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환은 내 눈에 서린 의문을 알아챈 듯 천천히 손을 놓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그는 여유로운 태도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비웃듯 입을 열었다.“임씨 가문의 따님, 역시 머리는 단순하고 힘만 세군. 이런 어설픈 추측으로 날 협박할 생각을 한다니.”다시 숨 쉴 수 있게 되자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고시환을 노려보았다.고시환의 태도는 한결같이 태연하고 가벼웠다. 나는 왠지 모르게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이런 일로는 이 사람을 위협할 수 없다는 건가?’‘설마, 내가 잘못 짚은 거야?’“어떻게 그게 어설픈 추측일 수 있죠?”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오빠, 내가 알기로 남자가 지갑 가장 깊숙한 곳에 그런 사진을 넣어두는 건, 절대로 아무나한테 하는 짓이 아니거든?”“게다가 오빠가 그렇게까지 필사적으로 부정하는 걸 보면, 혹시 강민아 씨가 오빠 조카며느리라서? ‘그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처음에는 잠시 흥분한 듯 보였던 고시환의 표정이 이내 싹 사라졌다.그의 얼굴에는 무미건조한 냉소만이 남아 있었고, 심지어 지루해 보이기까지 했다.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걸치고 있던 가운을 가볍게 여미고 나를 바라보았다.“하나야, 그런 쓸데없는 추측에 시간 낭비할 바에야, 차라리 네 목숨을 어떻게 구할지나 고민하는 게 낫지 않겠어?”나는 고시환의 눈과 마주친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며 온몸이 떨렸다.실은 나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남자라면 정말로 나를 죽일 수도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이 멍청아, 제발 머리 좀 굴려 봐!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내가 착각한 게 아닐 텐데. 내가 아무리 자의식 과잉이 아니라 해도, 누군가가 어린 시절의 사진을 소중히 간직한다는 건 분명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거잖아!’무언가 떠오른 듯, 나는 갑작스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문을 열려던 고시환의 발걸음이 멈췄고, 그는 살짝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가라는 신호를
“영훈 씨, 제발 날 구해줘요...”나는 극심한 통증을 참다못해 낡은 골목에 숨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것은, 고영훈의 짜증 섞인 목소리였다. [강민아, 너 또 무슨 짓이야? 난 할아버지의 유언에 따르기 위해 너와 결혼했어. 이 이상 뭘 더 바라는 거야?]“영훈 씨, 나... 나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에요. 제발... 제발 와서 나 좀 구해줘요...”오늘은 나와 고영훈의 결혼식이 예정된 날이었다. 하지만 고영훈은 갑작스레 경찰서에서 온 전화를 받자 그대로 떠나버리고, 나 혼자 결혼식장에 남겨졌다. 나는 사라진 신랑이 파투 낸 결혼식을 모두 수습하고, 산책 삼아 신혼집으로 혼자서 걸어 돌아오던 길이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칼을 들고 나를 습격했다. [그만해!]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고영훈의 냉랭한 꾸짖음이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강민아, 이런 연극도 질리지 않니? 이제 정말 질린다.]“영훈 씨, 연극이 아니에요. 정말 누군가 나를 죽이려고 해요!!”나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공포감에 떨며 다급하게 말했다.[그럼 그냥 죽어버리든가.] 고영훈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나...”말을 이으려는 순간, 갑작스레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숨을 죽이고 입을 틀어막았다. 온몸이 오싹해졌다. 나를 쫓아온 끔찍한 살인자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강민아, 얌전히 고씨 가문의 며느리 역할이나...]그때 전화기 속 고영훈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고, 나는 깜짝 놀라 전화를 끊으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커다란 손이 갑자기 내 머리 위를 덮은 상자를 벗겨냈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피범벅이 된 흉측한 얼굴을 마주했다. “헤헤, 드디어 찾았다.” 광기로 가득 찬 눈빛과 잔인한 남자의 미소에 나는 공포로 얼어붙었다. 이 남자의 얼굴은 악몽처럼 내 머릿속에 깊이 새겨졌고, 이내 나는 피 웅덩이 위로 쓰러졌다. 하얀 웨딩드레스가 붉은 피로 물들어가며 내 몸은 점점 차가
