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재훈이 고개를 끄덕였다.“기억해요. 은서 씨가 각종 향 조합하는 데 독특한 견해를 가지고 있어서 인상 깊었어요.”고은서가 말을 이었다.“그럼 저희가 시트러스 향을 추가하는 것에 대해 논의한 것도 기억하시죠? 하지만 조제해보니 시은의 요구사항과 맞지 않을 것 같아서 사용하지 않았고요.”여재훈은 실제로 고은서와 향 조합 등에 대해 논의한 바 있었다.시트러스뿐만 아니라 다른 향들의 조합도 시도해본 적이 있었다.“적합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 제가 왜 계속 사용했겠어요?”고은서는 또 자신이 조제한 향수가 에센셜 오일을 임시로 혼합한 것이 아니라 증류와 침전 등 일련의 공정을 거쳤다고 설명했다.“방금 도우미가 가져온 이 병에는 시트러스 계열 오일이 나중에 추가된 게 분명해요. 양도 너무 많아 향이 강렬하게 나는데 정상적인 조향사라면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절대 하지 않아요.”“완성된 향수에 일부러 넣었을 수도 있잖아요. 어차피 아무도 모르는데.”유은수가 의심을 제기하자 고은서가 웃음을 지었다.“그럴 가능성도 없진 않죠. 하지만 시은에게 시향하기 전에 먼저 시향지에 뿌려서 맡아본 후에 시은이가 손목에 뿌렸죠.”고은서는 가방에서 시향지를 꺼내며 말을 이었다.“여재훈 씨, 차이가 나는지 확인해 보시겠어요? 시향지는 제가 여씨 저택에 도착한 후에 사용했고 주위에 사람들이 다 있었어요. 게다가 여시은의 지문도 남아있죠. 이건 제가 조작할 수 없어요. 믿기지 않으시면 경찰에 연락해 검증해보시죠.”고은서에게서 시향지를 받은 여재훈이 가볍게 냄새를 맡았다. 확실히 시트러스 계열의 향기는 없었다.“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여재훈이 여시은을 바라보았다.“이 향에는 자극성분이 없는데 쿠아가 왜 너를 물었어? 향수병의 향기는 또 왜 다른 거야?”여시은은 충격을 받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아빠, 저도 모르겠어요.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야? 쿠아가 나를 물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은서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 하다니!”여시은이 화난 목소리로 현장의 도우미들
화가 난 여시은은 눈이 빨개졌다.“너 왜 계속 은서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 했는지 알겠다! 네 실수를 감추려는 거였어! 이번 일은 절대 용서할 수 없어! 너 해고야!”이 말을 들은 유은수는 더욱 비통하게 울며 다시는 그러지 않을 테니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여재훈에게 애걸복걸하기 시작했다.진상이 이미 밝혀진 이상 이렇게 소란을 계속 피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여재훈은 유은수를 일단 방으로 데려가라고 한 후 나중에 결정을 내리겠다고 했다.울며 사과하던 유은수가 떠난 뒤 여재훈은 방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내보냈다.드디어 조용해졌다.여재훈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사과했다.“고은서 씨, 정말 미안해요. 평소에 집안일을 소홀히 했고 시은이도 도우미들을 관리한 경험이 없어서 이런 일이 벌어졌네요. 하마터면 누명을 쓸 뻔했네요.”고은서는 여재훈이 아직도 속고 있다는 걸 알았다.여시은의 수법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유은수만 나서게 했고 자신은 전혀 관여하지 않은 척하며 오히려 고은서를 변호하는 척했다.여재훈의 입장에서 자기 딸을 믿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고은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는 괜찮아요. 윗물이 맑으면 아랫물도 맑은 법이겠죠. 시은이가 쿠아에게 물려서 고생하겠네요.”여시은은 고은서 말에 담긴 비꼬는 뜻을 못 들은 듯 빨개진 눈으로 말했다.“정말 생각도 못 했어, 만나는 도우미들마다 다 이렇게 나쁜 마음을 품고 있을 줄이야! 평소엔 항상 웃으며 잘 대해주고 나를 특별히 챙겨주더니 뒤에서는 이렇게 무서운 짓을 하다니...”여시은이 여재훈의 소매를 잡으며 서운해했다.“아빠, 내가 너무 무능한 거 같아요. 도우미에게까지 이렇게 속다니...”여재훈이 여시은의 어깨를 토닥였다.“네 탓이 아니야. 강성의 집사님을 여기로 오라고 할게. 그분이 관리하면 이런 일이 없을 거야.”여시은은 여전히 자책하는 얼굴로 고은서에게 사과했다.“은서야, 정말 미안해. 오늘은 같이 앉아서 바비큐도 먹으며 오해를 풀려고 했는데 이런 일이 생겨서..
