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강주희의 화사한 모습을 보며, 어젯밤 그 두 사람이 보여준 역겨운 장면이 떠올랐다.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주희 씨, 의뢰하신 옷이 아직 디자인 단계인데, 무슨 일로 왔을까요?” 강주희는 웃으며 손을 살짝 흔들었다. “옷은 급하지 않아요. 그냥 하나 씨가 마음에 들어서 친해지고 싶어서 왔어요.” “어제는 너무 급하게 가느라 연락처를 못 남겼더라고요.” ‘빈손으로 절에 오진 않지. 이 말투로 봐선 뭔가 꿍꿍이가 있네.’ 나는 속으로 생각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휴대폰을 꺼냈다. “그러네요, 잊어버렸어요. 나중에 옷 관련해서 연락도 드려야 하니, 연락처를 주시면 좋겠어요.” 그렇게 우리는 서로 연락처를 교환했다. 그 순간, 나는 강주희의 프로필 사진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바로 고영훈과 손을 꼭 잡고 찍은 사진이었다. 강주희는 가게 안을 한 번 둘러보더니, 다시 나를 보며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하나 씨, 보면 볼수록 저랑 진짜 잘 맞는 것 같아요. 앞으로 제가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언니요?” ‘내가 너 같은 사람의 언니 노릇을 한다고? 말도 안 돼!’ 나는 속으로 역겨움을 억누르며 부드럽게 말했다. “제가 알기로는 주희 씨가 저보다 두 살이나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 ‘언니’라고 부르는 건 좀 이상하지 않을까요?” “게다가 주희 씨는 강씨 집안의 양딸이고, 저는 우리 집안의 진짜 외동딸이잖아요. 만약 우리가 자매처럼 지내면, 사람들이 주희 씨가 저를 아부하려고 따라다닌다고 오해할 수도 있겠네요. 그러면 제가 주희 씨를 부리듯 대하는 것처럼 오해받을 수도 있고요.” 강주희의 얼굴에 살짝 불쾌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 표정을 보고, 나는 그녀가 속으로 나를 어떻게 욕하고 있을지 금방 알아챘다. 강주희는 내가 던진 말에 당황한 듯, 더 이상 나와 대화를 이어가지 못하고 대충 몇 마디 건넨 뒤, 급하게 가게를 나섰다.막 고용한 직원인 장연희는 강주희가 떠나자
나는 레스토랑의 룸으로 들어섰다. 고영훈과 강주희는 이미 와 있었고, 두 사람은 마치 연인처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속이 울렁거려, 어젯밤 먹은 음식이 도로 올라올 뻔했다. ‘이제 둘이 진짜로 물리적 거리까지 좁혔구나. 분위기가 전과는 다르네. 곧 서로 한몸이라도 되겠어.’ 그 순간 고영훈이 나를 발견하고 멈칫하며 얼어붙으면서 무의식적으로 강주희를 밀쳐내더니 벌떡 일어섰다. “너... 너 어떻게 여기...” “아니... 아니, 민아 너 돌아왔어? 죽지 않았다고?” 나는 냉소를 띠며 말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렇게도 내가 죽길 바랐어?” 고영훈은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나에게 다가왔다. “아니야! 오해하지 마. 나... 나 CCTV 영상 봤어...” 고영훈의 눈에 눈물이 맺혔고, 목소리가 떨렸다. “미안해. 그때 네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아서... 네가 살아있다니 정말 다행이야!” 그는 갑자기 나를 껴안았고, 너무 강하게 껴안는 바람에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남자의 팔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강주희의 표정을 똑똑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분노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야, 넌 거기서 눈만 부릅뜨고 뭐 하는데? 와서 네가 좀 떼어놓으라고! 나 지금 이러다 진짜 숨 막혀 죽겠거든?’ 내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숨이 막혀오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나를 고영훈의 품에서 끌어냈다. 뒤를 돌아보니 고시환이 서 있었다. 나는 고시환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내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살았어!’ 평소라면 당장 고영훈에게 욕이라도 퍼부었겠지만, 상황을 눈치챈 나는 고시환의 어깨를 끌어안고 그의 품에 몸을 기대고, 눈물을 머금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야, 당신 조카 왜 저래? 나 진짜로 죽을 뻔했잖아!” ‘자기’라는 내 다소 과장된 애교 섞인 말에 고시환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고시환은 나를 단숨에 품에 안으며, 눈에 꿀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표정으로 내 귀 옆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넘겼다. “나는 다른 남자들처럼 딴 여자들에게 눈 돌리거나 하지 않아. 내 눈에는 당신밖에 안 보여. 