고영훈이 방 안으로 들어가자, 나도 그를 따라 들어갔다. 방 안을 둘러보며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이 방은 내가 정성을 다해 꾸민 신혼 방이었다. 하지만 결혼 후, 신혼이었던 나와 남편은 단 하루도 이곳에서 잠을 잔 적이 없었다. 고영훈은 꽤 피곤해 보였다. 샤워를 마친 후 침대에 누운 그는 금세 잠이 들었다. 나 역시 고영훈의 상태와 동기화된 것처럼, 그가 잠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가 멍해지더니 마치 잠이 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죽은 상태 아닌가?’ ‘영혼이 어떻게 잠을 자는 거지?’ 나는 잠에 들어있다가,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깨어났다. 침대에 누워 있던 고영훈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 차가운 이목구비가 전화 화면을 확인하자 부드럽게 풀어졌다. “주희야, 무슨 일이야?” 고영훈이 다정하게 입을 열었다. 그 부드러운 어조는 내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목소리였다. [흑흑흑, 오빠... 언니가 계속 연락이 안 돼요. 언니 화난 거 아니에요?]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어리광 섞인 흐느낌은 내 동생, 강주희의 목소리였다. 강주희는 내가 납치된 이후 강씨 집안으로 입양된 아이였다. 분명 입양된 딸이었지만, 집안에서 나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다. 강씨 집안에서는, 할아버지를 제외한 그 누구도 어렵게 되돌아온 나를 환대하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내 남편인 고영훈조차도... 고영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약간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강민아가 친정집에 없다고?” [오빠, 그게 무슨 뜻이에요?]다른 쪽에서 강주희는 울음을 멈추고 반문했다. “강민아는 여기에도 없어.” 고영훈의 목소리가 약간 낮아졌다. 나는 열여섯 살에야 H 시로 돌아오게 되었기 때문에 이곳에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고영훈은 내가 신혼집에 없다는 걸 확인하고 당연히 친정집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집안 식구들도 나를 찾고 있다는 소식
‘피해자는 산 채로 몸이 토막 난 거야. 그것도 모자라, 그 끔찍한 과정에서 잠시나마 깨어 있었다니... 이 살인자는 정말 잔혹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군.’ ‘게다가 더욱 놀라운 건, 피해자의 뱃속에 고작 석 달밖에 되지 않은 사산아가 발견됐다는 사실이야. 석 달이라니...’김재국의 말을 들으면서 고영훈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고영훈의 머릿속은 끊임없이 복잡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석 달 전이면... 분명 강민아와 관계를 가졌었는데... 만약 그때 임신이 된 거라면, 지금 딱 석 달...’‘잠깐, 그런데 왜 자꾸 그 끔찍한 여자가 떠오르는 거지...?’“영훈? 영훈아?!” 갑작스럽게 멍해진 고영훈을 보고, 김재국은 몇 번이나 고영훈의 이름을 불렀다. 요즘 고영훈이 얼마나 지쳐있는지 아는 김재국은 고영훈의 상태가 몹시 걱정스러웠다. ‘간신히 집에 돌아가 쉬던 사람이 다시 호출된 상황이니, 피곤할 수밖에 없을 거야.’ ‘더구나 영훈이는 최근 강씨 집안의 장녀와 결혼까지 했으니...’ 김재국은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서 고영훈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고영훈은 정신을 차리고, 김재국의 걱정 어린 시선을 마주했다. 고개를 저으며 아무 문제 없다는 듯 계속 사건에 대해 자세히 캐물었다. “그 외에 다른 단서는 없나요?” 나는 옆에서 고영훈의 표정 변화를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다. 우스운 일이지만, 처음으로 남편이 나를 걱정하는 말을 듣게 된 순간이, 슬프게도 바로 내 시신의 신원 파악을 위한 단서를 논할 때였다. 나는 머리 없는 내 시신을 바라보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서글픔이 차올랐다. 내 가슴에는 작은 장미 모양의 태어날 때부터 있던 모반이 있었는데, 지금은 하얀 천이 아래를 가리고 있어 상반신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내 시신이 여기 이렇게 놓여 있는데도, 나와 가장 가까운 관계였던 남편조차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아마 함께 침대 위에서 뒹굴며 사랑을 나눌 때조차,
