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 하씨 가문 소속이지? 분명히 말하는데, 그게 누구의 명령이든 곧 취소하게 될 거야. 난 하씨 가문의 최대 주주인 하도훈 씨와 사돈 관계니까! 다들 눈치껏 행동하는 게 좋을 거야. 지금 당장 주방장을 불러서 식사를 준비하는 게 좋을 거라고!”“그렇지 않으면, 내가 사돈한테 전화해서 너희들의 좋은 날을 당장 박살 내 줄 거야!!” 윤재하는 자기 말이 박용만을 위협할 줄 알았는데, 박용만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죄송하지만, 저희 주방장은 오지 않을 겁니다.”“그래, 마지막 기회를 발로 차버린 건 너희들이야!”윤재하는 곧장 하도훈에게 전화를 걸며 말했다.“내가 전화 못 할 줄 알고?” 전화가 곧 연결되자, 윤재하가 아첨이 극에 달한 목소리로 말했다.“접니다, 저예요. 이제 막 귀국했습니다...”하지만 인사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도훈 쪽에서 귀찮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윤재하? 당신이 나한테 전화할 자격이나 있나?!]하도훈은 이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고, 윤재하는 놀란 탓에 몸을 덜덜 떨며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뭐야, 우리가 윤이서를 친딸로 둔갑시킨 일을 이미 알고 있는 건가?’하도훈의 차가운 말투를 생각하자, 윤재하의 심장을 쉴 새 없이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식사할 마음조차 사라졌다.윤재하는 급히 고이서에게 달려갔고, 두 사람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사태의 전개는 모든 사람의 예상 밖이었고, 심지어 성지영조차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이서만이 멀리서 이 장면을 보고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이서가 오늘 외출한 목적이 바로 윤재하 일가를 제대로 골탕 먹이고, 이전의 수모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서였다. ‘피곤과 배고픔에 찌든 저 모습을 좀 봐. 통쾌해 죽겠어!’이서는 다른 일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한편, 윤재하의 손에 이끌려 한적한 구석에 다다른 고이서가 당황스럽다는 듯 말했다.“아빠, 왜 그러세요?” “방금 하도훈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것 같았어. 아무래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고이서는 더 이상 일을 차분하게 처리할 생각이 없었다. ‘치매가 아니라면, 윤이서는 우리를 골탕 먹이려고 오늘 일을 벌인 거야. 정말 그런 거라면 당장 마땅한 곳을 찾아 윤이서를 죽여버려야겠어!’‘죄는 다른 사람한테 뒤집어씌우고, 나는 자연스럽게 윤씨 그룹을 계승하면 될 테니까!’한편, 고이서의 계획을 알 리 없는 이서는 여유롭게 직원들이 건네준 과일을 먹고 있었다. 과수원은 확실히 하씨 가문 산하의 사업이었지만, 이전에 지환이 이미 하씨 가문의 사업을 인수했기 때문에 지환도 주주 중 하나인 셈이었다. 하지만 이서는 이 사실을 과수원에 온 후에야 깨닫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오기 전에는 이서도 고이서가 어디로 갈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 과수원이 하씨 가문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서는 곧장 이천에게 전화를 걸어 윤재하 일가를 블랙리스트에 올리라고 지시한 후, 박용만을 불러 윤재하 일가를 위한 ‘풍성한 점심 식사’를 준비했다. 이것이 바로 윤재하 일가에게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과수원에 입장시킨 진정한 이유였으니 말이다.‘오늘 일이 윤재하 일가에게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았으면 해. 아, 물론 이걸로는 부족하지만 말이야.’이서는 앞으로도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바로 이때, 이서는 고이서와 윤재하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기쁨을 거둔 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이서야, 대체 무슨 일이야?” 서로의 눈을 마주친 고이서와 윤지하가 입을 열었다.“아무것도 아니야. 이만 가볼까?”이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왜? 우리는 아직 과일을 많이 따지도 못했잖아.”“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가족이 이 과수원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대. 우리한테 음식을 제공할 수도 없다고 하니, 여기선 우리가 밥 먹을 수 없을 것 같아.”“일단 여길 나가서 밥 먹을 곳부터 찾아보자.” 이서는 몇 초 생각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이 과수원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고?”고이서는 이서의 질문
