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결이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오자 서지아는 그와 안희서의 대화가 유쾌하지 않았음을 짐작했다. 강한결은 안희서를 향한 못마땅함을 전혀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강유라는 정신이 딴 데 팔린 듯했다.“오빠, 그 여자가 뭐라고 했어? 혹시 내 험담이라도 한 건...”강한결이 시선을 들어 강유라를 바라보았다.“너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거야?”“아니. 안 했는데.”강유라는 주스를 들고 입을 삐죽였다.“내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알아?”차진우는 안으로 들어와서 강한결을 힐끔 보았다. 그는 조금 전 밖에서 보았던 광경을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서지아가 언짢아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다른 여자가 본인의 남자에게 수작을 부렸다는 걸 신경 쓰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성해원은 코웃음을 쳤다.“왜 여동생한테 뭐라고 하는 거야? 조금 전에는 안희서 씨가 잘못한 게 맞아. 네 뒤를 밟고 여기까지 따라왔잖아. 그런 짓을 하기 전에 본인에게 그런 자격이 있는지부터 생각해 봐야 하는데 말이야.”차진우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지금 상황을 보면 네가 이혼 얘기를 꺼내도 너한테 들러붙으려고 할 거야. 한결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둬.”강한결은 무심한 얼굴로 말없이 서지아를 위해 차를 따라주었다.서지아는 덤덤히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일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강유라는 그 광경을 본 순간 살짝 뒤가 켕겼다.그러나 생각을 바꿔본다면, 그녀가 나서지 않았더라도 안희서가 여기까지 찾아왔을 가능성이 있었다.그렇다면 굳이 설명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안희서는 원래부터 모두에게 미움받는 여자이니 사람들이 이 일로 그녀를 오해하든 말든 중요하지 않았다.그런 생각이 들자 강유라는 곧바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 선망 가득한 눈빛으로 서지아에게 안현대에 관해 물었다....안희서는 다음 주 주치의와 함께 치료에 관해 얘기를 나누기로 했다.금요일 오전, 심예은은 안희서에게 문자를 보내서 하도현이 오후에 드론 조종 초청 경기에 참석할 것
서지아가 강한결의 사무실에서 나왔고 비서팀의 다른 비서가 정중하게 앞으로 나서며 그녀의 가방을 들어주었다.“서지아 씨, 강 대표님께서 서지아 씨와 함께 점심을 드시기 위해 레스토랑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서지아 씨께서 휴식을 마치시면 그곳으로 안내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건 강 대표님께서 서지아 씨를 위해 준비한 커피입니다. 가는 길에 드시면 됩니다.”서지아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의 극진한 대접을 여유로운 태도로 받아들였다.그녀는 자신감이 넘치고 태연했다. 그것들을 누릴 자격이 충분하다는 듯이 말이다.모든 이들이 그녀를 사모님처럼 대했다.안희서는 꽤 놀랐다.강한결의 사무실에는 기밀문서가 가득했고 또 그의 개인적인 영역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서지아가 그곳을 휴게실처럼 쓸 수 있게 했고 세심하게 그녀를 챙겼다.그러나 정작 안희서는 지난 3년 동안 그의 서재에 들어갈 권한조차 없었다.강한결이 누구를 사랑하는지 굳이 확인해 볼 이유가 없었다.“안 팀장님, 잠깐 비켜주시겠어요? 서지아 씨 길을 막고 계셔서요.”조민준은 안희서가 눈치 없다고 생각하며 말했다.안희서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젠 신경 쓰이지 않았지만 엄청난 차별 대우를 직접 눈으로 보게 되니 과거 자신의 희생이 안타깝게 느껴졌다.그녀는 고개를 숙이면서 길을 내준 뒤 조민준을 향해서 말했다.“만약 한결 씨가 바쁘지 않다면 저와 이...”“한결 씨?”엘리베이터 입구까지 걸어간 서지아는 안희서의 말을 듣고 그제야 그녀의 존재를 발견했다.그녀는 덤덤한 표정을 지으면서 생각에 잠긴 얼굴로 물었다.“혹시 이 회사 직원인가요?”안희서는 미간을 찌푸렸다. 서지아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블루베이에서 일한다는 건 모를 수도 있었다.조민준이 앞으로 나섰다.“네. 홍보팀 안 팀장입니다.”서지아는 시선을 거두어들이면서 덤덤히 말했다.“어쩐지.”홍보팀에서 그녀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을 거절했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안희서가 홍보팀 팀장이라는 걸 알고 나니 이해가 갔다.서지아는
