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씨 가문이 문제 삼는 거야, 아니면 당신이 문제 삼는 거예요?” 은하는 제현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차갑게 끊었다. “만약 내 말 한두 마디에 임수아 씨가 자살을 시도했다면, 그 사람 멘탈이 문제 아니에요?” 수아를 달래는 모습을 본 은하는 제현에 대한 실망감만 더 깊어졌다. 이제 제현과 더 이상 대화를 나누고 싶지도 않았다. “최대한 빨리 이혼하죠.” 은하는 싸늘한 시선으로 제현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나도 당신과 임수아 씨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요. 집안에는 할아버지 회복되신 후에 얘기해도 늦지 않고.” 제현은 은하의 싸늘한 태도에 격분했다. 그는 몸을 숙여 조수석에 앉아 있는 은하 쪽으로 다가오더니,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움켜잡았다. 은하의 하얀 피부에 손자국이 날 정도로 힘을 주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렇게까지 이혼하고 싶어? 대체 그 남자가 누구길래...” 제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발신자는 진우성이었다.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을 거냐?]진우성의 목소리에는 분노를 억누른 기색이 가득했다. [제현아, 네 성격이 어떤지는 내가 잘 안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선을 지켜야 한다. 아무 상관도 없는 여자 때문에 도를 넘는 행동을 한다면, 그건 네가 할 일이 아니다!]“곧 돌아갑니다.” 제현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잠시 드러냈던 감정을 도로 감췄다. “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 겁니다.” 전화를 끊은 그는 더 이상 은하를 쳐다보지 않고, 바로 조수석 문을 닫고 차를 돌아 운전석에 앉아 차를 출발시켰다. ... 제현과 은하는 서로 간격을 두고 본가에 들어섰다. 거실 소파에는 진우성이 불쾌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장예정은 남편의 눈치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나 제현에게 다가갔다. “네 핸드폰 줘봐.” 제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어머니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장예정은 아들의 핸드폰을
오랜 침묵 끝에 제현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제현은 마치 부모의 훈계가 귀찮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흘려듣는 태도였다. 은하는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진제현이 소중히 여긴다는 ‘곁에 있는 사람’은 결국 임수아잖아.’ 장예정은 은하를 옆으로 끌어당기며 달래듯 말했다. “은하야, 만약 제현이 너에게 또다시 상처를 준다면, 꼭 우리에게 말해야 해, 알겠니?” 은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한구석은 점점 더 복잡하게 얽혀 갔다. ‘진씨 가문은 모든 게 완벽 그 자체였어. 자애로운 시부모님, 나를 손녀처럼 아껴주던 할아버지까지.’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남편의 사랑인데 그것만큼은 허락되지 않았어. 이 얼마나 아이러니하고 우스운 일이람...’ 은하는 쓴웃음을 지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완벽한 껍데기 속에 숨겨진 공허함이 다시금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할 뿐이었다....임수아의 자살 시도 소식은 빠른 속도로 외부로 퍼져나갔다. 은하가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동료들이 이미 가십거리로 떠들고 있었다. 그녀는 원래 동료들의 뒷담화에 동참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 편이라, 일을 빨리 처리하는 편을 택했지만, 대화 속에서 수아의 이름이 언급되자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들었어? 그 임수아 씨랑 진씨 가문의 젊은 대표님, 뭔가 특별한 사이라던데. 어릴 적부터 알던 사이래.” “맞아, 임수아 씨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진 대표님이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나도 그런 남자 친구가 있다면 평생 소원이 없을 것 같아.” 동료들의 말은 마치 뾰족한 가시처럼 은하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 ‘7년 동안의 결혼 생활 내내, 나는 말없이 ‘진씨 가문의 작은 안주인’이라는 타이틀로 살아왔는데...’ ‘임수아는 대놓고 내 남편의 곁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여자가 되어 있단 말이지!’ 은하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가슴속에 밀려오는 분노와 허무함이 차갑게 뒤엉켜 그녀를 잠식해 갔다.그녀는 씁쓸한 마음
