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시후는 다시 등을 기대고 다리를 꼰 자세로 앉으며 말했다.“십중팔구 알고 있을 거야. 알면 어때. 자기 눈이 삐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지. 투자자라는 사람이 그렇게 큰 실수를 한 건 본인이 알아서 책임져야지.”고은서는 잠시 침묵했다.“네가 백씨 가문에 보낸 그 원지훈이라는 사람, 최근에 큰 거래를 성사했던데 네 계획이야?”민시후가 태연히 물었다.고은서는 굳이 숨기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나는 받은 대로 돌려주는 것뿐이야.”“받은 대로 돌려주는 고은서라니. 정말 내 맘에 쏙 들어.”민시후가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걱정하지 마. 내가 확실히 도와줄 테니까.”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온 고은서는 원지훈에게 전화를 걸어 최근 백씨 가문 산업에 이상이 없는지 물었다.백유미가 민시후까지 조사했다면 분명 고은서가 이 사건에 연관되어 있음을 알았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원지훈까지 의심할 가능성도 있었다.이전에 원지훈과 가깝게 지내고 거래 내역까지 있으니 백유미의 눈에 띌 가능성이 높았다.백유미와 원지훈이 서로 물고 뜯는 상황을 고은서는 즐기고 있었다.어차피 원지훈과의 협력은 이미 목적을 달성했다.백유미가 원지훈의 배신을 알게 된다면 반드시 그를 처단하려 할 것이고 원지훈은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항할 것이다.여기에 아들 바보인 원지훈의 어머니 범가온까지 가세하면 백유미의 상황은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그들끼리 내분이 일어나면 고은서는 그 틈을 타서 그들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세 사람 중 좋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이전 고은서가 원지훈에게 약속했던 건 단지 그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미끼였을 뿐 그녀는 원지훈과 범가온을 그냥 둘 생각이 없었다.그녀의 질문에 원지훈의 목소리는 다소 떨리고 있었다.“특별한 움직임은 없었어요. 새로운 거라도 발견한 거예요?”‘전생의 원지훈은 냉혹하고 잔인한 인물이었는데 왜 갑자기 겁먹은 듯한 반응을 보이는 거지? 뭘 두려워하고 있지?’고은서는 의아했지만 민시후가 알아낸 사실은 말하
다행히 이 사건이 폭로된 후 보복이 두려웠던 그 여자는 남자 친구와 함께 해성을 떠났기에 백유미는 그들에게 닿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그 여자가 퇴사하고 해성을 떠났다고 해서 내가 못 찾을 거로 생각하지 마. 네가 이 일과 연관된 걸 내가 알게 되면 너랑 네 엄마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백유미는 협박을 마치고는 원지훈의 가슴을 걷어차고 그제야 사무실 의자에 앉았다.이미 심하게 맞아 정신이 없던 원지훈은 백유미의 이어진 발길질에 피를 토하고 말았다.범가온은 계속 몸부림치며 신음하다 백유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구했다.백유미는 물티슈로 손가락을 닦으며 일말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원지훈은 피를 토하고 나서 애원하기 시작했다.“누나, 제가 잠시 돈에 눈이 멀었어요. 돈 없는 가난한 삶을 더는 살고 싶지 않아서 고은서 말을 들었던 거예요. 앞으로는 다시는 이런 짓 안 할게요. 누나한테 충성하며 살 테니 제발 한 번만 살려주세요.”범가온도 원지훈과 함께 울며 애원했다.백유미는 그들 모자가 피가 날 정도로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빌도록 내버려뒀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백유미는 사무실에 있던 덩치 큰 남자들에게 나가라고 했다.“고은서와 손잡고 있었다면 고은혜 일도 거짓이었던 거야?”백유미가 물었다.원지훈은 더 이상 숨길 생각을 하지도 못하고 피눈물을 흘리며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그녀에게 건넨 사진과 동영상은 모두 합성된 것이었으며 고은서가 그날 밤 모든 영상을 갖고 있다고 했다.만약 고은혜의 부적절한 영상이 유출되면 고은서는 이를 증거로 사용할 것이라고 했다.백유미의 얼굴은 분노로 차갑게 굳어졌다.그녀는 자신이 길들인 개가 고은서가 던진 유혹에 넘어가 자신을 물어뜯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은서 대단하네. 원지훈을 이용해서 나를 함정에 빠트리다니.’며칠 전 그녀는 전자 프로젝트가 민시후의 함정이었음을 알아냈다.민시후와 고은서의 관계를 떠올리자 백유미는 이 모든 것이 고은서가 자신을 위해 꾸민 함정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
