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승재는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프라이빗 룸에서 곽현수를 만났다.곽현수는 손에 고급 시가를 들고 앉아 있었다. 그에게서는 오랜 시간 높은 자리에 있었던 사람 특유의 날카로운 아우라가 풍겼다. 곽현수 주위에는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몇몇 사업가들이 앉아 함께 시가를 음미하고 있었다.중앙의 테이블에는 디캔팅 된 레드와인이 놓여 있었고 유리잔 속에서 은은하게 흔들리는 와인빛이 유혹적인 광택을 뿜어냈다. 시가의 그윽한 향과 와인의 깊은 향이 어우러져 공간 전체가 편안하고 여유로운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곽승재는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문가에 도착했고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아버지.”곽현수는 옆에 있던 사람들과 함께 해성시 경제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예상치 못한 곽승재의 출현에 놀라운 기색을 보였다.“네가 여긴 무슨 일이야?”곽승재는 태연하게 자리에 있는 어른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곽현수를 바라보며 말했다.“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눈치 빠르게 각자 적당한 핑계를 대며 자리를 떴다.사람들이 모두 나가고 난 후 곽승재는 곽현수 옆에 놓인 등나무 의자에 천천히 앉았다.곽현수는 시가를 깊게 들이마신 후 희미한 연기를 내뿜으며 물었다.“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승엽 아저씨가 죽었습니다.”곽현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 일로 굳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어제 이미 소식을 들어서 알고 있다.”“경찰이 현장을 조사했지만 타살 흔적은 없었습니다. 사인은 일산화탄소 중독입니다.”곽현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미간을 더 깊게 찌푸렸다.곽승재는 그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경찰 측에서 아저씨랑 함께 숨어있던 경호원 두 명을 확보했는데 아저씨는 최근 극도의 불안 속에서 정신적 압박을 심하게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틀 전 두 경호원에게 당분간 몸을 피하라고 지시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여요.”곽승재의 말을 들은
“아버지도 아저씨가 그렇게 대담하게 민시후까지 엮어 함정을 파고 기회를 이용해 범가온을 독살할 줄은 예상 못 했겠죠. 아버지가 시켰다는 걸 밝힐까 봐 죄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처럼 꾸민 거 아닙니까?”“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곽현수는 분노로 얼굴이 새파래진 채 손에 들고 있던 시가를 바닥에 내던졌다.“네가 감히 네 아버지를 이렇게 의심해? 내가 고은서를 손보려면 방법이야 많아. 굳이 백승엽을 이용할 필요는 없지! 백승엽은 오랫동안 내 곁에서 집사를 해 왔어. 공로가 없진 않다고. 내가 왜 그런 사람을 궁지로 몰아넣어 죽게 만들겠어!”곽승재는 바닥에 떨어진 시가를 흘깃 내려다본 후 무표정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정말 아버지와 상관없습니까?”“당연하지!”곽현수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누가 너한테 쓸데없는 소리를 했길래 날 의심하는 거야! 혹시 고은서야?”곽현수는 차갑게 비웃으며 말했다.“너랑 이혼한 걸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해서 지금 온갖 문제를 일으키고 네가 아직 미련이 남아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 일부러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거잖아! 곽승재!”곽현수는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경고했다.“더 이상 나를 거스르지 마라. 안 그러면 나도 더 이상 봐주지 않을 거다. 백유미를 귀국시킨 건 내가 맞지만 너랑 고은서의 관계와 감정이 정말 단단했다면 그렇게 쉽게 흔들릴 리도 없었겠지!”곽현수의 표정이 점점 더 험악해졌다.“고은서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아직도 질질 끌어? 이미 더 나은 선택지가 있는데 무슨 미련이 남아서 이러는 거냐. 아니면 네 엄마 때문에 일부러 내 화를 돋우려고 그러는 거야?”곽승재는 코웃음을 치며 낮게 웃음을 흘렸다.“누가 지금 일부러 이러고 있는데요?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의 문제에는 끼어들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와 여씨 가문의 혼사는 얘기가 다르죠.”곽승재는 또 다른 서류를 꺼내어 곽현수 앞에 내밀었다.“사람을 시켜 조사해봤더니 1년 전 Y 국에서 열린 연회에 원래 초대받은 사람은 아