난 평생 당신만 사랑할 거야. 우리 와이프 하나면 충분해.” 고시환의 잘생긴 얼굴과 진심 어린 듯한 고백... 다른 여자라면 벌써 가슴이 두근거리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가 평소 얼마나 독설을 잘 하는 사람인지 잘 알고 있다.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단지 내 반응을 보고 비웃으려는 속셈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나를 놀려먹으려고 연극하는 거지? 그거야 누군들 못 하겠어?’ 나는 일부러 감동한 척 고시환의 가슴에 기대며 손가락으로 그의 목젖을 장난스럽게 스쳤다. “자기야, 알았어! 역시 자기가 최고야. 자기도 걱정하지 마. 나도 평생 자기만 사랑할게. 자기만큼 잘생긴 사람이 어디 있다고!” 나와 고시환의 이런 과한 연기에 결국 고영훈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고영훈의 시선은 계속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니, 조카. 나 좀 그만 쳐다보면 안 되겠어?” “우리 남편이 화나면 나중에 달래기도 힘들다고.” 고영훈은 시선을 돌리며 고시환의 굳어진 표정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죄송해요, 작은아버지. 그런데 정말로... 작은어머니 얼굴이 민아랑 너무 똑같아서요.” 나는 그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 음식을 먹으며 태연하게 물었다. “참, 내가 우리 남편한테 이 자리 마련하라고 한 건 조카며느리랑 잘 지내고 싶어서였는데, 조카며느리는 왜 안 왔어?”고영훈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제 와이프가 다른 일로 바빠서요.” “그래요? 근데 아까 보니까 네 말투가 꼭 자기 와이프가 없는 것처럼 말하던데?” 나는 고시환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자기야, 당신 조카며느리가 죽었거나 실종됐으면 경찰에 신고해서 제대로 조사해야 하는 거 아니야?”
눈앞에 있는 내 얼굴을 닮은 불상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그와 눈이 마주치는 듯한 느낌에 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고시환의 팔을 꽉 잡으며 그의 품에 쓰러지듯 기대하면서 눈을 꼭 감았다. 몸이 멈추지 않고 떨리는 것을 억누르기 위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온 힘을 다했다. 고시환은 내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그 불상을 바라보았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옆에 있는 천으로 불상을 덮더니, 봉투 안으로 던져 멀리 치워버렸다. “난 불교 따위 믿지 않아. 이런 건 보는 것만으로도 재수 없어.” 그는 내 등을 부드럽게 두드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네가 어릴 때부터 불상을 무서워하는 거 내가 잘 알아. 그거 치웠으니까 이제 아무것도 없어. 신경 쓰지 마.” 나는 고시환의 품에 기대어 한참 동안 숨을 고르며 떨리는 몸을 진정시켰다. 드디어 몸이 진정되자,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아 강주희를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뜻이야? 다들 내가 불상을 가장 무서워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딨는데, 네가 하필 나한테 불상을 준다고?” “게다가 그걸 내 얼굴처럼 조각해서? 이건 분명히 의도된 짓거리야!” 내 갑작스러운 분노에 강주희는 당황한 얼굴로 두 손을 휘저으며 변명했다. “하나 씨, 정말 미안해요. 저는 몰랐어요. 불상을 무서워하시는 줄은 정말로...” “몰랐다고?” 나는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가 망설임 없이 손을 올려 강주희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 내가 힘껏 때린 탓에 그녀의 뺨에는 선명하게 손가락 자국이 남았다. “내가 불상 무서워서 난리 친 거, 예전에 핫이슈로 다뤄진 적도 있었는데 네가 몰랐다고? 그 정도는 검색만 해도 다 나오는 이야기야. 네가 개였다면 주인을 기쁘게 하려고 발버둥쳤을지는 모르겠네.” 분이 풀리지 않은 나는 강주희의 다리를 걷어차며 소리쳤다. “재수 없어. 강씨 집안 친딸도 아니고 양딸 주제에 네가 어딜 감