고이서의 얼굴에 만연하던 근심은 삽시간에 사라졌는데, 고이서는 이서를 향해 입을 열었다.“그래, 가장 친한 친구는 상대의 요구를 반드시 들어줘야 해. 하지만 이서야, 우리가 정말 친한 친구라면 너도 내 요구를 반드시 들어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긴 하지.”이서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지만, 고이서가 미소를 짓기도 전에 이서는 또 한 마디를 덧붙였다.“하지만 나는 이미 많은 일을 잊어버렸어. 너는 내가 가장 친한 친구라고 말했지만, 나는 아무 기억도 안 난단 말이야.” 이 말인즉슨, 고이서가 먼저 두 사람이 가장 친한 친구라는 믿음을 줘야 한다는 뜻이었다.“하하!” 고이서가 급기야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너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걸 증명하면 되는 거지?”“그래, 알겠어. 오늘 안에 네가 먹고 싶다는 과일을 꼭 준비해 줄게.”고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윤재하와 성지영을 끌고 차갑게 식은 음식으로 향했다.윤재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지금 뭐 하는 짓이야?!”“아빠, 방금 못 들었어요?”“친한 친구는 상대의 요구를 반드시 들어주는 거라잖아요.”“상대의 요구를! 반드시 들어주는 거요!” 단번에 고이서의 뜻을 이해한 윤재하의 눈이 점차 밝아지기 시작했지만, 성지영은 이해하지 못하고 불만스럽게 말했다.“상대의 요구를 반드시 들어 준다니,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윤이서는 일부러 우리를 괴롭히려는 거야. 이서야, 절대 속지 마. 우린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한다고!” “너, 엄마가 굶어 죽는 꼴을 보고 싶은 거야?”고이서가 성지영 앞에 밥 한 그릇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엄마, 배고프면 이거 드세요.”“나더러 이걸 먹으라고?” 성지영은 자기 그릇에 있는 잔반과 찬밥을 보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이게 돼지죽이랑 뭐가 달라?’ “네.”진지한 표정의 고이서는 전혀 농담하는 것 같지 않았다.“엄마, 우린 이걸 먹고 오늘 안에 윤이서가 요구한 과일을 모두 준비해 줘야 해요.”“너, 미친 거
윤재하 일가는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지만 결국 이서의 요구를 승낙할 수밖에 없었고, 모든 과일을 수확했을 때는 이미 이틀이 지나 있었다. 세 사람은 이틀간 잔반과 차게 식은밥만 먹을 수 있었는데, 처음에는 불평을 늘어놓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눈을 뜨자마자 일했기 때문에 피곤해서 불평할 정신도 없었다. 심지어 집으로 돌아가는 차를 탔을 때도 기뻐할 힘이 없었으니 말이다.이런 텅 빈 느낌은 다음날까지 이어졌고, 세 사람은 그제야 살아난 듯한 기분을 느꼈다.이서는 세 사람이 집을 뒤적거리며 먹을 것을 찾는 기회를 틈타, 요 며칠 동안 세 사람이 힘든 시간을 보내는 사진을 단톡방에 보냈다.단톡방에서는 하나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윤재하랑 성지영이잖아.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이서가 상황을 간단히 설명하자, 하나는 이서가 하은철을 위해 가장 좋은 과일을 찾으려고 피부가 벗겨질 때까지 햇볕 아래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하나는 통쾌하다는 듯 욕설을 내뱉었다.[꼴 좋네! 저 인간들은 진작에 저런 상황을 겪어야 했어. 성지영은 각종 이유로 널 구박했었잖아? 아마 하은철이 널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네가 뭘 하든 싫었던 걸 거야.][그래서 네가 한 모든 일을, 별거 아닌 것처럼 치부했던 거라고!][이젠 네가 겪은 고통을 두 사람에게 똑같이 돌려줘야 할 때야!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건지 알게 해주라고!][저 사람들은 앉아서 입만 열 줄 알지, 직접 겪어보지 않았으니 고통은 전혀 몰랐을 거야.][하은철이 널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네가 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말도 했었잖아?] [이제 본때를 보여줘야 해. 네 문제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해줄 때가 온 거라고.][그때의 일은 네가 아니라 하은철의 문제였으니까.]윤재하 일가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도 하나는 전혀 동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부족하다고 느꼈다. [저 사람들은 잔인한 학대를 당해도 싸!] 소희와 나나는 이서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 수 없었으나, 윤재하와 성