은하는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벨 소리는 끊임없이 울렸고, 함께 오는 진동은 마치 제현의 인내심이 서서히 바닥나고 있는 듯했다. 그러다 마침내 벨 소리가 멈췄고, 다음 전화나 메시지도 없었다. 은하는 조용해진 화면을 내려다보며 미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내가 전화를 무시한 게 그 사람의 자존심에 상처를 줬겠지.’ 제현은 언제나 자신이 우위에 서 있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누군가에게 무시당하는 건 참기 힘든 일일 것이다. 은하는 차가운 눈빛으로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다시 찾아올 고요한 싸움의 시작을 마음속으로 준비했다....PF그룹 건물 아래에 도착했을 때, 은하의 핸드폰에 낯선 번호로부터 또 한 통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녀는 내용을 보자마자 발신자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은하 씨, 사과하고 싶지 않다면 강요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은하 씨도 알잖아요. 나와 제현이는 정말로 사랑하는 사이에요. 어떻게 해야 제현이를 다시 나에게 돌려줄 건가요?] 문자메시지의 어투만 봐도 임수아가 보낸 것임이 분명했다. 은하는 욕이라도 퍼붓고 싶었지만, 꾹 참고 메시지는 저장해두고 번호는 바로 차단해 버렸다. 은하가 PF 그룹 정문에 들어서자, 세준의 비서 강주혁이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혁이 매너 있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심 기자님 오셨습니까? 부 대표님께서 이미 기다리고 계십니다.” 회사 로비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직원들은, 아름다운 기자가 부 대표의 비서와 함께 전용 엘리베이터로 올라가는 뒷모습을 몰래 사진 찍어 단체 채팅방에 올렸다. 그리고 곧 모든 사람이 은하와 세준 사이에 뭔가 특별한 사이는 아닌지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세준과의 인터뷰는 작은 응접실에서 진행되었다. 세준은 이미 도착해 있었고, 탁자에는 차와 정갈한 디저트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중 자신이 좋아하는 쿠키가 보이자, 은하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조금 더 쿠키에 머물렀다. 은하는 먼저 사과의 말을
저녁 식사 중, 장예정은 은하의 몸 상태를 은근히 물으며 조심스레 임신 여부를 떠보았다. 그 순간, 은하의 마음은 복잡하게 뒤엉켰다. ‘아이가 생길 리 없는데.’ ‘그리고 나도 내 아이를 이런 불행한 결혼 생활 속에서 키울 생각은 없어.’ 은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숟가락을 들어 올렸지만, 목 끝에 차오르는 씁쓸함은 감출 수 없었다.마음 한편이 쓰려왔지만, 은하는 무심한 척하며 대답했다. “어머니, 그런 건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잖아요.” 장예정은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아들의 엉망진창인 사생활이 떠오르자 당장에라도 머리를 싸매고 드러눕고 싶을 정도로 답답해졌다. 식사를 마친 후, 은하는 방에 들어갔다. 시간이 아직 이른 터라, 그녀는 오늘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해 기사 초안을 작성할 생각이었다. 미리 작업을 해 두면 다음 날 아침 일찍 편집장에게 제출하기 더 수월할 것이다. 일과 관련해서는 늘 최선을 다하는 은하였다. 오늘 오후 인터뷰에서 사용할 만한 자료가 많았기에 초안을 작성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늘 내 전화를 받지 않은 이유가 이 일 때문이야?” 익숙한 목소리가 갑자기 뒤에서 들려왔다. 은하는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뒤로 돌렸다. 제현은 언제 들어왔는지 모르게 은하 뒤에 서 있었다. 그는 노트북 화면을 내려다보며 어두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은하는 황급히 노트북을 덮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내 일인데, 뭐가 문제야?” 제현은 그녀의 턱을 거칠게 움켜잡으며 말했다. “그렇게까지 다른 남자를 찾고 싶어? 아직 우리 두 사람 이혼 전이라는 것 잊지 마.” 그의 몸에서는 술 냄새와 더불어 어딘가 익숙한 향수 냄새가 났다. 제현이가 누구와 함께 있다 왔는지 은하는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은하의 마음은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녀는 제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비웃듯 말했다. “내가 그런 일에 감히 진 대표님을 따라갈 수나 있겠어? 당신 지금