“미안해요...”안희서는 갑자기 눈시울이 빨개졌다.하도현은 그 순간 화가 치밀어올랐지만 동시에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나한테 미안할 게 뭐가 있어? 3년 동안 재능을 썩혔으니 너 자신한테 미안해해야지.”안희서는 울고 싶기도, 웃고 싶기도 했다.사실 하도현은 안희서가 올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입이 가벼운 심예은이 이미 일찌감치 그에게 그 사실을 알렸기 때문이다.“안 늦었어.”하도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이제라도 깨달았으면 됐어.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아. 네 능력이라면 어떤 회사든 갈 수 있을 거야. 네가 비엔으로 온다면 우리한테는 좋은 일이지. 비엔의 영광이야.”안희서는 당시 뛰어난 재능으로 연구소에 특별 임용되었었다.안희서는 결코 묻혀선 안 되는 사람이었다.그동안 사람들은 엔유 2 드론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었다. 그러나 다들 엔유 2를 하도현의 연구 성과라고 생각했고 적지 않은 이들이 엔유 2를 위해 비엔을 끊임없이 찾았다. 그러나 사실 엔유 2는 안희서가 겨우 스무 살 때 만들어낸 것이었고 지금까지도 그것을 뛰어넘은 사람이 없었다.안희서는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많은 시간을 주었다. 그러나 여태 사람들은 그녀의 앞선 사고력과 기술을 넘어서지 못했다.“내가 비엔에서 일하는 걸 동의하는 거예요?”안희서의 마음속에서 온갖 감정이 소용돌이쳤다.하도현은 차갑게 웃었다.“심예은은 너의 기술 출자를 일방적으로 동의했어. 난 네가 비엔을 얼마나 높은 곳까지 끌어올릴 수 있을지 지켜볼 거야. 월요일부터 출근해.”하도현은 겉으로는 매정해 보여도 사실은 마음 약한 사람이었다. 안희서는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안희서는 방긋 웃었다. 그녀는 아주 오랜만에 진심에서 우러나온 미소를 지었다.“고마워요. 도현 오빠.”하도현은 차갑게 코웃음을 친 뒤 몸을 돌려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러 갔다.안희서는 그녀의 마음을 짓누르던 무언가가 사라지는 듯한 홀가분한 기분을 느꼈다.조금 전까지는 몸
서지아는 드론 자격증이 있었기에 드론을 조종하는 건 그녀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사람들은 그녀를 위해 환호했다.서지아는 능력이 있고 자신감도 있었다.강한결이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 게 이해가 되었다.서지아 같은 여자는 원래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안희서는 객관적으로 서지아가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부드러우면서도 당당한 성격에 어렸을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은 티가 났으며 똑똑한 데다가 예쁘기까지 하니 말이다.서지아는 어딜 가든 화제의 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그러나...서지아가 가진 것들은 전부 훔쳐 온 것이었다.서지아의 어머니와 안희서의 어머니는 한때 친한 친구 사이였다. 서지아의 어머니는 몸이 좋지 않았고 당시 안희서의 어머니는 서지아의 어머니가 대학원에 다닐 수 있게 그녀를 위해 학비를 대주었다.그러나 결국...서지아의 어머니는 안희서의 어머니가 2년 동안 고생하며 쓴 논문을 표절해서 발표했다.안희서의 어머니가 심혈을 쏟아부은 논문에 본인의 이름을 적은 것이다.서지아의 어머니는 안희서의 어머니를 짓밟고 신분 상승을 했고, 임신한 뒤 해외로 떠나 해외 재벌과 결혼했다.서지아는 화려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안희서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안희서의 눈빛이 살짝 차가워졌다. 그녀는 이 상황이 우습게 느껴졌다.서지아는 좋은 성적으로 퇴장했고 현장에 있던 기자들은 그녀와 강한결을 취재하기 위해 그들에게 우르르 달려들었다.안희서는 중간쯤에 서 있었기 때문에 지나가는 기자들과 몇 번이나 부딪쳤다.안희서처럼 유명하지 않은 사람은 그들을 피할 기회조차 없었다. 그녀는 발목에서 통증을 느끼며 비틀거리다가 겨우 중심을 잡았다.한 기자가 질문을 했다.“두 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곧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요?”안희서가 고개를 들었다.강한결은 기자들이 서지아에게 닿지 않도록 그녀를 품 안에 감쌌다. 그의 차가운 눈빛은 위압감이 넘쳤다.“닿지 않게 조심해 주세요.”여성 기자들은 그들의
