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시후는 그가 입을 열길 기다리고 있는 고은서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오글거려 죽겠네.”고은서는 끝내 참지 못하고 방금전 손을 닦던 물티슈를 그를 향해 던졌다.“누가 오글거린다는 거야! 사람 호기심 불러일으켜 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 짜증 나는 자식아!”“고은서!”물티슈에 얼굴을 맞은 민시후가 물티슈를 다시 주어 그녀를 향해 던지려고 할 때 뒤에서 갑자기 빵빵하는 자동차 경적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와 민시후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보니 고급 SUV 한 대가 뒤에 세워져 있었는데 그 운전석에는 육현석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다름 아닌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곽승재였다.육현석은 조심스레 그녀를 향해 손을 저으며 옆에 있는 곽승재를 힐끔힐끔 보았다. 방금 경적 소리를 낸 게 그가 아니라 곽승재인 것이 분명했다.SUV 차량 높이가 꽤 있었기에 아마 방금전에 그녀와 민시후가 장난치는 걸 본 모양이다.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가운 얼굴빛을 한 채 앉아있는 곽승재를 보며 고은서는 성가시다는 듯 몸을 홱 돌리면서 민시후에게 말했다.“초록불이야. 안 가고 뭐 해?”민시후도 차 안에 앉아있는 육현석과 곽승재를 보았다. 그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하고 액셀을 밟기는커녕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백미러를 쳐다보았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여기에서 볼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그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전에 두 사람이 운전하면서 맞부딪친 일이 떠올랐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안전벨트를 꼭 쥐고 말했다.“민시후, 우리 약속 있는 거 잊은 거 아니지? 이상한 짓 하지마.”민시후는 불쾌하다는 듯 그녀를 보며 말했다.“이상한 짓이라니. 전에 내 차를 먼저 박은 사람은 곽승재거든.”‘네가 곽승재 차 앞에 막아서서 시비 걸지 않았으면 곽승재가 널 박을 리도 없었거든.’고은서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민시후가 조용히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이자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그러면 나 먼저 차에서 내려도 돼?”“너 언제부터
“형, 형수님이 민시후한테 별다른 마음은 없어 보이는데 걱정하지마.”“내가 무슨 걱정을 한다고 그래?”곽승재가 약간 어색해하며 말했다.“이미 이혼한 사이인데 고은서가 누구한테 마음이 가든 누구랑 있든 나랑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야.”“아까 썩은 표정을 하고 경적을 울린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네.”육현석이 작은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그러나 갑자기 차가운 시선이 느껴지면서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애써 웃으면서 변명거리를 찾았다.“맞아, 맞아. 형 말이 맞아. 형수님이 누구랑 있든 형이랑 이젠 아무 상관없는 일이지. 역시 이혼 같은 작은 일 때문에 속상해하는 일은 전혀 없는 우리 형, 상남자답다니까.”곽승재의 얼굴빛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걸 발견한 육현석은 이내 입을 화제를 돌렸다.“형, 형수님이 형을 보기 싫어하는 것도 화나서 그러는 거잖아. 계속 이렇게 자존심 때문에 고집부려서는 안 된다니까. 형수님한테 문자도 하고 전화도 하면서 존재감을 나타내야 할 거 아니야.”그의 말을 들은 곽승재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네가 말했다시피 날 싫어하잖아. 그런데 무슨 존재감을 나타내라는 거야?”“지금 상대방을 잊지 못하고 놓아주기 싫은 사람은 형이잖아.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하고 형수님이 스스로 돌아올 것 같아? 형, 자존심 따위 버리지 않으면 형수님 영원히 돌아오지 않아.”육현석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전에 낯선 사람 사이로 지내도 되냐고 물었을 때 아주 흔쾌히 된다고 답하던 고은서의 모습이 떠올랐다.어제 점심, 그가 스케줄을 바꾸면서까지 병원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고은서가 이혼해서 무척 기쁘다고 하면서 자신의 뒤담화를 하는 걸 들었다.그러나 방금전 민시후와 다정하게 장난치면서 자신을 보고서도 모르는 척하는 그녀를 생각하면 이건 자존심을 내려놓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고은서가 이젠 진짜 그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곽승재는 눈살을 질끈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언제 고은서랑 다시 화해하고 싶다고 했어? 인제