오후에 고은서와 송민아가 클라이언트를 만난 후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민시후는 이미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밥 꼭 먹어야겠어?”고은서가 묻자 민시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먹어야 해.”두 사람은 차를 타고 해성에서 이름있는 한식당으로 향했다.이곳은 무조건 예약해야 하고 회원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종업원은 그들을 2층의 별실로 안내했고 민시후의 형은 아직 오지 않은 상태였다.곧 맞이하게 될 청문회를 떠올리자 고은서는 한숨을 내쉬었다.‘민시후랑 아무 사이도 아닌데 왜 꼭 집안의 반대로 헤어져야 하는 커플 같지?’민시후는 고은서의 무력함과 긴장감을 알아차리고 말했다.“걱정하지 마. 방어용 스프레이는 미리 준비했으니 상황이 좋지 않으면 바로 사용해.”말을 마친 민시후는 그녀에게 펜처럼 생긴 물건을 건넸다.고은서는 잠시 멈칫했다.“형이 공직에 있는 사람이라며? 왜 방어용 스프레이가 필요한 거야?”민시후는 드물게 표정을 찡그린 채 진지하게 말했다.“형이 겉으로는 공직에 있지만 사실은 뒤 세계에 있는 조직이랑 결탁해서 무서울 게 없는 사람이야. 평소에도 세 명 이상을 데리고 다니는데 다들 싸움을 잘해. 만약 여기서 얘기가 잘 안 풀려서 난장판이 되면 너도 방어할 만한 물건 하나는 있어야지.”“농담이지?”“푸하하!”민시후는 고은서의 경계하는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고은서, 너 정말 순진하다. 내가 말하는 대로 믿는 거야? 하하하.”“민시후, 정말 돌았어?”고은서는 화가 나서 그의 다리를 차려고 했다.민시후는 민첩하게 한발 물러서며 공격을 피했다.고은서는 화가 나서 샌드백을 치는 자세로 다시 한번 그에게 주먹을 날리려고 했다.하지만 민시후는 빠르게 그녀의 팔을 잡고 자신 쪽으로 당기며 농담을 던졌다.“고은서, 그 정도 실력으로 나랑 싸우려고?”“너...”화가 난 고은서가 민시후를 밀어내려 했지만 바로 그때 방문이 열리며 정중한 목소리가 들렸다.“두 분 안으로 드시죠.”고은서가 고개를 돌렸다.문 앞에
직원이 떠나자 그들은 그제야 테이블에 착석했다.테이블은 고급 실목 원탁으로 고풍스러웠으며 과일과 견과류가 놓여있었고 꽃병에 생화도 꽂혀 있고 디퓨저도 놓여 있었는데 매우 우아했다.고은서가 옆자리에 앉자 민시후는 그녀의 오른쪽에 앉으며 자연스럽게 과일 한 조각을 건네며 말했다.“과일이라도 먹어. 기절하지 말고.”고은서는 그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지만 민시후는 손을 내리지 않고 과일을 들고 있었다.민시현과 곽승재가 바라보고 있는 상황에 계속 어색한 분위기를 유지하기는 싫어 고은서는 어쩔 수 없이 과일을 건네받아 한입 물었다.“달아?”‘나쁜 놈! 나를 부끄럽게 만들려고 작정한 거야!’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테이블 아래에서 그에게 발길질했다.아픔을 느낀 민시후가 이를 악물었다.고은서가 정말 화났다는 것을 깨달은 민시후는 더 이상 장난을 치지 않았다.그리고 그 장면을 본 민시현과 곽승재는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다.민시현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지만 곽승재의 안색은 조금 어두워졌다.“곽 대표님, 앉으세요.”민시현이 말했다.“편하게 대해주세요.”곽승재는 시선을 돌리며 고은서의 왼쪽에 앉았다.“자리도 많은데 좀 떨어져서 앉지?”민시후가 바로 말했다.곽승재는 묘한 표정으로 민시후를 쳐다보며 말했다.“여기 앉는 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시후야, 예의 좀 지켜.”민시현이 엄한 목소리를 내었다.민시후는 반박하려 했지만 고은서가 그를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민시후, 과일 더 줘.”고은서의 말에 곽승재의 기운은 한층 더 무겁게 변했다.고은서는 일부러 이런 상황을 만든 게 아니었다.그녀는 단지 민시후와 민시현이 더 이상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지 않게 하려고 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이미 말해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이제 곽승재는 남편도 아니니 그의 기분을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고은서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민시현과 곽승재와 실랑이하지 않고 과일을 그녀 앞에 놓으며 말했다.“다 먹어.”“고마워.”고은서는 자두 한 알을 골랐다.“밥 먹기
