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재야, 한 가지만 믿어줘. 난 은서 씨를 해치려 한 적이 없어. 오해를 만들었다고 해도 손해를 보는 건 나뿐이야.”백유미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무력한 목소리로 말했다.“너에게 남다른 감정이 있다는 건 부정하지 않을게. 하지만 너에게 있어 나도 조금이나마 독특한 존재인 줄 알고 있었어. 남녀 사이에 사랑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내 인품만은 의심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그런데 네가 성아연 일에 관해 나한테 직접 물어보지 않고 아예 날 냉대하고 또 은서 씨가 우리 집 회사를 망가뜨리는 걸 보고만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어.”백유미가 적반하장으로 곽승재를 탓하기 시작했다.“어릴 적에 내가 폐렴으로 고열에 시달리면서 하마터면 죽을 뻔했을 때 나한테 했던 말 기억나?”백유미는 곽승재가 입을 열기도 전에 혼자 답했다.“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찾아와도 된다고 그 누구도 날 괴롭히지 못하게 지켜줄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날 원수처럼 대하는 건데?”백유미는 더는 참지 못하고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내가 그렇게 못났어? 난 그저 부득이하게 너에게 몇 가지 속인 일이 있을 뿐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널 해칠 생각은 없었다고. 이후에도 절대 널 해치지 않을 거야.”곽승재는 눈살을 찌푸리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니까 그 고충이 뭔데?”백유미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날 강요하지 말아줘. 진짜 알려줄 수 없으니까. 그런데 제발 날 믿어줘. 나도 이렇게까지 하기 싫었어. 나도 우리 둘 사이가 이 지경에 이르는 걸 원치 않았다고.”곽승재의 얼굴빛이 방금전보다 더 어두워졌다.“전에 고은서와 고씨 가문 회사에 손을 댔으니 고은서가 너희 집 회사를 망가뜨리려거든 네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일이야. 나도 널 돕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그리고 성아연을 이용하고 또 고씨 가문 회사에까지 손댈 능력이 있으면 이번 일도 충분히 무난히 넘길 능력이 되는 거 아니야?”곽승재의 덤덤한 눈빛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백유미도 그가 어디까
이미숙은 지금까지도 고은서가 곽승재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두 사람이 이혼한 지 꽤 오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은서가 화난 김에 고집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고은서는 이젠 설명하는 것조차 지겨웠다.“아줌마, 얼른 해장국 끓이러 가세요. 저 할 일이 있어서 먼저 끊을게요.”고은서는 폰을 놓자마자 생각에 잠겼다.‘아마 백승엽 일 때문에 이 시간에 곽승재를 찾아간 거겠지.’현재 백승엽은 아직도 수감소에 갇혀 있었다.이번 일이 너무 큰일은 아니었지만 또 그저 눈 감고 넘어갈 만한 작은 일도 아니었다. 법적 징벌보다는 사람들의 도덕적 비난을 더 많이 받게 될 것이다.‘백유미의 수단으로 곧 풀려나게 되겠지.’그러나 원지훈은 전에 백승엽을 단단히 혼쭐 내주겠다면서 그를 제대로 된 불구로 만들겠다고 고은서와 약속했었다.원지훈은 백씨 가문을 무너뜨리는데 진심이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백유미와 백승엽을 아웃시키고 백씨 가문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싶어 했다.그러나 의외인 것은 곽승재가 여느 때와 달리 백유미의 도움 요청을 거절했다는 것이다.전에는 백씨 가문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면서 백승엽을 친아버지처럼 공손하게 대하던 곽승재가 갑자기 백씨 가문 전체를 냉대한다는 게 약간 믿기지 않았다.‘백유미의 진면목을 알고 단단히 실망한 모양이네.’바로 이때, 주인혁한테서 영상통화가 왔다.“누나, 저 성공했어요!”전화 너머로 주인혁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주인혁은 생방송을 할 때 입고 있던 옷 그대로였고 심지어 메이크업도 지우지 않은 상태였다. 그의 맑은 눈동자는 희열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은서는 그에게 축하 인사를 하면서 오래전부터 그가 성공할 거라는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고 했다.주인혁은 바쁜 와중에 그녀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려고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몰래 폰을 들고 그녀에게 일등으로 소식을 전했던 것이다.스태프가 뒤에서 그를 재촉하자 그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이내 고은서에게 말했다.“며칠 후에 브랜드 쪽에서 자선
