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영 오빠!”여자의 들뜬 목소리가 안희서의 생각을 흐트러뜨렸다. 여자는 안희서를 지나쳐 주찬영의 널따란 품 안으로 뛰어들었고 주찬영은 익숙하다는 듯이 여자를 안아주었다.“내가 찬영 오빠를 얼마나 기다린 줄 알아요? 오빠가 조금이라도 늦게 나왔으면 우리 아빠가 날 납치해서 다른 사람과 결혼시켰을 거예요!”주찬영은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와 뜨겁게 키스를 나누었다. 주찬영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뭐가 그렇게 급하대? 잠시 뒤에 너희 집 운전기사에게 차에서 내리라고 해. 내가 너희 아버지께 큰 선물을 드리도록 할게...”여자는 앙탈을 부리면서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오빠 진짜 나빠요! 우리 아빠가 오빠를 보고 싶다면서 집으로 데리고 오라고 했어요. 그리고 오빠를 위해 축하 파티도 할 거라고 했어요...”안희서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서서 망연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무안함과 당황함을 느꼈다.한때 부드럽고 다정했던, 언제나 그녀를 살뜰히 챙겨주었던 주찬영은 십여 년 전에 꾸었던 꿈인 것만 같았다.배에서 또다시 통증이 느껴졌다.칼이 시간을 뛰어넘어 그녀의 몸을 꿰뚫는 것 같았다.“희서야, 난 주씨 가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난 정말로 네 오빠가 되고 싶지 않아. 앞으로 크면 나랑 결혼하자. 어때?”온화했던 목소리가 떠올라 안희서는 잠깐 넋을 놓았다.“조심해!”걱정이 느껴지는 외침과 함께 안희서는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오토바이 한 대가 빠르게 그녀와 주찬영, 그리고 여자를 향해 달려들었다.주찬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여자를 안고 뒷걸음질 치며 여자를 보호했고, 스스로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던 안희서는 허둥지둥 얼굴을 가렸지만 그 와중에 발목도 삐었다.“그쪽은...”안희서를 바라보는 주찬영의 눈빛에서 긴장과 당황스러움이 느껴졌다.“전 괜찮아요...”안희서는 눈물이 흐르기 전에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여자는 궁금한 듯 물었다.“누구예요?”주찬영은 한동안 넋을 놓고 있다가 여자의 턱을 잡으면서
안희서는 당황했다. 그녀는 창백한 입술을 깨물었다.“한결 씨가 지시한 일이라고요?”“네.”조민준은 안희서가 예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비록 안희서는 일도 열심히 하고 능력도 좋았지만 비열한 수단으로 강한결과 잠자리를 가지고 그것을 빌미로 강한결과 억지로 결혼했다.그래서 조민준은 안희서를 경멸했다.“대표님께서 오늘 여론을 잠재울 때까지 아무 데도 가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만약 오늘 내로 여론을 잠재우지 못한다면... 블루베이에서는 능력 없는 사람을 거두지 않는다고 하셨어요.”안희서는 강한결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혼을 앞둔 지금 이렇게 자신을 괴롭힐 줄은 몰랐다.강한결의 아내인 안희서가 불륜녀를 위해 진실을 거짓이라고 해야 한다니!순간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 복부의 통증이 강해졌다. 안희서는 책상을 짚으면서 애써 괜찮은 척하다가 조롱 어린 눈빛으로 책상 위에 놓인 사원증을 보았다.그녀는 사원증을 들어 줄을 감았다.“블루베이는 확실히 능력 없는 사람을 거두지 않죠. 그런데 전 그 일은 못 하겠네요.”안희서는 덤덤한 표정으로 사원증을 엎어두었다.“저 그만둘게요.”어젯밤 그녀는 이혼합의서와 사직서를 동시에 준비해서 제출했는데 절차가 복잡하여 아직 강한결에게 전달되지 않았을 뿐이다. 안희서는 오늘 서지아와 관련된 업무를 맡지 않을 것이다.“앞으로 서지아 씨 일로 절 찾지 마세요. 그리고 대표님께 다른 분한테 맡기라고 하세요. 블루베이에 직원이 이렇게 많은데 굳이 저여야 할 이유는 없죠.”조민준은 경악했다.안희서가 사직한다니.강한결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를 안희서가 과연 포기할 수 있을까?어쩌면 강한결의 관심을 끌려는 또 다른 수단일지도 몰랐다.조민준은 꼭대기 층으로 돌아갔다.스케줄이 꽉 차 있던 강한결은 동임 테크의 진성민 대표를 만나러 갈 준비를 했다.“강 대표님, 이건 동임과의 계약서입니다. 확인해 보시죠.”강한결은 시선을 내려뜨리면서 말했다.“홍보팀에서는 지아 일을 어떻게 처리했어?”
