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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8화

작가: 류한나
오래 이야기를 나눈 만큼 고은서는 더 이상 민시아와 돌려 말할 생각이 없어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시아 씨, 오늘 저를 찾아오신 건 민시후와 거리를 두라는 말씀이죠?”

민시아는 고은서를 바라보았다.

화장하지 않았음에도 피부는 하얗고 투명하게 빛났고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는 침착함을 머금고 있었다.

고은서는 아름답고 왠지 모르게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은서 씨, 지나치면 반드시 상처를 입게 됩니다.”

민시아가 입을 열었다.

“시후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이미 한 차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상처는 오래도록 아물지 않았고 시후가 세상을 가볍게 여기고 방탕한 삶을 살아온 것도 그 아픔을 감추기 위해서였어요. 그래서 저는 그 애가 은서 씨 때문에 또다시 상처받을까 두렵습니다. 이번에는 버텨내지 못할 거예요.”

민시아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은서 씨가 시후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저는 시후에게 모든 걸 걸어보라고 말했을 겁니다. 하지만 은서 씨는 여전히 전 남편인 곽 대표님과 가깝게 지내고 있고 곽 대표님 역시 은서 씨를 무척 신경 쓰고 있죠. 이런 상황에서 시후는 결국 상처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점점 깊이 빠져들어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차라리 지금 헤어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민시아의 말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고 민시현에 비하면 그녀는 오히려 매우 정중한 태도였다.

“시아 씨, 저랑 시후는 현재 친구일 뿐이에요.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갈 생각은 없습니다.”

고은서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은서 씨를 떠보는 게 아닙니다. 시후 성격 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요. 그 애가 완전히 단념하도록 만들려면 은서 씨가 곽 대표님과 재결합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시후는 원칙이 강한 아이예요. 사랑하는 사람이 이미 다른 연인을 두고 있다면 절대 빼앗으려 하지 않을 거예요.”

고은서는 단호히 거절했다.

“죄송하지만 그렇게는 못 하겠네요. 저는 이미 곽승재와 이혼했습니다. 다시 만날 생각도 없고요. 시후는 저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내던졌어요.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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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은서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서야 병실 문을 두드렸다.송민아가 복도에 나오면서 그녀를 보고 물었다.“뭐하러 갔어? 왜 이리 늦은 거야?”고은서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송민아는 억지로 괜찮은 척하는 고은서를 보면서 그녀가 민시후가 걱정되어서 그러는 줄 알고 저도 모르게 어깨를 토닥여 주며 그녀를 위안했다.“괜찮아. 천천히 얘기 나눠. 시아 언니가 오면 다 내 생각이라고 말해둘게.”고은서는 송민아한테 자세히 설명해줄 힘도 없었는지라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맙다고 말하고는 병실로 들어갔다.민시후는 머리에 붕대를 묶은 상태로 환자복을 입은 채 병상에 앉아 있었는데 약간 초췌해진 것 같았다.병실 불빛 때문인지 그의 모습이 귀공자처럼 느껴졌다.민시후도 입을 꾹 다문 채 걸어들어온 고은서를 관찰하고 있었다.가녀린 몸매와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그녀는 피부마저도 눈처럼 새하얬는데 당장이라도 깨질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는데 쓸쓸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두 눈이 유독 민시후의 마음에 와닿았는데 저도 모르게 가엾다는 생각이 들면서 괴이하게도 달려가 그녀를 안아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민시후, 몸은 어때? 머리는 아직도 세게 아파?”고은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민시후는 고은서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그녀를 빤히 바라보면서 직설적으로 물었다.“송민아 말로는 내가 널 엄청 좋아했다고 하던데? 심지어 포기할 줄도 모른 채 널 쫓아다녔다며?”‘송민아가 일부분 일을 알려준 모양이네.’“왜?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야?”민시후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고은서를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확실히 날 좋아한다면서 쫓아다니긴 했어. 심지어 그 일 때문에 네 가족과 불화도 생겼고. 하지만 그 모든 게 다 송민아한테 보여주기 위한 연기일 뿐이었어.”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민시후는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캐물었다.“이유는?”고은서는 민