“너 모르고 있었니?”강한결의 할머니는 곧바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화를 냈다.“내가 이틀 전에 너희 둘이 율청산에서 이틀 동안 휴가를 보낼 수 있게 티켓을 예약했어. 어제 한결이한테 물으니까 너한테 티켓을 줬다고 하던데.”안희서는 의아했다. 강한결은 그녀에게 그 사실을 얘기해주지 않았다.그녀와 함께 휴가를 보내고 싶지 않아서 할머니에게 거짓말한 게 틀림없었다.“할머니, 사실 제가 갑자기 일이 생겨서...”“오늘은 주말인데 무슨 일이 있겠어? 한결이 그 자식 편 들어주려고 하지 마. 희서야, 지금 바로 율청산으로 가. 할머니가 너희 둘을 위해서 다 준비해 뒀어. 내가 한결이 그 자식에게 얘기하마.”안희서는 막으려고 했다.“할머니, 사실 저 한결 씨랑...”“한결이랑 뭐?”강한결의 할머니는 다시 온화해진 말투로 안희서에게 말했다.상황을 보니 그녀는 안희서가 강한결에게 이혼하자고 한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강한결은 무엇 때문에 그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은 걸까?알렸다면 할머니가 두 사람을 위해 데이트를 계획했을 리도 없었다.안희서는 강한결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강한결의 할머니는 혈압도 불안정했고 심장도 좋지 않았다. 설마 적당한 시기에 차차 할머니에게 이혼 얘기를 꺼낼 생각인 걸까?만약 그녀가 지금 할머니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가 혹시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큰일이었다. 그녀는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이혼합의서에 사인을 하면 그 뒤로 이혼 신고만 하면 되었다. 강한결의 할머니가 그 사실을 천천히 받아들이기엔 시간이 충분했다.안희서는 심사숙고한 뒤 말했다.“괜찮아요. 할머니, 저 지금 바로 갈게요. 한결 씨가 저한테 얘기해줬어요.”안희서는 단지 그녀를 달랠 생각이었을 뿐, 진짜로 갈 생각은 없었다.그런데 할머니가 말했다.“그러면 지금 바로 차 보내줄게. 운전기사가 그곳을 잘 알고 있어. 너희는 부부라서 가끔은 새로운 걸 즐겨야 해. 둘이서 이틀 동안 잘 지내봐. 올해 말까지는 나한테 손주를 안겨줘야지!”
“됐어요. 그냥 지금 바로 떠날게요.”안희서는 이곳에 남아 그들의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움직이자마자 큰 손이 그녀를 붙잡았다. 안희서는 강한결의 무심한 눈빛을 마주했다.“네가 여기 써. 내가 방을 바꿀게.”안희서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그런데 강한결이 먼저 그녀의 손을 놓으면서 그녀와 거리를 벌렸다.“네가 지금 가버리면 할머니한테 설명하기 힘들어.”안희서는 그의 의도를 이해했다. 그녀는 믿기 어렵다는 듯이 말했다.“한결 씨랑 지아 씨를 위해서 연막이 되어달라고요?”‘그래야 할머니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으니까?’강한결은 그녀를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강한결은 그녀를 응시하면서 소매를 정리했다.“네가 여기에 오지 않았다면 이런 귀찮은 일은 없었을 거야.”안희서는 순간 가슴이 꽉 막힌 기분이 들었다.그녀가 자초했다는 말인가?안희서는 조건을 걸었다.“그래요. 대신 사표 바로 수리해 줘요.”강한결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안희서는 그 미소가 뭘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그녀는 방으로 돌아갔다.강한결이 그녀에게 율청산 일을 언급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그는 서지아와 함께 데이트하고 싶었던 것이다.이럴 줄 알았다면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안희서는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이젠 상관없었지만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그녀는 캐리어 속 옷을 정리했다.검색해 보니 그들이 묵고 있는 곳에는 승마장이 있었다. 직원이 옆에서 말을 끌어주는 것인데 꽤 재밌어 보였다.안희서는 곧장 승마장으로 향했다.그런데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여자의 앙탈을 부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찬영 오빠, 뒤에서 그만 찔러요! 진짜 변태 같아!”“뭐야? 또 날 탓하는 거야?”남자는 양아치처럼 굴었다.안희서는 걸음을 멈췄다.그녀의 눈동자가 함께 말을 타고 있는 남자와 여자에게로 향했다. 남자는 여자를 뒤에서 끌어안고 한 손에는 고삐를, 다른 한 손으로는 여자의 턱을 쥐면서 그녀와 키스하고
강한결은 정말로 방을 바꾸었다. 그리고 아침 일찍 서지아와 함께 방에서 나왔으니 아마 어젯밤 둘이 같은 방에서 묵었을 것이다.안희서는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그녀는 두 사람을 피해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화장실로 달려간 그녀는 뭐라고 게워 내려고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게워 내지 못했다.요즘 식욕이 많이 줄어들었다. 어쩌면 몸 상태가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더 안 좋은 걸지도 몰랐다.안희서는 거울 속 초췌한 몰골의 자신을 바라보자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인간은 너무나도 나약했다.