곽현수는 곽승재의 말을 듣고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네 할머니의 생각은 고려하지 않는다 해도 여씨 가문 체면은 고려해야 하지 않겠니? 고은서와 강제로 이혼시키고 다시 여씨 가문과 결혼한다면 더러운 소문 때문에 여씨 가문에도 피해가 가지 않겠니? 그런 상황에 여씨 가문이 널 받아들이겠어?”곽승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한참을 침묵하던 곽승재가 냉소하며 입을 열었다.“아버지가 이렇게 세심하고 사려 깊은 분인줄은 미처 몰랐습니다.”곽승재의 비꼬는 말투에 곽현수의 표정이 다시 험악해졌다.“이제라도 내 뜻을 알았으니 더 늦기 전에 여씨 가문과의 결혼을 확정 지어라!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다.”“누가 후회할지는 두고 봐야죠.”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곽승재의 크고 곧은 체격은 마치 한 그루의 장성한 소나무처럼 위풍당당했다.“이미 관련 증거는 경찰에 넘겼습니다. 아저씨의 죽음이 아버지와 관련 있는지는 경찰이 조사할 겁니다.”“너 이 자식이!”곽현수는 분노로 숨이 턱 막혔다.“못난 놈!”곽현수가 화를 내건 말건 곽승재는 신경 쓰지 않고 긴 다리를 뻗어 유유히 룸을 빠져나갔다....테니스 코트 안에서 육현석은 땀을 흘리며 테니스 라켓을 휘둘렀다.육현석은 박지연 병원의 배구 친선 경기에 참여한 이후로 꾸준히 운동을 해왔다. 혹시라도 다음에도 비슷한 활동이 있으면 박지연의 체면을 살려주려는 의도도 있었다.막 열정이 솟아오를 때쯤 육현석은 멀찍이 서 있는 곽승재를 발견했다.그는 헐레벌떡 곽승재의 옆으로 달려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형, 여긴 무슨 일이야? 아직 몸이 다 낫지도 않았는데 격렬한 운동하면 안 돼.”그러나 곽승재는 아무 말 없이 곧장 옆에 있던 의자에 앉았다.육현석도 땀을 닦으며 그의 옆에 앉았다.“형, 참 답답하다니까. 부상당한 몸으로 제대로 쉬지도 않고 밤새 고은서 돌보느라 잠도 안 자고 심지어 계속 안고 다니기까지 하면서... 후유증이라도 남으면 어쩌려고 그래?”곽승재는 육현석을 흘깃 쳐다보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
체육관 주차장에서 차가 미친 듯이 고은서를 향해 돌진했던 장면을 떠올리기만 해도 곽승재는 아찔한 공포를 느꼈다.그는 고은서를 보고 있어야만 안심할 수 있었다.육현석은 곽승재의 생각을 간파하고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진작 이런 마음을 깨달았더라면 은서가 그렇게까지 이혼을 결심했을까? 휴... 됐어.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지.’“형, 백승엽 사건에 대해 경찰도 결론을 내렸지? 전에 형이 아버님이 백승엽 사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조사한 건 어떻게 됐어?”곽승재는 관자놀이를 누르던 손가락을 풀고 오후에 곽현수를 만나고 온 이야기를 간략하게 육현석에게 전했다.육현석이 놀라며 말했다.“그럼 아버님이랑 상관없는 일이었던 말이야?”곽승재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아버지가 한 말도 일리가 있어. 만약 진짜로 은서를 해치려 했다면 굳이 이렇게 번거로운 방식을 쓸 필요가 없어. 그리고 민씨 가문까지 끌어들일 이유도 없고.”“그럼 백승엽은 도대체 누구의 사주를 받은 걸까? 설마 자기 마음대로 벌인 일일리는 없잖아. 백승엽은 형한테 밉보일까 봐 누군가한테 원한을 품어도 작은 꼼수 정도만 부렸지 이렇게까지 악랄한 짓은 저지르지 않았잖아. 최근 백승엽과 접촉한 사람들을 다 확인해 봤어? 아버님 외에 수상한 인물은 없었어?”곽승재는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현재로선 발견된 게 없어. 백승엽이 사람을 시켜 차 사고를 일으키고 불법 경로로 마약을 구매한 모든 증거가 명확하게 남아 있어.”“내가 듣기로 민시후가 은서를 도와 예전에 백씨 가문과 거래했던 고객들을 다시 이어줬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백유미의 정신 감정 보고서가 조작된 것임을 입증할 수 있는 의사도 찾았다고 하더라. 혹시 이런 일들이 백승엽을 자극한 건 아닐까? 게다가 백유미가 수술 중 대출혈로 고비도 겪었잖아. 분노에 휩싸여 이성을 잃은 걸지도 모르지.”그럴싸한 이유이긴 했지만 곽승재는 여전히 뭔가 석연치 않았다.‘백승엽이 분노에 휩싸여 이성을 잃었다면 이렇게 냉정하고 신속하게 일을 꾸밀 수 있었을
박지연이 고은서를 설득한 이유는 간단했다. “현재 민시후는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태라 해야 할 검사도 많아. 너도 기운 없이 병색이 완연한 모습이야. 오늘 하루는 일단 쉬고 내일 민시후의 상태가 조금 더 안정된 후에 가서 보는 게 어때?”하지만 고은서는 기다릴 수 없었다.“싫어. 그냥 가서 민시후가 정말 깨어났는지만 확인할 거야.”말을 마친 고은서는 박지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침대에서 내려와 신발을 신었다.박지연이 손을 뻗어 고은서를 잡았다.“민시후 정말 깨어났어. 내가 너한테 거짓말이라도 할까 봐?”“전에 민시후가 혼수상태일 때도 나한테 숨겼잖아.”“너한테는 정말 못 당하겠네.”박지연은 체념한 듯 말했다.“지금 민씨 가문 사람들이 다 민시후를 지키고 있어. 민시후가 너와 대화할 여유가 있을 것 같아? 