“당신 지금 뭐 하려고 하는 거야? 말해두는데, 우리 그냥 파트너일 뿐이야!!” 남자의 얇은 입술이 내게 가까워지는 걸 보자, 나는 겁에 질려 눈을 꼭 감았다. 예상했던 키스는 오지 않고, 대신 고시환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겁먹었네? 아까는 그렇게 용감하더니.” 그는 내 귀 옆에서 속삭이듯 말하며, 남자의 숨결이 내 목에 닿았다. 나는 그 순간 오싹한 느낌에 몸을 떨었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때? 한 번 더 ‘자기’라고 불러볼래?” 고시환의 장난스러운 표정을 보자 나는 화가 나서 그를 세게 밀치고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꿈 깨! 그런 일 절대 없거든!” 고시환은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고, 나는 그의 눈빛에 심장이 쿵쾅거리며 무의식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해. 이런 거 하지 말고. 어렸을 땐 그래도 좀 귀여웠는데 지금은 전혀 아니야.” 남자의 미소가 점차 사라지더니, 천천히 나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내가 어릴 때 어땠는지 어떻게 알아?” “임씨 가문의 귀한 딸로 태어나서 뭐든 원하는 건 다 가질 수 있었을 텐데.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수 있을 정도였을 네가, 내 어린 시절을 안다고?” 고시환의 말에 나는 속으로 경고등이 켜지는 것을 느꼈다. ‘큰일 났다. 너무 흥분해서 내가 지금 누구인지를 잊어버렸네!’ “나는... 당연히 알지!” 나는 말을 더듬으며, 겁먹은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잊지 마. 나랑 민아는 엄청 친한 친구였다고. 민아가 당신에 대해 다 얘기해줬어! 당신 어릴 때 개한테 쫓기다가 바지가 내려간 일도 다 알고 있는데?” 고시환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남자의 눈빛에는 뭔가를 탐색하려는 기색이 엿보였고, 나는 그 순간 그 시선을 피하려고 본능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급하게 방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잠갔다. ‘고시환 같은 사람이랑 같이 살고 있는 건, 진짜 호
나는 불상 안에 갇힌 채, ‘임하나’의 몸이 뒤로 쓰러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 순간, 고시환이 재빠르게 움직여 그녀를 부축했다. “임하나?” 고시환은 ‘임하나’를 조심스럽게 소파에 눕히고, 즉시 사람을 불러 의사를 오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소파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애틋한 눈빛으로 ‘임하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임하나’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고시환의 손과 눈에는 깊은 애정이 가득했다. 바닥에 떨어진 불상 안에 갇혀 있는 나는, 누운 상태로 남자의 표정을 생생히 볼 수 있었다. ‘이 사람, 원래부터 임하나를 좋아했던 건가?’ ‘그렇지 않다면, 왜 이런 표정을 짓는 걸까?’ 과거의 일들이 머릿속을 스치자, 나는 마치 머리 속에 그동안 이해되지 않은 것들이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것을 깨달았다. ‘고시환 정도의 권력을 가졌다면, 애초에 이 결혼을 거부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데도 아무 말 없이 받아들인 걸 보면, 사실 그녀를 좋아했던 게 아닐까?’ ‘만약 그날 밤 약에 취해 실수로 임하나를 밀어버린 일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쯤 이 둘은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나는 더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당장 내가 원하는 건 이 불상에서 빨리 빠져나오는 것뿐이었다. ...곧 의사가 서둘러 도착했고, ‘임하나’의 몸을 검사하기 시작했다. “고 대표님, 아내분의 몸에는 큰 이상이 없습니다. 어떤 자극을 받아 일시적으로 기절한 것 같으니, 충분히 쉬고 나면 곧 깨어날 겁니다.” 고시환은 자연스럽게 불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남자의 눈에 서린 분노를 보고, 나는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고시환, 지금 뭐 하려고 하는 거야?’ 그는 말없이 불상을 집어 들더니, 분노에 차서 그것을 바닥에 세게 내던졌다. 쾅!이 소리와 함께 불상은 산산조각이 났다. 나는 갑작스러운 충격에 머리가 어지러워지며, 다시 한번 의식이 혼미해졌다. ‘큰일 났다. 이번엔 진
전화를 끊자마자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물었다. “뭐래? 뭔가 나왔어? 그 뼈에서 뭐가 확인됐어?” 고시환은 즉시 대답하지 않고,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너 뭔가 알고 있는 거 아니야?”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태연한 척 고시환의 말을 반박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나 의심하는 거야? 잊지 마. 나 지금 당신 편에서 같이 움직이고 있잖아.” 고시환은 말없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 “처음부터 너는 민아에 대해 뭔가 알고 있다고 장담했어. 그리고 네가 고영훈 집에서 훔쳐온 향초도 함께 감식하라고도 했지.” 그가 점점 내 쪽으로 다가오며 날 몰아붙이자, 나는 침대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고시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런 식으로 몰아붙이지 말고. 