그녀는 그래도 완전히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나서야 깨달은 건 아니라고 자신을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그녀에게는 다시 안희서로 돌아갈 시간이 남아 있었다.안희서는 다시 화장을 수정하여 얼굴에 생기가 감도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그녀는 호텔 측에 얘기하여 율청산에서 떠나는 차를 부탁한 뒤 외할머니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외할머니는 사실 말수도 많지 않고 웃음도 적은 사람이었다. 외할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뜬 뒤 외할머니는 자식들을 키우는데 모든 정력을 쏟았다.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외할머니는 더욱 말수가 줄어들었다. 그녀는 오직 안희서의 일에만 유독 마음을 쏟았다.“외할머니?”안희서는 외할머니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않게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침은 먹었니?”엄혜원이 걱정스레 묻자 안희서는 마음이 따뜻해졌다.“지금 먹고 있어요. 외할머니, 저 보고 싶어서 전화하셨어요?”엄혜원은 웃으면서 말했다.“사실 별일은 아니고 요즘 너랑 한결이를 위해서 목도리를 두 개 떴거든.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있잖아. 손으로 뜬 게 훨씬 따뜻해서 떠봤어. 너희 언제쯤 가지러 올 거니? 같이 집으로 와서 밥도 먹고 가. 우리 희서가 좋아하는 갈비찜도 해줄게.”안희서는 시선을 내려뜨렸다.“외할머니, 그런 건 안 해주셔도 돼요. 힘들잖아요.”“이게 다 뭐라고. 네가 그런 집안에 시집가서 힘들었을 거라는 거 할머니는 다 알아. 그런데 내가 해줄 수 있는
안희서는 주먹을 쥐면서 평온하게 말했다.“그런 장면을 보고 싶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거예요.”안희서는 굳이 해명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강한결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억지 부리지 말아요. 나한테 들키지 않았으면 절대 인정하지 않았을 거잖아요.”강유라는 안희서를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진짜 짜증 나게 하네요. 여긴 호텔이에요. 먹는 거, 입는 거 다 여기서 해결할 수 있다고요. 그런데 당신은 왜 따라왔어요? 여긴 당신이 필요 없다고요.”지난 3년간, 강유라는 주말이나 방학 때면 엄마의 잔소리를 피하고자 자주 강한결의 집에 갔고 그때마다 안희서는 엄마처럼 그녀를 보살펴 주었다.그런 것에 익숙했던 강유라는 본능적으로 안희서가 그녀를 보살펴준다는 명목으로 그들을 언짢게 하러 왔다고 생각했다.“무슨 일이에요?”장하윤과 주찬영이 모습을 드러냈다.주찬영은 그들에게 괴롭힘당하는 안희서를 바라보며 웃었다.“강 대표님, 무슨 일이길래 분위기가 이렇게 심각해요?”강유라는 비록 어리긴 하지만 눈치가 있었다. 주찬영이 안희서의 오빠라는 걸 알고 있던 그녀는 입을 비죽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안희서는 주찬영이 그냥 넘어갈 수 있도록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았다.서지아는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장하윤을 바라보며 말했다.“우리는 밥 먹으러 가자.”장하윤도 남의 일에 쓸데없이 끼어들고 싶지 않았기에 서지아와 함께 떠났다.주찬영은 나른하게 웃어 보였다. 그는 난감해하는 안희서의 상황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강 대표님은 집안일을 처리하고 계세요. 전 제 여자 친구한테 가볼게요.”그는 심지어 강한결이 내연녀를 데리고 다니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옆에서 방관했다.강유라는 뭔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 듯했지만 강한결의 눈빛에 겁을 먹고 목을 움츠리더니 곧바로 도망쳤다.안희서는 주찬영의 뒷모습을 몇 초간 지켜보았다.“뭘 보는 거야?”강한결의 차가운 목소리에 안희서는 그제야
안희서는 익숙해서 뼛속 깊이 새겨진 듯한 은은한 향을 맡았다.힘없이 고개를 들자 강한결의 짙고 어두운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그는 거의 무표정한 얼굴로 안희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그 시선은 안희서로 하여금 땅속으로 꺼졌으면 싶게 만들 만큼 부끄럽고 참담하게 느껴졌다.마치 그녀가 일부러 이런 상황을 만든 것 같은 분위기였다.“죄송해요.”안희서는 이를 악물고 일어서려 했지만 이마엔 식은땀이 맺히고 병증이 한꺼번에 몰려와 손발엔 점점 힘이 빠져갔다.“내가 안아줘야 일어날 수 있겠어?”강한결의 목소리는 담담했다.아무런 감정도 섞이지 않은 제삼자의 말투였다.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묘하게 바뀌는 게 느껴졌다.안희서가 일부러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가장 권력 있는 남자에게 기대려 연기를 했다는 듯한 눈빛이었다.