업무를 처리한 뒤 안희서는 조민준에게서 연락을 받았다.조민준은 강한결의 뜻을 전했고 안희서는 곧바로 강한결의 의도를 이해했다.서지아는 강한결과 바람을 피웠기에 불륜녀가 확실했다.강한결이 이 일을 그녀에게 맡기려고 하는 이유는 앞으로 누군가 이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그의 아내인 안희서가 해명한다면 서지아가 불륜녀가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들도 더는 의심하거나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강한결은 서지아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했던 것은 만약 그녀가 서지아의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면 블루베이를 떠난 뒤 다른 회사에서 그녀를 받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였다. 강한결은 안희서가 더는 일을 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었다.지난 3년간 안희서는 아내로서 본분을 다하려고 그와 결혼할 날부터 과거를 전부 끊어냈는데 강한결은 단 한 번도 그녀를 진심으로 대한 적이 없었다.이제 안희서는 지쳤다.그녀는 자조하듯 입꼬리를 올리면서 덤덤히 말했다.“전 병가를 사용할 거예요. 제가 병을 앓는 와중에 일을 처리하길 강요한다면 노동법을 위반한 것이니 원한다면 법원에서 보죠.”이제 곧 이혼할 예정이고 일도 그만둘 텐데 강한결이 언짢아하든 말든 중요하지 않았다.퇴근 후 차에 탄 안희서는 아버지 주명훈이 보낸 문자를 받았다.[너희 오빠 출소했다. 오늘 집에서 파티를 할 생각인데 돌아올 거니?]질문이지만 안희서는 주명훈이 불효녀인 그녀가 돌아오는 걸 원치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당시 주명훈은 그녀와 주찬영의 일을 치욕으로 생각했고 안희서를 파렴치하다고 생각했다. 안희서가 강씨 가문 같은 대단한 집안에 시집가지 못했다면, 그녀에게 이용 가치가 없었다면 주명훈은 그녀를 집에서 쫓아내고 그녀와 연을 끊었을 것이다.하지만 오늘 파티의 주인공은 한때 그녀에게 가장 소중했던 사람인 주찬영이었다.한참을 고민하던 안희서는 화장을 수정하여 얼굴에 생기가 감도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곧장 차를 타고 주씨 가문 소유의 별장으로 향했다.주찬영이
안희서는 주찬영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안희서를 바라보면서 마치 방관자처럼 당황해하는 안희서의 모습을 보려고 했다.안희서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하나 남았던 희망마저 이젠 모조리 사라졌다.그녀는 주찬영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면서 그가 바라는 대로 해주었다.“안녕하세요, 새언니.”장하윤의 웃음기가 더욱 짙어졌다. 그녀는 주찬영의 허리를 끌어안고 애교를 부렸다.주찬영은 잠깐 멈칫하면서 안희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이고 장하윤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그녀와 함께 응접실로 향했다.“어디서 쿨한 척이야?”주가은은 그녀에게 다가가서 비아냥댔다.“우리 오빠는 유부녀 안 좋아해! 그리고 어제 강 대표님이 서지아 씨 생일을 축하해줬다면서? 서지아 씨는 그 업계에서 서로 데려가려고 경쟁하는 항공우주공학과 박사야. 너처럼 몸만 내어줄 줄 아는 가정주부랑은 비교도 안 되지. 이제 곧 그 집에서 쫓겨날 것 같아 두려워서 우리 주씨 가문에 들러붙으려는 거야?”사람들은 그녀의 비참한 결혼생활을 웃음거리로 여겼다.안희서는 애써 괜찮은 척하며 들고 있던 선물을 내려놓았다.“걱정하지 마. 내가 앞으로 잘살든 못살든 주씨 가문과는 아무 상관 없으니까. 아무래도 내 성은 안씨잖아.”안희서는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떠났다.그곳에 남아있어 봤자 다들 언짢아질 뿐이다.“갔어?”옆방에서 나온 주명훈은 마침 안희서가 홀연히 떠나는 뒷모습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주가은은 정신을 차린 뒤 투덜댔다.“아빠, 쟤 태도 좀 봐요. 주씨 가문과 아빠가 안중에도 없는 게 분명해요. 제가 보기엔 조만간 강 대표님과 이혼할 것 같아요.”지난 3년간 주명훈은 안희서가 강한결의 마음을 얻지 못했음을 보아냈다. 안희서가 강한결과 결혼했을 때 그는 안희서 덕분에 약간의 이득을 보긴 했지만 그 뒤로 주씨 가문이 강씨 가문의 프로젝트에 숟가락을 얹으려고 할 때마다 강씨 가문은 가차 없이 그들을 거절했다. 강한결 역시 장인어른인 그가 안중에도 없었다.그건 모두 안희서가 제 역