“걱정하지 않아도 돼. 민아 데리고 오지 않았으니까.”송민준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어갔다.“혹시나 또 고집부리면서 기분 나쁘게 할까 봐 오늘 너희랑 만난다는고 얘기하지 않았어.”민시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제발 좀 북제로 데려가. 해성에 계속 있게 하지 말고.”송민준은 나긋한 미소를 보이면서 답했다.“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게다가 이미 ZY 그룹으로 출근하기로 했다던데.”그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눈살을 더 세게 찌푸렸다.“우리 아버지가 송민아를 강제로 ZY 그룹에 밀어 넣은 건 나도 별다른 방법이 없는데 나중에 또 고은서를 해치려 하거든 가만두지 않을 거야! 또다시 너랑 우리 아버지 때문에 봐주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고은서는 민시후를 쏘아보았다.‘나랑 송민준을 원수 사이로 만들 생각인 거야?’“뭘 쏘아봐?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민시후는 점점 더 흥분해 하며 말했다.“전에도 몇 번이고 널 협박했잖아. 심지어 간호사를 교사하여 우리 아이까지 잃게 한 사람이야. 네가 날 막지만 않았으면 내가 송민아를 가만둘 거 같아?”“...”고은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전에 유산한 경과를 민시후에게 간단히 알려주면서 송민아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그걸 이렇게 이용할 줄은 미처 생각 못했다.씩씩거리는 민시후를 보면서 고은서는 그가 배우를 하지 않은 게 너무 아쉽다고 속으로 감탄했다.송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도 전문가에게 나가보라 하고 직접 민시후에게 차를 따라줬다.“전에 병원에서 있었던 일은 정말 미안해. 오늘 만나자고 한 것도 그 일 때문이야.”송민준이 말하기를 진희숙은 송민아를 친딸로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돌봐온 사람으로서 그녀가 두 사람 일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그런 모험을 했다고 한다.그리고 송민아가 간호사랑 만난 모습이 포착된 사진은 진희숙이 그녀를 불러내 우연하게 찍힌 사진이라고 한다.“민아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투약한 간호사도 전에 이미 곽승재에 의해 경찰서로 넘겨졌는데 그녀의 증언에도 진희숙만 언급되었다.고은서는 이 모든 결과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그녀는 속으로 백유미의 신중함을 탄복했다. 그녀가 경각심을 낮추지 않고 제때 녹음하면서 증거를 남겼더라면 지금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당사자로서 고은서는 경찰 조사에 협조한 후 나머지 일을 변호사에게 맡겼다.“걱정하지 마세요. 증거가 확실하니까 상응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송민준이 말했다.고은서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진정으로 대가를 치르길 바라는 사람은 백유미이지 대신 누명을 쓴 진희숙과 간호사가 아니었다.“우리 민아도 잘못한 곳이 있으니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원하는 보상이라도 있으시면 얼마든지 말하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서 보상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송민준이 말을 이어갔다.“보상은 필요 없어요. 괜찮다면 제 부탁 하나 들어주시죠.”고은서가 말했다.“무슨 부탁이요?”“백씨 집안에서 요즘 여러 프로젝트를 도맡아 하고 있다던데, 그 프로젝트들을 저 대신 산통 깨주세요.”고은서도 민시후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곽수혁이 GS그룹 일에 끼어들면서 백씨 집안에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그녀의 말을 들은 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송민아 보고 나한테도 그만 집적거리고 해. 나도 스트레스 그만 받고 싶어.”옆에 있던 민시후가 갑자기 말을 보태었다.송민준은 민시후를 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시후야, 민아가 어릴 적부터 널 좋아한 걸 너도 알고 있잖아. 민아가 포기하지 않는 이상 우리도 곁에서 어쩔 수 없어.”그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성가시다는 듯 직설적으로 말했다.“난 어릴 적부터 송민아가 싫었다고.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데는 진짜 짝이 없다니까.”송민준은 그의 말에 답하지 않고 시선을 고은서에게로 돌리며 물었다.“이혼했다고 들었는데 혹시 시후랑 함께 있을 생각이신가요?”‘소식이 빠르네.’이혼한 지 며칠 되지도 않