그것은... 머리였다! 피와 살이 모두 사라진 하얀 해골 머리! ‘하지만 분명 내가 죽은 지 아직 사흘도 지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순식간에 뼈만 남은 거지?’‘그리고 도대체 누가 내 머리를 잘라 이 사람들에게 보낸 걸까? 혹시 이들 중 한 명이 나를 죽인 범인인 걸까?’나는 가까이 다가가 두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려 했지만, 몸이 무언가에 꽉 묶인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쯧쯧쯧, 이 뼈의 주인은 참 예쁜 여자였을 텐데, 이제 향 가루로 만들어지다니, 안타깝군.”키 작은 남자가 입맛을 다시며 비웃듯 말했다.옆에 있던 키 큰 남자는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예쁘든 말든 상관없어. 우린 돈 받고 일만 하면 되는 거야.”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커다란 망치를 꺼내 들더니, 그 하얀 해골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 쾅!커다란 소리와 함께 하얀 뼈는 산산조각이 났다. 그 순간, 내 머리에 또다시 날카로운 고통이 밀려왔다. ... 눈앞이 흐릿해졌다가 다시 또렷해졌을 때, 나는 다시 친정집에 서 있었다. 유리병 안에 담긴 향 가루를 바라보며, 방금 보았던 광경들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내 머릿속이 ‘꽝’ 하고 울리며, 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내 머리뼈가 향 가루로 만들어져 여기로 보내진 거야?!’ ‘그것도 내 부모에게?’ ‘비록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도, 분명 두 분은 나를 낳은 친부모잖아!!’ “안 돼! 아빠!! 하지 마세요!!!” 우리 아버지가 향을 피우려고 하자, 나는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몸을 그대로 통과해 버릴 뿐이었다. ‘도대체 누구야? 누가 나를 토막 내고, 내 뼈를 향 가루로 만들어 내 부모에게 보낸 거지?’ 분노가 내 안에서 끓어올랐다. 고향에서 이곳으로 돌아온 이후로 나는 달리 친구도 없었고, 누구와 원한을 맺을 만한 일도 없었다. 만약 누군가와 다툰 적이 있다면, 그건 오로지 강주희뿐이었다. ‘강주희?!’ 나는 문득 무언가가 떠
고영훈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을 본 우대산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고영훈은 아무 말 없이 사진 속 반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한동안 침묵했다. 우대산이 더 묻기 전에, 고영훈은 고개를 저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폐를 끼쳤습니다.” 그는 말없이 몸을 돌려 뜰에서 나와 차를 몰아 경찰서로 향했다. ...경찰서에 도착한 고영훈은 바로 김재국을 찾았다. 고영훈의 다급한 모습에 김재국은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인가 묻기도 전에 고영훈이 먼저 다급하게 외쳤다. “그 반지 어디 있어요?! 그 결혼반지 말이에요!!!” “영훈아, 왜 이렇게 급해? 이 사건으로 위에서 우리에게 준 스트레스가 심하다는 건 알지만, 이런 모습은 너답지 않잖아.” “그 반지!” 고영훈은 눈가가 붉어진 채 김재국의 옷깃을 잡아 흔들며 거의 소리를 질렀다. “반지 내놔요!! 당장 가져오라고요!!!”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호기심에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김재국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옆에 있던 한 젊은 경찰관에게 급히 말했다. “증거물 보관소에 가서 그 반지 가져와.” 얼마 지나지 않아, 젊은 경찰관이 투명한 증거물 봉투를 들고 왔다. 고영훈은 그것을 보자마자 와락 빼앗더니, 봉투를 거칠게 찢었다. 김재국이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하지만 고영훈은 감재국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반지를 손에 들었다. 반지 안쪽에 새겨진 ‘GK’라는 이니셜을 보는 순간, 고영훈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반지 안에 그런 이니셜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나도 그제야 알았다. “이건... 내가 강민아에게 준 결혼반지인데...” 고영훈은 완전히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김재국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지만,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영훈아, 진정해. 혹시 잘못 본 거 아니야?” 고영훈은 아무 말도 하지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강주희의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이지?’ ‘설마 내 죽음이 자신과 관련이 있다고 자백하는 거야?’ 내가 반응하기도 전에, 고영훈이 갑자기 앞으로 나아가 강주희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무슨 소리야? 언니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거지?” 강주희는 얼굴을 찡그리며, 눈물을 머금은 채 고영훈을 바라보았다. “오빠, 아파요.” 고영훈은 멍하니 그녀의 고통스러운 얼굴을 보더니, 손을 무의식적으로 놓아버렸다. “미안해... 내가 조금 흥분했어.” 강주희는 울먹이며 말했다. “괜찮아요, 오빠. 언니 걱정 때문에 그러신 거 알아요.” 고영훈은 그녀의 팔뚝에 선명하게 남은 빨간 자국을 보고는 죄책감에 사로잡힌 얼굴을 했다. “네 팔...” 강주희는 옷을 살짝 당기며 가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별거 아니에요.