다음 날, 가정부가 왔을 때 강한결의 여동생 강유라도 함께 왔다.강유라는 이제 막 17살이 되었는데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았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소파 위에 가방을 던졌다.“안희서는?”강유라는 눈을 깜빡이면서 강한결을 바라보았다.강한결은 넥타이를 매면서 그녀를 힐끗 보았다.“예의 없게 왜 그렇게 불러?”강유라는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오빠도 그 여자를 싫어하는데 내가 왜 그 여자를 새언니라고 불러야 해?”강유라의 엄마는 안희서가 주제넘게 강한결과 결혼하여 강씨 가문에 시집왔으니 당연히 강씨 가문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했다.‘뭐라고 했더라? 고급 가정부?’“말해 봐. 또 뭘 꾸미고 있는 거야?”강한결은 자신의 여동생을 잘 알고 있었기에 차가우면서도 압박감이 느껴지는 어투로 말했다.강유라는 눈알을 도르르 굴리면서 말했다.“오빠, 오늘 많이 바빠?”“왜?”“엄마는 패션쇼를 보러 갔고 아빠는 해외로 갔어. 또 할머니는 몸이 안 좋으셔서 학부모 총회에 가줄 사람이 없어. 안희서 그 여자를 보내면 안 돼? 어차피 그 여자 오빠한테 얹혀사는 거잖아. 할 일 없으니까 시간 많을 거 아냐?”강유라는 종아리를 달랑거리면서 애교를 부렸고 강한결은 잠깐 뜸을 들였다.“네가 알아서 얘기해...”강유라는 자신 있게 말했다.“그 여자는 오빠한테 잘 보이려고 나한테 엄청나게 잘해줘. 어차피 내가 뭐라고 하든 좋다고 할 테니까 그냥 통보하면 돼.”최근 강유라는 서지아가 해외에서 진행했던 항공업계와 관련된 공개강좌에 푹 빠져서 성적이 조금 떨어졌다.이번에 학부모 총회에서 선생님들은 학부모들과 상담을 진행할 것이다. 그래서 강유라는 오빠나 엄마가 가는 걸 원하지 않았다. 반대로 안희서는 선생님에게 몇 마디 꾸지람을 들어도 괜찮았다.안희서는 강유라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도 절대 오빠나 엄마에게 일러바치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그 말을 들은 강한결은 잠깐 고민하다가 겉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그래. 내가 휴가 승인해 줄게.”...잠에
당시 안희서가 자신이 원하는 전공을 계속 공부했더라면 지금쯤 항공 업계에서 일했을 것이다.드론은 이 시대 가장 중요한 첨단 기술 산물로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군수업이나 농업에서도 사용되었다.교수님이 그녀가 연구원에 갈 수 있게 추천서를 써준 이유는 당시 안희서가 장거리 비행, 고하중, 고속, 자동화 등 기술적 어려움을 돌파한, 정찰 기능과 공격 기능이 탑재된 일체형 드론 엔유를 개발했기 때문이다. 현재 엔유는 실전에도 투입되고 있으며 업계 내에서는 최고라고 평가받고 있었다.안희서는 결혼 때문에 지금까지 허송세월하면서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고 젊은 나이에 암까지 걸려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안희서는 드디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인간은 늘 본인을 우선시해야 하며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걸 말이다.나을 수 없더라도 그녀는 유한한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나는...’안희서는 본인이 원하는 업계로 돌아가서 꿈을 이루고 싶었다.심예은은 비록 기술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비엔에는 대단한 사람이 있었다.심예은이 투자를 하면 상대방은 팀원들과 함께 연구를 진행했고, 지난 몇 년간 비엔은 승승장구하여 강주시에서 무시 못 할 다크호스로 떠올랐다.비엔은 그만큼 훌륭한 곳이었다.다만...“너도 알다시피 내가 결혼을 선택했을 때 도현 오빠는 나와 연락을 끊었어. 도현 오빠는 비엔의 실질적인 운영자니까 내가 비엔에서 일하는 걸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어.”당시 안희서를 위해 추천서를 써준 사람이 바로 하도현의 아버지였다. 두 부자는 안희서에게 큰 희망을 걸었고 그녀를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앞으로 그녀가 큰 일을 해내 훗날 우리나라의 자랑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그러나 안희서는 결혼을 했고 그들의 기대를 저버렸다.심예은은 고개를 긁적이며 말했다.“도현 오빠는 겉으로만 차가워 보이지 사실 무른 사람이야. 너도 알잖아. 다음에 내가 자리를 한 번 만들게. 그때 얘기 나눠봐. 사실 도현 오빠도 널 꽤
서지아는 안희서를 보지 못한 것인지 부드러운 얼굴로 웃으면서 강유라에게 말했다.“유라 네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면 돼.”강한결은 시선을 들더니 짜증 난 어조로 말했다.“여긴 왜 왔어?”안희서는 그의 차가운 시선을 마주한 순간 그가 뭔가 오해했다는 걸 깨달았다.역시나 옆에 있던 성해원이 안희서를 보자마자 차갑게 말했다.“안희서 씨 참 대단하네요. 한결이 뒤를 밟아서 우리가 있는 곳까지 알아내는 걸 보면 말이죠. 다들 그래도 체면이 있는데 이러는 거 무안하지 않아요?”안희서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겠는가?강한결이 바람을 피우는 것을 잡으러 온 걸 것이다.“이러는 거 재미없어요. 한결이가 안희서 씨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 안희서 씨도 알고 있잖아요.”성해원은 스스로 안희서의 생각을 꿰뚫어 봤다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당시 안희서는 강한결과 잠자리를 가진 뒤 기자를 시켜서 사진을 찍게 했다. 