고은서가 되물었다.“왜 그렇게 묻는 거야?”민시후는 콧방귀를 뀌면서 답했다.“백씨 집안 프로젝트를 산통 깨는 거 왜 나한테 부탁하지 않고 송민준한테 부탁한 거야? 목적이 분명하잖아.”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반박했다.“그냥 너한테 빚지기 싫어서 그런 건데.”“우리 둘 사이에 무슨 빚 같은 소리를 하고 그래. 나한테 널 깊이 사랑하는 캐릭터를 유지하라고 한 사람은 너잖아.”민시후가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그럼 송민준도 내 속셈을 알아차렸다는 거네.”“알아차리라지 뭐. 게다가 송민준 집안 도우미가 그런 짓을 했는데 네가 의심하는 것도 아주 당연한 일이지 않아? 걔도 자신이 무고하다는 걸 증명할 의무가 있잖아.”민시후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고은서는 민시후가 자신을 이 정도로 지지할 줄은 전혀 생각 못 했다.“그런데 그 도우미가 수상하긴 해. 처음부터 모든 걸 혼자 안고 갈 생각이었으면 숨을 필요가 없잖아. 게다가 왜 송민아 전화는 받지 않으면서 송민준한테는 저렇게 쉽게 걸려든 거지?”민시후는 그녀가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고 비아냥거리는 대신 그녀에게 주의를 주었다.“이번에는 너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그냥 넘어가 줄 거야. 그런데 다시는 송민준 앞에서 꼼수 부릴 생각하지 마.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나도 감히 못 건드리는 존재라고.”고은서는 민시후의 말을 들으면서 처음에는 고개를 끄덕였는데 마지막 한마디를 듣자마자 참지 못하고 반박했다.“제발 총명한 척 그만해줄래?”민시후는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너보다는 총명하지. 게다가 내가 멍청하다고 생각했으면 날 찾아와서 협력을 제안하지 않았을 거잖아.”고은서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민 도련님, 겸손한 것도 일종 미덕이에요.”“이미 충분히 우수해서 그 어떤 미덕도 나에겐 금상첨화일 뿐이야. 딱히 너무 중요하진 않다는 생각이 드네.”...두 사람은 곧장 ZY 그룹으로 돌아갔다.고은서도 정식으로 회사 직원들에게 인사했다.전에 입사 활동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데다가 그
민시후는 성가시다는 듯 그녀를 째려보면서 말했다.“자기애가 너무 넘치는 거 아니야? 내가 이혼까지 했던 너를 왜 좋아해?”고은서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그녀와 함께 연기하면서 이미 귀찮은 일들을 많이 겪었는데 진짜 그녀를 좋아하게 된다면 성가신 일이 지금보다 더 많을 것이다.게다가 고은서는 더는 사랑이란 단어에 속박당하고 싶지 않았다.호텔 앞에 도착했을 때 고은서는 민시후한테 내리지 말라고 말했다.“나 혼자 들어가면 돼.”“확실해?”“응.”민시후는 그녀를 힐끗 보더니 이내 아무 말 없이 떠났다.고은서는 호텔 로비로 들어가면서 박지연에게 연락했다.그러나 전화가 통하기도 전에 프런트 데스크 앞에 서 있는 익숙한 모습을 발견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곽승재였다.그의 옆에는 화려한 옷차림을 한 여자 한 명이 서 있었다.이십 대 좌우로 보였는데 손에는 명품백을 들고 있었고 아주 화려한 옷차림에 몸매도 우월했다.함께 서 있는 두 사람은 마치 선남선녀 같았다.이를 본 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렸다.‘뭐 하자는 거지? 내가 이 호텔에 있는 걸 알면서도 굳이 여자를 데리고 여기로 온다고? 해성에 다른 호텔이 없는 것도 아닌데.’“은서야, 괜찮아?”전화 너머로 박지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이내 시선을 돌리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으며 답했다.“응. 너 온 닥터랑 얘기 나눠봤어? 왜 그 여자랑 함께 카페로 갔는지는 물어봤고?”“물어봤지. 다른 친구가 유혜린이 귀국한 거 알고 같이 밥 먹자고 했대. 그런데 종일 수술하면서 피곤해서 그저 같이 커피 사러 간 거라고 했어.”“그게 다야?”고은서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면서 말했다.“응.”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고은서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물었다.“다친 손이 괜찮은지는 안 물어보고?”“연고 가져다줬어. 병원으로 새로 개발한 건데 흉터 없애는 데 좋다면서 주던데.”“그 외에는 아무 말도 없었어?”고은서가 닫힘 버튼을 누르면서 캐물었다.“잠시만요.”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고 할 때