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그러고 나서 그녀는 입술을 꼭 다문 채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 “언니에 대해선...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전에 언니가...” “뭐라고 했는데?” 고영훈의 목소리에는 그 자신도 깨닫지 못한 긴장감이 담겨 있었다. 강주희는 눈썹을 잔뜩 찌푸리며,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사실... 언니가 예전에 저한테 그런 말을 했어요. 오빠에 대한 감정은 이미 오래전에 식었고, 할아버지의 유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했다고요.” 고영훈은 아무 말 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분노를 삼키려는 듯 이를 악물고 있었다. 강주희는 한숨을 깊게 쉬며 덧붙였다. “그리고 언니가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했어요. 결혼식 날 그 사람이 데리러 온다고 했거든요. 처음엔 저도 언니 말이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고영훈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고, 차갑게 물었다. “네 말이 다 사실이야?” 강주희는 그의 눈빛에서 의심을 읽었는지, 조용히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오빠가 이 말 못 믿는 건 이해해요. 하지만
고영훈의 품에 안기려던 시도가 실패하자, 강주희의 눈에 잠깐 원망의 빛이 스쳤다. 그녀는 생각에 잠긴 척하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말했다. “아마 Y 시일 거예요. 정확히는 잘 모르겠어요.” 고영훈은 말없이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강민아가 Y 시로 가는 차편이나 비행기표를 샀는지 확인해봐.” 전화를 끊은 뒤, 그는 여전히 눈물을 글썽이는 강주희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늦었으니 집으로 데려다줄게.” 그 순간 강주희는 기회를 노리듯 고영훈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싫어요! 난 오빠 곁에 있고 싶어요. 오빠와 함께하고 싶다고요...” “강주희!” 고영훈이 단호한 목소리로 그녀를 꾸짖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결국 강주희를 밀어내며 말했다. “난 이미 네 언니와 결혼했어. 주위에서 어떻게 볼지 시선도 생각해야지. 시간도 늦었으니 인제 그만 돌아가.” “하지만 언니는 이미 오빠를 배신했잖아요. 그런데도...” 강주희의 말을 중간에 끊으며 고영훈이 말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해.” 그는 더 이상 강주희와 말을 섞지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계단을 올라갔다. 주방의 문이 무겁게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강주희의 시선이 남자가 사라진 문에 머물렀다. 잠시 후, 강주희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의 눈빛에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오빠는 결국 날 사랑하게 될 거예요. 강민아는... 이제 어디서도 다시는 찾을 수 없을 거야.” 나는 이 말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리고 강주희의 서늘한 미소와, 그녀가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설명할 수 없는 충격에 빠졌다. ‘내 죽음이 정말 강주희와 관련이 있다는 거야?’ ‘하지만 나는 강주희와 무슨 원한이 있지도 않았는데!’ ‘강주희가 지금까지 나 대신 가족들로부터 사랑과 관심을 나보다 훨씬 많이 받았지만, 오히려 내가 강주희의 마음을 달래려고 얼마나 잘해줬는데...’ ‘그러니까 도대체 왜 강주희는 이렇
고시환은 내 눈에 서린 의문을 알아챈 듯 천천히 손을 놓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그는 여유로운 태도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비웃듯 입을 열었다.“임씨 가문의 따님, 역시 머리는 단순하고 힘만 세군. 이런 어설픈 추측으로 날 협박할 생각을 한다니.”다시 숨 쉴 수 있게 되자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고시환을 노려보았다.고시환의 태도는 한결같이 태연하고 가벼웠다. 나는 왠지 모르게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이런 일로는 이 사람을 위협할 수 없다는 건가?’‘설마, 내가 잘못 짚은 거야?’“어떻게 그게 어설픈 추측일 수 있죠?”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오빠, 내가 알기로 남자가 지갑 가장 깊숙한 곳에 그런 사진을 넣어두는 건, 절대로 아무나한테 하는 짓이 아니거든?”“게다가 오빠가 그렇게까지 필사적으로 부정하는 걸 보면, 혹시 강민아 씨가 오빠 조카며느리라서? ‘그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처음에는 잠시 흥분한 듯 보였던 고시환의 표정이 이내 싹 사라졌다.