제현의 거친 숨결이 은하를 더욱 옥죄어 오자, 그녀의 심장은 두려움과 분노 속에 격렬히 뛰어올랐다. 그렇게 응시하던 제현의 손길은 서서히 느려졌고, 어느새 교묘히 유혹하는 듯한 그의 손끝이 은하의 단단한 방어막을 한 겹씩 허물어뜨리고 있었다. 결국 은하의 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제현의 손길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창밖에는 가는 비가 밤새도록 내렸다. 밤이 지나고, 은하는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제현은 수아에게 그렇게나 다정하고 사려 깊으면서, 왜 자신과의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지. 그러나 제현은 절대 그 이유를 은하에게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제현의 방해로 은하는 그날 밤 작업을 끝내지 못했지만, 편집장이 정해준 마감 시간 전에 인터뷰 초안을 제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번 PF 그룹과의 인터뷰는 예상보다 훨씬 성공적이었다. 인터뷰 기사는 여러 플랫폼에 게시되었고, 모두 네티즌들의 상당한 관심을 받았다. PF 그룹도 덕분에 큰 화제를 모았다. 성공적인 결과를 보며 은하는 큰 기쁨과 성취감을 동시에 느꼈다. 편집장에게 호출되기 전, 사무실 동료들은 은하를 축하하며 보너스를 받아 모두에게 한턱내라고 농담을 던졌다. “편집장님, 부르셨어요?” 은하는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편집장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맞았다. “은하 씨, 이번 부세준 대표님과의 인터뷰 정말 성공적이었어요! 윗선에서도 칭찬이 자자하더라고요. 그래서 이번 프로그램을 아예 정기 칼럼으로 만들기로 했어요. 앞으로 은하 씨가 맡아서 쭉 진행해 줬으면 좋겠어요.” 이것은 은하에게 엄청난 좋은 소식이었다. 몇 년 동안의 노력 끝에 그녀의 성과가 드디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 모든 게 편집장님께서 저를 잘 이끌어 주신 덕분입니다. 기대에 부족함 없이 잘 준비해 보겠습니다.” 은하의 말에 편집장은 매우 흡족한 듯 함박웃음을 웃었다. 편집장은 리스
[제현아, 내가 제안한 거 잘 생각해 봤어? 요즘 라이브 방송이나 짧은 영상 콘텐츠가 점점 인기를 끌고 있어. 너희 회사 이미지에도 도움이 될 거야.]수아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제현은 그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뒤돌아 은하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통화를 이어갔고, 마치 은하가 옆에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은하는 이런 상황에도 밖으로 뛰쳐나가지 못하는 자신을 비웃으며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그의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이미 그녀는 필요한 답을 얻었다. ‘역시, 진제현의 성격으로는 이런 실시간 인터뷰를 좋아할 리 없지.’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니, 그렇게 안 내키는 일도 임수아가 말하면 가능해지는 모양이네.’ 통화가 끝난 후, 제현은 은하 앞까지 걸어왔다. 그의 눈빛은 이번 제안을 약간 흥미로워하고 있었다. “네가 먼저 날 찾아오다니, 의외군.” 그는 가볍게 비웃었다. 은하가 이혼 이야기를 꺼낸 후, 내내 자신을 피하는 태도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원래 하려던 말을 삼키고, 핑계 삼아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냥 할아버지 건강검진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 궁금해서.” 진강산 회장의 발병 이후, 은하는 가족들에게 건강 검진을 권유했다. 가족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말이다. 제현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냉소를 띠며 말했다. “의사도 있는데 뭘 그렇게 걱정해? 설마 이혼 문제로 할아버지를 계속 자극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의 비꼬는 말투에 은하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 “검진 결과가 나왔어. 큰 문제는 없지만, 의사 말로는 절대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된다고 하더군. 네가 알아서 잘 생각해.” 시할아버지인 진강산의 진심 어린 손자며느리 사랑 때문에 은하는 할아버지를 실망시키는 일을 결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혼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이유가 없어진 은하는 조용히 자리에서