지금 중요한 건 그 뼈의 정체가 뭔지 아는 거야. 그게 사람 뼈야, 아니야?” 남자의 의심 어린 눈빛이 날 꿰뚫는 듯했다. “왜 그게 사람 뼈라고 생각하는데?” 이 질문에 나는 순간 얼어붙었다. “사람 뼈가 아니라고? 그럼 그게 뭐야?” ‘그럴 리가 없어. 내가 확실히 그 불상에서 강하게 끌려가는 걸 느꼈는데, 어떻게 사람 뼈가 아닐 수 있지?’ 고시환은 짧게 숨을 고르더니 말했다. “개 뼈였어.”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여전히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하지만 그 뼈에서 민아의 지문이 나왔어.” “뭐라고?” 나는 그 말에 완전히 충격을 받았다. ‘뼈가 내 것이 아니라고? 그런데 내 지문이 거기서 나왔다고?’ 내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히며 혼란스러워졌다. ‘강주희는 대체 뭘 하려는 거지? 이런 짓을 벌인 이유가 뭐야? 설마 내 정체를 의심하고 있는 건가?’그럴 가능성을 떠올리자, 나는 속으로 비웃음이 나왔다. ‘임씨 가문의 딸이라는 내 신분은 확실히 증명할 수 있는데, 누가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서 내가 죽은 강민아라고 의심할 수 있지?’ 이런 일이 내게 직접 벌어
고시환의 눈이 커지며 충격에 한 걸음 물러섰다. 남자의 시선은 내게 고정된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 너 진짜 강민아야?” 고시환의 충격적인 표정을 보자 나는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오며, 배를 잡고 허리를 숙이며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하하하... 하하하...!” “고 대표님, Y 시에서 최고 부자 자리에 오를 만큼 똑똑한 머리로, 이런 말을 믿는다고?” 나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제발! 난 임하나야, 임씨 가문의 외동딸이라고! 어떻게 내가 민아일 수 있겠어?” “당신이 직접 조사해 보면 알 수 있잖아. 그냥 내 얼굴이 민아랑 조금 닮았다고 해서 나를 민아로 착각한 거야?” 웃음을 멈춘 나는 천천히 고시환에게 다가가 그를 한 손으로 잡아당겼다. “아니면, 진짜로 이런 말을 듣고 싶었던 거야?” 고시환은 내가 그를 놀린 걸 깨닫고, 화가 나서 내 팔을 강하게 뿌리쳤다. “임하나, 이런 농담 정말 재미없어! 죽은...” 그는 말을 멈추고, 무언가를 깨달은 듯 얼굴이 굳어졌다. “그 누구에게도 네가 이런 식으로 농담하면 안 되지!” 나는 두 팔을 엇갈리게 팔짱을 끼며 얼굴에 냉소를 띠었다. “방금 뭐라고 말하려고 했어? 죽은 사람을 가지고 농담한다고 하려고 했지?” “당신도 속으론 이미 민아가 죽었다고 인정한 거잖아. 그런데 왜 그걸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해?” 나는 고시환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내가 당신을 협박해서 결혼하고 혼인신고를 한 그 순간부터, 당신은 내 얼굴을 보면서 민아를 떠올렸던 거지?” 내 영혼은 내가 맞지만, 지금 이 몸은 임하나의 것이다. 고시환은 임하나의 얼굴을 보며 나를 그리워했던 것이다. 그 사실이 떠오르자, 내가 이 상황을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은 나를 강민아의 대체품으로 여기면서,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날 의심하는 거야?” 나는 고시환에게 손가락질하며
강주희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듯 이를 악물었지만, 나를 어찌할 수는 없었다. “고마워요, 작은어머니. 저 꼭 오래오래 살게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잔을 부딪쳤다. “그야 그렇겠죠. 욕 많이 먹을수록 오래 산다잖아요.” 강주희는 내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그녀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눈가가 붉어지더니, 곧 고영훈을 바라봤다. “오빠, 작은어머니가 나한테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 거예요?” “우리 강씨 집안이야 임씨 가문만큼은 못하겠지만, 제가 오빠랑 함께하는 게 이런 식으로 압박을 받아야 한다면, 이 약혼은 하지 않는 게 낫겠어요.” 강주희는 일부러 술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약간 숙이며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했다. ‘아휴, 저 눈물 연기 몇 번이나 본 거야? 이제는 좀 지겹다.’ 나는 하품을 참지 못하며 고개를 돌렸다. “굳이 내 앞에서 이런 연극을 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 앞으로 우리가 서로 엮일 일도 없을 거잖아요.” 나는 여전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고시환을 힐끔 바라보고, 의자를 당겨 일어섰다. “오늘 약혼식에 온 건 우리 남편 때문이야. 우리가 서로 얼굴 보기 싫어하는 건 분명하니까, 미안하지만 이만 갈게.” 