[괜찮을 거야. 기회를 봐서 조금씩 움직여 볼게.] 이서는 이 메시지를 보내려던 찰나 바깥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를 들었고, 서둘러 마지막 문장을 덧붙였다.[인제 그만 연락해야 할 것 같아.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이서는 이내 채팅 기록을 삭제했다. 한편, 함께 있던 소희와 하나는 이서가 보내온 메시지에 걱정만 쌓여갔다. “정말 이렇게 내버려둬도 괜찮은 걸까?”소희가 눈살을 찌푸리며 묻자, 하나가 고개를 저었다.“글쎄, 형부한테 이 일을 알리는 건 어떨까?” ‘우리라면 몰라도 형부는 이서를 도울 수 있을 거야.’소희가 말했다.“좋은 생각이야.” 소희의 동의를 구한 하나는 곧장 지환에게 전화를 걸었고, 업무를 처리하던 지환은 낯선 번호로 걸려 온 전화를 보고서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하나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저예요...”하나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에서 지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로 갈게.]곧이어 수화기 너머에서 상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하나는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형부의 도움이 필요했어요.” 이 말을 들은 상언이 의아하다는 듯 지환을 힐끗 보았다.[지환이의 도움이요?] 상언의 딱딱한 어투는 마치 대단한 소식을 들은 듯했지만, 하나는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왜요, 저는 형부한테 전화하면 안 돼요?”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상언은 입으로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핸드폰을 지환에게 건네주지는 않았다. 한참 동안 기다려도 지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자, 하나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이서에 관한 일 때문에 전화했어요.” 이 한마디에 상언의 눈썹이 들썩였다. [하하, 나도 알아요.]하나는 말문이 막히는 듯했다.상언은 그제야 지환에게 핸드폰을 건넸고, 하나의 말을 들은 지환은 그저 ‘알겠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소희는 하나가 핸드폰을 든 채 제자리에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형부가 뭐라
상언은 낯선 사람을 보듯 지환을 바라보았다.‘내가 알던 지환이가 맞나?’ 상언은 지환이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지만, 직접 보고 들은 이상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지환아...”“별일 없으면 이만 가봐.”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다시 고개를 숙인 채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지환의 냉정한 모습을 본 상언은 그 자리에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지환이의 이런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더라?’ ‘지환이가 이서를 만난 후로는 이런 모습을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기계적으로 일만 하던 그 모습으로 다시 돌아간 건가?’ 눈살을 찌푸린 상언은 하려던 말을 삼키고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방 안에 고요함이 맴돌자, 지환은 마침내 하던 일을 멈추었다.지환은 한참이나 이마를 눌렀지만,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핸드폰을 들어 이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천, 이서가 내일 병원에 갈 거야. 이서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필요해 보이면 이서를 도와주도록 해. 혹시라도 이서가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면 너도 마침 병원에 온 거라고 이야기하고.” [네.]한편, 아직 문밖을 떠나지 않은 상언이 안에서 들려오는 지환의 목소리에 입꼬리를 씰룩였다.‘역시 이럴 줄 알았다니까?’ ‘천하의 하지환이 이서의 일에 신경을 안 쓴다는 게 말이나 돼?’ ...이튿날.이서는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났고, 고이서가 어느 병원으로 자신을 데려갈지 모르기에 카드 한 장을 준비해 두었다. ‘가장 간단하고 잔인한 방식으로 의사를 매수할 수밖에 없겠어.’ ‘하지환 씨의 병원이라면 이렇게 귀찮을 필요는 없었을 텐데 말이야.’ “이서야, 이제 가야 해!” 고이서가 방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며칠간 과수원에서 극심한 노동을 한 고이서의 몸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지만, 이서가 치매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면 고이서는 언제든 벌떡 일어날 수 있었다. ‘열흘 동안 침대에 누워있어도 체력을 회복하지 못할 지경이야.’‘피곤해서 죽을 것 같다고!’
