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뚱보가 날 좋아했던 거야?’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나는 급히 고개를 흔들었다.‘그럴 리 없어!’‘이 사람은 단지, 걱정 없이 지냈던 어린 시절의 시골 생활을 그리워하는 것뿐이야!’나는 조금 전부터 이상하게 자만하는 내 모습에 스스로 경악했다.‘막 환혼을 끝내자마자 이런 생각을 하다니... 이건 분명 임하나의 몸에 들어갔던 후유증 때문이야!’원래는 고시환과 최대한 거리를 두고 이 상황을 벗어나려 했지만, 지금의 분위기를 보니 마음이 바뀌었다.나는 그대로 옆에 놓인 소파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시환 오빠, 우리 대화 좀 해보자.”고시환은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느긋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좋아. 나도 마침 너와 얘기하고 싶었어.”그는 내 맞은편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나는 무심코 눈을 질끈 감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뭐야? 관종이야? 왜 이러는 거야?’고시환은 내 반응을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뭐가 그렇게 긴장돼? 어차피 뭘 볼 게 있다고.”나는 몰래 눈을 조금 떠서 손가락 틈 사이로 고시환의 하반신을 살폈다. 남자가 옷을 입고 있는 걸 확인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시환을 보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하지만 남자의 단호한 표정을 보자마자 웃음을 싹 거두고 헛기침했다.“저기, 오빠, 아니... 고 대표님, 우리 거래 하나 할래요?”고시환은 아무 말 없이 나를 조용히 바라보았다.긴장한 나는 주먹을 꽉 쥐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H 시로 돌아온 건, 분명히 목적이 있는 거죠?”“그렇다면 우리 둘이 협력하는 건 어때요?”“고 대표님이 나랑 결혼해 주시면, 저는 우리 집안의 배경을 이용해서 고 대표님께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 드릴게요. 고 대표님이 원하시는 걸 얻을 수 있게 도와드리는 거죠.”고시환은 흥미롭다는 듯 나를 바라보더니 다리를 내리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대단한 임하나가 굳이 그렇게까지 나를 돕겠다고 나서는 이유가 뭔데?”“아니면, 단지 나랑 결혼해서 날 이용하고 도망치려는 속셈이야?”
고시환은 내 눈에 서린 의문을 알아챈 듯 천천히 손을 놓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그는 여유로운 태도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비웃듯 입을 열었다.“임씨 가문의 따님, 역시 머리는 단순하고 힘만 세군. 이런 어설픈 추측으로 날 협박할 생각을 한다니.”다시 숨 쉴 수 있게 되자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고시환을 노려보았다.고시환의 태도는 한결같이 태연하고 가벼웠다. 나는 왠지 모르게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이런 일로는 이 사람을 위협할 수 없다는 건가?’‘설마, 내가 잘못 짚은 거야?’“어떻게 그게 어설픈 추측일 수 있죠?”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오빠, 내가 알기로 남자가 지갑 가장 깊숙한 곳에 그런 사진을 넣어두는 건, 절대로 아무나한테 하는 짓이 아니거든?”“게다가 오빠가 그렇게까지 필사적으로 부정하는 걸 보면, 혹시 강민아 씨가 오빠 조카며느리라서? ‘그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처음에는 잠시 흥분한 듯 보였던 고시환의 표정이 이내 싹 사라졌다.그의 얼굴에는 무미건조한 냉소만이 남아 있었고, 심지어 지루해 보이기까지 했다.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걸치고 있던 가운을 가볍게 여미고 나를 바라보았다.“하나야, 그런 쓸데없는 추측에 시간 낭비할 바에야, 차라리 네 목숨을 어떻게 구할지나 고민하는 게 낫지 않겠어?”나는 고시환의 눈과 마주친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며 온몸이 떨렸다.실은 나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남자라면 정말로 나를 죽일 수도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이 멍청아, 제발 머리 좀 굴려 봐!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내가 착각한 게 아닐 텐데. 내가 아무리 자의식 과잉이 아니라 해도, 누군가가 어린 시절의 사진을 소중히 간직한다는 건 분명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거잖아!’무언가 떠오른 듯, 나는 갑작스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문을 열려던 고시환의 발걸음이 멈췄고, 그는 살짝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가라는 신호를