“결국 고은서 씨가 억울함을 당한 건 사실이니 고은서 씨를 만나면 대신 사과의 말도 전해줘.”담담한 표정의 곽승재는 대답 대신 말을 돌렸다.“여 대표님, 판주는 GS 그룹의 하나의 투자은행일 뿐이고 업무도 비교적 단순해 여시은이 배울 게 많지 않습니다. 여 대표님이 여시은 씨를 단련시키고 싶으시다면 더 좋은 곳으로 보내시는 게 좋을 겁니다.”곽승재의 뜻을 알아차린 여재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고려해 볼게.”곽승재가 떠난 후에야 여재훈이 엄숙한 표정으로 딸을 바라보았다.“시은아, 솔직히 말해 봐. 오늘 일은 유은수가 네 지시에 따라 일부러 그렇게 한 거지?”도우미 한 명이 꾸지람을 듣고 벌금을 부과했다고 원한을 품고 이런 방법으로 복수할 계획을 세웠다는 게 여재훈에게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하지만 아까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딸을 공개적으로 의심할 수는 없었다.“아빠, 어떻게 나를 의심할 수 있어요!”여재훈의 말을 들은 여시은은 천추의 한을 품은 듯 눈물을 비 오듯 흘리며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은서와 곽 대표님이 나를 안 믿으시는 건 그렇다 쳐도 아빠까지 저를 의심하다니! 그럼 아까 경찰을 부르지 그랬어요? 진상을 조사해서 내가 유은수를 부추겼는지, 유은수가 저를 해치려고 계획한 건지 알아보게요!”여재훈은 딸의 반응에 약간 죄책감을 느꼈다.일이 바빠 딸이 대부분 혼자 집에서 지내다 보니 성격이 오만하긴 했지만 그래도 대체로 사려 깊고 분별력 있는 아이였고 말과 행동을 함에 있어서도 분수를 알았다.그런데 어떻게 이런 식으로 의심할 수 있을까?여재훈은 딸에게 휴지를 건네며 말했다.“아빠가 잘못했어, 화내지 마. 그냥 유은수라는 도우미가 어떻게 고양이를 자극할 수 있는 향을 알고 짧은 시간에 이렇게 계획적으로 일을 꾸민 게 이해가 안 가서 그래.”“그러니까 아빠는 여전히 나를 의심하시는 거네요!”여시은이 휴지를 내팽개쳤다.“유은수가 하면 이상하고 내가 시켰다고 하면 정상이란 말이에요? 아빠, 저는 향에 대
딸의 슬픈 모습에 마음이 아픈 여재훈은 여시은의 눈물을 닦아주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당연하지.”이 말을 들은 여시은은 여재훈의 품에 매달리며 서럽고 감동적인 눈물을 흘렸다.“아빠, 거짓말하는 거 다 알아요. 전 아무런 능력도 없고 잘하는 것도 하나도 없잖아요.곽 대표님께도 인연을 맺고 싶다고 말했는데 나를 무시하더라고요... 전 실패한 사람인가 봐요, 정말 못난 사람이에요...”여재훈이 딸의 어깨를 토닥이며 다정하게 말했다.“시은아, 넌 충분히 뛰어나. 실패한 사람이 아니야. 정말 승재와 결혼하고 싶다면 내가 직접 말해볼게.”“싫어요, 그러면 승재 씨는 더욱 저를 싫어할 거예요...”여시은이 슬픈 목소리로 거절하자 여재훈도 방법이 없었다.“그럼 네 생각엔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아?”여시은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들고 말했다.“아빠, 나도 회사를 차리는 건 어때요?”비록 딸의 요구가 약간 장난 같아 보였지만 더 이상 딸이 슬퍼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던 여재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아빠, 정말 최고예요...”여시은이 여재훈의 팔을 끌어안았다.“앞으로는 절대 나를 의심하면 안 돼요! 난 아빠의 딸이에요, 아빠가 하나하나 가르쳐줬는데 그렇게 추한 일을 할 리 없잖아요! 내가 직접 유은수를 경찰서에 데려가서 혼내주도록 할게요!”여재훈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한 번도 딸의 교육을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딸은 평소에 벌레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할 정도로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씨 따뜻한 아이였다.그러니 자신이 과민반응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은 도우미의 계획된 행동이었을 뿐이다....“승재 씨도 전용 기사가 있잖아. 왜 내 차에 타는 거야?”차 안에서 고은서가 꽤 짜증 난 듯한 표정을 지었다.여씨 저택을 나와 차에 막 앉았을 때 곽승재가 무단으로 그녀의 차 문을 열고 올라탄 것이었다.곽승재는 고은서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되물었다.“지난번에 물에 빠진 일, 대체 어떻게 된 거야?”농장에 있었던 그 날, 현장에