“희서 씨, 한결이 여자 친구도 여기 있는데 손발 못 쓰는 건가요?”성해원이 대놓고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서지아는 별다른 감정 없이 안희서를 바라봤다.화내지도 않았고 그냥 재미있는 구경이라도 되는 듯한 표정이었다.하지만 차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지금의 안희서는 정말로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하여 그가 뭔가 말을 하려는 찰나였다.“지아 씨, 손 데인 거예요?”성해원이 갑자기 놀란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안희서의 허리춤에서 강한 힘이 느껴졌고 누군가 그녀를 거칠게 밀쳐냈다.순간 중심을 잃었지만 간신히 탁자에 손을 짚어 쓰러지진 않았다.강한결은 이미 돌아서 서지아에게 다가가 있었다.정교하게 생긴 이마에 미세한 주름이 졌다.“데인 거야?”서지아는 하얀 팔을 들어 보였다.피부 한쪽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그녀는 안희서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별일 아니에요. 난 그렇게 유난 떠는 사람 아니니까.”안희서는 강한결 얼굴에 분명 긴장감이 스친 걸 놓치지 않았다.하지만 그건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에게 향한 것이었다.그녀는 조용히 시선을 거두고 이를 악물고 쓰러지지 않도록 온 힘을 버텼
안희서의 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애초에 병세가 불안정한 시기였는데 이번 연회를 위해 온 힘을 쏟아 준비했건만 강한결이 서지아를 데리고 나타나면서 그녀의 모든 흐름이 깨져버렸다.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하자 가방에서 약을 꺼내 기계적으로 알약 두 알을 입에 털어 넣었다.아랫배의 통증을 억누르려는 몸부림이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제야 안희서는 하도현이 걸었던 두 번째 전화를 발견했다.“도현 오빠?”“어디야?”안희서는 거울에 비친 창백한 얼굴을 힐끗 보고는 대답했다.“밖이에요, 금방 돌아갈게요.”“여기 지금 간담회가 하나 열리고 있어. 이쪽으로 먼저 와.”“네, 바로 갈게요.”간단히 화장을 고치고 이상 없는 걸 확인한 뒤에야 밖으로 나왔다.이번 간담회에는 주요 인물로서 국장도 참석해 있었다.도착했을 때, 강한결이 서지아와 함께 국장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안희서의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조용히 하도현 옆으로 돌아갔다. 하도현은 틈을 보자 안희서를 데리고 앞으로 나섰다.드디어 안희서도 국장과 인사를 나눌 기회를 얻게 되었다.하도현이 국장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이자 국장의 시선이 곧 안희서에게로 향했다.“당신이 바로...”하지만 신분이 비밀인지라 그는 곧 표정을 바꾸고 감탄을 터뜨렸다.“어쩐지 하 대표님이 그렇게 중시하시더라니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안희서는 옅게 미소지었다.“국장님을 뵐 수 있어 영광입니다.”안희서와 국장이 이야기를 나누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가자 그 모습을 강한결 일행도 곧 눈치챘다.서지아는 그쪽을 몇 번이나 힐끗 바라보았다.도대체 안희서가 국장과 무슨 얘기를 할 수 있다는 건지 의아했다.“체면 차리느라 애쓴다. 겉으론 그럴싸하네.”성해원이 비웃으며 말했다.그러고는 서지아를 흘끗 보고 덧붙였다.“정책도 모르고 기술도 모르고 비엔 핵심도 전혀 모르면서 국장한테 대화를 붙이다니.”서지아는 가볍게 입꼬리를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해원의 말이 무슨 뜻인지 그녀는 잘 알고 있
안희서는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동시에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이토록 중요한 만찬에서 강한결이 서지아를 떠받들어 줄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다만...“미안해요, 도현 오빠. 괜히 신경만 쓰게 했네요.”안희서는 자신과 강한결, 그리고 서지아 사이의 얽힌 감정 때문에 하도현을 괜히 번거롭게 만든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그가 자신을 이 자리에 데려온 것도 결국은 비엔을 위한 선택이었는데 강한결은 그 기회를 가차 없이 빼앗아갔다.하도현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괜찮아. 우리 자리 국장님 바로 옆이거든. 아직 이야기 나눌 기회 있어. 그리고 다른 인맥은 오늘 말고도 또 생길 테니까.”그러나 막 자리에 앉으려던 순간 한 직원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죄송합니다, 안희서 씨. 귀빈 인원 변동으로 인해 희서 씨 자리만 임시로 2번 테이블로 조정되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안희서는 고개를 들어 테이블 쪽을 바라봤다.분명 자신이 앉기로 되어 있던 맨 앞줄 자리였다.