뒤돌아 나가려는 순간, 고영훈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그는 내 얼굴을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곧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작은어머니, 주희한테 사과하세요.”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져 나오며 손가락으로 귀를 파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뭐라고? 다시 한번 말해봐?” “제가 주희한테 사과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작은어머니, 아까 말씀이 너무 지나치셨잖아요.” 고영훈의 말에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웃으며 주변 사람들을 둘러봤다. “지금 여기 계신 분들, 다 들으셨죠? 제가 누구한테 무례했다는 건데, 당사자 말고 또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 계시면 말씀 좀 해보세요.”나는 손가락으로 강
‘어차피 곧 이혼할 사인데, 앞으로는 서로 얽힐 일도 없겠지. 아마 두 번 다시 마주칠 일도 없을 거야.’ 주요석에 앉아 있던 고정한이 그 순간 고시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주변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다 들리도록 크게 말했다. “시환아, 너 하나 양과 벌써 혼인신고까지 했다며? 결혼식은 언제 올릴 거니? 이왕 여자 쪽에서 허락한 건데, 절대 서운하게 하면 안 된다.” 고정한의 말이 떨어지자, 이미 조용했던 예식장은 더더욱 적막에 휩싸였다.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고시환을 바라보며, 속으로는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뭐? 고시환이랑 임씨 가문의 임하나 양이 혼인신고를 했다고?” “전부터 그런 소문이 살짝 돌긴 했는데, 진짜였네.” “근데 아까 보니까 둘이 말도 안 하고, 웃는 얼굴도 안 보였는데. 둘이 대체 왜 갑자기 혼인신고를 한 거야?” “에휴, 너 그거 모르지? 고시환은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H 시에서는 힘이 없잖아. 그래서 H 시에 발붙이려고 그런 거지.” “임씨 가문이 고씨 가문만큼은 아니어도, H 시에서는 알아주는 집안이잖아. 고시환 저 사람, 야망이 대단하네.” 예식장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이 이런 계산에 밝은 사람들이었다. 단 몇 초 만에 고시환과 나의 관계를 파악한 듯, 각자의 추측을 마친 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나는 주변의 시선에 전혀 개의치 않고, 그저 미소를 띤 고정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단하네. 그때 고시환이랑 고씨 가문의 본가에서 그렇게 싸우고, 사이가 완전히 틀어졌으면서도, 지금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들 행세를 하고 있잖아.’ 나는 옆에 있는 고시환을 힐끗 보았다.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결국 내가 먼저 나서기로 했다. “아버님, 저희 젊은 사람들 문제에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보다 우리 영훈 조카 약혼식부터 잘 챙기시는 게 우선 아니겠어요?” 고정한은 한때 고씨 가문에서 그야말로 전설로 불
고시환은 손에 들고 있던 혼인관계증명서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래.” 순간에 우리 사이에 묘하게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저기, 약혼식 곧 시작할 것 같은데, 당신 빨리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고씨 가문의 일원인 고시환이 아무리 고영훈과 사이가 안 좋더라도, 주요 가족 행사에서 가족석에 앉지 않고 나와 이 구석에 있는 건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내 말을 들은 듯 주위를 한번 훑어보더니,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어? 뭐 하는 거야?” 고시환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직 이혼 안 했잖아. 내 아내로서 나랑 같이 가야지. 괜히 뒷말 나오게 만들 순 없으니까.” “곧 이혼할 건데...” 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남자의 손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사실 우리 결혼 소식은 이 상류층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고시환이 내 손을 잡고 주인석에 앉자, 모두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사람들은 눈을 크게 뜨고 수군거리며 고시환과 나의 관계를 추측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그때 손을 뿌리쳤어야 했는데... 