그의 얼굴에는 무미건조한 냉소만이 남아 있었고, 심지어 지루해 보이기까지 했다.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걸치고 있던 가운을 가볍게 여미고 나를 바라보았다.“하나야, 그런 쓸데없는 추측에 시간 낭비할 바에야, 차라리 네 목숨을 어떻게 구할지나 고민하는 게 낫지 않겠어?”나는 고시환의 눈과 마주친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며 온몸이 떨렸다.실은 나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남자라면 정말로 나를 죽일 수도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이 멍청아, 제발 머리 좀 굴려 봐!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내가 착각한 게 아닐 텐데. 내가 아무리 자의식 과잉이 아니라 해도, 누군가가 어린 시절의 사진을 소중히 간직한다는 건 분명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거잖아!’무언가 떠오른 듯, 나는 갑작스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문을 열려던 고시환의 발걸음이 멈췄고, 그는 살짝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가라는 신호를
‘설마? 뚱보가 날 좋아했던 거야?’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나는 급히 고개를 흔들었다.‘그럴 리 없어!’‘이 사람은 단지, 걱정 없이 지냈던 어린 시절의 시골 생활을 그리워하는 것뿐이야!’나는 조금 전부터 이상하게 자만하는 내 모습에 스스로 경악했다.‘막 환혼을 끝내자마자 이런 생각을 하다니... 이건 분명 임하나의 몸에 들어갔던 후유증 때문이야!’원래는 고시환과 최대한 거리를 두고 이 상황을 벗어나려 했지만, 지금의 분위기를 보니 마음이 바뀌었다.나는 그대로 옆에 놓인 소파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시환 오빠, 우리 대화 좀 해보자.”고시환은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느긋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좋아. 나도 마침 너와 얘기하고 싶었어.”그는 내 맞은편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나는 무심코 눈을 질끈 감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뭐야? 관종이야? 왜 이러는 거야?’고시환은 내 반응을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뭐가 그렇게 긴장돼? 어차피 뭘 볼 게 있다고.”나는 몰래 눈을 조금 떠서 손가락 틈 사이로 고시환의 하반신을 살폈다. 남자가 옷을 입고 있는 걸 확인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시환을 보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하지만 남자의 단호한 표정을 보자마자 웃음을 싹 거두고 헛기침했다.“저기, 오빠, 아니... 고 대표님, 우리 거래 하나 할래요?”고시환은 아무 말 없이 나를 조용히 바라보았다.긴장한 나는 주먹을 꽉 쥐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H 시로 돌아온 건, 분명히 목적이 있는 거죠?”“그렇다면 우리 둘이 협력하는 건 어때요?”“고 대표님이 나랑 결혼해 주시면, 저는 우리 집안의 배경을 이용해서 고 대표님께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 드릴게요. 고 대표님이 원하시는 걸 얻을 수 있게 도와드리는 거죠.”고시환은 흥미롭다는 듯 나를 바라보더니 다리를 내리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대단한 임하나가 굳이 그렇게까지 나를 돕겠다고 나서는 이유가 뭔데?”“아니면, 단지 나랑 결혼해서 날 이용하고 도망치려는 속셈이야?”
나는 몸이 뒤로 넘어가 침대 위에 그대로 쓰러졌다. 머리가 어지럽고 멍한 느낌에 뒷머리를 몇 번 두드리다가, 손에 느껴지는 축축한 감촉에 깜짝 놀랐다.나는 고개를 흔들며 다시 정신을 차리려 노력한 후, 손을 내려다보자 온통 피투성이였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급히 수건을 집어 들고 상처 부위를 감싸고 나서 그제야 뒷머리에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아보니, 테이블 위에도 피가 묻어 있었다.‘설마...’나는 상황을 되짚어보기 시작했다.‘임하나가 어떻게든 이 휴게실에 들어와 고시환에게 접근하려 했던 거겠지.’ ‘그런데 고시환이 강한 자제력으로 임하나를 거부하고 밀쳐냈고, 그 과정에서 임하나가 테이블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혔다? 그래서 죽게 된 거고?’내가 생각할수록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임하나가 비록 재벌가 아가씨로 평판이 좋지 않았어도, 그렇다고 그렇게 나쁜 짓을 한 건 아니었는데...’‘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돌이킬 수는 없었으니까.’‘이제 내가 임하나의 몸으로 다시 환혼한 이상, 임하나 대신 제대로 살아야겠지.’나는 속으로 임하나를 위해 잠시 묵념하며 조용히 말했다.‘임하나, 이제는 편히 쉬어. 네 몫까지 내가 잘살아 볼게.’1분 뒤, 나는 손에 묻은 피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지금 나도 당장 이 뒷머리 상처를 처리해야 해.’