게다가 너 지금 이 상태로 들어가 봐야 민시후가 오히려 걱정할 거야. 조금 참았다가 내일 가도 똑같잖아.”고은서는 박지연의 말도 일리가 있다는 걸 알았지만 정말로 민시후가 무사한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그럼 병실에는 안 들어가고 밖에서 보기만 할게.”박지연도 더 이상 막을 수 없었다.“그럼 같이 가자.”“응.”10분 후 박지연은 고은서를 데리고 민시후의 병실 앞에 도착했다.병실 문이 완전히 닫혀 있지 않아 안이 살짝 보였고 그 안에는 민씨 가문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의사와 간호사도 있었다.민시후는 병상에 누워 있었고 몸에 부착된 기기들은 제거된 상태였다.머리에는 두꺼운 붕대가 감겨 있었고 손에는 링거가 꽂혀 있었다.의사의 검사에 응하면서도 힘없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와 같은 짜증이 섞여 있었다.“귀찮게 하지 말고 나가요. 쉬고 싶어요.”민시후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고은서의 가슴속에 벅찬 감정이 밀려왔다.‘민시후가 정말 깼어! 무사해... 멀쩡히 누워 있어.’“은서야, 이제 봤으니까 가자.”박지연이 조용히 말하자 고은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민시후는 허약한 상태라 고은서는 자신이 들어가서 괜히 폐를 끼치면 안
“너 표정 왜 그래? 무슨 일 있어?”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박지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무것도 아니야. 송민아가 좀 이따 올 거야. 너랑 같이 민시후 보러 갈 거라고 하더라.”고은서는 마음이 따뜻해졌다.“민아는 내가 민시후 형 때문에 곤란해질까 봐 걱정하는 거겠지? 정말 다정하네.”얼마 지나지 않아 송민아가 도착했다.고은서는 곧바로 민시후를 보러 가자고 했지만 송민아는 잠시 망설이며 박지연과 눈을 마주쳤다.“왜 그래? 너희 둘 다 왜 이렇게 수상해?”고은서가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아무것도 아니야. 가자.”송민아가 고은서의 팔을 살짝 부축했다.고은서도 두 사람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일단 민시후를 만나고 나서 추궁하기로 했다.고은서와 송민아가 병실 앞에 도착했다.병실에는 어제보다 사람이 적어진 것인지 한결 조용했다.송민아가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민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오세요.”거의 일주일만이었다.드디어 다시 민시후와 대화할 수 있다는 생각에 고은서는 왠지 모를 설렘을 느꼈다.송민아가 병실 문을 열자 안에는 민시아와 민시후 남매 둘 뿐이었다.고은서는 민시아에게 인사할 겨를도 없이 곧장 민시후에게 시선을 돌렸다.어젯밤 문틈 사이로 보았을 때보다 확실히 상태가 나아 보였다.그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아 있었고 앞에는 작은 간이식탁이 놓여 있었다.식사가 차려져 있었지만 민시후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듯했다.민시후는 아무것도 덮지 않은 채로 붕대를 감은 다리를 그대로 드러냈다.송민아가 말해줬던 대로 민시후는 머리 부상 외에도 팔과 다리가 골절되었다.그날 밤의 사고가 떠오르자 고은서의 눈가가 붉어졌다.“왜 또 왔어?”힘없는 민시후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내 앞에서 그만 알짱대.”놀란 고은서가 고개를 들자 민시후의 말은 고은서가 아닌 송민아를 향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은서는 지금 이 상황이 의아했다.‘송민아는 이미 오래전에 민시후를 향한 감정을 정리했
송민아는 고은서가 눈을 크게 뜨고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보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막 입을 열려던 찰나 민시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서 씨, 미안해요. 시후가 깨어나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에요. 의사도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고 해서 제가 미처 시후한테 모든 걸 설명하지 못했어요.”고은서는 충격에서 벗어나 침착함을 되찾았다.그녀도 처음 깨어났을 때 뇌진탕 때문에 사고 당시의 기억이 없었다.민시후도 같은 상황일 가능성이 컸다.“괜찮습니다.”고은서는 요동치는 감정을 억누르며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제가 신중하지 못했네요. 이럴 때 방해해서 죄송해요. 민시후, 푹 쉬어. 우린 먼저 가볼게.”고은서의 말이 끝나자 민시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잠깐, 왜 우리 두 사람이 같이 있다가 사고가 일어난 건지 아직 설명 안 했잖아.”사고라는 말에 고은서는 본능적으로 움찔했고 사고 당시의 장면이 떠올라 숨이 막혀왔다.“미안해. 다 나 때문이야.”고은서의 말을 들은 민시후의 눈가에 의심이 스쳤다.“설마 너랑 곽승재가 짜고 치는 연극은 아니지?”