만약 강한결이 제때 상황을 통제하지 않았더라면 강씨 가문은 체면을 심하게 구겼을 것이다.자신의 몸을 이용하여 강씨 가문에 발을 들인 여자를 그들은 매우 경멸했다.안희서는 그들의 비아냥에 익숙해졌다. 강한결의 친구인 그들은 모두 파렴치한 안희서를 혐오했다.서지아는 강한결의 곁에 평온히 앉아서 부드러운 얼굴로 강유라를 위해 주스를 따랐다. 그녀는 굳이 고개를 들어 안희서를 바라보지는 않았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서 우아함과 자신감이 느껴졌다.서지아는 안희서와 대치하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은 듯했다.안희서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강한결에게 사랑받고 있으니 두려운 게 없을 것이다.“새언니, 기분 나쁜 건 아니죠?”옆에 있던 강유라가 긴장한 얼굴로 서지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서지아가 강한결을 빼앗아 간 안희서 때문에 언짢아할까 봐 걱정되었다.서지아는 대답하지 않고 부드럽게 웃을 뿐이었다.강한결은 서지아가 오해할까 봐 걱정되는지 잘생긴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나가서 얘기해.”안희서는 시선을 거두어들이며 더는 그들을 바라보지 않
강한결이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오자 서지아는 그와 안희서의 대화가 유쾌하지 않았음을 짐작했다. 강한결은 안희서를 향한 못마땅함을 전혀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강유라는 정신이 딴 데 팔린 듯했다.“오빠, 그 여자가 뭐라고 했어? 혹시 내 험담이라도 한 건...”강한결이 시선을 들어 강유라를 바라보았다.“너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거야?”“아니. 안 했는데.”강유라는 주스를 들고 입을 삐죽였다.“내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알아?”차진우는 안으로 들어와서 강한결을 힐끔 보았다. 그는 조금 전 밖에서 보았던 광경을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서지아가 언짢아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다른 여자가 본인의 남자에게 수작을 부렸다는 걸 신경 쓰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성해원은 코웃음을 쳤다.“왜 여동생한테 뭐라고 하는 거야? 조금 전에는 안희서 씨가 잘못한 게 맞아. 네 뒤를 밟고 여기까지 따라왔잖아. 그런 짓을 하기 전에 본인에게 그런 자격이 있는지부터 생각해 봐야 하는데 말이야.”차진우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지금 상황을 보면 네가 이혼 얘기를 꺼내도 너한테 들러붙으려고 할 거야. 한결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둬.”강한결은 무심한 얼굴로 말없이 서지아를 위해 차를 따라주었다.서지아는 덤덤히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일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강유라는 그 광경을 본 순간 살짝 뒤가 켕겼다.그러나 생각을 바꿔본다면, 그녀가 나서지 않았더라도 안희서가 여기까지 찾아왔을 가능성이 있었다.그렇다면 굳이 설명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안희서는 원래부터 모두에게 미움받는 여자이니 사람들이 이 일로 그녀를 오해하든 말든 중요하지 않았다.그런 생각이 들자 강유라는 곧바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 선망 가득한 눈빛으로 서지아에게 안현대에 관해 물었다....안희서는 다음 주 주치의와 함께 치료에 관해 얘기를 나누기로 했다.금요일 오전, 심예은은 안희서에게 문자를 보내서 하도현이 오후에 드론 조종 초청 경기에 참석할 것
안희서는 익숙해서 뼛속 깊이 새겨진 듯한 은은한 향을 맡았다.힘없이 고개를 들자 강한결의 짙고 어두운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그는 거의 무표정한 얼굴로 안희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그 시선은 안희서로 하여금 땅속으로 꺼졌으면 싶게 만들 만큼 부끄럽고 참담하게 느껴졌다.마치 그녀가 일부러 이런 상황을 만든 것 같은 분위기였다.“죄송해요.”안희서는 이를 악물고 일어서려 했지만 이마엔 식은땀이 맺히고 병증이 한꺼번에 몰려와 손발엔 점점 힘이 빠져갔다.“내가 안아줘야 일어날 수 있겠어?”강한결의 목소리는 담담했다.아무런 감정도 섞이지 않은 제삼자의 말투였다.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묘하게 바뀌는 게 느껴졌다.안희서가 일부러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가장 권력 있는 남자에게 기대려 연기를 했다는 듯한 눈빛이었다.“희서 씨, 한결이 여자 친구도 여기 있는데 손발 못 쓰는 건가요?”