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희 씨를 심씨 가문에서 쫓아내려는 이유는 아주 간단해. 소희 씨가 하은철의 미움을 샀기 때문이지.” “하지만 지난번에는 일이 성사되지 않았더라고.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어.”“나는 그 사람들이 쉽게 물러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후에 심태윤이 나를 찾아온 건... 내 불안감을 더 고조시켰지.”“그래서 부하 직원한테 심씨 가문과 심태윤이 접촉했는지에 대해 살펴보라는 지시를 내렸어.” “그런데 정말 누군가가 심태윤과 접촉했더라고.” 이서가 말했다.“그게 누군데?” 하나가 궁금해하며 물었다.“강경숙.” 이 이름을 들은 그녀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애초에 강경숙은 환영 파티에서도 눈에 띄게 날뛰며 소희를 괴롭히지 않았는가. “뱀과 쥐가 한 배를 탄 셈이네.”하나가 이서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이서야, 네가 직접 그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야?”“나한테 그런 능력이 어디 있겠어. 심태윤 혼자라면 내가 해결할 수 있겠지만, 심태윤과 강경숙이 손을 잡은 이상, 일을 쉽게 해결하기는 어려울 거야. 내가 심태윤을 상대한다면, 강경숙과 적이 되는 건 피할 수 없을 테니까.”“강경숙이 그렇게 날뛰었던 건 내가 싫어서가 아니야. 소희 씨가 돌아간 후에 본인이 가졌던 자원이 줄어드는 게 싫어서였겠지.”“즉, 그 여자가 싫어하는 건 소희 씨라는 뜻이야.”“내가 심태윤을 처리하면, 강경숙은 그걸 빌미로 내가 심씨 가문에 대항하려 한다고 말할 거야.” “하지만 심씨 가문과 윤씨 그룹은 지금 워낙 예민한 관계잖아.” 하나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나한테 소희를 도울 방법이 하나 있긴 해. 네가 원하는 방법은 아니겠지만 말이야.” “무슨 방법인데? 정말 그 방법이 소희 씨를 도울 수 있다면, 나는 그 방법을 사용하고 싶어.”이서가 말했다.“정말? 그럼 말해줄게.”“사실 방법은 아주 간단해. 형부와 심씨 가문에 가서, 형부가 네 남편이고 예전에는 YS그룹의 대표였다는 것만 말하면 돼.”“지금은 하씨 그룹의 주주라는 것까지 말하면 금상첨화겠지.
지환의 병실 안.상언은 어쩔 수 없이 열 번째로 멈추었다.“지환아, 다크웹 고수의 일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너와 이서의 일부터 이야기해 볼까?”‘이서’라는 두 글자를 들은 지환은 곧 정신을 차렸다.“이서? 이서는 어디 있어?” 상언이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보았다.“지환아, 이서에 대해 말한 게 아니라, 다크웹에 대해 말하고 있었어. 너, 설마 고수를 모집할 생각이 없는 거야?”“쓸데없는 소리.” “그럼 조금 더 진지하게 행동해. 벌써 어둠의 호리병에 대한 이야기만 세 번째 했잖아. 내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기는 하는 거야?”지환은 좀 짜증이 났다.“지금은 기분이 안 좋으니까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진작 그렇게 이야기하던가.”상언이 자료를 밀어내고 말했다.“말해봐,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지환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어떻게 생각하냐고?”“너랑 이서 말이야!” 상언은 지환의 머리를 열어, 그 안에 대체 무엇이 들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을 지경이었다.“이서가 너를 잘 챙기지는 않지만, 적어도 너랑 같은 공간에 있을 때 날카롭게 대하지는 않았잖아.” “솔직히 오늘 너희 두 사람의 만남은 평화로운 편이었어.” 이것은 지환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그럼 무슨 소용이야?”지환은 의기소침해졌다.“함께하긴 했지만, 이서는 나를 상대하지 않으려 했어. 그리고 너도 들었잖아.” “뭐를?”“하도훈과의 일이 해결되면, 우리 사이의 관계는 완전히 끝일 거라고.” “그게 걱정이었던 거야?”상언은 할 말이 없었다.“지환아, 하나만 묻자. 이서가 혼수상태일 때는 무슨 생각을 했었어?”지환은 상언이 왜 이렇게 묻는지 알 수 없었지만 대답했다.“이서가 영원히 깨어나지 않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했었지.” “그래, 그럼 이서가 깨어난 후에는?”“나한테 질문하면 뭐라고 대답할지 고민했어.” 상언은 그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지환은 눈을 크게 뜨고 상언을 바라보았다. 한참 후, 상언이