이튿날.고은서는 오전에 ZY 그룹 계약 체결에 관한 일을 처리하고 오후에는 유성준의 전화를 받고 마침 해성으로 온 커스텀 향수를 부탁한 분을 만나러 갔다.오후 두 시, MQ에 도착한 고은서는 직접 그녀를 마중하러 나온 유성준을 발견했다.“은서야, 왔어? 손님은 위층에서 기다리고 계셔. 전에 우리랑 연락했던 분은 손님 비서래. 그런데 오늘은 직접 오셨어.”“네.”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그녀는 접대실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시은 씨?”그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여시은도 같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은서 씨가 왜 여기에 있어요?”“아는 사이에요?”옆에 있던 유성준도 따라 놀랐다.“전에 그 향수를 만든 사람이 은서예요. 그리고 여시은 씨께서 찾고 계신 퍼퓨머도 은서예요.”“은서 씨 퍼퓨머에요? 전에는 금융에 관한 일을 한다고 하지 않았나요?”여시은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은서에게 물었다.“그저 취미일 뿐이에요. 전문 퍼퓨머까지는 아니에요. 만약 제 실력이 의심된다면 제가 전문 퍼퓨머를 소개해 드릴게요.”고은서가 나긋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럴 리가요. 저도 소문 듣고 찾아온 거예요. 그런데 그 향수를 제작한 퍼퓨머가 은서 씨일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네요. 그 향수를 엄청 마음에 들어 했거든요.”여시은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그러니 이번엔 저한테 안성맞춤인 유일무이한 향수를 부탁할게요.”그러나 고은서도 커스텀 향수 제작을 맡는 건 처음인지라 확답을 주지 않았다.“최선을 다해볼게요.”고은서는 이내 여시은의 취향과 수요에 관해 물으면서 그녀를 데리고 여러 가지 향을 맡아보며 그녀가 좋아하는 향을 자세히 기록했다.그러다 보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었다.“시은 씨, 배고프지 않아요? 우리 같이 저녁 먹을래요?”고은서가 여시은을 보며 말했다.“저도 마침 배고팠는데 좋아요.”여시은이 꼬르륵 소리 나는 배를 만지면서 답했다.두 사람은 유성준까지 불러 함께 MQ 근처에 있는 해산물 맛집에
고은서와 여시은은 서로 좋아하는 사람에 관해 얘기할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그래서 고은서 그저 웃으면서 대화를 아주 공식적으로 이어갔다.“시은 씨처럼 좋은 조건을 갖춘 상대가 얼마나 된다고요. 누굴 좋아하든 다 그 사람 복이죠.”“글쎄요. 그런데 아직 제가 좋아한다는 걸 모르고 있을 거예요.”여시은이 나긋하게 웃으며 말했다.고은서는 약간 의외였다.“왜 고백하지 않는 거죠?”‘여시은의 외모와 가정 배경이라면 아마 거절할 남자가 없을 텐데.’“아직 타이밍이 아닌 것 같아서요.”여시은은 말하면서 부끄럽다는 듯 웃었다.“은서 씨는요? 은서 씨를 좋아하는 사람이 엄청 많잖아요. 만약 은서 씨 보고 선택하라면 옛사랑을 선택할 거예요, 아니면 새로운 사랑을 선택할 거예요?”여시은이 눈을 깜빡이면서 천진난만한 물음을 제기했다.고은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옛사랑은 이미 지나간 과거인데 절대 선택할 리가 없죠. 저는...”그러나 그녀가 말을 이어가려고 할 때 뒤에서 싸늘한 시선이 느껴졌다.고개를 홱 돌려보니 다름 아닌 곽승재가 문 쪽에 서서 그녀가 한 말을 듣고 있었다.그는 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옆에서는 아주 캐쥬얼한 옷차림의 육현석도 있었다.“형... 은서 씨.”육현석이 조심스레 그녀에게 인사했다.“곽 대표님, 여기서 또 만나게 되네요. 밥 먹으러 오신 건가요? 저희 금방 주문 마쳤는데 같이 드실래요?”여시은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합석 요청을 보냈다.곽승재는 여시은의 말을 무시한 채 고은서만 빤히 바라보았다.‘보긴 뭘 봐?’고은서는 끝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다른 사람 대화를 몰래 엿듣는 습관은 언제 고칠 거야?”‘들을 거면 가만히 듣고만 있든가, 기분 나쁜 티는 왜 내고 다니는 거야. 내 기분도 따라 상하게.’“결혼 선물도 미리 줬으면서 이런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던 거 아니야?”그녀의 말을 들은 육현석은 놀라 하며 뒤로 한발 물러섰다.‘내가 뭘 들은 거야? 결혼 선물? 형 미친 거 아