성해원이 대놓고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서지아는 별다른 감정 없이 안희서를 바라봤다.화내지도 않았고 그냥 재미있는 구경이라도 되는 듯한 표정이었다.하지만 차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지금의 안희서는 정말로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하여 그가 뭔가 말을 하려는 찰나였다.“지아 씨, 손 데인 거예요?”성해원이 갑자기 놀란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안희서의 허리춤에서 강한 힘이 느껴졌고 누군가 그녀를 거칠게 밀쳐냈다.순간 중심을 잃었지만 간신히 탁자에 손을 짚어 쓰러지진 않았다.강한결은 이미 돌아서 서지아에게 다가가 있었다.정교하게 생긴 이마에 미세한 주름이 졌다.“데인 거야?”서지아는 하얀 팔을 들어 보였다.피부 한쪽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그녀는 안희서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별일 아니에요. 난 그렇게 유난 떠는 사람 아니니까.”안희서는 강한결 얼굴에 분명 긴장감이 스친 걸 놓치지 않았다.하지만 그건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에게 향한 것이었다.그녀는 조용히 시선을 거두고 이를 악물고 쓰러지지 않도록 온 힘을 버텼
안희서의 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애초에 병세가 불안정한 시기였는데 이번 연회를 위해 온 힘을 쏟아 준비했건만 강한결이 서지아를 데리고 나타나면서 그녀의 모든 흐름이 깨져버렸다.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하자 가방에서 약을 꺼내 기계적으로 알약 두 알을 입에 털어 넣었다.아랫배의 통증을 억누르려는 몸부림이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제야 안희서는 하도현이 걸었던 두 번째 전화를 발견했다.“도현 오빠?”“어디야?”안희서는 거울에 비친 창백한 얼굴을 힐끗 보고는 대답했다.“밖이에요, 금방 돌아갈게요.”“여기 지금 간담회가 하나 열리고 있어. 이쪽으로 먼저 와.”“네, 바로 갈게요.”간단히 화장을 고치고 이상 없는 걸 확인한 뒤에야 밖으로 나왔다.이번 간담회에는 주요 인물로서 국장도 참석해 있었다.도착했을 때, 강한결이 서지아와 함께 국장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안희서의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조용히 하도현 옆으로 돌아갔다. 하도현은 틈을 보자 안희서를 데리고 앞으로 나섰다.드디어 안희서도 국장과 인사를 나눌 기회를 얻게 되었다.하도현이 국장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이자 국장의 시선이 곧 안희서에게로 향했다.“당신이 바로...”하지만 신분이 비밀인지라 그는 곧 표정을 바꾸고 감탄을 터뜨렸다.“어쩐지 하 대표님이 그렇게 중시하시더라니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안희서는 옅게 미소지었다.“국장님을 뵐 수 있어 영광입니다.”안희서와 국장이 이야기를 나누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가자 그 모습을 강한결 일행도 곧 눈치챘다.서지아는 그쪽을 몇 번이나 힐끗 바라보았다.도대체 안희서가 국장과 무슨 얘기를 할 수 있다는 건지 의아했다.“체면 차리느라 애쓴다. 겉으론 그럴싸하네.”성해원이 비웃으며 말했다.그러고는 서지아를 흘끗 보고 덧붙였다.“정책도 모르고 기술도 모르고 비엔 핵심도 전혀 모르면서 국장한테 대화를 붙이다니.”서지아는 가볍게 입꼬리를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해원의 말이 무슨 뜻인지 그녀는 잘 알고 있
안희서는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동시에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이토록 중요한 만찬에서 강한결이 서지아를 떠받들어 줄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다만...“미안해요, 도현 오빠. 괜히 신경만 쓰게 했네요.”안희서는 자신과 강한결, 그리고 서지아 사이의 얽힌 감정 때문에 하도현을 괜히 번거롭게 만든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그가 자신을 이 자리에 데려온 것도 결국은 비엔을 위한 선택이었는데 강한결은 그 기회를 가차 없이 빼앗아갔다.하도현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괜찮아. 우리 자리 국장님 바로 옆이거든. 아직 이야기 나눌 기회 있어. 그리고 다른 인맥은 오늘 말고도 또 생길 테니까.”그러나 막 자리에 앉으려던 순간 한 직원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죄송합니다, 안희서 씨. 귀빈 인원 변동으로 인해 희서 씨 자리만 임시로 2번 테이블로 조정되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안희서는 고개를 들어 테이블 쪽을 바라봤다.분명 자신이 앉기로 되어 있던 맨 앞줄 자리였다.