  • 어게인, 비긴   제880화

    민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은서 씨의 행동은 이해할 수 있어요. 다만 시후를 만나기 전에 제 말을 잠시 들어줄 수 있을까요?”고은서는 민시아가 일부러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그녀는 송민아에게 메시지를 보내 몇 분 늦을 거라고 알린 뒤 민시아를 따라 비상구 뒤쪽 복도로 향했다.복도에는 밝은 조명이 켜져 있었고 바닥은 반짝일 정도로 깨끗했다.주변은 너무나 조용해 괜히 사람을 답답하게 만드는 분위기였다.고은서가 조용히 물었다.“시아 씨, 하실 말씀이 뭐죠?”고은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민시아가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시아 씨, 이러지 마세요!”고은서는 다급하게 그녀를 부축하려 했지만 아직 다 낫지 않은 등의 상처가 다시 아파졌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밀려드는 통증에 얼굴을 찡그렸다.“은서 씨, 절 부축하지 말고 제 말 좀 끝까지 들어주세요.”그녀의 얼굴에는 결연함이 서려 있었고 민시후와 닮은 눈매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시후가 은서 씨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시후는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은서 씨가 찾아왔을 때만 반응을 보였어요. 그건 시후가 무의식 속에서도 은서 씨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겠죠. 하지만 두 사람은 정말 안 돼요.”민시아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시후는 의리가 깊은 사람이에요. 이미 T 국에서도 은서 씨를 위해 칼을 맞았고 이번에는 목숨까지 버리려 했어요. 앞으로도 또다시 무모한 행동을 할 가능성이 큽니다.”민시아가 계속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보니 고은서는 도저히 이 상황을 견딜 수 없었다.“시아 씨, 제발 이러지 마세요. 그냥 일어나서 말씀하시면 안 될까요?”그러나 민시아는 고개를 저었다.“은서 씨, 우리 집안이 은서 씨한테 큰 빚을 진 셈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은서 씨가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아요. 하지만 시후랑은 인연이 없어요. 시후는 저보다 열 살 넘게 어린 동생이에요. 저는 시후를 동생 이상으로 제 아이처럼 아끼고 있어요. 시후가 또다시 이런 일을

  • 어게인, 비긴   제879화

    이미 송민아가 알게 된 이상 고은서도 부정하지 않고 바로 물었다.“네 생각은 어때? 민시후랑 같이 해외 갈래?”“무슨 소리 하는 거야? 당연히 안 갈 거야!”송민아는 다소 화가 난 듯 말을 이었다.“나랑 시후 오빠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런데 갑자기 해외로 따라간다는 게 말이 돼?”“하지만 네 오빠는 민시후와 감정을 쌓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 같던데?”옆에 있던 박지연이 말했다.고은서도 송민준의 생각을 송민아에게 전했다.“네 오빠는 네가 민시후와 잘 되길 바라는 것 같아. 네가 민시후에게 아직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다면 이번 기회가 괜찮을 수도 있겠지.”“난 그런 기회 따윈 필요 없어!”송민아는 단호했다.“시후 오빠를 좋아했던 감정이 있다고 해도 이미 지난 일이야. 내가 무슨 성녀도 아니고 한 남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 나 자신을 그렇게까지 낮출 생각은 없어. 게다가 내가 모든 걸 바친다고 해도 그게 사랑으로 돌아올 거란 보장도 없잖아. 오히려 원망만 남을 수도 있지.”“정말 현실적이네, 송민아!”박지연은 감탄하며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미안해. 솔직히 말하면 나는 네가 그 사람들 말에 설득당할 거로 생각했어.”“사과할 필요 없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송민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마 다들 내가 그저 감정을 억누르고 있을 뿐 사실은 여전히 시후 오빠를 좋아한다고 생각할 거야. 하지만 난 정말로 다 놓았어.”송민아가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언니를 원망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시후 오빠가 언니한테 보인 태도를 보고 사랑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감정에 따르는 행동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확실히 깨달았어. 시후 오빠가 함께한 시간과 보살핌 때문에 나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해도 그게 사랑이 될 리 없다는 걸 알아. 우리 오빠가 언니를 찾아온 건 언니가 나한테 죄책감을 가질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야. 언니는 줄곧 언니가 내가 좋아했던 사람을 빼앗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잖아. 하지만 이건 언니 잘못이 아니야.