이서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래? 하지만 너무 무서워... 나... 안 들어가면 안 될까?” “그건 안 돼. 오늘은 재검사하는 날이잖아. 네가 병원에 안 들어가겠다고 우기면, 의사 선생님이 어떻게 너를 검사할 수 있겠어?” “그런데 왜 이전에 갔던 병원에선 재검사받을 수 없는 거야? 그 병원에서는 무서운 느낌이 전혀 없었단 말이야.” 고이서는 잠시 말문이 막히는 듯했지만 다시금 입을 열었다.“이 병원의 의료 수준이 가장 높다고 하길래 내가 이 병원에서 가장 유명한 의사 선생님께 네 진료를 부탁해 뒀어. 그분께 치료를 맡기면 네가 더 빨리 회복할 수도 있을지도 모르잖아.” “이서야, 하루빨리 회복해서 옛날 일을 떠올리는 게 싫은 건 아니지?”이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고이서가 이서를 격려하며 말했다.“내가 있으니까 아무도 널 다치게 할 수 없을 거야, 응?” 이서는 참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말했다.‘네가 날 다치게 할 거잖아.’하지만 더 이상 고이서의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 없었던 이서는 이만 차에서 내려야 했다.이서는 두려움에 떨며 차에서 내렸지만, 머릿속으로는 방법을 강구하면서 의사의 진료실로 향했다.마침내 진료실 입구에 도착한 이서는 위에 길게 적힌 직함을 보고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국제적으로 유명한 의사라니, 이런 사람은 돈이 궁하지 않을 거야.’ ‘어쩌면 내가 가지고 있는 카드로는 의사를 매수할 수 없을지도 몰라.’ 이서는 애써 생각을 숨기며 고이서를 향해 말했다.“이서야, 배가 좀 고파서 그런데, 뭐 좀 사다 줄 수 있어?”고이서가 말했다.“나오기 전에 아침도 먹었잖아.” 이서가 배를 만지며 말했다.“하지만 배가 고픈 걸 어떡해...”고이서는 이서가 투정을 부리는 모습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그래, 알겠어.”고이서가 떠난 것을 확인한 이서가 의사의 맞은편 자리에 앉자, 의사가 이서를 흘긋 보며 말했다.“이름은요?” 이서가 대답하지 않고 멍하니 의사를 바라보자, 의사는 손에 든 차트를 바라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고이서는 벌컥 화를 내려 했지만, 의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더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치매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그래서 윤이서 씨는 지난 일은 잊었음에도 전혀 어리숙해 보이진 않았던 거죠.” 의사의 설명을 들은 고이서는 그제야 크게 깨달았고, 조금 전에 이서에게 화를 내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여겼다. “감사합니다, 선생님.”고이서가 이서에게 말했다.“이서야, 이만 가자.” 이서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의사를 바라보았지만, 이내 고이서를 따라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이서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의사의 전화를 받았다. [이상언 선생님의 연락처를 알고 싶습니다.] 이서는 말문이 막혔다.‘상언 오빠의 연락처가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은 몰랐어!’ 한편, 이서가 정말 치매 환자라는 소식을 접한 윤재하가 얼른 입을 열었다.“그럼 하루빨리 윤이서한테 양도 협의서를 써달라고 해야지!” “이미 지시해뒀으니까 오후쯤이면 양도 협의서를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윤이서가 그 서류에 서명하기만 하면 윤씨 그룹은 우리의 것이 되는 거라고요!”성지영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드디어 이날이 오는구나!” 고이서는 오후가 되어서야 양도 협의서를 받았고, 곧장 이서의 방문을 두드렸다.한편, 이서는 하나와 한참 동안 채팅을 나누고 있었는데, 노크 소리를 듣고서 재빨리 모든 기록을 삭제했다.“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선 고이서의 손에는 주스 한 컵이 들려 있었다.“이서야, 널 위해서 특별히 준비한 생과일주스야. 오늘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이느라 아주 피곤했지?” 고이서는 살며시 양도 협의서를 내려놓았지만, 이서는 그것을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다.‘아, 저것 때문에 나를 치매 환자로 만들려고 한 거구나!’ ‘내가 치매에 걸리면 나를 몰아내고 윤씨 그룹을 장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허, 제법인데?’“고마워.” 잠시 침묵하던 고이서가 입을 열었다.“이서야, 네가 전에 했던 말...