“태하야, 누나가 짐을 먼저 올릴 테니, 너는 여기 앉아서 조금만 기다려.” 은하는 태하에게 말했다. 태하는 마음이 썩 내키지 않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누나, 나 혼자 할 수 있어. 그냥 같이 올라가자. 나 걸을 수 있다니까.” 하지만 은하가 가만히 있으라는 눈길을 한번 보내자, 태하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또 넘어져서 다치기라도 해서, 학교에 못 돌아가면 누나 탓하지 마.”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 대의 차가 옆에 멈췄다. 세준이 차에서 내려 두 사람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아, 딱 알맞은 타이밍에 도착했네요.” 그는 태하를 부축해서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키도 크고 체격이 좋은 세준에게 태하 같은 학생을 부축하는 일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태하는 뒤따라오는 누나와 이웃집 형을 번갈아 보며 눈을 굴렸다. ‘우리 누나는 진씨 가문에 시집간 뒤로 계속 괴롭힘만 당했는데, 매형 말고 세준 형 같은 사람이 누나 옆에 있다면 훨씬 행복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스치자, 태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형님, 오늘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오늘 저녁에 저희집에서 같이 식사하시는 건 어때요? 우리 누나 요리 잘하거든요!” 태하의 갑작스럽고 다정한 초대에 세준은 놀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은하를 바라봤다. “혹시 폐가 되지는 않을까요?” 세준의 물음은 은하를 향한 것이었고, 은하의 승낙을 기대하는 마음이 약간 서려 있었다. 태하가 이미 초대를 해버린 상황에서, 은하도 딱히 거절하기 어려웠다. “전혀요. 여태껏 도와주신 게 너무 많아서요. 제 요리가 별로라도 괜찮으시다면 함께 하시죠.” 집에 도착하자마자 태하는 혼자 짐을 정리하며 말했다. “누나는 나 신경 쓰지 말고 손님 접대나 잘해. 난 괜찮아!” 은하가 주방에서 채소를 씻으며 손님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다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니, 세준이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세준 씨, 먼저 거실에서 쉬고 계세요. 음식은
제현의 깊은 눈동자가 방 안쪽을 흘깃 쳐다보더니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왜? 내가 오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그는 무언가를 암시하듯, 집 안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자마자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은하는 아직 상황을 정리할 새도 없이 제현은 이미 거실 안으로 들어서 있는 모습을 보고 한숨을 내쉬며 문을 닫았다. “아직 내가 초대하지 않았잖아. 여기 어떻게 알고 왔어?” 그녀는 이전에 집을 보러 갔을 때 제현과 우연히 마주쳤던 일이 떠올랐다. 하지만 자신은 분명 제현에게 이 집의 정확한 위치를 알려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제현은 마치 이곳을 미리 알고 있었던 듯 행동했다. ‘설마... 나를 몰래 추적이라도 한 걸까?’ 은하의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제현이 의도적으로 자신의 거취를 알아봤다는 확신이 서자, 그의 행동이 더욱 의뭉스럽게 느껴졌다.제현은 은하의 질문에 대답 대신 집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짐만 들고 들어오면 되는 집이었기에, 이 집의 인테리어는 이전 주인의 취향 그대로였고, 깔끔하면서도 남성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이를 보는 제현의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처남이랑 함께 여기서 지내는 거야?” 은하는 속이 답답했다. ‘무슨 낯짝으로 태하 이야기를 꺼내는 거지? 본인이 임씨 집안 남매를 감싸지 않았다면 우리 태하가 또 다치지는 않았을 텐데.’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여기 온 이유가 시비 걸려는 거라면, 그냥 돌아가. 여긴 당신을 환영하는 곳이 아니니까.” 그녀가 내쫓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주방에서 세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하 씨, 간장은 어디에 뒀어요?” 세준이 주방에서 나와 현관 쪽으로 걸어오자, 그의 눈에 제현이 들어왔다. 잠시 놀란 듯한 표정을 지은 세준은 곧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진 대표님도 저녁 식사에 오셨나요?” 두 사람의 얼굴에는 미소가 있었지만, 거실의 공기는 단번에 싸늘해졌다. 제현은 무표정하다가 갑자기 비웃는 듯한