“지금 나 놀리는 거야?” 여전히 협상 중이라는 걸 깨닫고, 나는 웃음을 억누르며 다시 고시환을 쳐다봤다. “오빠, 이번에 H시로 돌아온 이유, 결국 강민아 찾으려고 온 거잖아.”“오빠 쪽 사람도, 고영훈 쪽에서도 다 강민아를 못 찾았잖아. 해코지를 당했다는 것만 알지, 지금은 생사조차 모르고.” 내 말에 고시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제야 심각한 기색으로 나를 바라봤다. “강민아가 어디 있는지는 지금 오빠에게 말할 수 없어.”“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오빠가 나와 결혼하는 거야.” ‘나는 이미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어. 임하나와 고시환의 힘을 잘 이용하면, 상대가 눈치채기 전에 모든 걸 마무리할 수 있을 거야.’ 고시환은 내 말을 한참 동안 곱씹는 듯했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결국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래. 우리 잘해보자.” 나도 고시환의 손을 잡고 미소 지었다. “잘해보자.”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갑자기 심한 어지러움이 몰려왔으며, 몸이 그대로 뒤로 기울었다. ‘고시환이 나를 잡아준 건가?’ 예상했던 바닥의 충격이 느껴지지 않아서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견딜 수 없는 피로가 몰려오자 나는 눈을 감았다....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침대 주위에는 낯선 사람들이 서 있었고, 그들 뒤쪽에는 고시환이 보였다. “딸!! 드디어 깨어났어!!! 엄마는 네가 정말 걱정돼서 혼이 나갈 뻔했어!!!” 눈앞에 서 있는 우아한 중년 여성을 보며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아름다운 사모님, 바로 임하나의 어머니, 장해선이었다. ‘눈이 빨갛게 부어 있고, 얼굴 가득한 걱정과 안타까움... 진짜 걱정하는 표정이네.’ 내 가슴 한구석이 순간에 따뜻해졌다. ‘오랜만에 느끼는 따뜻함...’ 나는 늘 재벌가에는 가족 간의 정 같은 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 사람에 따라 다른 법이지.
“당신도 잘 봐. 정말 우리 딸 이렇게 만들고 싶었어?”“딸, 네가 정말 싫다면 아빠도 강요하지 않아.” 임승후가 그렇게 말하며 미안한 표정으로 고시환을 한 번 힐끗 보고는, 일부러 목소리를 낮췄다. “우리 집안이 아무리 고씨 가문만 못해도, 혼사를 거절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단다.” “내 소중한 딸을 억지로 내주면서까지 체면을 차릴 필요는 없으니까.” 임승후의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눈가가 붉어졌다. 나는 이제야 임하나가 왜 이토록 도도하고 자신감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부모님이 있고, 또 재벌가 배경 속에서 자라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임승후는 내 눈가가 붉어진 것을 보고 무언가 마음속에 담아두고 말하지 못하는 억울함이 있다고 착각하는 듯했다. 그는 곧장 고시환에게 혼사를 없던 일로 하겠다고 말할 참이었다. ‘이러다 정말 파혼되겠는데?’ 나는 서둘러 입을 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바로 힘겹게 몸을 일으켜 손가락으로 고시환을 가리켰다. “아빠!! 안 돼요!! 나 시환 오빠랑 결혼할 거예요!” “이번 생은 시환 오빠 말고는 아무도 안 돼요!” 내 눈에 서린 단호함에 모든 사람이 놀란 듯했다. 이미 결과를 알고 있던 고시환조차 예상 못 한 반응에 살짝 놀란 기색을 보이며, 갑자기 웃음을 지으며 두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하나 씨가 저한테 첫눈에 반해서 평생 저만 바라보겠다니, 참 영광이네요.” “이렇게 절대적으로 절 원하다니,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봐라, 저 건방진 태도 좀. 진짜 얄밉기 짝이 없네.’ 고시환의 그 태도에 내 속으로 이를 갈았다. ‘대놓고 내가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하는지 보겠다는 심보가 훤하네.’ ‘고시환... 아마 처음부터 내가 다친 걸 핑계로 이 지경까지 가게 놔둔 것도 이런 상황을 노린 거겠지.’ 나는 최대한 억울하면서도 애틋한 표정을 지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네, 나 시환 오빠한테 첫눈에 반했어요! 오