“어둠의 호리병은 다크웹을 이용하는 많은 사람이 모집하려는 고수야. 랭킹 3위를 차지하는 사람인데, 다크웹에서는 그런 말이 있다고 하더라고. 그건 바로... ‘다크웹에서 랭킹 3위에 드는 고수들을 동시에 차지하기만 하면, 이 세상을 정복할 수 있다’!!”“그런데 랭킹 3위에 드는 고수 중 한 명과 다른 두 명은 피맺힌 원한을 가지고 있대.”“즉, 세 사람을 한 번에 모집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라는 뜻이지.” “그런데 우리도 이 세상을 정복할 생각은 없잖아? 그러니까 어둠의 호리병을 떼어내기만 하면 하도훈의 독점을 막을 수 있을 거야.”상언이 말했다.지환은 어둠의 호리병에 대한 자료를 모두 보았다.“꽤 제멋대로 일을 맡는 모양이네. 1년에 단 1건의 임무만 맡는대.”“맞아.”상언이 종이 한 장을 뒤적거리며 말했다.“게다가 올해의 임무는 이미 수행했네.” 지환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그런데도 그 사람을 찾겠다고?” “어쩔 수 없잖아. 1,2위는 신출귀몰해서 찾고 싶어도 방법이 없어.”“하지만 어둠의 호리병은 아는 사람이 있긴 하더라고.” “그게 누군데?” “앤서니 씨.”“앤서니가 어둠의 호리병을 안다고?”지환이 물었다.“아는 사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일방적으로 한 번 본 적은 있나 봐.”지환은 화가 나서 웃음이 났다.“그러니까, 어둠의 호리병이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만 있고, 그 사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전혀 모른다는 거네?”“그 사람은 다크웹 3위에 오른 고수야.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으면 고수라고 할 수 있겠냐?”상언은 당당했다.지환은 깊은숨을 들이마셨다.정말이지 이서의 안전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와 이곳에서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을 것이었다.“사람을 찾는 건 너한테 맡길게.” “그래, 문제없어.”상언은 아주 깔끔하게 대답했다.“어차피 나는 그 사람을 설득할 수 없을 테니, 어려운 임무는 너한테 맡길게.”“그래.”지환이 짧게 대답했다.“별일 없으면 먼저 갈게.” 상언은 자료를 말아
한편, 소희는 심씨 가문으로 돌아오자마자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거실로 들어선 후, 왜 그런 느낌이 든 것인지 알게 되었다. 집에는 손님이 있었는데, 한 명이 아니었다. 그들은 바로...강경숙과 심유인. 게다가 다른 방계의 심씨 가문 사람들과 심씨 가문의 어르신들도 함께였다. 그 모습은 애초에 사당에 있을 때와 똑같았다.굳이 다른 점을 찾으라고 한다면 장소가 다르다는 것뿐. 소희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이서 언니를 만나고 오면, 이렇게 될 줄 알았어.’‘놀라울 일도 아니지.’ ‘하지만 이 사람들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어.’ “아쉽게도 돌아왔네요!” 소희를 본 심유인이 괴상한 목소리로 입으로 열었다.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소희는 이 말이 굉장히 단호하게 느껴졌다.마치 누군가의 지지를 받는 것처럼 말이다. “저 왔어요.”소희는 심유인의 말을 무시하고 심근영 부부에게만 인사했다.심근영 부부는 안색이 좋지 않았지만, 그녀의 인사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왔으니 됐어, 그걸로 된 거야!” 이지숙은 곧장 일어나서 소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소희야, 이리 오렴.” 그녀는 순순히 이지숙의 곁으로 가서 앉았다.이지숙은 계속해서 소희의 손을 잡았는데, 금방이라도 그녀가 눈앞에서 사라질까 봐 두려운 듯했다. “소희야, 어르신들께서 너한테 묻고 싶은 질문이 있다고 하셨어. 긴장하지 말고 사실대로만 대답하면 돼.” 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장 중앙에 앉은 어르신을 보았다.그 어르신은 이내 목소리를 낮추고 입을 열었다.“소희야, 어디서 오는 길이냐?” 소희가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병원이요.”“병원? 진찰을 받으러 간 게냐, 아니면 병문안을 다녀온 게냐?” “병문안 다녀왔습니다.”이 말을 들을 강경숙과 심유인이 득의양양하게 소희를 바라보았다. “인정하는군요.”심유인이 말했다.“심소희, 심씨 가문과 윤씨 그룹의 관계가 아주 미묘하다는 걸 알면서도,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윤 대표의
어르신이 불만스러워하며 말했다.“분명 자기 잘못인데도 뻔뻔하게 당당한 모습이라니! 내가 처음부터 시골 출신 계집애는 교양이 없을 거라고 말하지 않았나!” “사실 교양이 없는 건 상관없어, 가르치면 되니까. 하지만 자네 딸처럼 상식이 하나도 없는 건 아주 무서운 일이야!”“심씨 가문과 윤씨 그룹은 지난번 일을 거치면서 적대적인 관계가 됐어! 그런데 자네 딸을 어땠나? 조심성은 전혀 없이 윤 대표를 쫓아다녔어!” “어쩌면 벌써 회사의 비밀을 팔아넘겼는데, 정작 본인은 모를 수도 있죠...” 강경숙이 걱정스러워하며 어르신의 말을 이었다. 이지숙은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불쾌해했다.“동서, 방금 그 말이 무슨 뜻이에요?”“아, 형님, 그냥 한 말이에요. 너무 마음에 담아두진 마세요.”“그냥 한 말이라... 나도 그 가능성이 크다고 봐.”중간에 앉은 어르신이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소희는 윤 대표와 자주 어울렸으니, 이미 회사의 기밀을 팔아넘겼을지도 몰라!” “말도 안 됩니다.”심근영이 단호하게 말했다.“소희는 절대 심씨 가문을 배신할 아이가 아닙니다. 게다가 소희는 심씨 가문으로 돌아오기 전부터 자신을 잘 돌봐 준 윤 대표와 사이가 좋았습니다. 이번에 윤 대표를 만나러 간 것도 윤 대표에게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간 거고요.” “아무리 심씨 가문과 윤씨 그룹의 관계가 미묘하다지만, 친구를 보러 가는 것도 잘못이란 말입니까?”하지만 이런 말들로는 어르신들을 설득할 수 없었다. 그들은 소희를 쫓아낸 후, 이전의 자원을 되찾을 생각만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심 대표, 자네 말이 틀렸어. 친구만 만났다면 할 말이 없지만, 지난번에는 어땠지?” 중간에 있던 어르신이 사진 한 묶음을 내팽개쳤다.“지난번에 사당을 떠난 후, 소희는 곧바로 윤 대표를 만나러 갔더군.”“진행 상황을 전하러 갔던 거 아닌가?” 사진이 찍힌 날짜는 사당을 떠난 소희가 회사에 가서 이서를 만났을 때였다. 그녀는 나오거나 들어갈 때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으며, 너무도