곽승재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의외네. 내 이름을 다 기억하다니.”‘머리에 문제 있는 거 아니야?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면서 왜 비아냥거리며 난리야?’엘리베이터는 문이 너무 오래 열려있은 탓에 경보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곽승재가 길을 비켜줄 생각이 없어 보이자 고은서도 더는 그와 다투기 싫어 엘리베이터 버튼이 있는 구석에 서 있었다.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데 일이 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기에 그저 참을 생각이었다.이내 곽승재가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면서 경보 소리가 멈추고 문이 닫히면서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몇 층으로 가세요?”고은서가 곽승재랑 함께 온 여자에게 물었다.여자는 그녀를 아래 우로 훑어보더니 자랑이라도 하는 듯 턱을 받쳐 들고 말했다.“그쪽이랑 같은 층이에요.”‘나랑 같은 층이라고? 진짜 엿 먹이려고 작정한 거야?’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렸다.엘리베이터 각 면에 거울이 있었기에 그녀는 곽승재와 여자의 행동을 엿볼 수 있었다.여자는 곽승재 곁에 꼭 붙어서 물었다.“대표님, 저분과 아는 사이세요?”자신의 얘기가 나오자 고은서는 고개를 푹 숙이고 못 들은 척했다.곽승재는 콧방귀를 뀌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자도 눈치 있게 더는 캐묻지 않고 그에게 애교부리기 시작했다.“대표님, 이 호텔 레스토랑 음식이 엄청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오늘 저녁에 아무것도 드시지 않은 것 같으신데 웨이터한테 우리 룸으로 가져다 달라고 할까요?”곽승재는 아주 덤덤하게 답했다.“하고 싶은 대로 해.”“그럼 저 와인도 같이 주문해도 될까요?”여자는 곽승재의 대답에 점점 더 담이 커졌다.“오늘 대표님 대신 운전하느라고 연회 때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단 말이에요. 보상은 해줄 거죠?”곽승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응.”그의 대답을 얻은 여자의 목소리가 방금전보다 더 애교스러워졌다.“고마워요, 대표님.”‘우웩, 토할 것 같아.’고은서는 그녀의 목소리에 속이 울렁거린 탓에 저도 모르게 그녀를 힐끗 쏘아보았다.“왜, 의견이라도 있
곽승재의 행동을 보고 오해를 한 듯 엘리베이터 밖에 서 있던 커플이 그를 향해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여자친구분을 미처 보지 못하는 바람에...”“여자친구 아니에요. 그냥 낯선 사람일 뿐이에요.”곽승재가 차가운 목소리로 상대방의 말을 끊었다.커플은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고은서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고는 이내 자신의 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고은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곽승재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대표님, 화내지 마세요. 아까 그 여자...”여자가 말하면서 다정하게 그의 팔짱을 끼려고 할 때, 곽승재가 한기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여자가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몇 마디 더 보태려고 할 때 곽승재는 이미 뒤도 돌아보지 않고 룸으로 향했다.그러나 두 사람이 예약한 룸은 다름 아닌 고은서의 맞은편 룸이었다.이를 발견한 여자는 또다시 멈칫했다. 그녀는 두 사람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하지만 그녀가 곽승재한테 빌붙으려 하는 데는 별 상관이 없었다.여자는 연회에서 곽승재에게 첫눈에 반했다. 그녀는 여러 업계를 오가면서 사람 보는 눈이 꽤 높았는데 대부분 남자들은 잘난 체를 하지 않으면 또 다른 여러 가지 일로 맘에 안 드는 일이 일쑤였다. 그러나 곽승재처럼 뼛속으로부터 우러져 나오는 고귀한 기품을 가진 남자는 어디 가나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그녀 또한 그에게 푹 빠진 것이다.처음에는 자신을 냉대하는 곽승재를 보면서 낙심하긴 했으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매력을 어필했다. 끝내 연회가 끝나기 전에 곽승재는 무언갈 떠올렸는지 그녀에게 눈길을 주었다.수많은 남자를 만나본 그녀는 이내 그의 뜻을 깨닫고 그에게 대신 운전해서 데려다주겠다고 먼저 건의했다.아니나 다를까, 곽승재는 그녀에게 호텔 이름을 댔다.여자는 애써 흥분을 억누르고 곽승재와 함께 호텔로 향했다.하지만 곽승재는 프런트 데스크에서 룸만 예약하고 로비에 앉아 부하들과 온라인미팅을 했다.얼마나 지났을까, 여자가 농락을 당했다고 생각하려는 찰나 그