나는 딱 하루만 병원에 더 있다가 퇴원하겠다고 성화를 부렸다. 임승후는 ‘딸’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결국 어쩔 수 없이 나를 퇴원시켜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생각해보니 임하나처럼 성격이 뻔뻔하고 당당한 것도 나쁘진 않네. 하기 싫은 일 있을 땐 이렇게 써먹을 수 있잖아.’ ...나는 임하나 방에 들어서자마자 온통 핑크색으로 꾸며진 공주풍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고, 순간 숨이 턱 막혔다.‘이 나이에 핑크 공주 방? 너무 유치하잖아.’ 나는 침대에 반쯤 누운 채로 지금 상황을 정리했다. ‘지금은 고시환이 H 시로 막 돌아온 시점이고, 강주희에 대해 내가 아는 건... 단지 이 사람이 날 해치려 했다는 사실뿐...’ ‘내 두개골 상태나 날 죽이려 했던 증거들은 아직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인데...’ 이렇게 생각하니 나도 괜히 한숨이 나왔다. ‘진작에 알았으면 조금만 더 늦게 다시 살아나는 건데.’‘모든 사실을 알고 나서 다시 살아났다면, 내 손으로 직접 복수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앞으로의 일은 완전히 오리무중이야. 그야말로 돌다리를 두드리며 건너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지.’‘하지만 다행인 건, 지금 임하나의 위치가 어느 정도 되니까 나는 더 이상 강씨 집안 사람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고.’‘게다가 임하나의 이런 성격 덕분에 굳이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애쓸 필요도 없으니까...’‘이제 누구한테도 굳이 친절할 필요가 없겠네.’그렇게 생각하니 내 입가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떠올랐다. ‘다시 살아난 것도 꽤 괜찮은데?’긴장이 풀려서인지 나는 금세 잠이 들어버렸다....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울린 벨 소리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비몽사몽한 상태로 몸을 일으키고 낯선 방 안을 둘러보며 잠시 멍하니 있었는데, 한참 지나서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아, 그래. 난 이제 다른 사람의 몸으로 다시 살아났지...’나는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책상 아래 떨어져 있던 휴대
나는 예상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구청 입구에 도착했다. ‘흠, 내가 이렇게 일찍 도착했으니 고시환이 오면 한마디 할 수 있겠네. 혼인신고에도 늦는 건 말이 안 되지.’ 그런데 내가 도착했을 때, 고시환은 이미 입구에 서 있었다. ‘나보다 더 일찍 도착했다고?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임하나, 보아하니 너도 시간 약속은 잘 안 지키는 편인가 보네.” “아니면 정말 나한테 첫눈에 반해서 빨리 결혼하고 싶은 건가...” “닥쳐!” 나는 고시환의 얼굴에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주변에서 혼인신고를 하러 온 사람들이 우리를 힐끔거렸다. 나는 부끄러워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이를 악다물며 말했다.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라. 안 그러면 이번 판 당장 다 엎어버릴 수 있어!!” “그래?” 고시환은 웃으며 내 손을 덥석 잡고 구청 안으로 걸어갔다. “한 번 내 배에 올라탔으면, 함부로 내릴 수는 없지.”...혼인신고 하는 내내 정신이 멍했던 나는 도장이 찍히는 순간에야 손이 떨리며 실감이 났다. 그리고 문을 나서면서 내 손에 들린 혼인관계증명서를 내려다보았지만 묘하게 실감이 안 났다. ‘내가 진짜 고시환의 아내가 된 거야?’ “왜? 벌써 후회돼?” “후회?” 나는 고시환을 바라보며, 어릴 적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그의 얼굴을 보다가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웃었다. “뚱보, 이제 내 배에 탔으니까 쉽게 내릴 생각은 하지 마!” 나는 시원하게 웃고 돌아서서 손을 흔들며 말했다. “집에서 기다려. 내가 곧 이사 들어갈게.” 뒤돌아 걸어가는 나를 고시환은 멍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남자의 눈빛은 마치 내 등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아마 지금 고시환은 도저히 상상도 못 하겠지. 이 몸 안에 어릴 적부터 자신과 붙어 다니던 그 바보 같은 여자애가 있다는 걸...’고시환은 멍하니 제자리에 서서 손에 든 혼인관계증명서를 내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거렸다. “임하나, 진짜 재밌는 사람이네.” .
