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대의 차가 모든 사람을 데려가자, 그 줄지어 늘어섰던 굴착기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인근 주민들도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 쉴 수 있었다. 밤새 떠들썩했던 병원이 마침내 조용해졌고, 하도훈은 지환의 사람이 모두 떠난 것을 확인하고서야 부하들에게 은철을 관에 넣으라고 지시했다. “남은 관 두 개는 여기 둬! 언젠가 하지환과 윤이서가 쓰게 될 테니까!” 그는 이 날이 머지않았다고 확신했다!한편, 다른 나라에서는 맑은 햇빛이 드리우고, 신선한 공기가 맴돌고 있었다. 창밖 새들의 노랫소리조차 평화롭게 들렸으며, 피비린내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환이 저렇게 처참하게 고통받는 걸 보고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안 들어?”하지호는 박예솔에게 레드 와인 한 잔을 따라주었다.지환이 YS그룹을 매각한 후, 하지호는 원래 YS그룹이 있던 사무실 건물로 들어왔다. 게다가 그는 지환이 관리하던 직원들을 해고하지 않고, 그들이 계속 그 건물에서 일하며 자신을 위해 일하게 했다. 이 건물에는 너무 많은 직원이 있었는데, 그저 생계를 위해서 일하고 있었다. 지환은 당시 M국에서 사업을 매각한 후, 모든 중심을 H국으로 옮겼다. 하지만 원래 M국에 있던 직원들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의 회사에서 일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M국의 80%가량의 사업이 모두 그의 것이기 때문이었다.하지호는 이렇게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후련해졌다. 이전의 그에게 있어서 지환은 기어오르는 장애물일 뿐이었다.하지만 지환이 떠나자, 재운이 물밀듯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하도훈이 지환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하지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가장 뛰어난 고수들을 모두 하도훈에게 넘겨주었다. 비록 공든 탑이 무너지고, 마지막 고비에서 하도훈이 꼬리를 내렸지만 말이다.그렇지 않았다면, 오늘 밤은 어떻게든 지환의 죽음이 날이 되었을 것이었다! 하지호는 아쉬워하며 와인 잔을 곽 쥐었다.그의 감정이 드러나는 얼굴에 비해, 박예솔의 얼굴은 훨씬 평온해 보였다.
병원.이는 어둠의 세력이 생긴 이래, 가장 큰 사상자를 낳은 사건이었다. 다행히도 지환 산하의 병원은 적지 않았는데, 현재 그들이 도착한 이 병원은 원래 다음 달에 개원할 계획이었다. 즉, 앞당겨 개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다행히 의사는 다른 병원에서 차출할 수 있었다.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병원에서, 하나는 붕대를 감은 채 모든 것을 지휘하는 상언의 모습을 보았다. 사람들 사이의 하나는 눈이 붉어져 있었다. 하지만 상언이 그녀를 쳐다보자, 급히 코를 훌쩍이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왜 이런 꼴이 되었는데도 쉴 곳을 찾지 않는 거예요?”하나가 곧장 손을 들어 상언을 부축했다.“지환이는 검사하러 갔고, 의사들은 지금 막 다른 병원에서 차출되어 왔어요. 지금은 보스가 없는 상황이잖아요. 내가 나서지 않으면 아무도 나서지 않을 거예요.” 물론 현태 또한 용감하고 밝은 사람이었으나, 병원 일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하나는 그저 입술을 오므렸다. “방금 이서를 진료했다면서요? 어떻게 됐어요?”“마이클 천 선생님이 급히 와서 이서에게 약을 먹였어요.” “상태가 꽤 안정적이라고 하더군요.” 상언이 웃으며 말했다.“그러면 된 거 아니에요? 그런데 왜 아직도 걱정이 태산인 거예요?” 하나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했다.“하지만 마이클 천 선생님은 이게 폭풍우 전의 고요함일 수도 있다고 했어요. 지금 당장 이서의 상태를 확정 지을 수는 없어요. 모든 건 이서가 깨어나야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거라고요!” 안색이 변한 상언이 슬그머니 팔을 들어 하나를 껴안았다. 팔꿈치의 통증이 점차 온몸으로 퍼져 나갔으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되려 다정하게 하나를 바라보며 위로했다.“하나 씨, 나를 믿어요. 다 괜찮을 거예요.” “지금까지의 풍파도 견뎠으니, 이서는 분명히 무사할 거예요!”하나는 그저 상언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의 품은 울타리가 되어 방황하던 그녀가 중심을 잡게 했다.“이 선생님!”바로 그때, 갑자기 울려