유성준이 그녀를 설득하려고 할 때 갑자기 뒤에서 육현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형수님! 헤헤, 죄송해요. 또 잘못 불렀네요.”육현석은 웃으면서 휘청이는 곽승재를 부축하며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은서 씨, 저희도 오늘 술 마셨는데 차 안 가져와서 혹시 은서 씨 차에 같이 가면 안 될까요?”“그냥 차 부르세요.”고은서가 단칼에 거절했다.“형이 너무 많이 마셔서 그래요. 그리고 아까부터 계속 어깨가 아프고 위도 아프다고 하는데 기사가 오려면 한참 기다려야 되잖아요. 그런데 기사가 이미 떠났다고 하니까 중도에 만나게 되는 즉시 내릴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육현석이 설명하면서 어떻게서든 그녀의 차에 타려고 했다.고은서도 더 이상 거절하기 난감해졌다. 그래서 그녀는 유성준을 먼저 보내려고 했다.“오빠, 일찍 들어가서 쉬세요.”유성준은 육현석이 일부러 그런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고은서를 더는 난감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는지라 비아냥거리려던 말을 꾹 참고 애써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알겠어. 집 들어가게 되면 문자해.”고은서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육현석은 곽승재를 뒷좌석에 앉히고 자신은 재빨리 조수석으로 달려가 앉았다.“형이 술만 마시면 저한테 짜증 내고 그러는데 혹시라도 저를 때릴까 봐 무서워서 조수석에 앉은 거예요. 그런데 여자한테는 손대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특히 은서 씨한테는 절대 그럴 리가 없으니까 맘 편히 먹고 얼른 앉아요.”“...”횡설수설하는 육현석을 보며 고은서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뒷좌석에 앉았다.차가 출발한 후 육현석은 자신의 기사한테 연락해 합류할 장소를 정했다.곽승재는 조용하게 창가에 머리를 대고 손으로 이마를 받친 채 눈을 감고 쉬고 있었다.가로등 불빛이 그를 비추었는데 왠지 모르게 고독하고 쓸쓸한 분위기가 느껴졌다.“평소에는 주량이 좋은 사람인데 오늘따라 기분이 안 좋은지 엄청 급하게 마시더라고요. 그래서 더 빨리 취한 것 같아요.”고은서는 자연스레 시선을 다
“이거 놔!”고은서는 팔꿈치로 곽승재의 가슴팍을 찌르면서 소리쳤다.“스읍.”곽승재는 고은서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냈다.서운에 있을 때 곽승재가 그녀를 지키기 위해 또 한 번 상처를 입은 걸 떠올린 고은서는 순간 흠칫했다.곽승재는 이 틈을 타 그녀를 더 세게 껴안으면서 말했다.“은서야, 날 밀어내지 말아줘. 나에게 한 번만 기회를 더 줘...”술기운이 느껴지는 그의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얼굴 가까이 와닿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숨죽이고 있었다.‘설마 방금전에 내가 레스토랑에서 한 말 때문에 자극이라도 받은 건가? 대체 왜 이러는 거야?’그녀의 주변은 온통 곽승재 몸에서 나는 설송향으로 물들었다.불편함을 느낀 고은서가 그를 밀어내면서 말했다.“이거 좀 놔.”“싫어. 놓으면 또 날 버리고 갈 거잖아. 그러면 더는 널 볼 수 없게 되잖아.”곽승재는 얼굴을 그녀의 품에 기댄 채 장난감을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앙탈을 부렸다.“은서야, 보고 싶었어.”그는 고은서 없이 보내는 일분일초가 너무 괴롭게 느껴졌다.비록 며칠 동안 함께 서운에서 지내고 또 몇 시간 전에 금방 만나고 지금 함께 뒷좌석에 앉아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마음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곽승재는 그녀의 이름을 계속 부르면서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술을 마신 원인 때문인지 고은서는 온몸이 뜨거워 나는 것 같았다.“곽승재, 술 마셨다고 함부로 행동하지마. 안 취한 거 다 알고 있으니까.”고은서가 발버둥 치면서 곽승재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는 고집을 부리면서 아예 그녀를 들어 올리면서 자신의 다리에 앉혔다.덕분에 두 사람은 부득이하게 마주 보게 되었고 또 곽승재가 고은서를 손으로 잡고 있는 바람에 두 사람은 거의 맞붙어 앉아 있게 되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체온이 점점 높아지면서 그의 말 못 할 부위가 이상해지는 걸 느꼈다.‘이러다가 진짜 큰일 나겠어.’고은서는 곽승재의 상처를 관심할
“저리 비켜...”고은서는 온몸에서 전율이 느껴지는 듯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행동을 제지하려고 하는 그녀의 모습이 마치 허세를 부리는 아기 고양이처럼 느껴졌다.욕망을 애써 억누르고 있던 곽승재는 더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손을 아래로 잡아당기면서 힘겹게 입을 열었다.“은서야, 너무 보고 싶었어. 진짜 더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보고 싶었어...”단단한 무언가에 손이 닿은 고은서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녀는 곽승재의 손을 뿌리치면서 화를 냈다.“변태 새끼!”“은서야, 너도 하고 싶잖아. 