곽승재는 어두운 눈빛으로 고은서를 응시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서가 말을 이었다.“예전 생각이 나더라고. 백유미에게 무슨 일만 생기면 당신은 늘 까닭도 묻지 않고 날 탓했지. 설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어. 설령 내가 설명해도 전혀 믿어주지 않았어. 그냥 내가 악질이고 구제 불능이라고 했었지.”곽승재의 안색이 약간 변하더니 입술도 꽉 깨물었다.“승재 씨, 지금 많이 변했어. 나에 대한 감정이 진심이라는 것도 알아. 하지만 내 마음이 예전으로 돌아갈 순 없어요.”고은서가 곽승재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이혼한 지 이렇게 오래되었는데도 나를 향해 보였던 혐오, 받지 않았던 전화, 백유미를 감싸던 모습을 떠올리면 여전히 깊은 절망감이 밀려와.”“은서야, 그만 얘기해.”곽승재가 낮고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니, 계속 말할 거야.”고은서가 단호하게 말했다.“곽승재, 당신은 지금 내가 너무 냉정하다고 생각하지? 당신은 나를 위해 많은 것들을 했고 여러 번 다치기도 했지만 나는 늘 과거에만 매달린 채 마음을 열지 않고 오히려 당신을 이용까지 했잖아. 하지만 생각해본 적 있어? 한 여자가 얼마나 많이 절망감을 느꼈기에 한때 그토록 사랑했던 남자의 노력에도 이토록 무감각할 수 있는지?”이 말을 마친 뒤 고은서는 창문을 약간 열어 밖을 바라보았다.“그러니까 다시 한번 진지하게 말할게. 난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그러니 내게 시간 낭비하지 마. 되돌아가지도 않을 거고 그때 그 감정으로 돌아가는 일도 없을 테니까.”평온한 목소리로 말하는 고은서는 곽승재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창밖으로 지나가는 차량만을 바라보았다.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고은서의 검은 머리카락이 몇 가닥 날리며 은은한 향기가 퍼져나갔다.곽승재는 그 머리카락을 잡고 싶었지만 결국 움직이지 않았다.“차 좀 세워줘.”한참 후, 곽승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백미러를 통해 뒷좌석 상황을 살핀 운전기사는 고은서가 창밖만 바라보고 있고 곽승재가 그녀의 뒤통수를 응시
박지연은 약간 어리둥절했다.“아무리 곽승재를 좋아한다고 해도 이러는 건 무의미한 행위잖아. 널 괴롭혔다고 곽승재가 여시은을 좋아하게 될 것도 아닌데.”고은서도 여시은의 속셈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그냥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날 화풀이 상대로 생각할 수도 있잖아. 약간 다른 사람이 자신의 손아귀에서 괴롭힘당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 위선적인가 하면 또 진실한 면도 있단 말이지. 이젠 내가 자신의 진면목을 알아차려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나온다니까.”“미리 준비해 둔 녹음 필에는 별로 쓸만한 내용이 녹음된 거 없어?”“없어. 내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나를 경계하더라고.”“듣고 나니까 여시은이 너무 소름 끼치게 무서운데.”박지연은 말하면서 손으로 자신의 팔을 어루만졌다.“생긴 건 천진난만해서 세상 물정 모르고 곱게 큰 부잣집 아가씨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이런 암흑 적인 면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여시은은 처음부터 오냐오냐하게 큰 순진한 여자애의 모습으로 고은서에게 다가갔다.사실 전에 민시후가 여씨 가문과 같은 부잣집에서 자란 아가씨치고는 여시은이 너무 수상할 정도로 천진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아주 지당한 말이었다.민시후의 추측이 틀리지 않았고 여시은 또한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은서야, 전에 절에 가서 보살님한테 빌 때 너 다른 생각한 거 아니야? 간절하게 빌었어야지. 그렇지 않고서야 왜 이런 사람들이 계속 네 주변에 꼬이는 거야?”박지연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아마 내가 필연코 넘어야 할 고비인가 봐. 넘고 나면 내 인생도 조금이나마 편해지려는지.”고은서도 따라 한숨을 내쉬면서 답했다.“너 고은서 맞아? 왜 갑자기 인생의 의미를 다 꿰뚫어 보기라도 노인처럼 이상한 소릴 하는 거야?”박지연이 그녀를 힐끔 보면서 장난삼아 물었다.고은서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곽승재는 며칠 동안 라이트문에 나타나지 않았고 고은서한테 연락도 하지 않았다.반면 마재경과 사이가 점점 좋아지는 것 같았는데 심지
“이런 일은 걱정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야. 여씨 가문이 아니더라도 다른 가문이 나타날 수도 있는 일이잖아. 우린 그냥 자기 일에 몰두하면 돼.”고은서가 송민아를 위안했다.“나도 알고 있어. 그런데 여시은은 왜 강성에 있는 그 큰 회사를 내버려두고 해성에서 회사를 차리려고 하는 거야? 경쟁자가 하나 더 많아졌잖아.”송민아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의 불만을 토로했다.고은서도 눈살을 찌푸렸다.‘설마 나를 노리고 이러는 건가? 그런데 곽승재가 아직 나한테 미련이 남았다는 이유로 이 정도로 일을 크게 만든다고?’“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 실력도 만만치 않잖아. 무서워할 필요 없어.”송민아가 도리어 고은서를 위안했다.고은서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서로 몇 마디 더 주고받은 후 송민아는 이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려고 했다.