어르신들은 과연 펄쩍 뛰었다.“심 대표! 그게 무슨 소린가?! 자네 딸이 회사의 기밀을 팔아넘겼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우리 주식을 재검토하겠다는 거야? 분명히 말하지만, 자네는 그럴 자격이 없어!” “저는 심씨 가문의 가주이고,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심근영이 말했다.“저는 회사의 미래를 위해서 어르신들의 주식을 사들일 수도 있어요!” “우리는 팔지 않을 거야!”“맞아! 안 팔 거네!” “그때가 되면 어르신들 마음대로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들을 노려보는 심근영은 조금도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몇몇 어르신들은 그제야 그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심근영은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가주가 될 수 있었던 인물로, 절대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화가 난다면, 그들의 주식쯤은 강매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정말 큰돈을 벌 수는 있겠지만, 그들의 자손들은 어떻게 되겠는가.회사를 떠난다는 것은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지는 것이었으며, 그들의 자손이 심씨 가문의 가주가 되는 것을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을 의미했다. “됐어요, 됐어!”강경숙은 일이 자기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을 보고는 벌떡 일어나 미소를 지었다. “소희의 일에 대해 말하고 있었잖아요. 갑자기 회사 주식에 대한 이야기는 왜 하시는 거죠?”“소희야, 어서 회사의 기밀을 넘기지 않았다고 말씀드려. 너희 아버지와 어르신들께서 싸우는 건 막아야 하지 않겠니?” 소희는 강경숙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말씀드렸잖아요? 아무 소용이 없을 거라고요.”강경숙은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몸을 일으킨 소희가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저를 쫓아내고 싶으시면, 제가 회사의 기밀을 넘겼다는 증거를 찾아오세요. 계속 증거도 없이 억지 부리는 모습을 더는 참아줄 수가 없네요.”“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습니다. “이 정도의 헛소문이면 경찰도 웃음을 터뜨릴 것 같네요, 그렇지 않나요?” “아, 소문도 일파만파 퍼지겠군요.”“사람들이 이 일을 알
소희가 입술을 오므렸다.‘말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네.’심근영이 입을 열었다.“말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된다. 자, 시간이 늦었으니 우리도 방에 가서 쉬어야겠다, 너도 푹 쉬거라!” 소희는 심근영과 이지숙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왠지 모르게 심근영의 뒷모습이 상실감으로 가득 차 있다고 느꼈다.‘말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던 건데...’ ‘그 일은 분명 H국 전체를 흔들어 놓을 거야.’가장 큰 가문의 후계자가 죽었다? 이는 어디에 놔둬도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킬 것이었다. 아마 소희가 말하지 않는 이상, 심근영도 믿지 않을 터였다.‘그저 이서 언니가 허풍을 떠는 거라 여기시겠지.’ 방으로 들어서 이지숙은 심근영의 실망감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심근영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왜 그래요, 소희가 여전히 당신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아서 그래요?” 심근영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아니긴요, 당신이랑 여태 살아온 내가 그것도 모를까 봐요? 아이고,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아요. 소희는 태어난 직후부터 우리의 곁에서 자라지 않았잖아요. 우리와 가깝지 않은 건 당연한 거죠.” “설마, 눈치 못 챈 거예요?”“오늘 소희가 보여준 태도 말이예요.” “소희가 왜?”심근영은 이지숙만큼 세밀하게 살펴보지 않은 듯했다.“지난번에는 어르신들께서 자기를 쫓아내주길 간절히 바랐잖아요.“그런데 오늘은 그렇지 않던데요?”“여보, 우리 딸은 차가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에요. 우리가 더 많은 노력을 쏟으면, 분명히 마음을 열 거라고.”“그리고 소희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난처하겠어요?”“한쪽은 20여 년 간 나타나지 않은 부모이고, 다른 한 쪽은 아주 가까운 언니잖아요.”“하, 물론 나도...”“아니야, 됐어.”“부모인 우리의 잘못이야. 사실 나를 슬프게 한 건 소희가 아니라, 그 어르신들이고.” “그분들은 소희가 돌아오면 많은 자원을 선점할 수 없어.”“차라리 그 작디작은 이익을 위해서