“장모님, 죄송합니다. 하나 씨랑 갑작스럽게 혼인신고를 해서 놀라셨을 것 같아요. 용서해주십시오.” “이건 제가 첫 방문 인사로 가져온 작은 선물입니다. 추후에 약혼식과 결혼식도 성의껏 준비할 예정이니 하나 씨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고시환이 바로 따라 들어와 살짝 기분이 상했다. “여기까지 왜 따라왔어?” 고시환은 마치 진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잊었어? 당신이 나랑 같이 살겠다고 했잖아. 혹시 당신 짐이 많을까 봐 같이 짐 옮겨주려고 온 거야.” 장해선은 눈이 동그래지며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하나야, 너... 이사부터 하겠다고?” 얼마 전 내가 내뱉었던 말이 떠올라서, 이제 와서 부정할 수도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이미 혼인신고도 했으니까 이제 같이 살아야죠.” 장해선은 나를 보내기 싫어하는 눈빛이었다. 사실 나도 이 따뜻한 집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 계속 머물게 되면 앞으로 내가 하려는 일에 걸림돌이 될 수 있고, 결국 이 집 사람들이 내가 ‘임하나’가 아니라는 걸 눈치챌 위험도 있었다.나는 고시환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보며 장해선의 귀에 살짝 대고 말했다. “엄마, 날 잘 알잖아요. 내가 시환 오빠를 다른 사람한테 조금이라도 뺏기게 둘 수 없어요.” 장해선도 결국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가 그렇게 정했으니, 엄마가 더 이상 말하지 않으마.” “우리 엄마가 최고야!” 나는 장해선을 꽉 안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지만, 마음속으로 잠시 감회에 젖었다. ‘임하나가 늘 가족과 반대 방향으로 가려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이해가 안 됐는데...’ ‘이렇게 따뜻하고 자신을 아껴주는 부모님과 좋은 가정 분위기를 왜 소중히 여기지 않았을까?’ 장해선과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눈 뒤, 나는 고시환과 함께 임하나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방 안에 가득한 핑크색 인테리어가 다시 눈에 들어오자 나는
나는 고시환과 함께 차에 탔지만, 차가 이동하는 경로는 아무리 봐도 쇼핑몰로 향하는 길이 아니었다. ‘어? 아닌데? 이거 쇼핑몰 가는 길 아니잖아?’ 내가 살짝 의문스러운 눈길로 고시환을 바라봤다. “고 대표님, 약속 안 지키는 거야?”뭔가 깊이 생각에 잠겨 있던 고시환은 내 말에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돌렸다. 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먼저 본가에 들러야 해.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거든.”‘고정한 회장인가? 고시환은 나랑 이제 막 혼인신고를 했는데 벌써 얼굴을 보자고 하시다니.’ ‘혹시 이미 누군가 시켜서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던 걸까? 동시에, 나를 떠보려는 생각도 있을 테지.’ 나도 조금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거기서 고 회장을 만날 때 임하나의 성격으로 갈까? 아니면 지금 내 원래 성격대로 갈까?’ 내 속마음을 들킨 듯 고시환이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근데 한 가지, 아버지가 연세가 있으셔서 심장이 좀 약해. 그러니까 네 불같은 성질은 좀 참아줄 수 있겠어?”그가 슬쩍 운전석 쪽을 바라보길래 나도 자연스럽게 그쪽을 따라 봤는데, 곧 무슨 의미인지 깨닫고는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코웃음을 쳤다. “고 회장님께서 나한테 좋게 대해 주시면 나도 좋은 얼굴로 대해 드릴 거고.” “근데 만약 나를 무시하거나 비꼬고 빈정대면, 나도 봐주지 않을 거야.”“나도 우리집에서 우리 부모님한테 금쪽같은 귀한 딸로 자랐거든!” 고시환은 가볍게 웃더니 별다른 말 없이 눈을 감고 잠깐 눈을 붙였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옛날에 임금 옆에 있는 건 호랑이랑 같이 있는 거나 다름없다더니, 이 말이 딱이네.’ ‘방금 내가 눈치 못 챘으면 완전 들킬 뻔했잖아.’ ‘앞으로 고시환 곁에 있으려면 분위기 잘 파악하고 눈치도 빨라야겠어.’ ‘안 그러면 어느 날 갑자기 고시환 아내 자리에서 잘릴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다시 고씨 댁 본가에 도착했다.