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유미수의 얼굴에는 거의 주름이나 기미 하나 없었다. 다만, 말 할 때마다 가끔 드러나는 그 음흉함은 숨길 수 없었다. 은하는 유미수의 위협을 충분히 이해했지만, 감정을 억누른 채 의연하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 곧은 자세는 마치 꺾이지 않는 소나무처럼 강인해 보였다. “사모님, 이런 말씀은 다른 사람에게나 통하겠죠. 하지만 저는 여전히 제 동생이 잘못한 게 없다고 믿습니다. 반대로 아드님은 어땠나요? 반복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며 학교 내에서 폭력을 저질렀죠. 사모님께서 아드님을 제대로 교육하지 못한다면, 우리 시에도 소년 보호시설은 있습니다.” 은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유미수의 평온했던 표정이 일순간 깨지는 것을 보자, 은하는 차분히 차에서 내렸다. 이번 대화는 겉으로 보기에 은하가 이긴 듯했다. 그로부터 30분 후 태하가 나오자, 은하는 동생과 함께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요즘 학교에서 누가 괴롭히는 사람은 없었어?” 태하는 책가방을 옆으로 던지고 웃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요즘 완전 평화롭다니까. 지난번 대회는 놓쳤지만, 선생님이 다른 시에서 열리는 대회에 나가라고 추천해 주셨어. 요즘 그거 준비하느라 바빠.” 태하의 성적은 늘 우수했으니, 은하도 동생에 대해 별다른 걱정은 필요 없었다. 게다가 얼마 전 태하가 학교에서 뛰어내린 일이 있었던 탓에, 선생님들은 혹시 또 다른 불상사가 생기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태하를 각별히 신경 쓰고 있었다. 그 덕분에 임재욱 역시 함부로 태하를 건드릴 틈을 찾지 못했다. 태하의 최근 학교생활을 전해 들으며, 은하는 잠시나마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하지만 유미수의 경고는 여전히 은하의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설령 자신이 협박과 위협에 시달린다 해도 상관없지만, 태하만큼은 결코 잃을 수 없는 존재였다. 태하는 은하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이었으니까.“태하야, 물리 공부에 그렇게 관심 많으면, J 시에 있는 전문 학원에 다녀
일에 대한 걱정 외에도, 은하의 머릿속에는 또 다른 일이 떠올랐다. 카메라 앞에서는 오늘 수아가 일부러 넘어진 상황이 수아의 자작극이고 자신은 결백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었다. 지금은 회사 직원들만 오늘의 일을 알고 있지만, 만약 그 영상이 유출된다면 은하의 커리어는 이대로 끝나버릴지도 모른다. 은하는 바로 광수에게 물었다. “카메라 메모리 카드 좀 볼 수 있을까요? 안에 유용한 자료가 있는지 확인해 보려고요.” 광수는 그녀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고 즉시 장비를 찾아 메모리 카드를 가져오려고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광수가 가져간 여러 대의 카메라를 모두 확인했지만, 오전에 녹화된 영상이 들어 있는 메모리 카드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은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주간 편집장이 자신을 배제하고 해당 칼럼 작업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려 한다는 점이었다. 중요한 프로젝트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는 것은 그 어떤 일보다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 퇴근 후, 은하는 기운이 없었다. 그때 동생 태하의 전화가 걸려 왔다. [누나, 오늘 저녁에 집에 와서 나 밥 좀 해줄 수 있어?] 며칠간 정신없이 바빠 동생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탓에, 태하는 주로 밖에서 끼니를 때우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태하의 외로운 모습을 상상하자 은하는 동생에게 한없이 미안한 마음이 스며들었다. 어차피 지금 회사에 남아 있어봐야 할 일은커녕, 밤낮없이 준비한 자료가 다른 이의 공로로 돌아갈 게 뻔한 상황이었다. 그런 판에 굳이 붙잡혀 있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은하는 시계를 확인했다. 마침 태하가 아직 학교에 있을 시간대라는 걸 깨닫자, 그녀는 망설임 없이 동생을 데리러 직접 나서기로 마음먹었다.학교 앞에는 이미 많은 학부모가 차를 세우고 자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고급 차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은하는 조용히 길가 한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차창이 반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은하의 가슴은 여전히 미어지는 듯한 고통으로 가득했다. ‘수년간의 내 진심이 진제현에게는 그저 한낱 거품이었구나.’ 현장 분위기가 점점 심상치 않게 흐르자, 한 직원이 다가와 은하를 조심스레 붙잡으며 설득했다. “은하 씨, 오늘 우리 여기 일로 온 거잖아요. 절대 감정적으로 행동하면 안 돼요.” 그 말에 은하는 속으로 씁쓸히 동의했다. ‘그래. 틀린 말은 아니지. 일을 하면서 억울한 일이 생겨도, 결국 이를 악물고 참아내야 하는 게 현실이니까.’ 깊은 한숨을 내쉰 은하는 이 모든 감정을 꾹 눌러 담으며, 차분히 참아내기로 결심했다.