지환과 이서는 곧 하도훈을 마주했는데, 두 사람을 보는 하도훈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래, 너희가 이겼어!” 겨우 이 말을 내뱉는 하도훈은 이미 온 힘을 다 쓴 듯했다.“원래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환은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말했지만, 하도훈은 지환의 말에 흥분하기 시작했다.“허.”“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고? 네가 윤이서와 급히 결혼하지만 않았더라면, 은철이가 이 세상을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모든 비극은 너희들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하도훈이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잘못을 깨닫지 않자, 이서는 더 이상 하도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이서의 눈빛을 마주한 지환이 고개를 끄덕인 후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하도훈을 바라보았다.“형님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하도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이런 상황에서 알려줄 게 있다니, 두 사람한테 아이라도 있다는 건가?”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형님의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지환이 먹구름처럼 어두운 눈동자로 하도훈을 응시하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하도훈이 곧장 몸을 일으켜 지환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지환은 그저 묵묵하게 하도훈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닙니다.” “뭐, 뭐라고?”하도훈이 벼락을 맞은 듯 제자리에 얼어붙자, 지환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그 아이는, 형님의 아이가 아니라고요.”하도훈은 급기야 고개를 저으며 ‘하하’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하하하,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하지환, 내가 그 말에 속을 줄 알고?! 하하, 나는 절대 그 말에 속지 않을 거야!”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하도훈의 손을 뿌리쳤고, 광기 어린 하도훈을 차갑게 응시했다.“그 여자는 형님을 만나기 전부터 임신 중이었습니다.”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이서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하도훈은 정말 그 여자를 믿었던 걸까요?”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는 지환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이란다. 내가 왜 이런 일로 널 속이겠니?!” “정말 잘 됐어! 스웨이 여사도 이제야 소원을 하나 이룬 셈이니까!”배미희가 말했다.이서는 병실 입구까지 걸어온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이 결과에 놀란 하이먼 스웨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서는 붉은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잠시 후,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게 된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눈물 속에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배미희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이서야, 엄마라고 불러보렴.” 이서는 이전에도 하이먼 스웨이를 ‘엄마’라고 부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하이먼 스웨이가 친엄마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하이먼 스웨이가 자신을 다정하게 챙겨주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엄마’라는 호칭은 아주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이서는 여러 번 시도한 후에야 온몸을 떨며 말했다.“엄, 엄마...”이서의 눈에서 하염없는 눈물이 터져 나오자, 하이먼 스웨이는 이서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 드디어 널 찾았구나.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앞으론 엄마가 널 지켜줄게.”“엄마... 엉엉...”큰 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한 이서는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을 다 토해내는 듯했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잠시 후, 병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지환을 본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놓아주며 지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어서 오렴.” 지환은 서서히 하이먼 스웨이에게 다가갔고, 하이먼 스웨이는 지환의 손을 이서의 손 위에 올려 두었다.“이서야, 하 서방은 누구보다 널 잘 아는 사람이야. 하 서방이야말로 너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지.” “하 서방한테 널 맡길 수 있다면... 엄마는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그