고은서는 민시후와 곽승재가 건넨 음식을 먹는 대신 야채를 집으며 입을 열었다.“내가 알아서 먹을 테니까 신경 쓰지 마.”민시후는 살짝 불만을 표했다.“고은서, 처음으로 여자한테 이렇게 다정하게 대하는데 기회조차 주지 않는 거야?”고은서는 민시후를 향해 눈을 흘겼다.그러자 민시후는 금방 태도를 바꿨다.“알았어. 알았어. 그만할 테니까 많이 먹어.”곽승재는 입술을 짓씹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민시현은 그 장면을 지켜보며 무표정하게 식사를 이어 나갔다.식사가 끝날 때까지 민시현은 민시후와 그녀의 사이를 묻지 않았다.고은서는 민시현이 이미 그녀의 상황을 알아보고 민시후와의 관계도 얼마간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오늘 이 자리는 커플이라고 생각되는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하는게 아니라 우회적으로 민시후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경고하는 자리네.’어차피 정말 민시후와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기에 민시현이 어떤 행동을 하던 고은서는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식사가 끝나자 고은서는 자신의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하며 일어섰는데 종업원이 따뜻한 차를 내왔다.민시현이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은서 씨, 시간도 아직 이른데 차 한 잔 하시면서 입가심하시죠.”“됐어! 그만 해! 저녁 내내 가면 쓰고 있는 거 답답하지도 않아?”고은서가 뭐라 하기도 전에 민시후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민시현,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어. 그냥 고은서랑 곽승재 사이를 나한테 다시 상기시켜 주고 싶었던 거잖아. 미리 얘기하는데 난 그런 것들 신경 안 써. 나는 고은서가 좋아.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나랑은 상관없어.”“너!”하지만 민시후는 민시현이 뭐라 할 틈도 주지 않고 고은서의 가방을 들고 입을 열었다.“가자.”건물 밖으로 나와 신선한 공기를 맡으니 고은서는 숨이 조금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이번 식사는 정말 숨 막힐 뻔했다.“배 안 불렀지? 네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다시 먹으러 갈까?” 민시후가 차 문을 열며 물었다.“배불러!”고은서가 차에
민시후가 진심 어린 말투로 말하면서 약간 억울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고은서는 순간 자신이 너무 심했나 하는 생각까지 들면서 마음이 약해졌다.‘송민아와의 약혼을 무효로 하면서 각종 시끄러운 일이 생긴 게 알고 보면 내 탓도 있는데.’“민시후, 나...”“쯧, 고은서, 이거 봐. 끝내는 나랑 말을 걸 거면서.”민시후가 장난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민시후, 너 진짜!”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때렸다.한때 격투기를 배웠는지라 주먹의 힘이 꽤 셌는데 그녀는 민시후가 당연히 피할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나 그녀의 예상과 달리 민시후는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았다.“너 괜찮아?”고은서가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아직도 화 안 풀렸어?”민시후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힘 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고은서는 약간 어이가 없었다.“제발 이상한 짓 좀 그만해.”“고은서, 왜 자꾸 내가 장난친다고만 생각하는 거야? 편견 버리고 나 좋아해 주면 안 돼?”민시후가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너...”“은서야!”바로 이때, 곽승재의 부름 소리가 들려왔다.그는 성큼성큼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곽승재가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고은서는 더는 그를 상대하기 싫었다.“얼른 돌아가.”그녀는 민시후한테 한마디만 남기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곽승재가 그녀를 따라가려고 할 때 민시후가 그의 앞에 막아섰다.“곽승재, 고은서가 널 싫어하는 거 몰라서 이러는 거야? 이미 이혼한 주제에 그만 좀 집착해.”“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곽승재의 얼굴빛이 순간 차가워졌다.“적어도 고은서는 날 싫어하지 않고 나와 가까이 지내는 걸 꺼려하지 않...스읍!”민시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곽승재의 주먹이 먼저 날려왔다.곽승재는 방금전에 민시후가 룸에서 고은서한테 자신에게 기대라 할 때부터 그를 패고 싶었다.그런데 고은서를 향해 아양을 떠는 것도 모자라 이젠 그한테 시비까지 걸다니.