그런데도 제현의 눈빛은 그녀에게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은하가 더 이상 경찰에 신고할 기색이 없자, 제현은 그녀의 핸드폰을 돌려주며 수아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남겨진 회사 직원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머뭇거렸다. “그냥 우리도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라이브로 예정되었던 인터뷰가 모두 녹화로 바뀌어 있었고, 회사로 돌아온 뒤에는 편집장이 모든 팀원을 편집장실로 소집했다. 편집장실에는 사람들이 빼곡히 모여 있었고, 이번 인터뷰 실패에 대한 편집장의 분노는 가라앉을 기미가 없었다. “심은하 씨!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일을 이렇게 만든 거예요? 잘 진행되던 인터뷰를 엉망으로 만들다니!” 편집장은 두꺼운 기획서를 책상 위에 내던지며 큰소리 쳤다. 주변 직원들은 고개를 숙이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며 꾸중을 듣는 분위기였다. 촬영을 맡은 광수도 꾸중을 면치 못했다. 그가 라이브를 녹화로 전환했던 사실이 밝혀졌고, 연말 보너스 절반이 삭감되는 징계까지 받았다. 큰 사건을 수습한 후, 주간 편집장의 사무실을 나오는 직원들의 분위기는 한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은하는 맨 뒤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며 진광수를 불렀다. 은하는 오늘 다른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제안 때문에 징계를 받게 된 진광수에게만큼은 사과하고 싶었다. “광수 씨, 오늘 일
은하는 이런 비난과 지적에 냉담한 표정으로 응수했다. “임수아 씨, 참 대단한 연기네요. 아카데미상에 도전하지 않는 게 아쉬울 정도예요.” 상황을 자작극으로 해결하려는 수아의 의도는 완전히 빗나갔다. 아무리 누명을 씌우려 해도, 은하는 절대 이런 수아에게 사과하지 않을 것이었다. 은하는 주위에서 구경하는 동료들을 신경 쓰지 않고, 위에서 바닥에 넘어져 있는 수아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아까 본인이 일부러 넘어진 것도, 커피를 자신에게 부은 것도 모두 당신이 한 일이잖아요. 저에게 덮어씌우려면 확실한 증거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수아는 억울한 척하며 말했다. “방금 그 장면 다 촬영됐어요. 라이브로 본 관객들이 다 지켜보고 있었을 거예요.” 그 말이 힌트라도 된 듯, 주변 사람들이 놀라며 말했다. “우리 장비 아직 켜져 있었던 거 아니야?” 이런 일이 라이브로 나갔다면 큰 문제가 될 것이 분명했다. 스태프들이 급히 촬영 장비를 점검했다. 수아는 그런 상황을 보고 입꼬리를 올리며 은하를 바라봤다. 그러나 이내 스태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라이브 장비가 꺼져 있잖아?” “이건 라이브가 아니라 녹화였어!” 수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이미 라이브 형식 인터뷰가 수아의 제안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은하는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다. 그녀는 평소 함께 일하며 친분이 있는 카메라 감독 진광에게 부탁해, 라이브를 녹화로 전환해 놓았다. 은하는 담담하게 말했다. “방금 촬영된 화면은 임수아 씨가 넘어지는 장면만 찍혔을 텐데, 그게 제가 당신을 밀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까요?” 그 순간, 카페 직원 한 명이 나서며 은하를 겨냥했다. “촬영이 안 됐다는 것이 당신이 안 했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잖아요. 우리 사장님을 질투해서 이런 짓을 벌였다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라고 보는데요?” 그때, 전화를 끝내고 돌아오던 제현이 이 상황을 목격했다. “무
“죄, 죄송합니다. 방금 한 말은 그냥 농담이었어요.” ‘다분히 고의적인 악담이 이런 사과 한마디로 끝나는 거야?’ 은하는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여러분이 오늘 처음 배치돼서 제 업무 스타일에 익숙하지 않은 거 알아요. 하지만 괜찮아요. 앞으로 함께 일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익숙해질 겁니다.” 그 말에 험담하던 직원들은 은하가 정말 화해를 뜻하는 건지, 아니면 속으로 가만두지 않겠다는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어 어리둥절했다. 수아는 그런 상황을 오히려 속으로 즐기며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단순한 오해였던 것 같네요. 심 기자님, 절대 화내지 마세요.” 은하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수아가 건넨 커피를 받아 들며 말했다. “그럼 감사히 마실게요. 고맙습니다, 임수아 씨.” 그녀는 커피를 들고 촬영 장비가 있는 자리로 걸어갔다. 하지만 수아가 이렇게 쉽게 물러설 리 없었다. 그녀는 은하의 뒤를 따라오며 한마디 던지려고 했다. 