고은서는 이 기회에 쇼핑백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이거 네 오빠한테 대신 전해줘. 아줌마가 며칠 전에 세탁소에서 가져왔는데 계속 잊어버리고 미처 가져다주지 못했어.”“우리 오빠 외투가 왜 너한테 있는 거야?”송민아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고은서는 이내 그녀의 이마를 콕 찌르면서 답했다.“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그날 바에서 있었던 일로 경찰서로 갔었잖아. 그런데 나오는 길에 날씨가 하도 추워서 나한테 빌려준 거야.”송민아는 약간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난 두 사람이 사이에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줄 알았지. 옷은 네가 직접 돌려줘. 요즘 들어 바쁜지 도통 보이지 않는다니까.”“그냥 네가 가지고 있다가 시간 될 때 나 대신 돌려줘.”“고은서, 우리 오빠한테는 기회조차 주지 않으려는 거야?”“맞아.”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날 좋아하는 건 둘째 치고 나한테 호감이 있다고 해도 거절할 생각이거든. 난 상사만 되고 싶을 뿐 네 형수님이 되고 싶은 생각은 일도 없으니까 쓸데없는 생각은 일찌감치 접는 게 좋을 거야.”“...”송민아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외투에 관한 소식
송민준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순간 멈칫했다가 이내 답했다.“딱히 무서운 건 아니에요. 그저 별로 안 친한 사람이랑 함께 걷는 게 어색해서요.”“은서 씨, 우리가 서로 알고 지낸 지 꽤 오래된 것 같은데 아직도 제가 낯설게 느껴지나요?”송민준이 웃으면서 물었다.그는 전에도 비슷한 물음을 제기하면서 고은서를 싫어했던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해 준 적이 있었다.비록 항상 온화한 모습만 보이던 그였지만 차마 민시후처럼 편하게 대할 수가 없었다.고은서는 이 상황에서 어색하게 웃으며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죄송해요.”다행히 송민준은 별로 개의치 않는 듯했다.“사과할 필요 없어요. 따지고 보면 제 탓이죠. 나중에 민아한테 은서 씨 친구가 될 수 있는 법을 잘 물어보고 배워야겠네요.”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어 보이기만 했다.“그보다 요즘 곽 대표님이 전에 농장에서 은서 씨랑 여시은 씨가 물에 빠진 일에 관해 재조사하고 있다던데요.”‘확실히 재조사해 보겠다고는 했지만 그 이후로 연락이 없었는데 송민준은 또 어떻게 안 거지?’그녀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본 송민준이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저도 현장에 있었잖아요. 그래서 저한테 물어보는 사람이 있어서 알아봤더니 곽 대표님께서 재조사하고 있더군요. 그 일이 있은 지 며칠 되는데 왜 갑자기 재조사하게 된 거죠? 그 후로 무슨 다른 일이 더 있었나요?”고은서는 부인하지 않았다.“여 대표님께서 제가 여시은 씨를 밀었다고 오해하고 계시잖아요. 곽승재는 그저 제가 아무 죄도 없다는 걸 증명해 주고 싶어서 그러는 걸 거예요.”“당시 오해라고 현장에서 이미 다 설명하고 끝난 일이 아닌가요?”송민준한테 여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을 그대로 알려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고은서는 자신을 비꼬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모호한 답을 내뱉었다.“또 새로운 오해가 생겨서야.”송민준도 눈치 있게 더는 묻지 않았다.끝내 고은서는 송민준의 차에 앉아 회사로 돌아갔다.주차장에서 고은서는 차에서 내리면서 송민준한테 인사하고는
구경꾼들은 그다지 좋지 않은 시선으로 고은서를 쏘아보기 시작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옆에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이쁘게 생겨서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다른 사람 고양이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벤치까지 발로 차고 이 정도면 공공시설 훼손 아니야?”“그러니까 말이야. 요즘 여자애들이 너무 오냐오냐하게 자라서 하나둘씩 공주병이라니까.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저러는 거지.”“언니는 아무 잘못 없어요! 그리고 공주병도 아니에요!”곽승연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언니는 다른 고양이를 뺏는 나쁜 사람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함부로 발로 차는 사람도 아니에요!”“뒤로 넘어진 걸 우리가 다 봤는데 뭐가 아니라는 거야.”구경꾼 중의 누군가가 피식 웃으면서 비아냥거렸다.곽승연은 급한 마음에 눈시울이 빨개졌다.“거짓말 아니에요. 언닌 좋은 사람이에요.”고은서는 애써 두려움을 참고 자신을 위해 나서주는 곽승연을 보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여시은 때문에 치밀어 올랐던 화도 조금이나마 가라앉는 듯했다.