밖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곽승재였다.고은서는 별로 놀랍지 않았다.‘딱 봐도 민시후에 관해 물으려고 찾아온 거겠지.’그러나 고은서는 곽승재에게 자신의 개인적인 일까지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그녀는 모르는 척 그를 무시할 생각이었다.그러나 곽승재는 이내 초인종 대신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이웃 사람들이 소음 소리를 참지 못하고 신고를 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파트 관리 인원이 찾아와서 그를 제지했다.그러나 곽승재는 일부러 그들 앞에서 불쌍한 척했다.“제 아내가 저한테 화나서 저를 쫓아냈거든요.”그의 속임수에 넘어간 관리 인원들은 그 대신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사모님, 대화로 푸시고 얼른 문 여세요. 이웃 주민들도 휴식해야지 않겠습니까.”고은서는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었다.문밖에는 아파트 관리 인원 두 명과 셔츠만 입은 채 외투를 손에 들고 있는 곽승재가 서 있었다.곽승재는 피곤한 기색을 하고 서 있었는데 턱에 있는 상처까지 더하니 얼핏 보면 진짜 아내랑 싸우다 집에서 쫓겨난 남편 같았다.‘밥 먹을 때까진 괜찮더니 아까 아파트 단지 밑에서 둘이 또 싸운 거야?’“제 남편 아니에요. 일을 처리하기 전에 먼저 사실여부를 확인하는 게 우선이 아닌가요? 그리고 보안 좀 강화하세요. 아무 사람이나 함부로 막 들여서 되겠어요?”고은서가 관리 인원들을 향해 말했다.관리 인원 두 명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민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먼저 가보세요. 제가 담당자한테 얘기해 놓을게요.”원래도 곽승재를 보자마자 그의 범상치 않은 기품에 주눅이 들었던 관리 인원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내가 아주 확실하게 말한 것 같은데. 날 다신 찾아오지 말라고.”고은서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고은서, 너 정말 민시후 좋아하는 거야?”곽승재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역시나 또 민시후였어.’“당신이랑 무슨 상관인데?”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우린 이미 이혼한 사이야. 내가 누구랑 결혼하든...우읍!”그러나
곽승재는 순간 절망에 빠졌다.그는 두 사람 사이가 이대로 끝났다는 걸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다.‘나한테 정말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은 거야?’곽승재는 고은서를 한참 뚫어지라 쳐다보다가 뒤돌아 떠났다....그 후로 거의 두 주일 동안 곽승재는 고은서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민시후도 회사 일로 바삐 보내면서 그녀를 쫓아다니며 성가시게 굴지 않았다.그사이 고은서는 송민아를 데리고 제인 제약 투자 계약서를 완성했고 자세한 부분도 여러 담판을 거쳐 수정했다.이젠 정식으로 사인하고 계약을 체결만 하면 됐다.주인혁은 백주 앰버서더에 관한 계약서를 체결하기 위해 명운에 왔다가 그녀와 함께 밥 먹으러 가자고 약속했다.쌍방은 목적이 아주 명확했고 계약도 순리롭게 체결되었다.고은서는 주인혁과 밥 먹으러 가면서 도아름과 주인혁의 매니저까지 함께 가자고 불렀다.밥 먹을 때 매니저는 요즘 들어 주인혁한테 엄청 많은 요청이 들어온다면서 팬덤도 점점 안정되어 가고 있다고 했다.“한창 상승기라서 스캔들만 나지 않는다면 엄청 대박 날 애예요.”고은서는 매니저의 뜻을 단번에 알아차렸다.자선 파티 때 주인혁이 그녀를 엄청 많이 챙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사준 정장까지 입었는데 매니저도 은근슬쩍 눈치를 챈 모양인 것 같았다.그는 행여나 두 사람에 관한 스캔들이 날까 봐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저도 주인혁이 자신의 꿈을 꼭 실현할 거라고 믿고 있어요. 게다가 머리도 좋아서 사리 분별도 잘할 거예요.”고은서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주인혁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꼭 정상에 오르겠다고 약속했다.“지키고 싶은 사람을 지킬 수 있을 때까지 노력할게요.”레스토랑에서 나오면서 도아름이 고은서를 보며 장난삼아 입을 열었다.“은서 씨, 저 남자애가 지키고 싶다고 한 사람이 은서 씨 맞죠?”고은서도 주인혁이 자신에게 남다른 감정을 품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전에 한 번 도와줬었는데 그 일로 제 이미지에 오해가 생긴 것 같아요.