지환은 상언의 충고를 전혀 듣지 않았는데, 지금 당장 이서를 꼭 보고 싶은 듯했다.‘이서는 이미 내가 하은철의 작은 아빠라는 사실을 알았어.’ ‘깨어나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고!’ ‘하씨 가문이 이서에게 준 상처가 너무도 크고 깊어서, 이서는 더 이상 하씨 가문과 관련된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을 거야!’ ‘하물며 계속해서 자신을 속인 하은철의 작은 아빠라면 더욱이!’“이서를 만나게 해달라고! 내 말을 들어달라고!”지환의 눈이 붉어지기 시작했다.몸에 부상을 입은 상언은 도무지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그래, 알겠어. 이서한테 데려다줄게.” 지환은 그제야 비로소 안정을 되찾았다.상언은 곧장 그를 데리고 이서의 병실로 향했다.병실 입구에 다다랐을 때, 마이클 천의 모습이 보였다.마이클 천도 지환을 보았는데, 곧장 병실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대표님,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왜죠?”지환은 목이 메었다.“사모님께서 깨어나지 않은 이상, 어떤 상황인지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습니다.” “사모님을 위해 조금만 참으세요.”상언은 이 말을 들은 지환이 또 화를 낼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그는 침묵하면서 병실 앞 의자에 앉을 뿐이었다. “여기서 기다려주십시오!”마이클 천이 상언을 힐끗 보았고, 상언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하지만 대표님, 사모님께서 깨어나신다고 해도 섣불리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꼭 기억하셔야 해요!” “알겠어요.”지환이 무기력하게 대답했다.“네, 그럼 제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마이클 천은 이 말을 끝으로 병실로 들어갔다. 지환의 곁에 앉은 상언은 따라온 의사에게 계속해서 지환에게 링거를 투여하라고 지시했다. “지환아.”상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네 마음은 이해해. 하지만 지금으로서 가장 중요한 건, 네 건강을 잘 유지하는 거야.”“네 부상은 너무 심각해.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후유증이 남을 거라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앉은 지환은
“그래, 너는 이서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만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잖아.”상언이 더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더 이상 말리진 않을게. 하지만 나를 좀 봐. 나는 하나 씨랑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 지냈고, 그 시간 동안 우리의 감정이 점차 안정돼 가고 있다고 느껴. 이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나는 늘 걱정하면서 살아. 어느 날 눈을 떴는데, 하나 씨가 나한테 헤어지자고 말할까 봐 걱정돼 미치겠어.” “그렇지만... 지환아, 너는 나보다 훨씬 운이 좋잖아.”“적어도 이서가 너를 좋아한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으니까.” “이서가 널 좋아한다면, 언젠가는 널 다시 받아주지 않을까, 응?” “너에겐 아직 희망이 있지만, 나에겐 희망조차 없어.”“하지만 그러면 뭐 어때? 나는 여전히 지금이 너무 소중해. 왜냐하면,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나 자신에게 말하거든.” “하나 씨를 볼 수 있는 것에 만족하라고.”고개를 돌린 상언이 미소를 지은 채 지환을 바라보았다.“지환아, 모든 걸 가진 네가 왜 자꾸 불안감을 느끼는지 알아?”“이미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보았기 때문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이서가 너를 상대하지 않을까 봐, 후에 네가 무너져 내릴까 봐 두려운 거야.”“하지만 생각을 바꿔보는 건 어떨까? 너와 이서 사이의 벽이 마침내 무너져 내린 거야! 이 고비만 넘기면, 앞으로 너희 둘 사이에는 아름다운 일만 펼쳐질 거야. 찰나의 고비일 뿐인데, 두려워할 게 뭐 있겠어?” 지환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상언을 보았고, 상언은 다시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고마워.”지환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눈빛에 서린 고마운 감정은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상언은 또 한 번 지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서야 문어귀로 걸어갔다. 그는 또 다른 일을 처리해야 해서 계속 지환과 함께 있을 수 없었다. 한편, 윤씨 그룹의 비서들이 심태윤을 향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윤 대표님은 정말 자리에 안 계십니다. 저희 말을 믿지