참지 말고 날 한 번 믿어봐.”곽승재의 뜨거운 숨결이 고은서의 목에 와닿았다.그의 말이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그녀는 술을 마신 자신이 너무 미웠다.‘술을 마시지 말았어야 했어. 그럼 곽승재의 유혹에 이렇게 쉽게 넘어갈 리도 없었을 텐데.’자신의 몸을 더듬는 곽승재의 손길에 고은서는 더는 참지 못할 것 같았다. 그녀의 저항은 이젠 무용지물이 되었고 심지어 곽승재에겐 크나큰 유혹으로 느껴졌다.곽승재가 그녀를 깨물 때 고은서는 수치스러움에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곽승재, 그만해...”그녀의 울먹이는 소리에 고개를 든 곽승재와 눈이 마주친 고은서는 순간 흠칫했다. 그의 눈빛은 온통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고 목소리도 평소보다 더 매혹적이게 느껴졌다.“은서야, 아파? 내가 더 부드럽게 해줄게.”고은서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싫어.”곽승재는 단번에 그녀의 뜻을 알아차렸다.그녀는 몸에 힘이 풀리면서 거의 그의 품에 기대어 있었는데 두 볼은 빨간 홍조를 띠고 있었고 그를 바라보는 울망울망한 두 눈엔 욕망이 들끓고 있었다.마치 자신을 가지라고 유혹하는 것처럼 느껴졌다.그러나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거절하고 있었다.곽승재는 고은서가 진심으로 거절하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건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취하지 않은 자신이 너무 미웠다.사실 계속 이어간다고 해도 고은서는 그를 밀어내지 못할 것이다.그러나 그렇게 되면 고은서를
고은서는 곽승재의 장난스러운 말투와 눈빛으로부터 자신의 현재 모습이 얼마나 낭패한 지를 예상할 수 있었다.그녀는 오늘 셔츠와 정장 치마를 입었는데 곽승재 때문에 단추가 풀리면서 속옷이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가슴 쪽에 아주 선명한 이빨 자국까지 생겼다.고은서는 자신의 이런 모습이 너무도 창피했다.그녀는 생각을 포기하고 얼굴을 곽승재 가슴팍에 묻은 채 그의 외투를 잡아당기며 자신의 얼굴을 가리려고 했다.곽승재는 고은서의 귀여운 모습에 피식 웃으면서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그는 그녀를 안은 채 엘리베이터 올라 아주 자연스럽게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이내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반응하고 조심스레 고은서에게 물었다.“몇 층이야?”고은서의 대답을 들은 곽승재는 버튼을 누르는 시늉만 하고 또다시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받쳐 올렸다.곽승재의 욕망은 아직 사그라들지 않았고 심지어 다시 들끓어 오를 기세를 보였다. 이를 가까이 감지한 고은서는 그를 쏘아보며 화냈다.“이상한 생각 그만 좀 해!”그러나 곽승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내가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사람이 지금 내 품에 안겨 있는데 나도 어쩔 수 없어.”코끝은 온통 곽승재의 특유한 설송향으로 가득했고 귓가에는 그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얼굴이 또다시 화끈 달아올랐다.‘곧 집이니까 조금만 더 참으면 돼.’두 사람은 고은서 집 문 앞에 도착할 때까지 친밀한 자세를 계속 유지했다.지문을 누르고 집 문을 열리자마자 고은서는 곽승재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그러나 곽승재가 핑계를 둘러대면서 그녀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나 목말라.”고은서는 어쩔 수 없이 곽승재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집에 들어선 고은서는 황급히 곽승재를 밀어내고 자신의 가슴 부위를 손으로 막았다.“물 저기 있... 우웁!”곽승재는 고은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를 장롱 쪽으로 밀어붙이며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방금전의 키스와 달리 그의 다급함과 미련이 깊이 느껴지는 키