이제 이혼하면 뒷말이 더 많겠네.’ ‘고시환이랑 엮였다는 걸 이제 알았을 텐데, 오늘 밤에 이혼 소식까지 돌면 얼마나 말이 많아질까?’ 나는 마음속으로 임씨 가문의 내 부모님에게 미리 사과와 기도를 했다. ‘제발 이 험담들을 잘 견뎌내게 해주세요...’ 고시환은 주인석에 앉아도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했지만, 눈썹 사이엔 살짝 드러나는 불쾌감이 있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눈길을 주자, 그 순간 사람들이 수군거리던 소리가 뚝 끊기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입을 다물었다. 나는 고시환의 대응에 속으로 엄지를 치켜세우며 웃음을 참았다. ‘정말 대단하긴 하네.’ 그에게 한마디 장난스럽게 말하고 싶었다.‘이제 곧 남이
장연희의 한마디가 내 혼란스러운 마음을 단숨에 정리했다.‘맞아, 난 이미 죽음을 한 번 경험한 사람이잖아. 뭘 그렇게 겁먹고 있는 거지?’ ‘어릴 적 친구 하나쯤이야, 별로 대수로운 일도 아니잖아.’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나는 서둘러 준비를 마친 뒤, 고영훈과 강주희의 약혼식에 가기로 했다. 청첩장을 들고 예식장에 들어서자, 이리저리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도 모르게 긴장감이 스쳤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고시환을 찾았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다.’ 안도감을 느끼는 동시에, 묘하게 내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졌다. ‘애초에 고시환은 고씨 가문을 싫어하고, 자신의 성을 혐오하는데, 여기 올 리가 없잖아.’ ‘그런데도 왜 이렇게 약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걸까?’ 며칠 동안 나는 일에 몰두하며 고시환에 대한 생각을 잊으려 애썼지만, 잠깐이라도 쉬는 시간이 생기면 그의 얼굴과 목소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결국 문제는 내 마음이겠지.’ ...나는 예식장 한쪽 구석에 앉아 조용히 쉬고 있었다. 그때, 샴페인 잔을 든 남자 몇 명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아가씨, 전에 본 적 없는 얼굴인데요?” “H 시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 계시다니, 어디 가면 또 뵐 수 있을까요?” 나는 두 사람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둘 다 잘생긴 편이긴 했지만, 고시환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다.나는 차갑게 말했다. “만나볼 마음 없으니까 돌아가세요.” 이런 상류층 모임에서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섞여 있는 법이다. 특히 조금이라도 돈이 있는 이른바 ‘재벌 2세’들은 자신들이 평범한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두 사람을 단칼에 거절하자, 그들의 표정에 약간의 불쾌함이 스쳤지만, 공공장소라 억지로 화를 참는 듯했다. “아가씨, 참 성격 있네요. 그런데 어느 집안의 아가씨예요? 혹시 내가 누군지는 알아요?” 나는 그를 힐끗 쳐다보고 기억을
청첩장에 적힌 내용을 읽으며 나는 살짝 놀랐다. ‘고영훈이랑 강주희 사이에 뭔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빠르게 약혼까지 하다니.’ 며칠 사이에 둘이 약혼식 날짜까지 잡았다니, 정말 예상 밖이었다. 강주희는 웃으며 청첩장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작은어머니, 꼭 시간 맞춰 오셔야 해요.” 약혼식은 열흘 뒤로 정해져 있었다. ‘그때쯤이면 나도 고시환과 이미 이혼했을 거야.’ ‘그땐 고씨 가문이랑 완전히 남이겠지.’ 그 생각이 들자, 나는 청첩장을 다시 강주희에게 밀어 돌려주었다. “나 지금 네 작은어머니 아니야. 곧 고시환 씨와 이혼할 거고, 그 이후로는 너희 고씨 가문 사람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을 거야.” 나는 강주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약혼 축하해. 네 약혼식이 순조롭길 바랄게.” 강주희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다시 한번 청첩장을 내 손에 놓으며 말했다. “그래도 언니잖아요. 반쪽짜리 언니라도, 꼭 와줬으면 좋겠어요.” 그녀가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초대하려는 모습에, 나는 웃으며 청첩장을 받아들었다. “알았어. 그렇게 간절히 부탁하니까 가줄게.” ...강주희의 약혼 소식은 삽시간에 퍼졌고, 인터넷에서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사람들은 모두 이 잘 어울리는 커플에게 축하를 보내느라 바빴다. 하지만 한때 고영훈과 결혼을 약속했던 ‘강민아’에 대한 기억은 모두 완전히 잊은 듯했다. 약혼식 당일, 나는 가게에 앉아 청첩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장연희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사장님,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되잖아요. 누가 칼 들고 협박하는 것도 아니고요.”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넌 나를 몰라.” 강주희의 약혼식에 가든 안 가든 사실 내겐 상관없었다. 이미 고영훈에 대한 미련은 다 버린 지 오래였으니까. 문제는, 거기서 혹시 고시환을 마주치게 될까 봐였다. 그날 이후 고시환은 이혼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