강주희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듯 이를 악물었지만, 나를 어찌할 수는 없었다. “고마워요, 작은어머니. 저 꼭 오래오래 살게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잔을 부딪쳤다. “그야 그렇겠죠. 욕 많이 먹을수록 오래 산다잖아요.” 강주희는 내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그녀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눈가가 붉어지더니, 곧 고영훈을 바라봤다. “오빠, 작은어머니가 나한테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 거예요?” “우리 강씨 집안이야 임씨 가문만큼은 못하겠지만, 제가 오빠랑 함께하는 게 이런 식으로 압박을 받아야 한다면, 이 약혼은 하지 않는 게 낫겠어요.” 강주희는 일부러 술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약간 숙이며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했다. ‘아휴, 저 눈물 연기 몇 번이나 본 거야? 이제는 좀 지겹다.’ 나는 하품을 참지 못하며 고개를 돌렸다. “굳이 내 앞에서 이런 연극을 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 앞으로 우리가 서로 엮일 일도 없을 거잖아요.” 나는 여전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 고시환을 힐끔 바라보고, 의자를 당겨 일어섰다. “오늘 약혼식에 온 건 우리 남편 때문이야. 우리가 서로 얼굴 보기 싫어하는 건 분명하니까, 미안하지만 이만 갈게.” 뒤돌아 나가려는 순간, 고영훈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그는 내 얼굴을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곧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작은어머니, 주희한테 사과하세요.”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져 나오며 손가락으로 귀를 파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뭐라고? 다시 한번 말해봐?” “제가 주희한테 사과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작은어머니, 아까 말씀이 너무 지나치셨잖아요.” 고영훈의 말에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웃으며 주변 사람들을 둘러봤다. “지금 여기 계신 분들, 다 들으셨죠? 제가 누구한테 무례했다는 건데, 당사자 말고 또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 계시면 말씀 좀 해보세요.”나는 손가락으로 강
‘어차피 곧 이혼할 사인데, 앞으로는 서로 얽힐 일도 없겠지. 아마 두 번 다시 마주칠 일도 없을 거야.’ 주요석에 앉아 있던 고정한이 그 순간 고시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주변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다 들리도록 크게 말했다. “시환아, 너 하나 양과 벌써 혼인신고까지 했다며? 결혼식은 언제 올릴 거니? 이왕 여자 쪽에서 허락한 건데, 절대 서운하게 하면 안 된다.” 고정한의 말이 떨어지자, 이미 조용했던 예식장은 더더욱 적막에 휩싸였다.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고시환을 바라보며, 속으로는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뭐? 고시환이랑 임씨 가문의 임하나 양이 혼인신고를 했다고?” “전부터 그런 소문이 살짝 돌긴 했는데, 진짜였네.” “근데 아까 보니까 둘이 말도 안 하고, 웃는 얼굴도 안 보였는데. 둘이 대체 왜 갑자기 혼인신고를 한 거야?” “에휴, 너 그거 모르지? 고시환은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H 시에서는 힘이 없잖아. 그래서 H 시에 발붙이려고 그런 거지.” “임씨 가문이 고씨 가문만큼은 아니어도, H 시에서는 알아주는 집안이잖아. 고시환 저 사람, 야망이 대단하네.” 예식장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이 이런 계산에 밝은 사람들이었다. 단 몇 초 만에 고시환과 나의 관계를 파악한 듯, 각자의 추측을 마친 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나는 주변의 시선에 전혀 개의치 않고, 그저 미소를 띤 고정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단하네. 그때 고시환이랑 고씨 가문의 본가에서 그렇게 싸우고, 사이가 완전히 틀어졌으면서도, 지금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들 행세를 하고 있잖아.’ 나는 옆에 있는 고시환을 힐끗 보았다.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결국 내가 먼저 나서기로 했다. “아버님, 저희 젊은 사람들 문제에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보다 우리 영훈 조카 약혼식부터 잘 챙기시는 게 우선 아니겠어요?” 고정한은 한때 고씨 가문에서 그야말로 전설로 불