민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 건지 아니면 아버지에게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려고 했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는 해외에서 혼자 지내며 꽤 많은 기술을 익혔다고 말했다.고은서는 민시후를 다시 보게 되었다.비록 지난 생에서 앞으로 그가 이루어낼 성과가 작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평소 그의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정말 믿음이 가지 않았다.미래를 알고 있는 게 아니라면 고은서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를 그냥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쯤으로 여겼을 것이다.“고은서, 나는 단 한 번도 내 약점을 다른 사람에게 얘기한 적이 없어. 이제 알게 되었으니 날 책임 져야 해.”민시후는 진지하면서도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고은서는 그에게 눈을 흘기며 답했다.“져야 할 책임이 너무 커서 감당 안 되겠는데?”“그럼 내가 너 책임질까?”민시후의 눈빛에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고은서는 민시후가 자신을 어머니의 묘비 앞에 데려간 이유를 알았다.그는 자신의 과거를 공유하며 자신에게 진지함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고은서는 그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구애받았지만 그녀는 곽승재에게만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그녀는 최선을 다해 곽승재의 마음을 돌리려 했지만 자신도 사랑받을 자격이 넘치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잊고 살았었다.잠시 생각하던 고은서가 민시후에게 말했다.“다음 주 우리 삼촌 생일인데 부상이 다 나으면 나랑 같이 갈래?”그 말에 민시후는 얼굴이 밝아지며 말했다.“지금이라도 갈 수 있어. 믿지 못하겠으면 두 바퀴 뛰어서 보여줄까?”말을 마친 민시후가 날뛰려 했지만 고은서가 얼른 제지했다.“됐어. 얼른 앉아.”고은서는 어이가 없었다.“민시후, 여기서 몇 바퀴 돌다가는 구급차 불러야 할 거야.”민시후는 고은서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기분이 좋았다.“그래. 알았어. 얌전히 앉아 있을게.”병동으로 돌아와 엘리베이터에 오른 고은서는 핸드폰을 차에 두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그녀는 민시후에게 먼저 올라가라고 하고
다급한 민시후의 모습에 고은서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농담이야.”그 말을 들은 민시후의 잘생긴 얼굴에 매혹적인 미소가 떠올랐다.“고은서, 너는 진짜 예쁘면서 마음도 착해.”“야... 그러지 마.”고은서가 팔을 문지르며 말했다.“민 도련님, 정상적으로 돌아올 순 없을까? 그렇게 웃지도 말고 닭살 돋는 말 하지도 마. 아니면 뭔가 나쁜 의도가 있는 것 같잖아.”민시후는 말문이 막혔다.‘역시 장난은 그만 쳐야겠어. 전에 방탕하게 행동했더니 이제 이미지 회복은 글렀네.’고은서는 민시후가 자신을 재밌는 곳이나 특별히 경치가 좋은 곳에 데려갈 것으로 생각했다.그런데 민시후는 그녀를 묘지로 데려왔다.고은서는 민시후의 지시에 따라 한 묘비 앞에 섰다.묘비 사진에는 온화하고 단정한 표정의 중년 여성이 웃고 있었다.“우리 어머니야.”민시후가 말을 이었다.“여긴 외가 쪽 집안 묘지야. 비록 어머니가 북성으로 시집갔지만 외로울까 봐 여기에서 묘비를 세웠어.”고은서는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지켜봤다.평소 민시후는 세상만사에 무심한 듯한 태도를 보였지만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드물게 부드럽고 슬픈 표정을 지었다.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그의 심정이 여실히 느껴졌다.민시후는 휠체어에서 내려 준비한 꽃을 조심스럽게 묘비 앞에 놓고 묘비 위로 떨어진 나뭇잎을 정성껏 정리했다.“왜 곽승재를 그렇게 미워하냐고 물었었지?”고은서는 그 이유가 궁금해서 여러 번 물었었지만 지난번 서운에서 조금 얘기해줬을 뿐 전부는 얘기해 주지 않았다.묘비 앞에 앉아 어머니의 사진을 바라보는 민시후의 표정을 보며 고은서는 조심스레 짐작했다.“설마 경찰서에 끌려갔던 그날 밤 어머니께서 사고를 당하신 거야?”민시후의 눈에 슬픈 감정이 서렸다.그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그날 밤 내 소식을 들은 어머니께서 급하게 해성으로 오시다가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했어. 이튿날 북성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어. 난 어머니 마지막 모습도 보지 못
곽승재는 사복을 입고 있었는데 단순히 바람 쐬러 나온 건지 아니면 볼일이 있어 나가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고은서가 민시후를 휠체어에 태운 모습을 보고 곽승재는 평소처럼 냉담하고 무표정한 눈빛을 보였지만 그 안에는 아픔도 서려 있었다.“아이고, 곽 대표. 여기서 입원 중이었어? 우연이네.”민시후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곽승재는 그에게 답하지 않고 고은서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눈빛을 보였다.고은서가 물었다.“할 말이라도 있어?”곽승재는 입술을 짓씹으며 답했다.“몇 분이면 되는데 병실에서 얘기할 수 있을까?”고은서는 차분하게 답했다.“여기서 얘기해.”곽승재는 민시후를 한번 보고 다시 고은서를 보며 말했다.“사적인 일이라서 다른 사람이 듣는 건 곤란해.”