“승연아, 언니는 괜찮으니까 저 사람들이랑 시간 낭비하지 않아도 돼.”고은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언니는 처리할 일이 있으니까 기사한테 너를 민아 언니한테 데려다주라고 말해 둘게.”곽승연은 고은서가 조금 전에 신고한 걸 알고 있었다.그리고 자신이 도울 수 있는 게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고은서를 차마 혼자 두고 갈 수 없었기에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언니, 나도 같이 갈래요.”“언니 정말 괜찮아.”고은서는 말하면서 주차장에서 대기 중인 기사에게 연락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가 도착했다.동시에 경찰들도 신고를 받고 현장으로 왔다.곽승연은 용기 내 여시은을 가리키면서 경찰들을 향해 말했다.“경찰 아저씨, 저 여자 나쁜 사람이에요. 우리 언닌 그저 저 여자가 고양이를 학대하는 걸 막으려다가 실수로 밀친 것뿐이에요. 얼른 저 여자를 잡아요.”여시은 순간
“그만해!”쿠아의 비명과 함께 고은서는 여시은 손에 있는 캣스틱을 빼앗아 땅에 내팽개쳤다.“당신 정말 머리에 문제 있는 거 아니에요? 이건 명백한 학대라고요.”쿠아의 입가에는 빨간 핏자국이 생겼고 그는 앓는 소리를 내며 발버둥을 치면서 여시은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했다.그러나 여시은은 쿠아를 꼭 잡고 억울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고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럴 리가요. 저는 그냥 간식을 주다가 부주의로 살짝 찍은 것뿐이데요.”고은서는 발버둥 치는 쿠아를 보면서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동물병원 의사가 전에 쿠아의 상태를 검사하면서 학대받은 것 같다고 했었는데 정말 당신이었어.”여시은은 고은서의 화난 모습에 더 환하게 웃어 보이며 쿠아의 털을 쓰다듬었다.“은서 씨, 전에도 말했잖아요. 저를 기분 나쁘게 만든 사람은 꼭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고요.”마침 쿠아가 전에 심하게 다쳤던 날에 유일 투자 은행이 개업했다.여시은은 후에 돌아가자마자 쿠아가 심하게 다친 채 땅에 누워 있었다면서 사진까지 보여줬었는데 사진 속의 쿠아는 초점을 잃은 동공에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이발도 다 빠져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다.고은서는 그 사진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멎는 듯했다.‘그때 그 사진을 보여준 것도 나 기분 나빠 하라고 보여준 거였어. 그런데 개업식 날에 난 여시은이랑 여재훈을 건드린 적이 없는데. 곽승재랑도 간단히 인사만 나누었을 뿐 아무 일도 없었어. 그런데 왜 기분 나쁘다고 뒤돌아 쿠아를 괴롭히는 거지?’“여시은 씨, 저한테 화가 난 거라면 직접 저를 찾아와 말했어야죠. 왜 쿠아한테 화풀이하는 거예요?”고은서는 여시은의 행위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쿠아는 당신 애완묘잖아요. 어떻게 이리 약하고 가여운 생명한테 손을 댈 수가 있어요?”여시은은 무지 기쁘다는 듯 소리 내 웃으면서 답했다.“누가 쿠아 보고 은서 씨를 좋아하래요? 지금 은서 씨의 반응을 보니 저도 틀린 판단을 한 건 아니네요.”“변태!”더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었
송민아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민시후 하나로도 충분하거든. 더는 어느 남자 뒤를 쫓아다니고 싶지 않아. 주인혁처럼 인기 있는 사람과 연애하려거든 내가 더 피곤해질걸.”감정이란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정말 생각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주인혁한테 말해볼게.”“아니. 필요 없어. 지금 상태가 제일 좋거든. 쓸데없는 감정에 얽히고 싶지 않아.”송민아가 단호하게 거절했다.고은서도 더는 강요하지 않고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 주겠다고 말했다.그날 오후.고은서가 처리할 일들을 다 처리하고 곽승연의 요구대로 비둘기한테 먹이 주러 공원으로 향했다.공원은 널찍한 데다가 환경도 깨끗하고 좋았다.광장에 도착한 후 고은서는 비둘기 먹이를 사서 곽승연한테 쥐여주고는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예전부터 비둘기를 좋아했던 곽승연은 인내심 있게 천천히 그들에게 먹이를 뿌려주었다.이곳의 비둘기 또한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았는데 심지어 곽승연의 손에 날아오르기까지 했는데 그녀는 거부하는 대신 환한 미소를 드러냈다.고은서는 이 장면을 촬영해 서연정한테 보내주었다.서연정은 연신 고은서한테 고맙다고 인사했다.두 사람이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고은서는 아주 익숙한 향기를 맡았다.이는 고은서가 여시은을 위해 제작한 우드향 퍼퓸 향이 분명했다.