이서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환은 몸에 난 상처로 인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서가 고개를 숙여 지환과 입을 맞추며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우리가 올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네?” 이서는 하마터면 놀라 넘어질 뻔했는데, 눈치 빠른 소희가 이서를 붙잡았다.이서가 다소 원망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나를 바라보자, 하나는 깔깔거리며 가지고 온 건강식품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이내 상언과 지환은 그날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서는 하나와 소희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두 사람, 화해한 거야?” 병실을 나서자마자, 하나가 호기심과 가십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나가 기뻐하며 이서의 어깨를 두드렸다.“잘 생각했어. 형부가 신분을 속이긴 했지만, 형부가 널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아마 하은철은 형부의 반도 못 따라올 거야!” “근데 대체 언제까지 형부랑 그 쓰레기를 비교할 생각이야?”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이랑 비교해야 한단 말이야. 아니다, 형부는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낫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과거를 내려놓고 지환 씨와 다시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이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서의 표정이 다소 엄숙해졌다.“그러는 너는? 너는 상언 오빠랑 어떻게 됐어?’그동안 이서는 하나와 상언의 일을 잘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우리는...”하나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꽤 괜찮아.” “뭐가 괜찮은데?” 소희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하나가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결정했어, 그 사람을 내 영원한 남자 친구로 만들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평생 이 선생님과 함께 할 생각이야. 물론 이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헤어져야겠지만 말이야.” “아, 이제야 알겠다!” 이서가 말했다.“네 마음속 상언 오빠의 지위가 상승하긴 했지만, 아직 남편이 될 자격
이서가 이곳에서 죽을 각오를 하던 그 순간,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크게 일었다. 사람들은 그 위력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서는 어렴풋이 자기 머리 위에서 헬리콥터가 선회하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이서가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병상 위에 누운 상태였고, 곁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있었다. 이서가 깨어나는 것을 본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이서야, 좀 괜찮니?” “... 네.”이서는 간신히 대답한 후 긴장한 표정으로 배미희의 손을 잡았다.“엄마, 지환 씨는요?” “무사해.”배미희가 자기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다른 병실에 있는데, 아직 의식을 찾진 못했단다.” “지환 씨한테 가보고 싶어요.” 이서가 눈물을 머금고 배미희를 바라보자, 배미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언에게 이서를 옆 병실로 안내해달라고 했다. 잠시 후, 침대에 누운 지환을 본 순간, 이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괜찮을 거예요. 조금만 있으면 깨어날 수 있을 거고요.”그 순간, 병실 안에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떨어진 창가에 멋지게 걸터앉은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그 여자는 아래로 떨어질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당신은...” “그 사람이 누구든 신경 쓰지 마세요.”갑자기 나타난 어둠이 호리병이 이서를 가로막으며 보물을 자랑하듯 말했다.“윤이서 씨, 나한테 고마워해야 할 겁니다!” 이서는 호기심에 어린 눈빛으로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는데, 어둠의 호리병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 콜록콜록, 두 사람은 여기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윤이서 씨와 하 대표님은 이미 염라대왕을 만났을 겁니다.” “헬리콥터를 동원한 것도 당신들이었나요?”“맞아요, 우리가 하도훈이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해치웠고, 하지호와 박예솔까지 해결
지환과 이서는 숨을 돌리기도 전에 더욱 맹렬한 공격을 받아야만 했는데, 다크웹 고수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곳마다 파멸로 이끌었으니 말이다.이서는 바깥 상황을 보면서 많은 걱정에 휩싸였다. “어둠의 호리병은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죠? 설마...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죠?”지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럴 리 없어. 그 바닥 사람들은 의리를 아주 중요시하거든.”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데려오겠다고 약속한 이상, 어둠의 호리병은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킬 거야.”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차에 이서를 태웠다. “너는 우선 여길 떠나.”이서는 지환의 말 속에서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지환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여길 떠나라니요?” 지환이 말했다.“하지호는 이미 모든 수를 동원했어. 그 자식들이 여기로 올지도 모르니까 너는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이서는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가정법원에 가서 새로운 정보를 등록하지도 않았잖아요!” “일이 끝나는 대로 처리하러 가야 한다고요!” 