“그럼 미안하지만 시간이 안 되겠네. 저녁에 시간 되면 다시 얘기해.”고은서가 그렇게 말하자 곽승재의 가슴 속에서 무거운 통증이 밀려왔다.이제 고은서는 몇 분이라도 자신에게 할애하지 않으려는 듯했다.“지나가게 좀 비켜줄래?”고은서가 곽승재에게 길을 비키라고 재촉했다.곽승재는 고은서가 나중에 시간을 낸다는 말을 핑계로 그저 대화를 피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 결국 입을 열었다.“어제 승연이가 네가 준 캔들을 사용했더니 밤새 잠을 설치지 않고 잤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시더라. 승연이가 그림 한 장 그렸는데 너한테 주고 싶대.”고은서는 약간 놀랐다.‘승연이랑은 한번 마주친 게 다인데? 날 쳐다보지도 않았으면서 나한테 그림을 선물로 준다고?’“외할아버지 댁에 아직 오일이 조금 남아 있어. 만약 승연이가 필요하면 사람을 보내 가져다줄게.”고은서가 여전히 자신과 관련된 사람들을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에 곽승재는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 풀렸다.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은서야, 어머니가 직접 승연이 그림을 너한테 전달하고 싶대. 언제 시간 되는지 알려주면 내가 장소를 정해서 알려줄게.”고은서가 차분한 표정으로 답했다.“그럴 필요 없어. 나도 어머니 연락처 있으니 나중
고은서가 민시후의 병실에 도착했을 때 민시후는 통화를 하고 있었다.그녀가 들어서려 하자 민시후는 전화를 끊고 백유미에게 정신 진단서를 발급한 병원에 관해 이야기하며 그 병원은 곽현수가 개인적으로 지분을 했다는 사실을 전했다.“관련 증거는 경찰서에 보내놨고 백유미가 돌아오면 재검사 신청할 거야. 원지훈의 사망 원인은 T 국 쪽 부검 보고서에서 군도로 목을 그었다고 나와.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건지 실수로 찔린 건지는 알 수 없어. 상식적으로 백유미가 그 상태에서 성인 남성을 죽일 힘이 남아있을 리는 없지만 사람이 위급한 상황에서 초인적인 힘이 나타날 수도 있지. 하지만 이 부분은 증거로 삼을 수 없어. 폐기된 창고에는 CCTV가 없고 모든 사람의 시선이 너에게 향해 있었으니 그 누구도 안쪽 상황은 신경 쓰지 않았어. 새로운 증거가 없으면 사건 재조사는 힘들 거야.”민시후의 설명을 듣자 고은서는 마음이 따뜻해졌다.민시후는 대충 넘기지 않고 진지하게 T 국 사건을 조사하고 있었다.“고마워.”고은서는 진심으로 말했다.민시후는 고은서의 감사한 마음을 알아채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정말 고마우면 행동으로 표현해 줘.”고은서는 경계하며 한 발짝 물러섰다.“뭐 하려는 거야?”그 모습을 본 민시후가 불쾌하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고은서, 지금 누구랑 벽을 세우는 거야? 밥 챙겨왔다며? 어디 있어? 배고파 죽겠어!”고은서는 그제야 도시락을 열어 보여줬다.“특별히 찾아온 맛집이야. 얼른 드세요, 민 도련님.”민시후는 젓가락으로 몇 입 맛보고선 불만을 표했다.“특색이 하나도 안 살았잖아. 다음엔 내가 직접 요리해서 진짜 맛있는 음식이 뭔지 보여줄게.”고은서가 놀라며 물었다.“요리할 줄 알아?”민시후가 고은서를 쳐다보며 말했다.“그게 무슨 반응이야? 내가 요리할 줄 아는 게 이상해?”‘이상하고말고. 부잣집 도련님이 의식주에 대해 까다롭게 굴면서 사람들이 신경 써주는 생활이 익숙할 텐데 왜 스스로 요리를 배운 거지?’“혹시 어떤 여자
고은서가 여시은의 제안을 완곡히 거절하며 미소를 지었다.“시은 씨 혼자서도 충분할 것 같네요.”여시은은 다소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하지만 곽 대표님은 저보다 은서 씨를 더 보고 싶어 할 걸요? 같이 가면 제가 좀 더 편할 것 같은데 어때요?”여시은은 고은서의 팔을 붙잡고 병실로 이끌었다.여시은의 비서는 문을 두드리고 병실 문을 열었다.고은서는 여시은과 함께 예기치 않게 곽승재의 병실에 들어섰다.곽승재는 VIP 스위트룸에 입원해 있었는데 거실과 오픈형 주방 작은 재활실이 있었으며 병상도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곽승재는 소파에 앉아 주민기에게 업무 보고를 듣고 있었다.소리를 들은 곽승재가 고개를 들어 고은서를 바라보고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고은서의 방문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사모님, 시은 씨.”주민기는 예의 있게 인사를 건네고 한쪽으로 물러났다.고은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여시은은 상냥하게 말했다.“주 비서님께서도 계셨네요.”여시은은 곧장 곽승재에게 말을 건넸다.“곽 대표님, 다치셨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 대신 제가 왔어요. 마침 은서 씨를 마주쳐서 같이 왔지 뭐예요?”여시은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귀여웠다.“곽 대표님, 너무 감사하죠?”곽승재는 그녀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예의를 갖춰 말했다.