‘겨우 다시 살아났는데,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또 죽을 순 없잖아.’겨우 몸을 일으켜 나가려던 찰나, 바닥에 떨어진 지갑이 눈에 들어왔는데, 지갑 사이로 1인치 크기의 증명사진이 살짝 보였다.‘저게 뭐지?’호기심에 나는 반쯤 몸을 구부려 지갑을 집어 들었다.그리고 그 안에 든 사진을 확인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멍해졌다.‘이게... 이게 내 어릴 적 사진이잖아?’나는 지갑을 뒤적이며 안에 든 다른 사진도 찾아냈다.이번에는 어린 남자아이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그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나는 갑자기 욕실 쪽을 향
한참을 숨을 고르고 난 뒤, 고영훈은 주변을 둘러보며 자신이 침실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그는 꿈에서 내가 누군가에게 쫓기고, 결국 무참히 살해당하는 장면을 보았다. 내 몸이 칼에 찔려 쓰러지는 것도 모자라, 마지막엔 사방으로 조각나 흩어지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고영훈은 그 모든 걸 눈앞에서 지켜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강민아, 제발 무사히 있어야 해!” “너는 죽으면 절대 안 돼, 내가 허락하지 않아! 반드시 널 찾아낼 거야!!”...“으악!” 나는 갑작스럽게 눈을 번쩍 뜨며, 눈앞의 밝은 불빛에 반사적으로 다시 눈을 감았다. 잠시 적응한 후 천천히 눈을 떴다.내 눈길을 돌리자, 땀에 흠뻑 젖고 얼굴이 붉어진 채로 고통을 억누르고 있는 고시환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깜짝 놀라 온몸이 굳어버렸다.‘이게 뭐야? 지금 무슨 상황인 거지?’‘여긴 어디고, 고시환은 왜 저러고 있는 거야?’주위를 둘러본 나는, 내 눈에 들어온 하얗고 고운 손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뭔가 불길한 생각이 스치며 나는 급히 화장실로 뛰어갔다.거울 속에 비친 나를 본 순간, 나는 숨이 막히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이게... 이게 임하나잖아?’‘내가... 내가 임하나의 몸으로 환혼한 거야?‘그렇다면, 임하나는 어디로 간 거지?’‘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고시환이 비틀거리며 욕실로 들어왔다.그는 갑자기 내 목을 움켜쥐었고, 눈에는 살기가 서려 있었다.나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남자의 손을 떼어낼 수 없었다.“삼...” 입 밖으로 단어가 나오자마자 나는 깨달았다.‘지금 나는 임하나잖아! 삼촌이라고 부르면 안 돼!’“시환 오빠, 정신 좀 차려!”“나는 아주 정신이 맑아.”고시환의 목소리는 쉰 듯이 거칠었다.“약을 먹일 용기가 있었다면, 그 대가는 치러야지!”나는 점점 숨이 막혀 오고, 아무리 몸부림쳐도 고시환의 힘을
막 고영훈과 고정한이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살펴보려던 찰나, 우연히 임하나가 조심스럽게 구석으로 숨어드는 모습을 발견했다.임하나에게 빠르게 다가가자, 그녀가 서빙 직원에게 은밀히 말을 걸고 있었다.“잠시 후에 이 물을 고시환에게 가져다줘. 반드시 이분이 마시는 걸 직접 확인하고, 돌아와서 이분이 어느 휴게실에 있는지 알려줘야 해.”임하나는 현금을 한 뭉텅이 꺼내 서빙 직원의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덧붙였다.“일만 잘 처리하면, 추가 보상도 넉넉히 챙겨줄게.”서빙 직원은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키더니, 앞에 놓인 약물이 든 물을 바라보며 신중히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반드시 해내겠습니다!”직원은 심호흡을 하더니 사람들 사이로 걸어가더니, 아무렇지 않은 척 계단을 올라갔다.나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상황을 지켜봤다.‘대체 이게 뭐야? 임하나가 약물까지 사용하려고 들다니!’임하나는 불안한 듯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2층을 향해 초조한 시선을 던지며, 손에 땀을 흘리고 있었다.“미안해요, 시환 오빠. 나도 어쩔 수 없었어요.”나는 임하나의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리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혹시, 이 약물을 사용하는 일이 임하나의 진짜 의도가 아닌 건가?’하지만 나는 깊이 생각할 틈도 없이 빠르게 2층 휴게실로 향했다. 고시환이 정말로 속을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고시환이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니, 설마 이런 데 넘어가겠어?’ 나는 서빙 직원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고, 눈앞에서 고시환이 그 약물이 든 음료를 마시는 장면을 똑똑히 목격했다. ‘뭐야? 진짜로 마셔버린 거야?’ ‘자기가 직원을 불렀는지 안 불렀는지도 구분 못 해?’‘아니, Y 시 최고 재벌이라는 사람이 이 정도의 상황 판단도 못 한다니, 너무 실망스러운데?’ 서빙 직원은 일이 성공적으로 끝난 것을 확인하자마자 아래층으로 내려가 임하나에게 보고했다. 이 모든 일이 순식간에 매끄럽게 진행됐다. 돈을 받아 든 직원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리를