소희는 현태가 밤새 돌아오지 않자, 이서가 다친 사실을 알게 되었다.물론 구체적인 상황은 알 수 없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낼 마음도 없었다. 그녀는 가능한 한 빨리 병원에 가고 싶을 뿐이었다.‘이서 언니가 대체 어떤 상황인 거지?’ 하지만 소희가 방문을 나서자마자 심근영이 그녀를 불렀다.“소희야, 어디 가려고?” “잠시 나갔다 올게요.” “윤 대표를 만나러 가는 거야?”심근영이 물었고, 소희도 숨기려 하지 않았다.“네.” “안 된다.”심근영이 의논할 여지가 없는 말투로 말했다.“왜요?” 소희는 이해할 수 없었다.“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이서 언니가 입원했대요. 언니는 저의 친구나 마찬가진데, 왜 보러 가지 말라는 거예요?”소희는 애가 탔다.“윤 대표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보러 갈 수 없을 줄 알아! 잊지 마, 너는 심씨 가문의 아가씨이지, 윤 대표의 비서가 아니야!” 소희가 눈살을 찌푸렸다.“무슨 말씀을 하시든, 저는 오늘 이서 언니를 만나러 갈 거예요! 저와 이서 언니가 각각 심씨 가문과 윤씨 그룹을 대표한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저희는 한 인간으로서 서로를 대할 뿐이라고요!” “우리 두 사람의 사적인 관계가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두 집안의 이익이 연결되지는 않을 거예요.” 소희가 말했다. “그건 단지 네 생각일 뿐이야.”심근영이 다소 너그럽게 말했다.“소희야, 네 방으로 돌아가라. 지금 심씨 가문 사람들은 네가 윤씨 그룹에서 일했다는 핑계로 너를 공격하고 있어.”“그런 상황에서 네가 윤 대표를 만나러 간다면, 그 사람들이 큰 문제를 일으킬지도 몰라.”“얘야, 다 너를 위한 거란다.” “그런 배려는 필요 없어요!”소희가 말했다.“그분들이 그렇게 하는 건 저를 심씨 가문에서 쫓아내기 위한 거잖아요! 정말이지 상관없어요, 저도 이 집에 감정이 없으니까요!” 이 말이 나오자, 소희는 심근영의 몸이 움찔하는 것을 보았다.그녀는 자기 말이 선을 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급히 말했다.
소희는 감격스럽게 이지숙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이서 언니가 병원에 입원해 있어서 걱정돼요.”“당신도 들었죠? 친구가 병원에 입원했다는데, 그래도 못 가게 할 작정이에요? 아버지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매몰찰 수 있어요?” 심근영은 정말이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심근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이지숙을 한쪽으로 끌고 가서는 목소리를 낮추었다.“어제 어르신들이 나를 왜 불렀는지 알아?” 이지숙이 대답했다.“왜 불렀는데요?” “어떤 사람이 소희가 윤씨 그룹으로 들어가는 사진을 찍은 걸로도 모자라, 그걸 가지고 글을 쓰고 있대.”“이런 상황에서 소희가 윤 대표를 만나러 간다면, 그분들은 틀림없이 심씨 가문에서 소희를 쫓아내려 하실 거야.”“당신, 우리 딸이 쫓겨나기를 바라는 건 아니지?” 이 말을 들은 이지숙은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심근영이 이어서 말했다.“물론 소희가 괴로워하는 걸 보고 싶진 않겠지. 악역은 내가 도맡을 테니, 당신은 먼저 방으로 돌아가.”이지숙은 소희를 한번 보았고,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방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몇 걸음 내딛다가 달갑지 않게 고개를 돌려 심근영을 불렀다.“당신, 소희는 어릴 때부터 우리 곁에서 자라지 않았고, 우리에게 요구한 것도 없어요.”“그리고 지금은 그저 병원에 입원한 친구를 보러 가고 싶을 뿐이죠. 우리한테 그렇게 작은 소원을 들어줄 방법도 없다는 거예요?” 이지숙이 또박또박 내뱉는 말은 소희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이 말을 들은 소희는 마음이 일렁이기 시작했다.‘이 집에서 내가 돌아오기를 바란 사람은 오직 저 두 분이구나.’‘특히 저분.’ ‘내게 진 빚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시는 건지, 내 부탁은 늘 들어주려고 하셔.’ ‘게다가 내가 저분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오랫동안 슬퍼하곤 하시지.’ 어젯밤, 소희는 이미 배불리 먹었기 때문에, 이지숙이 자른 과일을 먹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또 슬퍼하기 시작했고, 소희가 마지못해 모든 과일을 다
병원에 다다른 소희는 침대에 누운 이서를 보고는 재빨리 하나에게 경위를 물었다. 하지만 하나도 경위를 잘 알지 않았다.그저 하은철과 하도훈의 음모로 인한 일이라는 것만 알 뿐이었다. “이서는 이미 형부의 신분을 알고 있어.”하나가 소리를 낮추고 입구를 한 번 바라보았다.소희는 병실로 들어올 때 지환을 보았다. ‘그래서 형부가 들어오지 않고 문밖에 계셨던 거구나.’“그럼...” 하나가 고개를 살며시 흔들었다.“아직 상황이 불분명해. 마이클 천 선생님은 이서가 깨어나야만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을 거라고 하셨어.” “그리고...”그녀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나쁜 소식을 전했으니, 좋은 소식도 하나 알려줄게.” “좋은 소식?”소희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하은철이 죽었어!”“하은철이 죽었다고?” 이는 과연 좋은 소식이었다. 