고은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역시 민시후다운 생각 방식이었다.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의 의도를 몇 번이나 의심했던 그였다.‘정말 나를 기억하지 못하나 보네.’고은서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실망, 허탈함과 깊은 죄책감이 그녀를 뒤덮었다.민시후가 이렇게 된 건 모두 본인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코끝이 시큰해진 고은서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먼저 쉬어. 나중에 다시 올게.”그렇게 말하고는 고은서는 송민아와 함께 병실을 나왔다.병실을 나와 복도를 걸어가던 고은서는 옆에 있던 의자에 힘없이 앉아버렸다.“은서야, 괜찮아?”송민아가 걱정스럽게 묻자 고은서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시후 상태 알고 있었어?”송민아는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솔직히 답했다.“시아 언니가 어제 민시후가 기억을 잃었다고 알려줬어. 병원에 와 보라고 해서 와서 확인했더니 최근
민승호는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민시현은 가차 없이 물었다.“여긴 왜 오신 거죠?”고은서는 솔직히 답했다.“시후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어서 보러 왔어요.”민시현의 목소리는 냉랭했다.“은서 씨도 시후 상태가 어떤지 잘 알겠죠. 두 사람 사이의 일은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을 테니 앞으로는 이렇게 방해하러 오지 마세요. 완전히 인연을 끊으면 더 좋겠네요.”“아저씨! 시현 오빠!”고은서가 답하기도 전에 송민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송민아를 보자 민시현의 태도는 조금 누그러졌고 민승호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민아도 시후 보러 왔니? 시후가 많은 걸 잊어도 너에 대한 기억은 또렷한 걸 보니 네가 시후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었던 거 아닐까?”민승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송민아는 옆에 있던 고은서를 흘끗 보더니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답했다.“아저씨, 이제 더 이상 그런 농담 하시면 안 돼요. 시후 오빠가 모든 기억을 잃은 것도 아닌데 저와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는 건 당연하죠. 하지만 저는 정말 오빠를 완전히 내려놓았어요. 그러니까 절대 저희 두 사람 다시 이어주려고 하지 마세요!”민승호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나는 정말로 네가 마음에 들었어. 우리 막내며느리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시후 저 녀석이...”송민아는 이에 답하지 않고 그저 웃으며 말했다.“아저씨, 시현 오빠. 저랑 은서는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말을 마친 송민아는 고은서의 팔을 잡고 함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우리 집안과 민씨 가문은 원래 친분이 깊어. 아저씨도 나를 좋아해서 시후 오빠와 결혼시키고 싶어 하셨던 거야. 너를 난처하게 만들려고 한 건 아니야.”“위로하려고 그러는 거면 안 해도 돼. 뭐든지 각오하고 있었어.”“시현 오빠가 너한테 심한 말한 건 아니지?”송민아가 자책했다.“좀 더 참을 걸 그랬어. 널 병실에 바래다주고 화장실에 갔어야 했는데...”고은서는 송민아의 표정과 말투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그게 무슨 상관이야. 화장실
“네 엄마는 아는 사람이 많지만 송씨 집안 사람과 안면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고준석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은서야, 왜 갑자기 송씨 집안 사람을 아는지 묻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겼니?”아직 모든 게 오리무중이라 고은서는 외할아버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제가 그 집안 따님이랑 친한 친구이고 아드님과도 아는 사이라 인연이 있는 것 같아서 혹시 어른끼리 아는 사이가 아닌지 여쭤본 거예요.”“집안 어른까지 알아보면서 결혼 생각이 없다고?”단은숙이 다시 흥분했다.“은서야, 솔직히 말해봐. 그 송민준이라는 청년이 너를 좋아하지? 너를 쫓아다니지?”고은서는 황당해하며 부인했다.“아니에요. 절대 그럴 일이 없어요. 저와 송민준은 그냥 친구예요. 그리고 제가 만약 결혼할 마음이 생기면 반드시 숙모께 첫 번째로 말씀드릴게요.”“여보, 자꾸 결혼 얘기로 애를 못살게 굴지 마. 우리 은서는 능력도 뛰어난데 시집가지 않아도 괜찮아.”고국성이 뜻밖에 그녀 편을 들어주었다. 영악하고 연줄을 대기 좋아하는 삼촌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더 놀라운 것은, 숙모가 화내거나 반박하지 않고 그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것이다.