“솔직히, 그 년을 시골에 그냥 놔뒀다가 뒷말 나올까 봐 데려온 거지, 아니었으면 평생 데려올 일도 없었을 거야.” 어머니는 혀를 차며 말했다. 어머니의 독설에 강주희는 살짝 미소 지으며 바로 어머니를 만류하며 부드럽게 안았다. “엄마,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돼요. 누가 들으면 언니가 무슨 큰 죄라도 지은 줄 알잖아요.” 그러면서도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말이에요, 언니가 신혼 첫날 이후로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잖아요. 혹시 우리한테 서운해서 그러는 건 아닐까요?” “언니가 우리가 평소에 잘해 주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앞으로는 우리를 아예 보지 않으려는 거면 어쩌죠?” 강주희의 말에 어머니는 곧바로 얼굴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흥! 서운하긴 뭘 서운해! 그년은 살아 있어도 강씨 집안의 딸이고, 죽어도 우리 집안 귀신이야!” “이 연회만 끝나 봐라. 내가 꼭 그년을 찾아서 단단히 혼쭐낼 거야!”나는 이 광경을 보며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예전에 부모님과 강주희의 대화에서 나는 어떤 문제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제삼자가 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즉, 강주희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치 나를 위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나를 더 깊은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있다는 사실을.돌이켜보면, 내가 처음 시골에서 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만 해도 나를 대하는 부모님의 태도는 나름 나쁘지 않았다.부모님은 나에 대해 그다지 정이 있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예의를 지키며 나를 대했고, 서먹한 사이지만 적당히 존중도 해주었다.그런데 시간이 흐르며 강주희가 이런저런 일에 끼어들면서, 그녀와의 비교 속에서 부모님은 점점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대놓고 싫어하며 경멸하기에 이르렀다.그런 와중에도 유일하게 나를 진심으로 아껴준 사람은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생전에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었고, 내가 고영훈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자, 옛날 고씨 가문을 도운 은혜를 언급
원래 재미있게 구경만 하고 있던 나는, 고시환의 말이 끝나자마자 긴장해 몸이 굳어졌다. ‘이 사람, 대체 왜 이러는 거야?’ ‘강주희 건으로 끝난 줄 알았더니, 이번엔 또 내 이야기를 꺼내다니.’ ‘설마 고영훈이 마음에 안 들어서, 주변 사람들까지 싸잡아 다 미워서 그러는 건가?’ 긴장한 나는 본능적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고영훈이 어떻게 대처할지 궁금해지다가, 문득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이미 죽었는데, 이런 걸 왜 신경 써? 고영훈이 뭐라든 내 운명이 달라질 것도 아닌데.’ 고시환은 연회장을 둘러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근데 이상하네. 여기 조카며느리의 부모님도 와 계시는데, 조카며느리는 안 왔네. 혹시 나 같은 삼촌이 싫어서 안 온 건가?” 갑작스러운 그의 발언에 나도 모르게 신경이 곤두섰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고영훈, 나의 부모님이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할지 지켜보았다. 고시환이 미간을 찌푸리며 심각한 표정을 짓자, 놀란 우리 부모님은 황급히 종종걸음으로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난감한 눈빛으로 고영훈에게 도움을 청하는 듯했다.“저... 그게, 우리 딸이 결혼하고 나서는 한 번도 집에 돌아오질 않아서요...” 우리 어머니는 얼굴에 싫은 내색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그러게요. 심지어 결혼식을 마친 후 친정에 오는 그 관례조차 안 지키더라니까요. 원래 시골에서 자란 애라 예의 같은 건 없어요. 지금도 어디서 놀고 있는지 알 길이 없고요.”어머니의 말투에 비꼼과 짜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민아도 주희처럼 똑똑하고 사려 깊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주희는 늘 주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잖아요.”“그런데 민아는, 제발 사고만 안 치면 감사할 따름이에요.” 고영훈은 우리 부모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약간 불쾌한 내색을 했다. 하지만 내가 실종되거나 심지어 해를 입었을 가능성을 생각하면, 그는 아직 확실한 증거도 없는데 이 자리에서 그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민아는 요즘 공부에 전념하느라