고개를 돌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여시은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여시은은 명품 브랜드 원피스를 입고 고양이 가방을 멘 채 쿠아를 안고 있었다.그녀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쿠아가 전보다 훨씬 약해진 데다가 털도 윤기를 잃은 것 같았다. 심지어 눈빛도 전과 달리 흐리멍덩해 보였다.“하인한테 투약 당한 후로부터 기죽어 있는데 제대로 먹지도 않아서 걱정이에요.”고은서의 시선을 느낀 여시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다 여시은이 혼자 꾸민 일이잖아. 그러니까 하인이 쿠아한테 투약한 것도 여시은의 지시를 받은 거겠네.’고은서는 몰래 녹음 버튼을 누르고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여시은 씨, 쿠아는 여리고 작은 동물일 뿐이
고은서와 곽승재는 동시에 곽승연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그녀는 아주 긴장된 상태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방금 부모님의 싸움 현장을 겪은 곽승연은 아직도 긴장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애썼고 그도 눈치 있게 그녀를 놓아주었다.그녀는 곽승연 곁으로 다가가 웃어 보이며 그녀를 위안했다.“승연아, 우린 괜찮아.”“정말이에요?”곽승연이 곽승재를 보며 물었다.곽승재는 표정 관리를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오빠가 언니한테 장난 좀 친 것뿐이야.”곽승연은 그제야 시름을 놓고 고은서 따라 부엌을 나왔다.“언니, 아까 오빠랑 뽀뽀 유희를 한 거예요?”곽승연이 갑자기 천진한 목소리로 물음을 제기했다.“...”고은서는 순간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그러니까 아까 곽승재가 나한테 키스하는 모습을 봤단 말이지? 곽승재는 정말 머리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니야? 전엔 화내며 가더니만 왜 갑자기 또 나한테 키스하고 난리야.’고은서는 이내 곽승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인했다.“승연이가 잘못 본 거야. 아무 일도 없었어.”곽승연은 더는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고은서가 부끄러워서 답을 피할 뿐 절대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라고 굳게 믿었다.고은서가 곽승연을 욕실로 들여보낸 뒤 곽승재도 부엌에서 나왔다.옷이 덜 마른 탓에 그는 옷소매를 위로 거두면서 굵은 팔뚝을 드러냈다.“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돌아가서 쉬어. 승연이는 내가 돌볼게.”“승연이 잘 부탁해.”곽승재는 머뭇거리다가 한 마디 남기고는 캐리어를 들고 떠났다.고은서는 부엌을 힐끗 들여다보았는데 그릇은 이미 다 씻겨 있었지만 싱크대와 바닥은 물과 거품으로 가득했다.‘아줌마가 보면 곽승재 설거지했다고 감동할지 아니면 이 아수라장이 된 부엌을 보고 환장할지 은근히 기대되네.’...이튿날, 고은서가 눈을 떴을 때 곽승연은 이미 깨어 있었다.어제보다 상태가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집으로 돌아가는 걸 거부했다.“언니,
면을 먹은 후 곽승연은 방금전보다 상태가 훨씬 나아진 듯했다.고은서는 그녀와 함께 소파에 앉아 아이패드를 보면서 화젯거리를 찾았다.단 한 번도 부엌에 들어가 본 적이 없던 곽승재는 그릇을 거두더니 자연스레 설거지까지 해놓을 생각이었다.쨍그랑!고은서와 곽승연이 한창 재미나게 패드를 보고 있을 때 부엌에서 그릇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곽승연한테 소파에 가만히 있으라고 당부한 뒤 부엌으로 걸어갔다.아니나 다를까, 그릇 조각들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는 데다가 세제 덮개는 열려 있었고 싱크대와 곽승재의 손은 거품투성이였다.“세제를 물로 쓰는 거야?”곽승재는 평소에 당당하고 오만하기 짝이 없던 모습과 달리 약간 주춤하더니 어색한 듯 헛기침을 한 번 했다.“처음 해보는 거라서 많이 따랐나 봐.”“더 따르지 그랬어? 그럼 안에 들어가서 수영해도 될 텐데.”“...”곽승재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이 작은 구멍이 무슨 용도로 쓰이는지 한 번도 생각 안 해 봤어? 딱 봐도 세제를 짜는 데 쓰이는 거잖아.”고은서는 덮개를 들고 곽승재를 비난하기 시작했다.부엌에 단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던 곽승재는 생활 지식이 결핍했던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그가 땅에 있는 그릇 조각들을 주우려고 할 때 고은서가 황급히 제지했다.“잠시만! 빗자루로 쓸면 돼. 손으로 줍다가 상할 수도 있으니까. 또 손을 다쳤다고 이런저런 요구를 제기하면 그땐 정말 쫓아낼 거야.”곽승재는 반박하지 않고 빗자루를 들고 평소에 사인만 하던 손으로 로봇처럼 삐걱거리며 땅을 쓸기 시작했다.“당신이 청소할 줄 안다고 생각한 내가 바보지.”그 모습을 본 고은서는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육현석은 각양각색의 음식을 다 할 줄 알던데 당신은 왜 이런 거야? 세제도 쓸 줄 모르고 아무리 집안 배경이 좋고 잘생겼다고 한들 이러고 누가 당신한테 시집을 가겠어.”고은서는 투덜거리면서 곽승재 손에 있는 빗자루를 빼앗으려 했다.그러나 곽승재가 그