민시후는 코웃음을 치며 비꼬았다.“또 우리 형 들먹이네? 곽승재, 너도 이 수밖에 안 되냐? 설마 나만 쫓아내면 은서 씨가 널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민시후의 말은 곽승재의 정곡을 찔렀고 그는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고은서는 예전처럼 그를 밀어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반갑게 맞아주지도 않았다.곽승재는 가슴이 답답해졌고 숨은 쉴 수 있었지만 속이 꽉 막힌 기분이었다. 마침 손을 씻고 다가온 고은서는 싸늘한 분위기를 보고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그저 곽승재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여기서 안 먹을 거면 아주머니한테 국만 싸달라고 해서 가져가.”곽승재는 자연스럽게 식탁에 앉으며 대답했다.“먹고 갈 거야.”고은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이미숙은 주방에서 빠져나왔고 남은 세 사람은 어색하지 않지만 편안하지도 않은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쳤다.식사 후, 피곤한 모습의 고은서를 본 민시후는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는 나가기 전에 곽승재까지 데리고 떠났다.다음 날 오전, 고은서는 경찰서에서 연락을 받았다.어젯밤 쓰레기를 뒤지며 살아가던 두 노숙자의 혈액 검사 결과, 불법 약물 성분이 검출되었다는 것이다.그 약물은 뇌를 자극해 이성을 잃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고은서를 덮치려 한 것이었다.문제는 그 약물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였다. 조사 결과, 노숙자들이 먹은 음식과 술에서 검출되었고 누군가 일부러 약을 탄 술과 음식을 버린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발생한 것인지는 추가 조사가 필요했다.고은서가 사무실로 돌아갔을 때, 회의실에는 송민아가 있었고 접견실 소파에는 송민준이 앉아 있었다.그날 개업식 이후, 고은서는 송민준을 다시 만난 적이 없었다.개업식에서 송민준의 정장을 엉망으로 만든 일이 마음에 걸린 고은서는 송민아에게 그가 입고 있던 정장이 얼마였는지 물어봤었다. 그러나 송민아는 단칼에 보상을 거절했다.“겨우 정장 한 벌일 뿐인데 무슨 보상이야! 그럴 필요 없어. 우리 오빠도
“나 마침 라이트문 아파트에 가려던 참이야.”고은서가 거절할 틈도 없이 곽승재는 낮고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아주머니가 국을 끓였다고 하더라. 나한테 와서 가져가라고 했어.”원래 기분이 좋지 않던 민시후는 곽승재가 고은서네 가정부를 핑계 삼아 온 것을 보고 더 답답해졌다.“그래도 곽 대표가 데려다줄 필요는 없어!”그리고 이어 고은서를 향해 투정 부렸다.“나도 배고픈데. 내가 집까지 데려다주고 나도 뜨끈한 국 한 그릇 먹어도 될까?”민시후가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고은서는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그렇게 해.”그리하여 곽승재의 복잡한 표정 속에서 고은서는 민시후의 차에 올랐다.민시후의 차가 점점 멀어져갔지만 곽승재는 여전히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주민기는 밤바람 속에서 쓸쓸해 보이는 곽승재를 바라보며 안쓰러워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애써 여기까지 찾아왔건만 아내가 다른 남자와 다정하게 함께 있는 걸 목격하고 말았으니...’곽승재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심지어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다.‘하아... 대표님의 아내 되찾기 여정은 끝도 없이 험난하구나.’주민기가 속으로 한탄하던 중, 갑자기 곽승재의 시선이 그를 스쳤다.주민기는 몸을 바로 세우며 물었다.“대표님, 그래도 가시겠습니까?”곽승재는 입술을 꾹 다물고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사고가 났던 골목에 CCTV 설치해요. 그리고 사모님한테는 실력 좋은 운전사를 붙이도록 하세요.”“네, 대표님.”주민기가 고개를 끄덕였다.민시후는 그 길로 차를 몰아 고은서의 집에 도착했다.차를 세우고 막 올라가려는데 저쪽에서 막 도착한 곽승재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직접 운전해서 온 듯했고, 비서는 곁에 없었다.민시후는 그가 거슬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다행히 고은서는 곽승재를 기다릴 생각이 없어 보였고 결국 두 사람은 먼저 위층으로 올라갔다.집에 들어서자 이미숙은 같이 들어온 두 사람을 보고 살짝 놀랐다.“사모님, 곽 대표님도 오신다고 하셨는데 같이 안 오셨나요?”
고은서는 일부러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시후 씨,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재벌가 아들이라는 신분이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는 거야?”“시후 씨가 가족 앞에서 나에 대한 감정이 없다고 말하면 아버님과 형도 그냥 이성 친구라 생각하고 괴롭히지 않을 거야.”민시후는 그녀의 농담에 신경 쓰지 않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내가 포기하기를 원하는 거야?”고은서는 다소 수척해진 민시후의 얼굴을 보고 조용히 말했다.“사실 시후 씨도 잘 알잖아. 1년이 지나도 가족분들은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걸.”