소희는 이 말을 듣자마자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 형부가 직접 사격했대. 하지만 이 선생님이 그러는데, 그 총을 맞지 않았더라도 그날 밤을 넘길 수 없었을 거래.” “정말 잘 됐다! 그 미친X이 죽었으니, 이서 언니도 마침내 하씨 가문이라는 그늘에서 벗어나게 된 거잖아.” 그 순간, 하나 얼굴의 웃음기가 굳어졌다.‘하도훈과 하도훈 배후의 그 무서운 사람들을 생각하면...’ “언니, 왜 그래? 설마 내 말이 틀린 거야?” 하나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잠시 다른 생각을 했을 뿐이야. 드디어 고생 끝에 낙이 온 거지. 이제 깨어난 이서가 형부와 잘 지낼 수 있기만 바라면 돼.” “형부가 이서를 속인 건, 확실히 형부가 잘못한 거야.”“하지만 형부도 처음에는 이서가 하은철의 약혼녀라는 걸 몰랐다고 하더라고.”“맞아, 나도 이서 언니가 형부와 잘 지냈으면 좋겠어. 두 사람, 그동안 너무 힘들었잖아.” “이제 하은철도 죽었으니, 두 사람을 귀찮게 할 사람은 없을 거야. 이럴 때는...” 소희의 말이 채 끝내기도 전에 침대 누워 있던 이서의 눈꺼풀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흥분해서 몸을 일으
병실에 들어선 마이클 천은 이서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우선 이서의 눈을 검사하고,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이서는 여전히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며 입을 기계적으로 세 번 움직였다.“이서요.” 이 대답을 들은 세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직업이 뭔지도 기억나세요?”“윤씨 그룹의 CEO요.” 모두가 또 한 번 기뻐했다.마이클 천이 하나를 곁으로 끌어당겼다. “그럼 이분은요, 이분은 누구인지 아시겠어요?” “하나요.”마이클 천은 또 소희를 끌어당겼다.하지만 이서는 그녀의 이름을 정확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기계적으로 천장만을 응시할 뿐이었다.그 모습은 마치 감정이 없는 로봇과 같았다. 이러한 행동은 미소가 만연해지던 하나와 소희의 얼굴에 걱정을 불러일으켰다. “마이클 천 선생님...”하나가 고개를 돌리자, 마이클 천이 손을 흔들며 저지했다.“나가서 이야기합시다.”“네.”세 사람은 곧장 병실을 빠져나왔다. 지환은 그들을 보자마자 즉시 걸어왔으나, 마이클 천에게 저지당하고 말았다.그는 턱을 들며 멀지 않은 곳을 가리켰다.“저쪽에 가서 이야기하시죠.”마이클 천은 복도 끝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발걸음을 멈추었다.“방금 검사해 본 결과, 모든 기억이 완전히 회복된 것 같습니다.”하나가 말했다.“하지만...”“이미 충분합니다. 방금 보여준 반응에서 알 수 있듯이, 과거의 기억뿐만 아니라 그날 밤에 일어난 일도 기억하시니까요.” “지금 보여주는 반응은 그저 전형적인 스트레스 반응일 뿐입니다.” “다만 그날 밤의 모든 일과 하씨 가문 어르신의 죽음, 그리고 하 대표님의 신분을 떠올렸는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그럼... 우리는 뭘 하면 될까요?”하나가 물었다. 마이클 천은 여전히 침묵하는 지환을 바라보았다.그가 아쉬움 가득한 어투로 말했다.“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이서 아가씨를 일상적인 생활로 복귀시키는 일입니다.”“여러분이 할
전화 건 사람은 우기광이었다. 이서는 우기광의 목소리를 듣고는 꽤 의외라는 듯 말했다.“웬일로 저한테 직접 전화하신 거죠?” 사실 우기광도 전화를 걸고 싶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몇몇 임원들이 회사에 우기광을 붙잡아 두는 바람에, 이서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윤 대표님, 혹시 지금 윤씨 그룹의 대표 업무를 수행하는 고이서 팀장이 공금을 횡령한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아, 그게 언제 있었던 일이죠?]이서의 어조에서는 전혀 불쾌감이 느껴지지 않았고, 되려 흥미로움이 묻어나는 듯했다. 우기광은 그런 이서의 반응에 잠시 의아해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어제 일입니다. 대표님께서 고이서 팀장에게 회사를 맡기자마자 그런 황당한 일을 저지른 거죠. 대표님, 저는 대표님께서 윤씨 그룹을 맡기 전부터 대표님과 함께 일해왔으니, 대표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표님의 능력은 누구나 인정할 정도니까요. 하지만 회사 운영을 재무팀 팀장에게 맡기신 건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이서가 웃으며 말했다.“제 결정을 무조건 지지해 줄 수 있으신가요?” 우기광은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조심스러운 어조로 답했다. [그건 대표님의 결정이 회사에 이익이 되는 경우에 한합니다. 만약 회사에 손해가 되는 일이라면 저는 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서의 미소가 더욱 밝아졌다. “그 말씀이면 충분합니다. 이제야 안심이 되네요. 하지만 고 팀장님의 일에 대해서는 개입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다른 임원들이 아무리 압박을 가하더라도 반드시 버텨 주셔야 하고요.” [대표님, 혹시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며칠만 기다리시면 알게 될 겁니다.”이서는 이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고, 곧장 김하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서의 전화가 걸려 오자, 김하늘은 겁에 질린 채 전화를 받을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몇 초 동안 망설이다가 결국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김하늘은 전화를 받자마자 울먹이는