“감사합니다. 여시은 씨. 아저씨한테도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그럼요.”여시은은 눈빛으로 비서에게 과일 바구니를 내려놓으라고 지시했다.“뭘 준비해야 할지 몰라서 과일 좀 준비했어요. 성의 없어 보인다고 하진 말아주세요.”곽승재는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했지만 눈길은 여전히 고은서에게 가 있었다. 그는 그녀의 수중에 들린 도시락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고은서도 곽승재의 시선을 느꼈지만 그에게 말하는 대신 여시은에게 말을 건넸다.“시은 씨. 얘기 나눠요. 저는 다른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았떤 여시은이 작은 목소리로 고은서에게 부탁했다.“은서 씨, 저도 대표님이랑 친하지
이메일 알림 소리가 울리자 온승준이 압축 파일을 열고 비디오를 재생했다.어머니의 말은 더 이상 그의 마음을 흔들지 않았지만 박지연이 독신으로 살아도 다시는 그와 결혼하지 않겠다는 말은 온승준의 마음을 깊게 찔렀다.그는 잠시 멍하니 화면을 응시하며 감정을 추스르려 했다....고은서는 조수연이 온 일로 인해 벌어진 소동을 들었다.고은서는 화내며 말했다.“도대체 무슨 낯으로 와서 너한테 난리 치는지 모르겠네? 다음에는 그냥 신고해 버려.”박지연은 이미 화가 가라앉은 상태에서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응. 다음엔 바로 신고할게.”고은서는 박지연을 몇 번 쳐다보며 물었다.“너 진짜 괜찮은 거 맞아?”박지연은 고은서를 향해 눈을 흘기며 대답했다.“지금 나 얕보는 거야? 그런 사람 주위에 많아. 더 심한 사람도 그냥 그러려니 하며 지내고 있다고. 전에는 시어머니니까, 중간에 낀 온승준을 난처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좀 존중하려고 했지. 하지만 이제 상관없어. 욕하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지.”고은서는 박지연의 태도에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좋네. 제대로 정신 차린 거 맞네. 응원해.”박지연은 그 칭찬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은서는 박지연에게 점점 더 감탄했다. 이혼 이후 박지연은 한 번도 온승준이나 그와 관련된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이혼한 날 밤 잠시 울고 소리 지른 후 그 일에 대해 한 번도 걱정하거나 마음 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박지연의 말에 따르면 전에 발생한 일은 모두 허상으로 그 누구도 허상을 위해 슬퍼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그날 밤, 박지연은 온승준에게서 온 사과 문자를 받았다.[어머니 대신 사과할게. 앞으로는 다시 너를 찾는 일은 없을 거야.]박지연은 문자를 확인하고는 답하지 않고 핸드폰을 거뒀다.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었다.고은서는 먼저 ZY 그룹에 들러 송민아와 몇 가지 업무를 마친 뒤 민시후가 배가 고프다고 해서 병원으로 향했다.병실로 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고은서는 우연히 여시은을 마주쳤다.여시은은 비서
온승준이 급히 자신의 어머니를 막아섰다.“뭐 하시려는 거예요?”조수연이 분노하며 말했다.“쟤 상사한테 가서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욕보일 수 있냐고 따지려고.”“어머니, 제발 이러지 마세요!”온승준이 목소리를 높이자 조수연은 더 화를 내며 말했다.“승준아, 엄마한테 무슨 말투야? 박지연 때문에 나랑 또 싸우려고? 너 그 여자가 우리를 어떻게 협박했는지 잊은 거야? 박지연이 우리를 얼마나 하찮게 얘기했는지 기억 안 나? 굳이 이혼하겠다고 난리 쳐서 이혼했으면서 왜 또 뒤꽁무니 쫓아온 거야!”온승준이 짜증 내며 말했다.“지연이도 틀린 말 한 거 아니잖아요. 우리도 지연이에게 잘해준 거 없어요.”“지금 그 여자 편을 드는 거야?”조수연은 분노로 몸을 떨며 말을 이었다.“우리가 뭘 못해 줬는데? 네 아내로서 널 돌보고 시부모 돌보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다른 사람들이 다 하는 일을 왜 못 하겠다는 건데? 게다가 그런 학력과 직업으로 우리 집에 시집온 걸 감사해야지!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성격은 왜 그 모양이야? 몇 마디 했다고 바로 말대꾸하고. 미리 얘기하는데 나랑 네 아버지는 박지연이 다시 우리 집안에 들어오는 거 절대로 반대다.”온승준이 싸늘한 말투도 답했다.“지연이도 우리 집에 들어오고 싶지 않아 해요. 이제는 저랑 말도 잘 안 한다고요.”“마침 잘됐네. 이제 박지연한테 그만 굽신거리고 얼른 이전에 있던 병원으로 돌아가. 혜린이도 싫으면 엄마가 성격 좋고 집안 좋은 여자들 소개해 줄게.”“어머니!”온승준이 조수연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다른 여자는 싫어요. 직장도 그만두지 않겠어요. 어머니가 정말 저를 위한다면 아버지랑 같이 와서 지연이한테 사과해 주세요.”“우리가 사과하라고?”조수연은 그 말을 듣고 헛웃음이 나왔다.“그 여자가 무슨 자격으로 우리 사과를 받아!”온승준은 더 이상 조수연과 대화를 이어 나가고 싶지 않았다.그는 곧바로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박지연은 간호사실에서 동료들에게 일을 맡기고 옷을 갈아입은