수아는 녹화 장비의 빨간불이 깜박이는 것을 힐끗 보더니, 눈빛이 살짝 변했다. “심 기자님, 방금 동료들의 말이 저는 아주 그럴듯하다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예쁘게 하고 다니니 남자들이 마음을 뺏기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요?” 은하는 수아가 숨긴 의도를 바로 알아채고, 손에 든 커피를 한쪽에 내려놓으며 비웃었다. “혹시 임수아 씨는 자기 외모에 별로 자신감이 없어서 남자의 마음을 붙잡지 못하는 건가요?” 수아는 외모에 대한 지적을 듣고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그녀는 원래 자기 외모에 대해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자, 수아도 더 이상 온화한 척하지 않고 본색을 드러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나와 제현이는 오랜 시간 알고 지냈어. 당신 말 몇 마디로 뺏을 수 있는 사이가 아니라는 뜻이야. 당신도 남자들의 관심이 부족하진 않을 텐데, 왜 꼭 진제현이어야 해? 지난번에 날 죽음으로 몰아넣지 못해 아쉬웠나?” 수아는 눈물까지 글썽이
은하의 반응에 오히려 제현은 은근한 즐거움을 느끼는 듯했다. 그의 입가에 비뚤어진 웃음기가 살짝 번지며, 눈가에 희미한 장난기가 어렸다. “물론이죠. 나도 심 기자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까.”테라스는 습지 공원에 자리 잡고 있었고, 은하 팀의 팀원들이 목재 산책로 위에 유럽풍의 심플한 테이블과 의자를 배치해 마주 앉았다. 은하는 카메라를 잡고 있는 동료에게 손짓을 보냈고,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일할 때 은하는 프로답게 누구보다도 집중력이 뛰어났다. 그녀는 최근 제현이 진행한 여러 사업을 중심으로 꼼꼼히 질문하며 제현의 답변을 끌어냈다. 초반에 제현은 성실히 질문에 대답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제현의 대답은 묘하게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서구 상권 개발과 관련해서는, 앞으로 살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는 방향으로 추진할 계획입니다. 다양한 시설이 통합된 쇼핑몰을 갖출 예정이니, 그때 심 기자도 한 번 체험해 보시면 좋을 겁니다.” 은하는 순간 미세하게 멈칫했지만, 제현의 말 뒤에 덧붙여진 문장은 무시한 채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인터뷰 내내 제현은 질문에 성실히 답하는 듯했으나, 끝에는 꼭 대화를 은하와 연결하려 했다. 그런 제현의 모습은 수아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멀찍이 서서 대기하던 수아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은하도 승자의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 결국 자신은 결혼 생활에서도 승자가 아니었다. 촬영 담당 스텝이 손짓을 보내며 중간 휴식 시간을 알렸다. 수아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다가와 직원들에게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희 카페에서 준비한 커피와 디저트 드시러 카페로 가세요. 편히 쉬면서 마음껏 드시면 좋겠습니다.” 무료로 다과를 대접받은 직원들은 고마워하며 카페로 이동했다. 누군가 은하에게 함께 가자고 권했으나, 그녀는 부드럽게 거절했다. “인터뷰 내용을 다시 한번 점검해야 해서요.” 제현은 인터뷰를 마치자
은하는 죽 그릇을 건네기 전에 고개를 들어 제현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는 은은한 빛이 번졌다. “왜 갑자기 라이브 형식의 인터뷰를 하겠다는 거야? 평소 당신 스타일과는 전혀 안 어울리는데.” 제현은 오랜만에 맡는 죽의 익숙한 향기에 약간 안정감을 느꼈다. 그러나 죽을 먹기도 전에 그는 은하의 말을 듣고 이마를 찌푸렸다. “남편으로서, 네 인터뷰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면 안 돼?” 은하는 냉소를 지으며, 뜨거운 죽이 담긴 그릇을 제현의 손에 직접 쥐여주었다. “임수아가 시킨 게 아니라면, 당신이 이런 형식을 생각해 낼 리 없지. 또 무슨 의도가 있는 거야?” 제현은 죽의 뜨거운 온도에 손을 뎄지만, 은하가 일부러 그러는 것을 알면서도 무덤덤하게 반응했다. 제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이미 경고했잖아. 윤씨 가문은 네가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고. 왜 말을 안 들어?” ‘이 남자는 늘 이런 식이야!’또다시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제현의 태도에 은하의 눈빛이 점차 어두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됐어. 더 할 얘기 없어.” 은하는 말을 마치자마자 제현을 지나쳐 주방을 나섰다. 밤은 점점 깊어져 갔고, 주방의 적막함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제현은 식은 죽을 바라보며 손도 대지 않았다. ...은하는 항상 일에서는 고집이 센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달랐다. 제현의 인터뷰가 예정된 날, 은하의 팀 스텝들은 제현과 사전 조율을 마치고 인터뷰 장소를 카페의 뒤편 테라스로 정했다. 적당한 온도와 날씨에 녹음이 가득한 카페의 테라스는 원래 딱딱한 경제 인터뷰를 보다 부드럽고 흥미롭게 만들어줄 수 있는 배경이었다. 은하는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사전에 현장을 직접 둘러보았다. 하지만 조사를 마친 뒤, 그 카페의 투자자 목록 중 한 사람이 임수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은하는 이번 인터뷰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임수아가 무언가 음흉한 계획을 세우고