“당장 결혼하라고 닦달한 것도 아니잖아요. 곽승재와 비슷한 조건의 남자가 있다면 놓치지 말아야죠...”“괜찮아요. 숙모도 저를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죠.”고은서는 적당히 무마한 후 넉살스럽게 단은숙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숙모, 제가 최근에 G브랜드 핸드백을 샀는데 디자인이 예뻐요. 한번 보실래요? 마음에 드시면 드릴게요.”이렇게 좋은 일을 마다할 리 없는 단은숙은 급히 일어섰다.“아이고, 은서가 숙모 생각도 해주고! 은혜 그 계집애보다 백배 낫네.”“엄마, 다 들려!”멀지 않은 곳에 있던 고은혜가 기분 상한 듯 소리쳤다.“들리든 말든. 내가 틀린 말 했나?”단은숙은 흐뭇한 표정으로 고은서와 함께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고은서는 차에서 포장
고준석과 고국성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해성의 곽씨 일가, 북성의 송씨 가문, 민씨 가문은 모두 명문가였다.“당연히 알지.”남편과 시아버지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단은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송씨 집안의 가주가 훈훈한 외모를 가진, 유명한 독신남이라는 것도 알아.”“은서야, 송씨 가문은 왜 물어?”단은숙이 갑자기 소리 질렀다.“너 설마 송씨 가문에 시집가려고?”“맞네! 송씨 가문이 해성에 지사를 세웠다더니 너와 사업 거래가 있었구나.”단은숙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 집안 아드님이 우리 은서 얼굴을 보고 첫눈에 반한 게 틀림없어.”“...”그녀가 한 마디 물었을 뿐인데, 숙모는 기관총 쏘듯 수십 마디를 내뱉었다. ‘첫눈에 반했다’, ‘결혼한다’, 이런 말까지 나오니 고은서는 어느 것부터 반박해야 할지 난감했다.“바쁜 애가 언제 연애할 시간이 있겠어? 넘겨짚지 말고 은서 말을 들어보자꾸나.”단은숙은 화내지 않고 고은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정확한 소식을 기다렸다.명문가와의 혼인, 이에 대한 숙모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고은서는 알고 있었다.“숙모, 너무 상상의 나래를 펼쳤어요. 어떻게 아무 남자나 저를 좋아하고 저와 결혼하려고 하겠어요? 저는 그저 우리가 과거에 송씨 가문과 무슨 거래가 없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이 말을 듣고 순식간에 흥미를 잃은 단은숙은 모른다고 했다.고준석과 고국성도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고씨 가문은 줄곧 북성에 있었던 송씨 가문과 거래할 기회가 없었다.“사업 거래도 없었어요? 송씨 가문에서 향료와 관련된 사업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고은서는 꼬치꼬치 캐물었다.“아니면 두 분이 사업차 북성에 갔다가 송씨 가문 사람과 마주친 적도 없으세요?”고국성이 입을 열었다.“송씨 가문은 줄곧 부동산 사업을 해왔고 송민준이 개척한 새로운 사업도 향료와는 무관한데, 우리와 무슨 사업 거래가 있었겠어?”고준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예상했던 결과였다.‘하지만 두 가문이 아예 모르는 사이
건전복 상자를 들고 주방에서 나오던 단은숙이 고은서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은서 왔어?”그녀가 고국성의 일을 도와준 뒤로 단은숙은 그녀를 훨씬 살갑게 대했다. 얼마나 진심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를 존중하고 예의를 차리기 시작했다.단은숙의 목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은서야, 거기 서서 뭐 해? 얼른 외할아버지 곁으로 와.”고준석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고은서는 미소 띤 얼굴로 모두에게 인사하면서 고준석 곁으로 갔다.아내의 부름을 받은 고국성은 식재료를 손질하러 주방에 갔고, 고은서는 외할아버지 곁에 앉았다.“은서야, 너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요즘 밥은 잘 챙겨 먹니?”외할아버지는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걱정스럽게 물었다.“일이 바빠도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지.”“할아버지 너무 해요.”고은혜가 입을 삐죽거리며 끼어들었다.“저한테는 살이 찐 게 아니냐고 하시더니 언니한테는 살이 빠졌다고 하시고. 언니만 일이 바쁜 게 아니라 저도 바쁘거든요.”고준석이 자애롭게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일이 바쁜지는 모르겠지만, 군턱이 진 것을 보니 끼니는 굶지 않은 것 같구나.”“할아버지, 저 군턱이 지지 않았어요.”오기가 생긴 고은혜는 증명해 보이려고 목을 쭉 빼 들었다.“보세요. 전혀 안... 콜록!”목을 너무 세게 빼든 탓에 말이 끝나기 전에 사레가 들렸다.그녀는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연거푸 기침했다. 유성준이 어이없는 듯한 표정으로 물과 휴지를 건넸다.“회사에서 센 척하더니 집에서도 이러네.”“콜록콜록! 제가 언제 센 척했다고 그래요? 저는 그런 적이 없어요. 콜록!”고은혜는 기침하면서도 발끈했다.이 정겨운 모습을 보고, 고은서는 문득 유성준과 고은혜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은 부드럽고 세심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덜렁대는 성격이다.다만 숙모 단은숙이 동의할지 모르겠다. 고은혜가 명문가에 시집가 상류층에 진입하기를 바라는 그녀였다.유성준도 집안이나 능력이 빠지지 않았지만,