이서는 여전히 지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는데, 이서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도 않았잖아요.” 지환이 거친 손가락으로 이서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일이 끝나는 대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게.” 지환은 이 말을 끝으로 모진 마음을 먹고 이서의 손을 밀어냈고,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보며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쳤다.“우리한테는 아직 아이도 없다고요!”지환이 걸음을 멈추었다.“지환 씨,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이서는 지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화약 냄새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앞으로 남은 당신의 운명이 죽음뿐이라면, 나는 당신과 함께 죽을 거예요.”“하지만 당신이 살아갈 운명이라면,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지환 씨?” 지환은
지환의 모습을 본 이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내 말은, 가정법원에 가서 다시 혼인 신고하자는 뜻이었어요.”“이전에 등록한 건 다 가짜 정보였잖아요. 내일은 진짜 정보를 등록하자고요.” 지환이 기뻐하며 말했다.“좋아, 그렇게 하자.” 이서는 지환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다시 치켜세웠지만, 잠시 후 웃음을 거두었다. “아, 하도훈 쪽을 깜빡했네요. 우리가 가정법원에 가는 틈을 타서 기습하면 어쩌죠?”지환은 이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을 미루고 싶진 않아. 하지만...’“그럼 어둠의 호리병이 다크웹의 1위와 2위를 찾을 때까지만 기다려보자...”바로 그때, 지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안색이 변한 지환은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아래층에서 총을 발포한 두 무리의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 무리는 하도훈의 사람들임이 분명했다.“무슨 일이에요?”이서가 침대에서 일어나 물었다.“아무래도 하도훈이 이곳을 떠나는 어둠의 호리병을 지켜본 모양이야. 이 기회를 틈타 첫 번째 공격을 하려고 한 거지.”지환은 이서를 데리고 방구석으로 향했고, 서랍에 있던 총을 꺼내며 이서에게 말했다.“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내가 저 사람들을 쫓아내 볼게.” 이서가 지환은 손을 잡고 말했다.“하지만... 혼자는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 “내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지켜줄 거야.”지환이 말했다.“이서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내일이 밝으면 우리는 가정법원에 가서 진정한 부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서는 지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천천히 손을 놓았다.“나는 지환 씨를 믿어요. 당신은... 꼭 돌아올 거예요.” 굳게 마음먹은 지환이 떠나자마자 집 밖에선 몇 차례의 총소리가 울렸고, 머리를 감싼 이서는 구석에 웅크린 채 지환만을 기다렸다.‘이럴 때는 나 자신을 잘 보호해서 지환 씨한테 걱정을 끼치지 않아야 해.’ 이내 아래층의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이서는 살며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별장 전체가 고요한
“윤이서 씨가 하 대표님과 사이좋게 지낸다면, 그 사람들을 찾아줄 의향이 있습니다.” 어둠의 호리병의 말을 들은 이서와 지환은 모두 멍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두 사람 모두 어둠의 호리병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특히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작은 어색함이 피어올랐다. “왜 대답이 없어요?”어둠의 호리병이 재촉하며 말했다.“뭐,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어요. 나야 그 사람들을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만약 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상대할 작정이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가면 돼요.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떻게 할 생각이죠?” 이서의 시선이 지환에게 떨어졌다.“하도훈이 최선을 다해 우리를 상대할 거라는 게 사실이에요?” 지환이 이서의 눈을 응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응.” 이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어둠의 호리병을 바라보았다.“정말 그 사람들을 찾을 방법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뭐 도울 건 없고요?”“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그럼...”이서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우리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주기만 한다면, 그 조건을 승낙할게요.” 옆에 있던 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의 말에 흥분하며 말했다.“이서야, 하 서방이랑 이혼하지 않겠다는 거니?” “네.”이서가 짧게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의 제안은 이서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내어준 셈이었고, 이서는 그 구멍을 통해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정말 잘 생각했어!”배미희와 하이먼 스웨이가 이서를 안고 말했다.“정말 좋은 일이구나. 