고시환은 손에 들고 있던 혼인관계증명서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래.” 순간에 우리 사이에 묘하게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저기, 약혼식 곧 시작할 것 같은데, 당신 빨리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고씨 가문의 일원인 고시환이 아무리 고영훈과 사이가 안 좋더라도, 주요 가족 행사에서 가족석에 앉지 않고 나와 이 구석에 있는 건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내 말을 들은 듯 주위를 한번 훑어보더니,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어? 뭐 하는 거야?” 고시환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직 이혼 안 했잖아. 내 아내로서 나랑 같이 가야지. 괜히 뒷말 나오게 만들 순 없으니까.” “곧 이혼할 건데...” 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남자의 손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사실 우리 결혼 소식은 이 상류층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고시환이 내 손을 잡고 주인석에 앉자, 모두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사람들은 눈을 크게 뜨고 수군거리며 고시환과 나의 관계를 추측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그때 손을 뿌리쳤어야 했는데... 이제 이혼하면 뒷말이 더 많겠네.’ ‘고시환이랑 엮였다는 걸 이제 알았을 텐데, 오늘 밤에 이혼 소식까지 돌면 얼마나 말이 많아질까?’ 나는 마음속으로 임씨 가문의 내 부모님에게 미리 사과와 기도를 했다. ‘제발 이 험담들을 잘 견뎌내게 해주세요...’ 고시환은 주인석에 앉아도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했지만, 눈썹 사이엔 살짝 드러나는 불쾌감이 있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눈길을 주자, 그 순간 사람들이 수군거리던 소리가 뚝 끊기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입을 다물었다. 나는 고시환의 대응에 속으로 엄지를 치켜세우며 웃음을 참았다. ‘정말 대단하긴 하네.’ 그에게 한마디 장난스럽게 말하고 싶었다.‘이제 곧 남이
장연희의 한마디가 내 혼란스러운 마음을 단숨에 정리했다.‘맞아, 난 이미 죽음을 한 번 경험한 사람이잖아. 뭘 그렇게 겁먹고 있는 거지?’ ‘어릴 적 친구 하나쯤이야, 별로 대수로운 일도 아니잖아.’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나는 서둘러 준비를 마친 뒤, 고영훈과 강주희의 약혼식에 가기로 했다. 청첩장을 들고 예식장에 들어서자, 이리저리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도 모르게 긴장감이 스쳤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고시환을 찾았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다.’ 안도감을 느끼는 동시에, 묘하게 내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졌다. ‘애초에 고시환은 고씨 가문을 싫어하고, 자신의 성을 혐오하는데, 여기 올 리가 없잖아.’ ‘그런데도 왜 이렇게 약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걸까?’ 며칠 동안 나는 일에 몰두하며 고시환에 대한 생각을 잊으려 애썼지만, 잠깐이라도 쉬는 시간이 생기면 그의 얼굴과 목소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결국 문제는 내 마음이겠지.’ ...나는 예식장 한쪽 구석에 앉아 조용히 쉬고 있었다. 그때, 샴페인 잔을 든 남자 몇 명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아가씨, 전에 본 적 없는 얼굴인데요?” “H 시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 계시다니, 어디 가면 또 뵐 수 있을까요?” 나는 두 사람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둘 다 잘생긴 편이긴 했지만, 고시환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다.나는 차갑게 말했다. “만나볼 마음 없으니까 돌아가세요.” 이런 상류층 모임에서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섞여 있는 법이다. 특히 조금이라도 돈이 있는 이른바 ‘재벌 2세’들은 자신들이 평범한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두 사람을 단칼에 거절하자, 그들의 표정에 약간의 불쾌함이 스쳤지만, 공공장소라 억지로 화를 참는 듯했다. “아가씨, 참 성격 있네요. 그런데 어느 집안의 아가씨예요? 혹시 내가 누군지는 알아요?” 나는 그를 힐끗 쳐다보고 기억을
청첩장에 적힌 내용을 읽으며 나는 살짝 놀랐다. ‘고영훈이랑 강주희 사이에 뭔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빠르게 약혼까지 하다니.’ 며칠 사이에 둘이 약혼식 날짜까지 잡았다니, 정말 예상 밖이었다. 강주희는 웃으며 청첩장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작은어머니, 꼭 시간 맞춰 오셔야 해요.” 약혼식은 열흘 뒤로 정해져 있었다. ‘그때쯤이면 나도 고시환과 이미 이혼했을 거야.’ ‘그땐 고씨 가문이랑 완전히 남이겠지.’ 그 생각이 들자, 나는 청첩장을 다시 강주희에게 밀어 돌려주었다. “나 지금 네 작은어머니 아니야. 곧 고시환 씨와 이혼할 거고, 그 이후로는 너희 고씨 가문 사람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을 거야.” 나는 강주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약혼 축하해. 