박지연도 온승준을 발견하고는 고은서에게 말했다.“병실로 들어가서 얘기하자.”“그래.”그때 온승준이 박지연을 불렀다.“지연아.”“두 사람이 얘기해. 난 먼저 들어갈게.”“은서 씨.”온승준이 고은서를 부르자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평소 불필요한 교류는 하지 않는 온승준이 이렇게 먼저 나한테 말을 건넨다고?’“지연이 동료들에게서 들었는데 은서 씨 친구가 다쳤다면서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온승준이 고은서를 향해 말했다.고은서는 여전히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예의상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고은서는 민시후의 방으로 향했고 박지연은 온승준을 차분히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일이야?”“심장외과 쪽에서 환자를 보고 있었는데 네가 여기 있다고 해서 잠깐 들러봤어.”온승준은 박지연이 기분 나빠 할까 봐 해명했다.“그럴 필요 없는데. 온 선생님 업무도 바쁜 데 여기서 시간 낭비하지 마.”온승준은 말문이 막혔지만 다시 한번 물었다.“그동안 병원에 없던데 괜찮아?”“무슨 일 있었으면 출근도 못 했겠지?”박지연은 약간 짜증이 나는 목소리로 답했다.“온 선생님, 다른 일 없으면 가. 난 아직 할 일이 많아서.”온승준은 잠시 묵묵히 서 있었다.병원에서 근무한 지 반달이 넘었지만 그는 박지연을 자주 만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겨우 마주쳤지만 박지연이 낯선 사람을 대하듯 그에게 인사도 건네지 않으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요 며칠 박지연이 연차를 냈다는 사실도 그녀의 동료에게서 우연히 들은 것이었다.이전의 박지연은 어디를 가든, 뭘 하든, 어떤 사람을 만나든 모두 그에게 공유했었다.하지만 박지연은 이제 그녀의 세상에서 온승준이라는 사람을 지우기라도 한 듯 문자도 보내지 않았다.온승준이 먼저 연락하려 했지만 번호도 차단당한 듯했다.온승준은 겨우 만난 박지연과 이렇게 빨리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친구랑 밥은 먹었어? 안 먹었으면 내가 식사 한 끼 대접할게.”온승준은 겨우 타당한 이유 하나를 찾았다.이혼 전날 밤
고은서가 갑자기 경계의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하루 세 통 이상은 안 돼.”“세 통은 너무 적어. 다섯 통.”“네 통. 더는 안돼. 그게 한계야.”민시후도 더 이상 실랑이하지 않았다.마침 두 사람의 협상 장면을 마주한 박지연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은서야, 잠깐만 나와 줄래? 할 말이 있어.”고은서는 밖으로 나갔다.두 사람은 한적한 곳에 앉았다.“내가 방해한 거 아니지?”박지연이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그녀의 의도를 파악한 고은서가 그녀를 향해 눈을 흘기며 말했다.“수간호사님, 그렇게 한가하시면 차라리 가십 팀 팀장 하나 맡으세요.”“오, 괜찮네. 좋은 팀 있으면 소개해 줄래?”고은서는 다시 한번 그녀를 향해 눈을 흘겼다.“자, 이제 얘기해 봐. 왜 불러낸 거야?”박지연이 비로소 본론을 말했다.“곽승재가 우리 병원에 와서 치료받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어. 병원 측에서는 곽승재를 위해 제일 좋은 병실과 의사를 준비한다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어.”그 말을 들은 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렸다.조금 전 곽씨 일가 본가에서 마주쳤을 때 곽승재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그런데 갑자기 이 병원에 오기로 했다는 것은 분명 목적이 있을 것이었다.“곽승재는 민시후가 여기 있는 거 알고 있을 거고 네가 자주 여기 올 거라는 것도 알지. 그래서 일부러 우리 병원을 선택한 거야. 곽승재도 참 재밌어. 한 편으로는 널 놓지 못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백유미에게 너그럽잖아. 하지만 육현석이 말하길 백유미는 아직 T 국 병원에서 돌아오지 않았대. 범가온이 백유미를 죽도록 때려서 이제는 호흡기까지 달아야 한대.”박지연은 오후에 육현석과 통화하며 들은 내용을 고은서에게 전했다.범가온은 갑작스럽게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어 T 국 병원에서 정신병 판정을 받았다.따라서 그녀는 백유미에게 한 폭력에 대해 법적인 책임을 질 필요가 없었다.고은서는 잠시 놀랐다.범가온은 굉장히 강하고 이기적이며 탐욕적인 사람이다.‘아무리 아들을 사랑한다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