“민씨 가문에선 나와 곽 씨 집안의 혼인 관계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을 거야.”만약 고은서가 예전에 평범한 남자와 결혼했다면 민씨 가문에서도 그걸 덮을 수 있었겠지만 곽승재의 전처라는 신분은 그들에게 너무 민감하고 큰 문제였다.민씨 가문 같은 재벌 집안에서 가장 중요한 건 체면이기에 그녀가 며느리가 되는 걸 결코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고은서는 진지하게 말했다.“그러니 더 이상 고집부리지 말고 예전처럼 자유로운 삶을 살아.”“은서 씨, 아직도 내 마음을 믿지 못하는 거야?”민시후의 눈에 어두운 그늘이 깔렸다.“아니, 시후 씨 마음을 알아. 문제는 나야.”고은서가 계속해서 말했다.“만약 내가 정말 시후 씨를 사랑했다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함께할 수 있었을 거야. 시후 씨 가족의 태도나 외부의 시선도 개의치 않고 말이야. 하지만 내게는 그만큼 시후 씨에 대한 감정이 부족해. 그래서 시후 씨 가족분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다른 외부적인 이유도 나를 주저하게 만들지. 그래서 나는...”민시후가 갑자기 고은서를 끌어안으며 급하게 말했다.“그러지 마, 나에게 기회를 준다고 약속했잖아.”고은서는 마음속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그녀는 살며시 민시후를 밀어내며 말했다. “내가 한 말이 다 사실이라는걸 시후 씨도 알 거야. 그러니 그런 고집은 의미가 없어.”민시후는 여전히 고은서를 끌어안고 있었
고은서가 계속해서 뒤를 보고 있자 민시후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매번 여시은이 나타나면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 같아.”고은서가 민시후를 바라봤다. 설마 그렇겠냐고 말하다 곧 그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처음 여시은을 만난 건 고양이 쿠아를 구할 때였다. 그 후 서운에서 여시은의 방에서 불이 났고, 이사 파티에서는 민시후가 함정에 빠졌다.유일 투자은행 개업식에서 페인트가 뿌려졌고 지난번 골프장에서는 곽현수와 골프를 치던 장우현도 다쳤었다.모든 사건이 여시은이 직접 일으킨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이렇게 많은 우연이 있을까?’‘하지만 만약 우연이 아니었다면 여시은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고은서는 더 이상 추측하지 않기로 했다. “고객을 만나러 간다며? 나를 병원 앞에 내려주면 돼.”민시후는 약간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그깟 고객 때문에 다친 너를 그냥 두고 가는 사람 같아 보여?”고은서는 헛기침을 한 번 하며 말했다.“중요한 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민시후가 고은서를 바라보며 감정을 억누른 채 물었다.“왜 혼자 이런 곳에 왔어? 비서도 기사도 없이?”“새 프로젝트 때문에 온 거야. 그 회사의 작업실이 근처에 있거든.”고은서는 사실대로 말했다.“운전기사 부를 시간이 없었고 송민아는 다른 프로젝트로 바빠서 이번엔 그냥 혼자 왔어.”민시후는 다시 한번 말없이 고은서를 바라보았다. 다만 조금 더 차분해 보였고 무언가 애써 참는 것처럼 보였다.고은서의 요청대로 민시후는 그녀를 근처의 한 동네 병원에 데려갔다.동네 병원은 예약이 필요 없었고 진료도 비교적 간편했다.다행히 고은서의 팔에 난 상처는 깊지 않았다. 하지만 약 10cm 정도 되는 길이의 상처였고 지금은 더 이상 피가 나지 않았지만 주변이 이미 검붉게 부어 있어 보기에 꽤 충격적이었다.의사는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발라준 후, 파상풍 예방주사도 맞혔다.고은서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시은 씨, 전 괜찮아요.”고은서는 팔이 조금 아팠지만 상처를 보니 긁혔을 뿐 살까지 깊게 파고들지 않아 구급차를 부를 정도는 아니었다.“약국에 가서 씻고 약만 바르면 돼요. 경찰이 올 때까지 기다릴게요.”“그래도 병원에 가는 게 좋겠어요!” 여시은이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혹시라도 감염되면 큰일이에요! 제 기사님이 앞에 있어요. 그분이 병원에 데려다 줄 거예요. 저가 대신 여기서 경찰을 기다릴게요!”말을 마친 여시은은 고은서가 거절할 새도 없이 자기 사를 부르러 갔다.“은서 씨?”도로 옆에서 깜짝 놀란 듯 급하게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고은서가 고개를 돌리니 하얀색 캐주얼 슈트를 입고 차에서 뛰어 내려오는 민시후의 모습이 보였다.개업식 때 민시후가 고은서를 도와 성동욱 일을 처리해 준 후, 그녀와는 거의 연락 하지 않았다. 그의 비서가 두 번 전화를 걸어 도와줄 일이 있는지 물어왔으며 민시후가 최근 업무 때문에 너무 바빠서 살도 빠졌다는 얘기를 했었다.눈앞에서 다가오는 민시후를 보고 고은서는 갑자기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왜 여기에 있어? 손은 왜 그래?” 민시후는 고은서의 손을 잡고 긴장하며 물었다.“별거 아니 야.” 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노숙자들과 싸우다 철판에 긁혔어. 다행히 살까지 파고들지 않은 것 같아. 