네 약혼식이 순조롭길 바랄게.” 강주희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다시 한번 청첩장을 내 손에 놓으며 말했다. “그래도 언니잖아요. 반쪽짜리 언니라도, 꼭 와줬으면 좋겠어요.” 그녀가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초대하려는 모습에, 나는 웃으며 청첩장을 받아들었다. “알았어. 그렇게 간절히 부탁하니까 가줄게.” ...강주희의 약혼 소식은 삽시간에 퍼졌고, 인터넷에서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사람들은 모두 이 잘 어울리는 커플에게 축하를 보내느라 바빴다. 하지만 한때 고영훈과 결혼을 약속했던 ‘강민아’에 대한 기억은 모두 완전히 잊은 듯했다. 약혼식 당일, 나는 가게에 앉아 청첩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장연희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사장님,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되잖아요. 누가 칼 들고 협박하는 것도 아니고요.”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넌 나를 몰라.” 강주희의 약혼식에 가든 안 가든 사실 내겐 상관없었다. 이미 고영훈에 대한 미련은 다 버린 지 오래였으니까. 문제는, 거기서 혹시 고시환을 마주치게 될까 봐였다. 그날 이후 고시환은 이혼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
“우리, 이제 끝낼 때가 된 것 같아...” 고시환의 말을 들은 나는 순간 멍해졌다. ‘끝내자고? 이혼을 하겠다는 뜻인가?’ 나는 한참을 머릿속에서 되새기다가, 그가 정말 떠나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 ‘고시환이랑 이혼할까?’ 실은 나도 처음 고시환과 결혼한 것도 단지 이 사람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였다. 지금의 강주희, 그녀가 끝까지 물고 늘어지지 않는 한, 나는 임씨 가문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그녀를 상대할 수 있었다. 이제의 나는 고시환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다가 일부러 웃는 얼굴로 말했다. “맞아, 끝내야지. 그럼 좋은 날 골라서 이혼하러 가자.” 고시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재산 분할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필요 없어.” 나는 남자의 말을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원래부터 비즈니스 관계였잖아. 임씨 가문 정도면 날 먹여 살리기 충분해.” 나는 일부러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내가 널 찾은 이유는 따로 있어. 나 H 시로 돌아가려고 해.” “이혼 절차는... 오늘 바로 끝내는 게 어때?” 고시환은 눈을 깜빡이며 헛기침을 했다. “오늘? 오늘은 안 될 것 같은데...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밤까지 걸릴 거야.” “괜찮아.”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시간 날 때 말만 해. 언제든 내가 맞출게.” 고시환이 답하기도 전에 나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럼 이만 갈게. 우리 엄마가 집에서 밥 차려놓고 기다리고 계셔.” 나는 문을 나섰고, 고시환은 내 뒷모습을 보며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 비서가 허둥지둥 들어왔다. “보스, 방금 그분... 그 사진 속 사람이잖아요?” “그분... 이미 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고시환은 액자 속 소녀의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했다. “맞아요, 이미 떠났어요.” 비서는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이미 사무실을 떠난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고시환의 사무실로 들어서는 순간, 왜 비서가 나를 보고 그렇게 놀랐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내 눈길을 끈 건 고시환이 아니라, 그의 책상 위에 놓인 커다란 액자였다. 나는 그 액자 속 사진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저 사진...’ 그 사진을 보는 순간, 내 머릿속은 열 살 때로 돌아갔다. 열 살...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중요한 나이였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생일축하는커녕 내 생일이 언제인지조차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단 한 사람, 고시환만 빼고. 나도 그날이 기억난다. ‘뚱보’는 내게 다가와 말했다. “나 이제 떠나야 해. 아마 다시는 못 돌아올 거야.”나는 ‘뚱보’를 진심 어린 친구로 여기고 있었기에, 그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결국 눈물을 참지 못하고 엉엉 울며 ‘뚱보’의 가슴을 두드렸다. “다들 나를 떠나는데, 너마저 떠난다고? 너만은 친구라 생각했는데, 너도 나 버리고 갈 거야?” “오늘이 내 생일인데, 다들 케이크를 먹을 때 나는 못 먹어. 이제 내 유일한 친구인 너까지 떠나는 거야?” 