고은서가 이미 생각을 정했다는 것을 확인한 곽승재는 더 이상 의견을 내지 않고 단지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할 말을 다 한 고은서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늦었는데 일찍 들어가 쉬어.”곽승재는 좀 더 있고 싶었지만, 억지로 머물 핑계를 찾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났다.때마침 영상전화가 걸려 오자, 고은서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고 영상전화를 받았다.문 쪽으로 걸어가던 곽승재가 무심결에 돌아보니, 그녀는 어느새 소파에 벌러덩 누워 한쪽 발을 다른쪽 무릎에 올리고 흔들거리고 있었다. 진지하고 엄숙했던 조금 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이었다.곽승재는 이혼하기 전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한번은 그가 외할아버지 댁에 같이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은서가 삐진 적이 있었다. 그녀가 며칠째 외할아버지 댁에 머물며 집에 돌아오지 않자, 이 일을 알게 된 할머니가 그를 고씨 가문으로 보냈다.그때의 고은서도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편안한 실내복 차림으로 소파에 엎드려 두 발을 흔들거리며 아이패드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맨발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곽승재는 그 순간 모든 불쾌감이 사라졌다. 원래 불만 가득했던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은서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도우미가 말을 걸어서야 정신을 차렸다.다시 모습을 드러낸 고은서는 흠 잡을 데 없이 단정한 차림에 화장도 완벽하게 끝낸 상태였다.그와 함께 마구 뛰던 곽승재의 심장도 평온을 찾았다. 고은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서 잠깐 넋을 잃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그것이 실은 설렘의 순간이었다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했다...고은서와 이야기하던 중, 고은혜가 문 쪽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언니, 저기 혹시... 형부?”고은서가 몸을 뒤로 젖힌 채,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는 여전히 문어귀에 서 있었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잘생긴 얼굴에서 고통스러운 기색이 언뜻 보였다.‘갑자기 왜 저런 표정이지?’고은서가 자세히 보려고 일어났을 때는 그가
“당시 시은이가 부상당한 쿠아를 쫓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일에 대한 기억이 전부 시은이가 쿠아를 구해 준 그 따뜻한 장면으로만 남아있어. 시은이가 왜 거기에 있었을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고은서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곽승재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고은서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두려워하지 마, 자책하지도 마.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할 거야.”곽승재가 부드럽게 위로했다. “내가 민기 씨에게 송민준과 시은 씨사이의 관계를 조사해 보라고 시켰어.”고은서는 살며시 손을 빼냈다. “그럼 부탁할게.”곽승재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애써 숨기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시은이가 당신과 결혼을 하려 하기에 날 싫어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 하지만 송민준은 왜 나를 미워할까?” 고은서가 의문을 제기했다.비록 그녀가 예전에 민시후와 가까웠다고 해도 고씨 가문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게다가 유미 씨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귀국한 것은 곽 회장님의 뜻뿐만 아니라 이 C 선생의 지시도 있었다고 했다. 