  • 어게인, 비긴   제878화

    “하지만 민아는 예전처럼 무작정 달려들지 않아요.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이 됐으니 시후도 그런 민아를 다시 보게 될 거예요. 더구나 둘이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된다면 시후가 민아에게 마음을 열 확률도 높아질 거로 생각해요.”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람은 외롭고 힘들 때일수록 자신에게 다가오는 온기에 쉽게 흔들리는 법이었다.더구나 해외라는 낯선 환경에서는 그 흔들림이 더할 것이었다.그래서 송민준이 말한 가능성은 생각보다 더 높았다.“부모님은 민아의 파혼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시후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세요. 어릴 때부터 봐온 터라 시후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계시거든요. 우리 두 집안이 혼사를 맺는다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될 거예요.”송민준이 말을 이었다.“은서 씨. 시후 좋아하는 거 알아요. 하지만 시후는 이제 은서 씨를 기억하지 못해요. 그리고 은서 씨도 두 사람이 이어지기 힘들다는 거 잘 알고 계시잖아요. 시후가 해외로 갈 때 민아가 가지 않더라도 아저씨는 다른 여자를 시후 곁에 둬서 두 사람이 이어지도록 할 거예요. 그럴 바에는 민아를 보내는 게 낫지 않겠어요?”“민아 생각은 물어봤나요?”송민준이 고개를 저었다.“아직이요. 그래서 은서 씨가 먼저 말해줬으면 좋겠어요.”고은서는 처음엔 황당한 제안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말을 듣다 보니 화가 줄어들고 그저 답답함만이 남았다.송민아가 민시후를 좋아하는 건 누구보다도 그녀가 잘 알고 있었다.비록 송민아가 이미 마음을 접었다고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다시 흔들릴 수도 있었다.두 사람이 함께 해외로 가 이번 기회에 가까워진다면 민시후가 그녀를 사랑하진 않더라도 그녀의 헌신과 곁을 지켜주는 모습에 감동할 가능성이 높았다.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민시후가 기억을 되찾게 된 후였다.‘나를 위해 목숨도 내던졌는데 다른 여자를 떠밀었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떤 생각을 할까?’고은서가 복잡한 표정을 짓자 송민준은 부드럽게 웃으며 덧붙였다.“은서 씨,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만