범가온은 원래 이기적이고 거칠기 짝이 없는 여자였다.아들을 잃고 희망이 사라진 그녀가 이제는 손자마저 잃었으니 얼마나 미쳐 날뛸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고은서가 박지연에게 물었다.“백유미 지금 상태는 어때?”“유산도 했고 가위에 찔려서 과다 출혈로 응급실로 실려 갔어. 치료가 늦어지면 목숨도 위험할 거야. 백승엽이 곽승재한테 찾아가 백유미를 더 좋은 병원으로 옮기고 의사도 바꿔 달라고 부탁했는데 곽승재가 아예 만나주지도 않았대. 아마 곽승재 아버지한테 가서도 부탁하겠지. 그쪽에서 신경 써 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곽현수는 백유미가 자기 일을 대신 처리해 준 적이 있으니 완전히 외면하지는 않을 터였다.게다가 백승엽과의 오랜 신뢰 관계도 있으니 백유미가 죽게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아마 백유미도 이 점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에게 그런 극단적인 짓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고은서는 박지연과 몇 마디 더 나눈 뒤 전화를 끊었다.민시후는 백유미의 일에 별 관심이 없었다.백유미가 비참하게 사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했기에 그는 따로 의견을 내지 않았다.대신 그는 고은서가 흥미를 느낄 만한 이야기를 꺼냈다.“너 전에 청풍이라는 밴드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어? 내일 그 밴드가 해성에서 공연한데. 같이 보러 가자.”고은서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형 만나야 하잖아. 내일도 나랑 연락할 수 있을까?”민시후가 콧방귀를 뀌었다.“아무리 형이라도 나를 좌지우지할 권리는 없어. 맨날 상사처럼 나한테 훈계질이야. 듣기 싫어 죽겠어. 그러니까 그냥 내일 저녁 같이 밥 먹고 공연 보러 가는 걸로 하자.”“네 형은 더더욱 내가 너한테 나쁜 영향을 준다고 확신하겠네.”“그렇게 생각해도 상관없어.”민시후가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네가 내 인생에 미치는 영향력을 빨리 인정하면 내 연애를 막아보겠다는 헛된 꿈도 빨리 포기하겠지.”“나 거절해도 돼?”“안 돼!”결국 고은서는 민시후와 함께 공연을 보러 가기로 했다.한편으로는 민시후를 도저히 이길 수 없었기 때
두 사람은 음식을 주문한 후 요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요리가 나오자 두 사람은 식사를 즐겼고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민시후가 입을 열었다.“이번 출장에서 유일 투자은행을 대신해 백씨 가문 산업에 있던 고객들과 접촉했어. 유일 투자은행이 가진 능력을 확인한 후 그쪽에서 협력을 계속 이어가기로 했으니까 직원들에게 후속 조치를 하라고 하면 돼.”민시후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순간 얼어붙었다.‘출장을 다녀온 게 나를 돕기 위해서였어?’“그냥 겸사겸사 진행한 거야. 미래 투자은행에도 진행할 프로젝트가 있었거든.”민시후는 그녀의 생각을 눈치채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덧붙였다.“그리고 백유미 말인데. 우리 쪽에서 한 의사를 찾아냈어. 그 사람이 당시 정신 감정이 조작된 거라고 증언할 수 있어. 하지만 지금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게 감옥에 갇혀 있는 것보다 나을 거야. 그러니까 이 증거는 당장 쓰지 말고 필요할 때 꺼내 써.”고은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감동이 밀려왔다.“민시후, 고마워.”“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부담 가질 필요도 없고.”민시후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겉으로 보면 내가 널 돕는 것 같지만 사실 나를 돕는 거야. 네가 돈을 많이 벌어야 나랑 제대로 연애할 생각이 들지.”고은서는 그런 민시후를 바라보았다.평소에 보내오는 시선만으로도 그의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가늠되지 않았는데 눈동자까지 반짝이며 말하는 그를 보자 그의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도저히 상상되지 않았다.“그래도 고마워.”고은서가 말을 마치자 핸드폰이 울렸다.박지연에게서 온 연락이었다.박지연은 다른 도시에 다녀오느라 휴가를 냈었는데 요즘 그 휴가로 인한 당직을 서느라 바빴다.시간이 나도 육현석과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이렇게 연락 오는 일은 드물었다.“지연아, 무슨 일이야?”“은서야, 방금 육현석이 알려줬는데 백유미가 애를 지웠대!”박지연의 목소리가 컸던 탓에 옆에 있던 민시후도 자연스럽게 듣게 되었다.민시후와 시선을 마주한 고은서가 다시 박지연에게 물었다.“어떻게