잠시 후, 소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서 언니, 솔직히 말해도 절대 화내면 안 돼요.]“그래, 어차피 내가 먼저 말하라고 했잖아. 소희 씨도 내가 무슨 성격인지 잘 알잖아? 말하라고 해놓고 화내는 일은 없을 거야.” 이서의 말에 하나와 소희, 나나는 용기를 내서 각자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하나가 먼저 운을 띄웠다. [이서야, 형부가 신분 문제로 널 속인 건 맞지만, 그 외의 다른 일에선 너를 진심으로 대했어.]“그러니까 네 말은 하지환 씨가 날 속인 걸 더 이상 문제 삼지 말라는 거야?”[응... 그런 셈이지.]“소희 씨 생각은 어때?”소희가 머뭇거리며 천천히 답했다.[그럼 저도 솔직히 말할게요. 형부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형부만큼 언니한테 잘해줄 사람은 찾기 어려울 거라고요.][만약 저라면 그 정도 잘못은 그냥 넘어갔을 것 같아요.]소희는 최대한 조심스레 말했고, 혹여나 이서가 기분 나빠할까 봐 머뭇거렸다.다행히 이서는 여전히 차분한 태도로 대답했다. “내가 괜히 별거 아닌 일로 예민하게 군다는 거네?”[언니,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소희가 급히 해명했지만, 이서는 한사코 소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소희 씨,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되고, 미안해할 필요도 없어. 소희 씨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게 소희 씨의 솔직한 생각인 거니까. 사람마다 문제를 보는 시각은 다르니, 결론도 다를 수 있어. 난 소희 씨의 의견을 존중하고, 그 말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것 같아. 잘 생각해 볼게.”소희는 이 말을 듣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으로 나나가 나섰다. [언니, 아시다시피 저는 연애 경험이 없어서 딱히 할 말도 없어요. 그냥 시간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을까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답이 나올 것 같아요.]이서는 작게 중얼거렸다. “시간에 맡기라고...?”‘그래,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자. 어차피 하도훈 문제도 당장 해결될 게 아니고, 그때까진 고민할 시간이
윤재하와 성지영, 고이서 세 사람은 여전히 이서가 치매에 걸려 윤씨 그룹을 손에 넣을 꿈에 들떠 있었지만, 정작 이서는 지환과 한 지붕 아래에서 지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고민에 빠져 있었다. 분명 병원에서 함께 지내던 때도 있어서 이번에도 별문제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집에서 같이 지내게 되니 묘하게 어색하고 불편했다. 이서는 귀를 바짝 세우고 문밖에서 나는 작은 소리 하나까지 신경 쓰면서도, 문밖에서 조금이라도 소리가 나면 그 소리가 금세 사라지길 바라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런 어이없는 감정에 시달리던 첫날 밤, 놀랍게도 이서는 오랜만에 불면증 없이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 이서는 눈을 뜨자마자 하나의 문자 폭탄을 받았다. [너, 형부랑 다시 합친 거야?] [같이 살기 시작했다던데, 화해하고 다시 시작하려는 거냐고!] [왜 그렇게 중요한 일을 나한테 말하지 않은 거야? 이 선생님이 말 안 해줬으면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나, 너한테 가장 친한 친구 아니었어?]이서는 할 말을 잃었다. 곧바로 소희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어제 두 사람이 손잡고 있는 거 보고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화해한 거였어요? 이렇게 큰일을 저한테도 숨긴 거예요?] 결국 이서는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환 씨랑 다시 화해한 거 아니야. 괜히 오해하지 마.] 그 순간, 나나도 단톡방에 뛰어들었다. [뭐라고요? 이서 언니가 형부랑 다시 화해했다고요? 대박! 들러리 자리 하나 예약할게요!]이서는 어이가 없어졌다. ‘대체 왜 내가 한 말은 안 보고 다들 자기 멋대로 상상하는 거야?’ 이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단체 영상 통화를 시도했다. “말했잖아, 화해한 거 아니라고.” 이서는‘화해한 적 없다’는 말을 특히 강조했다.그제야 세 사람은 조용해졌는데, 잠시 후에야 하나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근데 이 선생님 말로는 두 사람이 같이 산다고 하던데? 다시 화해한 게 아니면 왜 같이 사는 거야?]