“우리, 이제 끝낼 때가 된 것 같아...” 고시환의 말을 들은 나는 순간 멍해졌다. ‘끝내자고? 이혼을 하겠다는 뜻인가?’ 나는 한참을 머릿속에서 되새기다가, 그가 정말 떠나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 ‘고시환이랑 이혼할까?’ 실은 나도 처음 고시환과 결혼한 것도 단지 이 사람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였다. 지금의 강주희, 그녀가 끝까지 물고 늘어지지 않는 한, 나는 임씨 가문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그녀를 상대할 수 있었다. 이제의 나는 고시환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다가 일부러 웃는 얼굴로 말했다. “맞아, 끝내야지. 그럼 좋은 날 골라서 이혼하러 가자.” 고시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재산 분할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필요 없어.” 나는 남자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원래부터 비즈니스 관계였잖아. 임씨 가문 정도면 날 먹여 살리기 충분해.” 나는 일부러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내가 널 찾은 이유는 따로 있어. 나 H 시로 돌아가려고 해.” “이혼 절차는... 오늘 바로 끝내는 게 어때?” 고시환은 눈을 깜빡이며 헛기침을 했다. “오늘? 오늘은 안 될 것 같은데...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밤까지 걸릴 거야.” “괜찮아.”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시간 날 때 말만 해. 언제든 내가 맞출게.” 고시환이 답하기도 전에 나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럼 이만 갈게. 우리 엄마가 집에서 밥 차려놓고 기다리고 계셔.” 나는 문을 나섰고, 고시환은 내 뒷모습을 보며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 비서가 허둥지둥 들어왔다. “보스, 방금 그분... 그 사진 속 사람이잖아요?” “그분... 이미 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고시환은 액자 속 소녀의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했다. “맞아요, 이미 떠났어요.” 비서는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이미 사무실을 떠난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고시환의 사무실로 들어서는 순간, 왜 비서가 나를 보고 그렇게 놀랐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내 눈길을 끈 건 고시환이 아니라, 그의 책상 위에 놓인 커다란 액자였다. 나는 그 액자 속 사진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저 사진...’ 그 사진을 보는 순간, 내 머릿속은 열 살 때로 돌아갔다. 열 살...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중요한 나이였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생일축하는커녕 내 생일이 언제인지조차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단 한 사람, 고시환만 빼고. 나도 그날이 기억난다. ‘뚱보’는 내게 다가와 말했다. “나 이제 떠나야 해. 아마 다시는 못 돌아올 거야.”나는 ‘뚱보’를 진심 어린 친구로 여기고 있었기에, 그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결국 눈물을 참지 못하고 엉엉 울며 ‘뚱보’의 가슴을 두드렸다. “다들 나를 떠나는데, 너마저 떠난다고? 너만은 친구라 생각했는데, 너도 나 버리고 갈 거야?” “오늘이 내 생일인데, 다들 케이크를 먹을 때 나는 못 먹어. 이제 내 유일한 친구인 너까지 떠나는 거야?” 그때, 내가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우는 모습을 본 ‘뚱보’는 나를 꼭 안아주며 위로했다. ‘뚱보’는 내 눈물을 닦아주고, 동네 구멍가게에서 슈퍼 막대사탕을 사와 내게 내밀며 말했다. “생일 축하해. 하지만 난 정말 떠나야 해. 해야 할 일이 있거든.” “내가 성공하면 꼭 널 찾으러 올게. 여기서 나 기다려 줄래?” 그때의 나는 ‘뚱보’의 눈빛 속 진심을 알아채지 못하고, 그저 친구가 날 속인다고 생각했다. ‘뚱보’가 날 달래려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사진 한 장 찍어줄게. 내가 너 보고 싶을 때마다 이 사진을 볼 거야.” “이 사진 앞에서 맹세할게. 내가 꼭 돌아와서 너 데리러 갈 거라고!” 그 말에 속아 넘어간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예쁜, 하지만 지금 보면 우스꽝스러운 미소를 카메라 앞에