시후 씨는 어떻게 여기 있어?”“고객과 약속이 있어서 지나가던 길이야!”그때 여시은의 운전기사가 다가왔다. “지금 병원에 모셔다드릴까요?”여시은이 웃으며 말했다. “민시후 씨가 계시니 저는 빠져도 될 것 같아요. 빨리 은서 씨를 병원에 데려다주세요!”“시은 씨는 어떻게 여기에 계세요?” 민시후가 물었다.지난번 여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이 여시은과는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그녀의 가정부가 관련되었기 때문에 민시후는 그녀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지 않았다. 그의 태도는 어쩔 수 없이 차가워졌다.여시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지만 여전히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 “여기 유명한 동물
게임 회사의 작업실은 다소 오래된 작은 아파트 단지에 위치해 있었고 단지에는 경비나 순찰을 하는 경비원도 없었다.골목에는 가로등이 있었지만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 비해 꽤 외진 곳이었다.차는 골목에 주차되어 있었고 고은서는 핸드폰에 집중하느라 주변 상황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두 남자를 알아챘을 때는 이미 그들이 바로 눈앞까지 다가왔다.두 남자는 하나는 마르고 키가 컸고 다른 하나는 까무잡잡했다. 그들은 헤진 옷을 입고 있었고 손에 든 짐 꾸러미에는 많은 쓰레기가 담겨 있었다. 아마도 근처에서 쓰레기를 주워 생계를 잇는 사람들인 듯했고 몸에서는 고약한 악취가 났다.고은서는 속으로 구역질을 참으며 본능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섰다.하지만 그녀는 차 옆에 서 있었기 때문에 한발 물러서자 차에 기대게 되었다.이제 차 문을 열고 들어가기는 이미 늦었고 두 남자가 점점 다가오고 있어 도망칠 수도 없었다.두 남자의 눈가는 이상하리만치 붉었고 고은서를 발견하자 점점 더 흥분된 듯 보였다. 그들은 입에서 지저분한 욕설을 뱉으며 다가왔다.“젠장, 오늘 운이 정말 좋아! 이 근처 쓰레기통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울 수 있을 줄 몰랐네. 게다가 이렇게 예쁜 여자도 만날 줄은!”“그렇지, 도시의 여자는 역시 다르네. 이 피부를 보라고. 아주 보드라워! 하하하, 집으로 끌고 가서 잘 놀아보자고!”그때, 악취 나는 마르고 키 큰 남자가 더럽게 손을 뻗으려 했고 고은서는 눈살을 찌푸리며 남자의 아랫배를 향해 강하게 발길질했다!갑작스러운 공격에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아랫배를 움켜잡고 무릎을 꿇었다.까무잡잡한 남자는 그제야 반응해 고은서를 잡으려 했고 고은서는 틈을 타 재빨리 몸을 틀어 그에게 발차기를 날렸다!하지만 남자는 상대적으로 더 강한 체격을 가졌고 고은서는 서 있는 자세 때문에 힘을 제대로 실을 수 없어 그를 넘어뜨리지 못했다.그러자 남자는 화가 난 듯 욕설을 퍼부으며 팔을 휘둘러 고은서를 향해 달려왔다.고은서는 민첩하게 몸을 낮추며 땅에 떨어진
육현석은 박지연의 말을 듣고 눈이 반짝였다.“방금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줘!”박지연은 눈에 눈물이 고인 채로 그를 바라보며 더 분명하게 말했다.“말했잖아, 현석 씨가 너무 보고 싶다고. 만약 빨리 돌아올 수 없다면 내가 당장 현석 씨를 찾아갈 거야!”육현석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듯, 바로 대답했다.“정말? 그럼 내가 비행기 표 예약해 줄게! 짐 싸고 있어, 내가 기사 불러서 병원으로 데리러 갈게!”“응!”박지연은 행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미처 멀리서 혼자 서 있는 온승준을 보지 못했다.박지연이 남자 친구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온승준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아파졌다. 예전에, 그녀도 그렇게 그를 바라봤었고 그를 볼 때마다 눈이 반짝였었다.그는 그를 위해 L 국까지 갔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다른 남자에게로 돌아갔고 박지연의 마음속에 그의 자리는 더 이상 없었다.그 순간, 온승준은 박지연을 완전히 잃었다는 절망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얼마나 그녀에게 차가웠고 무관심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박지연이 원한 것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는데, 그는 그것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전화를 끊은 박지연은 복도에 서 있는 온승준을 발견했다. 그는 마치 서리 맞은 배추처럼 기운이 빠져서 문을 붙잡고 있었다.“괜찮아? 의사 불러줄까?”박지연은 그가 몸이 불편해 보여 물었다.온승준은 그녀의 촉촉한 눈과 입가의 미소를 보며 가슴이 더 아파졌다.“지연아, 미안해.”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박지연은 그 말의 의미를 알았지만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우리 사이는 이제 끝났어. 그러니 더 이상 나에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지금의 아내를 소중히 여기길 바라.”그 말을 끝으로 박지연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급히 떠났다.저녁 무렵, 게임 회사에서 나온 고은서는 박지연의 전화를 받았다.그리고 해주시로 간 박지연이 육현석과 이모와 함께 셋이서 식사를 했다는 말을 듣고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이제 양가 부모님을 만나는 단