2층에서 소란을 듣고 있던 윤재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1층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와는 다르게 고이서 혼자만이 만족스럽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이서는 바로 뒤에 있던 짐가방을 든 직원들에게 자리를 내주며 말했다. “들어오세요.” 직원들이 들고 있는 쇼핑백들이 모두 명품 브랜드임을 본 성지영과 윤재하는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서야, 그 많은 걸 대체 무슨 돈으로 산 거야?” 성지영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직원들이 짐을 다 내려놓고 나가자, 고이서는 여유롭게 말했다. “엄마, 아빠, 두 분을 위해 산 선물인데, 한번 보세요. 마음에 드실진 모르겠네요.” 성지영은 가까이 있던 쇼핑백 하나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LV 로고가 새겨진 명품 의류가 들어 있었다. 성지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이서야, 어디서 이렇게 큰돈을 구한 거야?” 고이서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윤씨 그룹의 돈으로 샀어요.” “뭐? 회사 공금을 횡령했다고?” 윤재하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렇게 많은 걸 샀으니 금방 들키고 말 거야. 윤이서가 내일 회사에 출근하면, 바로 알아챌 거라고! 당장 환불하렴. 윤이서한테 들키면 정말 큰 일이니까!” 고이서는 소파에 편하게 앉으며 미소 지었다. “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윤이서는 절대 모를 거예요. 이 돈, 다 합법적인 절차로 나온 거거든요.” 윤재하와 성지영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고이서는 다리를 꼬고 앉아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윤이서가 저한테 회사를 맡겼어요.” “뭐? 그게 정말이야?” 윤재하와 성지영은 깜짝 놀라며 고이서를 바라보았다. “물론 임시로 맡긴 거긴 하지만... 윤이서가 왜 저한테 회사를 맡겼는지 아세요?” 두 사람이 고개를 젓자, 고이서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오늘 윤이서가...”고이서는 오늘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성지
이서는 지환의 대답을 듣고 나서 참지 못하고 말했다. “아까 분명히 얘기했잖아요, 화해한 척 연기하는 거라고요! 지엽이도 없는 데서 굳이 연기할 필요는 없어요.”지환은 살짝 눈을 들어 이서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이서야, 아무리 토사구팽이라지만, 이렇게 빨리 쳐내는 건 좀 심하지 않아?” 더 이상 이 주제로 대화하고 싶지 않은 이서는 곧바로 소희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자료는 다 읽어봤어? 정말 심태윤이 벌인 짓이야?”“네, 자료에는 심태윤이 어떻게 가짜 증거를 만들었는지도 다 나와 있었어요. 이 증거들만 경찰에 넘기면, 심태윤은 바로 잡혀가고 말 거예요.” 이서는 소희의 말투에서 뭔가 망설임이 느껴져 물었다. “왜 그래? 혹시 심태윤이 잡혀가면 소희 씨의 양부모를 돌볼 사람이 없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 소희는 가볍게 웃었다. “언니, 저를 너무 착하게 보신 거 아니에요?”“그 사람들이 돈을 이유로 저한테 어떻게 했는지 다 아시잖아요. 그 이후로 저는 그 사람들한테 기대한 것도 없고, 미련도 없었어요. 단지 이 일이 심태윤 혼자 한 짓이 아닌 것 같아서 그래요. 분명히 배후가 있을 거라고요.” “그 배후만 찾아내도 앞으로 골치 아플 일은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심씨 가문 사람들이 이서 언니의 남편이 하 대표님이라는 걸 알게 된 후에는 더 이상 직접적으로 날 괴롭히지 않았지만, 언젠가 이서 언니와 하 대표님이 헤어진다면, 나를 몰아내려는 사람들은 다시 들고일어날 거야.’ “혹시 이미 의심 가는 사람이 있는 거야?” 이서는 소희가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마음을 정확히 읽어냈는데, 역시 자매다운 호흡이었다. 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 말을 다른 사람한테 하면 오해받을 수도 있겠지만, 언니한테는 말해도 될 것 같아요.”“제 생각엔... 강경숙이 관련된 것 같아요.” “강경숙?”“제가 심씨 가문에 돌아온 이후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이 강경숙과 심유인이잖아