문밖에서 방안의 대화를 들은 소희는 마음 한 켠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방으로 돌아가려던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어릴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양부모의 관심은 모두 심태윤에게 있었으며,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소희는 어릴 때부터 항상 1등을 하고, 100점을 받았다.하지만 양부모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그녀는 시간이 흘러서야 자신이 1등을 해도 양부모가 기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때의 소희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이 그들의 친딸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을 몰랐고, 그저 마을의 남아선호사상 영향인 줄 알았다. ‘부모님은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여자면 소용없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앞으로 학교도 가지 못하면 어쩌지?’소희는 더욱 열심히 공부에 매진했다. 특히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장학금이 걸린 시험이라면 최선을 다했으며, 대학에 갈 수 있도록 몰래 돈을 모으기도 했다.합격 통지서가 도착하는 순간, 그녀는 양부모가 대학을 포기하라는 모습을 상상하기도 했다.하지만 합격 통지서를 받아 든 양부모는 아주 기뻐했다. 대학을 포기하라는 말은 전혀 없었다.어려서부터 관심을 받지 못하고, 가장 나쁜 결말을 상상해 왔기 때문일까?갑자기 공부해도 된다는 말을 듣자, 그녀는 하늘에서 뜻밖의 행운이 떨어진 것 같았다. 그래서 대학 등록금과 생활비 모두를 자신이 아르바이트에 연연하며 어렵게 마련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렸다. 소희는 양부모가 자신을 대학에 보내준 것을 통해, 그들의 마음속에 자신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하지만 그 당시에는 전혀 알 수 없었다.아니, 이지숙의 말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알 수 없었다. 소희는 어느새 정원에 다다랐다.정원은 흙이 새로 손질된 덕에 짙은 흙내음을 풍기고 있었다. 며칠 전, 차를 운전하던 그녀는 무심코 정원을 월계수 나무로 가득 채울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말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한 말이었
전화 건 사람은 우기광이었다. 이서는 우기광의 목소리를 듣고는 꽤 의외라는 듯 말했다.“웬일로 저한테 직접 전화하신 거죠?” 사실 우기광도 전화를 걸고 싶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몇몇 임원들이 회사에 우기광을 붙잡아 두는 바람에, 이서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윤 대표님, 혹시 지금 윤씨 그룹의 대표 업무를 수행하는 고이서 팀장이 공금을 횡령한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아, 그게 언제 있었던 일이죠?]이서의 어조에서는 전혀 불쾌감이 느껴지지 않았고, 되려 흥미로움이 묻어나는 듯했다. 우기광은 그런 이서의 반응에 잠시 의아해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어제 일입니다. 대표님께서 고이서 팀장에게 회사를 맡기자마자 그런 황당한 일을 저지른 거죠. 대표님, 저는 대표님께서 윤씨 그룹을 맡기 전부터 대표님과 함께 일해왔으니, 대표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표님의 능력은 누구나 인정할 정도니까요. 하지만 회사 운영을 재무팀 팀장에게 맡기신 건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이서가 웃으며 말했다.“제 결정을 무조건 지지해 줄 수 있으신가요?” 우기광은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조심스러운 어조로 답했다. [그건 대표님의 결정이 회사에 이익이 되는 경우에 한합니다. 만약 회사에 손해가 되는 일이라면 저는 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서의 미소가 더욱 밝아졌다. “그 말씀이면 충분합니다. 이제야 안심이 되네요. 