그런데 그 자리에 지금은 서지아가 앉아 있었다.그 옆에는 강한결이 여유롭게 차를 음미하고 있었고 안희서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자신에게 배정됐던 그 자리를 그는 아무런 부담도, 미안함도 없이 서지아에게 넘겨버렸다.직원의 미안함이 담긴 시선을 마주한 안희서는 조용히 입술을 다물었다.“네, 알겠습니다.”하도현은 여전히 앞자리에서 몇몇 주요 인사들에게 붙들려 상황을 알지 못하고 있었고 안희서도 굳이 문제를 만들고 싶진 않았다.게다가 하도현이 앞자리에 앉는 건 그의 실력과 배경이 있기 때문이었다.그의 아버지 하정빈 원사는 항공우주 분야의 권위 있는 원사이고 그 자신도 업계에서 충분한 입지를 쌓은 인물이었다.하지만 안희서는?하도현이 데려온, 이름도 생소한 듣보잡 기술자일 뿐이었다.강한결이 서지아를 앞자리에 앉히기로 마음먹었다면 그의 위상과 영향력 앞에서 누가 감히 반대할 수 있을까.그가 서지아를 밀어주겠다는 의지가 분명한 이상 그 누구도 강한결의 의사를 무시하지 못
“희서 씨, 처음 뵙겠습니다.”상대는 안희서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를 건넸다.하지만 그뿐이었다.인사를 마치자마자 안희서를 제쳐두고 하도현과만 업계 전망과 기술 개혁에 관해 이야기를 이어갔다.이 업계는 남성이 대부분인 탓에 여성에 대한 관심이나 존중은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편견은 언제나 한발 먼저 앞선다.안희서는 이런 분위기를 미리 예상하고 있었기에 차분하게 대처했다.그들의 대화를 조용히 들으며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하도현은 안희서에게 따로 꼭 소개하고 싶은 인물이 있다고 말했다.“저쪽 회색 정장 입은 분 보여? 국장님이야. 앞으로 정책 흐름을 제일 먼저 아는 분이고 오늘 꼭 인사해둬야 할 인물이야. 인상 잘 남겨야 해.”안희서는 그런 고위급 인사가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그제야 이 만찬의 무게가 얼마나 큰지 실감할 수 있었다.하도현은 안희서를 이끌고 천천히 그쪽으로 향했다.상대는 하도현을 발견하고는 먼저 환한 미소로 인사했다.“하 대표, 정말 오랜만이네요.”하지만 하도현이 안희서를 소개하기도 전에 입구 쪽에서 웅성임이 들려왔다.안희서가 고개를 돌렸다.서지아가 강한결의 팔을 끼고 우아한 걸음으로 입장하는 모습이 보였다.주변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며 시선을 끌기에 충분한 존재감이었다.강한결이 모습을 드러내자 조금 전까지 여유롭게 있던 주요 인사들이 하나같이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그쪽으로 몰려갔다.안희서의 시선도 모르게 그들에게로 향했다.서지아는 자신과 비슷한 톤의 짙은 녹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드레스의 네크라인은 크기와 형태가 다양한 다이아 조각들로 장식돼 조명 아래서 찬란하게 빛났다.그리고 강한결은 서지아의 드레스와 똑같은 색감과 질감의 포켓 스퀘어를 정장에 매치하고 있었다.노골적으로 둘의 관계를 드러내는 커플 코디였다.하지만 안희서가 입은 드레스와 세트였던 강한결의 그 정장을 그는 단 한 번도 입은 적이 없었다.안희서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입꼬리를 올렸다.시야가 살
이번엔 안에서 소리가 났다.“들어와.”안희서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강한결은 막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참이었고 등을 돌린 채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방 안으로 들어서자 다다미 옆 카펫 위에 그의 정장 상의가 떨어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안희서는 무의식적으로 다가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마침 강한결이 돌아섰고 안희서 손에 들린 외투를 보더니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앞으로 내 옷엔 손대지 마.”그의 옷은 예전엔 항상 안희서가 직접 다려줬다.강한결은 이번에도 그녀가 또 가져가서 손볼 셈이라고 생각한 것이다.안희서는 입술을 꾹 다물고 외투를 다다미 위에 던졌다.“우리 이혼 이야기는 언제쯤...”“먼저 자.”강한결은 말을 끊더니 손목시계를 보며 빠르게 방을 나갔다. 안희서가 무슨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지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그가 그렇게 급하게 나갈 줄은 안희서도 예상하지 못했다.이혼 이야기를 꺼내 볼 기회조차 없었다.그를 그토록 급하게 만드는 사람이 누구일까. 서지아 말고는 떠오르지 않았다.곧 아래층에서 차 경적 소리가 들려왔다.안희서의 핸드폰도 알림음을 울렸다.하도현이 음성 메시지 하나를 보내는 것이었다.“모레 저녁에 나랑 같이 만찬에 가자. 업계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너 인맥 넓히는 데 도움 될 거야.”안희서는 ‘좋아요’라고 짧게 답장을 보낸 뒤, 이곳에 남겨뒀던 갈아입을 옷을 옷장에서 꺼내 들고 방으로 가서 잠자리에 들었다.다음 날.강한결이 밤사이 집을 나갔다는 걸 알게 된 할머니는 크게 노했다.하여 안희서는 가까스로 달래드린 뒤에야 비엔으로 향했다.비엔의 전반적인 상황은 어느 정도 파악이 끝난 상태였고 필요한 자료들은 전부 훑어본 뒤, 앞으로의 방향까지 세부적으로 정리해 기술팀 핵심 직원인 진택원에게 전달했다.안희서가 불과 사흘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산처럼 쌓인 서류와 데이터를 모두 검토한 데다 기술적 완성도 높은 가이드 문서까지 정리해 건넨 걸 알게 된 순간, 진택원은 입을 다