그 시절 자신은 민시후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었다.‘고씨 가문이 송민준에게 크게 잘못한 거라도 있나?’고은서는 머리가 터질 정도로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곽승재도 이 일의 전후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우리의 추측일 뿐이야. 증거 없이는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없으니 서두르지 마.”고은서는 급할 수밖에 없었다. 뒤에 숨은 검은 손을 잡아내지 못하면 그녀와 고씨 가문은 영원히 불안에 떨어야 했다.전생의 비극적 결말이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범인을 색출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곽승재는 고은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MQ에 관련된 일은 내가 사람을 시켜 주의 깊게 보고 있어. 무슨 움직임이 생기면 바로 나에게 보고할 거야.”고은서는 곽승재가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거실의 하얀 색 조명 아래서 그의 각진
곽승재의 물음에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갔어. 우연히 마주치기까지 했지.”여시은이 그들이 있는 곳을 알고 일부러 찾아왔을 것이라는 의심이 확 들었다.곽승재는 여시은이 WOR 게임 회사에 협력 제의를 했으나 주 개발자에게 거절당했다고 알려주었다.여시은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유혹을 던지는 걸 보면, 고은서가 이 일을 알게 만들어 화나게 하려는 의도임이 분명했다.고은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은서야, 무슨 얘기 하려고 했어?” 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는 일단 여시은의 이 문제를 접어두고, 오늘 송민준의 사무실에서 그의 컴퓨터에 있는 농장 영상을 발견한 일을 설명했다.곽승재는 표정이 복잡해지며 말했다.“송민준이 그렇게 방심할 사람이야? 아니면... 당신을 그만큼 신뢰한다는 뜻이야?”스스로 질문한 자격이 없음을 알면서도 그는 씁쓸하게 물어왔다.고은서는 곽승재의 말뜻을 알면서도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송민아가 비밀번호를 알아낸 과정을 설명했다.그녀와 송민준의 관계가 생각처럼 그리 가깝지 않음을 확인한 곽승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송민준이 어떤 반응을 보였어?”고은서는 들은 대로 전했다.“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있을까?”고은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잘 모르겠어. 만약 그 이유가 아니라면, 송민준이 왜 농장 사건을 조사했을까?”송민준이 C 선생이라 해도 농장과는 무관한 일, 조사 동기가 불분명했다.곽승재는 입술을 깨물며 분석을 이어갔다. “우리가 농장 사건을 파헤친 건 시은 씨가 너를 모함해 여 대표님마저 널 의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잖아.”“내 사람들이 샅샅이 조사했지만 결정적 증거는 나오지 않았어. 전에도 말했지만, 시은 씨가 미리 손쓴 거 같아.”“만약 송민준이 너를 위해 조사한 게 아니라... 이미 그 영상을 확보한 상태였다면?”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쳤다.고은서가 뭔가 깨달은 듯 소리쳤다. “설마 민준 오빠가 시은이 혐의를 숨겨준 장본인이라는 뜻이야?”곽승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
고은서는 송민준의 반듯한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민준 오빠가 정말 뒤에서 나를 죽이려는 사람일까?’통화를 마친 송민아가 들어오면서 둘의 대화는 자연스레 끊겼다. 송민아가 애교 부리며 조른 끝에 송민준의 손에서 의향서를 가질 수 있었다.점심이 거의 끝날 무렵, 고은서가 먼저 계산을 했다.송민준이 한 끼 식사값 정도 낸다고 문제 될 건 없겠지만, 의향서까지 받은 마당에 식사까지 대접받는 건 좀 민망했다.송민준은 고은서가 계산을 한 걸 알고도 기분 상해하지 않고, 오히려 기분 좋게 받아쳤다. “은서야, 그럼 다음번엔 내가 살 기회를 줘.”...의향서는 손에 넣었다지만 그래도 처리할 일은 여전히 많았다.고은서가 일을 마치고 라이트 문 아파트에 돌아온 건 밤 10시가 다 되어서었다.쑤신 팔을 주무르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고은서가 집 앞에 다다르기도 전에, 검은 쓰레기봉투를 든 곽승재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진한 색 셔츠를 입은 곽승재의 옷자락은 허리에 대충 걸쳐져 있었는데 정장 바지와 긴 다리, 쭉 뻗은 체격에서 귀공자의 기품이 풍겨왔다.하지만 그에 비해 낯색은 별로였다. 살짝 찌푸린 미간과 손에 꽉 움켜쥔 검은 쓰레기봉투가 불조화를 이루었다.고은서의 시선을 느낀 곽승재가 고개를 들었다.이 시간에 마주칠 줄 몰랐던 그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는 척 지나가기가 더 어색하다고 느낀 고은서가 말을 건넸다.“쓰레기 버리러?”곽승재는 슬그머니 검은 봉투를 뒤로 숨기며 대답했다.“청소 아주머니가 교체하는 걸 깜빡해서 직접 내다 버리려고.”순간 송민준에게서 받은 영상이 생각난 고은서가 물었다.“지금 별일 없지? 너랑 할 이야기가 좀 있어.”말을 마친 고은서가 곽승재 방으로 가려 하자 곽승재가 막아서며 말했다.“너한테로 가자. 내 방이 좀 지저분해서 그래.”청소 아주머니가 다녀갔다면서 방이 지저분하다는 말에 고은서는 의문스러웠지만 더 묻지 않았다.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재빨리 쓰레기 버리러 계단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