그런데 그 자리에 지금은 서지아가 앉아 있었다.그 옆에는 강한결이 여유롭게 차를 음미하고 있었고 안희서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자신에게 배정됐던 그 자리를 그는 아무런 부담도, 미안함도 없이 서지아에게 넘겨버렸다.직원의 미안함이 담긴 시선을 마주한 안희서는 조용히 입술을 다물었다.“네, 알겠습니다.”하도현은 여전히 앞자리에서 몇몇 주요 인사들에게 붙들려 상황을 알지 못하고 있었고 안희서도 굳이 문제를 만들고 싶진 않았다.게다가 하도현이 앞자리에 앉는 건 그의 실력과 배경이 있기 때문이었다.그의 아버지 하정빈 원사는 항공우주 분야의 권위 있는 원사이고 그 자신도 업계에서 충분한 입지를 쌓은 인물이었다.하지만 안희서는?하도현이 데려온, 이름도 생소한 듣보잡 기술자일 뿐이었다.강한결이 서지아를 앞자리에 앉히기로 마음먹었다면 그의 위상과 영향력 앞에서 누가 감히 반대할 수 있을까.그가 서지아를 밀어주겠다는 의지가 분명한 이상 그 누구도 강한결의 의사를 무시하지 못
“희서 씨, 처음 뵙겠습니다.”상대는 안희서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를 건넸다.하지만 그뿐이었다.인사를 마치자마자 안희서를 제쳐두고 하도현과만 업계 전망과 기술 개혁에 관해 이야기를 이어갔다.이 업계는 남성이 대부분인 탓에 여성에 대한 관심이나 존중은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편견은 언제나 한발 먼저 앞선다.안희서는 이런 분위기를 미리 예상하고 있었기에 차분하게 대처했다.그들의 대화를 조용히 들으며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하도현은 안희서에게 따로 꼭 소개하고 싶은 인물이 있다고 말했다.“저쪽 회색 정장 입은 분 보여? 국장님이야. 앞으로 정책 흐름을 제일 먼저 아는 분이고 오늘 꼭 인사해둬야 할 인물이야. 인상 잘 남겨야 해.”안희서는 그런 고위급 인사가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그제야 이 만찬의 무게가 얼마나 큰지 실감할 수 있었다.하도현은 안희서를 이끌고 천천히 그쪽으로 향했다.상대는 하도현을 발견하고는 먼저 환한 미소로 인사했다.“하 대표, 정말 오랜만이네요.”하지만 하도현이 안희서를 소개하기도 전에 입구 쪽에서 웅성임이 들려왔다.안희서가 고개를 돌렸다.서지아가 강한결의 팔을 끼고 우아한 걸음으로 입장하는 모습이 보였다.주변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며 시선을 끌기에 충분한 존재감이었다.강한결이 모습을 드러내자 조금 전까지 여유롭게 있던 주요 인사들이 하나같이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그쪽으로 몰려갔다.안희서의 시선도 모르게 그들에게로 향했다.서지아는 자신과 비슷한 톤의 짙은 녹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드레스의 네크라인은 크기와 형태가 다양한 다이아 조각들로 장식돼 조명 아래서 찬란하게 빛났다.그리고 강한결은 서지아의 드레스와 똑같은 색감과 질감의 포켓 스퀘어를 정장에 매치하고 있었다.노골적으로 둘의 관계를 드러내는 커플 코디였다.하지만 안희서가 입은 드레스와 세트였던 강한결의 그 정장을 그는 단 한 번도 입은 적이 없었다.안희서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입꼬리를 올렸다.시야가 살
이번엔 안에서 소리가 났다.“들어와.”안희서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강한결은 막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참이었고 등을 돌린 채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방 안으로 들어서자 다다미 옆 카펫 위에 그의 정장 상의가 떨어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안희서는 무의식적으로 다가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마침 강한결이 돌아섰고 안희서 손에 들린 외투를 보더니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앞으로 내 옷엔 손대지 마.”그의 옷은 예전엔 항상 안희서가 직접 다려줬다.강한결은 이번에도 그녀가 또 가져가서 손볼 셈이라고 생각한 것이다.안희서는 입술을 꾹 다물고 외투를 다다미 위에 던졌다.“우리 이혼 이야기는 언제쯤...”“먼저 자.”강한결은 말을 끊더니 손목시계를 보며 빠르게 방을 나갔다. 안희서가 무슨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지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그가 그렇게 급하게 나갈 줄은 안희서도 예상하지 못했다.이혼 이야기를 꺼내 볼 기회조차 없었다.그를 그토록 급하게 만드는 사람이 누구일까. 서지아 말고는 떠오르지 않았다.곧 아래층에서 차 경적 소리가 들려왔다.안희서의 핸드폰도 알림음을 울렸다.하도현이 음성 메시지 하나를 보내는 것이었다.“모레 저녁에 나랑 같이 만찬에 가자. 업계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너 인맥 넓히는 데 도움 될 거야.”안희서는 ‘좋아요’라고 짧게 답장을 보낸 뒤, 이곳에 남겨뒀던 갈아입을 옷을 옷장에서 꺼내 들고 방으로 가서 잠자리에 들었다.다음 날.강한결이 밤사이 집을 나갔다는 걸 알게 된 할머니는 크게 노했다.하여 안희서는 가까스로 달래드린 뒤에야 비엔으로 향했다.비엔의 전반적인 상황은 어느 정도 파악이 끝난 상태였고 필요한 자료들은 전부 훑어본 뒤, 앞으로의 방향까지 세부적으로 정리해 기술팀 핵심 직원인 진택원에게 전달했다.안희서가 불과 사흘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산처럼 쌓인 서류와 데이터를 모두 검토한 데다 기술적 완성도 높은 가이드 문서까지 정리해 건넨 걸 알게 된 순간, 진택원은 입을 다