하지만 고 팀장님의 일에 대해서는 개입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다른 임원들이 아무리 압박을 가하더라도 반드시 버텨 주셔야 하고요.” [대표님, 혹시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며칠만 기다리시면 알게 될 겁니다.”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고, 곧장 김하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서의 전화가 걸려 오자, 김하늘은 겁에 질린 채 전화를 받을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몇 초 동안 망설이다가 결국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김하늘은 전화를 받자마자 울먹이는
잠시 후, 소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서 언니, 솔직히 말해도 절대 화내면 안 돼요.]“그래, 어차피 내가 먼저 말하라고 했잖아. 소희 씨도 내가 무슨 성격인지 잘 알잖아? 말하라고 해놓고 화내는 일은 없을 거야.” 이서의 말에 하나와 소희, 나나는 용기를 내서 각자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하나가 먼저 운을 띄웠다. [이서야, 형부가 신분 문제로 널 속인 건 맞지만, 그 외의 다른 일에선 너를 진심으로 대했어.]“그러니까 네 말은 하지환 씨가 날 속인 걸 더 이상 문제 삼지 말라는 거야?”[응... 그런 셈이지.]“소희 씨 생각은 어때?”소희가 머뭇거리며 천천히 답했다.[그럼 저도 솔직히 말할게요. 형부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형부만큼 언니한테 잘해줄 사람은 찾기 어려울 거라고요.][만약 저라면 그 정도 잘못은 그냥 넘어갔을 것 같아요.]소희는 최대한 조심스레 말했고, 혹여나 이서가 기분 나빠할까 봐 머뭇거렸다.다행히 이서는 여전히 차분한 태도로 대답했다. “내가 괜히 별거 아닌 일로 예민하게 군다는 거네?”[언니,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소희가 급히 해명했지만, 이서는 한사코 소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소희 씨,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되고, 미안해할 필요도 없어. 소희 씨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게 소희 씨의 솔직한 생각인 거니까. 사람마다 문제를 보는 시각은 다르니, 결론도 다를 수 있어. 난 소희 씨의 의견을 존중하고, 그 말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것 같아. 잘 생각해 볼게.”소희는 이 말을 듣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으로 나나가 나섰다. [언니, 아시다시피 저는 연애 경험이 없어서 딱히 할 말도 없어요. 그냥 시간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을까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답이 나올 것 같아요.]이서는 작게 중얼거렸다. “시간에 맡기라고...?”‘그래,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자. 어차피 하도훈 문제도 당장 해결될 게 아니고, 그때까진 고민할 시간이
윤재하와 성지영, 고이서 세 사람은 여전히 이서가 치매에 걸려 윤씨 그룹을 손에 넣을 꿈에 들떠 있었지만, 정작 이서는 지환과 한 지붕 아래에서 지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고민에 빠져 있었다. 분명 병원에서 함께 지내던 때도 있어서 이번에도 별문제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집에서 같이 지내게 되니 묘하게 어색하고 불편했다. 이서는 귀를 바짝 세우고 문밖에서 나는 작은 소리 하나까지 신경 쓰면서도, 문밖에서 조금이라도 소리가 나면 그 소리가 금세 사라지길 바라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런 어이없는 감정에 시달리던 첫날 밤, 놀랍게도 이서는 오랜만에 불면증 없이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 이서는 눈을 뜨자마자 하나의 문자 폭탄을 받았다. [너, 형부랑 다시 합친 거야?] [같이 살기 시작했다던데, 화해하고 다시 시작하려는 거냐고!] [왜 그렇게 중요한 일을 나한테 말하지 않은 거야? 이 선생님이 말 안 해줬으면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나, 너한테 가장 친한 친구 아니었어?]이서는 할 말을 잃었다. 곧바로 소희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어제 두 사람이 손잡고 있는 거 보고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화해한 거였어요? 이렇게 큰일을 저한테도 숨긴 거예요?] 결국 이서는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환 씨랑 다시 화해한 거 아니야. 괜히 오해하지 마.] 그 순간, 나나도 단톡방에 뛰어들었다. [뭐라고요? 이서 언니가 형부랑 다시 화해했다고요? 대박! 들러리 자리 하나 예약할게요!]이서는 어이가 없어졌다. ‘대체 왜 내가 한 말은 안 보고 다들 자기 멋대로 상상하는 거야?’ 이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단체 영상 통화를 시도했다. “말했잖아, 화해한 거 아니라고.” 이서는‘화해한 적 없다’는 말을 특히 강조했다.그제야 세 사람은 조용해졌는데, 잠시 후에야 하나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근데 이 선생님 말로는 두 사람이 같이 산다고 하던데? 다시 화해한 게 아니면 왜 같이 사는 거야?]