강한결은 시선을 거둬들이고는 곧 젓가락을 내려두며 일어섰다.“처리할 일이 좀 있어서요. 먼저 식사하세요.”그는 안희서를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은 채 긴 다리를 내딛어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안희서는 조금 전 그가 보낸 애매한 시선이 마음에 남아 있었다.그 표정이 어떤 의미였는지 정확히 짚을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속이 타들어 갔다.‘도대체 언제쯤 할머니께 말할 셈이지?’강유라는 옆에서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오빠도 입맛 없는데 나도 안 먹을래요.”그러고는 게임하러 방으로 가버렸다.안희서는 조용히 밥을 계속 먹었다.타인의 시선은 어디까지나 타인의 것, 그걸로 스스로를 갉아먹을 필요는 없었다.식사가 끝나고 할머니가 안희서를 붙잡고 조용히 탄식했다.“우리 착한 희서, 한결이 성격이 원래 그렇다지만 너 많이 힘들었지? 할미가 다 안다. 걱정 마, 무슨 일이 있어도 할미는 네 편이야. 절대로 네가 헛되게 희생하게 두지 않을 거야.”안희서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할머니의 그 걱정 어린 눈빛이 괜히 마음을 찌릿하게 만들었다.할머니는 그동안 줄곧 안희서를 아껴줬고 둘 사이가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온갖 정성을 쏟아줬다.하지만 이제는 정말 더는 갈 수 없는 길이었다.강한결의 마음도, 몸도 이미 다른 여자의 것이었다.그리고 자신 역시 더는 이런 식의 관계를 이어갈 자신이 없었다.게다가 그녀의 병,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그것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할머니, 저 오늘 사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안희서는 숨을 깊이 들이쉰 후, 조용히 말했다.“한결 씨랑 같이 말씀드리려고요.”더 이상 할머니의 눈을 마주보기 어려웠는지라 그녀는 마치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갔다.그들의 방, 한때 안희서가 가장 많은 밤을 함께했던 곳, 그 앞에 서서 안희서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두 사람이 함께 할머니께 이혼 이야기를 해야 했고 이젠 피할 수 없었다.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넌 출신도 별로고 학벌도 평범하지. 나중에 한결이가 밖에 나가서 자기 아내는 전업주부라고 소개하게 하고 싶어?”유옥자는 말을 아끼지 않았고 목소리에는 은근한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며느리 안희서가 마음에 안 든 지 오래였다.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마음에 든 적이 없었다.하지만 당시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그냥 받아들였을 뿐이었다.그러나 요즘 강한결과 자주 연락하는 서지아는 적어도 사람들 앞에 내세울 만했다.물론 강씨 가문 기준에서 보면 출신이야 다소 아쉽지만 학벌은 우수했고 적어도 안희서보다는 훨씬 나았다.안희서는 유옥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담담하게 말했다.“그런 걱정 곧 안 하셔도 될 거예요.”그러자 유옥자는 찡그린 얼굴로 물었다.“그게 무슨 뜻이야?”안희서가 대답하기도 전에 현관 밖에서 자동차 경적 소리가 들렸다.곧 길고 곧은 실루엣이 현관문을 지나 거실에 들어섰다.강한결이었다.그의 차가운 눈동자가 거실 분위기를 가볍게 훑었다.지난 3년간, 어머니 유옥자가 안희서를 곤란하게 만든 장면을 그는 수없이 봐왔다.그럴 때마다 안희서는 감정 한 번 표출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그녀가 스스로도 억울하다고 느끼지 않는 듯했기에 강한결은 굳이 나서지 않았다.그럴 필요도 없다고 여겼다.“좀 일이 있어서 늦었습니다.”강한결은 안희서를 스치듯 바라보다 그녀 옆에 조용히 섰다.“할머니,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세요?”그가 옆에 섰을 때 안희서는 그의 몸에서 은은히 퍼지는 익숙한 향을 느꼈다.여성용 향수였다.그중에서도 백머스크의 잔향, 절대 무시할 수 없는 향이었다.바로 서지아가 자주 쓰는 향이었던 것이다.그가 이 향을 이 정도로 짙게 묻히고 있다는 건 둘이 오랜 시간 가까이 있었단 뜻이었다.아무리 부정해도 이건 우연일 수 없다.할머니는 강한결의 탄탄한 팔뚝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왜 이제야 오는 거야? 