그때, 내가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우는 모습을 본 ‘뚱보’는 나를 꼭 안아주며 위로했다. ‘뚱보’는 내 눈물을 닦아주고, 동네 구멍가게에서 슈퍼 막대사탕을 사와 내게 내밀며 말했다. “생일 축하해. 하지만 난 정말 떠나야 해. 해야 할 일이 있거든.” “내가 성공하면 꼭 널 찾으러 올게. 여기서 나 기다려 줄래?” 그때의 나는 ‘뚱보’의 눈빛 속 진심을 알아채지 못하고, 그저 친구가 날 속인다고 생각했다. ‘뚱보’가 날 달래려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사진 한 장 찍어줄게. 내가 너 보고 싶을 때마다 이 사진을 볼 거야.” “이 사진 앞에서 맹세할게. 내가 꼭 돌아와서 너 데리러 갈 거라고!” 그 말에 속아 넘어간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예쁜, 하지만 지금 보면 우스꽝스러운 미소를 카메라 앞에
나는 고시환의 눈을 마주치다가 어색해서 고개를 돌렸다. ‘분위기가 왜 이리 묘하지?’ 결국 나는 가볍게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저기, 나 여기까지 오느라 너무 힘들었거든. 우선 올라가서 쉬어야겠어.” 말을 마치자마자 헐레벌떡 위층으로 올라갔지만, 막상 내 방이 어딘지 몰라서 다시 내려와야 했다. “그... 어디서 자면 돼?” 고시환은 나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이 자고 싶은 방에서 자. 당신이 이 집의 주인인데.” 그 말에 나도 순간 눈썹이 꿈틀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돌아 적당한 방 하나를 골라 들어갔다. 나는 넓고 푹신한 침대 위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지금 고시환한테 갖고 있는 감정이 어떤 건지 잘 모르겠어. 예전처럼 그저 복수를 위해 이용하려는 건 아닌 것 같아.’ ‘하지만 지금 내 육체는 임하나고, 영혼은 강민아잖아.’ ‘내가 정말 어린 시절의 정 때문에 고시환을 좋아하게 된 건지, 아니면 지금의 또 다른 고시환에게 끌리는 건지 헷갈려.’ 고시환도 똑같이 알 수 없었다. ‘그 사람이 날 보는 이유가 이 얼굴 때문인지, 아니면 지금의 나 때문인지 모르겠어.’ 다시 한번 몸과 영혼 사이의 갈등에 빠진 나는 하늘을 향해 소리를 내지르다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 ‘복잡한 거 그만 생각하자. 그냥 주어진 대로 살아야지.’ 며칠 동안 꽉 조였던 긴장감이 풀린 탓인지, 나는 모처럼 완전히 편히 쉬었고 눈을 떠보니 이미 정오가 넘어 있었다. 내가 낯선 침실을 잠시 바라보다가 지금 어디 있는지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집 안을 돌아다녀 봤지만 고시환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전화를 걸었는데, 또다시 통화 중이라는 신호음이 들려왔다. ‘대체 뭘 하길래 통화 중이야?’ 나는 찡그린 얼굴로 SL 그룹의 주소를 검색했고,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SL그룹 건물 앞에 도착해 KM 그룹보다도 훨씬 크고 높은 건물을
고시환은 두 팔로 나를 끌어안으며 아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얼마나 억울한지, 너는 알기나 할까...” 나는 코끝을 훌쩍이며 남자의 품에서 몸을 빼내면서 고시환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남자의 얼굴이 창백한 것 말고는 별다른 이상이 없어 보이자 안도의 숨이 나왔다. “그동안 어디 있었어? 왜 내가 그렇게 전화했는데 단 한 통도 안 받았냐고!” “대체 나를 당신의...” 내가 말을 하다 갑자기 멈췄다. “나의 뭐?” 고시환이 장난스레 물었다. 나는 얼굴이 조금 달아오르며 말했다. “당신의 파트너로 생각하지 않는 거야?” “민아의 시신을 찾아주자마자 나 같은 파트너는 버리고 팽개치려는 건 아니겠지?” “아직 민아를 죽인 범인을 못 찾았잖아. 우리의 비즈니스 관계는 끝난 게 아니야!” 고시환은 나를 바라보며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 같은 파트너를 잊을 리가. 다만 내가 재벌이니까 쉬고만 있을 순 없잖아.” “안 그러면 재벌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하기 힘들겠지. 그러면 너, 임씨 가문의 귀한 딸의 얼굴에 먹칠하게 될 텐데.” 나는 고개를 홱 돌려버리고, 고영훈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근데 고영훈이 했던 말은 뭐야? 얼른 솔직히 말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고시환은 나를 Y 시의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본인의 입을 통해서야 나는 고시환이 자리를 비웠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 장례식이 열리고 있던 동안, 고시환의 회사인 SL 그룹에서 개발한 약품이 누군가를 죽게 만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유족들이 SL 그룹에 찾아와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이 사건이 커지면서, 주가도 끝없이 추락했다. 결국 고시환은 회사를 수습하고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급히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고영훈이 했던 말도 이와 관련 있었다. 유족들은 고시환의 제안에 불만을 품고 사람을 시켜 그를 납치하려 했지만, 고시환은 이를 미리 알아채고 역으로 유족 측을 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