2층에서 소란을 듣고 있던 윤재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1층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와는 다르게 고이서 혼자만이 만족스럽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이서는 바로 뒤에 있던 짐가방을 든 직원들에게 자리를 내주며 말했다. “들어오세요.” 직원들이 들고 있는 쇼핑백들이 모두 명품 브랜드임을 본 성지영과 윤재하는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서야, 그 많은 걸 대체 무슨 돈으로 산 거야?” 성지영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직원들이 짐을 다 내려놓고 나가자, 고이서는 여유롭게 말했다. “엄마, 아빠, 두 분을 위해 산 선물인데, 한번 보세요. 마음에 드실진 모르겠네요.” 성지영은 가까이 있던 쇼핑백 하나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LV 로고가 새겨진 명품 의류가 들어 있었다. 성지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이서야, 어디서 이렇게 큰돈을 구한 거야?” 고이서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윤씨 그룹의 돈으로 샀어요.” “뭐? 회사 공금을 횡령했다고?” 윤재하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렇게 많은 걸 샀으니 금방 들키고 말 거야. 윤이서가 내일 회사에 출근하면, 바로 알아챌 거라고! 당장 환불하렴. 윤이서한테 들키면 정말 큰 일이니까!” 고이서는 소파에 편하게 앉으며 미소 지었다. “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윤이서는 절대 모를 거예요. 이 돈, 다 합법적인 절차로 나온 거거든요.” 윤재하와 성지영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고이서는 다리를 꼬고 앉아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윤이서가 저한테 회사를 맡겼어요.” “뭐? 그게 정말이야?” 윤재하와 성지영은 깜짝 놀라며 고이서를 바라보았다. “물론 임시로 맡긴 거긴 하지만... 윤이서가 왜 저한테 회사를 맡겼는지 아세요?” 두 사람이 고개를 젓자, 고이서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오늘 윤이서가...”고이서는 오늘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성지
이서는 지환의 대답을 듣고 나서 참지 못하고 말했다. “아까 분명히 얘기했잖아요, 화해한 척 연기하는 거라고요! 지엽이도 없는 데서 굳이 연기할 필요는 없어요.”지환은 살짝 눈을 들어 이서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이서야, 아무리 토사구팽이라지만, 이렇게 빨리 쳐내는 건 좀 심하지 않아?” 더 이상 이 주제로 대화하고 싶지 않은 이서는 곧바로 소희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자료는 다 읽어봤어? 정말 심태윤이 벌인 짓이야?”“네, 자료에는 심태윤이 어떻게 가짜 증거를 만들었는지도 다 나와 있었어요. 이 증거들만 경찰에 넘기면, 심태윤은 바로 잡혀가고 말 거예요.” 이서는 소희의 말투에서 뭔가 망설임이 느껴져 물었다. “왜 그래? 혹시 심태윤이 잡혀가면 소희 씨의 양부모를 돌볼 사람이 없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 소희는 가볍게 웃었다. “언니, 저를 너무 착하게 보신 거 아니에요?”“그 사람들이 돈을 이유로 저한테 어떻게 했는지 다 아시잖아요. 그 이후로 저는 그 사람들한테 기대한 것도 없고, 미련도 없었어요. 단지 이 일이 심태윤 혼자 한 짓이 아닌 것 같아서 그래요. 분명히 배후가 있을 거라고요.” “그 배후만 찾아내도 앞으로 골치 아플 일은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심씨 가문 사람들이 이서 언니의 남편이 하 대표님이라는 걸 알게 된 후에는 더 이상 직접적으로 날 괴롭히지 않았지만, 언젠가 이서 언니와 하 대표님이 헤어진다면, 나를 몰아내려는 사람들은 다시 들고일어날 거야.’ “혹시 이미 의심 가는 사람이 있는 거야?” 이서는 소희가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마음을 정확히 읽어냈는데, 역시 자매다운 호흡이었다. 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 말을 다른 사람한테 하면 오해받을 수도 있겠지만, 언니한테는 말해도 될 것 같아요.”“제 생각엔... 강경숙이 관련된 것 같아요.” “강경숙?”“제가 심씨 가문에 돌아온 이후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이 강경숙과 심유인이잖아