송민준은 눈앞에서 금방이라도 싸울 듯한 두 형제를 바라보며 적절히 나서서 민시현을 말렸다.“형, 같은 가족끼리 싸우지 말고 시후랑 따로 시간 잡아서 얘기 나누시는 게 좋겠어요.”민시현도 지금 대화를 나누기엔 적절한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민시후를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저녁에 집으로 갈게.”하지만 민시후는 그를 무시한 채 고은서의 손을 잡고 곧장 그들 앞을 지나쳤다.주차장으로 돌아와서도 민시후는 여전히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괜히 기분만 잡쳤네. 멀쩡히 잘 있다가 저 두 사람을 만날 줄이야...”반면 고은서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민씨 일가 사람들이 원래부터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이런 반응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이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닐 테니 말이다.“저녁에 형이 찾아온다는데 제발 싸우지 좀 마. 네 형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틀린 말도 아니잖아.”그녀는 오히려 민시후를 위로하듯 장난스럽게 말했다.“재벌 집 도련님이 주변에 수많은 훌륭한 여자들을 두고 굳이 곽승재의 전처를 좋아한다면 나라도 나서서 반대했을걸?”“넌 왜 너를 그렇게 낮춰서 말해?”민시후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다.“날 낮추는 건 아니야. 다만 현실을 외면할 수도 없지. 난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신분 때문이 아니라 감정적으로도...”“은서야, 그만해.”민시후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 얘기는 수도 없이 했어. 넌 날 설득 못 해. 네가 날 덜 좋아해도 상관없어. 내가 널 더 많이 좋아하면 되니까. 자, 밥 먹으러 가자.”가는 길에 민시후는 여시은을 떠봤던 결과를 물었다.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별 소득 없었어. 여시은이 곽승재를 정말 좋아하는지 아닌지 모르겠어.”“여자들 직감이 그렇게 예리하다면서 너는 직감이 고장 난 거 아냐?”민시후가 놀리듯 말했다.고은서도 자신이 둔감해졌다고 느꼈다. 예전의 그녀라면 곽승재 주변에 작은 변화만 있어도 곧바로 경계 태세를 갖췄을 텐데 지금은 그냥 그런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마음뿐
노을의 황금빛이 호수 위로 내려앉으며 물결이 반짝이는 보석처럼 빛났다.장난기가 발동한 고은서가 두 손을 벋어 저 멀리 호수 위의 부서진 다이아몬드 조각과 햇살을 한데 모아 손안에 담으려는 듯했다.멀지 않은 곳에서 차에서 내리던 민시후가 그 장면을 보게 되었다.고은서는 고풍스러운 회랑 위에 흰색 니트에 연한 색의 롱스커트를 입고 긴 머리는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채 서 있었다.가녀린 손을 뻗으며 무언가를 잡으려는 그녀의 모습은 저녁노을이 드리운 호수 풍경과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주황빛 석양이 그녀의 얼굴과 머리카락까지 물들여 그녀의 존재 자체가 빛을 머금은 듯한 아름다움을 뿜어냈다.그 순간 민시후는 먼 훗날 이 장면을 떠올리더라도 여전히 설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민시후, 거기서 뭐 해?”앞쪽에서 들려온 고은서의 청아한 목소리에 민시후는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로 걸어갔다.“미안, 늦었지.”“괜찮아, 나도 방금 왔어.”“은서야, 손을 뻗어서 잡은 게 뭐야? 나도 좀 나눠 줄래?”고은서는 민시후의 장난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그 눈빛을 보고 자신이 아까 허공에 손을 뻗었던 모습을 떠올렸다.순간 얼굴이 뜨거워진 고은서가 민시후에게 눈을 흘겼다.“공기야. 줄까?”그러자 민시후는 두 손을 공손히 내밀며 진지하게 말했다.“네가 주는 거라면 뭐든 좋아.”고은서는 어이없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시후야, 은서 씨?”그 순간 회랑 너머에서 익숙한 송민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가 고개를 돌려보자 송민준의 옆에는 강한 위압감을 풍기는 민시현도 함께 있었다.그들 뒤로는 레스토랑 직원들과 비서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이 따라오고 있었다.고은서가 반응할 틈도 없이 민시후는 재빠르게 고은서를 등 뒤로 감쌌다.“여긴 무슨 일이야?”민시후의 표정이 한순간에 굳어졌다.‘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레스토랑으로 예약할걸. 좋던 분위기 다 깨졌네.’민시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송민준이 다른 사람에게 먼저 자리를 뜨라고 제스처를 보낸 뒤
서연정의 질문에 고은서는 왠지 모르게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어제 그 남자는 분명 서연정을 향해 호감을 보였고 당시 고은서는 곽승재가 그 장면을 보고 불필요한 오해를 할까 봐 무의식적으로 그 사실을 숨겼다.“죄송해요, 어머니.”서연정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은서야, 널 탓하는 건 아니야. 넌 착한 아이니 나랑 승재의 관계가 썩 좋지 않다는 걸 알고 혹시 불필요한 오해로 갈등이 깊어질까 봐 말하지 않은 거겠지.”서연정이 말을 이었다.“어제 그 친구와는 꽤 오랜 인연이 있어. 예전에 Y 국에서 일했는데 최근에야 귀국했어.”서연정이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고은서는 그 남자가 서연정 때문에 귀국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걸 눈치챘다.담담하면서도 온화한 서연정의 표정을 바라보며 고은서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어머니, 그분 혹시 어머니 좋아하시나요?”서연정은 가볍게 웃었다.“우리 나이쯤 되면 좋아한다는 감정에 그리 열정적이거나 충동적이지 않아. 그 사람은 젊을 때 우리 아버지의 신세를 졌고 오랜 세월 나를 가족처럼 생각해 왔어.”