“오빠요.”곽승연이 답했다.‘아마 어머니한테서 승연이가 내 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물어보려고 전화한 거겠지.’고은서는 더는 상관하지 않았다.“얼른 손 씻고 밥 먹자.”“네.”곽승연은 손 씻으러 가고 고은서는 물을 따르러 갔다. 그러나 바로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누구세요?”고은서가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오빠일 거예요. 방금 언니 집에 있다고 했는데 금방 오겠다고 했어요.”손 씻고 나온 곽승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언니, 나 혹시 뭐 잘못했어요?”곽승연은 두 사람이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고 또 전에 만날 때마다 서로 모순이 생겨 다툰 것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그녀는 고은서가 자신을 탓하기라도 할까 봐 두려웠다.곽승연의 생각을 알아차린 고은서는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아니. 승연이는 아무 잘못이 없어. 오빠도 승연이가 걱정되어서 보러 온 걸 거야. 먼저 먹고 있어. 언니가 문 열게.”“네.”곽승연은 이내 식탁 앞에 앉고 고은서는 문을 열어주러 갔다.아니나 다를까 곽승재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금방 출장을 마치고 온 그는 작은 캐리어를 끌고 외투를 팔에 걸치고 있었는데 약간 피곤해 보였다.“승연이 여기 있어?”“응. 들어와.”고은서는 이내 들어오라고 옆으로 비켜주면서 답했다.곽승연은 그를 보자마자 오빠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내 시선을 고은서한테로 돌리면서 기뻐하며 말했다.“언니, 쫄면 너무 맛있어요. 저 이렇게 맛있는 쫄면은 처음이에요.”“언니가 한 게 맛있는 게 아니라 승연이 네가 너무 배고파서 뭐 먹어도 맛있게 느껴지는 거야.”음식 냄새를 맡은 곽승재도 저도 모르게 배가 고파 났다.그러나 식탁 위에 놓인 면을 보면서 차마 자기도 먹고 싶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고은서는 면을 힐끔힐끔 바라보는 곽승재를 보면서 말했다.“마침 한 그릇 남았는데 배고프면 먹어.”원래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그는 이혼한 이후로 고은서가 해준 음식을 먹은 적이 없었다.전미자의 부탁으로 그를 보
호전된 곽승연이 또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걸 원치 않았던 서연정은 그녀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알겠어, 알겠어. 울지 마. 그럼 오늘은 돌아가지 말고 언니 집에 있자.”고은서는 곽승연의 어깨를 토닥여주면서 그녀를 달랬다.“그래그래. 오늘은 언니랑 같이 있자.”곽승연은 그제야 서서히 진정되는 듯했다.“은서야, 그럼 승연이를 부탁할게.”서연정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고은서는 서연정이 상처받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도 위안이 될 것 같지 않았다.“괜찮아요, 어머니. 승연이는 제가 잘 돌볼게요.”서연정은 곽승연을 안고 한참 동안 달래면서 그녀가 진심으로 집으로 돌아가길 원치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뒤돌아 떠났다.서연정이 배웅해 준 후 고은서는 곽승연 곁에 다시 앉았다.그녀는 잠이 깼는지 혼자 소파에 앉아 인형을 안고 멍때리고 있었다.“승연아, 배 안 고파? 언니가 밥해줄까?”“배 안 고파요.”곽승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그러나 이내 그녀의 배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뭐 먹고 싶어? 만두? 면? 아니면 죽?”“다 돼요.”곽승연은 어색한지 얼굴이 빨개졌다.고은서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말했다.“그럼 언니가 먹을 것 좀 해올게. 언니 집에서는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마음껏 돌아봐.”곽승연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고은서는 냉장고에서 여러 가지 채소와 계란을 꺼내 쫄면과 스크램블을 요리할 생각이었다.전에 곽승재의 관심을 얻기 위해 요리를 배우면서 시간 날 때마다 밥상을 푸짐하게 차리고 그가 돌아오길 기다렸었다.하지만 곽승재는 무심하게도 거의 집에 돌아오는 일이 없었다.가끔 그녀가 해준 밥을 먹으면서 단 한 번도 칭찬이라곤 해주지 않았다.그러나 예전의 고은서는 그가 자신이 해주는 밥을 먹어주기만 해도 흥분해 하며 좋아했다.‘전에는 정말 왜 그랬지? 곽승재가 없으면 못 사는 것도 아닌데 왜 자꾸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했는지 몰라. 그런