나는 고시환의 눈을 마주치다가 어색해서 고개를 돌렸다. ‘분위기가 왜 이리 묘하지?’ 결국 나는 가볍게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저기, 나 여기까지 오느라 너무 힘들었거든. 우선 올라가서 쉬어야겠어.” 말을 마치자마자 헐레벌떡 위층으로 올라갔지만, 막상 내 방이 어딘지 몰라서 다시 내려와야 했다. “그... 어디서 자면 돼?” 고시환은 나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이 자고 싶은 방에서 자. 당신이 이 집의 주인인데.” 그 말에 나도 순간 눈썹이 꿈틀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돌아 적당한 방 하나를 골라 들어갔다. 나는 넓고 푹신한 침대 위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지금 고시환한테 갖고 있는 감정이 어떤 건지 잘 모르겠어. 예전처럼 그저 복수를 위해 이용하려는 건 아닌 것 같아.’ ‘하지만 지금 내 육체는 임하나고, 영혼은 강민아잖아.’ ‘내가 정말 어린 시절의 정 때문에 고시환을 좋아하게 된 건지, 아니면 지금의 또 다른 고시환에게 끌리는 건지 헷갈려.’ 고시환도 똑같이 알 수 없었다. ‘그 사람이 날 보는 이유가 이 얼굴 때문인지, 아니면 지금의 나 때문인지 모르겠어.’ 다시 한번 몸과 영혼 사이의 갈등에 빠진 나는 하늘을 향해 소리를 내지르다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 ‘복잡한 거 그만 생각하자. 그냥 주어진 대로 살아야지.’ 며칠 동안 꽉 조였던 긴장감이 풀린 탓인지, 나는 모처럼 완전히 편히 쉬었고 눈을 떠보니 이미 정오가 넘어 있었다. 내가 낯선 침실을 잠시 바라보다가 지금 어디 있는지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집 안을 돌아다녀 봤지만 고시환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전화를 걸었는데, 또다시 통화 중이라는 신호음이 들려왔다. ‘대체 뭘 하길래 통화 중이야?’ 나는 찡그린 얼굴로 SL 그룹의 주소를 검색했고,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SL그룹 건물 앞에 도착해 KM 그룹보다도 훨씬 크고 높은 건물을
고시환은 두 팔로 나를 끌어안으며 아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얼마나 억울한지, 너는 알기나 할까...” 나는 코끝을 훌쩍이며 남자의 품에서 몸을 빼내면서 고시환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남자의 얼굴이 창백한 것 말고는 별다른 이상이 없어 보이자 안도의 숨이 나왔다. “그동안 어디 있었어? 왜 내가 그렇게 전화했는데 단 한 통도 안 받았냐고!” “대체 나를 당신의...” 내가 말을 하다 갑자기 멈췄다. “나의 뭐?” 고시환이 장난스레 물었다. 나는 얼굴이 조금 달아오르며 말했다. “당신의 파트너로 생각하지 않는 거야?” “민아의 시신을 찾아주자마자 나 같은 파트너는 버리고 팽개치려는 건 아니겠지?” “아직 민아를 죽인 범인을 못 찾았잖아. 우리의 비즈니스 관계는 끝난 게 아니야!” 고시환은 나를 바라보며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 같은 파트너를 잊을 리가. 다만 내가 재벌이니까 쉬고만 있을 순 없잖아.” “안 그러면 재벌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하기 힘들겠지. 그러면 너, 임씨 가문의 귀한 딸의 얼굴에 먹칠하게 될 텐데.” 나는 고개를 홱 돌려버리고, 고영훈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근데 고영훈이 했던 말은 뭐야? 얼른 솔직히 말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고시환은 나를 Y 시의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본인의 입을 통해서야 나는 고시환이 자리를 비웠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 장례식이 열리고 있던 동안, 고시환의 회사인 SL 그룹에서 개발한 약품이 누군가를 죽게 만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유족들이 SL 그룹에 찾아와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이 사건이 커지면서, 주가도 끝없이 추락했다. 결국 고시환은 회사를 수습하고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급히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고영훈이 했던 말도 이와 관련 있었다. 유족들은 고시환의 제안에 불만을 품고 사람을 시켜 그를 납치하려 했지만, 고시환은 이를 미리 알아채고 역으로 유족 측을 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