“적어도 내가 다른 사람을 찾기 전까지는 그렇게 할게.” “지엽아...” “그런 표정 짓지 마.” 지엽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그러면 내가 또 희망을 품을 것 같잖아.” 이서는 입술을 꾹 다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보다 내가 먼저 가도 될까?” 이서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줘. 내 마지막 소원이야.”지엽의 진지한 눈빛에 이서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지엽은 잠시 이서를 바라보더니, 이서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기억에 새기듯 눈에 담은 후, 미소를 짓고 조용히 돌아섰다. ...한편, 고택 입구에서는 소희와 지환이 두 사람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온 사람은 지엽 혼자였다. 지엽이 혼자 돌아오는 모습을 본 순간, 지환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환은 한걸음에 다가가 지엽의 멱살을 움켜잡으며 거칠게 물었다. “이서는 어디 있어?” 지엽은 차분한 눈빛으로 지환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표님은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정말 부럽다니까요?” 하지만 지환은 지엽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이서는 어디 있냐고 묻잖아!” 마침 그때 이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환이 지엽을 몰아붙이고 있는 모습을 본 이서는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 “하지환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서가 무사히 나오는 걸 본 지환은 그제야 손을 놓았다. “너... 괜찮아?” 이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안 괜찮을 건 없지.” 지엽은 헝클어진 옷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서야, 봤지? 저 사람이 바로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널 아주 사랑하면서도 과할 정도로 집착하는 남자가 저 사람이라고.” 이서는 입술을 움직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지엽은 쓸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저 남자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분명히 보여주는 게, 내가 널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
차가 심씨 가문의 고택에 다다르자, 이서는 가장 먼저 지엽을 발견했다.지엽 역시 차에서 내리는 지환을 보고 얼굴이 굳어 버렸는데, 특히 이서가 자연스레 지환의 팔짱을 낀 순간, 지엽의 눈썹이 몇 번이나 심하게 떨렸다. “두 사람...” 지엽이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찰나, 고택의 대문이 열리며 소희가 나왔다. “오셨네요!” 몇 초 후, 두 사람이 팔짱을 낀 모습을 본 소희는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두 분... 화해하신 거예요?” 이서는 지엽의 반응을 슬쩍 살피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됐어.”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었다. 지엽이 떠난 뒤에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소희는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하나 언니는 아직 모르죠? 지금 바로 알려줘야겠어요!” 이서는 다급하게 소희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으며 말했다. “잠깐만!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먼저 소희 씨 얘기부터 하자. 지엽아, 얼른 조사한 결과부터 소희 씨한테 보여줘.”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이 함께 있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고, 이서가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소희에게 조사 결과를 건넸다. “소희 씨에게 누명을 씌운 건 심태윤이었어요. 소희 씨가 여태 친동생인 줄 알았던 그 사람이요.” 지엽은 여전히 이서와 지환 쪽에 신경이 쏠려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그 안에 다 적혀 있으니까 잘 읽어보면 돼요...” 지엽이 고개를 돌려 이서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서야, 잠깐 나랑 따로 얘기할 수 있을까?” 그 순간,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이서는 지환을 한 번 바라보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서가 지환의 팔에서 손을 빼내려 하자, 지환은 더욱 강하게 이서의 손을 잡았다. 이서는 당황한 표정으로 지환을 올려다보며 눈빛으로 놓아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 대표님, 제가 이서랑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면