  • 어게인, 비긴   제877화

    송민준은 손에 들고 있던 선물을 내려놓으며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한 채 말했다.“민아한테 상황은 들었어요. 시후 병문안 온 김에 겸사겸사 은서 씨도 보러 왔어요.”고은서는 감사 인사를 전한 뒤 그를 자리에 앉게 했고 참지 못하고 물었다.“민시후는 어때요? 괜찮나요?”민시후가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 데다 민씨 가문 사람들도 그녀가 면회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기에 고은서는 지난 이틀 동안 민시후를 직접 보지 못했다.“그럭저럭 괜찮습니다. 다만 몸에 상처가 많아 손과 다리를 쓰는 걸 불편해하더라고요. 게다가 두통도 자주 와서 감정 기복도 심해졌어요.”“민준 씨는 기억하는 거죠?”고은서는 의도적으로 물었다.그녀도 당연히 송민준을 기억하고 있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민시후가 그에게 여전히 예전처럼 경계심을 가지는지 궁금해 직접적으로 묻는 대신 돌려서 물은 것이었다.송민준은 그녀의 의도를 눈치채고 미소를 지었다.“시후가 예전의 불편한 감정들은 잊었는지 저한테는 그럭저럭 예의를 갖추더라고요.”민시후는 이전의 사람들과 사건들을 기억하면서도 유독 그녀와 해성에서 있었던 일만 잊은 것이다.“시현 형이랑 아저씨는 시후를 해외 병원으로 옮길 계획이더라고요.”고은서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송민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뇌 쪽 혈종 문제가 심각해서 선진 기술을 가진 해외에 가서 전문가에게 맡길 건가 봐요. 그편이 시후한테도 좋긴 하죠.”고은서는 순간 멍해졌다.‘민씨 가문 사람들이 민시후를 해외로 보낸다고?’“언제 가요? 그리고 얼마나 있을 예정일까요?”“아마 며칠 안에 출국할 거예요. 얼마나 머물지는 정해지지 않았어요. 병원의 치료 계획과 시후의 회복 상태에 따라 달라질 것 같아요.”민씨 가문이 이렇듯 급하게 민시후를 해외로 보내려는 건 치료 목적도 있지만 그녀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어쩌면 이전에 민시아가 북성으로 데려가겠다고 한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었다.고은서는 머리로는 이 상황을 이해했지만 마음이 아려왔다.하

  • 어게인, 비긴   제876화

    민승호는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민시현은 가차 없이 물었다.“여긴 왜 오신 거죠?”고은서는 솔직히 답했다.“시후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어서 보러 왔어요.”민시현의 목소리는 냉랭했다.“은서 씨도 시후 상태가 어떤지 잘 알겠죠. 두 사람 사이의 일은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을 테니 앞으로는 이렇게 방해하러 오지 마세요. 완전히 인연을 끊으면 더 좋겠네요.”“아저씨! 시현 오빠!”고은서가 답하기도 전에 송민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송민아를 보자 민시현의 태도는 조금 누그러졌고 민승호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민아도 시후 보러 왔니? 시후가 많은 걸 잊어도 너에 대한 기억은 또렷한 걸 보니 네가 시후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었던 거 아닐까?”민승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송민아는 옆에 있던 고은서를 흘끗 보더니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답했다.“아저씨, 이제 더 이상 그런 농담 하시면 안 돼요. 시후 오빠가 모든 기억을 잃은 것도 아닌데 저와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는 건 당연하죠. 하지만 저는 정말 오빠를 완전히 내려놓았어요. 그러니까 절대 저희 두 사람 다시 이어주려고 하지 마세요!”민승호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나는 정말로 네가 마음에 들었어. 우리 막내며느리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시후 저 녀석이...”송민아는 이에 답하지 않고 그저 웃으며 말했다.“아저씨, 시현 오빠. 저랑 은서는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말을 마친 송민아는 고은서의 팔을 잡고 함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우리 집안과 민씨 가문은 원래 친분이 깊어. 아저씨도 나를 좋아해서 시후 오빠와 결혼시키고 싶어 하셨던 거야. 너를 난처하게 만들려고 한 건 아니야.”“위로하려고 그러는 거면 안 해도 돼. 뭐든지 각오하고 있었어.”“시현 오빠가 너한테 심한 말한 건 아니지?”송민아가 자책했다.“좀 더 참을 걸 그랬어. 널 병실에 바래다주고 화장실에 갔어야 했는데...”고은서는 송민아의 표정과 말투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그게 무슨 상관이야. 화장실

