을 터뜨렸다. 원경능이 호기심에 물었다."제왕이 정말 무술을 배운 적이 있나요?""배웠지, 황자로써 누가 배우지 않아도 되겠어? 마술과 궁술, 무술 모두 익혀야 하지. 일곱째도 배웠었는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후로는 배우지 않았어. 싸우는 것도 원하지 않고 말이야."아사는 의아해졌다."왜요?""무슨 자극을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무술 하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어."우문호가 말했다. 아사는 믿을 수 없었다."그렇게 많이 맞았는데 정말 무술을 익혔다면 왜 반격을 하지 않았겠어요?""일곱째는 여인을 때리지 않아."우문호가 답했다****여인을 때리지 않는 제왕은 제왕부로 돌아갔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그는 곧장 저명취의 방으로 향했다.요 이틀간 저명취는 많이 울었는지라 눈이 계속 부어있었다. 제왕이 들어오는 것을 보아도 그저 담담히 눈길을 위로 들었다."성지가 내려진 건가요
제왕은 기가 막혔다."당신의 말투가 왜 아이를 달래는 것 같지? 본왕에게 정비를 소개하다니. 본왕의 혼사는 모후의 뜻을 따라야 해."원영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밝은 눈에 하얀 이, 옴폭 파인 보조개가 매력적이었다."조모께서 말씀하셨어요. 남자는 모두 애라 달래면 된다고요. 그리고 당신의 모후는...."제왕이 화를 냈다."당신의 모후이기도 하잖아!"원영의는 그제야 두 사람 사이가 생각난 듯 무미건조하게 코를 만졌다."전 정비가 아니라 모후라고 부르면 안돼요."제왕은 눈을 가늘게 떴다."당신 계속 본왕에게 합의 이혼하라고 하고 지금 또 이러한 말을 하는군. 당신 정비가 되고 싶은 거 아니야?"원영의가 물었다."정비가 되면 좋은 점이 뭔데요?""좋은 점이 많지."제왕은 잠시 생각했다."최소한 당신은 본왕과 명분이 정당한 부부로 되는 거지.""명분이 정당한 부부가 된다면 뭐가 좋아요?"원영의가 다시 물었다. 제왕은 그녀를 바라 보았다."당신은 부중에서 뜻대로 할 수 있어. 하인들도 모두 당신의 명을 따를 것이고."원영의가 반문했다."제가 지금 부중에서 뜻대로 살고 있지 않나요? 지금 하인들이 제 명을 따르지 않나요?""당신 본왕과 함께 여러 장소로 출석할 수 있지."원영의가 웃었다."지금은 제가 여러 장소에 출석할 수 없나요? "제왕은 그녀에게 눈을 부릅떴다."당신 지금 고의적으로 엇나가는 거야? 당신이 정비와 측비의 다른 점을 모를 리가 없잖아. 정비는 처고 측비는 첩이야, 명분부터 다르잖아.""처도 좋고 첩도 좋아요. 그러나 제가 저인 사실은 번함이 없어요."원영의는 손을 내저었다."전 당신의 처가 되기 싫어요 .좋기는 다른 사람을 찾으세요. 그리고 당신이 저명취와 합의 이혼하는가를 관심하는 것은 저와 직접적인 이해득실이 있어서예요. 누가 부중에 그러한 정실이 있기를 원하겠어요? 전 그녀를 보는 것조차 싫어요."말을 마치고는 곧 일어났다. 원영의가 떠나려 하자 우문경이 손을 잡았다."가자마, 본왕과 이야기나 좀
아사는 돌아간 뒤 부두에서 만아를 본 일을 원경능에게 알렸다.원경능은 이를 듣고 조금 마음이 시큰거렸다.이러한 시대에 여인들은 일반적으로 사람들 앞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만아는 남정네들과 함께 막노동을 하고 있으니 어디 얼굴을 드러내는 정도인가?다만 자신의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아사더러 만아에게 은 열 냥을 가져다 주라고 하였다.다음날 아침 아사가 돌아왔다. 만아가 안받으려고 하였는데 억지로 만아에게 넣어주고 달아났다고 전했다.원경능이 묵묵히 말했다."그 아이에게 주었으면 되었다.""왕비께서는 참 선량하십니다."아사가 칭찬했다. 원경능은 속으로 자신이 선량하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은 열 냥은 준 것도 사실 자신의 죄책감 때문이었다. 원경능은 이 은 열 냥으로 자신을 홀가분하게 만들려고 했다.엄격하게 따진다면 그녀는 만아에게 빚진 것이 없었다.다만 원경능은 자신의 동정심이 점차 사라짐을 느꼈다. 원래의 원경능도 점차 모진 마음을 갖게 되었는데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혹 자기 보호를 더 잘할 수 있을 수 있으나 결국 자신을 잃게 된 것이었다.우문호가 저녁에 돌아올 때 제왕을 데리고 함께 돌아왔다.그은 노기등등한 모습으로 초왕부에 도착하더니 바로 소월각으로 들어가 숨었다.원경능이 호기심에 물었다."왜요? 왜 구신이라도 본 듯이 숨어요? 누가 기분을 상하게 했기에 노기등등한 얼굴이에요?"우문호는 자리에 앉아 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원경능은 자신 곁으로 끌어오고는 배를 어루만지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아들아, 기억하거라. 네가 이후에 만일 일곱째 삼촌처럼 못난 짓을 한다면 뺨을 갈겨 죽일 것이야."원경능은 그의 손을 두드리며 웃었다."무슨 아들이에요? 딸이면 안되나요? 제왕이 왜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했어요?"우문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이 놈이 연속 이틀 동안 관아로 와 나를 찾았어. 공무가 가득한데 저놈 때문에 한 건도 해결하지 못했잖아. 이것 봐, 오늘밤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