이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정말... 같이 먹고, 같이 잔다고요?”지환은 그 말에 이서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걸 눈치채고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지만, 일부러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응, 어쩔 수 없잖아. 어둠의 호리병을 반으로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당분간은 같이 지내야겠어요.” 지환의 미소는 더 깊어졌는데, 그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하도훈은 언제 처리할 수 있어요? 설마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니죠?” 지환은 깊은숨을 내쉬며 대답했다.“어둠의 호리병이 다크 웹의 1위와 2위의 위치만 알아낸다면, 하도훈과 정면 승부를 가릴 수 있을 텐데 말이지...”“어둠의 호리병은 그 둘의 위치를 모르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어둠의 호리병도 순위에 올라 있는 킬러일 뿐, 그 사람들과 친구는 아니거든.” “단서도 전혀 없어요?” 지환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망하게 해서 미안하지만, 지금은 없어.” 이서는 실망이라기보다는 하도훈이라는 골칫거리를 빨리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럼, 우린 이제 어디로 가요?” “회사로.” 고개를 끄덕인 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두 사람이 탄 차는 윤씨 그룹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이서는 지엽의 전화를 받았다. “소희 씨에 대한 일은 어느 정도 해결된 거야?”이서는 기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얼른 가서 소희 씨한테 알려줘. 분명히 엄청나게 기뻐할 거야.” 수화기 너머의 지엽은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말했다.[이서야, 난 소희 씨랑 이제 막 알게 된 사이라 조금 어색한데, 네가 같이 가주면 안 될까?] 이서는 곁눈으로 지환을 한 번 바라보며 생각하다가 말했다. “알았어.” 그 순간, 이서를 태우고 있던 지환은 잠시 핸들을 놓칠 뻔했
“고이서를 바로 내쫓으면 분명 편하긴 하겠죠. 하지만 내 손에 있는 윤씨 그룹의 자산 중 일부는 원래 윤씨 가문의 것이었어요.”“그 인간들의 만행이 제대로 폭로되지 않으면, 과거 윤씨 그룹에 몸담았던 몇몇 내부 인사들은 고이서와 손을 잡고 말 거예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반드시 그 인간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지 모두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일부러 고이서를 회사의 대표 자리에 앉힌 거야? 그 여자가 빨리 본색을 드러내도록 하려고?” “네.”짧게 대답한 이서는 무심코 거울 속 자신을 보았고, 활짝 웃고 있는 자기 모습에 잠시 멍해졌다. ‘하지환 씨 앞에 서면 점점 자유로워지는 것 같아.’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는데, 이서에게 더 난감한 것은 지환이 자신의 정체를 속였던 일조차 잊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 내려오라고 한 거예요?”아래층으로 내려온 이서는 지환의 차에 올랐다. “하도훈이 이렇게 오랫동안 잠적한 이유가 뭔지 알아?”“자식을 만드느라 바쁜 거겠죠.” “맞아.”“그동안 꽤 많은 여자를 만났고, 그중 한 여자가 진짜로 임신했다더라.” 이서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그럼 이제 하도훈이 다시 우리한테 신경 쓸 여유가 생겼다는 거네요?” 지환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이서를 바라보았다. 이서는 지환의 표정을 보고 의아하게 물었다. “그 표정은 또 뭐예요? 설마... 예전에 내가 하도훈한테 여자를 붙여보라고 했던 그 작전을...”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그 임신했다는 여자, 하지환 씨가 보낸 사람이에요?” “아니었으면 한 번에 임신했을 리가 없잖아.” 이서는 입을 살짝 벌리고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럼 그 아이는 하도훈의 아이가 아닌 거예요?” 지환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고, 이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훈은 그 사실을 알면 미쳐버릴 거예요.” “미치면 더 좋지 않아?” 지환은 담담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