고은서는 순간 곽현수도 알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또한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게 그 사람 때문인지도 묻고 싶었지만 고은서는 궁금증을 꾹 참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서연정은 마치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랑 승재 아버지 사이의 문제는 다른 사람이랑 상관없어.”고은서도 두 사람의 갈등이 단순한 오해나 제삼자로 인해 생긴 것이 아니라 훨씬 깊고 복잡한 문제 같았다.그때 곽승연이 다가오며 둘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끝났다.전시회 관람을 마치자 이미 오후였다.서연정이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고 제안할 때 마침 고은서의 전화가 울렸다.민시후에게서 온 연락이었다.“은서야, 나 출장 끝나고 돌아왔어.”민시후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그리고 네게 전할 소식이 하나 있어.”“무슨 소식인데?”고은서가 묻자 민시후는 장난스럽게 말했다.“궁금하면 시간 내서 이 도련님이랑 밥이
그 말에 서연정의 얼굴에서 모든 감정이 사라졌고 담담하고 냉랭한 표정으로 위층으로 올라갔다....다음 날 일요일 아침 고은서는 서연정의 연락을 받았다.그녀는 해성에서 그림 전시회가 열리는데 곽승연을 데려가 보고 싶다며 함께 갈 시간이 있는지 물어왔다.서연정이 곽승연을 데리고 호원 저택으로 옮긴 이후로 고은서는 두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게다가 서연정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해 보여서 고은서는 함께 가기로 했다.고은서가 전시장에 도착했을 때 서연정과 곽승연은 이미 와 있었다.“언니!”오랜만에 만난 곽승연은 그녀를 보자 기뻐했다.“승연아, 어머니.”고은서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언니! 이거 제가 그린 그림인데 선물로 줄게요.”곽승연은 그림을 내밀었다.고은서가 받아 보니 그것은 지난번 본가에서 자신이 드럼을 치던 장면을 그린 것이었다.비록 단순한 그림이었지만 당당한 그녀의 자태가 잘 표현되어 있었다.“고마워, 승연아. 정말 잘 그렸네. 너무 마음에 들어.”고은서는 그림을 소중히 가방에 넣었다.“갖고 싶은 선물 있으면 언니가 사줄게.”곽승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그냥 빨리 건강을 회복해서 언니처럼 내가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고은서는 안쓰러운 마음에 그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승연아, 금방 좋아질 거야. 우리 들어가서 전시회 보자.”그림을 좋아하는 곽승연은 난해해 보이는 예술 작품도 깊이 빠져들어 감상했다.그녀가 몰입해서 감상하는 동안 고은서와 서연정은 휴게 공간에 있는 작은 카페로 향했다.“은서야, 승재 통해 보낸 캔들 잘 받았어. 고마워.”서연정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네가 요즘 바쁜 것 같아서 방해하지 않으려고 했어.”고은서도 웃으며 답했다.“어머니, 방해라니요. 그런 말씀 마세요.”두 사람이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커피가 나왔다.고은서는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은서야, 혹시 지난번 고양이 행사에 갔었어?”서연정이 갑자기 묻자 고은서는
고은서의 제안에 여시은이 반응하기도 전에 곽승재가 차갑게 말했다.“미안하지만 바쁩니다.”여시은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곽 대표님, 한가해도 저랑 가지 않을 거잖아요! 곽 대표님 안목을 믿을 수가 있어야죠.”말을 마친 여시은이 고은서를 보며 말했다.“은서야, 곽 대표님이 고양이 돌보게 두고 넌 나랑 같이 가자. 다른 고양이한테 정신 팔려서 쿠아를 소홀히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결국 고은서는 여시은과 함께 삼색 고양이를 보러 갔다.고양이는 귀여웠지만 쿠아는 그 고양이를 경계하며 가까이 가지도 않았다. 오히려 살짝 겁을 먹은 듯 보였다.“삼색 고양이는 고양이 세계의 미녀라 누구든 보면 좋아한다고 하던데 왜 쿠아는 싫어하는 거지?”여시은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쿠아가 아직 이 환경에 적응을 못 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그러네. 그럼 그냥 쿠아를 혼자 두는 게 낫겠다. 괜히 다른 고양이를 들여서 외롭다고 느끼게 만들면 안 되잖아.”여시은은 그렇게 말하며 쿠아의 머리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그녀의 애틋한 표정을 보며 고은서는 문득 자신의 판단이 맞는지 혼란스러워졌다.‘여시은이 정말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일까?’일부러 SNS에 사진을 올려 곽승재를 현장으로 불러내 그 앞에서 친밀하게 행동했지만 정작 여시은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정말 곽승재에게 관심이 없는 걸까? 아니면 연기력이 뛰어난 걸까?’고은서는 그 진위를 가늠할 수 없었다.오후가 되어서야 일정이 마무리되었고 여시은은 곽승재에게 고은서를 데려다 줄 것을 부탁하며 그녀는 쿠아를 데리고 먼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퀸은 한없이 애교를 부렸다.고은서가 안고 있으면 자꾸만 얼굴에 몸을 부비며 애교를 부리는 탓에 마음이 무너져내린 고은서는 결국 곽승재의 차를 타기로 했다.가는 길에 고은서는 무심하게 곽승연의 근황을 물었다.‘호원 저택에 가 있긴 하지만 어머니가 자주 본가로 데리고 나와. 게다가 심리 상담도 받고 아로마 테라피도 병행하는 중이라 상태는 나쁘지 않아.’