송민아의 말투에 묻어난 야유를 고은서가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송민아는 송민준이 고은서에 대한 호감 때문에 몰래 조사를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고은서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고 여겼다. 송민준과는 특별한 접점이 없을뿐더러 호감이라 하기엔 애매했다. 게다가 송민준은 묵묵히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었다.‘그렇다면 왜 농장 사건을 조사한 걸까?’“그날 은서가 당한 사고가 항상 마음에 걸렸었어.”송민준이 송민아의 질문에 답했다.“그날 내가 늦지 않고 계속 함께 있었다면 은서가 물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 거야. 게다가 여 대표가 은서가 시은 씨를 밀었다고 의심했다는 말에 내가 더 미안해서...”송민준이 사과의 뜻을 전했다.“다만 몇 분이라도 빨리 도착했더라면, 적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봤을 텐데 말이야.”이 설명에도 송민아는 만족스럽지 못한 뉘앙스를 풍겼다.“단지 죄책감 때문이야?”고은서는 송민아가 더 엉뚱한 소리를 해댈까 봐 서둘러 말을 끊었다.“민준 오빠, 그날 일은 어떤 각도로 봐도 오빠 잘못이 아니야. 전혀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어쨌든 진상을 밝혀줘서 고마워. 이 영상 나한테 보내주실 수 있어?”고은서가 조심스레 물었다.“물론이지. 원래도 너 주려고 했었어.”송민준이 웃으며 말했다.“은서야, 이걸 바로 여 대표님께 보여줄 거야?”송민아가 물었다.송민준의 의도가 불분명한 시점에 고은서는 완전히 경계심을 풀 수가 없었다.“아마 재훈 씨는 최근 시은이 회사 설립으로 바쁘실 거야. 이 관건적인 시기에 드리면 내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서 아무래도 개업 축하 파티가 끝나고 나서 다시 얘기하는 게 좋을 거 같아.”“분명 시은 씨가 널 물에 빠뜨리고, 여 대표님의 오해까지 받았는데 넌 뭐 하러 그 사람들을 배려해!”송민아가 화내며 말했다.“내가 봤을 땐 그냥 영상을 보여주고 너를 오해했다는 걸 인지시켜야 해! 오빠, 어떻게 생각해?”송민준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은서도 자기 생각이 있을 거야. 은서의 판단
고은서가 입을 열기도 전에, 멀지 않은 곳에서 송민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송민아와 고은서는 깜짝 놀라며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송민준이 사무실 문 앞에 서서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고은서는 순간 어색함이 밀려왔다. 남의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함부로 만진 데다 지어는 내용까지 훔쳐보다가 주인에게 딱 걸렸으니 말이다.얼굴이 확 붉어진 고은서가 입을 열려는 순간, 송민아가 먼저 물었다.“오빠, 오빠 컴퓨터에 왜 지난번 은서와 여시은 씨가 물에 빠진 영상이 있는 거야?”송민준에게 사과하려는 고은서의 말을 끊은 채 송민아는 재차 추궁했다.“누구한테서 받은 거야? 왜 나한테는 말도 안 해줬어?”고은서 역시 궁금했기에 민망함을 뒤로 한 채 조용히 답을 기다렸다.송민준은 차분히 걸어와 영상을 끈 뒤 담담히 물었다.“민아야, 누가 내 컴퓨터를 함부로 만져도 된다고 허락했어?”송민아도 민망하긴 마찬가지였던지라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그냥 비밀번호가 맞나 확인해보려다가... 미안해. 이 일은 나중에 사과할게. 우선 이 영상 어디서 난 건지부터 말해봐.”송민준은 고은서를 보며 입을 열었다.“은서야, 지난번 곽 대표가 농장 사고를 수사한다는 말을 듣고 나도 사람을 시켜 조사해 봤어. 마침 그날 농장에 있던 관광객이 풍경 촬영 중 우연히 사고 장면을 찍어두었더라고.”송민준은 그 관광객이 급한 일로 고향에 내려갔다가 최근에서야 해성시로 돌아와 그날의 사고 수사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설명했다.“그럼 왜 나한테는 안 알려줬어?”송민아가 불만스럽게 묻자, 송민준은 오늘 아침에야 받은 결과라고 답했다.“안 그래도 은서에게 연락하려던 참이었는데, 너희가 먼저 발견해 버렸네.”이 말을 들은 고은서는 이내 사과했다.“정말 미안해. 민준 오빠....”“비밀번호 푼 것도, 영상 연 것도 나야. 뭐라 할 거면 나한테 해.”송민아가 의리 있게 나서자, 송민준은 의자에 앉아있는 여동생을 흘깃 보며 받아쳤다.“요즘 부모님께 칭찬만 듣다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