“적어도 내가 다른 사람을 찾기 전까지는 그렇게 할게.” “지엽아...” “그런 표정 짓지 마.” 지엽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그러면 내가 또 희망을 품을 것 같잖아.” 이서는 입술을 꾹 다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보다 내가 먼저 가도 될까?” 이서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줘. 내 마지막 소원이야.”지엽의 진지한 눈빛에 이서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지엽은 잠시 이서를 바라보더니, 이서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기억에 새기듯 눈에 담은 후, 미소를 짓고 조용히 돌아섰다. ...한편, 고택 입구에서는 소희와 지환이 두 사람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온 사람은 지엽 혼자였다. 지엽이 혼자 돌아오는 모습을 본 순간, 지환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환은 한걸음에 다가가 지엽의 멱살을 움켜잡으며 거칠게 물었다. “이서는 어디 있어?” 지엽은 차분한 눈빛으로 지환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표님은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정말 부럽다니까요?” 하지만 지환은 지엽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이서는 어디 있냐고 묻잖아!” 마침 그때 이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환이 지엽을 몰아붙이고 있는 모습을 본 이서는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 “하지환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서가 무사히 나오는 걸 본 지환은 그제야 손을 놓았다. “너... 괜찮아?” 이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안 괜찮을 건 없지.” 지엽은 헝클어진 옷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서야, 봤지? 저 사람이 바로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널 아주 사랑하면서도 과할 정도로 집착하는 남자가 저 사람이라고.” 이서는 입술을 움직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지엽은 쓸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저 남자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분명히 보여주는 게, 내가 널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
차가 심씨 가문의 고택에 다다르자, 이서는 가장 먼저 지엽을 발견했다.지엽 역시 차에서 내리는 지환을 보고 얼굴이 굳어 버렸는데, 특히 이서가 자연스레 지환의 팔짱을 낀 순간, 지엽의 눈썹이 몇 번이나 심하게 떨렸다. “두 사람...” 지엽이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찰나, 고택의 대문이 열리며 소희가 나왔다. “오셨네요!” 몇 초 후, 두 사람이 팔짱을 낀 모습을 본 소희는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두 분... 화해하신 거예요?” 이서는 지엽의 반응을 슬쩍 살피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됐어.”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지엽이 떠난 뒤에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소희는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하나 언니는 아직 모르죠? 지금 바로 알려줘야겠어요!” 이서는 다급하게 소희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으며 말했다. “잠깐만!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먼저 소희 씨 얘기부터 하자. 지엽아, 얼른 조사한 결과부터 소희 씨한테 보여줘.”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이 함께 있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고, 이서가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소희에게 조사 결과를 건넸다. “소희 씨에게 누명을 씌운 건 심태윤이었어요. 소희 씨가 여태 친동생인 줄 알았던 그 사람이요.”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 쪽에 신경이 쏠려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그 안에 다 적혀 있으니까 잘 읽어보면 돼요...” 지엽이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서야, 잠깐 나랑 따로 얘기할 수 있을까?” 그 순간,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이서는 지환을 한 번 바라보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서가 지환의 팔에서 손을 빼내려 하자, 지환은 더욱 강하게 이서의 손을 잡았다. 이서는 당황한 표정으로 지환을 올려다보며 눈빛으로 놓아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 대표님, 제가 이서랑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면