고은서는 어릴 적 드럼을 배우면서 자신만의 멋진 별명을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퀸이었다.예전에 곽승재를 쫓아다닐 때 재미 삼아 이 이야기를 그에게 한 적이 있었다.당시 곽승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었다.‘갑자기 그 얘기를 꺼낸 걸 보면 기억하는 걸까?’그가 기억하든 말든 고은서는 굳이 확인할 생각이 없었다.“마음대로 해.”어차피 그 별명은 중2병 시절에 장난으로 붙인 거였고 이제는 고양이 이름으로 써도 나쁘지 않았다.고은서는 시선을 거두려다 뜻밖에도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했다.단아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서연정이었다.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그녀는 곽승연을 데리고 나오는 대신 오십 대쯤 되어 보이는 무테안경을 쓴 남자와 함께하고 있었다.남자는 세련되게 차려입었고 성숙한 남성 특유의 차분함이 느껴졌다.우연히 마주친 건지 일부러 약속을 잡은 건지 남자의 표정에는 은근한 기쁨이 묻어나 있었다.서연정이 등을 돌린 채 서 있어서 그녀의 표정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여자의 직감이 그 남자는 서연정의 구애자라고 말해주고 있었다.“왜 그래?”곽승재는 한참 동안 반응 없는 고은서를 보며 어디에 정신이 팔린 건지 궁금해했다.“곽승재!”곽승재가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고은서가 그를 불러 세웠다.곽승재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고은서는 두어 번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얼른 핑계를 지어냈다.“눈에 뭐가 들어간 것 같아. 좀 봐줄래?”그러면서 그녀는 동그랗게 눈을 크게 뜨고 곽승재에게 다가섰다.“어느 쪽?”“오른쪽!”곽승재는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그 안에 물결이 일렁이는 듯했고 햇빛이 비치는 그녀의 하얀 얼굴은 가느다란 솜털까지 선명하게 드러냈다.연분홍빛 입술도 살짝 벌어져 있었는데 그 모습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곽승재는 갑자기 목이 바짝 말랐다.그는 무의식적으로 침을 삼키다 결국 참지 못하고 고은서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촉촉한 감촉이 입술에 닿자 고은서는 깜짝 놀라 곽승재를
생각을 마친 고은서는 작게 숨을 들이마시고 품에 안고 있던 아기 고양이가 그녀의 손가락을 살짝 깨물어 놀란 척하며 곽승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곽승재는 재빠르게 그녀를 붙잡았다.그는 그녀의 팔 부상이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걸 신경 쓰는 듯 먼저 팔을 지탱했다가 곧 허리 쪽으로 손을 옮겼다.옷을 사이에 두고도 그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느껴졌다.코끝에는 익숙한 삼나무 향이 은은하게 스쳤다.고은서는 불쾌감을 참아내며 그릴 밀쳐내는 대신 오히려 그의 품에서 살짝 고개를 돌려 뒤쪽을 확인했다.하지만 여시은은 쿠아에게만 신경을 쓰며 조용히 무언가를 말하고 있을 뿐 두 사람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아, 망했다. 괜히 연기했네. 완전 헛수고잖아.”그 순간 곽승재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서야, 손은 괜찮아?”그는 그녀의 손을 직접 잡아 올리며 상태를 확인했다.고은서는 자연스럽게 손을 빼내며 한 걸음 물러섰다.“괜찮아. 아기 고양이라 이가 아직 덜 자라서 가볍게 물렸을 뿐이야.”그렇게 말한 뒤 고은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쪽으로 걸어갔다.곽승재는 아무 말 없이 온기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손끝을 살짝 문지르고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무대 쪽에는 행사 주최 측뿐만 아니라 고양이 사육 전문가들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곽승재는 워낙 유명한 인물인지라 이런 자리에서도 그를 알아본 몇몇 사람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한편 고은서는 사육 전문가와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쿠아가 심하게 낯을 가리는 문제가 떠올라 전문가에게 문의했다.전문가는 차분히 설명했다.“고양이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 다쳤다면 종종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어요. 이럴 땐 장난감과 간식을 준비해 주고 주인이 충분히 함께 시간을 보내 주면 서서히 나아질 겁니다.”장난감과 간식은 여시은이 충분히 준비해 둔 것으로 보였고 함께 있는 시간도 많아 보였다.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이어갔다.“그런데 다친 지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깜짝 놀라거나 털을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