은하는 집 안에서 걷기 힘든 태하가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도록 필요한 것들을 챙기고 정리한 뒤, 그를 방에 두고 나왔다. 거실에 나와 보니 제현과 세준 둘 다 보이지 않았다. 대신 핸드폰에 메시지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 [아래층 주차장에서 기다릴게.] 제현 특유의 간결한 문장이었다. 오늘 은하는 몇 차례 제현을 도발했고, 결국 태운 갈치를 억지로 먹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은하에게 이렇게 호락호락 넘어갈 리 없을 것이다. 은하는 메시지를 무시한 채 1층으로 내려가, 단지 입구에서 택시를 잡으려 했다. 시간이 늦어서인지, 근처에서는 택시를 잡기 쉽지 않았다. 은하가 한참 동안 기다렸지만, 호출 앱에서도 택시를 찾지 못했다. 잠시 후, 검은색 차 한 대가 그녀 앞에 멈춰 섰다. 창문이 내려가더니, 제현의 옆모습이 드러났다. 날카롭고 단정한 그의 이목구비는 지금 약간 느긋해 보였다. “내가 보낸 메시지 못 봤어?” 그의 목소리는 평온해 보였지만, 그 속에는 은하만 느낄 수 있는 불만이 감춰져 있었다. 은하는 남자의 기색을 읽고 경계심을 품었고, 마치 전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메시지? 못 봤네.” 제현은 냉소를 지으며, 그녀의 변명을 굳이 따지려 들지 않았다. “타.” 은하는 차에 올라탔다. 그녀는 가까이서 보니, 제현의 얼굴이 창백했다. 은하는 방금 제현이가 억지로 먹었던 그 갈치를 떠올리며, 속으로 짐작했다. ‘설마 그 갈치구이 때문에 속이 안 좋아진 건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는 지키는 마음으로, 은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병원에 가는 게 어때? 상태가 안 좋아 보여.” 제현은 사실 속이 몹시 불편했다. 몇 년간 힘들게 회복된 위장에 다시 탈이 난 것 같았다. 아까 그는 은하 집에서 음식을 거의 먹지 못했고, 지금도 통증을 참느라 이마에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제현은 단호하게 말했다. “병원에 갈 필요 없어.
태하는 방에서 나와 이어폰을 귀에서 빼며 거실로 향했다. 그리고 거실에 앉아 있는 제현을 발견하자마자, 본능적으로 누나를 찾았다. 태하는 제현이 집에 온 것이 몹시 불쾌했다. ‘매형이 여기 웬일이지?’ 은하는 태하에게 제현이 온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동생과 시선을 잠시 마주치며 안심시키려 했다. ‘신경 쓰지 마.’ 은하는 제현이 가장 좋아하는 갈치구이를 그의 앞에 놓았다. 그러나 그녀의 태도는 평소에 비해 지나치게 온화하고, 깍듯하게 예의를 차렸다. “이거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갈치 요리예요. 근데 주방에서 다른 요리에 정신이 팔려 깜빡하는 바람에 조금 오래 구워졌어요. 그래도 괜찮죠?” 모두의 시선이 그 새까맣게 탄 요리에 쏠렸다. ‘이게 갈치야?’ 그녀가 말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제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비웃는 듯 말했다. 은하의 이런 반항적인 행동은 처음이 아니었다. 제현은 곧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괜찮아. 네가 만든 요리는 뭐든 좋으니까.” 그의 대답에 말을 잘 하지 않던 태하조차 경외의 눈빛을 보냈다. ‘저걸 먹고도 탈이 안 나면 이상한 거지.’ 네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갈치구이를 제외한 다른 요리는 모두 맛있어 보였고, 향도 좋았다. 은하는 일부러 제현에게 갈치 한 조각을 집어주며 말했다. “한번 먹어봐요. 생각보다 맛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제현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은하의 겉모습은 부드럽고 온화했지만, 그 눈빛 속에는 교묘한 장난기가 숨어 있었다. 제현은 잠시 주저하더니 결국 그 갈치를 입에 넣었다. 모두가 놀란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제현은 옆에 놓인 물 한 컵을 들어 천천히 반쯤 마셨다. 그러나 입안에 퍼지는 짠맛에 그만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도저히 입에 넣고 삼킬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짠맛이었다. 그는 속으로 확신했다. ‘이건 분명 날 위해 ‘특별히 준비한 요리’군.’ 순간 떠오른 생각에 제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