강한결은 시선을 거둬들이고는 곧 젓가락을 내려두며 일어섰다.“처리할 일이 좀 있어서요. 먼저 식사하세요.”그는 안희서를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은 채 긴 다리를 내딛어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안희서는 조금 전 그가 보낸 애매한 시선이 마음에 남아 있었다.그 표정이 어떤 의미였는지 정확히 짚을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속이 타들어 갔다.‘도대체 언제쯤 할머니께 말할 셈이지?’강유라는 옆에서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오빠도 입맛 없는데 나도 안 먹을래요.”그러고는 게임하러 방으로 가버렸다.안희서는 조용히 밥을 계속 먹었다.타인의 시선은 어디까지나 타인의 것, 그걸로 스스로를 갉아먹을 필요는 없었다.식사가 끝나고 할머니가 안희서를 붙잡고 조용히 탄식했다.“우리 착한 희서, 한결이 성격이 원래 그렇다지만 너 많이 힘들었지? 할미가 다 안다. 걱정 마, 무슨 일이 있어도 할미는 네 편이야. 절대로 네가 헛되게 희생하게 두지 않을 거야.”안희서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할머니의 그 걱정 어린 눈빛이 괜히 마음을 찌릿하게 만들었다.할머니는 그동안 줄곧 안희서를 아껴줬고 둘 사이가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온갖 정성을 쏟아줬다.하지만 이제는 정말 더는 갈 수 없는 길이었다.강한결의 마음도, 몸도 이미 다른 여자의 것이었다.그리고 자신 역시 더는 이런 식의 관계를 이어갈 자신이 없었다.게다가 그녀의 병,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그것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할머니, 저 오늘 사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안희서는 숨을 깊이 들이쉰 후, 조용히 말했다.“한결 씨랑 같이 말씀드리려고요.”더 이상 할머니의 눈을 마주보기 어려웠는지라 그녀는 마치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갔다.그들의 방, 한때 안희서가 가장 많은 밤을 함께했던 곳, 그 앞에 서서 안희서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두 사람이 함께 할머니께 이혼 이야기를 해야 했고 이젠 피할 수 없었다.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넌 출신도 별로고 학벌도 평범하지. 나중에 한결이가 밖에 나가서 자기 아내는 전업주부라고 소개하게 하고 싶어?”유옥자는 말을 아끼지 않았고 목소리에는 은근한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며느리 안희서가 마음에 안 든 지 오래였다.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마음에 든 적이 없었다.하지만 당시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그냥 받아들였을 뿐이었다.그러나 요즘 강한결과 자주 연락하는 서지아는 적어도 사람들 앞에 내세울 만했다.물론 강씨 가문 기준에서 보면 출신이야 다소 아쉽지만 학벌은 우수했고 적어도 안희서보다는 훨씬 나았다.안희서는 유옥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담담하게 말했다.“그런 걱정 곧 안 하셔도 될 거예요.”그러자 유옥자는 찡그린 얼굴로 물었다.“그게 무슨 뜻이야?”안희서가 대답하기도 전에 현관 밖에서 자동차 경적 소리가 들렸다.곧 길고 곧은 실루엣이 현관문을 지나 거실에 들어섰다.강한결이었다.그의 차가운 눈동자가 거실 분위기를 가볍게 훑었다.지난 3년간, 어머니 유옥자가 안희서를 곤란하게 만든 장면을 그는 수없이 봐왔다.그럴 때마다 안희서는 감정 한 번 표출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그녀가 스스로도 억울하다고 느끼지 않는 듯했기에 강한결은 굳이 나서지 않았다.그럴 필요도 없다고 여겼다.“좀 일이 있어서 늦었습니다.”강한결은 안희서를 스치듯 바라보다 그녀 옆에 조용히 섰다.“할머니,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세요?”그가 옆에 섰을 때 안희서는 그의 몸에서 은은히 퍼지는 익숙한 향을 느꼈다.여성용 향수였다.그중에서도 백머스크의 잔향, 절대 무시할 수 없는 향이었다.바로 서지아가 자주 쓰는 향이었던 것이다.그가 이 향을 이 정도로 짙게 묻히고 있다는 건 둘이 오랜 시간 가까이 있었단 뜻이었다.아무리 부정해도 이건 우연일 수 없다.할머니는 강한결의 탄탄한 팔뚝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왜 이제야 오는 거야? 