이제 DNA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되겠어!” 지환도 이서를 꽉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린 배미희는 하이먼 스웨이와 어둠의 호리병에게 말했다.“우린 이만 나가볼까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이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자리를 떠났고, 이서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적막한 방 안에는 순식간에 두 사람만이 남았고, 이서는 지환을 바라볼 수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배미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어머, 벌써 잊은 거야?”“애초에 스웨이 여사가 심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 그 가짜랑 DNA 검사를 했을 때 이서 네가 그 여자랑 함께 있었잖아!” “그때 우리는 CCVT 자료를 찾진 못했지만, 가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DNA 검사를 진행했단다.” 그 일은 아주 명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지막까지 그 가게에 있던 사람 중에 누가 하이먼 스웨이의 딸인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때 그 가게에 있던 모든 사람을 조사했어.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야!” 배미희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이서의 몸에 떨어지자, 하이먼 스웨이도 그제야 배미희의 뜻을 이해한 듯했다.하이먼 스웨이는 흥분한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지만, 함부로 과욕을 부릴 수는 없었다.“이서야...”이서도 감격에 겨워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다.“설마... 그럴 리가...”배미희가 말했다.“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때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조사받았는데, 너랑 스웨이 여사만 DNA를 대조하지 않았잖니? 아니다,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서 DNA 검사를 하는 건 어떨까, 응?” 배미희의 말에 하이먼 스웨이와 이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물론 이서도 하이먼 스웨이가 친부모이길 바란 적이 있었고, 하이먼 스웨이도 이서가 딸이기를 바란 적이 있었다.하지만 지금은...두 사람 모두 반신반의했다.“제 생각에도 검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의 DNA가 일치한다면 아주 기쁠 일이지만, 아니라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지환이 입을 열자, 이서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지환의 눈빛을 마주했다.이서는 다시금 하이먼 스웨이를 바라보았는데, 하이먼 스웨이의 눈동자에는 조심스러운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저는 괜찮은데,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하이먼 스웨이가 억제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래, 좋고말고...”잠시 후, 연락
성지영이 곧장 입을 열려고 하자, 윤재하가 성지영을 제지하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저 X이 친부모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게 해주자고!” “당신은 윤이서가 정말 우리한테 가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두 사람이 걸려들지 않는 것을 보고도 이서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으며, 되려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는 있는 모양이네요.” 성지영은 자신이 정말 속았다는 것에 분개하며 소리쳤다.“이 사기꾼아!” 하지만 성지영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기도 전에 윤재하와 성지영은 경찰들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윤재하와 성지영이 경찰차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서는 꼭꼭 숨겨두었던 나약함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어쩌면 평생 친부모님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하지만... 나는 절대 오늘의 일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이서는 고개를 돌려 한쪽에 서 있는 지환과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후회하지 않을 거야.’‘친부모님을 찾을 순 없지만, 저 친구들이 내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거니까.’“이만 돌아가자.” 이서의 목소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 이서는 또 한 차례의 격전을 이겨내기 위해 푹 쉬어야만 했지만, 이서가 윤씨 가문의 혈육이 아니라는 가십이 온 세상을 들썩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서는 일부로 그 가십을 잠재우려 하지 않았고, 되려 상황이 더욱 악화되도록 방치했다.이내 그 소식은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은 윤씨 가문이 하씨 가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토록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어머, 그럼 윤이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이 윤씨 가문의 도구가 된 거예요? 너무 불쌍하네요.] [윤씨 가문 사람들, 정말 파렴치해요! 자기 딸은 자기 딸이지만, 다른 사람은 딸은 다른 사람의 딸인 거잖아요.][윤이서 씨가 친부모님을 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윤이서 씨의 친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