이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정말... 같이 먹고, 같이 잔다고요?”지환은 그 말에 이서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걸 눈치채고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지만, 일부러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응, 어쩔 수 없잖아. 어둠의 호리병을 반으로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당분간은 같이 지내야겠어요.” 지환의 미소는 더 깊어졌는데, 그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하도훈은 언제 처리할 수 있어요? 설마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니죠?” 지환은 깊은숨을 내쉬며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이 다크 웹의 1위와 2위의 위치만 알아낸다면, 하도훈과 정면 승부를 가릴 수 있을 텐데 말이지...”“어둠의 호리병은 그 둘의 위치를 모르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어둠의 호리병도 순위에 올라 있는 킬러일 뿐, 그 사람들과 친구는 아니거든.” “단서도 전혀 없어요?” 지환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망하게 해서 미안하지만, 지금은 없어.” 이서는 실망이라기보다는 하도훈이라는 골칫거리를 빨리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럼, 우린 이제 어디로 가요?” “회사로.” 고개를 끄덕인 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두 사람이 탄 차는 윤씨 그룹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이서는 지엽의 전화를 받았다. “소희 씨에 대한 일은 어느 정도 해결된 거야?”이서는 기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얼른 가서 소희 씨한테 알려줘. 분명히 엄청나게 기뻐할 거야.” 수화기 너머의 지엽은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말했다.[이서야, 난 소희 씨랑 이제 막 알게 된 사이라 조금 어색한데, 네가 같이 가주면 안 될까?] 이서는 곁눈으로 지환을 한 번 바라보며 생각하다가 말했다. “알았어.” 그 순간, 이서를 태우고 있던 지환은 잠시 핸들을 놓칠 뻔했
“고이서를 바로 내쫓으면 분명 편하긴 하겠죠. 하지만 내 손에 있는 윤씨 그룹의 자산 중 일부는 원래 윤씨 가문의 것이었어요.”“그 인간들의 만행이 제대로 폭로되지 않으면, 과거 윤씨 그룹에 몸담았던 몇몇 내부 인사들은 고이서와 손을 잡고 말 거예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반드시 그 인간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지 모두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일부러 고이서를 회사의 대표 자리에 앉힌 거야? 그 여자가 빨리 본색을 드러내도록 하려고?” “네.”짧게 대답한 이서는 무심코 거울 속 자신을 보았고, 활짝 웃고 있는 자기 모습에 잠시 멍해졌다. ‘하지환 씨 앞에 서면 점점 자유로워지는 것 같아.’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는데, 이서에게 더 난감한 것은 지환이 자신의 정체를 속였던 일조차 잊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 내려오라고 한 거예요?”아래층으로 내려온 이서는 지환의 차에 올랐다. “하도훈이 이렇게 오랫동안 잠적한 이유가 뭔지 알아?”“자식을 만드느라 바쁜 거겠죠.” “맞아.”“그동안 꽤 많은 여자를 만났고, 그중 한 여자가 진짜로 임신했다더라.” 이서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그럼 이제 하도훈이 다시 우리한테 신경 쓸 여유가 생겼다는 거네요?” 지환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이서를 바라보았다. 이서는 지환의 표정을 보고 의아하게 물었다. “그 표정은 또 뭐예요? 설마... 예전에 내가 하도훈한테 여자를 붙여보라고 했던 그 작전을...”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그 임신했다는 여자, 하지환 씨가 보낸 사람이에요?” “아니었으면 한 번에 임신했을 리가 없잖아.” 이서는 입을 살짝 벌리고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럼 그 아이는 하도훈의 아이가 아닌 거예요?” 지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이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훈은 그 사실을 알면 미쳐버릴 거예요.” “미치면 더 좋지 않아?” 지환은 담담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