서로 다투던 광경이 떠올랐는지 평소엔 온화하고 담담해 보이던 서연정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면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승연이는 우리가 밥 먹을 때부터 정원에서 혼자 놀고 있었는데 아마 애 아빠가 상을 엎는 소리가 하도 커서 놀랐던 것 같아.”서연정은 말하면서 곽승연을 바라보았다.“내가 정신 차리고 승연을 찾으러 갔을 땐 이미 사라진 후였고.”하인들도 곽승연이 어디 갔는지 별로 신경 쓰지 않은 탓에 나중에 CCTV 동영상을 돌려보고서야 그녀가 뒷문으로 달려 나간 걸 발견했다고 한다.그리고 하인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 한참 동안 찾아보았지만 곽승연은 보이지 않았고 고은서가 전화했을 땐 마침 신고하려던 참이었다고 설명을 보탰다.그녀는 서연정이 얼마나 다급해하고 절망스러워했는지 상상이 갔다.“저도 오늘 평소보다 집에 늦게 들어오고 또 마침 도우미 아줌마가 휴가를 내는 바람에 집이 비어 있었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승연이를 더 빨리 만나서 어머니한테 연락드릴 수 있었을 텐데.”“아니야, 네 잘못은 하나도 없어. 내가 급한 마음에 승연이 해성에서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너 아니면 승재라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서연정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고은서는 피곤해 보이는 서연정을 보며 물었다.“어머니, 곽 회장님과 사이가 그토록 좋지 않은데 왜 이혼하고 승연이를 혼자 데리고 살지 않는 건가요? 아무리 어르신들의 약속을 대신 지켜드리기 위해 이혼하지 않는 거라고 하지만 할머니께선 어머니가 행복하게 사는 게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이혼하신다고 해도 절대 반대하지 않으실 거예요.”자기보다 어른인 데다가 예전엔 시어머니였던 사람을 이혼하라고 달래는 게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고은서는 서연정이 이미 벼랑 끝에 맞닿은 결혼생활을 굳이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었다.그녀의 말을 들은 서연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지금까지 계속 이렇게 살아왔는데 이혼하든 말든 달라지는 건 없어. 그나마 이혼하지 않으면 GS그룹
“몰라요. 엄마 아빠가 싸워서 무서워서 오빠랑 언니 찾으러 온 건데 다 집에 없었어요...”곽승연의 목소리가 점점 더 낮아졌다.고은서는 아무 말도 없이 혼자 달아나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아냐고 그녀를 꾸짖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시간은 저녁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서연정은 아마 곽승연이 사라진 걸 발견하고 미친 듯이 찾고 있을 것이다.고은서가 전화를 걸자마자 서연정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서야, 승연이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아. 혹시 너한테 간 거니?”“어머니, 먼저 진정하세요. 승연이는 제가 데리고 있어요.”고은서가 그녀를 위안했다.서연정은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이야. 내가 지금 데리러 갈게.”고은서는 전화를 끊고 곽승연 곁에 앉아 물었다.“승연아,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차엔 어떻게 오른 거야?”곽승연은 인형 호주머니에 넣어둔 용돈으로 택시를 타고 온 거라고 사실대로 답했다.고은서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그녀를 교육했다.“다음부턴 무슨 일 있으면 먼저 언니한테 전화해. 이렇게 함부로 뛰쳐나왔다가 나쁜 사람이라도 만나면 어떡하려고 그래.”곽승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혼자 밖에서 오랫동안 앉아있은 탓인지 눈에 띄게 피곤해 보였고 아직 조금 전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고은서는 계속해 비난하는 대신 그녀를 꼭 껴안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달래주었다.덕분에 긴장이 풀린 곽승연은 스르르 잠에 들었다.반 시간 후, 밖에서 서연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조용히 일어나 문을 열어주었다.눈가가 빨개진 서연정은 소파에 누워 잠든 곽승연을 향해 다가가더니 그녀가 다친 곳은 없는지 자세히 살펴보았다.곽승연이 괜찮다는 걸 확인한 서연정은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옆에 있던 고은서는 그녀에게 종이를 건네주었다.“어머니, 승연이는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서연정은 종이로 눈물을 닦으면서 연시 고맙다고 인사했다.“은서야, 정말 고마워.”고은서는 서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