박지연은 온승준이 휴대폰을 꺼내 드는 모습을 무심코 바라봤다. 화면에 나타난 발신자는 온승준의 어머니였고 박지연은 유혜린과 관련된 일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온승준은 휴대폰을 무음으로 바꾸고 말을 이어갔다.“지연아, 우리 부모님이 약속하셨어. 내가 유 닥터랑 결혼만 하면 더 이상 너한테 연락하지 않겠다고.”그는 간절히 부탁했다.“나도 이제 곧 이 병원을 떠날 거고, 그러면 우리는 만날 기회가 없을 거야. 그냥 마지막으로 선물을 하나 주고 싶은데, 정말 안 받을 거야?”“응, 받을 수 없어.”박지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결혼을 결심한 이유가 무엇이든, 결혼을 하기로 했으면 그 약속을 지키고 잘 살아. 나에게 상처를 줬으니 이제 다른 여자에게는 더 이상 상처 주지 말았으면 해.”온승준은 무슨 말을 더 하려고 했지만 사실 그가 할 말은 더 이상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한 건 그 자신이었다. 박지연과 재혼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결국 부모님의 뜻에 따라 타협했던 것이었다.그때, 안소희가 사무실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지연 언니, 잠깐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아요.”안소희의 얼굴에 떠오른 흥분을 본 박지연은 의아해하며 물었다.“무슨 일이야?”안소희는 온승준을 한 번 쳐다본 뒤 박지연을 문밖으로 끌고 가며 말했다.“저쪽이요. 배달원이 본인 사인이 필요하다 해서요. 전화가 무음이라서 연결이 안 되길래 제가 배달원 데리고 왔어요!”“여기요! 여기로 가져다주세요!”안소희가 말을 마치자 배달원이 큰 꽃다발을 들고 다가왔다.“박지연 씨, 본인 맞으시죠? 육 대표님께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여기다 사인해 주세요.”박지연은 서명을 마친 후 꽃다발을 받았다. 그 안에는 푸른 장미가 들어 있었고, 그 속에 길고 정교한 보석 상자가 들어 있었다.“빨리 열어보세요! 안에 뭐가 있을지 궁금해요!”안소희가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그녀는 육현석과 박지연의 연애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달콤한 순간을 보는 걸 좋아했다.박지연은 천천히 상자를 열
박지연은 순간 온승준이 술에 취했던 그날 밤을 떠올렸다. 그날 밤, 유혜린은 그를 집까지 데려다주었고 밤새 그를 돌봐주었다.‘그날 밤, 무언가 일이 생겼던 걸까?’“그날, 나는 유 닥터가 단순히 나를 돌봐준 거라고만 생각했어.”온승준은 마치 박지연의 생각을 읽은 듯 말했다.“근데 유 닥터 말로는 내가 유 닥터를 너로 착각했다고 하더라고. 집에 들어가자마자 자기를 방으로 끌고 갔다고...”“나는 술에 취해본 적이 없어서 술 취한 후 행동이 어떤지 몰라. 그런데 다음 날 출근했을 때 설민희 씨가 내가 술에 취해 너를 끌어안고 집에 데려가겠다고 하는 영상을 보여줬어. 그래서 내가 착각했을 가능성도 있긴 해.”온승준은 이미 이 사실을 받아들인 듯했고 그의 목소리는 감정 없이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차분했다.“유 닥터는 원래 그 일을 없었던 걸로 하려고 했대. 나한테 말할 생각도 없었는데 며칠 전에 자기가 임신했다는 걸 알게 된 거야.”“유 닥터가 그 소식을 보냈을 때 나는 병원에서 어머니 퇴원 수속을 돕고 있었어. 그때 마침 어머니가 그 메시지를 봤고 그 후 나한테 유 닥터랑 결혼하라고 하셨어...”온승준은 박지연에게 설명하는 동안,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했다. 박지연은 그가 반항하려 했을 수도 있었지만 손주를 원하는 부모님을 이기기엔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담담하게 말했다.“굳이 나한테 설명할 필요 없어. 우리는 이미 이혼했잖아. 결혼이든 재혼이든 그건 자유야. 게다가 나는 이미 남자 친구가 있어.”‘남자 친구’라는 말에 온승준의 표정이 잠시 흐려졌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박지연 앞에 놓았다.“이거 주고 싶었어.”박지연이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어제 악세서리 가게에서 봤던 그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목걸이에 박힌 다이아몬드는 하나하나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었고 조명 아래서 반짝이고 있었다.진열장에 전시된 다이아몬드 목걸이라는 건, 그 가격이 결코 저렴하지 않다는 걸 의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