  • 어게인, 비긴   제875화

    송민아는 고은서가 눈을 크게 뜨고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보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막 입을 열려던 찰나 민시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서 씨, 미안해요. 시후가 깨어나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에요. 의사도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고 해서 제가 미처 시후한테 모든 걸 설명하지 못했어요.”고은서는 충격에서 벗어나 침착함을 되찾았다.그녀도 처음 깨어났을 때 뇌진탕 때문에 사고 당시의 기억이 없었다.민시후도 같은 상황일 가능성이 컸다.“괜찮습니다.”고은서는 요동치는 감정을 억누르며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제가 신중하지 못했네요. 이럴 때 방해해서 죄송해요. 민시후, 푹 쉬어. 우린 먼저 가볼게.”고은서의 말이 끝나자 민시후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잠깐, 왜 우리 두 사람이 같이 있다가 사고가 일어난 건지 아직 설명 안 했잖아.”사고라는 말에 고은서는 본능적으로 움찔했고 사고 당시의 장면이 떠올라 숨이 막혀왔다.“미안해. 다 나 때문이야.”고은서의 말을 들은 민시후의 눈가에 의심이 스쳤다.“설마 너랑 곽승재가 짜고 치는 연극은 아니지?”고은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역시 민시후다운 생각 방식이었다.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의 의도를 몇 번이나 의심했던 그였다.‘정말 나를 기억하지 못하나 보네.’고은서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실망, 허탈함과 깊은 죄책감이 그녀를 뒤덮었다.민시후가 이렇게 된 건 모두 본인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코끝이 시큰해진 고은서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먼저 쉬어. 나중에 다시 올게.”그렇게 말하고는 고은서는 송민아와 함께 병실을 나왔다.병실을 나와 복도를 걸어가던 고은서는 옆에 있던 의자에 힘없이 앉아버렸다.“은서야, 괜찮아?”송민아가 걱정스럽게 묻자 고은서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시후 상태 알고 있었어?”송민아는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솔직히 답했다.“시아 언니가 어제 민시후가 기억을 잃었다고 알려줬어. 병원에 와 보라고 해서 와서 확인했더니 최근

  • 어게인, 비긴   제874화

    “너 표정 왜 그래? 무슨 일 있어?”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박지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무것도 아니야. 송민아가 좀 이따 올 거야. 너랑 같이 민시후 보러 갈 거라고 하더라.”고은서는 마음이 따뜻해졌다.“민아는 내가 민시후 형 때문에 곤란해질까 봐 걱정하는 거겠지? 정말 다정하네.”얼마 지나지 않아 송민아가 도착했다.고은서는 곧바로 민시후를 보러 가자고 했지만 송민아는 잠시 망설이며 박지연과 눈을 마주쳤다.“왜 그래? 너희 둘 다 왜 이렇게 수상해?”고은서가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아무것도 아니야. 가자.”송민아가 고은서의 팔을 살짝 부축했다.고은서도 두 사람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일단 민시후를 만나고 나서 추궁하기로 했다.고은서와 송민아가 병실 앞에 도착했다.병실에는 어제보다 사람이 적어진 것인지 한결 조용했다.송민아가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민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오세요.”거의 일주일만이었다.드디어 다시 민시후와 대화할 수 있다는 생각에 고은서는 왠지 모를 설렘을 느꼈다.송민아가 병실 문을 열자 안에는 민시아와 민시후 남매 둘 뿐이었다.고은서는 민시아에게 인사할 겨를도 없이 곧장 민시후에게 시선을 돌렸다.어젯밤 문틈 사이로 보았을 때보다 확실히 상태가 나아 보였다.그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아 있었고 앞에는 작은 간이식탁이 놓여 있었다.식사가 차려져 있었지만 민시후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듯했다.민시후는 아무것도 덮지 않은 채로 붕대를 감은 다리를 그대로 드러냈다.송민아가 말해줬던 대로 민시후는 머리 부상 외에도 팔과 다리가 골절되었다.그날 밤의 사고가 떠오르자 고은서의 눈가가 붉어졌다.“왜 또 왔어?”힘없는 민시후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내 앞에서 그만 알짱대.”놀란 고은서가 고개를 들자 민시후의 말은 고은서가 아닌 송민아를 향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은서는 지금 이 상황이 의아했다.‘송민아는 이미 오래전에 민시후를 향한 감정을 정리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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