뭐 그렇게 급한 일이 있다고!”강한결은 의미 없는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차진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성해원의 말에 은근히 동의하는 기색이었다.성해원은 강한결을 바라보며 단언했다.“내가 보기에 희서 씨는 그냥 지아 씨랑 경쟁하고 싶은 거야. 지아 씨가 드론에 관심 있다니까 갑자기 흉내 내고 지아 씨가 하도현한테 관심 보이니까 비엔에 입사하고. 결국 핵심은 하나지. 너한테 관심 끌려고 그러는 거야.”여자들의 그런 심리는 성해원 입장에서 너무 익숙하고 뻔했다.사랑받지 못하는 여자들은 괜히 애써보고 괜히 시끄럽게 굴게 마련이다.강한결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는데 그때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전화는 할머니에게서 걸려온 것이었다.강한결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전화를 받으며 밖으로 나갔다.“많이 늦었는데 아직 안 주무셨어요?”할머니는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넌? 지금 희서랑 같이 안 있는 거야?”강한결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일이 많아서요.”“거짓말 마! 내가 들은 얘기가 한두 개가 아니야! 요즘 네가 누구랑 자주 붙어 다니는지 다 들리는데 그게 말이 돼?”할머니는 격분해 있었고 강한결은 시선을 들며 조용히 물었다.“누가 그랬는데요?”“진짜 그런 사람이 있어?!”할머니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연달아 ‘아이고 아이고’ 하더니 바로 고함쳤다.“강한결! 희서가 얼마나 괜찮은 앤데! 그런 애를 네가 저버리면 하늘이 너한테 벌 줄 알아!”하지만 강한결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그 정도까지는 아니잖아요.”그 대답에 할머니는 불같이 화를 냈다.“나 화나게 하기 싫으면 내일 희서 데리고 집에 와! 명령이야. 부탁이 아니라.”이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어버렸다.강한결은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한참 그대로 서 있다가 안희서와의 카톡 메시지 창을 열었다.그렇게 잠깐 들여다보다가 아무 말 없이 다시 나와 바로 전화를 걸었다.이미 밤 11시가 되는 시간이라 안희서는 막 잠들려던 참이었다.원래 수면 패턴이 규칙적인 편이라 늦게까지 깨어 있는 일이 거의 없었고 강한결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불구
안희서의 가슴이 순간 조여들었다.놀랍고 믿기지 않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겨우 입을 열었다.“그럼 언제쯤 저랑 같이 가서...”이혼서류.끝 네 글자는 결국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그때 강한결의 핸드폰이 울렸다.그는 안희서를 한 번 흘깃 보고는 몸을 돌려 전화를 받더니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한층 부드러워졌다.“응, 금방 갈게.”안희서가 아직 말을 채 다 하지도 않았는데 그는 전혀 미련 없이 등을 돌려 긴 다리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마치 예전처럼 익숙하게 그녀를 무시하며 그렇게 떠났다.안희서는 본래 그 틈을 타 할머니 병문안 얘기를 다시 꺼낼 생각이었다.언제 시간 낼 수 있느냐고, 이 일부터 확실히 정리하자고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강한결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서지아에게로 향하는 모습을 보고 안희서는 조용히 차에 올랐다.‘그만두자. 다음 기회에 하자.’몸도 마음도 지쳐 있는 상태에서 지금은 더 이상 그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병원에서 받은 약을 꺼내 포장을 뜯고 투명한 약병에 하나하나 옮겨 담았다.그리고 포장지는 버린 뒤 다시 비엔으로 돌아갔다.안희서가 진료를 받으러 갔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은 탓에 심예은은 그저 삼촌 안해진을 보러 간 줄 알고 안부를 물었다.그 말에 안희서는 병상에서 고통스러워하던 삼촌의 얼굴이 떠올라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그대로야.”심예은은 슬퍼 보이는 얼굴로 안희서를 꼭 안아줬다.안희서도 살짝 안아주며 말했다.“괜찮아.”퇴근 후, 안희서는 집에 돌아와 혼자 생각을 정리했다.드론은 미래 기술의 핵심 사업이고 비엔도 앞으로 정책과 긴밀히 협력하게 될 것이었다.그녀는 이미 전체적인 기획을 세워둔 상태였고 이제 하도현 팀과 회의하며 세부적인 논의를 할 필요가 있었다.어느새 밤 10시 가까이 되자 설정해둔 약 복용 알람이 울렸고 안희서는 메스꺼움을 참으며 약을 삼켰다.바로 그때, 하도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희서야, 네가 알아야 할 일이 있어.”“네?”