“맞아! 저 나이에 이미 자수성가한 재벌이라니, 정말 대단해! 그 수완을 보면 전혀 상상도 못 했어. 당장이라도 만나보고 싶어질 정도야!” 주변 사람들이 고시환을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시선이 고영훈 쪽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 고영훈이 몰래 주먹을 꽉 쥐고 있는 게 보였다. 그의 눈빛에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고영훈의 이런 모습이 몹시 흥미로웠다. ‘예전에 내가 알던 고영훈은 그저 욕심 없이 자기 일에만 충실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고영훈이 욕심 없이 자기 일에만 매진하는 모습이 내 마음을 끌었던 이유였다. 하지만 지금 보니,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이런저런 뒷모습이 꽤 많았던 것 같다. 과거의 나는 사랑에 눈이 멀어, 고영훈의 본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사람들의 칭찬을 한몸에 받은 고시환은 고정한 앞으로 다가가 가볍게 목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리고 그는 시선을 돌려 곧바로 고영훈을 보더니, 미소를 띠며 조카에게 다가갔다.“영훈아, 너 신혼인데, 결혼식 때 내가 너무 바빠서 축하를 못 했네. 너무 섭섭해하지 않길 바란다.”“괜찮습니다.”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고영훈은 어쩔 수 없이 불편한 기색을 숨기며 손을 흔들며 답했다. 그리고 그도 신혼 첫날에 벌어진 일을 딱히 설명할 수도 없어서, 그저 유야무야 넘어가려는 듯했다.하지만 상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고시환은 인사만으로 이 상황을 넘기려 하지 않았다. 고시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고영훈 옆에 서 있는 강주희로 옮겨졌고, 이어 그의 손짓에 비서가 검은색 선물 상자를 앞으로 내밀었다.고시환은 약간의 미안함이 담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건 조카며느리에게 주는 신혼 선물이다. 꼭 받아줬으면 좋겠네.”강주희는 얼굴 가득 기쁨을 띠며 마음속으로 몹시 들떠 있었다. 그녀는 부끄러운 듯 고영훈을 살짝 쳐다보고는 선물을 받으려고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고영훈은
고시환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정한의 얼굴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지면서,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탕’ 하고 테이블 위에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뭐냐? 혹시 마음에 둔 사람이 있기라도 한 건가?” 고시환은 차를 한 모금 천천히 머금으며 대답했다. “없습니다. 다만...” “없다면, 내가 아버지로서 네 혼처를 대신 정하겠다.” 고시환은 고개를 들어 고정한의 단호한 눈빛을 바라보았다. 거부할 여지가 없다는 뜻이 담긴 그 시선을 읽은 고시환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특별히 반대가 없다면, 내일 바로 연회를 열 것이다. 유력한 인사들을 초대해서 너도 직접 보고 고를 수 있도록 말이다.” 고시환은 미소라기보다는 비웃음에 가까운 표정을 지으며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일 뿐이었다.귀신이 된 나는 의문투성이였다. ‘고시환은 이렇게 영향력 있는 사람이면서, 왜 계속 Y 시에 남아 자신의 ‘제국’을 지키지 않는 걸까?’‘그런데 왜 굳이 이런 답답하고 숨 막히는 고씨 가문으로 다시 돌아와 고정한의 말 같지도 않은 헛소리를 듣는 거지?’ 내 궁금증을 풀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시환이 자리를 떠난 뒤, 고영훈은 찌푸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있으신 거죠?”고정한이 잠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내가 보기엔 임씨 가문의 그 딸이 적당하다고 본다. 게다가 그 애도 시환이를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으니까.” “만약 이 혼사가 성사된다면, 우리 집안에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고영훈은 머릿속으로 잠시 생각에 잠기다 말했다. “임씨 가문의 그 딸이면... 설마 그 임하나 말씀인가요?? 성격은 제멋대로에, 날마다 말썽만 피우고, 자신밖에 모르는 그 아가씨 말씀이세요??” “그래, 바로 그 아이다.” 고정한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재벌가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임하나에 대한 소문을 들어본 적은 있다. 들리는 말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