뭐 그렇게 급한 일이 있다고!”강한결은 의미 없는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차진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성해원의 말에 은근히 동의하는 기색이었다.성해원은 강한결을 바라보며 단언했다.“내가 보기에 희서 씨는 그냥 지아 씨랑 경쟁하고 싶은 거야. 지아 씨가 드론에 관심 있다니까 갑자기 흉내 내고 지아 씨가 하도현한테 관심 보이니까 비엔에 입사하고. 결국 핵심은 하나지. 너한테 관심 끌려고 그러는 거야.”여자들의 그런 심리는 성해원 입장에서 너무 익숙하고 뻔했다.사랑받지 못하는 여자들은 괜히 애써보고 괜히 시끄럽게 굴게 마련이다.강한결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는데 그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전화는 할머니에게서 걸려온 것이었다.강한결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전화를 받으며 밖으로 나갔다.“많이 늦었는데 아직 안 주무셨어요?”할머니는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넌? 지금 희서랑 같이 안 있는 거야?”강한결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일이 많아서요.”“거짓말 마! 내가 들은 얘기가 한두 개가 아니야! 요즘 네가 누구랑 자주 붙어 다니는지 다 들리는데 그게 말이 돼?”할머니는 격분해 있었고 강한결은 시선을 들며 조용히 물었다.“누가 그랬는데요?”“진짜 그런 사람이 있어?!”할머니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연달아 ‘아이고 아이고’ 하더니 바로 고함쳤다.“강한결! 희서가 얼마나 괜찮은 앤데! 그런 애를 네가 저버리면 하늘이 너한테 벌 줄 알아!”하지만 강한결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그 정도까지는 아니잖아요.”그 대답에 할머니는 불같이 화를 냈다.“나 화나게 하기 싫으면 내일 희서 데리고 집에 와! 명령이야. 부탁이 아니라.”이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어버렸다.강한결은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한참 그대로 서 있다가 안희서와의 카톡 메시지 창을 열었다.그렇게 잠깐 들여다보다가 아무 말 없이 다시 나와 바로 전화를 걸었다.이미 밤 11시가 되는 시간이라 안희서는 막 잠들려던 참이었다.원래 수면 패턴이 규칙적인 편이라 늦게까지 깨어 있는 일이 거의 없었고 강한결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불구
안희서의 가슴이 순간 조여들었다.놀랍고 믿기지 않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겨우 입을 열었다.“그럼 언제쯤 저랑 같이 가서...”이혼서류.끝 네 글자는 결국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그때 강한결의 핸드폰이 울렸다.그는 안희서를 한 번 흘깃 보고는 몸을 돌려 전화를 받더니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한층 부드러워졌다.“응, 금방 갈게.”안희서가 아직 말을 채 다 하지도 않았는데 그는 전혀 미련 없이 등을 돌려 긴 다리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마치 예전처럼 익숙하게 그녀를 무시하며 그렇게 떠났다.안희서는 본래 그 틈을 타 할머니 병문안 얘기를 다시 꺼낼 생각이었다.언제 시간 낼 수 있느냐고, 이 일부터 확실히 정리하자고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강한결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서지아에게로 향하는 모습을 보고 안희서는 조용히 차에 올랐다.‘그만두자. 다음 기회에 하자.’몸도 마음도 지쳐 있는 상태에서 지금은 더 이상 그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병원에서 받은 약을 꺼내 포장을 뜯고 투명한 약병에 하나하나 옮겨 담았다.그리고 포장지는 버린 뒤 다시 비엔으로 돌아갔다.안희서가 진료를 받으러 갔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은 탓에 심예은은 그저 삼촌 안해진을 보러 간 줄 알고 안부를 물었다.그 말에 안희서는 병상에서 고통스러워하던 삼촌의 얼굴이 떠올라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그대로야.”심예은은 슬퍼 보이는 얼굴로 안희서를 꼭 안아줬다.안희서도 살짝 안아주며 말했다.“괜찮아.”퇴근 후, 안희서는 집에 돌아와 혼자 생각을 정리했다.드론은 미래 기술의 핵심 사업이고 비엔도 앞으로 정책과 긴밀히 협력하게 될 것이었다.그녀는 이미 전체적인 기획을 세워둔 상태였고 이제 하도현 팀과 회의하며 세부적인 논의를 할 필요가 있었다.어느새 밤 10시 가까이 되자 설정해둔 약 복용 알람이 울렸고 안희서는 메스꺼움을 참으며 약을 삼켰다.바로 그때, 하도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희서야, 네가 알아야 할 일이 있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